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의 호동왕자
고구려 대무신왕 十五[십오]년.
가을 해가 서편 벌판으로 뉘엿 뉘엿 넘어가려 한다.
바야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고구려의 세력이 한토(漢土)의 낙랑(樂浪)까지도 집어 삼켜서 어제까지도 낙랑의 서울이던 땅이 오늘의 고구려의 一[일] 읍으로 되었다. 그로써 읍의 교외 멀리 패수를 굽어 보는 아담한 재릉에 한 개 새로운 무덤이 서 있었다.
고귀한 사람의 무덤인 듯, 그 앞에 아로새긴 돌이며 무덤의 높이가 보통 평민의 무덤은 아니였다. 그리고 이 근처의 무덤이 모두 한풍(漢風)을 띄운데 반하여 이 무덤만은 고구려풍이다.
황혼의 해를 등으로 받고 고요히 누워 있는 이 무덤 위로 깃을 찾아 가는 몇 마리의 까마귀가 울며 지나간다.
황혼의 교외.
황혼의 무덤.
고요한 사위였다.
🙝 🙟
황혼도 어느덧 대지로 사라지고 붉으스럼한 가을달이 동녘 하늘로 솟아 올랐다.
동녘 하늘에 솟아 오른 달의 그림자가 소 한 마리의 길이 쯤 높이 오른 때였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벌판에 나타났다. 말을 타고 이 재릉으로 향하여 달려 온다. 말은 쉽지 않은 명마로서 그 걸음거리며 숨소리의 웅장함이 가위 용마라 할 듯하나 말께 오른 주인은 기운이 하나도 없이 말이 달려 가는 대로 버려두는 모양이다.
그러나 말은 이 길에 익은 듯 일직선으로 무덤을 향해 달려 온다.
이윽고 무덤까지 달려 온 말은 무덤 정면을 피하여 측면으로 돌아 갔다. 그리고는 마치 다 왔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리려는 듯 발로서 땅을 긁으면서 우렁차게 울었다.
말 주인은 말에서 내렸다. 말을 그 곳에 버린 채 무덤의 정면으로 돌아 왔다.
돌아와서도 무덤 앞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서 있는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만 비오 듯하였다.
한각경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가야 그는 도로 말께로 돌아 갔다.
다시 말께 오른다. 그런 뒤에는 다시 아까 온 길로 돌아 간다.
그는 호동왕자(好童王子)였다.
낙랑공주의 무덤을 찾아 왔던 것이었다.
지금 고구려에서는 낙랑을 정복하였다고 그 전승 축하 기분이 온 나라에 넘쳐 있다. 그러나 호동왕자의 가슴은 쓰리고 아프고 적적할 뿐이었다.
자기는 전승장군 ─ 말하자면 이 승리를 가장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낙랑 영토를 얻는 것과 동시에 가장 사랑하던 낙랑공주를 잃어버린 왕자는 마음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낙랑을 정복한다는 것은 년래의 고구려의 숙망으로서 그 숙망을 이루었으매 당연히 기꺼워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뻗어 나아가는 고구려는 인제도 연하여 남으로 북으로 정벌을 거듭하여 대고구려 제국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만한 것을 모르는 왕자가 아니었으며 이만한 야심을 안 가진 왕자가 아니었지만 이번의 낙랑 정복의 결과로서 생긴 공주의 참변이 왕자에게는 가슴 아팠다.
더구나 공주는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낙랑의 국보인 나발과 북을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낙랑왕 최리의 노염을 사서 참사하지 않았는가. 북과 나발을 깨뜨리라고 지시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었던가. 낙랑을 정벌하자면 그 나라의 국보로 되어 있는 북과 나발을 먼저 없이 하여야 하겠으므로 공주의 힘을 빌어서 그것을 깨뜰지 않았는가.
낙랑의 북과 나발이 없어진 덕에 고구려는 손쉽게 낙랑을 정복하였다. 말하자면 이번의 승리는 공주의 덕이라 할 수도 있었다.
공주는 오로지 왕자 자기에게 대한 애정 때문에 제 나라에 반역을 한 셈이다.
이 크나 큰 사랑에 대한 보수를 받지 못하고 공주는 저 세상으로 갔구나.
온 고구려는 전승축하 기분으로 들떠 있을 이때에 그 전승의 제일공자인 공주는 승리를 보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갔구나.
한 걸음만 더 빨리 왔더면 혹은 공주를 구해냈을런지도 모를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왕자의 마음은 더 아프고 쓰릴 따름이었다.
새로이 묻은 이 무덤.
지금 이 아래서 썩어 들어갈 공주의 몸을 생각하면 지난날 낙랑 궁중에서 기뻐 떨던 공주가 연상되어서 가슴을 우겨 내는 듯하였다.
공주여.
공주여.
부르나 대답 없는 무덤 앞에서 부르면 무얼 하리.
그러나 또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심사를 어찌 하랴.
눈물만 한 없이 흐를 뿐이었다.
🙝 🙟
나날이 초췌하여 가는 호동왕자의 꼴은 아버님 왕에게도 딱하였다.
왕도 호동의 가슴 아퍼하는 까닭을 짐작한다. 왕자가 그 언제 낙랑 정벌군의 원수로서 출정하려 할 때,
『네가 전승하면 상으로 무엇을 주랴?』
물으매 그때 왕자의 대답이,
『소신은 다른 소망이 없사옵니다. 낙랑공주로써 왕자빈을 삼아 줍시사.』
하지 않았던가.
전승을 하면 당연히 데려올 줄 믿었던 공주를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신 왕자가 음울한 얼굴로 패군지장과 같이 개선한 모양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낙랑공주는 분명히 죽었든가 어떻게 된 것이다.
그 뒤로부터 차차 음침해가고 초췌해가며 듣건대 간간이 단신 말을 타고 대궐을 벗어나서 일량일식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며 한다는 것을 보니 이것은 정녕코 잃어버린 낙랑공주에게 대한 상사병이었다.
이 호동왕자는 왕비의 소생이 아니었다. 왕비에게서는 아직 소생이 없고 후궁에서 난 왕자이었다.
왕비는 아직 늙지 않았으매 장래를 알 수 없지만 왕으로서는 이 왕자에게 큰 촉망을 두고 있었다. 그런 뜻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적은 없었지만 왕의 내심으로는 왕비가 장래에도 소생이 없기를 은근히 바라기까지 하였다.
보아하니 호동왕자는 아직 소년의 경을 면치 못했지만 그 견식으로든지 무술로든지 역량으로든지 당당한 인물만 모여 있는 고구려 조정에서도 가장 빼어나는 인물로서 장차 이 나라를 부탁함에 조금도 근심되는 점이 없는 소년이었다.
왕비에게 장래 소생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떤 자식이 날런지 알 수 없는 배며 비록 걸출이 난다 할지라도 호동보다 더한 인물이 나리라고는 믿지 못할 배다.
그러면 도리어 왕비에게는 소생이 없고 이 호동왕자가 장차 당신이 승하한 후에는 고구려 임금의 자리를 점령하는 것이 국책상으로 가장 바라는 바였다.
이만한 촉망을 두었으니 만치 왕의 이 왕자에게 대한 사랑은 큰 것이었다.
그 사랑이 크니만치 지금의 초췌한 모양을 볼 때에 왕은 매우 근심되었다.
하루는 왕이 조용히 왕자를 불렀다.
『네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으면 다 말해 봐라.』
이 말에 왕자는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하였다.
『소신께 무슨 근심이 있사오리까?』
『아니로다. 근심이 없으면 왜 이렇듯 초췌하였겠느냐? 마음에 있는 바를 다 말하여라.』
왕자는 묵묵히 있었다. 묵묵히 있는 동안 그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만 쏟아졌다.
『폐하.』
『?』
『폐하의 총애하시는 소신이옵고 일국의 왕자이옵고, 전승장군이옵고, 온 백성이 사랑해주는 소년 귀인으로서 소신께 무슨 근심이 있사오리까? 다만 왜― 왜― 그러하온지…….』
흐르는 눈물 아래서 계속하는 말 ─.
『적적하옵니다. 가을철이라 그러하온지…….』
『좀 마음을 쾌활히 먹어보면 어떠냐?』
『노력해왔읍니다. 말을 달려 보았읍니다. 활을 쏘아 보았읍니다. 사냥을 해 보았읍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꺼질 듯할 뿐이로소이다.』
왕은 한참을 물끄러미 사랑하는 왕자의 얼굴을 굽어 보았다. 왕에게서도 기다란 탄식이 나왔다.
『폐하.』
『왜 그러느냐.』
『폐하 소신께 수유를 주십소사.』
『수유? 얼마 동안이나.』
『영구히.』
왕은 눈을 크게 하였다.
『?』
『영구히 폐하, 소신은 왜 그런지 세상 만사가 귀찮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를 보내고는 내가 견딜 듯 싶으냐? 나는 참는다 치고라도 고구려 백성이 가만 있을 듯 싶으냐? 온 국민의 촉망이 너의 어깨에 있는 줄 너도 알지 않느냐.』
용맹한 왕자, 전승장군으로서의 신망은 왕의 깨우침이 아닐지라도 자기도 잘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그 모든 명예가 왕자에게는 귀찮고 시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
『백성의 말썽까지 어떻게 모면한다 할지라도 장차 이 나라를 누구에게 부탁하겠느냐? 아예 그런 생각은 말아라.』
부왕의 간곡한 말 가운데서도 호동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지금의 부왕의 말의 뜻은 장차 자기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의향인 모양이다. 지금 왕자라는 이 자리도 귀찮거늘 태자의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나?
🙝 🙟
왕은 이 왕자의 쓸쓸해 하는 심사를 얼마간이라도 위로하고자 나라의 일등 여악(女樂)들을 뽑아서 왕자궁으로 보냈다.
어느날 호동왕자가 역시 외로운 심사로서 뜰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을 때에 홀연히 여악이 울리는 요란한 음악소리가 났다.
왕자는 깜짝 놀랐다. 왕자궁에는 여악이 없었거늘 웬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머지 않은 곳에서 나는 것을 보니 이 왕자궁 내에서 나는 것이 분명하였다.
시녀를 불러서 물어보고 왕자는 비로소 부왕이 자기를 위로코저 보낸 여악인 줄 알았다.
왕자는 부왕의 이 일이 고맙기는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구슬픈 심사와는 반대되는 흥성스런 음악이 도리어 왕자에게는 귀찮았다.
잠시 앉아서 듣기 싫은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보았지만 종내 참지 못하여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나가는 왕자 ─.
왕자가 왕자궁 문 밖에까지 나가매 음악은 싱거운 듯이 제 혼자 멎어 버리고 버석거리는 낙엽의 소리만 어수선하였다.
왕자궁을 나선 호동왕자는 차차 대궐 후원으로 돌아갔다.
낙엽으로 한 벌 덮인 후원.
낙엽이 비오 듯하는 사위.
성기 성기 줄기만 남은 늙은 나무들에는 가지 끝에 아직 떨어지지 못한 잎이 두 셋씩 달려 있을 뿐 천하는 만추(晩秋)에 잠겨 있었다. 그 성기 성기나무 줄기 틈으로는 누런 가을 햇볕이 기운 없이 내려 비최이고 있다.
푹푹 발이 빠지는 낙엽을 밟으면서 왕자는 천천히 발을 뒷동산으로 옮겼다.
동산 마루턱까지 올라가서 왕자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한없이 한없이 서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지도 않는 서남쪽에는 낙랑공주의 무덤이 있는 것이다.
『아 ─ 아.』
탄식과 함께 좌우 뺨을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무한히 왕자는 동산 마루턱에 서서 서남쪽 하늘만 바라 보았다.
가을해 떨어지려는 서남쪽, 얼마 전까지도 낙랑 영토 그것이 지금 자기네 영토가 되기는 되었다. 허나 이것을 자기네 영토로 만들기 위하여 공주는 저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닌가.
🙝 🙟
그것은 첫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후더덕 대궐을 벗어난 왕자는 또한 말을 달려 공주의 무덤에까지 가서 한참을 통곡을 한 뒤에 도로 맥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 온 때는 벌써 밤이 깊었다.
첫 겨울 ─ 낮에는 그래도 아직 그다지 춥달 수도 없지만 밤에 들어서서는 꽤 추웠다. 그러나 추위조차도 감각 못하고 망연히 대궐로 돌아온 왕자는 말을 버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왕자궁으로 향하였다.
향하여 가다가 그는 시야(視野) 한 끝에 화광이 보이므로 문득 그리로 주의를 한순간 가하였다.
불빛이 얼른거리는 것이 내전 왕후궁이었다. 왕자는 의아히 여기었다. 밤도 이미 깊고 그 위에 날씨도 꽤 서늘한데 왕후궁 뜰에 불 그림자가 얼른거리는 것이 수상하였다.
왕자는 잠시 의아하여 그것을 바라보다가 왕후궁 쪽으로 발을 옮겼다.
거진 가까이 이르렀다. 이르러 보매 기괴한 일이었다.
왕후궁 뒷 모퉁이에 조그만 모퉁이에 단을 하나 묻었다. 단에는 세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녀가 그 앞에서 무슨 기원을 드리고 있고 그 위에 수상한 것은 이 추운 밤에 왕후까지 시녀 몇을 데리고 나와서 그 앞에 꿇어 앉아 있는 것이었다.
호기심이라기보다 의심이 덜컥 난 왕자는 발소리를 감추어 가지고 더 가까이 갔다. 가매 차차 명료히 들리는 무녀의 기원성 ─.
『호동이에게 천살을 내려주십사.』
다른 모든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 한마디만이 명료히 들렸다.
왕자는 가슴이 덜컥 하였다.
맥 나고 괴상히 떨리는 가슴.
왕자궁으로 돌아온 그는 궁인들을 모두 멀리 물리쳤다. 물리친 뒤에 그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통곡했다.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왕후는 자기를 미워한다 . 지금 국왕 이하 온 국민의 신망이 모두 자기에게 있는 지라 왕후는 이것을 꺼리는 것이다.
아직도 왕후는 소생이 없다. 그러나 늙지 않는 몸이며 장래에도 그냥 소생이 없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때다.
그러나 부하 이하 온 국민의 신망이 죄다 자기에게 몰려 있느니만치 어느 날 자기가 이 나라의 태자로 책봉될런지 예측할 수 없다. 이번 낙랑 정복 이후로 조야의 신망은 더욱 두터워져서 태자 책봉의 여론도 꽤 높이 올라 있는 모양이다. 그 뒤에 부왕도 나날이 자기를 더 어여삐 보니까 이 일이 언제 구체화 될지 그것은 단지 시일 문제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왕후는 자기의 입장을 위태롭게 여기고 겸하여 장래 자기의 몸으로 왕자를 탄생하면 그 왕자가 당연히 누릴 태자의 위를 호동에게 빼앗길 가 두려워 지금 그 방자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태자의 위 따위는 부럽지 않다. 일찌기 탐내어 본 일도 없었다. 이전 낙랑공주가 아직 살아 있고 그 낙랑공주를 왕자비로 맞을 공상을 할 때에도 한번도 태자위를 동경하여 보지를 않았다. 이 나라의 충성된 신자로서 공주와 함께 부귀와 영화의 일생을 보내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었지 그 이상은 촌보도 나서본 일이 없었다.
공주를 잃은 뒤에는 지금은 단지 죽어지지 않으니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살기조차 귀찮은 지경이다. 만약 죽어지기만 하면 자기는 달갑게 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거늘 왕후는 왜 이다지도 야속한 행동을 하는가. 왕후께 대하여 아무 적의(敵意)도 품고 있지 않는 자기를 왜 적으로 여기고 죽기를 축수하는가.
호동은 왕후의 심사가 너무도 야속하여 통곡하였다. 자기의 죽음을 축수하는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하는 것이 딱하여서 통곡하였다.
🙝 🙟
그로부터 수일을 호동은 어전에 불리워서 태자로 책봉될 내의를 들었다.
그때 호동은 단연히 이를 거절하였다.
『폐하, 소신께는 과한 짐이로소이다. 어리석은 소신이 어찌 그런 중임에 견디오리까. 굳이 말아 주십시오.』
『사양치 마라. 너 밖에는 후자도 없으려니와 그 중임에 견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아니올시다. 몇십 몇백 년을 더 기다려서 폐하 천수 만세시에 유언으로 책봉을 합셔도 늦지 않을가 하나이다.』
이리하여 아직 폐하 즉위 중에는 왕후께 태자가 탄생될런지도 알 수 없다는 뜻을 암시하였다.
왕도 호동왕자의 적적한 심사를 얼마만치라도 낫게 하고자 이 길보를 들려 주었지만 당자가 이렇듯 굳이 사양하는 바에는 더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 문제는 유야무야 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소문은 대궐과 조정에 쫙 퍼졌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당연히 여겼지만 왕후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신령께 축원하여 호동왕자의 생명을 없이 하려던 왕후는 인젠 그런 유유한 방책을 쓸 수가 없었다. 문제는 목첩에 임하였다. 빨리 어떻게 해결을 짓지 않으면 호동이 태자로 책봉이 될런지도 알 수 없다. 호동만 태자로 책봉이 되면 호동의 생모 후궁에게는 영화가 이를런지 알 수 없지만 자기의 위라는 것은 더 위에 지나지 못한다. 지금 아무리 왕후라 할지라도 태자의 생모가 못되는 자기는 장래 태자가 등극할 때는 귀찮은 존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자기 하나면 그도 또한 참을 수 있으려니와 만약 장차 자기 몸에서 왕자까지 탄생되고 보면 어떻게 될가.
자기 몸에서 왕자가 탄생되면 왕의 적출 장자로서 당당히 장래 이 나라의 국왕이 될 인물이다 그러나 탄생되기 전에 호동이 태자로 책봉되면 장래 태자는 왕의 서자 때문에 그 위를 빼앗길 것이고 그 뒤로는 대대로 몇십대 몇 백대를 내려갈지라도 가련한 존재로 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에 왕후는 이 일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가.
자기는 아직도 왕자를 탄생치 못했을 뿐 더러 수태치도 못했다.
아직 수태도 안된 - 장래 왕자를 위하여 호동을 태자로 책봉치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위에 군신간의 신망이 그만치 두터운 호동을 핑계 없이 태자로 책봉치 말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찌하나 인제는 천년세월하고 신령님께 축원이나 하다가는 대사를 그릇칠 염려가 있다. 좀 더 바삐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 🙟
이리하여 왕후는 어떤 조용한 기회를 타서 왕께 호동왕자를 참소하였다.
『폐하.』
왕의 앞에 머리를 푹 숙으리고 울기만 하는 왕후를 왕은 달랬다.
『폐하.』
『왜 그러오.』
『폐하, 신을 죽여 줍시사.』
『후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폐하께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 죽여 줍시사.』
왕은 의아히 여겨서 그냥 그 연유를 따저 물었다.
여기 대하여 왕후는 매우 주저하면서 한장 글월을 꺼내어 바쳤다.
그것은 위 아래로 모두 찢기운 중에 단 한 구절만 아직 남아 있는 편지의 조각이었다.
『이루지 못할 소망을 그래도 단념치 못하고 못내 그리워 하는 호동은.』
위에도 없고 아래도 없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 필적은 틀림이 없는 호동왕자의 것이었다.
『폐하 호동이 신께 이런 편지를 보냈읍니다. 이것이 모두 신의 미력에서 나온 일이오니 신을 죽여줍시사.』
왕은 대답없이 그 글만 보고 있었다. 얼굴의 빛은 완연히 불쾌하였다.
『이것을 폐하께 아뢰자니 폐하께서는 호동을 믿으시는 터라 도리어 신을 의심하실 것이옵고 이 편지를 받은 뒤 반삭을 혼자서 번민하였읍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없는 왕, 불쾌한 표정은 점점 더 농후하여 갔다.
믿으려나 믿기지 않는 일인 동시에 믿지 않으려니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달필의 필적은 틀림이 없는 호동의 것으로서 위필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호동의 인격으로서 능히 이런 일을 할가.
🙝 🙟
이튿날 왕자는 부왕의 앞에 불리웠다.
『야.』
『네이?』
『왕후는 네게 어떻게 되는 분이냐?』
『모후(母后)되시는 분이옵니다.』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왕의 너무도 엄한 얼굴에 호동은 깊이 의아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껏 자기에게 이렇듯 엄한 표정을 보인 일이 없는 부왕이었거늘.
왕은 대답을 듣고 휙하니 무슨 종이조각을 하나, 호동의 앞으로 던졌다.
허리를 굽혀서 그것을 들어 펴보니 그것은 자기가 낙랑공주를 너무도 사모하는 나머지에 종이 조각에 그 심사를 끄적거리다 찢어버린 부스러기였다.
호동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왕께 자기 심경을 고백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리한 왕자는 즉시 다른 생각이 나서 그것을 중지하였다.
왕은 아까 자기에게 왕후의 일을 물었다. 그런 뒤에 종이조각을 자기에게 보였다.
그러면 이 종이는 필시 왕후와 무슨 결연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호동은 이 편지의 츄릭크를 통찰하였다. 동시에 그 어떤 겨울밤 자기에게 천살을 내려 달라고 신명께 빌던 왕후의 모양이 서언히 보였다.
왕후는 신명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빌었지만 이것이 성사가 되지 않으므로 방법을 돌려서 왕으로 하여금 자기를 죽이도록 하고자 계획함인 모양이었다.
이 이면의 전인을 통찰하자 왕자는 그 자리에 넙적 엎드렸다.
『폐하, 소신이 망녕이 나와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
흐르는 눈물 떨리는 가슴으로서 부왕께 이렇게 복죄를 하였다.
그래도 반신반의로 왕자를 힐난하던 왕은 왕자의 복죄를 보고 그만 기운이 빠진 모양이었다. 잠시를 뚫어져라 하고 왕자를 굽어 보았다. 그런 뒤에 노염을 억누르는 모양으로 한 마디씩 한 마디씩 숨찬 소리로,
『괘씸한 놈 같으니, 네 공적을 생각해서 이번만은 목숨은 부지되나.』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끓었다.
『냉큼 오늘로 이 대궐에서 나가거라.』
고 호령을 하였다.
🙝 🙟
왕자는 가슴에 머리를 푹 묻고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므로 돌아보니 수년간을 충실히 왕자에게 시종 들던 무장 하나이 따라 들어온다.
왕자는 모른체하고 그냥 가려 하였다. 그러나 무장이 뒤 따라와서 왕자의 맞은 편까지 와서 섰다.
『전하.』
『………』
『전하 왜 전하의 청백을 변명 안 합시오?』
눈물을 죽죽 흘린다.
『그 뜻은 고마우나 내 청백을 변명하자면 자연히 모후의 불미를 밝혀야 할 것, 인신되고 인자된 도리로서 못할 노릇이오.』
『그렇지만 전하 억울하옵니다.』
왕자는 그 말에 응하지 않고 거실로 들어 갔다.
흐리던 일기가 저녁때부터는 끝내 눈보라를 치기 시작하였다.
바람소리 귀곡성같이 요란하고 완강한 대궐의 문들도 바람에 소란히 덜컥거리는 눈보라의 밤이었다.
충실한 무장은 밤중에 깨어서 왕자의 거처하는 곳이 춥지나 않은가 하고 몰래 가서 엿보았다 그러나 . 이맘때쯤은 호걸다운 코고는 소리가 나던가 그렇지 않으면 불을 밝히고 그냥 앉아 있던가 해야 할 왕자의 거실은 캄캄할 뿐 아니라 조용하기 짝이 없다.
무장은 우둘우둘 떨면서 툇마루에서 한참 동안을 방안의 동정을 엿 들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여전히 인기척도 없었다.
드디어 결심을 하고 들어가서 불을 밝히고 보매 왕자는 그 방에 없을 뿐더러 방안이 정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걸리어 있던 낙랑공주의 족자까지도 없어진 것으로 보아서 왕자가 이 대궐을 벗어난 것이 분명하였다.
무장은 달려나가 보았다. 왕자의 애마까지도 없어졌다.
그러나 무서운 눈보라에 쌓여서 왕자의 간 자최는 알아볼 바이 없었다.
대궐을 벗어난 왕자는 꿈에조차 사랑하는 공주의 족자를 품은 채로 눈보라를 무릅쓰고 애마를 달려서 공주의 무덤으로 향하였다.
세상만사가 귀찮은 가운데서 그래도 부왕의 애정 뿐은 저버릴 수가 없어서 살기 싫은 목숨을 그래도 부지하여 오던 왕자는 지금 부왕의 의심까지 산 이상에는 더 살아 갈 필요며 의무도 없었다.
그럴진대 사랑하는 공주가 있는 나라로 자기도 가서 이생에서 못 다한 재미를 내생에서라도 보기 위하여 최후의 길을 눈보라를 쓰면서 낙랑을 향하여 말을 달리는 것이었다.
🙝 🙟
일양북내.
긴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따사로운 양춘이 이르렀다.
북국 고구려에 두껍게 쌓였던 눈도 봄의 따스한 볕에 차차 녹아서 그림자가 엷어갔다.
그 두껍던 눈이 차차 엷어감을 따라서 눈 아래 감춰졌던 만물이 세상의 표면에 나타날 때에 낙랑공주의 무덤 위에 한개 새로운 시체가 봄의 대지 위에 나타났다. 애마(愛馬) 홀로이 대궐로 돌아 오고 그 주인은 종적이 사라졌던 호동왕자의 주검이었다.
🙝 🙟
수일 후 온 고구려 백성의 조상 아래 이 왕자의 시체는 공주와 합장을 하였다.
해로는 못하였지만 동혈(同穴)한 왕자와 공주의 무덤에는 사시, 고구려 백성들의 애모의 향 연기가 끊어지는 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