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이날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에 싸이셨다.

넓은 침전 화려한 침구 잠자리가 편찮음도 아니다. 짧은 여름의 밤이니 물론 지루하실 리도 없었다. 바로 곁에는 오늘 한 밤 특히 왕을 모시게 된 명예의 미희가 아름다운 쌍겹눈을 반쯤 내려 감고 왕의 입에서 어떤 분부가 내리기만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벌써 몇 달을 두고 두고 이렇듯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왕에게는 즐거운 침실도 아름다운 시비도 모두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면 왕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는 것일가?

원 나라에 남겨 두고 오신 정인!

왕이 석달 전 귀국하시기까지 원 나라에 계시는 오랜 동안에 그렇듯 서로 아끼고 사모하던 그 여인을 못 잊어 하심이었다.

고려로 돌아오시던 그 전야, 원나라 궁성 고전(高殿) 뒤꼍에서 떨어지는 달 그림자를 바라보며 이별을 설어하던 그 날 밤은 삼월달이었지만 북국의 밤 바람은 퍽 쌀쌀하였다.

『어디든지 따라 가겠나이다.』

하며 왕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울던 애인을 생각하자, 왕은 이미 고려 궁실 지존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더욱 잠을 못 이루시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데리고 올걸!』

하고 왕은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반쯤 눈을 감고 어슴푸레 가수상태(假睡狀態)에 잠겼던 미희가 놀라 일어나 머리를 읍하였다.

『염려 말고 저리로 누워 자라.』

왕은 부드럽게 한편 자리를 가리키고는 드륵 창을 열어 젖히었다.

보름 지난 달은 파란 빛을 왕의 얼굴과 몸에 던지며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허 그날도 달은 밝았지!』

왕의 머리 속에는 또 그리운 추억이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잇대어 퍼져 갔다. 백 번 천 번 하여도 또 잊을 수 없는 회상의 가지가지, 왕은 달을 쳐다보며 한숨만 지었다.

『자기도 그렇게 오고 싶어하던 것을 데리고 올걸.』

왕은 다시 한번 후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처녀는 원나라 종실의 딸이다. 지체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고려의 왕손들이면 으례히 원나라에 가서 수년 씩 놀다 오는 법으로 또 그 나라 종실의 딸들에게 대개는 장가들어 오던 때이었으므로 왕도 그 처녀를 맞이하여 오더라도 전례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외딸이었다.

더욱이 완고한 그의 부모가 사랑하는 귀한 딸을 소국 고려에 멀리 떼어 보내기를 꺼린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부왕이 승하하시고 충선왕이 부득이 동환하게 되었을 때 처녀는 정말 미친 것 같이 날뛰었다.

늙은 부모를 설복하다 하다 못하여 나중에는 『같이 데리고 가 달라』고 몰래 왕께 매달려 보았다.

그러나 한참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에 긴장이 되시고 장차 한 나라의 지손이 되신다는 흥분에 잠기어 있던 왕은 허락 없는 원나라 종실의 딸을 몰래 데리고 도망하는 것, 그리고 그 뒤에 으례히 생길 여러 가지 문제가 무서웠다.

왕은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슬퍼하는 이 정열의 처녀를 여러 가지로 위로한 후 홀로 귀국의 길에 오르시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원래 떨어져 있을수록 그립고 아쉬운 것. 왕이 돌아와 즉위하고 귀찮은 문제들을 대강 처리한 후이라 몸이 차차 한가해지니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생각나는 것은 이별한 옛 정인의 모양 뿐이었다.

수라를 들어도 맛이 없었다.

잠 안 오는 밤이 계속되었다.

산해의 진미를 늘어놓은 진수 성찬이 몰래 원나라 궁실을 빠져나와 두 사람이 심심 숲속에서 희롱하며 따 먹던 나무 열매보다 못하였고, 능과 금수를 휘두른 침전도 정인과 함께 달을 바라보던 뒤꼍에 풀밭보다 못하였다.

이리하여 왕의 용안은 날로 초췌하여 지기 시작하였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혼자 한숨을 지시는 왕의 정경이야 그 신하와 궁액들은 다 같이 의아한 눈을 마주 뜨고 얼마나 근심하였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 제일 왕의 신상을 염려하고 이것을 위로코자 한 이는 이익재(李益齋)였다.

젊은 왕을 기쁘게 할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선왕의 상망이 끝남을 계기로 하여 먼저 주연과 가무를 설치하고 왕께 뵈입고자 하였으나 밤잠을 못자고 입맛 떨어진 왕은 세상만사가 모두 귀찮았다. 곁에 좋은 청주가 있고 유랑한 풍악이 울릴지라도 다만 왕은 귀찮은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묵묵히 앉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하룻밤의 침전을 모시기 위하여 뽑혀 왔다.

그러나 그들 역시 밤새 불면으로 고생하시는 왕을 뵈올 뿐이요, 잠간 동안의 돌보심도 받지 못하였다.

왕의 괴로워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인 익재는 이 미희들의 보고를 듣자 할 수 없는 듯이 수염만 쓰다듬었다.

『원나라 종실의 딸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고.』

하는 늙은 익재는 덧 없는 애욕을 잊어 버리지 못하는 왕을 위하여 남몰래 얼마나 슬퍼하였는지 모른다.

왕의 잠 못자는 밤이 많아질수록 익재의 잠 못자는 밤도 늘어갔다.

이날 밤 익재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북국의 애인을 생각하고 한숨 지시는 바로 그 달을 바라보며 익재도 왕의 신상을 생각하고 한숨을 지며 애타하였다.

『난희는 어찌 되었을가.』

하며 익재는 오늘 밤 왕의 침전으로 들여보낸 미희의 일이 근심되었다.

『난희마저 상감 마마를 못 모셔 본다면 우리 고려에는 마마의 마음을 흡족히 할 여인을 없을 것이다.』

그의 눈 앞에는 세상에도 뛰어난 난희의 아름다움과 따라 왕이 난희만은 사랑하실 듯한 자신이 생기자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처음으로 익재는 새벽 바람 으스스한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어저께 밤 상감께서 새도록 비감해 하시며 잠을 못 이루시더란 것과 난희 역시 돌보시지 않더란 말을 들었을 때 익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기까지 하였다.

『큰일이로다 큰일이로다.』

대궐 문을 나오는 그의 발길은 한 없이 무거웠다.


그러나 며칠 후 더욱 큰 일이 고려궁 안에 일어나자 익재의 근심은 십 배 백 배나 더하여졌다. 원나라에서 왕을 사모하다 못하여 종실의 딸 되는 그 처녀가 달려온 것이었다.

크나큰 기쁨이 감당할 수조차 없어 왕은 그리던 정인의 손을 잡고 잠시 말씀조차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더욱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익재였다.

그도 두 젊은 사랑하는 사이, 마주 손을 잡고 그리던 회포에 막혀 있는 것이 기쁘지 않음이 아니다.

더욱이 항상 우울 속에 잠겨 있던 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즐겨하시는 것을 볼 때 그의 늙은 눈에는 눈물까지 어리었다.

그렇지마는 잠간 기쁨은 큰 슬픔을 가져올 법, 아무리 사사로운 인정이 어렵더라도 큰 사직을 위하여는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 상국의 딸이 도망을 왔으니 원라라에서 가만이 있을 리가 물론 없었다.

그러면 몰래 달려온 처녀를 말없이 받아 들인 고려의 왕실은 어떻게 될가?

기필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이것을 생각하자 익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젊은 정열은 어려운 것, 그러나 나라의 일은 더욱 어려운 것.』

익재는 단신 입궐하여 왕께 뵈었다.

『상감마마!』

왕의 앞에 넙죽 엎드린 그는 이렇게 처음 한 마디를 부르고는 다시 목이 메어 말이 계속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요?』

왕은 용안에 약간 수색을 띄우시고 간단히 반문하신다.

왕도 익재의 마음을 짐작하신다.

그의 충성,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 그리고 이번에 원나라의 정인을 환영하신데 대하여도 얼마나 그가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는지 왕은 잘 아신다.

젊은 왕은 약간 부끄러운 듯한 빛을 띄시고 익재의 검은 관 밑으로 휘날리는 허연 머리털을 내려다 보시었다.

『상감마마, 마마의 옥체가 마마 한 분의 것만이 아니라 온 나라의 근원이 되심을 아시오면 이 늙은 것의 사뢰오는 말씀도 탓하시지 아니하시오리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약간 눈을 들어 왕의 안색을 살피었다.

못마땅해 하시는 눈치었다.

부끄러운 듯이 붉으스럼하게 된 빛은 괴로운 푸른 빛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아무 대답은 없으시다.

익재는 억지로 용기를 짜 내어 다시 말을 이었다.

『사사로운 인정이 아무리 끊기 어려우시더라도 나라와 백성의 태평을 생각하옵소서……』

익재는 다시 슬쩍 눈치를 살피었다. 왕의 얼굴에는 역시 괴로워하는 빛이 짙어갔다.

아직 어리실 때 콧물을 흘리며 자기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글을 읽으시던 왕 점점 자랄수록 어버이 , 같이 여기고 존경하여 주시던 왕, 원나라에 계신 몇몇 해를 잊지 않으시고 통기를 전해주시며 즉위하신 후에도 스승 같이 부모 같이 섬기시사, 무시로 입궐을 허락하시고 매사에 의견을 참작해 주시는 이 왕의 앞에 하필 그 제일 기뻐하시는 바를 꺾게 하지 않으면 안 될고, 익재의 마음 속에는 백 번 주저가 일어났다. 한 번 새로운 결심이 다시 생겼다.

그는 이번에는 왕의 안색을 살피지 않기로 하고 말만 계속하였다.

차마 왕의 역역히 괴로워하심을 정시할 수 없었음이다.

『마마 이 늙은 것이 죽기로 한하고 이렇게 바른 말로 사뢰오니 마마를 우러러 의지하는 백성을 보시사 부디 뜻을 돌이키소서.』

언변 없는 익재라, 하고 싶은 말은 간절하나 다 계속할 수 없다는 듯이 띄엄띄엄 하는 한 마디 한마디에 더욱이 목까지 메이니 그 하는 말씨는 하잘 것 없으련만 사람의 정성이란 무서운 것이다. 왕의 타는 듯한 마음도 차차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왕도 결코 어두운 임금이 아니다.

총명하고 재빠르고 그러면서 정열적인 어른이었다. 열정적인 만큼 사랑에도 일철(一徹)하지만 잊으려 들면 딱 작성하고 돌아 봄이 없을 만큼 과단성이 있는 분이었다.

『한 사람을 못 잊어합시는 사사로운 정을 넓게 백성 위에 펴시와……』

하는 늙은 스승의 말은 이 정열적인 왕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족하였다.

『염려 마오.』

하고 왕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익재는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후유 한숨을 내어 쉬고 겨우 고개를 드는 그의 이마에는 방울방울 찬 땀이 맺혀 있었다. 가뜩이나 더운 날 그 어려운 그 말을 하려니 오즉이나 어려웠으랴. 왕의 마음 속에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염려 말고 물러 가오.』

왕은 다시 한 번 같은 말로 이르시었다.

익재는 왕이 예상 밖에 순순히 허락하심에 놀랐다. 그처럼 못 잊어하시던 바이라 으례히 고집깨나 부리리라 생각하였던 것이 그 같이 승락하심에 도리어 의심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왕의 얼굴에 더욱 더 또렷해가는 슬픈 그림자, 깊은 결심을 나타내어 굳게 다무신 입술, 모든 것이 큰 일 앞에 희생되시렴을 알자 그의 머리는 더욱 숙으러졌다.

『상감마마, 이 몸이 마마를 위하여 몸을 깨뜨리겠나이다.』

그는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 왕의 총명을 찬송하고 크신 은혜를 빌었다.

그 날 저녁 왕은 끝으로 정인과 함께 영화(映花樓)에 수라를 드리우고 같이 저녁을 듭시었다. 참으로 짧았던 해후였다.

몇 날을 두고 발이 부르트고 옷이 찢어지도록 몰래 몰래 달려온 처녀의 뜨거운 정리를 생각할 때 왕은 이 사람의 앞에서 무엇이라고 다시 귀국하란 말을 내어 놓을가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달이 올랐다.

열이레 달이건만 그것은 역시 둥글고 밝은 빛이었다. 왕은 달빛에 비추인 정인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 보시다가

『본국으로 다시 돌아가오.』

하고 겨우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본국으로?』

그 일순 처녀의 얼굴에 웃음이 약간 사라지는 듯하더니 달 아래 얼굴은 하얗게 질리었다.

왕은 문득 원나라에서 떠나오던 그 밤을 생각하였다.

『내일은 돌아가오.』

하던 때의 그 얼굴로 이렇게 파랗게 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래도 마음 한구석을 위로해 주는 기대와 기쁨이 있었다. 본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국왕의 자리, 자기를 어버이라 따를 창생에게 대한 커다란 기대와 흠모. 그러나 이 자리에서 하는 이별은 그저 애타고 섧고 원통한 것 뿐이었다.

『가오』와 『가시오』, 비슷한 말이나 그 괴로움의 차이가 이렇게 심할 것을 젊은 왕은 아직 알지 못하였다.

『차마 못할 소리로다. 차마 못할 소리를 내 어찌 쉽게 했었던고.』

왕은 달을 우러러 길이 탄식하였다.

아까 익재에게 준 약속의 말이 한없이 후회되었다.

『큰 일을 위하여 작은 일을 희생해?』

왕은 가만히 눈을 감고 아까 익재의 말을 되뇌고 난간에 기대 앉았다.

『그렇다. 내 한 몸을 희생하면 될 것을…』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왕은 시진한 듯이 맞은편에 수그리고 앉은 여인을 보았다. 만리 객지에 외로히 지나는 동안을 이 처녀의 따뜻한 손에 위로를 받고 아름다운 마음씨에 싸여 오고가던 언약과 맹세의 가지 가지를 되뇌던 것을 기억한다. 봄이면 같이 꽃 따고 여름이면 녹음 밑에 희롱하며 객지의 외로운 등불도 쓸쓸한 줄 모르고 만리를 격하여 있는 고국 부왕의 그리움도 어려운 줄 몰랐다.

부왕 위급의 보를 접하여도 이 처녀 하나로 그 곳 떠나오기를 주저하였으며 부왕 승하하신 뒤에도 그처럼 애끓은 이별을 하고 온 것과 ── 더욱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험산 준곡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단신 찾아온 것을 생각할 때 왕의 눈에도 어찌 한 줄기 눈물이 없으랴?

그러나 모든 것을 단념하여야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라의 큰 일을 위하여서는 이 애끊는 사랑을 잊어야 한다하지 않는가?

정인을 앞에 두고 그 사이 무섭게 초췌해 진 왕의 얼굴은 달빛에 비치어 두 눈만이 황황히 빛날 뿐, 마시고 또 마신 술이 전신을 돌아 몸도 마음과 같이 진정을 못하고 난간에 기대인채 한없이 흔들거렸다.

『못할 말이로다. 차마 못할 말을 했구나.』

왕이 괴로워함이 점점 깊어지자 처녀는 다시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선뜻 그 앞으로 다가 앉으며 마루에 손을 짚었다.

『이 몸이 물러 가오리다. 물러는 가오나 이 몸이 왔던 뜻일랑 괄세 마옵소서.』

처녀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북풍 같이 쌀쌀한 몽고인(蒙古人) 특유의 성질에 원나라 종실의 외딸로 아무 부족함 없이 꺼리낌없이 자라난 터이라 여간하면 발끈하는 성미가 있었다. 더욱이 만리 역정을 찾아온 정랑으로부터 이유야 아무렇든 돌아가라는 선언까지 받은 이상 구구하게 달라 붙어 무엇하랴.

처녀는 다시 한 번 절하고 긴 치마를 떨치며 일어섰다.

『변하기 쉬운 것은 사나이 마음 ── 』

원나라 왕궁을 몰래 빠져 나올 때 그리던 꿈의 가지 가지는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운 남쪽 선인이 학을 타고 나르는 그곳 과연 고려의 영역에 들어서자부터 산은 명미하고 내는 청아하고 사람들은 인자하니 이곳이 모두 장차는 내 것이오 내 나라라 하여 그의 마음은 한없이 뛰었다.

궐내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말마다 왕이 원나라 종실의 처녀를 생각하사 수라도 듭시지 않으시고 밤잠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더욱이 전국의 일색 난희까지 물리치심에 난희는 고려 처녀의 자랑이 짓밟힘을 서러워 하여 혀를 깨물어 죽었다 할 제 그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던가. 그렇던 것이 왕을 만나 그리던 정회를 풀기도 몇 시간, 나라 일에 방해가 되니 되돌아 가라 한다.

처녀는 발길마다 넘어질 듯한 것을 억지로 가누면서 누를 떠나왔다.

왕이 딸려 주는 시비도 구종도 모두 물리치고 다만 몸소 끊어 주신 연꽃 한 송이만을 손에 든 채로.

『 가지를 떠나 뿌리를 떠나 가엾은 계집에게 안기 운 네 신세, 너도 나 같이 박명한 태임인가 보다.』

처녀의 떨어뜨리는 눈물은 연꽃에 맺히어 방울방울 이슬 같이 구르고 있었다.


저녁 해는 한 덩이 붉은 점이 되어 지평선으로 떨어져 갔다.

밤새 잠은 이루시지 못하시고 종일 몰 한 목음 바로 넘기시지 않으신 왕은 황혼이 되어 올수록 미칠 듯이 가슴 속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어저깨 이맘때』하고 왕은 익재를 돌아다 보시었다.

말 없이 부복한 익재의 등에서는 찬 땀이 주욱 흘러 나왔다.

왕위도 싫고 영화도 귀찮다고 밤새 뇌이시던 왕, 애인을 따라 산야의 초인이라도 되겠노라고 느껴 우시던 왕의 용안은 밤 사이 몰라 보게 초라해졌다.

아! 사랑이란 이렇듯 괴로운 것이든가,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뜻하지 않은 장애가 있고 고통이 있다. 익재는 언제까지나 엎디어 있었다.

『어디까지나 갔을가?』

왕도 한없이 엎디어 있는 이 늙은 스승이 딱하였던지 다시 입을 여시었다.

『영화루에나 가 보고 오오. 어저께의 술마시던 자리가 남아 있을 것이니……』

하고 왕은 안석에 기대어 눈을 감으신다.

감으신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왕은 그것을 씻으려고도 하지 아니 하시고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신다.

『만리길을 달려올 때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냥 있으면 부귀 영화가 무르녹을 대국 종실의 딸로서……』

왕은 혼자 말하듯이 뜨문뜨문 뇌이기 시작하셨다.

간밤부터 백 번 이백 번도 더 뇌고 듣고 들은 같은 말이건만 익재의 귀에는 새로운 벽력 같이 크게 울렸다.

『가 보고 오오. 떠나간 행방이나 알려다 주오.』

왕은 처음으로 소매 자락을 잡아 다리어 얼굴을 훔치신다.

혼자 계시고 싶으심이었다. 혼자서 이 애달픈 설음에 잠겨 있고 싶은심이었다. 익재는 일어났다.

할일 없이 영화루로 발을 옮기니 어느결에 들었는지 벌써 사방은 푸르스럼한 석양 빛이 진하다.

『어저께 이맘때 ―』

아까 왕이 하시던 말을 되뇌며 누상에 오르자 익재는 깜짝 놀라 딱 발을 멈추었다.

어둑한 누상 난간에 기대어 어떤 허연 그림자가 쓸어져 있다.

그윽한 후원 사람조차 , 찾지 않는 이 루상에 어두워오는 날 쓸어진 것이 무엇일가.

일순 의아해 있던 놀람이 조굼 진정되자 빨리 달려가 보았다.

원나라 복색을 한 여인이다. 아직 달은 오르지 않아 사면을 분별할 수 없으나 백옥 같은 살빛이며 옥 같은 손길이며 갖은 패물 품위로 보아 원나라의 가장 높은 귀인임에 틀림 없다. 영화루 높은 난간에 기대어 엎으러진 꽃 포기 같이 정신을 잃고 있는 그 여자를 익재는 고요히 일으켜 앉혔다.

일방 급히 냉수를 끼얹으며 사지를 주므르니 구슬 같이 영롱한 눈을 떠 보다가는 곧 다시 정신을 잃고 쓸어진다.

익재는 가슴이 아팠다.

『어찌 아직 이곳에 계시 오니까.』

하고 닥아 앉아 귀에 입을 대이고 소근거렸으나 소녀는 입술만 약간 달막어릴뿐 말을 이루지 못한다. 오랜 여정(旅程)의 피곤과 애인에게 버림받은 설움에 맥이 풀리고 정신이 흩으러 졌음이리라. 그는 정기를 잃고 혀까지 굳어 버렸다.

『어제 밤에 떠나셨났더더니 어이한 일이오니까?』

익재가 의아한 듯이 다시 물었을 때 여인은 무엇을 쓰고 싶다는 듯이 손을 내밀어 시늉을 해 보인다.

익재는 얼은 붓과 먹을 가져다 주었다.

처녀는 온몸의 힘을 손 끝에 모아 억지로 붓을 들어 한 절 운을 쓰되

보내신 연 꽃 송이 贈送蓮花片[증송연화편]
붉은 빛 작작 하더니 初來灼灼紅[초래작작홍]
가지 떠남 몇 날이뇨 辭枝今幾日[사지금기일]
이 몸 같이 여위었어라 憔悴人與同[초췌인동]

익재가 받아 보고 그 깊은 뜻에 눈물을 뿌렸다.

그러나 이 뜻을 바로 왕께 전갈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반정신이 나가 계신 왕이니 이 같은 소식을 들으시면 필시 밤새 이야기하시던 것 같이 손에 손을 잡으시고 야인 농군의 무리에로 떨어져 가실지 모른다.

그 시구(詩句)를 접어 깊이 간수한 익재는 왕의 계신 곳으로 발을 옮기며 또 괴로운 거짓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왕은 익재의 돌아오기를 간곡히 기디리고 계시었다.

눈에 띄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모두 신산하심에 혼자 계시기를 원하였으나 막상 혼자 계시다 보니 더욱 괴로운 마음이 더하심이리라. 왕은 익재의 들어옴을 반가이 맞아 자리까지 권하셨다.

『그래 무슨 소식을 알아 왔소?』

하고 왕이 곧 허덕이며 물었을 때 익재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사뢰기 황송한 말씀, 공연히 마마의 가슴을 아프시지 않게 하기 위하와 도리어 드리지 않음이 나을가 하나이다.』

왕은 이 익재의 말고 태도에 놀라셨다.

아까까지 어찌할 줄 모르고 왕의 앞에 부복하여 있던 그가 갑자기 이렇게 냉연히 끊어 말함은 무슨 까닭일가.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빨리 알려 주오.』

왕의 초조해 하는 태도에 익재는 마지 못하겠다는 듯이

『변하기 쉬운 것은 부녀자의 마음인가 하나이다.』

이렇게 서두를 내어 여태까지 꾸미고 꾸민 거짓말을 사뢰기 시작하였다.

『신이 막 궐문을 나서랴 하옵는데 원복 입은 귀인이 지나가옵기 곧 부르며 따랐사오나 냉연히 조소하며 급히 어떤 술집으로 들어가더이다.』

익재가 이까지 말하였을 때

『술집으루?』

하고 왕은 놀라 반문하셨다.

『녜! 그래 바로 술집으로 들어가옵는데 그 속에서 또한 젊은 소년이 나와 서로 손을 잡고 더불어 음주하옵는데 보는 사람마다 욕하며 흉보옵더이다.』

왕의 얼굴은 해쓱하여 졌다. 그러나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럴 리가 있나 원 나라 종실의 딸이 주가에서 소년과 더불어 음주하다니.』

하더니 입 안에 꾸짖는 듯한 어저로

『사람을 잘못 본 게지.』

하신다.

『그럴 리가 있겠읍니까. 그것이 어떤 말씀이기 잘못 보고 사뢰겠나이까.』

하고 이 번에는 익재가 펄쩍 뛰었다.

『신이 연로하와 안명하지는 못하오나 어찌 그 같은 일에 잘못 볼리야 있겠읍니까.』

그는 한마디로 부정한다.

왕은 깊이 이맛살을 찌푸린채 묵묵하시다.

『 참 변하기 쉬운 것은 부녀자의 마음, 주가 문 밖에서 각자기로 묻사오나 들을 수 없삽기 이렇게 초연하와 돌아왔나이다.』

익재는 말을 마쳤다.

왕은 가장 못마땅한 듯이 열린 미닫이 밖에 침을 탁 뱉으시며

『더러운 것.』

하고 불쑥 한 마디 하셨다.

그렇듯 선량한 체하고 절조 있는 체하더니 아무리 마음의 낙망이 크다 하더라도 그 같이 난잡한 행동을 하는 정인에게 대하여 왕은 분개하다 못하여 미워하셨다.

『나의 괴로운 입장을 모름도 아니겠건만!』

왕의 마음 속에는 이 같은 생각이 돌며 원나라에서 뒤 쫓아온 그 정열까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렇듯 가상하다 여기시고 못 잊어 하시던 정회까지 죽는 것을 깨달으며

『짐도 이제는 나라 일에 몸을 아끼지 않을 뿐이요.』

하고 익재를 돌아보신다.

익재는 도리어 자기 거짓이 너무나 심하였던 것이 후회가 나서

『하도 낙망이 심하였기 잠감 화를 풀려는 것인가 하왔읍니다.』

슬그머니 도로 감싸주려 하나 왕은 손을 내졌고

『더러운 것을.』

할 뿐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해가 바뀌었다.

왕은 만조 백관을 모으시고 경수절(慶壽節)의 잔치를 배푸시었다.

곳은 영화루. 왜 하필 이 곳을 택하셨을가.

익재는 왕의 마음을 잘 안다.

일시는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 정인을 원망하고 침 뱉으셨으나 날이 갈수록 왕의 마음속에 새로이 연연한 정이 다시 솟기 시작하였다.

잠간 동안의 분노보다 그 분노가 삭아지자 뒤이어 가슴 속을 미이는 것은 오랜 동안 쌓여진 정의와 애끊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었다.

익재도 물론 그 일에는 다시 말하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경수절, 이 기쁜 날에 왕은 하필 영화루를 치우시고 잔치를 여신 것이었다.

술잔이 오고 가며 풍악이 유랑해 질수록 밤도 점점 깊어 들었다.

왕도 취하셨다. 군신도 모두 취하였다. 이때에 돌연

『죽여 줍소서.』

하고 왕의 앞에 나와 넙죽 엎드린 사람이 있다. 익재였다.

풍악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술도 들지 않고 하염없이 한 옆 구석에 앉아있는 익재를 사람들은 다만 기분이 나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익재는 작년 여름 이 누상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죽여 줍소서』

그는 불문곡절하고 이렇게 왕의 앞에 나와 업드린 것이었다. 왕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랐다.

익재는 소매 속에서 그 때의 시구를 꺼내어 왕께 드리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크신 벌이 있을 줄 알았다.

몹쓸 진노가 계실 줄 알았다.

그러나 왕은 괴로운 듯이 웃으시며 몸소 익재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모두 짐을 위하여 한 일이니 내가 용서하오.』

그것은 울상이 된 웃음이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입을 빙긋거리며 웃으시는 모양.

익재는 죽는 날까지 그 웃음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웃음을 생각해 낼 때마다 명심하고 왕은을 보답하리라 하였다.

<끝>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