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1/왕자호동
이것은 年前 某雜誌에 촉탁에 의지하여 「情熱의 樂浪公主」, 「純情의 好童王子」 두 편으로 나누어 써주엇든 것이다. 그런데 그 잡지에서는 이 작품을 그 잡지 편즙인의 저작인듯이 그 잡지 편즙인의 명의로 발표를 하엿스므로 누차 그 「非」를 힐책하든 남어지에 이번 다시 내 名義로 여기 신는 바이다. 새로 다른 것을 하나 쓰려고 하여 보기도 하엿지만 病勢가 의외로 중하여 舊作을 再錄하는 바이니 諒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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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었던 봄빛도 차차 사라지고 꽃 아래서 돋아나는 푸르른 새 움이 온 벌을 장식하는 첫여름이었다.
옥저(沃沮) 땅 넓은 벌에도 첫여름의 빛은 완연히 이르렀다. 날아드는 나비, 노래하는 벌떼─ 만물은 장차 오려는 성하(盛夏)를 맞기에 분주하였다.
이 벌판 곱게 돋은 잔디밭에 한 소년이 딩굴고 있다. 그 옷차림으로 보든지 또는 얼굴 생김으로 보든지 고귀한 집 도령이 분명한데, 한 사람의 하인도 데리지 않고 홀로이 이 벌판에서 딩굴고 있다.
일 없는 한가한 시간을 벌판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보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 이었다. 때때로 벌떡 일어나서는 동편쪽 한길을 멀리 바라 보고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가는 다시 누워 딩굴고 하는 품이, 동쪽 한길에 장차 나타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기를 한나절, 또 첫여름의 긴 해도 좀 서쪽으로 기운 듯한 때에 이 소년은 또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소년은 비로소 방긋 웃었다. 그리고 빨리 일어나서 좀 이편 쪽에 있는 수풀에 몸을 숨겼다. 거기는 이 소년의 승마(乘馬)인 듯한 수(繡) 안장의 백마가 한 마리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년이 풀숲에 몸을 숨기자 저편 한 길에는 완연히 인마의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차차 커지면서 한길에는 한 행차가 나타났다.
낙랑(樂浪) 태수의 최리(崔理)의 노부였다.
문무 대신 대신의 시위를 받은 최리의 수레가 지금 대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소년은 잠시 그 수레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동안, 소년의 얼굴에는 차차 긴장미가 돌았다. 소년은 문득 허리를 굽혀서 한 개 돌멩이를 집었다. 다음 순간 그 돌멩이는 소리를 내며 날았다. 소년의 겨냥은 틀리지 않았다. 소년의 손을 떠난 돌은 낙랑태수 최리의 수레를 끌던 말의 뒷다리에 가 맞았다.
다리에 날쌘 돌을 맞은 말은 한 번 껑충 뛰었다가 전 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태수의 권력으로 구하여 들였던 명마가 힘을 다하여 달아나는지라, 그 속력은 놀라왔다. 의외의 사변에 시위했던 문무 대신들이 놀라서 태수의 수레를 붙들고자 뒤를 따랐으나, 그들의 말이 수레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옥저 넓은 벌 동쪽 끝에서 돌을 맞은 말은, 그 넓은 벌을 무방향하고 막 달아났다. 수레 위의 최리는 비명을 내며 구원을 청하였으나, 각일각 대신들의 말과는 거리가 더 멀어 갈 뿐이었다.
소년은 잠시 미소하면서 이 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최리의 수레가 꽤 멀리 간 뒤에야 비로소 거기에 매어 두었던 자기 말의 고삐를 풀고 말 등에 올라 앉았다.
『백룡(白龍)아, 어디 네 발을 한 번 시험해 볼까?』
말 등에 올라 앉아서 갈기를 한 번 두 들기고 소년은 숲에서 나섰다.
『자!』
소년이 한 번 발로써 말 배를 찰 때에 말은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고 발로 땅을 찼다.
먼지가 일었다. 먼지뿐이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 지점(地點)에 먼지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그 먼지는 순식간에 이동하였다. 말도 소년도 보이지 않고 단지 일어 나아가는 먼지 가운데서 말발굽 소리만 우렁차게 났다.
놀라운 속력을 가진 말이었다. 최리의 신하들의 말을 어느덧 뒤로 떨구었다. 그리고 일로 최리의 수레로 향하여 달려갔다.
돌개바람과 같이 앞으로 달아가는 먼지─ 그 먼지는 차차 최리의 수레에 가까와갔다. 접근되었는가 생각되는 순간은, 어느덧 말과 수레는 한 열(列)에서 서게 되었다.
『섰거라, 이 노마(駑馬)야.』
이것이 소년의 입에서 나온 호령이다.
이 호령에 넓은 벌이 더릉더릉 울렸다.
이 호령에 수레의 말은 주춤하였다. 그 주춤하는 순간, 소년은 자기의 말에서 나는 듯이 수레의 말에게 옮겨 탔다.
소년의 주먹이 말 콧등에 힘있게 내렸다.
놀라서 무정처하고 닫던 말은 이 괴물에게 놀라서 그 자리 에서 버렸다. 말이 서는 것을 기다려가지고 소년은 말께 내 려서 수레의 인물에게 돌아섰다.
『어떤 분인지 욕 보셨읍니다.』
수레의 최리는 얼굴이 창백하여져 가지고 소년을 굽어보았 다.
『어떤 아이인지 고맙다. 하마터면─』
그러나 소년이 그 말을 중도에 끊었다.
『말씀 좀 조금 높이십쇼. 나는 고구려 왕자 호동(好童)이 오.』
『오, 네가 일찍 소문에 듣던 호동이냐?』
나는 낙랑왕 최리로다. 듣던 바에 지지 않는 호협 소년─ 고맙다.』
이 말을 듣고 소년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금 인 사를 드렸다.
『그렇습니까, 누구신 줄 모르고 그만─』
『아니 괜찮다. 고맙다. 너 아니더면 큰 욕을 볼 뻔했다.』
때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십 오년─ 지금부터 일천 구백여 년 전.
호동왕자는 낙랑태수의 최리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체하고 낙랑 대궐에 같이 갔다.
낙랑 궁중에서는 호동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첫째로는 인 국(隣國) 왕자로도 대접이 융숭하겠거니와 태수 최리의 생명 의 은인으로서의 대접까지 겸하였는지라, 세세한 점까지 부 족이 없도록 융숭히 대접하였다.
낙랑 궁중에 머물으면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융숭한 대접에 표면으로는 만족한 듯이 지내는 호동왕자로되, 속으 로는 적지 않은 오뇌를 품고 있었다.
패기 만만하고 돋아오는 해와 같이 국운이 융성한 고구려 는, 일찍부터 이 낙랑을 정벌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적 이 있으면 반드시 싸우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고구려 나 라로서 이 낙랑을 정벌할 생각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더우기 이 곳은 단군의 옛터가 아니냐.
그러나 이 낙랑에는 신기한 북[鼓]과 나팔이 있어서, 적병 이 내공하면 이 북과 나팔이 저절로 소리를 내어 장차 올 재변을 알리어서 방비케 하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지라, 북과 나팔이 낙랑에 그냥 있는 동안은 아무리 고구려의 강병이라 할지라도 감히 침범할 생각을 못하고 있 는 것이었다.
그러나 패기 만만한 고구려로서는 또한 눈 앞에 보이는 이 진찬을 그냥 침만 삼켜 버릴 수가 없다. 어떻게든 이를 정 벌치 않으면 속이 펴이지 않았다. 정벌키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북과 나팔을 없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찌할까?」
정부와 온 국민이 낙랑의 북과 나팔을 없이할 꾀를 생각하 였다.
그러나 낙랑 정부에서도 국보를 좀체 허수로이 간직할 까 닭이 없었다. 대궐 창고에 깊이 깊이 감추어 두어서 웬만한 높은 대신들도 함부로 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렇다고 낙랑 정벌의 희망을 버려야 하나?
온 군신이 이 낙랑의 북과 나팔 때문에 고심하고 있을 때 에, 이 눈치를 안 왕자 호동은 몰래 아버님의 대궐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계략을 써서 낙랑 대궐에까지 국빈으로 들 어오게는 되었다.
그러나 들어와서 틈 있을 때마다 살피고 탐지하여 보았으 나, 그 두 개의 신기(神器)는 어디 감추어 두었는지 알 길이 없다.
천년 세월 하고 그냥 낙랑 궁중에 묵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일껏 이 곳까지 들어와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귀 국한다는 것도 일이 아니다.
힘 있는껏 살피고 알 수 있는껏 탐지하여 보았지만 그래도 알 길 없는 신기 은닉처 때문에 호동은 오뇌하였다.
일 없이 너무 오래 여기 있어도 도리어 의심을 살 터이니 까 하루 바삐 알아가지고 이것을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이다. 그러나 그 소재처조차 알 수 없으므로 호동은 나날이 마음을 죄었다.
「어찌하라?」
무위히 보내는 날짜는 흐르고 흘러서 어느덧 여름도 무르 익었다.
그 어느날 밤, 호동은 또 밤이 깊어서 뜰에 내렸다. 소나무 향내 그윽히 코에 들어오고 올빼미 길게 우는 여름밤이었 다.
어디 감추어 두었나? 있음직한 곳은 모두 뒤지어 보았다.
그러나 이 넓은 궁전에는 아직도 호동이 보지 못한 곳이 꽤 많았다. 밤마다 밤마다 남의 눈을 피하여 샅샅이 뒤지는 호 동은, 이 밤도 또 북과 나팔의 소재처를 알아보려고 뜰에 나섰다.
차차 내전으로 들어갔다. 공주전(公州殿) 가까이까지 갔다.
가까이 가서 보매, 밤도 으슥히 깊었는데도 공주전에는 아 직 불빛이 보인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힌 전내에는 발을 통 하여 침의를 입은 공주와 시녀 한 사람이 마주 이야기를 하 는 모양이 보였다.
젊은 왕자는 문득 거기 호기심을 일으켰다. 그리고 발소리 를 숨겨서 문 밖까지 가까이 갔다.
그때에 문득 들리는 한 마디의 말─ 그것은 호동왕자라는 자기의 이름에 틀림이 없었다. 깊은 밤 공주는 시녀와 함께 잠도 안 자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아직 가신다는 말씀은 안 들립디다마는…』
이것은 시녀의 말이었다. 거기 공주가 응한다.─
『도리어 하루 바삐 귀국하셔서 이 눈 앞에 보이지라도 않 으시면 잊히우리라도 하련만…』
그 뒤에는 한숨.
『공주께서 그렇듯 마음 두시면 왜 나라님께 말씀드려서 連枝(연지)의 연분을 안 맺으십니까? 배필로 부족하올 바도 없는터에.』
『그러니 어떻게 차마 말씀이야 드리겠느냐?』
공주는 자기를 사모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호동은 잠시 숨어 서서 이야기를 더 들었다. 들으면 들을 수록 공주의 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 나라의 국보를 찾으러 밤을 택하여 나섰던 호동왕자는 이 공주와 시녀의 하소연을 듣는 동안, 차차 마음이 산란하 여져서 본시의 계획을 잊어버리고 한참 그들의 이야기만 듣 다가 자기의 처소로 돌아왔다.
젊은 왕자의 가슴은 산란하였다. 그 산란한 가운데서도 자 기의 책무를 잊지 않은 왕자는 그 밤을 곰곰 생각한 뒤에 새로운 계획을 하나 세웠다. 즉 공주를 농락하자 하는 것이 었다.
국보는 자기의 힘으로는 매우 찾기 힘들 뿐더러, 더 찾다 가는 혹은 발각이 될 위험도 있다. 그 위험을 피하고도 자 기의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이 나라 공주의 마음을 농락하 자. 그리하여 공주를 통하여 국보의 소재처를 알아보자.
꿩 먹고 알 먹을 새 계획을 세운 호동 왕자는 이튿날부터 는 새로운 계획 아래서 일을 진행시켰다.
好童(호동)이라는 그의 이름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인물 잘 나고 호협하고 용맹있고 지혜 많은 이 왕자는 자기의 새 계 획에 충분한 자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수일 후 깊은 밤 궁궐 후원에서 서로 몸을 의지하고 사랑 을 속살거리는 한 쌍 남녀와, 이것을 망보는 한 사람을 굽 어본 자는 하늘 높이 뜬 달밖에 없었다.
그리고 매일 밤 이 한 쌍의 남녀는 그윽한 수풀에서 송진 의 향내를 달게 맡으면서 사랑을 즐겼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공주는 자기 모후에게, 모후는 지아버니 태수에게─ 이렇게 삼단식으로 호동왕자를 이 지방 사위로 맞기를 원하였다.
호동의 인물을 사랑하던 태수 최리는 쉽사리 이 원을 들어 주었다.
몇몇 신하의 반대가 있기는 있었지만 고구려 왕자 호동은 드디어 낙랑왕의 부마로 되게 되었다.
경사를 지내 뒤에 이 새 부부의 의는 침이 돌 만치 좋았 다.
태수 최리는 흔히 내관을 시켜서 몰래 가서 새 부부를 엿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매번을 새 부부의 의좋게 마주앉아 있는 모양을 듣고는 혼자서 만족히 웃고 하였다.
그러나 호동왕자로서는 단순히 이 신혼의 재미에 한껏 잠 겨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의 등에 짊어져 있는 크나큰 책무 때문에 남 모르게 늘 혀를 채고 하였다.
한 책략으로서 건 사랑이요, 책략 때문에 성립된 결혼이로 되, 결혼하고 나니 나날이 새 아내에게 대한 애정도 늘어간 다. 그러나 애정이 늘어가는 한편으로는 자기의 책무도 또 한 잊을 수가 없는 이 왕자는 새 아내와 릊거이 담화를 하 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무겁디무거운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결혼만 하면 손쉽게 알아질 줄 믿었던 북과 나팔의 소재처 도, 급기 결혼하고 보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기는 고구려의 왕자.
아내는 낙랑의 공주.
북과 나팔은 고구려와 낙랑의 국교상 델리케이트한 관계를 가진 물건.
이런지라, 공주에게 물러보기도 난처하였다. 물어보아서 공 주가 무심히 들으면 문제가 없거니와, 조금이라도 눈치 이 상히 여겼다가는 이야말로 긁어 부스럼이다. 눈치 이상이 보았다가는 神器(신기)는 더욱 깊이 감출 것이며, 아울러 공 주와의 새에 파경지탄까지도 생기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 하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호동왕자는 우울한 심사로 날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고구려 본국의 일이다.
부왕께 아무 의논도 없이 몰래 대궐을 벗어나서 이곳에 온 지 벌써 수 삭─ 자기를 유난히 사랑하시던 부왕은 지금 얼 마나 근심하고 계실까? 손쉽게 목적을 달하리라고 속단하고 부왕께 품하지도 않고 왔거니와, 와서 이렇듯 날짜가 길어 지니 거기 대하여서도 매우 마음이 걸렸다.
호동왕자는 낙랑 궁실에서 즐겁고도 마음 괴로운 날짜를 하루 이틀 거듭하고 있었다.
여름도 거의 간 어떤 날, 호동왕자는 드디어 공주에게 귀 국할 의사를 말하였다.
『잠깐 귀국을 해야겠소.』
이렇게 공주에게 말할 때에 공주는 깜짝 놀라서 왕자를 우 러러보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갑자기가 아니라, 그 새 오래 혼자서 두고두고 생각해 보았소이다. 아무리 해도 잠깐 귀국을 해야겠소.』
『고국 생각이 나십니까?』
『생각도 물론 나지요. 그렇지만 그 고국 생각보다도 더 긴한 일이 있소이다.』
『그건 또 무엇이오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공주와 내가 짝을 지은 지도 월여가 되지만 부왕께 품하지 못한 것은 공주도 아는 바가 아니오?
우리나라 법에 아버님의 허락이 없으면 내외가 되지 못하는 법이외다. 지금 결혼한지 월여, 나날이 정은 깊어지지만 우 리 나라 법으로 말하지만 공주는 아직 내 아내가 되지 못한 셈이외다. 그러니까, 일단 귀국해서 부왕의 윤허까지 얻어서 당당한 부부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오? 내 귀국해서 부왕의 윤허를 얻고 수레를 보내서 데려갈 테니, 그날까지 잠깐 상 별치 않으면 안되겠소이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까닭이 이렇게 붙는 이상은 어찌하랴.
공주도 하루 바삐 시아버님의 허락까지 얻고 당당한 고구 려 며느리로서 고구려 대궐에 들어가야 할 신분인 이상은 말릴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별은 서럽지만 이 상별은 임시요, 장차 영구히 고구려 며느리로서의 자리를 준비할 상별이라 하면, 어서 바삐 왕자를 보내서 윤허를 얻고 싶었다.
이리하여 호동왕자는 낙랑 태수 장인에게까지 허락을 받고 귀국의 길을 떠났다.
공주는 교외에까지 수레를 같이 타고 나가면서 이 상별을 울었다. 잠시의 상별이나마 떠나기가 싫었다. 그런 특별한 조건이 붙는 작별이 아니라면 보내기가 싫었다.
『그럼 얼른 윤허를 받으시고 저를 데려가 주세여.』
『내 힘껏 해 보리다.』
『한 각을 삼추와 같이 기다리리리다. 매일 한 번씩 기별 해 주세여.』
책무가 중하지만 않다면 왕자로서도 이별하기 싫었다. 그 러나 적지 않은 책무를 진 왕자는 이별을 이별로 여기지 않 고, 교외에서 공주와 작별하고 말에 채찍질하여 정다운 고 국으로 돌아왔다.
부왕과 대신들의 환영은 굉장하였다.
오래 소식이 없이 종적 감추었던 왕자가 무사히 돌아왔는 지라, 온 나라는 들어서 이 왕자의 무사와 건강을 축하하였 다.
『그 새 오래 어디 가 있었느냐? 퍽 근심했다.』
간곡한 부왕의 이 사랑의 말에 호동왕자는 쓸쓸히 머리를 숙이어 절하였다.
『나라님, 그 간의 소신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직 주상할 수가 없사옵니다. 소신 생각하는 바가 있사오니 아무 하문 도 마옵시고 소신이 나라님께 주상하는 날까지 기다려 주시 옵기를 바라옵니다.』
이렇게 왕자는 아뢰었다.
왕도 왕자의 심려와 다모(多謨)를 짐작하는지라, 무슨 적지 않은 곡절이 있을 줄 알고 다시는 연유를 묻지 않았다. 그 리고 왕자의 입에서 연유를 말할 날이 올 것을 고요히 기다 리고 있었다.
낙랑공주에게서는 나날이 기별이 왔다.
사모하는 정에 타는 마음, 구구 절절이 불타는 듯한 글이 하루 한 번씩 이르렀다. 그리고 그 편지마다 부왕의 윤허가 났는지 물어보는 그 투로써 공주가 얼마나 초조해 하는지는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왕자는 일절 회답을 안하였다.
마음에 깊은 계교를 품고 있는 왕자는 공주의 사랑의 글을 볼 때마다 젊은 마음에 타오르는 정열은 공주에게 지지 않 았으나 한 글자의 회답도 안 보냈다.
왕자에게서 회답 못 본 공주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편지의 연정은 나날이 더 맹렬하게 갔다. 한 자 의 회답도 없는 왕자를 나무라는 언구도 많이 있었다.
애타는 그 꼴, 초조해하는 모양을 눈 앞에 서언이 보면서, 그 공주에게 못하지 않게 자기 마음도 애타고 초조하였지만 왕자는 그냥 한 자의 회답도 보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한 달, 공주의 편지가 이젠 나무람뿐으로 차게 된 뒤에, 왕자는 비로소 처음으로 공주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새 한 달을 날마다 던지신 옥필을 하나도 남김 없이 보 았나이다. 생의 마음 공주도 아는지라, 생인들 왜 한 자 글 월을 공주께 올릴 마음이야 간절치 않았으리까.
그러나 생 좀 번민하는 바가 있어서 아직도 글월을 올리지 못하였사오니, 널리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 날 공주와 작별하고 귀국하온 이래, 오매 불망의 이 마음이야 어찌 공주에게 지리까. 하루 바삐 부왕의 어윤을 얻어서 백 일 아래 공주를 모셔올 날을 나날이 기다렸나이다. 그러나 아직껏 부왕은 윤허하지 않으시오며 매우 어려운 조건을 내 어거시므로, 생은 그 조건을 차마 공주께 알릴 수도 없고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아서, 지금껏 밀음 밀음 글월을 밀어 온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나이다.
그 동안 생은 전력을 다하여 부왕의 어의를 돌이켜 보아서 부왕의 윤허를 얻은 후에 회보를 공주께 알리려 한 것이 부 왕의 어의는 좀체 돌지 않고 공주의 힐책은 나날이 심해 가 므로 뜻에 없는 붓을 오늘 들었나이다. 이 흉보를 적지 않 을 수 없는 생의 손을 생은 스스로 끊고 싶소이다.
부왕의 어의 이렇듯 견고하옵고, 그 조건은 생으로서는 차 마 공주께 진언할 바가 못되오니 이를 어찌하리까. 생은 스 스로 결심한 바가 있나이다. 부왕의 불허하시는 우리의 연 분은 차생에서는 이룰 도리가 없사오니, 차생 연분은 깨끗 이 잊고 내생에서나 차생의 미진한 인연을 다시 즐길밖에는 도리가 없을까 하나이다.
공주여, 내내 안녕하시옵소서. 차마 잊을 수 없는 공주를 잊지 않을 수 없는 이 환경을 생은 무한히 저주하나이다.
이 편지에 대하여 공주는 즉시로 회답하였다.─ 부왕의 조 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들어드릴 수 있기 만 한 것이라면 무엇인들 거리끼리까. 이미 삼생을 맹세한 양인이매 감춤 없이 서로 마음을 알리어 어떻게든 최상의 결과를 얻도록 노력하여 보십시다─ 하는 편지였다.
호동왕자는 또 회답을 썼다.
─조건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귀국에 비장해 둔 북과 나팔에 대한 것이외다. 그 북과 나팔은 고구려와 낙랑 의 국교에 커다란 암영을 던지는 자로서, 그런 것을 귀국에 서 비장해 두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늘 귀국을 경계하지 않 을 수 없고, 경계를 하려면 서로 적의(敵意)가 생기는 것이 요, 적의가 있으면 언제든 폭발할 날이 있으니, 이런 근심이 있는 나라의 공주를 본국 왕자비로 맞아오기가 매우 힘들다 하는 것이 부왕의 의견이외다. 그런지라, 그 북과 나팔만 없 어지면 양국의 국교도 친선하여질 것이며, 친선한 이상은 혼인쯤은 이편에서 도리어 청이라도 하 겠지만 그 국교상의 방해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친선키 못 하겠고, 친선치 못하매 혼인도 못한다 합니다. 그러나 북과 나팔은 귀국의 국보로서 이것은 절대로 처칠 할 수 없는 보 물이니 어찌하리까. 이러므로 공주와 나와는 도저히 즐거운 장래를 볼 수가 없소이다.─ 이런 의미의 회답이었다.
그로부터 수일 후 공주에게서 다시 온 편지를 보고 호동왕 자는 눈물을 흘렸다.
소녀가 몰래 그 북과 나팔을 깨뜨려 버렸읍니다. 이것 모 두 오로지 낭군께 어서 뵙고 싶은 정열에서 나온 바오니 인 제는 부왕께 그대로 품하시와 소녀를 데려가시도록 채비를 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뜻이었다.
이 넘치는 정열이 눈물겨웠다. 이 정열에 대하여 책략으로 서 응한 자기의 태도가 얼마간 부끄럽기도 하였다. 더구나 자기도 또한 공주에게 지지 않도록 사랑하는 몸이라, 무슨 큰 죄나 지은 듯하기까지 하였다.
『나라님. 소신의 흉중에 깊이 감추었던 책모를 오늘 주상 할 날이 이르렀읍니다.』
부왕께 알현한 호동왕자는 이렇게 아뢰었다.
그는 과거 반 개년 동안에 그의 행한 일과 그의 오뇌를 죄 털어서 부왕께 아뢰었다. 낙랑을 정벌키 위하여 그 나라의 북과 나팔을 없이하려고 꾀를 써서 태수의 신임을 사던 일 을 비롯하여, 낙랑공주와 결혼케 된 사유며, 드디어 지금 초 지가 관철되어 낙랑에는 이젠 북과 나팔이 없어졌다는 사실 을 죄 아뢰었다.
『성사 여부를 추측키 어렵사와 아직 상주치 못하고 유예 하는 터이옵니다.』
이 상주를 듣고 한참을 묵묵히 생각하던 왕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반갑기는 반갑다. 그러나 너는 이 뒤 공주를 어떻게 하 려느냐?』
왕자는 대답치 못하였다. 마음에 먹은 바 생각은 있지만 그대로 복주할지 어쩔지 주저하였다.
『아녀자를 농락한 네 책임은 어찌 하려느냐?』
재차 왕은 물었다.
왕자는 잠시 더 있다가 대답하였다.
『나라님, 만약 낙랑의 신기를 없이한 것이 군국에 공이 된다 할진대, 소신은 나라님께 공에 대한 상사를 청하올 권 리가 있을 줄 아옵니다. 낙랑공주 또한 소신과 아울러 나라 님께 그것을 청할 권리가 있는 줄 아옵니다. 그 권리를 주 장하올 심산이옵니다.』
『무엇을 청구할 테냐?』
『공주를 나라님의 자부로 불러 주시기를 탄원하올 심산이 옵니다.』
왕의 엄한 용안 아래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야 한다. 공도 공이려니와 아무리 나라를 위해서라 도 아녀자의 정을 농락한 비열한 자가 돼서는 못쓴다. 네 소청 미리 승낙한다.』
이 성지에 왕자는 강읍하였다.
비밀리에 낙랑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노라고 고구려 조야는 물끓듯 하였다.
이 정벌군의 통수권(統帥權)을 받은 호동왕자는, 일변 군사 를 정돈하는 한편으로는 좀 조용한 때마다 혼자서 생각하고 는 탄식하고 하였다.
어리석지 않은 공주이매 자기 나라의 북과 나팔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물론 알 것이다. 그 가치를 알면서도 능히 그것을 깨뜨려 버린 크나큰 공주의 애정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애정을 장차 무엇으로 보답하나? 지금 자기는 군무에 바쁘다. 그 군무라는 것이 즉 공주의 나라를 정벌하려는 것 이다.
그의 애정에 대한 이 반격─ 이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언 짢았다. 스스로 부끄러웠다. 더구나 만약 낙랑에 자기 나라 보배가 깨어진 것을 발견하는 날에는 재화가 공주의 몸에도 미칠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나라를 반역하고까지 오직 사 랑에 살려는 공주의 심경을 생각할 때에, 거기에 대한 커다 란 책임까지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공주여, 그대의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 이것은 천명 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로다. 천명에 좇아서 그대의 생 국은 비록 망한다 하나, 장차 고구려의 왕자비로서의 그대 의 개인적 영예는 그대의 머리에서 배길 자 없도다.. 그대가 아버지의 나라를 배반함으로써 낙랑의 공주의 지위에서는 떨어진다 하나, 장차 고구려 왕자비의 지위에서는 그대를 떨굴 자 없도다.
자, 어서 군마를 모아 가지고 낙랑으로 가자.
나라를 위한 거사요, 겸하여 나 개인의 경사를 위한 진군 이로다.
이리하여 군사를 급급히 모아 가지고 호동왕자는 낙랑 정 벌의 대군을 이끌고 용감히 고구려를 떠났다.
영한 북과 나팔이 이미 없어진 낙랑에서는 고구려 정벌군 이 낙랑 성하에 이르기까지 이를 알지도 못하였다. 온 낙랑 이 태평의 꿈에 잠겨 있을 때에, 홀연히 고구려 군마의 요 란한 소리는 이 안일한 백성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이런 변란이 있으려면 먼저 북과 나팔이 저절로 울어 줄 터인데, 그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고구려 군사가 이르렀는 지라, 낙랑 조야는 낭패하였다.
낭패하여 신기를 찾아 보메, 웬일인지 신기는 깨어져나갔 다.
이것으로써 승부는 벌써 결정된 셈이다. 신기가 깨어졌는 지라, 낙랑 장졸은 벌써 기운이 꺾였다. 싸울지라도 반드시 ㄹ지 것으로 믿었는지라, 어차피 질 전쟁은 애당초 하기부 터 피하려 하였다.
의기 하늘을 찌를 듯 낳 고구려 군사와, 미리부터 기운 꺾 인 낙랑 군사의 싸움이라, 그것은 전쟁 같지도 않았다. 두어 번 살을 쏘아 본 뒤에는 낙랑 군사는 장수의 명령도 듣는둥 마는둥 제각기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고구려 군사는 성 안 으로 물밑 듯 밀려 들어왔다.
고구려 군사가 성하에서 싸움을 돋을 동안 궁중에서는 신 기 깨뜨린 범인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공주의 행사 며 그 행사가 호동왕자의 지휘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 때에 군신의 노염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 군사가 한창 성내로 물밀듯 밀려 들어오 는 그때에, 왕궁에서는 아버지 왕의 칼 아래 낙랑공주는 한 개 주검으로 변하여 버렸다. 그의 사랑하는 호동이 지금 이 대궐을 향하여 말을 달려 오거늘 그는 아버지의 노염의 칼 아래 애처로운 주검이 되었다.
그리고 군신은 고구려 군사를 피하기 위하여 대궐을 뒤로 하고 달아났다.
공주는 어디 있느냐?
정벌군의 선봉에서 장군도를 뽑아 들고 백마에 높이 앉아 낙랑 성중으로 들어온 호동왕자는, 이 소란의 도시에서 공 주를 구해 내고자 부하 장령들을 뒤에 남기고 단신 대궐로 달려 왔다. 휑하니 열린 대궐로 말을 달려 들어오며 보매, 텅 빈 듯 한 가운데 공주인 듯한 자가 홀로 정전 뜰 앞에 엎드려 있다.
왕자는 그리로 말을 달려 갔다. 그리고 그냥 그는 말에서 뛰어 내리면서 뜰에 엎드린 여인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앗!』
왕자의 팔에 부둥켜 안겨서 올라온 자는, 여인의 상반신(上 半身)뿐이었다. 하반신은 그냥 땅에 엎드린 채─ 그리고 그 아래는 피가 펑하니 괴어 있었다.
너무도 놀라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한 여인의 상반신의 얼굴을 보매 틀림없는 공주였다.
『공주!』
그러나 무슨 대답이 있으랴!
『공주!』
텅 빈 대궐에는 공주를 부르는 왕자의 애규성만 울렸다.
『공주! 공주!』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그 온기로써 참화를 본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빨리 왔더면 구해낼 수도 있었을걸, 공주의 상반신을 높이 쳐들고 부르짖는 호동왕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낙랑 정벌에는 성공하였다. 일단 몸을 피했던 최리며 부하 들도 모두 고구려 군사에게 발견되어 붙들려 왔다. 공주만 만약 살아 있었더면, 혹은 호동왕자도 최리는 사랑하는 아 내의 아버지라 생명은 유지되었을는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의 최리는 왕자에게는 단지 적국 추장일 따름이었다. 그 위 에 공주를 죽인 원수일 따름이었다.
최리 이하의 장졸은 모두 군율로 시행하였다.
승전은 하였다. 승전군이라고 장졸들은 모두 기뻐서 날뛸 때에, 승전군의 통수인 호동왕자는 쓰린 심사에 늘 혼자 속 으로 울었다.
이번 첩보와 함께 공주 죽은 사건이 고구려 서울까지 들어 가매, 왕은 승전을 축하하는 동시에 왕자의 심경을 짐작하 고 참사한 공주의 무덤에(왕후의 예에 따라서 능호(陵號)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만 일로써 왕자의 마음이 돌린 까닭이 없었다.
온갖 축하연 전첩연을 모두 물리치고 호동왕자는 늘 홀로 쓸쓸히 공주의 새 능전에 배회하였다.
전첩도 국토 확장도 모두 지금의 왕자에게는 쓸쓸할 뿐이 었다. 이렇듯 공주를 잃을 줄 미리 알았던들, 그는 애당초에 다른 방도를 취하였을 것이다.
낙랑은 고구려 강역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정벌군은 위의 당당히 고국에 개선하였다.
그러나 이 날 가장 빛나는 얼굴로서 선봉에 서서 들어와야 할 개선장군 호동왕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음침하고 쓸쓸한 데 고구려 백성들은 경이의 눈을 던졌다.
『대고구려 만만세하옵소서.』
『개선장군 만만세하옵소서.』
『호동왕자 만만세하옵소서.』
온 백성의 환호성을 듣는지 마는지 개선장군은 맥없이 백 마에 몸을 싣고 얼굴을 가슴에 깊이 묻고─ 마치 패전지장 과 같이 대궐로 들었다. 그리고 대궐에서 왕 이하 뭇 신하 들의 축하를 그냥 거절하고 왕자궁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비 로소 목을 놓아 울었다.
가을 해가 서쪽 벌판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한다.
바야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고구려의 세력이 한토(韓土)의 낙랑(樂浪)까지도 집어삼켜서, 어젯날까지도 낙랑 서울이던 땅이 오늘은 고구려의 일읍(一邑)으로 되었다. 그 새 읍의 교외 멀리 패수(浿水)를 굽어보는 아담한 잿등에 한 개 새로 운 무덤이 서 있다.
고귀한 사람의 무덤인 듯 그 앞에 아로새긴 돌이며 무덤의 높이가 보통 평민의 무덤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근처의 무 덤이 모두 한풍(漢風)을 띤 데 반하여 이 무덤만은 고구려 풍이었다.
황혼의 해를 등으로 받고 고요히 누워 있는 이 무덤 위로 깃을 찾아가는 뿐만 아니라 몇 마리의 까마귀가 울며 지나 간다.
황혼의 교외
황혼의 무덤
고요한 사위(四圍)였다.
황혼도 어느덧 대지로 사라지고 불그스름한 가을 달이 동 녘 하늘로 솟아 올랐다.
동녘 하늘에 솟아 오른 달의 그림자가 소 한 마리의 길이 쯤 높이 오른 때였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벌판에 나타났다.
말을 타고 이 잿등으로 향하여 달려 온다. 말은 쉽지 않은 명마로서 그 걸음걸이며 숨소리의 웅장함이 가히 용마라 할 듯하나, 말께 오른 주인은 기운이 하나도 없이 말이 달려 가는 대로 버려두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말은 이 길에 익은 듯 일직선으로 무덤을 향하여 달려 온다.
이윽고 무덤까지 달려온 말은 무덤 정면을 피하여 측면으 로 돌아 갔다. 그리고는 마치 다 왔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 리려는 듯이 발로써 땅을 긁으면서 한 번 우렁차게 울었다.
말 주인은 말에서 내렸다. 말을 그 곳에 버린 채 무덤의 정면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무덤 앞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 도 없이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있는 그의 두 눈에서는 눈 물만이 비오듯 하였다. 한 각 경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가야 그는 도로 말께로 돌아갔다.
다시 말께 오른다. 그런 뒤에는 다시 아까 온 길로 돌아간 다.
호동왕자(好童王子)였다.
낙랑공주의 무덤을 찾아 왔던 것이었다.
지금의 고구려에서는 낙랑을 정복하였다고 그 전승 축하 기분이 아직도 온 나라에 넘쳐 있다. 그러나 호동왕자의 가 슴은 쓰리고 아프고 적적할 따름이었다.
자기는 전승 장군─ 말하자면 이 승리를 가장 기꺼워하여 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낙랑 영토를 얻은 것과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공주를 잃어버린 왕자는 마음이 조금도 기쁘지를 않았다.
낙랑을 정벌한다는 것은 연래의 고구려의 숙망으로서, 그 숙망을 이루었으매 당연히 기꺼워해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늘어 나가는 국력은 이제도 연하여 남으로 정벌을 거듭하여 대고구려 제국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만 것을 모르는 왕자가 아니었으며, 이만 야심을 안 가 진 왕자가 아니었지만, 이번의 낙랑 정벌의 결과로서 생긴 공주의 참변은 왕자에게는 가슴 아팠다.
더구나 공주는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낙랑의 국보(國寶)인 나팔과 북을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낙랑 태수 최리의 노염을 사서 참사하지 않았는가? 북과 나팔을 깨뜨 리라고 지시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었던가? 낙랑을 정복하자 면 그 나라의 국보로 되어 있는 북과 나팔을 먼저 없이하여 야 하겠으므로 공주의 힘을 빌어서 그것을 깨뜨리지 않았는 가?
낙랑에 북과 나팔이 없어진 덕에 고구려는 손쉽게 낙랑을 정벌하였다. 말하자면 이번의 승리는 공주의 덕이라 할 수 도 있다. 공주는 오로지 왕자 자기에게 대한 애정 때문에 제 나라에 반역을 한 것이다.
이 크나큰 사랑에 대한 보수도 받지도 못하고 공주는 저 세상으로 갔구나.
온 고구려는 전승 축하 기분으로 들떠 있을 이때에, 그 전 승의 제일 공로자인 공주는 승리를 보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갔구나.
한 걸음만 더 빨리 왔더면 혹은 공주를 구해냈을는지도 모 를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왕자의 가슴은 더 아프고 쓰릴 따름 이었다.
새로이 묻은 이 무덤.
지금 이 무덤 아래서 썩어 들어갈 공주의 몸을 생각하면, 지난날 낙랑 궁중에서 자기 품 안에서 기뻐 떨던 공주가 연 상되어서 가슴 우벼내는 듯하였다.
공주여!
공주여!
부르나 대답 없는 무덤, 부르나 대답 없는 무덤 앞에 부르 면 무엇하리. 그러나 또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심사를 어 찌하리.
눈물만 한없이 솟을 뿐이다.
나날이 초췌하여 가는 호동왕자의 꼴은 아버님 왕께도 딱 하였다.
왕도 호동의 가슴 아파하는 까닭을 짐작한다. 왕자가 그 언제 낙랑 정벌군의 원수로 출정하려 할 때,
『네가 전승하면 상으로 무엇을 주랴?』
물으매 그때 왕자의 대답이,
『소신은 다른 소망이 없사옵니다. 낙랑공주로써 왕자비를 삼아 줍시사.』
하지 않았던가?
전승을 하면 당연히 데리고 올 줄 믿었던 공주를 잃어버리 고 우울한 얼굴로 마치 패군지장과 같이 개선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차차 음침해 가고 초췌해가며, 듣건대 간간 단신 말을 타고 대궐을 벗어나서 일량일씩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 오며 한다는 것을 보니, 이것은 정녕코 잃어버린 낙랑공주 에게 대한 상사병이었다.
이 호동왕자는 왕후의 소생이 아니었다. 왕후께는 아직 소 생이 없고 후궁의 몸에서 난 왕자였다.
왕후 아직 늘깆 않았으매 장래를 알 수 없지만, 왕으로서 는 이 왕자에게 큰 촉망을 두고 있었다. 그런 뜻을 노골적 으로 표시한 적은 없었지만, 왕의 내심으로는 왕비가 장래 에도 소생이 없기를 은근히 바라기까지 하였다.
보아하니 호동왕자는 아직 소년의 경을 면치 못했지만, 그 견식으로든 역량으로든 당당한 인물만 모여 있는 고구려 조 성에서도 가장 빼어나는 인물로서, 장래 이 나라를 부탁함 에 조금도 근심되는 점이 없는 소년이었다.
왕후께 장래 소생이 있다손 칠지라도 어떤 자식이 날는지 알 수 없는 바며, 비록 걸출이 난다 할지라도 호동보다 더 한 인물이 나리라고는 믿지 못할 바다.
그러면 도리어 왕후에게는 소생이 없고 이 호동왕자가 장 차 당신 승하 후에는 고구려 임금의 자리를 점령하는 것이 국책상으로 가장 바라는 바였다.
이만한 촉망을 두었으니만치 왕의 이 왕자에게 대한 사랑 은 큰 것이었고, 그 사랑이 크니만치 이즈음의 초췌한 모양 을 볼 때마다 왕은 매우 근심되었다.
하루는 왕은 조용히 왕자를 불렀다.
『야, 네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으면 다 말해 봐라.』
이 말에 왕자는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하였다.
『소신께 무슨 근심이 있사오리까?』
『아니로다. 근심이 없으면 왜 이렇듯 초췌하였겠느냐? 마 음에 있는 바를 다 말해라.』
왕자는 묵묵해 있었다. 묵묵해 있는 동안 그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나라님─』
『?』
『나라님의 총애하시는 소신이옵고 일국의 왕자이옵고 전 승 장군이옵고 이 백성이 사랑해 주는 소년 귀인으로서 소 신께 무슨 근심이 있사오리까? 다만─ 왜─ 왜 그러온지 ─』
흐르는 눈물 아래서 계속하는 말─ 『적적하옵니다. 가을 철이라 그러하온지…』
『좀 마음을 쾌활히 먹어 보면 어떠냐?』
『노력해 왔읍니다. 말을 달려 보았읍니다. 활을 쏘아 보았 읍니다. 사냥을 하여 보았읍니다. 그렇지만 나아지은 꺼질 듯할 뿐이로소이다.』
왕은 한참을 물끄러미 사랑하는 왕자의 얼굴을 굽어보았 다. 왕에게서도 커다란 탄식이 나왔다.
『나라님─』
『왜 그러느냐?』
『나라님, 소신께 수유를 주십소사.』
『수유? 얼마 동안이나?』
『영구히─』
왕은 눈을 크게 하였다.
『영구히. 나라님, 소신은 왜 그러온지 세상 만사가 귀찮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도나 닦으며 일생을 보내고 싶습니 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를 보내고는 내가 견딜 듯싶으냐?
나는 참는다 할지라도 고구려 백성들이 가만 있을 듯싶으 냐? 온 국민의 촉망이 네 어깨에 있는 줄 너도 알 것이 아 니냐?』
용맹한 왕자, 전승 장군으로서의 호동의 선망은 왕의 깨침 이 아닐지라도 자기도 잘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그 모든 영예가 왕자에게는 귀찮고 시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백성의 말썽까지 어떻게 모면한다 할지라도 장차 이 나 라를 누구에게 부탁하겠느냐? 아예 그런 생각은 말아라.』
부왕의 간곡한 말 가운데서도 가슴이 뜨끔하였다.
지금의 부왕의 말의 뜻은 장차 자기를 태자로 책봉을 하려 는 의향인 모양이다. 지금 왕자라는 이 자리로 귀찮거늘 태 자의 자리를 어떻게 감당하나?
왕은 이 왕자의 쓸쓸해 하는 심산을 얼마간이라도 위로하 고자 나라의 일등 여악(女樂)들을 뽑아서 왕자궁으로 보냈 다.
어느 날 호동왕자가 역시 의로운 심사로서 뜰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홀연히 여악의 울리는 요란한 음악의 소리가 났다.
왕자는 감짝 놀랐다. 왕자궁에는 여악이 없었거늘 웬 셈인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것을 보니 이 왕자궁 내에서 나는 것이 분명하였다. 시녀를 불려서 물 엉보고 왕자는 비로소 부왕이 자기를 위로코자 보낸 여악인 줄 알았다.
왕자는 부왕의 이 일이 고맙기는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구슬픈 심사와는 반대되는 흥성스런 음악이 도리어 왕자에 게는 귀찮았다.
잠시 앉아서 듣기 싫은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보았지만 종 내 참지 못하여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나가는 왕자.
왕자가 왕자궁 문 밖까지 나가매 음악은 싱거운 듯이 제 혼자 끊어져 버리고 버석거리는 낙엽 소리만 어수선하였다.
왕자궁을 나선 호동왕자는 차차 대궐 후원으로 돌아갔다.
낙엽으로 한 벌 덮인 후원─ 낙엽이 비오듯 하는 사위─ 성기 성기 줄기만 남은 늙은 나무들에는 가지 끝에 아직 떨어지지 못한 잎이 두세씩 달려 있을 뿐, 천하는 만추(晩 秋)에 잠겨 있었다. 그 성기 성기한 나무 줄기틈으로는 누런 가을 햇빛이 기운 없이 내리비치고 있다.
푹푹 발이 빠지는 낙엽을 밟으면서 왕자는 천천히 발을 뒷 동산으로 옮겼다.
동산 마루터기까지 올라가서 왕자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한 없이 서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지는 않는 서남 쪽에는 낙랑공주의 무덤이 있는 것이었다.
『아아, 아아!』
탄식과 함께 좌우 뺨을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무한히 왕자는 등산 마루터기에 서서 남쪽 하늘만 바라보았 다.
가을 해 바야흐로 떨어지려는 서남쪽─ 얼마 전까지도 낙 랑 영토, 그것이 지금은 자기네 영토가 되기는 되었다. 허나 이것을 자기네 영토를 만들기 위하여 공주는 저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닌가.
그것은 첫겨울 어떤 날이었다.
그 날도 후더덕 대궐을 벗어나서 왕자는 또한 말을 달려 공주의 무덤까지 가서 한참을 통곡을 한 뒤에 또한 맥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온 때는 벌써 밤이 깊었다.
첫겨울─ 낮에는 그래도 아직 그다지 춥달 수도 없지만 밤 이 들어서는 꽤 추워졌다. 그러나 추위조차도 감각치 못하 고 망연히 대궐로 돌아온 왕자는 말을 버리고 무거운 걸음 으로 왕자궁으로 향하였다.
향하여 가다가 그는 시야(視野) 한편 끝에 화광이 보이므로 문득 그리로 한 순간 가하였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곳은 내전 왕후궁이었다. 왕자는 의아 히 여겼다. 밤도 이미 깊고 그 위에 날씨도 꽤 서늘한데 왕 후궁 뜰에 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수상하였다.
왕자는 잠시 의아하여 그것을 바라보다가 왕후궁 쪽으로 발을 옮겼다.
거의 가까이 이르렀다. 보매 기괴한 일이었다.
왕후궁 뒷 모퉁이에 조그만 단을 하다 두었다. 단에는 제 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녀가 그 앞에서 무슨 축원을 드리고 있고, 그 위에 더 수상한 것은 이 추운 밤에 왕후까 지 시녀 몇을 데리고 나와서 그 앞에 꿇어 앉아 있는 것이 었다.
호기심이라기보다도 의심이 덜컥 난 왕자는 발소리를 감추 어 가지고 더 가까이 갔다. 가까이 가매 차차 명료히 들리 는 무녀의 기원성─
『호동이에게 천살을 내려 주십사.』
다른 모든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 한마디만이 명료히 들 렸다.
왕자는 가슴이 덜컥 하였다. 그는 황황히 도로 발소리를 감추어 가지고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맥나고 괘상히 떨리는 가슴.
왕자궁으로 돌아온 그는 궁인들을 모두 멀리 물리쳤다. 물 리친 뒤에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였다.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왕후는 자기를 미워한다. 지금 국왕 이하 온 국민의 신망 이 모두 자기에게 있는지라, 왕후는 이것을 꺼리는 것이었 다.
아직도 왕후는 소생이 없다. 그러나 늙지 않은 몸이매 장 래에도 그냥 소생이 없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바다. 그러 나 부왕 이하 온 국민의 신망이 죄 자기에게 몰려 있는 만 치, 어느날 자기가 이 나라의 태자로 책봉이 될는지 예측할 수 없다. 이번 낙랑 정복 이후로 조야의 신망은 더욱 두터 워져서 태자 책봉의 여론도 꽤 높이 올라 있는 모양이다.
그 위에 부왕도 나날이 자기를 더 어여삐 보니까 이 일이 언제 구체화될지 그것은 단지 시일 문제일 뿐이다.
이런 가운데서 왕후는 당신의 입장을 위태롭게 여기고 겸 하여 장래 당신 몸으로 태자의 위를 호동에게 빼앗길까 두 려워하며, 지금 그 방자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태자의 위 따위는 부럽지 않다.
일찌기 탐내어 본 일도 없었다. 이전 낙랑공주가 아직 살 아 있고 그 낙랑공주를 왕자비로 맞을 공상을 할 때에도 한 번도 태자의 위를 동경하여 보지를 않았다. 이 나라에 충성 된 신자로서 공주와 함께 부귀와 영화의 일생을 보내는 것 이 최대 희망이었지, 그 이상은 촌보도 나서 본 일이 없었 다.
공주를 잃은 뒤에는 지금은 단지 죽어지지 않으니 그냥 살 아 가는 것이지 살기조차 귀찮은 지경이다. 만약 죽어지기 만 하면 자기는 달갑게 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거늘 왕후는 왜 이다지도 야속한 행동을 하는가. 왕후 께 대하여 아무 적의(敵意)도 품고 있지 않은 자기를 왜 적 으로 여기고 죽기를 축수하는가.
호동은 왕후의 심사가 너무도 야속하여 통곡하였다. 자기 의 죽음을 축수하는 것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런 비열한 행 동을 하는 것이 딱하여서였다.
그로부터 수일 후, 호동은 어전에 불리어서 태자로 책봉할 내의를 들었다.
그때 호동은 단연히 이를 거절하였다.
『나라님, 소신께는 과한 짐이올시다. 어리석은 소신이 어 찌 그런 중임에 견디리까? 굳이 말아 주시옵소서』
『사양치 말라. 너밖에는 후사도 없거니와 그 중임에 견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아니옵니다. 몇 십 몇 백 년이고 더 기다립소서. 나라님 천추만세에 유언으로 책봉을 하셔도 늦지 않을까 하옵니 다.』
이리하여 아직 부왕 재위 중에는 황후께 태자가 탄생될는 지도 알 수 없다는 뜻는 암시하였다.
왕도 왕자의 적적한 심경을 얼마만치라도 낫게 하고자 이 길보를 들려 주었지만, 당자가 굳이 사양하는 이상은 더 말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이만치 하여 유야무야 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 문제는 왕과 왕자의 새에서는 유야무야 중에 사라져 버 렸다.
그러나 이 소문은 대궐과 조정에 쭉 퍼졌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당연한 문제로 여겼지만 왕후에게는 청천벽력이 었다.
신령께 축원하여 호동왕자의 생명을 없이하려던 왕후는, 인젠 그런 유유한 방책을 쓸 수가 없었다. 문제는 목첩에 임하였다. 빨리 어떻게든 해결을 짓지 않으면 호동이 태자 로 책봉이 될는지도 알 수 없다. 호동만 태자로 책봉이 되 면 호동의 생모 후궁에게는 영화가 이를는지 알 수 없지만 , 당신의 위라는 것은 허위에 지나지 못한다. 지금 아무리 왕후라 할지라도 태자의 생모가 못되는 당신은 장차 태자가 등극할 때는 귀찮은 존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당신 하나이면 그도 또한 참을 수 있으려니와 만약 장가 당신 몸에서 왕자까지 탄생되고 보면 어떻게 될까?
당신 몸에서 왕자가 탄생되면 왕의 적출 장자로서 당당히 장래 이 나라의 국왕이 될 인물이다. 그러나 탄생되기 전에 호동이 태자로 책봉되면 장래 당신 탄생의 왕자는 왕의 서 자 때문에 그 위를 빼앗길 것이고 그대로 대대로 몇 십대 몇 백대를 내려갈지라도 가련한 존재로 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에 왕후는 이 일을 그냥 둘 수가 없었 다.
그러나 어찌할까?
당신은 아직도 왕자를 탄생치 못하였다.
탄생치 했을 뿐더러 수태치도 못했다.
아직 수태도 안된 장래 왕자를 위하여, 호동을 태자로 책 봉치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위에 군신간의 신망이 그만 치 두터운 호동을 핑계 없이 태자로 책봉치 말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찌하나? 이제는 천년세월하고 신령에 축원이나 하다가는 대사를 그르칠 염려가 있다. 좀더 바삐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왕후는 어떤 조용한 기회를 타서 왕께 호동왕자 를 참소를 하였다.
『나라님!』
왕의 앞에 머리를 푹 수그리고 울기만 하는 왕후를 왕는 달랬다.
『나라님!』
『왜 그러오?』
『나라님, 신을 죽여 주십사.』
『후는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나리님께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 죽여 주십사.』
왕은 의아히 여겨서 그냥 그 연유를 따져 물었다.
여기 대해서 왕후는 매우 주저하면서 품속에서 한 장 글월 을 꺼내어 바쳤다.
그것은 위아래가 모두 찢기운 중에 단 한 구절만 아직 남 아 있는 편지의 조각이었다.
『이루지 못할 소망을 그래도 단념치 못하고 못내 그리워 하는 호동의 아픈 마음은…』
위에도 없고 아래도 없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 필적은 틀 림이 없는 호동왕자의 것이었다.
『나라님, 호동이 신께 이런 편지를 보냈읍니다. 이것이 모 두 신의 미덕에서 나온 일이오니 신을 죽여 주십사.』
왕은 대답 없이 그 글만 보고 있었다. 용안이 완연히 불쾌 하였다.
『이것을 나라님께 아뢰자니 나라님께서는 호동을 믿으시 는 터라, 도리어 신을 의심하실 것이옵고─ 이 편지를 받은 뒤 반삭을 혼자서 번민하였읍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 없는 왕. 불쾌한 표정은 점점 더 농후 하여 갔다.
믿으려니 믿기워지지 않는 일인 동시에, 믿지 않으려니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 달필의 필적은 틀림이 없는 호 동의 것으로서, 위필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호동의 인격 으로서 능히 이런 일을 할까?
이튿날 왕자는 부왕의 앞에 불리웠다.
『야─』
『네이?』
『왕후는 네게 어떻게 되는 분이냐?』
『모후(母后)되시는 분이옵니다.』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왕의 너무도 엄한 용안에 호동은 깊이 의아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껏 자기에게 이 렇듯 엄한 표정을 보인 일이 없는 부왕이었거늘.
왕은 호동의 대답을 듣고 휑하니 무슨 종잇 조각을 하나 호동의 앞으로 던졌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들어 펴 보니, 그것은 자기가 낙랑공 주를 너무도 사모하는나머지에 종잇 조각에 그 심사를 그적 거리다가 찢어 버린 부스러기였다.
호동의 얼굴이 화끈하였다. 부왕께 자기의 심경을 고백하 려 하였다.
그러나 영리한 왕자는 즉시 다른 생각이 나서 그것을 중지 하였다.
왕은 아까 자기에게 왕후의 일을 물었다. 그런 뒤에 이 종 이를 자기에게 보였다.
그러면 이 종이는 필시 앙후와 무슨 연결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호동은 이 편지의 트릭을 통찰하였다.
동시에 그 어떤 겨울밤, 자기에게 천살을 내려 달라고 신명 께 빌던 왕후의 모양이 서언히 보였다.
왕후는 신명께 자기를 죽여 달라 빌었지만, 이것이 성사가 되지 않으므로 방법을 돌려서 왕으로 하여금 자기를 죽이도 록 하고자 계획함인 모양이었다.
이 이면의 전폭을 통찰하자 왕자는 그 자리에 넙적 엎드렸 다.
『나라님, 소신 망령이 나와 궂을 죄를 지었읍니다.』
흐르는 눈물, 떨리는 가슴으로서 부왕께 이렇게 복주를 하 였다.
그래도 반신반의로 왕자를 힐난하던 왕은 왕자의 복죄를 보고, 그만 기운이 빠진 모양이었다. 잠시를 뚫어져라 하고 왕자를 굽어보았다. 그런 뒤에 노염을 억누르는 모양으로 한 마디씩 한 마디씩 숨찬 소리로
『괘씸한 놈 같으니 네 공적을 생각해서 이번만은 목숨은 부지되나─』
이렇기 말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냉큼 우리로 이 대궐에서 나가거라!』 호령을 하였다.
왕자는 푹 가슴에 머리를 묻고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므로 돌아보니 수년 간을 충실히 왕자에게 시중들던 무장 하나이 따라 온다.
왕자는 모른 체하고 그냥 가려 하였다.
그러나 무장이 뒤따라 와서 왕자의 맞은 편까지 와서 섰 다.
『전하!』
『……」
『전하! 왜 전하의 청백을 변명을 안합시오?』
눈물을 죽죽 흘린다.
『그 뜻은 고마우나 내 청백을 변명하자면, 자연히 모후의 불미를 밝혀야 할 것. 인신되고 인자된 도리로써 못할 노릇 이오.』
『그렇지만 전하, 억분하옵니다.』
왕자는 그 말에 응하지도 않고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흐리던 일기가 저녁때부터 근래 쉽지 않은 모진 눈보라를 치기 시작하였다.
바람 소리 귀곡성같이 요란하고, 완강한 대궐의 문들도 바 람에 소란히 덜컥거리는 눈보라의 밤이었다.
충실한 무장은 밤중에 깨어서 왕자의 거처하는 곳이 춥지 나 않은가 하고 몰래 가서 엿보았다. 그러나 이만 때쯤은 호걸다운 놀라운 코고는 소리가 나든가, 그렇지 않으면 불 을 밝히고 그냥 앉아 있든가 해야 할 왕자의 거실은 캄캄할 뿐아니라 조용키 짝이 없다.
무장은 우들우들 떨면서 툇마루에 한참 동안을 방안의 동 정을 엿들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여전히 인기척도 없었다.
드디어 결심을 하고 들어가서 불을 밝히고 보매, 왕자는 그 방에 없을 뿐더러 방안이 정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담벽 에 걸리어 있던 낙랑공주의 족자까지도 없어진 것으로 보아 서 왕자가 이 대궐을 벗어난 것이 분명하였다.
무장은 달려나가 보았다. 왕자의 애마(愛馬)까지도 없어졌 다.
그러나 무서운 눈보라에 싸여서 왕자의 간 자취는 알아볼 바도 없다.
대궐을 벗어난 왕자는 품에 사랑하는 공주의 족자를 품은 채로 눈보라를 무릎쓰고 애마를 달려서 공주의 무덤으로 향 하였다.
세상 만사가 귀찮은 가운데서 그래도 부왕의 애정뿐은 저 버릴 수가 없어서 살기 싫은 목숨을 그래도 부지하여 오던 왕자는, 지금 부왕의 의심까지 산 이상에는 더 살아갈 필요 며 의무도 없었다.
그럴진대 사랑하는 공주의 있는 나라로 자기도 가서 이생 에서 못다한 재미를 내생에서라도 보기 위하여 최후의 길을 눈보라를 쓰면서 낙랑을 향하여 말을 달리는 것이었다.
일양내복.
긴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따스러운 양춘이 이르렀다.
북극 고구려에 두껍게 쌓였던 눈도 봄의 따스한 볕에 녹아 서 그림자가 엷어갔다.
그 두껍던 눈이 차차 엷어감을 따라서 눈 아래 감추였던 만물이 세상의 표면에 나타날 때에, 낙랑공주의 무덤 위에 한 개 새로운 시체가 봄의 대지 위에 나타났다. 애마(愛馬) 홀로이 돌아오고, 그 주인은 종적이 사라졌던 호동왕자의 주검이었다.
수일 후 온 고구려 백성의 조상 아래 이 왕자의 시체는 공 주와 합장을 하였다.
해로(偕老)는 못하였지만 동혈(同穴)은 한 왕자와 공주의 무덤에서 사시 고구려 백성의 애모의 향 연기가 끊어지는 날이 없었다.
(一九三六年 十月 <野談> 所載 「崔理의 딸」 改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