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경문왕 말년.

곳은 상주 가은현(尙州 加恩縣)의 어느 한적한 촌락이다.

그 촌락을 뒤로 장식하고 있는 작다란 언덕에 드문 드문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 틈틈이로는 이끼 낀 바위가 비죽이 보이고 있다.

그 어떤 바위에 한 농군(農軍)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농군의 곁에는 그의 아들인 듯한 열아믄살쯤 난 소년이 앉아 있다.

『그래서요.』

지금껏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중도에 끊었던지 소년은 자기의 아버지를 향하여 이야기의 뒤를 채근한다. 이 채근을 받은 아버지는 잠시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다시 말을 꺼내인다.

『그래서 말이로다.』


그래서 신라는 우리 백제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구나. 너무도 백제가 강하고 그 위에 연방 신라 각 고을이며 성을 빼앗으니까 잔뜩 백제에게 원한을 품었구나.

그렇지만 신라는 우리 백제보다 힘이 약하니까 아무리 원한을 품었지만 할 수 없지 않겠느냐. 원수를 갚자니 원수를 갚을 만한 힘이 있어야지. 그래서 속이 끓는 것을 그냥 참았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우리나라 임금이 되시는 의자왕(義慈王)께서는 ─.

이러한 실머리로써 그 농군이 자기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백제 망국의 이야기였다.

백제의 최후의 임금인 의자왕이 차차 나라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만 잠기기 때문에 한때 강성하였던 백제가 차차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신라에서는 백제에 대한 옛날 원한을 풀기 위하여 극력으로 양병을 하고 또한 당나라에 빌붙기까지 하여 당나라의 세력까지 매수하였다.

이리하여 의자왕의 난정 때문에 백제는 나날이 약하여 지고 신라는 그 반대로 차차 강하게 되어 나당(羅唐) 연합군의 백제 정벌이 벌어지게 되고 백제라는 七[칠]백년 사직은 나당 연합군에 깨어져 나가고, 백제의 수천 궁녀는 낙화암에서 강으로 떨어져 죽고 의지왕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잡혀서 당나라 서울로 가서 거기서 외로운 최후를 보았다는 백제 망국의 사연을 들려 주고 있는 것이다.

『이봐라. 우리가 지금 아무리 일개 이름 없는 농군의 집안이라고 하나, 우리 조상은 대대로 백제의 녹을 먹은 백제 명족의 줄기로다. 백제 망한지 이백 년, 말하자면 우리가 신라 백성 노릇을 한지도 오륙대가 넘고 백제 왕국의 자취는 지금 찾아 볼래야 볼 수도 없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백제의 후손이고 백제의 피를 받은 사람이로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앉았던 소년은 그의 커다란 눈을 올려 떴다.

『아버지 그러면 신라는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서 당나라 군사와 결의를 했읍니다그려』

『그렇지.』

소년은 또 잠잠하여 버렸다.

한참 뒤에 소년이 또 물었다.

『당나라 군사까지 함께 오지 않았다면 그래도 백제가 망했으리까?』

『글쎄 그건 지금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신라 하나만 넉넉히 당했으리라.

그래도 계백장군(堦伯) 휘하의 작은 군사를 가지고 나당 연합군을 황산평원에서 네 번을 간담을 서늘케 하였구나. 신라 단독으로는 그래도 우리나라를 당하지 못했으리라.』

소년은 도로 내려 떴던 눈을 다시 굴려서 서쪽 벌을 바라보았다. 벌 뒤로 바야흐로 넘어가려는 햇볕에 소년의 눈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반짝였다.

─ 이 농군은 백제 유민(百濟遺民) 아자개(阿慈介)요 소년은 그의 아들 견훤(甄萱)이었다.


이 소년은 어린 시절에 기괴한 놀라운 일이 있었다.

이 소년의 아버지가 밭에서 농사를 짖고 있고 어머니가 젖먹이인 견훤을 붙안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어머니는 어린애를 수풀에 내려놓고 일을 보려 갔다.

일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놀라운 일을 보고 이 사연을 제 지아비에게 말하매 지아비는 다 들은 뒤에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누설하지 마오.』

하는 뿐이었다.

이 아자개의 집안의 근본에 대해서는 같은 동리의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대로 二[이], 三[삼]대를 그 동네에서 살았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과는 교제를 안 했다. 몇 대를 이 동네서 살기는 살았지만 ─ 그리고 이 동네가 모두 농사로 사는 사람 뿐이라 그 집안도 농사로 호구를 하는 모양이었지만 농군답지 않게 자식에게는 반드시 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런 농촌에서 이웃에 교제도 않고 지내면 자연히 동네에서 돌려놔서 미움을 사는 법이언마는 동네 사람들은 무슨 까닭인지 이 집안을 존경하였다. 근본도 모르고 교제도 안하는 집안이나 존경할 필요도 연유도 없지만 인격 상으로 저절로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남에게 경어를 쓸 줄 모르는 농군들이언만 아자개의 집안을 얘기할 때 뿐은 반드시 「그 집」이라지 않고 「그 댁」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집 소년은 도련님이라는 농촌에 다시 없는 명칭으로 불렀다.

단 한 가지 조금 그 내력을 엿볼 수 있는 일이 생긴 적이 있었다.

당주 아자개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그 형도 아직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그 형 되는 사람은 좀 성미가 괄괄한 위에 입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 소년이 어떤 때 동네 아이들과 싸움을 하였다. 싸움을 하며 서로 곱지 않은 말이 오고 갈 때에 그 소년은

『우리는 너의 한향 천인들과는 근본이 다르다 우리는 금지옥엽이야.』

하고 호령한 일이 있었다.

집에서는 낮잠을 자고 있던 소년의 아버지가 이 소리에 뛰쳐 나왔다. 그리고 두말 없이 제 아들을 끌고 들어갔다. 끌리워 들어 갈 때에 소년의 얼굴은 공포 때문에 창백하게 되었다.

이 변변치 않은 사건이 있은 뒤 소년(아자개의 형)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새었는지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년의 동생되는 아자개를 후사로 정하여 버렸다.

동네의 참견 좋아하는 늙은이들이 어떻게 아자개의 아버지를 행길에서라도 만나서

『맏 도련님은 이즈음 안 뵈입니다그려 누워 앓읍니까.』

하고 물으면 아버지는

『장사차로 멀리 떠나 보냈읍니다.』

하고 상세한 대답은 피하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대(先代)가 작고한 뒤에 아자개가 당주가 된 것이다.

아자개는 제 아들 견훤을 가꾸는데 무척 애를 썼다.

이 집안이 대대로 그렇게 한 바와 마찬가지로 아자개로 견훤을 소년 적에는 결코 농사에 내세우지 않았다. 집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벌에 내보내서 무술을 연습케 하고 ─ 이렇듯 농군에게는 적당치 않은 학문만 가르쳤다.

더욱이 어렸을 때에 호랑이가 젖 먹이는 것을 본 뒤로부터는 이 아들을 더욱 힘써 가꾸었다.

그리고 틈 나는 대로 늘 제 아들에게 二(이)백 년 전의 백제 망국의 곡절을 들려주곤 하였다.


백제 망한지 二[이]백년 ─ 다시 말하자면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가지고 백제를 집어 삼키고 고구려까지를 없이 해 버린지 二[이]백년 ─ 이리하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도 임군이 스무 번 가까이 갈린 경문왕(景文王) 말년.

본시 이 경문왕(景文王)은 희강왕(僖康王)의 증손자로서 화랑(花郞)으로 있었으며 그때의 응겸(應兼 ─ 或曰[혹왈] 應少[웅소])이라 하였다.

선왕 현안왕 때에 응겸이 임해전에서 왕께 뵈올 때 그때 왕과 문답을 하는 중에 그 대답이 너무도 용하므로 왕의 사랑을 사고

『짐에게 두 공주가 있는데 하나를 네게 줄 테니 마음대로 택하라.』

는 고마운 말씀까지 들었다.

그때에 응겸은 작은 공주를 취하기로 내정하였다. 큰 공주보다 작은 공주가 자색으로 훨씬 앞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취하는 이상에는 자색이 앞선 공주를 취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응겸의 낭도(郎徒)로 있던 범교사(範敎師)가 응겸의 이 의견에 단연 반대하였다.

『그것은 안 됩니다. 맞 공주를 취하십쇼. 지금 여기서 밝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맞 공주를 택하시면 세 가지의 좋은 길이 있읍니다.』

그리고 이 범교사는 응겸의 수 많은 낭도 중에서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응겸은 맏 공주가 그다지 달갑지가 않았다. 그러나 지혜 많은 범교사가 이렇듯 한사히 말하는 것을 보면 거기는 무슨 곡절이 있을 듯하였다. 그래서 왕께 맏 공주를 줍시라고 하였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현안왕은 이 새 사위를 맞은지 석달 뒤에 승하하셨다.

현안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 왕위는 맏 사위되는 응겸에게로 구울러 들어오게 되었다.

의외에도 신라 왕위를 얻은 응겸 ─ 변하여 신왕께 범교사는 곧 달려와서 하례를 드렸다.

『이전 폐하 잡룡 시대에 소신이 일찌기 세 가지의 좋은 일이 계시겠다고 아뢴 것이 있읍니다. 지금 그 세 가지가 다 이루어졌으니 첫째로 상 공주를 맞이하셨기 때문에 대해왕께서 폐하를 더욱 귀히 보시었고 둘째로 상 공주를 맞이셨기에 천승의 위에 오르셨으며 세째로 흠모하시던 버금 공주는 지금 폐하의 어의 하나에 달리셨으니 이 세 가지 좋은 일이 아니오니까.』

이리하여 범교사의 지혜의 덕으로 응겸 화랑은 신라왕이 되고 선왕의 상을 치른 뒤에는 버금 공주를 제 二[이]의 왕후로 책립을 하였다.

상 공주를 택한 덕에 지금 저절로 버금 공주까지도 뜻대로 되었다. 그러나 왕에게는 아직도 사랑의 불만이 있었다.

즉 이전 한낱 화랑시대에 사랑을 주고 받던 설씨가 지금도 그냥 처녀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왕도 설씨와의 사랑이 그의 첫사랑이니 만치 아직도 설씨가 가장 왕의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버금 공주를 맞은 이듬해에 설씨마저 후궁으로 대궐로 들이었다.

왕의 마음은 인젠 만족하였다. 오래 벼르던 사랑이니 만치 왕은 제一[일]왕후 제二[이]왕후를 모두 버리고 설씨만을 돌보았다.

일이 이렇듯 되매 제一[일]왕후 제二[이]의 두 왕후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자기네는 지금 왕후라 하나 선왕의 직계요, 지금의 왕은 비록 왕이라 하나 자기네를 아내로 삼은 덕에 왕이 된 것이니까, 말하자면 데릴사위 격이었다. 이러한 견해까지 붙고 보니 왕과 설씨가 좋게 지내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설씨의 몸에서 왕자까지 탄생되었다. 그리고 왕은 설씨를 사랑하느니 만치 왕의 사랑은 설씨 몸에서 난 왕자 뿐을 사랑하고 자칫하다가는 그 왕자가 세자로 책봉이 될 형편이었다.

여기서 제 一[일] 제 二[이]의 두 왕후의 책동이 맹렬하게 되어 일관(日官)을 매수하여 일관으로 하여 금 왕께 설씨 탄생의 왕자를 모함하였다.

처음에는 좀체 왕은 일관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는 격으로 드디어 일관의 참소에 속아서 이 설씨와 및 그 탄생의 왕자를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설씨는 왕사에게 죽은 바 되었으나 왕자만은 유모가 미리 빼어낸 덕에 죽음은 면하였다. 그대신 창황 중에 너무 덤비기 때문에 유모가 그릇하여 그의 오른편 눈을 찔러서 애꾸눈이가 되었다.

이렇게 애꾸눈이는 되었지만 그래도 목숨은 분명히 부지되었으니까, 아마 지금까지도 어디 그냥 생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모에게 붇안겨 몰래 도망한 이래 十[십]수년 간을 세상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왕은 이 왕자에게는 육신의 아버님이건만 또 한편 어머님을 죽인 원수이다.

지금 제一[일] 제二[이]의 왕후는 단지 어머님의 원수일 따름이요 다른 은원은 없다.

왕실에 대하여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한 소년이 지금 이마 어느 곳에서 고이 고이 생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느니 만치 대궐은 늘 불안 중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또한 가정적으로 이만한 어지러운 사건을 가지고 있느니 만치 신라의 정국은 매우 어지러웠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통일한지 벌써 이 백년 남아 ─ 처음 병합을 한 뒤에는 신부의 백성을 회유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좋은 정치도 베풀고 힘도 많이 썼다.

그러나 신라의 정치가 차차 어지러워감을 따라서 그런 원방까지를 돌볼 여유가 없게 되었다. 옛날 고구려의 강역은 지금 명색은 신라에 편입되었다 하나 사실로는 이 하늘 아래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거기는 백성은 있지만 관리가 없고 사람은 있지만 통솔자는 없었다.

옛날 백제의 강역은 신라 본토에서 비교적 거리가 가까우니 만치 지방관도 보내고 경질을 하고 하지만 이것도 역시 표면 뿐이지 내용으로는 역시 주인 없는 땅이었다.

신라왕의 세력은 신라 본토에 미치지 못하는 데가 많으니 어찌 신부의 영토까지를 살필 수가 있을가. 소의 왕화(王化)라 하는 것은 얻어 볼수도 없고 어지러운 정태 아래서 이 五[오]천리의 강역은 어디로 쓸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국이 이렇게 어지럽다는 소문은 흐르고 흘러서 상주 가은현의 초라한 농촌에서도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서로 수군거리었다.

이리하여 신라의 온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 아래서 서로들 수군거리는 경문왕 말년의 어떤 날이었다.

아자개의 아들 견훤은 뒷 벌 건너 어떤 못가에 가서 하루 종일을 혼자서 머리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날 뿐 아니라 이전에도 벌써 엿새를 연해서 여기 와서 생각한 것이었다.

찰싹!

물결이 뛰논다. 보니, 붕어 새끼 한 마리가 수면에까지 후더덕 올라 뛰어다가 도로 물로 떨어졌다.

소년은 생각에 잠겼던 얼굴을 조금 들고 못물을 내려다 보았다.

못물 위에 비친 소년, 자기의 그림자, 그것은 소년이라기에는 너무도 숙성되고 침울하고도 패기에 넘치는 얼굴이었다.

『으 ─ ㅁ』

때는 지금이로다. 우리 조상의 원수 ─ 칠백 년 백제의 원수, 얼마나 오래 누릴 줄 알았더냐. 겨우 이백년이로구나. 제 힘만으로도 부족하여 비열하게도 당나라의 힘까지 빌어 백제를 망케하고 또 다시 고구려를 집어 삼키기에 몇 만년 잘 누릴가 했더니 겨우 이백 년이냐.

도리켜 보건대 지금으로부터 이백년 전 나당 연합군의 모진 발에 밟히어 의자왕은 천승의 몸으로 멀리 당나라까지 포로가 되고 왕족 이하 귀현 궁인들이 모두 사자수(泗泚水)의 원귀로 화한 뒤 천도가 있으면 어찌 이 원을 못 알아보랴.

무엇보다도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 백제를 망케 하였다 하는 점이 이 소년에게는 억울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를 없이 함에 있어서 그 나라의 왕과 및 왕족들을 좋은 벼슬로 대접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륙을 했다 하는 일은 옛날의 예에도 있으되 당당한 천승지주를 만리타국으로 보내서 객귀가 되게 하였다는데 더욱 분하였다.

이 소년 견훤의 집 대대로 아비가 자식에게로 자식은 손주에게만 비밀히 전하여 내려 오는 말로 듣자면 자기네 집안은 이백년 전에는 당당한 백제의 왕족이었었다 한다. 그러면 지금 자기가 신라에게 대하여 품은 원한은 한 개 백제 사람으로서의 망국한 이외에 또한 백제 왕족으로서의 망가한까지의 아울른 셈이다.

지금 신라 사직이 어지러운 때를 타서 한번 일어서서 사내의 기개를 뽑아 볼 수 없을가. 넓게는 칠백년 백제의 원한을 풀고 좁게는 자기 집안의 원수를 갚아서 이백 년간 소멸되었던 백제왕을 재건해 볼 수 없을가?

─ 소년답지 않은 이런 엉뚱한 공상을 하노라고 견훤은 매일 이 조용한 못가에 와서 날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홀로이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반삭간이나 한 뒤에 어떤 날 밤 견훤은 집안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 제 아버지 아자개를 가만 가만히 흔들었다.

『응? 누구냐?』

한참 잠이 들었다가 깜짝 놀라 깨는 아버지에게 견훤은 귀에 입을 갔다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 저는 오늘 밤, 어디로 좀 먼길을 떠나겠읍니다.』

아버지는 두 말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다 그리고 아들의 손목을 잡고 덜레 덜레 끌고 밖으로 나왔다.

부자는 후원으로 돌아 갔다. 후원 조용한 곳까지 이르러서 아버지는 비로소 물었다 ─

『어디로 떠나느냐.』

견휜은 대답을 못하였다. 정처 ─ 목적한 곳이 없는 것이었다.

『응?』

『낙화암이나 잠깐 가보고 ─ 그 뒤는 정처가 없읍니다.』

『무얼하러?』

『백제 왕국을 재건하겠읍니다.』

예기하였던 대답인 모양이었다. 아비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네 힘이 넉넉할 듯하냐?』

『모르겠읍니다. 이제부터 힘을 기르겠읍니다. 十[십]년 ─ 十[십]년이 부족하면 二十[이십]년 三十[삼십]년, 사십[四十]년 ─ 한을 품고 넘어지든가 백제국을 재건하든가 둘 중에 한 가지의 끝장을 보겠읍니다.』

이말을 듣고 아버지는 한참을 감개무량한 듯이 잠자코 듣고 있다가야 입을 열었다.

『때는 가장 좋다. 하지만 아직 네 힘이 부족할듯하구나. 좌우간 떠나는 너를 말리지 않으마. 성공해라. 부모가 집에 있는 것을 잊어 버려라. 이 세상에는 너보다 윗사람이 없다는 신념을 굳게 가져라. 만약 이후 언제든 후백제국이 건설되었다는 소문만 들리면 이 늙은이가, 그때까지 요행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그때 너의 발 아래 가서 꿇어 엎드려 절하마. 군신이 되기 전에는 다시 안 보겠다.』

넘어가는 초생달 아래서 이 부자는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이튿날부터 견훤의 모양은 상주 가은현에서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이 이상히 여겨서 물으면 멀리 장사로 떠났다 하는 뿐이었다.

이리하여 자기의 고향에서 사라진 견훤의 모양은 그로부터 수일 후 부여 낙화암 근처에 나타났다.

하루 종일을 견훤은 낙화암 낭떠러지에 앉아서 울어 보냈다. 그리고 날이 기울어서야 거기서 발을 떼어 보냈다.

이렇듯 고향을 떠난 뒤 잠깐 부여에서 모양을 나타냈던 견훤은 그 이튿날부터는 완전히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가은현의 한 이름도 없는 소년이 엉뚱한 야심을 품고 제 아비에게 하직을 고하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서 다시 소식이 없이 된 지도 벌써 수년 간. 신라의 왕실은 더욱 어지러워 갔다.

그때의 왕이던 경문왕이 승하하고 경문왕의 제 一[일]왕후의 소생인 태자가 신왕으로 들어 앉았다.

신왕이 등극하였을 때에 신라 왕실에는 태후가 두 분이 있었다. 즉 경문왕의 제 一[일]왕후 제 二[이]왕후다. 이 고귀한 두 과부를 에워싸고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일이 생겨났다. 신왕은 몹시 심약한 분이라 재위 十一[십일]년간을 두 분 태후의 추잡한 행사에 마음을 쓰느라고 국정은 조금도 여가가 없이 지내다가 여기에 대한 심화 때문에 아직 청춘의 몸으로 승하한 것이었다.

이 왕이 승하하자 이 왕대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왕의 근친 중에서 신왕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여기서 두분 태후의 경쟁은 백열화 하였다. 제 一[일]태후에게는 대행왕밖에 공주가 또 한 분 있었다. 제 二[이]태후에게는 아드님이 있었다.

제一[일]태후는 당신 소생(대행왕의 동복 여동기)을 세우려 하였다.

제二[이]태후는 당신의 소생 왕자(대행왕의 이복 남동생)를 세우려 하셨다.

이리하여 왕위를 두고 두 분의 경쟁이 백열화 하게 되었을 때에 재상 위홍(魏弘)이 가운데 나서서 제二[이]태후 소생의 왕자를 세우기로 하였다.

위홍이 이렇게 결정하기까지는 별별 내막이 다 있었으니 즉 제二[이]태후는 당신 소생의 왕자를 세우기 위하여 아직도 자색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 당신의 몸을 아낌없이 위홍에게 내어 맡긴 것이다. 만약 정통(正統)으로 내려 가자면 대행왕께는 서자(庶子)나마 요(䁘)라 하는 아드님이 있었다. 그리고 왕위 승통에 있어서는 적서를 그다지 따지지 않는 게 선례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 태후는 직접 자기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고자 이렇듯 추잡한 경쟁을 한 것이다.

이 경쟁의 승리자로서 왕위에 오른 정강왕(定康王)은 불행히 병약한 위에다가 환경이 너무도 순조롭지 못하여 재위 一[일] 뒤에 승하하였다.

이 왕마저 승하하면 이번에는 왕위가 어디로 굴러 가려나.

당시 신라의 정국을 한 손으로 쥐었다 폈다 하는 사람은 재상 위홍이었다.

국왕일지라도 위홍의 세력을 대하지를 못하였다. 더욱이 위홍은 이번의 국왕을 왕위에 올려 놓은 사람이며 신왕의 모후되는 정부되는 사람이매 이 위홍의 세력이야말로 당당하였다. 정강왕이 승하하매 그 뒤에 왕을 세울 권한은 오로지 위홍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때에 대행왕의 이복 여동생이요 먼젔번 왕위 쟁탈전에서의 실패자인 공주(제一[일]태후소생)가 스스로 자기의 몸을 위홍에게 내어 던졌다. 일찌기는 자기의 어머님인 제一[일]태후의 정부요 그 뒤에는 자기의 이모인 제二[이]태후의 정부이던 위홍에게 공주는 스스로 자기의 몸을 내어 던진 것이다.

이리하여 공주가 신왕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신왕인 진성여왕은 성질이 음탕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녀로서 몸을 위홍에게 내어 맡겼을 뿐아니라 위홍이 죽으매 미소년들을 연하여 내전으로 불러 들여서 온갖 난잡스러운 일을 다 하였다.


왕실이 이만치 어지러워졌으니 정치가 온전할 수가 없었다.

각처에 도적이 일어났다. 도적은 무리를 모아서 변경을 침략할 뿐만 아니라 성을 치고 도시를 빼앗아서 그 성의 수령들을 쫓아 보내고 스스로 도독(都督)이라, 혹은 장군이라 일컫고 백성을 호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무리 중에 가장 세력이 강성한 자가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 궁예였다.

이전, 경문왕의 총희 설씨의 몸에서 난 왕자로서 그새 수십년 간을 숨어있다가 세상이 어지러운 이 기회를 타서 망모의 설음을 갚으려고 맹연히 일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 정부에서는 이 궁예의 작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궁실이 어지럽고 나라가 피패한 신라로서는 궁예의 하는 대로 방임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일변으로는 그래도 어떻게 좀 당해보려고 늦어나마 군훈 병련을 시작하였다.

늦게나마 시작한 국방군의 훈련이 국내 여기저기 있었다.


진성여왕 오년. 명주에는 궁예가 웅거해서 그 근처 십여군을 호령하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기 때문에 신라 서울의 민심은 자못 흉흉하였다.

궁예가 이제 몇 번만 더 움직이면 이 서울까지도 그의 발에 밟힐 것은 명확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서울의 민심은 여간 흉흉하지 않았다.

그 어떤 날 낮이었다.

민심은 흉흉하지만 민심 따위는 모르노라는 듯이 온화한 가을해가 서쪽으로 넘어 갈 때였다.

이 서울 뉘집에서 시작된 말인지

『견훤이 오늘 입성한단다.』

하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소문은 삽시간에 서울 장안에 쭉 퍼졌다. 그리고 이 소문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암담한 그림자는 약간 씻기운 듯 하였다.

지금부터 十[십]수년전 경문왕 말년에 백제 부여에 몸을 나타내었다가 사라져 버린 견훤도 그 뒤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이리하여 十[십]수년 후, 한창 북원 도독 양길이 성하고 그의 부하 궁예의 작패가 나날이 심하여 갈 때 갑자기 서울에 나타난 견훤은 군사되기를 지원하였다.

한창 신라에게서는 군사를 모집하던 중이라 곧 군사에 뽑혔다.

군사에 뽑히매 그의 용기와 담력과 지모는 차차 상관에게 알린 바 되어 짧은 기간 동안에 상당한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러다가 발탁되어 어느 서남쪽 해안에 수자리 살러까지 가게 되었다.

그의 담력과 지모는 거기서 더욱 나타났다. 서남쪽 해안은 옛날 백제 강역으로서 신라 서울에서는 상당히 먼 곳이므로 왕하도 잘 미치지 못할 뿐더러 이즈음 뒤숭숭한 세태에 들떠서 도적도 꽤 성한 곳이었다. 그러한 곳에 가게 된 견훤은 수 적은 군사로써 늘 적을 물리치고 깨뜨려서 그 용맹과 지모에 관해서는 조정에서도 익히 아는 바가 되었다.

궁예의 세력이 더욱 왕성해지매 조정에서는 궁예 방비책을 강구하던 나머지 견훤을 불러서 이를 막으려고 진성여왕이 친히 견훤을 부른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명에 의지하여 견훤은 왕께 뵙고자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이 갑자기 이름이 나기 시작한 무장을 보고자 길 모퉁이마다 꾸역 꾸역 모여 섰다. 지금 꺼져 버릴 듯한 신라의 사직을 의탁코자 왕명으로 부르는 무장이니만치 어딘가 좀 다르게 생긴 데가 있으리라고 희망과 호기심을 반씩 가진 마음으로서 견훤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하 이삼인을 데리고 견훤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황혼이 가까워서였다.

멧더미와 같은 커다란 몸집의 소유자였다. 그의 몸집이 그렇듯 크니만치 얼굴이며 그 얼굴에 있는 이목구비가 모두 놀랍도록 크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다지 작지 않은 말께 올라 앉았는데도 마치 얼른 보기에는 보통 사람이 강아지를 탄 듯하였다.

그 커다란 선이 굵은 얼굴에는 담력이 어디 있는지 지모가 어디 있는지 단지 음칠할 뿐이었다.

견훤은 성하에게까지 이르렀다. 이르러서 약간 머리를 들고 한번 사면을 살피었다. 왕명으로 부른 이상은 왕사가 성문까지 와서 맞을 줄 믿은 것이었다.

한번 둘러 본 뒤에 그는 눈섭을 푸들 푸들 떨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말없이 천천히 말을 문 안으로 들여 몰았다.

문안에도 왕사가 없었다. 여기서 견훤의 눈섭은 다시 한번 떨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살펴보지도 않고 말을 천천히 몰아서 대궐을 향하였다. 길 연변에 꾸역 꾸역 둘러서서 자기를 보며 무슨 공론들을 하는 백성들은 안중에 두지 않고.

이리하여 대궐에까지 이른 견훤은 대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승마한 채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것을 보고 수문장이 달려 나왔다. 나와서 창으로서 그의 길을 가로 막았다.

견훤은 두말이 없었다. 말 머리를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길로 말을 천천히 몰았다.


견훤이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것을 대궐에서 안 것은 그 이튿날 오정이 거의 되어서였다.

대궐에서는 견훤이 왜 돌아갔는지 그 심사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즉시로 사람을 달려서 견훤을 따라가서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거기 대해서 견훤은

『대궐에서 받지 않으니 할 수 없읍니다.』

하고 그냥 자기의 수자리로 향하여 길을 계속하였다.

왕이 대신들을 불러서 다시 회의를 한 결과 견훤에게 비장(裨將)이라는 무직을 주어서 그의 마음을 회유하고 다시 부르기로 작정한 것은 그로부터 이삼일 뒤였다.


견훤은 다시 어전에 불리웠다.

그의 거대한 몸집은 여왕의 앞에 꿇어 앉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선굵은 얼굴을 푹 숙으리고 여왕의 하문에 뚜억 뚜억 대답하는 양은 오히려 가관이었다.

여왕은 견훤에게 일천의 군사를 맡겨서 궁예 토벌의 길을 떠나기를 명하였다.

여러 남성(男性)을 이미 맛본 이 여왕이 과거의 경험에 의지하여 애교와 미소로써 견훤에게 국사를 부탁할 때에 견훤은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간간 머리를 더 숙으릴 뿐 대답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날 밤, 왕이 지정해준 객사로 물러나온 견훤은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었다.

뜰에 교자를 갖다 놓고 밤이 새도록 거기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역시 침울한 얼굴이었다. 침울한 기침 소리가 간간 울렸다.

밤중에 그의 막하 한 사람이 상관을 근심하여 가까이 가 본 일이 있었다.

견훤은 누구가 가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물러가 자거라.』

마치 맹호의 부르짖음과 같은 호령이 내리므로 막하는 몸서리 치고 처소로 물러갔다.


이튿날 왕이 준 일천 정예를 인솔하고 토벌의 길을 떠났다.

삼 사일 간은 무사히 갔다. 연변의 남녀노소들은 궁예토벌군이라고 환대가 여간하지 않았으며 성에 들면 성주 이하의 대접도 각별하였다.

이러한 삼 사일이 지나서 서울서 거리가 좀 멀어진 때쯤 하여서 저녁 때 어떤 성에 들어갔던 이 궁예 토벌군은 갑자기 창끝을 들어서 그 성을 빼앗았다.

성은 마음 놓고 있던 때이며 더구나 도독 이하가 모두 견훤 영접에 눈코 뜰 새가 없던 때라 견훤은 한 군사도 꺾이지 않고 그 성을 빼앗았다. 그 성에 있던 군사 오백 명도 견훤의 막하에 편입되었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견훤의 태도는 선명하게 되었다.

그 이튿날부터는 견훤은 마치 창 맞은 맹호였다. 동으로 치고 서으로 치고.

그의 손 안에는 일천 오백명의 군사가 있었다. 견훤이 치면 반드시 함락이 되고 함락이 되면 반드시 몇 백명의 군사를 얻게 되고 ─ 이리하여 십여일간을 좌충우돌한 뒤에는 그의 막하에는 오천명이라는 적지 않은 군사가 달리게 되었다. 이 오천이라는 대군으로서 그가 드리친 것은 신라의 웅성(雄性) 무진주(武珍州)였다. 무진주도 삽시간에 함락이 되었다. 이 무진주까지 함락이 된 뒤에는 견훤은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견훤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호(國號)도 세우지 않고 벼슬도 베풀지 않고 자기 혼자만 스스로 왕이라 일컬을 뿐이었다.

그가 지금 웅거한 곳은 그냥 신라의 영토였다. 그가 거느린 군사는 신라 본종이었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백제를 회복한다고 그의 본의를 피력하였다가는 도리어 민심을 잃을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왕이 되었지마는 국호도 세우지 않고 벼슬도 베풀지 않았고 더욱 힘 기르기에 주력을 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 힘을 더 길러 가지고 서쪽으로 뻗어 나가서 옛날 백제의 고토를 회복하고 그 곳에 자리를 잡을 때에 비로소 국호를 새우고 벼슬을 베풀 심산이었다.

그의 막하 장졸들은 자기네 왕, 견훤에게 이런 엉뚱한 생각이 있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자기네 상관이 인젠 왕이 된 것을 기뻐하고 상관이 왕이 된 이상에는 자기네들에게도 상당한 벼슬이 내리려니 하고 적지 않은 기대로소 기다렸다.


신라는 이때에 있어서 사실 사분 파열의 형태였다.

견훤이 서남쪽으로 차차 세력을 펴나가는 반면으로 경문왕의 세자 궁예는 또한 북쪽에서 그의 지반을 차차 넓히었다. 궁예는 칭왕(稱王)은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장군이라 일컫고 명주에 자리를 잡고 승령(僧領 ─ 朔寧[삭영]) 임강(臨江 ─ 長湍[장단]) 등까지도 점령하고 개성까지도 그의 손아래 들어갔다.

이 땅은 모두 옛날 고구려의 강역으로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을 하여 고구려를 망케 한 뒤에 한때는 신라영토에 편입되어 신라정부의 통치하에 있었으나 날이 가고 달이 감을 따라서 신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가매 미처 국내사도 보기가 힘든데 어느 하가에 그런 먼데까지를 보살 필수가 없었다. 그래서 명색은 신라 판도의 일부라 하나 신라 정부 호령 아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이 주인없는 땅에서 궁예는 마음대로 강역을 넓히며 인심을 수습하고 있었다.

궁예의 실력은 지금 칭왕을 할지라도 누구가 그것을 꺾을 사람이 없을 만치 되었으나, 그는 그래도 아직 칭왕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궁예의 목적이 견훤의 목적과 근본적으로 다른 까닭이다.

즉 견훤의 목적은 신라라는 나라는 있건 없건 옛날의 백제의 강토를 회복하면 그 뿐이다. 백제라는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이 견훤의 목적이다.

그러나 궁예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신라 경문왕의 서자로 태어난 궁예의 목적하는 바는 신라 사직이었다. 아직도 신라 궁실에 살아 있는 제一[일] 제二[이]의 두 태후는 궁예의 망모의 원수이다. 이 원수를 갚을 겸 차차 신라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런지라 그의 판도가 일국을 건설할만하고 그의 실력이 일국을 건설할만 하되 아직도 왕이라 자칭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신라 왕이지 다른 왕이 아니었다. 그런지라 임시로 스스로 장군이라 일컫고 호시 탐탐히 신라의 사직만 엿보고 있었다.

후일 견훤과 대립되고 더욱이 신라 왕실은 견훤이 보호하는 바가 되어서 궁예 자기의 힘으로서는 신라 사직까지는 도저히 엿볼 수 없게 된 때에 할 수 없이 스스로 왕이 되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후에 태봉이라 하였지만 이때는 아직도 신라의 사직만 엿보던 때라 신국 건설은 염도 내지 않던 때였다.

이 궁예가 북쪽에서 옛날 고구려의 강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국민을 호령하는 한편으로는 서남쪽으로 견훤이 신라 본토안에서 칭왕을 하면서 나날이 옛날 백제의 강역을 회복하여 들어갔다. 그 밖에도 여기 저기 작은 도적들이 일어나서 제 각기 몇성 씩을 빼앗고 혹은 도독이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며 스스로 백성을 호령하였다.

이렇게 사면을 뜯기운 신라는 지금은 삼국정립시대의 신라의 강역보다도 훨씬 좁은 범위 안에서 밖에 왕령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난국 안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진성여왕도 또 승하하셨다. 그리고 그의 조카 되는 분이 새로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가 즉 효공왕(孝恭王)이다.

이 효공왕 三[삼]년 ─ 즉 견훤이 스스로 칭왕한지 구년 드디어 견훤의 세력은 완산주에까지 폈다.

백제의 옛 터도 인제는 자기의 손아래로 들어왔다. 완산주가 함락되던 날, 부하 장졸들은 모두 전승의 축하연을 열고 정신없이 좋다고 날뛸 때에 그들의 왕인 견훤은 홀로 사람들을 물리치고 외따른 곳으로 가서 하염없이 울었다.

한개 홍안 소년으로 무너진 백제를 재건하자는 커다란 야심을 품고 아버지의 슬하를 떠난지 춘풍추우 二十七[이십칠]성상 ─ 스스로 칭왕을 한지도 벌써 九[구]개성상이지만 당년의 홍안소년이 지금 중노(中老)의 역에 이르러 비로소 이백년 전 백제의 강역의 일부분을 회복하였다.

『이다음 군신의 예로써 너를 다시 보지 그 전에는 다시 보지 않겠다.』

당시의 홍안 소년인 자기가 웅지를 품고 떠날때에 이렇게 격려해 주시던 아버지 아자개도 지금은 벌써 황천객이 된지도 오래다.

그새 근 三十[삼십]년을 품속에 깊이 간직하고 잇던 아버지의 족자를 눈앞에 걸어 놓고 이 왕은 그 아래서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님을 비롯하여 그새 원한 잡수진채 황천으로 가신 아홉대의 조상님들. 지금 소자는 조상님들의 신령의 도움으로써 백제의 구역을 회복하였읍니다. 의자왕의 원한 잡수신 최후를 회복할 날도 머지 않을 줄 압니다. 二[이]백여년 전 그날 우리의 임군 의지왕을 당나라로 물아낸 신라왕의 후손을 소자의 눈앞에서 자결을 시켜 보겠읍니다. 그 때에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수많은 궁녀들의 원한까지도 신라 궁실에 반드시 보복을 하고야 말겠읍니다. 끝끝내 조상님들의 신령의 도움을 부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성내에서 어지러이 울리는 환희의 가두성을 듣는 둥 마는 둥 견훤왕은 밤이 깊도록 홀로 울고 있었다.

이튿날 견훤왕의 포고문이 비로소 나붙었다.

── 二[이]백여년전 비겁한 신라가 당나라의 힘까지 빌려 가지고 우리 백제를 망케한 이래 백제의 유민된 자로서 망국지한을 울지 않는 자 뉘더냐.

과인(寡人)은 백제 왕족의 후예로서 백제 망한지 九[구]대째 내려 오면서 대대로 백제 회복을 꾀하다가 드디어 성취치 못한 조상의 신령의 도움과, 백제 천만 유민의 힘을 아울러서 싸우기 九[구]년, 오늘날 여기 二[이]백년 전에 없어진 백제 사직을 재건한다.

망국의 한을 울던 백제 유민은 모두 모이었다. 너희들이 그새 신라에게 받던 그 고초의 대신으로 과인은 너희들에게 안락과 태평을 주리니 포악한 신라의 학정에서 울지 말고 이 낙원으로 모여들라.

이제 과인이 너희에게 맹세코 실행하려 하는 것은, 위로는 옛날 의자왕께서 맛보신 고통의 잔보다도 더 아프고 쓴잔을 지금의 신라왕에게 품갚음으로 할 것이요, 아래로는 그새 二[이]백년간을 망국의 유민으로서 맛본 온갖 고달픈 입장에서 너희들을 구하여 올려서 우리 시조 고온조(高溫祚)의 시절과 같은 안락과 태평을 무한히 너희들에게 부어 줄 것이다.

너희들은 과인과 함께 이 후백제의 만만세를 축하하자 ──

이런 뜻의 포고가 옛날 백제의 강역 방방곡곡에 붙었다.


국호는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그새 九[구]년 간을 왕이라 자칭하면서도 벼슬을 베풀지 않고 조(朝)를 열지 않던 견훤은 국토를 세운 뒤에 비로소 관제를 세우고 국가로서의 의식을 차렸다.

견훤이 혼자서 칭왕을 할 때에는 세상에서는 비교적 냉담히 보았다. 군웅(群雄) 중의 한 사람이거니 이쯤으로 보아 두었다.

그러나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그의 태도를 선명히 할 때 백제의 유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견훤의 날개 아래로 모여 들었다.

나라를 잃은 지 반 五(오)백년, 망국인의 한을 통절히 느끼고 있던 백제 유민들은 이 새로 선 후 백제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백제 왕으로서 정식으로 즉위를 하고 조하를 처음 받는 날, 신왕의 궁실이 떠나 갈 만치 만만세를 부르며 돌아가는 그 소란스러운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이 신왕의 얼굴에는 비로소 명랑한 미소가 떠 올랐다.

그리고 이 미소는 신왕이 한낱 무명 군인으로 있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신왕의 장수들조차 二十七[이십칠]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에도 본 일이 없는 가을 하늘과 같은 맑은 미소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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