『네 처지도 딱하긴 하다.』

수양의 하소연과 부탁을 들은 양녕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백부님. 참 민망하고 딱하오이다.』

『짐작한다.』

『이 일을 어떻게 처단하오리까?』

『내니 도리가 있느냐?』

숙질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수양은 손톱으로 방바닥만 긁고 있었다. 생각하여 보아야 형왕의 성벽이 고쳐지기 전에는 사실 아무리 현인이라는 백부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듯하였다.

『백부님!』

『왜?』

『선대왕께서 승하하오시기 전에 제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무에라시더냐?』

『어려운 일, 감당키 힘든 일이 생기거든 백부님께 의논하라시구……』

수양은 머리를 푹 숙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양녕은 머리를 기울였다.

『선대왕은 고금에 다시 없으신 현인이시지만 그래도 역시 어버이로구나. 어버이는 자식이 한 자(一尺)만 하면 두 자만 한 것으로 보구 두 자만하면 석 자만한 것으로 보는 법이니라. 상감의 성벽이 그다지도 야릇하신 줄은 선대왕도 모르셨지. 네 말에 안들으셨으니 내 말이라구 들으실 듯싶으냐?』

수양은 머리를 숙였다. 형왕의 성벽이 하도 곧아서 백부의 권이라고 들을 듯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달려든 바이니, 되건 안 되건 한 번 백부를 움직여보게 되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그냥 백부께 떼를 쓰기로 하였다.

『백부님. 일의 성 불성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어니와, 되도록 힘을 써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되건 안 되건 간에 내 한 번 예궐해서 힘껏 권해 보리라. 너도 퍽 애를 쓰는구나. 그 정성을 왜 하늘이 몰라주시나.』

『백부님. 탄원이올시다. 꼭 애써 봐 주세요.』

『오오. 되는껏 힘은 써 보자.』

양녕은 사랑하는 조카 수양을 위하여, 대궐에 들어가 왕께 옥체 보중하기를 간하마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야. 내게 걱정이 하나 있구나.』

『무에오니까?』

『문신(文臣)들이 가만있을 듯싶지를 않구나. 무슨 말썽을 피우지.』

『왜요?』

『왜란? 네가 용상에 뛰쳐 올랐다지. 용상은 신자의 올라가지 못할 자린 줄 너도 알 배가 아니냐?』

『그래두 그런 위급한 경우……』

『위급하고 안 하고를 안다드냐. 문신이란 건, 주둥이만 깐 게 돼서, 사체의 여하를 막론하고 네가 용상에 올라간 것은 범상(犯上)의 죄로 의논하리라.』

듣고 보니 백부의 말이 당연하였다. 선대왕 시대며 또 그 전 태종 때에 문신들이 백부 양녕을 처벌하자고 청죄한 것도 무슨 백부에게 큰 죄가 있어서 그런 바가 아니었다. 단지 무엇이든 말썽을 부려서 왕의 주의를 끄는 것이 벼슬살이의 정도라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핑계든 생기기만 하면 욱적하는 것이 그들의 상례였다.

더구나 용상까지 뛰쳐 올라갔으니 가만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이튿날 헌부(憲府)에서 수양 청죄의 의논을 발하였다.

동시에 간원(諫院)도 들고 일어섰다. 그와 함께 옥당(玉堂)도 차자(箚子)하였다.

모두 한결같이, 수양대군이 용상까지 뛰쳐 올라가서 옥체를 어루만지고 붙안고 함은 범상의 죄니 중하게 벌하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양녕은 수양의 부탁으로 이튿날 왕께 알현하러 예궐하였다.

한헌의 문안을 드리면서 틈을 엿보아서 우러러보니 용안은 뵙기 참혹하였다. 그 사이 먼 발로 뵙기는 누차 하였지만, 가까이서 우러러 뵙기는 진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용염(龍髥)에 깊이 감추여 먼 발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가까이서 우러르니 광대뼈가 쑥 두드러지고 쑥 들어간 안정 안에서는 두 동자가 유난히도 광채 난다.

선비로 생장하여 평소에 앉아서 지냈고 눕기를 싫어하는 왕이었지만 하도 몸이 괴로워서 잠시를 가만히 앉아있지 못 한다. 자리를 이편으로 눕히고 저편으로 눕히고 몸을 앞뒤고 혹은 좌우로 저으며, 어떻게 하여서는 약간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수양에게 들었아온대, 전하 환후 심상치 못하오시다고?』

『그닥지 않습니다.』

『전하, 적당한 운동을 하오시고 원기조양에 주력하오서. 하루바삐 쾌차되오시기를 만민이 바라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양녕은 그윽이 용안을 우러렀다.

『전하, 성궁(聖躬)은 전하 혼자의 것이 아니옵니다. 만백성이 기다리고 우러르는 배옵니다. 지금 늙은 눈 분명치 못하오나, 심상치 못한 듯하오매 보증하소서. 시속 말에 고기 한 점이 귀신 천 머리를 쫓는 법이오라 전하 무엇보다도 식양(食養)에 용력하소서.』

왕은 피곤한 안정을 들어서 백부 양녕을 건너보았다. 백(伯)도 또한 수양의 한 말과 같은 말씀을 하시오 하는 눈치였다.

『백부님. 수양에게도 들었습니다. 지금 또 백께도 듣습니다. 그러나……』

희로애락이 무시로 발하는 왕은 지금 갑자기 슬픈 감정 때문에 말을 중도에 끊었다. 잠시를 진정하였다. 그러고야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힘이 하나도 없고 숨찬 음성이었다.

『선왕 승하하오신지 일년 겨우 남아, 지하에 계신 선왕을 생각해서라도 어찌 나 혼지 뜨뜻이 잠자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겠습니까? 차마 못하겠습니다. 백부님의 엄명일지라도……』

양녕은 더욱 머리를 숙였다.

『지당하신 하교옵니다. 그러나 전하 생각해 보십시오. 선대왕께서도 전하가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 성궁을 해치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혹은, 성궁이 건장하셔 선왕의 끼치신 유업을 잘 복돋우시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일(一)을 생각하시고 이(二)를 생각치 않으심이지, 선대왕의 영을 위로키 위해서 성궁을 더욱 보중하오셔야 되지 않을까, 신은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그래도 내 마음이 그렇지 못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백부님. 이 고충을 알아줍시오.』

탄원하듯이 하는 이 말에 양녕도 더 아뢸 말이 없었다.

그날도 삼사(三司)에서는 수양의 범상(犯上)의 죄를 벌하자고 차자(箚子)하고 논박하고 야단하였다.

그러나 왕은 여기만은 끝끝내 불윤(不允)의 두 자를 뻗치었다.

수양의 행위가 예절에 어그러지고 범상한 형적은 있지만, 임금을 생각하는 지성에서 나온 바니 물론(勿論)하라고 하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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