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18
18
편집왕의 용태는 갑자기 변화하는 일이 없었지만 나날이 조금씩 조금씩 더 중하여 갔다. 인제는 가벼운 물건조차 들 기운이 부족하여, 내관을 불러서 시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왕의 제사 절차며 예의에 관한 행사는, 어떤 일이 있든 몸소 행하였다.
대신들도 이 왕의 수(壽)가 얼마를 더 가지 못할 것을 번히 알았다.
국정의 밀린 것은 산적하였다. 선왕 환후 수년간, 국정을 돌보질 못하였고 그 뒤를 받은 지금 왕도, 오로지 예절 지키기에만 힘썼고 정사는 방임하였고, 대신 재상들도 국록이나 먹고 안양이나 하였지, 국정을 돌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국정을 돌보지 못할 등안은 대신들이 당연히 돌보고, 행할 일을 행하고 금할 일은 금할 것이로되, 이 대신들은 그럴 줄을 몰랐다. 고금 동서에 다시없는 현철한 선왕의 아래서 삼십 년을 지냈는지라, 국정이라 하는 것은 다만 임금이 시키는 대로 충실히 실행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지, 대신네 자기들이 무슨 좋은 꾀를 내어서 왕께 진언을 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였다.
그런지라 이런 대신들 위에는 현철한 국왕이 있어서 지휘하고 지도하고 명하여야 할 것인데, 왕은 그런 점을 생각도 않고 다만 예경(禮經)이나 읽고 다시 읽고, 고서(古書)나 외우며 시문(詩文)이나 희롱하는 것으로 일삼고, 그 밖의 군잡스러운 일은 모두 예절에 어그러지고, 고인이 행하지 않은 일이라 하여, 무시하여 버렸다.
선왕 삼십 년간에 창안하고 장려하고 북돋운 온갖 기예(사류들의 일컫는 바 잠기─雜技)는 돋던 싹이 쓰러지고 자라던 움이 꺾어지고 커가던 가지가 부러져서 다시는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유학(儒學)의 한 길만 소위 사도(斯道)라 하여 유일의 가치 있는 학문으로 국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여기만 힘쓰고 노력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단 한 사람, 이 사태를 근심한 사람은 수양대군이었다.
수양은 왕의 신임을 잃고 대신들의 꺼림을 받고 재상들의 배척을 받고 언관사신(言官嗣臣)들의 탄핵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대궐에 들어가서 형왕께 알현하고 배척도 기탄치 않고 주목도 탓하지 않고, 왕의 책망 회피도 모른 체하고 연하여 왕께 믿은 바대로 아뢰고 생각하는 바대로 조르고 하였다.
왕은 수양이 들어오는 것을 끔찍하게 알았다. 들어오면 들어올 적마다 조르고 떼쓰는 것이었다. 아무리 졸라도 형왕이 승낙하지 않을 줄을 알면서도 졸라서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정 졸리운 뒤에는 왕도 그 끈기에 못 이기어 백에 하나쯤 씩은 승낙하고 실행도 하는 것이었다. 수양은 이백에 하나 천에 하나쯤 그것이나마 불충분하게 실행되는 이 현상을 바라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수양의 박력(迫力)과 끈기에는 왕의 굳은 결심도 간혹 꺾이는 때가 있었다. 왕이 그렇게도 완강히 거절하던 육찬도 고기를 고기대로는 그냥 못 놓게 하였지만 육즙(肉汁) 쯤은 놓으라는 윤허가 내렸다. 방에 불 때기를 엄금하던 것도 조금 풀려서, 밤에만은 침전에 약간 불을 때도 무관하다는 윤허가 내렸다. 탕약도 조금씩 진어하였다.
그러나 이 맛 일로 왕의 건강이 회복되거나 증진되기에는 너무도 시기가 늦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한참씩 몸이 너무도 아파서 자릿속에서 준비를 하고야 일어났다. 한 번 몸을 움직이려면 마음으로 한참을 준비를 한 뒤에야 움직였다. 뼈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온몸이 아팠다. 눈을 한 번 감으면 다시 뜨기가 싫어서 한참씩 주저하였다.
다시 쾌차될 날이 이르지 못할 것은 당신이 가장 잘 알았다. 경연(經筵)에는 아침 한 번 밖에는 (그것이나마 간신히) 나아가지 않았다. 늘 어린 세자를 무릎 앞에 불러서 교훈을 게으르지 않았다.
왕의 남자 동기가 적출(嫡出)로 왕까지 여덟 분, 서출로 열 분, 합계 열 여덟 분이었다. 그 가운데서 왕 혼자가, 마음으로든 육체로든 매우 약하였지, 그밖엣분은 모두 억세고 건강하였다. 중조부 태조의 혈통, 할아버님 태종의 혈통, 외가(外家)의 혈통 등을 물려받아 억센 위에, 아버님 세종의 지혜까지 아울러 물려받았는지라, 그 적서 열 여덟 분의 힘을 아우르면 이 세상을 무서울 자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동생 수양은, 할아버님의 욕략과 아버님의 지혜를 한 몸에 물려받았는지라, 가장 걸출이었다.
이 아우님을 잘 손아귀에 넣어서 수족과 같이 써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당신의 옥체가 하도 약하고 보잘 데 없으니까, 아우님을 투기하기 시작하고, 투기는 차차 변하여 의심으로까지 되었다.
아우님을 의심하고 보니 매사가 모두 의심되었다.
왕을 돕고자 좋은 진언을 하면 그 원인을 캐어 의심하고 싶었다. 왕의 건강을 위하여 진언하면, 나를 만고의 죄인을 만들려는 복선이거니 의심 갔다. 편안히 쉬기를 청하면 나 쉬는 동안 무슨 짓을 하려나 의심 갔다.
이러기 때문에 의심은 더욱 의심을 낳고, 그 의심은 나날이 증가되는 뿐이었다. 그러고 이 호랑이 같은 숙(叔)들의 앞에 아직 어린 세자를 남겨 두고 가기가 겁이 나고 무서웠다.
틈 있을 때마다 어린 세자를 무릎 앞에 불러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숨 지고 하였다.
『동궁!』
『네?』
아직 어린애나마 그 눈찌는 너무도 노숙하였다.
『내가 만약 천추하면 동궁은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할꼬?』
『양녕 증조부.』
『또?』
『수양숙, 안평숙.』
꼽아 내리려는 것을 왕은 막았다.
『안 된다. 왜 차심치를 않느냐. 안평숙은, 괜찮지만 수양숙은……』
걱정이었다. 왕은 탄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