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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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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王의諱ᄂᆞᆫ法敏이오在位二十年이라統一前七年은三國記에見ᄒᆞ다

문무왕의 휘(諱)는 법민(法敏)이고, 재위 기간은 20년이었다.【통일 전 7년은 삼국기(三國記)에 보인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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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文武王八年唐高宗總章二年○日皇天智二年○西歷紀元後六百六十九年

신라 문무왕 8년【당(唐) 고종(高宗) 총장(總章) 2년 ○ 일황 천지(天智) 2년 ○ 서력 기원 669년】


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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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年唐高宗咸亨元年○日皇天智三年○西歷紀元後六百七十年이라時에高勾麗劍牟岑이故國을興復고ᄌᆞᄒᆞ야唐의官長을殺ᄒᆞ고故王外孫安勝을漢城에迎立ᄒᆞ고新羅에遣使ᄒᆞ야內附ᄒᆞ기ᄅᆞᆯ請ᄒᆞ거ᄂᆞᆯ王이高勾麗王을冊封ᄒᆞ고西方金馬渚今益山郡에處케ᄒᆞ엿더니唐帝ㅣ遣將ᄒᆞ야安勝을攻코ᄌᆞᄒᆞ니安勝이恐ᄒᆞ야其地ᄅᆞᆯ棄ᄒᆞ고來歸ᄒᆞᄂᆞᆫ지라羅王이다시報德王을封ᄒᆞ고外妹로ᄡᅧ妻ᄒᆞ다

문무왕 9년【당 고종 함형(咸亨) 원년 ○ 일황 천지 3년 ○ 서력 기원 670년】이었다.

이때에 고구려(高句麗) 검모잠(劍牟岑)이 옛 나라를 부흥하고자 당(唐)나라의 관장(官長)을 살해하고, 옛 왕의 외손 안승(安勝)을 한성(漢城)에서 맞이하여 옹립하였다. 신라(新羅)에 사신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니, 왕이 안승을 고구려 왕에 책봉하고 서쪽 지역의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군(益山郡)】에 거처하게 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장수를 보내 안승을 공격하고자 하니 안승이 두려워하여 그 땅을 버리고 와서 귀순하였다. 신라 왕이 다시 보덕왕(報德王)에 봉하고 누이의 딸과 혼인시켰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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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唐高宗咸亨二年○日皇天智四年○西歷紀元後六百七十一年이라初에王이百濟의土地ᄅᆞᆯ取ᄒᆞᆫᄃᆡ唐總管薛仁貴ㅣ來攻코ᄌᆞᄒᆞ야新羅虛實을偵探ᄒᆞ거ᄂᆞᆯ王이ᄯᅩ諸將을分遣ᄒᆞ야百濟의諸城을擊破ᄒᆞ엿더니薛仁貴ㅣ遣兵救援ᄒᆞᄂᆞᆫ지라이에王이將軍竹旨等을命ᄒᆞ야唐兵과石城에셔戰ᄒᆞ야五千三百餘級을斬ᄒᆞ고百濟의將軍二人을獲ᄒᆞ니自此로百濟餘衆이悉平ᄒᆞ니라旣而오唐將高侃等이軍士四萬을率ᄒᆞ고高句麗餘衆을襲擊ᄒᆞ야諸城을連克ᄒᆞ고平壤에至ᄒᆞ거ᄂᆞᆯ王이將軍義福等으로ᄒᆞ여곰麗兵과合ᄒᆞ야逆戰ᄒᆞ다가敗ᄒᆞ야太監阿珍舍ㅣ死之ᄒᆞ다

문무왕 10년【당 고종 함형 2년 ○ 일황 천지 4년 ○ 서력 기원 671년】이었다.

처음에 왕이 백제(百濟)의 영토를 취하였는데, 당(唐)나라 총관(總管) 설인귀(薛仁貴)가 와서 공격하고자 신라(新羅)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였다. 왕이 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백제의 여러 성을 격파하였는데, 설인귀가 병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 이에 왕이 장군 죽지(竹旨) 등에게 명하여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우도록 하였는데 5천 3백여 급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2명을 붙잡으니, 이때부터 백제의 남은 무리가 모두 평정되었다. 얼마 뒤에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 등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의 남은 무리를 습격하여 많은 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이때 왕이 장군 의복(義福) 등에게 고구려 병사와 연합하여 맞서 싸우도록 하였으나 패하여 태감(太監) 아진사(阿珍舍)가 죽었다.


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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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年唐高宗咸亨四年○日皇天武元年○西歷紀元後六百七十三年이라太大舒發翰金庾信이卒ᄒᆞ니年이七十九라王이크게震悼ᄒᆞ고有司ᄅᆞᆯ命ᄒᆞ야立碑記功ᄒᆞ다初에庾信이疾篤ᄒᆞ거ᄂᆞᆯ王이親臨存問ᄒᆞ고泣曰公이만일不諱ᄒᆞ면人民과社稷에奈何오ᄒᆞᆫᄃᆡ對曰今에三韓이統一ᄒᆞ고百姓이異心이無ᄒᆞ니可謂少康이라ᄒᆞᆯ지라然이나繼統ᄒᆞᄂᆞᆫ人君이ᄆᆡ양守成ᄒᆞᆫ者ㅣ鮮ᄒᆞ니願컨ᄃᆡ大王은君子ᄅᆞᆯ親ᄒᆞ고小人을遠ᄒᆞ야朝廷과人民이相安ᄒᆞ면臣이死ᄒᆞᆯ지라도無憾이로소이다ᄒᆞ더라妻金氏ᄂᆞᆫ太宗王의女라子五人이有ᄒᆞ더니次子元述이向者平壤之役에軍敗ᄒᆞ야自殺코ᄌᆞᄒᆞ다가其佐淡凌의言을聽ᄒᆞ고不死ᄒᆞ거ᄂᆞᆯ庾信이ᄡᅥᄒᆞ되家訓을負ᄒᆞ엿다ᄒᆞ고곳王ᄭᅴ奏ᄒᆞ야斬코ᄌᆞᄒᆞ니元述이慙懼ᄒᆞ야野에遁ᄒᆞ엿다가至是ᄒᆞ야其父의卒ᄒᆞᆷ을聞ᄒᆞ고奔喪ᄒᆞ야母ᄅᆞᆯ求見ᄒᆞᆫᄃᆡ母ㅣ曰爾가先君의게得罪ᄒᆞ엿스니我ㅣ엇지相見ᄒᆞ리오ᄒᆞᄂᆞᆫ지라元述이이에歎息曰吾ㅣ淡凌의誤ᄒᆞᆫᄇᆡ되엿다ᄒᆞ고太白山에逃隱ᄒᆞ다가後에唐兵이買蘇川城을攻ᄒᆞ거ᄂᆞᆯ元述이前恥ᄅᆞᆯ雪코ᄌᆞᄒᆞ야赴敵力戰ᄒᆞ야功勣을建ᄒᆞ나其父母의게不容ᄒᆞᆷ으로ᄡᅥ終身不仕ᄒᆞ고庾信의妻ᄂᆞᆫ其後에尼가되거ᄂᆞᆯ聖德王이夫人을封ᄒᆞ고每歲에租一千石을賜ᄒᆞ다○新曆을用ᄒᆞ다初에奈麻德이唐에入ᄒᆞ야曆術을學ᄒᆞ고至是ᄒᆞ야回國ᄒᆞ거ᄂᆞᆯ王이其法을用ᄒᆞ다○王이宮內에池ᄅᆞᆯ穿ᄒᆞ고山을造ᄒᆞ야花卉ᄅᆞᆯ植ᄒᆞ고珍禽奇獸ᄅᆞᆯ養ᄒᆞ더라○王이靈廟寺前에셔閱兵ᄒᆞᆯᄉᆡ阿飡薛秀眞이六陣兵法을進ᄒᆞ다○銅印을新鑄ᄒᆞ야百司와밋州郡에頒給ᄒᆞ다

문무왕 12년【당 고종 함형 4년 ○ 일황 천무(天武) 원년 ○ 서력 기원 673년】이었다.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관직명】 김유신(金庾信)이 죽으니, 나이가 79세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처음 김유신이 병세가 위독하자 왕이 직접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만약 세상을 떠나면 백성과 사직(社稷)은 어찌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에게 다른 마음이 없으니, 조금 편안하다고[少康]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통을 계승한 임금이 매양 수성(守成)하는 자가 드무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군자(君子)를 가까이하시고 소인(小人)을 멀리하시어 조정과 백성이 서로 편안하면 신이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부인 김씨(金氏)는 태종왕(太宗王)의 딸이다. 아들 5명이 있는데, 둘째 김원술(金元述)이 지난번 평양(平壤) 전투에서 패하여 자살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보좌 담릉(淡凌)의 말을 듣고 죽지 않았다. 이에 김유신이 가훈(家訓)을 저버렸다고 하여 곧 왕에게 아뢰어 목을 베고자 하니, 김원술이 잠시 두려워하여 밖으로 도망가 숨어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부친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뵙기를 청하였는데 모친이 말하기를, “네가 선친에게 죄를 지었으니, 내가 어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김원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담릉으로 인해 잘못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고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도망쳐 숨었다. 이후에 당(唐)나라 병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였을 때에 김원술이 이전의 수치를 갚고자 적에게 달려들어 힘껏 싸워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부모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고 하여 종신토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유신의 부인은 이후에 비구니가 되었는데, 성덕왕(聖德王)이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매년 조(租) 1천 석(石)을 내렸다.

○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였다. 처음에 나마(奈麻) 덕복(德福)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역법을 배우고 이때에 이르러서 귀국하였으므로 왕이 그 역법을 사용하였다.

○ 왕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고 진기하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674).

○ 왕이 영묘사(靈廟寺) 앞에서 병사들의 훈련을 관람할 때에 아찬(阿飡)【관등명】 설수진(薛秀眞)이 육진 병법(六陳兵法)을 선보였다(674).

○ 동(銅)으로 만든 도장을 새롭게 주조하여 모든 관사(官司)와 주군(州郡)에 나눠 주었다(675).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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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唐高宗儀鳳元年○日皇天武四年○西歷紀元後六百七十六年이라冬十一月에沙飡施得이唐將薛仁貴ᄅᆞᆯ所夫里州今扶에셔戰克ᄒᆞ다先是에王이高句麗의餘衆을納ᄒᆞ고ᄯᅩ百濟故地ᄅᆞᆯ據ᄒᆞ엿더니唐帝ㅣ大怒ᄒᆞ야王의弟仁問으로ᄡᅧ鷄林大都督을拜ᄒᆞ고劉仁軌로ᄡᅥ鷄林道大摠管을拜ᄒᆞ야新羅ᄅᆞᆯ攻ᄒᆞ라ᄒᆞᆯᄉᆡ時에仁問이唐에在ᄒᆞ더니唐帝ㅣ仁問을命ᄒᆞ야歸國ᄒᆞ라ᄒᆞ고仁軌ㅣ몬져七重城今積을進拔ᄒᆞ거ᄂᆞᆯ王이遣使請和ᄒᆞᆫᄃᆡ唐이곳罷兵ᄒᆞ고仁問을召還ᄒᆞ야臨海郡公을拜ᄒᆞ니라然이나王은더욱百濟故地ᄅᆞᆯ取ᄒᆞ고高句麗南境ᄭᆞ지州郡을置ᄒᆞ니唐兵이契丹과靺鞨을合ᄒᆞ야屢次侵犯ᄒᆞ되王이다勝捷ᄒᆞ더니至是ᄒᆞ야施得이ᄯᅩ仁貴로더부러二十餘戰에다勝捷ᄒᆞ고四千餘級을斬ᄒᆞ니自此로唐兵이敢히復至치못ᄒᆞ더라○靺鞨이阿達城을寇ᄒᆞ거ᄂᆞᆯ城主素那ㅣ戰死ᄒᆞ다素那ᄂᆞᆫ白城今安人이니其父沈那ㅣ膂力이過人ᄒᆞ야百濟人이飛將軍이라指目ᄒᆞ더니素那ㅣᄯᅩᄒᆞᆫ雄豪ᄒᆞ야父風이有ᄒᆞ거ᄂᆞᆯ王이素那ᄅᆞᆯ遣ᄒᆞ야阿達城을守ᄒᆞ라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靺鞨이猝然히入城ᄒᆞ거ᄂᆞᆯ素那ㅣ奮劍大呼ᄒᆞ야敵陣을突擊ᄒᆞ다가衆矢가叢集ᄒᆞ야死ᄒᆞᄂᆞᆫ지라友人이其妻의게弔ᄒᆞᆫᄃᆡ妻ㅣ哭曰亡人이常言ᄒᆞ되大丈夫ㅣ王事에死ᄒᆞᆷ이맛당ᄒᆞ다ᄒᆞ더니今에其志ᄅᆞᆯ成ᄒᆞᆷ이라ᄒᆞ거ᄂᆞᆯ王이聞ᄒᆞ고流涕ᄒᆞ더라○僧信惠와義安으로ᄡᅧ政官大書省을拜ᄒᆞ고ᄯᅩ僧義相을命ᄒᆞ야浮石寺ᄅᆞᆯ太白山今榮川地에創建ᄒᆞ다

문무왕 15년【당 고종 의봉(儀鳳) 원년 ○ 일황 천무 4년 ○ 서력 기원 676년】이었다.

겨울 11월에 사찬(沙飡)【관등명】 시득(施得)이 당(唐)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소부리주(所夫里州)【지금의 부여(扶餘)】에서 싸워 이겼다. 이에 앞서 왕이 고구려(高句麗)의 남은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百濟)의 옛 땅을 점거하였다. 이에 당나라 황제가 대로하여 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계림 대도독(鷄林大都督)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大摠管)에 임명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김인문이 당나라에 있었는데, 당나라 황제가 김인문에게 명령하여 귀국하도록 하고, 유인궤가 먼저 칠중성(七重城)【지금의 적성(積城)】에 나아가 빼앗았다. 왕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당나라가 곧 병사를 거두고 김인문을 소환하여 임해군공(臨海郡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왕은 더욱 백제의 옛 땅을 취하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까지 주군(州郡)을 설치하니 당나라가 거란[契丹], 말갈(靺鞨)과 연합하여 여러 차례 침범하였으나 왕이 모두 승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시득이 또다시 설인귀와 함께 20여 차례 싸워서 모두 승리하여 4천여 급의 머리를 베니, 이때부터 당나라 병사가 감히 다시 오지 못하였다(675).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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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年唐高宗開耀元年○日皇天武九年○西歷紀元後六百八十一年이라私七月에王이崩ᄒᆞ고太子政明이立ᄒᆞ야遺詔로ᄡᅥ東海口大石上에葬ᄒᆞ다

문무왕 20년【당 고종 개요(開耀) 원년 ○ 일황 천무 9년 ○ 서력 기원 681년】이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정명(政明)이 즉위하여, 남긴 조서[詔旨]에 따라 동쪽 바다 입구 큰 바위 위에 안장하였다.


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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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文王의諱ᄂᆞᆫ政明이오字ᄂᆞᆫ日炤니在位十一年이라

신문왕의 휘(諱)는 정명(政明)이고, 자(字)는 일소(日炤)이니,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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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唐中宗嗣聖元年○日皇天武十二年○西歷紀元後六百八十四年이라報德王安勝의族子將軍大文이金馬渚今益ᄅᆞᆯ據ᄒᆞ야故國을恢復고ᄌᆞᄒᆞ거ᄂᆞᆯ王이곳討平ᄒᆞ고其地로ᄡᅧ金馬郡을삼다○薛聰을擢ᄒᆞ야高秩官을拜ᄒᆞ다聰의字ᄂᆞᆫ聰智니父元曉ㅣ일즉이沙門이되엿다가旣而오退俗ᄒᆞ야瑤石宮寡夫人을娶ᄒᆞ야聰을生ᄒᆞ니聰이明銳博學ᄒᆞ고能히方言으로ᄡᅧ九經意義ᄅᆞᆯ解ᄒᆞ야後生을訓導ᄒᆞ며ᄯᅩ俚語로ᄡᅧ吏讀ᄅᆞᆯ製ᄒᆞ야官府文書에行ᄒᆞ니라○秋七月에王이崩ᄒᆞ고太子理洪이立ᄒᆞ다

신문왕 3년【당 중종(中宗) 사성(嗣聖) 원년 ○ 일황 천무 12년 ○ 서력 기원 684년】이었다.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의 친족 아들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益山)】를 점거하여 옛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왕이 곧 평정하고 그 지역을 금마군으로 삼았다.

○ 설총(薛聰)을 발탁하여 고질관(高秩官)으로 삼았다. 설총의 자(字)는 총지(聰智)이니, 부친 원효(元曉)가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환속(還俗)하여 요석궁(瑤石宮) 과부인(寡夫人)과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다. 설총이 총명하고 박학하여 능히 방언(方言)으로써 구경(九經)의 의미를 해석하여 생도들을 훈도하며, 또한 속언[俚語]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서 관부의 문서에 사용하였다.

○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이홍(理洪)이 즉위하였다(692).


효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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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昭王의諱ᄂᆞᆫ理洪이니在位十年이라

효소왕의 휘(諱)는 이홍(理洪)이니, 재위 기간은 10년이었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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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唐中宗嗣聖十九年○日皇文武六年○西歷紀元後七百二年이라秋七月에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國人이王의母弟隆基ᄅᆞᆯ立ᄒᆞ다

효소왕 10년【당 중종 사성 19년 ○ 일황 문무(文武) 6년 ○ 서력 기원 702년】이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이 왕의 아우 융기(隆基)를 옹립하였다.


성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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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德王의諱ᄂᆞᆫ隆基니後에改名ᄒᆞ야興光이라ᄒᆞ고在位三十五年이라

성덕왕의 휘(諱)는 융기(隆基)이니 이후에 이름을 고쳐서 흥광(興光)이라 하였고, 재위 기간은 35년이었다.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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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唐玄宗開元五年○日皇元正三年○西歷紀元後七百十七年이라秋九月에太監守忠이唐으로죳ᄎᆞ回國ᄒᆞ야文宣王과밋十哲과七十二弟子의畫像을上ᄒᆞ거ᄂᆞᆯ命ᄒᆞ야太學에置ᄒᆞ다

성덕왕 15년【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5년 ○ 일황 원정(元正) 3년 ○ 서력 기원 717년】이었다.

가을 9월에 태감(太監) 김수충(金守忠)이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공자[文宣王]와 십철(十哲), 72제자(弟子)의 화상(畵像)을 바치니, 명하여 태학에 모시도록 하였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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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九年唐玄宗開元十九年○日皇聖武八年○西歷紀元後七百三十一年이라日本이兵船三百艘ᄅᆞᆯ遣ᄒᆞ야東邊을侵伐ᄒᆞ거ᄂᆞᆯ王이發兵擊破ᄒᆞ다

성덕왕 29년【당 현종 개원 19년 ○ 일황 성무(聖武) 8년 ○ 서력 기원 731년】이었다.

일본(日本)이 병선 3백 척을 보내 동쪽 경계를 침범하니, 왕이 병사를 보내 격파하였다.


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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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一年唐玄宗開元二十一年○日皇聖武十年○西歷紀元後七百三十三年이라王이金允中을遣ᄒᆞ야渤海國을伐ᄒᆞ다가不克ᄒᆞ고還ᄒᆞ니渤海ᄂᆞᆫ本粟末靺鞨이오高句麗의別種이라高句麗ㅣ이믜滅ᄒᆞᄆᆡ大祚榮이自立ᄒᆞ야震國王이되다先是唐武后時에乞乞仲象이靺鞨酋長乞四比羽와밋高句麗遺種으로더브러東奔ᄒᆞ야太白山東北奧婁河ᄅᆞᆯ據有ᄒᆞ니武后ㅣ仲象을封ᄒᆞ야震國公을ᄉᆞᆷ앗더니仲象이死ᄒᆞ고子大祚榮이自立爲王ᄒᆞ거ᄂᆞᆯ唐玄宗開元元年에冊立ᄒᆞ야渤海郡王을ᄉᆞᆷ다이에北扶餘沃沮等地ᄅᆞᆯ盡得ᄒᆞ고王이된지十二年에祚榮이唐의封爵을受ᄒᆞ야渤海國境을開拓ᄒᆞ더니至是ᄒᆞ야祚榮이死ᄒᆞ고子武藝ㅣ立ᄒᆞ야더욱其地ᄅᆞᆯ拓大ᄒᆞ고唐의登州ᄅᆞᆯ侵伐ᄒᆞᄂᆞᆫ지라唐帝ㅣ이에新羅王의게傳檄ᄒᆞ야其南鄙ᄅᆞᆯ擊ᄒᆞ라ᄒᆞ거ᄂᆞᆯ王이允中等四將으로ᄒᆞ여곰唐軍을會合ᄒᆞ야往攻ᄒᆞᆯᄉᆡ會에大雪이下ᄒᆞ야山路가阻隘ᄒᆞ고士卒의死者ㅣ過半이라이에引還ᄒᆞ다渤海王祚榮이開國ᄒᆞᆫ以來로六王을歷ᄒᆞ야宣王野勃이立ᄒᆞ니卽祚榮의弟오年이七十이러라諸生을唐에遣ᄒᆞ야古今制度ᄅᆞᆯ學習ᄒᆞ고其地에五京十五府六十二州ᄅᆞᆯ寘ᄒᆞᆯᄉᆡ肅愼故地로ᄡᅥ上京을ᄉᆞᆷ으니此ᄂᆞᆫ곳龍井府오卽大祚榮의樹柵處니白頭山東南東牟山下에在ᄒᆞ고其南은中京이니曰顯德府오穢貊의故地ᄂᆞᆫ東京이니曰龍原府오沃沮故地ᄂᆞᆫ南京이니曰南海府오高句麗故地ᄂᆞᆫ西京이니曰鴨綠府라府가各其州ᄅᆞᆯ領ᄒᆞ야新羅로더브러浿江과鐵嶺으로ᄡᅥ地界ᄅᆞᆯ劃ᄒᆞ야海東의盛國이되니라

성덕왕 31년【당 현종 개원 21년 ○ 일황 성무 10년 ○ 서력 기원 733년】이었다.

왕이 김윤중(金允中)을 보내 발해국(渤海國)을 정벌토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고 고구려(高句麗)의 다른 종족이다. 고구려가 이미 멸망하였는데, 대조영(大祚榮)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국왕(震國王)이 되었다. 이에 앞서 당(唐)나라 무후(武后) 때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태백산(太白山) 동북쪽 오루하(奧婁河)를 차지하였다. 이에 무후가 걸걸중상을 봉하여 진국공(震國公)으로 삼았는데, 걸걸중상이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스스로 일어나서 왕이 되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원년(713)에 책립(冊立)하여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이에 북부여(北扶餘), 옥저(沃沮) 등의 땅을 모두 차지하고 왕이 된 지 12년에 대조영이 당나라의 봉작(封爵)을 받아서 발해의 국경을 개척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예(武藝)가 즉위하여 더욱 그 영토를 개척하여 넓히고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정벌하였다. 이에 당나라 황제가 신라(新羅) 왕에게 격문을 전해 남쪽 지역을 공격하라고 하니, 왕이 김윤중 등 4명의 장수로 하여금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가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때 모인 곳에 큰 눈이 내려서 산길이 험하여 막히고 병사의 절반 이상이 죽었으므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발해 왕 대조영이 개국한 이래로 6명의 왕이 왕업을 이어 갔으며, 선왕(宣王) 야발(野勃)이 즉위하니, 즉 대조영의 아우이고 나이가 70세였다. 제생(諸生)을 당나라에 보내 고금의 제도를 배워 익히고 그 땅에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설치하였다. 숙신(肅愼)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이곳이 곧 용정부(龍井府)이고, 대조영의 수책처(樹柵處)이다. 백두산(白頭山) 동남쪽 동모산(東牟山) 아래에 있다. 그 남쪽은 중경(中京)이니 현덕부(顯德府)이고, 예맥(濊貊)의 옛 땅은 동경(東京)이니 용원부(龍原府)이다. 옥저의 옛 땅은 남경(南京)이니 남해부(南海府)이다. 고구려의 옛 땅은 서경(西京)이니 압록부(鴨綠府)이다. 부가 각 주를 다스려서 신라와 함께 패강(浿江)과 철령(鐵嶺)으로써 영토의 경계로 정하여 해동(海東)의 성국(盛國)이 되었다.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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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三年唐玄宗開元二十三年○日皇聖武十二年○西歷紀元後七百三十五年이라春에遣使ᄒᆞ야唐에如ᄒᆞ더니밋使者ㅣ還ᄒᆞᆯᄉᆡ唐帝가浿江以南의地ᄅᆞᆯ賜ᄒᆞ니此ᄂᆞᆫ薩水以北과遼東以南을渤海가中間에踞ᄒᆞ야唐이浿南地ᄅᆞᆯ區制가不便ᄒᆞᆷ이러라

성덕왕 33년【당 현종 개원 23년 ○ 일황 성무 12년 ○ 서력 기원 735년】이었다.

봄에 사신을 보내 당(唐)나라에 가도록 했는데, 사자가 돌아올 때에 당나라 황제가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는 발해(渤海)가 살수(薩水) 이북과 요동(遼東) 이남 중간을 차지하여 당나라가 패강 남쪽 지역을 다스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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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五年唐玄宗開元二十五年○日皇聖武十四年○西歷紀元後七百三十七年이라春二月에王이崩고太子承慶이立ᄒᆞ다

성덕왕 35년【당 현종 개원 25년 ○ 일황 성무 14년 ○ 서력 기원 737년】이었다.

봄 2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승경(承慶)이 즉위하였다.


효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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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成王의諱ᄂᆞᆫ承慶이니在位五年이라

효성왕의 휘(諱)는 승경(承慶)이니, 재위 기간은 5년이었다.


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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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唐玄宗天寶元年○日皇聖武十九年○西歷紀元後七百四十二年이라夏五月에王이崩ᄒᆞ고太弟憲英이立ᄒᆞ야遺命으로ᄡᅥ其柩ᄅᆞᆯ法流寺에燒ᄒᆞ고其骨을東海에散ᄒᆞ니라

효성왕 5년【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 ○ 일황 성무 19년 ○ 서력 기원 742년】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제 헌영(憲英)이 즉위하였다. 유명(遺命)에 따라 관을 법류사(法流寺)에서 태우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경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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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德王의諱ᄂᆞᆫ憲英이니在位二十三年이라

경덕왕의 휘(諱)는 헌영(憲英)이니, 재위 기간은 23년이었다.


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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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年唐代宗永泰元年○日皇孝謙元年○西歷紀元後七百六十五年이라夏六月에王이崩ᄒᆞ고太子乾運이立ᄒᆞ니年이八歲라母后ㅣ攝政ᄒᆞ다

경덕왕 23년【당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 ○ 일황 효겸(孝謙) 원년 ○ 서력 기원 765년】이었다.

여름 6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건운(乾運)이 즉위하니, 나이가 8세였으므로 모후(母后)가 섭정하였다.


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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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恭王의諱ᄂᆞᆫ乾運이니在位十五年이라

혜공왕의 휘(諱)는 건운(乾運)이니,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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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唐代宗大曆十四年○日皇光仁十年○西歷紀元後七百七十九年이라金巖을遣ᄒᆞ야日本에聘ᄒᆞ다巖은庾信의曾孫이니爲人이聰敏ᄒᆞ고唐에入ᄒᆞ야陰陽家의術業을學ᄒᆞ고遁甲法을自述ᄒᆞ더니밋還國ᄒᆞᄆᆡ執事侍郞이되야浿江을鎭守ᄒᆞᆯᄉᆡ農隙에六陣兵法을敎ᄒᆞ고至是ᄒᆞ야日本에往聘ᄒᆞ니日主ㅣ其賢ᄒᆞᆷ을知ᄒᆞ고留코자ᄒᆞ다가맛ᄎᆞᆷ唐使ㅣ來ᄒᆞ야同還ᄒᆞ다

혜공왕 14년【당 대종 대력(大曆) 14년 ○ 일황 광인(光仁) 10년 ○ 서력 기원 779년】이었다.

김암(金巖)을 일본(日本)에 보내서 교빙(交聘)하였다. 김암은 김유신(金庾信)의 증손이니, 사람됨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업(術業)을 배우고, 둔갑법(遁甲法)을 직접 저술하였다. 귀국해서는 집사 시랑(執事侍郞)이 되어 패강(浿江)의 진(鎭)을 지킬 때에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육진 병법(六陳兵法)을 가르쳤다. 이때에 이르러서 일본에 교빙하러 가니 일본 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아보고 머무르게 하였으나, 마침 당나라 사신이 와서 함께 돌아왔다.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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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唐德宗建中元年○日皇光仁十一年○西歷紀元後七百八十年夏四月이라時에王이聲色에沈惑ᄒᆞ야戲謔이無度ᄒᆞ고綱紀가紊亂ᄒᆞ야人心이離叛ᄒᆞ니金志貞이聚衆作亂ᄒᆞ야王과밋后妃가亂兵의害ᄒᆞᆫᄇᆡ되거ᄂᆞᆯ金良相이志貞을誅ᄒᆞ고自立ᄒᆞ야王이되니라

혜공왕 15년【당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 ○ 일황 광인 11년 ○ 서력 기원 780년】이었다.

여름 4월이었다. 그때에 왕이 음악과 여색에 빠져서 허황된 행동에 절제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져서 인심이 이반(離叛)하였다. 이에 김지정(金志貞)이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켜서 왕과 후비(后妃)가 난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때 김양상(金良相)이 김지정을 죽이고 스스로 옹립하여 왕이 되었다.


선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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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德王의諱ᄂᆞᆫ良相이니沙飡孝芳의子오奈勿王의九世孫이오在位五年이라

선덕왕의 휘(諱)는 양상(良相)이니, 사찬(沙飡)【관등명】 김효방(金孝芳)의 아들이고, 내물왕(奈勿王)의 9세손이며, 재위 기간은 5년이었다.


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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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唐德宗貞元元年○日皇桓武四年○西歷紀元後七百八十五年이라王이崩ᄒᆞ다王이在位時에社稷壇을立ᄒᆞ고ᄯᅩ祀典을修ᄒᆞ니라至是ᄒᆞ야國人이一吉飡孝讓의子上大等敬信을立ᄒᆞ야王을삼다

선덕왕 5년【당 덕종 정원(貞元) 원년 ○ 일황 환무(桓武) 4년 ○ 서력 기원 785년】이었다.

왕이 돌아가셨다. 왕이 재위 시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또한 『사전(祀典)』을 편수(編修)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백성이 일길찬(一吉飡)【관등명】 김효양(金孝讓)의 아들 상대등(上大等) 경신(敬信)을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원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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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聖王의諱ᄂᆞᆫ敬信이니奈勿王의十一世孫이오在位十四年이라

원성왕의 휘(諱)는 경신(敬信)이니, 내물왕(奈勿王)의 11세손이고, 재위 기간은 14년이었다.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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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唐德宗貞元四年○日皇桓武七年○西歷紀元後七百八十八年이라讀書出身科ᄅᆞᆯ始定ᄒᆞ다先是에ᄂᆞᆫ다만射로ᄡᅧ選人ᄒᆞ더니至是ᄒᆞ야春秋左傳禮記文選論語孝經을能通ᄒᆞᄂᆞᆫ者ᄅᆞᆯ選ᄒᆞ야優等科ᄅᆞᆯ予ᄒᆞ고其外에五經三史諸子百家ᄅᆞᆯ博通ᄒᆞᄂᆞᆫ者ᄂᆞᆫ곳擢用ᄒᆞ다○時에金生이라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야自幼로能書ᄒᆞ야平生에他藝ᄅᆞᆯ不攻ᄒᆞ고ᄯᅩ佛法을好ᄒᆞ야隱居不仕ᄒᆞ더니年이八十에오히러操筆不休ᄒᆞ며隷行草가다入神ᄒᆞ니學者ㅣ寶藏ᄒᆞ더라

원성왕 3년【당 덕종 정원 4년 ○ 일황 환무 7년 ○ 서력 기원 788년】이었다.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처음으로 정하였다. 이전에는 다만 활쏘기로써 선발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춘추좌전(春秋左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논어(論語)』, 『효경(孝經)』에 능통한 자를 선발하여 우등과(優等科)를 수여하고 그 밖에 오경(五經), 삼사(三史), 제자 백가(諸子百家)를 넓게 통달한 자를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 그때에 김생(金生)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글쓰기에 능하여 평생 다른 기예를 익히지 않고, 또한 불법을 좋아하여 은둔하여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나이 80에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았으며, 예서(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모두 신기에 들어서니, 학자들이 귀하게 여겨 보관하였다.


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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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唐德宗貞元十五年○日皇桓武十八年○西歷紀元後七百九十九年이라王이崩ᄒᆞ고太子俊邕이立ᄒᆞ야遺命으로ᄡᅧ靈柩ᄅᆞᆯ奉德寺南에燒ᄒᆞ다

원성왕 14년【당 덕종 정원 15년 ○ 일황 환무 18년 ○ 서력 기원 799년】이었다.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준옹(俊邕)이 즉위하였다. 유언[遺命]에 따라 관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소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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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聖王의諱ᄂᆞᆫ俊邕이니在位一年이라

소성왕의 휘(諱)는 준옹(俊邕)이니, 재위 기간은 1년이었다.


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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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唐德宗貞元十六年○日皇桓武十九年○西歷紀元後八百年이라王이崩ᄒᆞ고太子淸明이立ᄒᆞ니年이十三이라叔父兵部令彦昇이攝政ᄒᆞ다

소성왕 원년【당 덕종 정원 16년 ○ 일황 환무 19년 ○ 서력 기원 800년】이었다.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청명(淸明)이 즉위하니, 나이가 13세였다. 숙부 병부령(兵部令) 언승(彦昇)이 섭정하였다.


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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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莊王의諱ᄂᆞᆫ明淸이니後에重熙라改ᄒᆞ고在位九年이라

애장왕의 휘(諱)는 청명(淸明)이니, 나중에 중희(重熙)로 고쳤다. 재위 기간은 9년이었다.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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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年唐憲宗元和四年○日皇平城四年○西歷紀元後八百九年이라秋에彦昇이其弟悌邕으로더브러作亂ᄒᆞ야王을弑ᄒᆞ고ᄯᅩ王의弟體明을殺ᄒᆞ고自立ᄒᆞ야王이되다

애장왕 9년【당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 ○ 일황 평성(平城) 4년 ○ 서력 기원 809년】이었다.

가을에 언승(彦昇)이 그의 아우 제옹(悌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또한 왕의 아우 체명(體明)을 죽였다. 스스로 옹립하여 왕이 되었다.


헌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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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德王의諱ᄂᆞᆫ彦昇이니昭聖王의母弟오在位十七年이라

헌덕왕의 휘(諱)는 언승(彦昇)이니, 소성왕(昭聖王)의 아우이고, 재위 기간은 17년이었다.


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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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唐憲宗元和十四年○日皇嵯峨十年○西歷紀元後八百十九年이라秋七月에唐鄆州節度使李師道ㅣ叛ᄒᆞ거ᄂᆞᆯ唐帝ㅣ장차討伐ᄒᆞᆯᄉᆡ使臣을遣ᄒᆞ야請兵ᄒᆞ거ᄂᆞᆯ王이金雄元으로ᄒᆞ여곰軍士三萬을率ᄒᆞ야助戰ᄒᆞ다○伽倻山에海印寺今陜ᄅᆞᆯ創建ᄒᆞ다

헌덕왕 10년【당 헌종 원화 14년 ○ 일황 차아(嵯峨) 10년 ○ 서력 기원 819년】이었다.

가을 7월에 당(唐)나라 운주 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나라 황제가 장차 토벌하고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였다. 왕이 김웅원(金雄元)으로 하여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도와서 싸우도록 하였다.

○ 가야산(伽倻山)에 해인사(海印寺)【지금의 합천(陜川)】를 창건하였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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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三年唐穆宗長慶二年○日皇嵯峨十三年○西歷紀元後八百二十二年이라春正月에王이無嗣ᄒᆞ야母弟秀宗으로ᄡᅧ太弟ᄅᆞᆯ삼다時에上大等忠恭이內外官職을擬注ᄒᆞᆯᄉᆡ請托이坌至ᄒᆞᄂᆞᆫ지라忠恭이能決치못ᄒᆞ고憂疑成疾ᄒᆞ엿더니執事侍郞祿眞이請見ᄒᆞ야曰公의病은砭石을不須ᄒᆞ고오쟉一言으로ᄡᅥ醫病코ᄌᆞᄒᆞ노라大抵宰相의爲政ᄒᆞᆷ은當官莅事ᄒᆞ야淸白恪恭ᄒᆞ며貨賂의門을杜ᄒᆞ고請托의路ᄅᆞᆯ絶ᄒᆞ야黜陟과予奪을必正必公ᄒᆞ면國家가自然太平ᄒᆞ리니엇지區區히成疾廢事ᄒᆞ리오ᄒᆞ거ᄂᆞᆯ忠恭이大悅ᄒᆞ야王ᄭᅴ入陳ᄒᆞᆫᄃᆡ王曰如此ᄒᆞᆫ賢人이有ᄒᆞ니吾弟로ᄒᆞ여곰不可不聞知케ᄒᆞ리라ᄒᆞ고太弟의게往告ᄒᆞ니太弟ㅣ入賀ᄒᆞ야曰臣은聞ᄒᆞ니君明ᄒᆞ면臣直이라ᄒᆞ니此ᄂᆞᆫ國家의美事로소이다ᄒᆞ더라

헌덕왕 13년【당 목종(穆宗) 장경(長慶) 2년 ○ 일황 차아 13년 ○ 서력 기원 822년】이었다.

봄 정월에 왕이 후사가 없어서 아우 수종(秀宗)을 태제로 삼았다. 이때에 상대등(上大等) 김충공(金忠恭)이 내외 관직을 왕에게 추천할[擬注] 때에 청탁이 몰려들었으므로 김충공이 결정하지 못하고 근심하다가 병에 걸렸다. 이때 집사 시랑(執事侍郞) 녹진(祿眞)이 뵙기를 청해 말하기를, “공의 병은 침을 놓을 필요가 없고 오직 한마디 말로 병을 치료하고자 합니다. 대개 재상이 정사를 살피는 것은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니, 청렴결백하고 삼가고 공손하며 뇌물의 문을 막고 청탁의 길을 끊어서 출척(黜陟)과 상벌을 반드시 바르고 공평하게 하면 국가가 자연스럽게 태평해질 것입니다. 어찌 구차하게 병을 얻어 일을 그만두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충공이 크게 기뻐하여 왕에게 가서 진언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와 같이 현명한 사람이 있으니 나의 아우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태제에게 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태제가 들어와 하례(賀禮)하며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으니, 이는 국가의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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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年唐敬宗寶曆二年○日皇淳和三年○西歷紀元後八百二十六年이라秋七月에牛岑今金太守白永을命ᄒᆞ야漢山今漢以北諸郡人一萬을發ᄒᆞ야浿江長城三百里ᄅᆞᆯ築ᄒᆞ다○冬十二月에王이崩ᄒᆞ고太弟秀宗이立ᄒᆞ다

헌덕왕 17년【당 경종(敬宗) 보력(寶曆) 2년 ○ 일황 순화(淳和) 3년 ○ 서력 기원 826년】이었다.

가을 7월에 우잠(牛岑)【지금의 김천(金川)】 태수 백영(白永)에게 명령하여 한산(漢山)【지금의 한양(漢陽)】 이북 여러 군민 1만여 명을 선발하여 패강(浿江)에 장성 300리를 쌓았다.

○ 겨울 12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제 수종(秀宗)이 즉위하였다.


흥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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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德王의諱ᄂᆞᆫ秀宗이니後에景徽라改ᄒᆞ고在位十年이라

흥덕왕의 휘(諱)는 수종(秀宗)이니, 후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재위 기간은 10년이었다.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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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唐文宗開成元年○日皇仁明三年○西歷紀元後八百三十六年이라冬十二月에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야堂弟의子悌隆이立ᄒᆞ다○金太廉이唐으로브터還ᄒᆞᆯᄉᆡ茶種을得來ᄒᆞ야智異山에種ᄒᆞ다

흥덕왕 10년【당 문종(文宗) 개성(開成) 원년 ○ 일황 인명(仁明) 3년 ○ 서력 기원 836년】이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사촌 아우[堂弟]의 아들 제륭(悌隆)이 즉위하였다.

○ 김태렴(金太廉)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올 때에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智異山)에 심었다.


희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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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康王의諱ᄂᆞᆫ悌隆이니元聖王의孫이오伊飡憲貞의子오在位二年이라

희강왕의 휘(諱)는 제륭(悌隆)이니,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인 이찬(伊飡) 헌정(憲貞)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2년이었다.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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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唐文宗開成三年○日皇仁明五年○西歷紀元後八百三十八年이라春正月에金明이王을弑ᄒᆞ고自立ᄒᆞ다明은元聖王曾孫이오阿飡忠恭의子라初에王이立ᄒᆞᆯᄉᆡ興德王의堂弟均貞이爭立ᄒᆞ거ᄂᆞᆯ武州都督金陽이均貞의子祐徵으로더브러均貞을立고ᄌᆞᄒᆞ더니時에明이王의羽翼이되야均貞을殺ᄒᆞ니祐徵이懼ᄒᆞ야淸海鎭大使張保皐의게往依ᄒᆞ거ᄂᆞᆯ陽이募兵往從ᄒᆞ더니至是ᄒᆞ야金明이侍中利弘等으로더브러作亂ᄒᆞ야王은縊死ᄒᆞ고明이自立ᄒᆞ야王이되거ᄂᆞᆯ陽이이에祐徵을奉ᄒᆞ야明을討ᄒᆞᆯᄉᆡ保皐ㅣ分兵助戰ᄒᆞ니라

희강왕 2년【당 문종 개성 3년 ○ 일황 인명 5년 ○ 서력 기원 838년】이었다.

봄 정월에 김명(金明)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김명은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이고, 아찬(阿飡) 김충공(金忠恭)의 아들이다. 처음에 왕이 즉위할 때 흥덕왕(興德王)의 사촌 동생 김균정(金均貞)이 왕위를 다투었다. 무주 도독(武州都督) 김양(金陽)이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과 함께 김균정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김명이 왕의 우익(羽翼)이 되어 김균정을 죽이니, 김우징이 두려워하여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김양이 군사를 모아 가서 그를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김명이 시중(侍中) 이홍(利弘)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왕은 목을 매어 죽고 김명이 스스로 옹립하여 왕이 되었다. 이에 김양이 김우징을 받들어서 김명을 토벌할 때에 장보고가 군사를 나누어 줘 싸움을 도왔다.


신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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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武王의諱ᄂᆞᆫ祐徵이니元聖王의孫이오上大等均貞의子오在位四月이라

신무왕의 휘(諱)는 우징(祐徵)이니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고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4개월이었다.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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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唐文宗開成四年○日皇仁明六年○西歷紀元後八百三十九年이라春正月에金陽이進兵ᄒᆞ야金明을討ᄒᆞ니金明이逃亡ᄒᆞ거ᄂᆞᆯ陽이追斬ᄒᆞ고곳下令曰我의本意ᄂᆞᆫ報讎코ᄌᆞᄒᆞᆷ이러니今에渠魁가就戮ᄒᆞ엿스니百姓은其業을各安ᄒᆞ라ᄒᆞ니人心이大悅ᄒᆞ더라○夏四月에金陽이祐徵을迎入ᄒᆞ야卽位ᄒᆞ니王이張保阜ᄅᆞᆯ拜ᄒᆞ야感義軍使ᄅᆞᆯ삼고食邑二千戶ᄅᆞᆯ封ᄒᆞ다○秋七月에王이崩ᄒᆞ고太子慶膺이立ᄒᆞ다

신무왕 원년【당 문종 개성 4년 ○ 일황 인명 6년 ○ 서력 기원 839년】이었다.

봄 정월에 김양(金陽)이 병사를 보내어 김명(金明)을 토벌하니, 김명이 도망하였다. 김양이 추격하여 목을 베고 곧 명령을 내리기를, “나의 본뜻은 복수를 하고자 한 것으로 지금 그 괴수[渠魁]가 죽음을 당하였으니 백성은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도록 하라.”고 하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 여름 4월에 김양이 김우징(金祐徵)을 맞이하여 즉위시키니, 왕이 장보고(張保皐)를 감의군사(感義軍使)에 임명하고 식읍(食邑) 2천 호를 봉(封)하였다.

○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경응(慶膺)이 즉위하였다.


문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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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聖王의諱ᄂᆞᆫ慶膺이오在位十八年이라

문성왕의 휘(諱)는 경응(慶膺)이고, 재위 기간은 18년이었다.


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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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年唐宣宗大中十一年○日皇文德七年○西歷紀元後八百五十七年이라秋八月에侍中金陽이卒ᄒᆞ다陽은太宗王의九世孫이오周元의曾孫이라爲人이英傑ᄒᆞ고所至에政譽가有ᄒᆞ며時에危亂을値ᄒᆞ야國事ᄅᆞᆯ匡濟ᄒᆞᆯᄉᆡ精忠大節이屹然이柱石이되더니至是에卒ᄒᆞ니王이哀慟ᄒᆞ고贈職과賻葬이金庾信舊例ᄅᆞᆯ一依ᄒᆞ다○秋九月에王이崩ᄒᆞ고神武王의弟誼靖이立ᄒᆞ다

문성왕 18년【당 선종(宣宗) 대중(大中) 11년 ○ 일황 문덕(文德) 7년 ○ 서력 기원 857년】이었다.

가을 8월에 시중(侍中) 김양(金陽)이 죽었다. 김양은 태종왕(太宗王)의 9세손이고, 김주원(金周元)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영특하고 준걸하여 이르는 곳마다 정무에 대한 칭찬이 있으며, 위급한 난리를[危亂] 만남에 국사를 바로잡았고, 충성과 절개가 뛰어나 귀감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왕이 애통해 하고 증직(贈職)과 부의(賻儀) 및 장례를 김유신(金庾信)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신무왕(神武王)의 아우 의정(誼靖)이 즉위하였다.


헌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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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安王의諱ᄂᆞᆫ誼靖이니在位四年이라

헌안왕의 휘(諱)는 의정(誼靖)이니, 재위 기간은 4년이었다.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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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唐懿宗咸通二年○日皇淸和三年○西歷紀元後八百六十一年이라正月에王이寢疾ᄒᆞ야左右ᄅᆞᆯ囑ᄒᆞ야曰寡人이不幸히無子有女ᄒᆞ니我國故事에비록眞德善德二女主가有ᄒᆞ엿스나此ᄂᆞᆫ良法이아니라今에外甥膺廉이年紀ㅣ雖少ᄒᆞ나老成ᄒᆞᆫ德이有ᄒᆞ니卿等은奉立ᄒᆞ라반다시祖宗의業을不墜ᄒᆞ리니寡人이死ᄒᆞ야도不朽ᄒᆞ리라ᄒᆞ더니밋王이崩ᄒᆞᄆᆡ膺廉이立ᄒᆞ다先是에王族啓明의子膺廉이王을臨海殿에셔侍宴ᄒᆞᆯᄉᆡ時年이十五라王이其器識을試코ᄌᆞᄒᆞ야問曰汝가游學ᄒᆞᆫ지久矣라善人을得見乎아ᄒᆞᆫᄃᆡ對曰臣이일즉三人을見ᄒᆞ오니一은勳閥子弟가能히讓人自下ᄒᆞ고一은家가富ᄒᆞ야도被服이不侈ᄒᆞ고一은勢가榮ᄒᆞ야도驕氣가無ᄒᆞ니此等人은可謂善人이라ᄒᆞᄂᆞ이다ᄒᆞ거ᄂᆞᆯ王이大悅ᄒᆞ야王后ᄅᆞᆯ顧謂曰朕이閱人이多ᄒᆞ되膺廉과如ᄒᆞᆫ者ㅣ無ᄒᆞ다ᄒᆞ고長女로ᄡᅧ妻ᄒᆞ니此ᄂᆞᆫ寧花夫人이러라

헌안왕 4년【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2년 ○ 일황 청화(淸和) 3년 ○ 서력 기원 861년】이었다.

정월에 왕이 병환으로 누워서 좌우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옛적에 비록 진덕과 선덕 두 여왕이 계셨으나, 이는 옳은 법도가 아니다. 지금 사위 응렴(膺廉)이 비록 나이가 어리나 성숙한 덕이 있으니 경 등은 받들어 왕위에 올리도록 하라. 반드시 조종(祖宗)의 업(業)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니 과인이 죽어서라도 영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돌아가시고 응렴이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왕족 계명(啓明)의 아들 응렴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왕을 모시고 연회를 열었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왕이 그의 기량과 식견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어 말하기를, “자네가 배우러 다닌 지 오래되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보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3명을 보았으니, 하나는 공훈이 있는 문벌 자제이면서 타인에게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는 집이 부유한데도 입은 옷이 사치스럽지 않고, 하나는 세력이 왕성한데도 교만한 기운이 없으니, 이들이 좋은 사람이라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왕후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짐이 겪어 온 사람이 많았지만 응렴과 같은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장녀와 혼인시키니 그가 영화 부인(寧花夫人)이다.


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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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文王의諱ᄂᆞᆫ膺廉이니啓明의子오僖康王의曾孫이오在位十四年이라

경문왕의 휘(諱)는 응렴(膺廉)이니, 계명(啓明)의 아들이고, 희강왕(僖康王)의 증손자이다. 재위 기간은 14년이었다.


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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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唐僖宗乾符二年○日皇淸和十七年○西歷紀元後八百七十五年이라秋七月에王이崩ᄒᆞ고太子晸이立ᄒᆞ다

경문왕 14년【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 ○ 일황 청화 17년 ○ 서력 기원 875년】이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정(晸)이 즉위하였다.


헌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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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康王의諱ᄂᆞᆫ晸이오在位十一年이라

헌강왕의 휘(諱)는 정(晸)이고,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


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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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唐僖宗光啓元年○日皇光孝元年○西歷紀元後八百八十五年이라春三月에崔致遠이唐으로브터還ᄒᆞ다致遠의號ᄂᆞᆫ孤雲이오沙梁部人이니十二歲에唐에入ᄒᆞ야力學能文ᄒᆞ고十八에登第ᄒᆞ야侍御史內供奉이되엿더니時에黃巢ㅣ叛ᄒᆞ거ᄂᆞᆯ兵馬都統高騈의從事가되야書記ᄅᆞᆯ任ᄒᆞᆯᄉᆡ黃巢ᄅᆞᆯ討ᄒᆞᄂᆞᆫ檄文이嚴正痛快ᄒᆞ야크게人心을感動ᄒᆞ니其檄文에曰不惟天下之人이皆思顯戮이라抑亦地中之鬼가已欲陰誅라ᄒᆞ니巢ㅣ其檄을見ᄒᆞ고大驚下牀ᄒᆞᄂᆞᆫ지라自此로文名이天下에振動ᄒᆞ고至是ᄒᆞ야還國ᄒᆞ니年이二十八이라王이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監事ᄅᆞᆯ拜ᄒᆞ거ᄂᆞᆯ致遠이自己의蘊奧ᄅᆞᆯ施展코ᄌᆞᄒᆞ다가衰世ᄅᆞᆯ當ᄒᆞ야疑忌가多ᄒᆞᆫ지라이에見容치못ᄒᆞ고太山郡今泰仁又云瑞山太守ᄅᆞᆯ出補ᄒᆞ엿더니後에世亂을値ᄒᆞ야다시仕進치아니ᄒᆞ고山水間에放浪ᄒᆞ니今慶州南山과智異山雙溪寺와伽耶山等이다其游翫ᄒᆞ든處이오文集이有ᄒᆞ야後世에傳ᄒᆞ니卽桂苑筆耕이러라

헌강왕 10년【당 희종 광계(光啓) 원년 ○ 일황 광효(光孝) 원년 ○ 서력 기원 885년】이었다.

봄 3월에 최치원(崔致遠)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왔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孤雲)으로,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힘써 배워서 글 짓는 솜씨가 뛰어났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다. 그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병(高騈)의 종사(從事)가 되어 서기(書記)의 일을 담당하였는데,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이 엄정하고 통쾌하여 크게 인심을 감동케 하였다. 그 격문에서 말하길, “오직 천하의 사람 모두가 너를 죽이고자 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도 몰래 너를 죽이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황소가 그 격문을 보고 크게 놀라 평상에서 떨어졌다. 이때부터 최치원의 문명(文名)이 천하에 떨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귀국하니 나이가 28세였다. 왕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 지서 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監事)에 임명하니 최치원이 자기의 재주[蘊奧]를 펼쳐 보려 했으나, 쇠락한 시절을 당하여 시기가 많았으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태산군(太山郡)【지금의 태인(泰仁) 또는 서산(瑞山)이라고도 한다.】 태수로 나아갔다. 이후에 난세를 만나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천을 방랑하였다. 지금의 경주(慶州) 남산(南山)과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溪寺), 가야산(伽倻山) 등이 모두 그가 유람하며 노닐던 곳이다. 문집이 있어 후세에 전하니 바로 『계원필경(桂苑筆耕)』이다.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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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唐僖宗光啓二年○日皇光孝二年○西歷紀元後八百八十六年이라秋八月에王이崩ᄒᆞ고弟晃이立ᄒᆞ다

헌강왕 11년【당 희종 광계 2년 ○ 일황 광효 2년 ○ 서력 기원 886년】이었다.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아우 황(晃)이 즉위하였다.


정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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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康王의諱ᄂᆞᆫ晃이니在位一年이라

정강왕의 휘(諱)는 황(晃)이니, 재위 기간은 1년이었다.


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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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唐僖宗光啓三年○日皇光孝三年○西歷紀元後八百八十七年이라秋七月에王이崩ᄒᆞ고女弟曼이立ᄒᆞ다

정강왕 원년【당 희종 광계 3년 ○ 일황 광효 3년 ○ 서력 기원 887년】이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여동생 만(曼)이 즉위하였다.


진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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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聖王의諱ᄂᆞᆫ曼이니在位十年이라

진성왕의 휘(諱)는 만(曼)이니, 재위 기간은 10년이었다.


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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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唐昭宗龍紀元年○日皇宇多二年○西歷紀元後八百八十九年이라元宗衰奴等이叛ᄒᆞ다時에主ㅣ淫穢瀆亂ᄒᆞ야少年美丈夫ᄅᆞᆯ潛通ᄒᆞ고因ᄒᆞ야要職을授ᄒᆞ니自此로佞幸이肆志ᄒᆞ고紀綱이大壞ᄒᆞ며ᄯᅩ國內州郡이貢賦ᄅᆞᆯ不輸ᄒᆞ야府庫ㅣ虛竭ᄒᆞ거ᄂᆞᆯ主ㅣ使者ᄅᆞᆯ四遣ᄒᆞ야督刷ᄒᆞ니이에盜賊이蜂起ᄒᆞ고元宗衰奴等은沙伐州今尙ᄅᆞᆯ據ᄒᆞ야叛ᄒᆞᄂᆞᆫ지라主ㅣ奈麻令奇로ᄒᆞ여곰往捕ᄒᆞ라ᄒᆞ니令奇ㅣ賊壘ᄅᆞᆯ望見ᄒᆞ고畏懼ᄒᆞ야敢進치못ᄒᆞ거ᄂᆞᆯ主ㅣ令奇ᄅᆞᆯ斬ᄒᆞ니라

진성왕 2년【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원년 ○ 일황 우다(宇多) 2년 ○ 서력 기원 889년】이었다.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에 왕이 음란하여 인륜을 어지럽히고 어리고 잘생긴 사내아이와 몰래 사통(私通)하고 그 대가로 요직(要職)을 주었다. 이로부터 아첨하는 자들이 마음대로 하여 기강이 크게 무너지고, 또한 각 주군(州郡)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아 관가의 창고가 텅 비게 되니 왕이 사자를 사방으로 보내 납부하기를 독촉하였다. 이에 도적이 봉기하고 원종과 애노 등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尙州)】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나마(奈麻) 영기(令奇)로 하여금 가서 토벌하게 하니, 영기가 적의 망루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으므로 왕이 영기의 목을 베었다.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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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唐昭宗太順二年○日皇宇多四年○西歷紀元後八百九十一年이라冬十月에弓裔ㅣ叛ᄒᆞ야北原今原을據ᄒᆞ다裔ᄂᆞᆫ憲安王의庶子니五月五日에生ᄒᆞ고곳齒가生ᄒᆞᄂᆞᆫ지라日者ㅣ言ᄒᆞ되國家에不利ᄒᆞ다ᄒᆞ거ᄂᆞᆯ王이樓下에擲棄ᄒᆞ엿더니乳婢가가만히捧ᄒᆞ다가手로ᄡᅧ誤觸ᄒᆞ야一目을眇ᄒᆞ고十餘歲에祝髮ᄒᆞ야僧이되고밋長成ᄒᆞᄆᆡ膽氣로ᄡᅥ自負ᄒᆞ더니國家ㅣ衰亂ᄒᆞᆷ을見ᄒᆞ고聚衆ᄒᆞ야北原賊梁吉에게往投ᄒᆞ니吉이곳軍士ᄅᆞᆯ分ᄒᆞ야東으로略地케ᄒᆞ더라

진성왕 4년【당 소종 태순(太順) 2년 ○ 일황 우다 4년 ○ 서력 기원 891년】이었다.

겨울 10월에 궁예(弓裔)가 반란을 일으켜 북원(北原)【지금의 원주(原州)】을 차지하였다. 궁예는 헌안왕(憲安王)의 서자(庶子)이니 5월 5일에 태어났는데, 곧바로 이가 났다. 일관(日官)이 말하길 ‘나라에 해가 될 것이라.’ 하니 왕이 누각 아래로 던져 버렸다. 젖먹이 노비가 받다가 손가락으로 잘못 찔러서 한쪽 눈을 잃어 애꾸가 되었다. 10여 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장성해서는 담력으로 자신을 믿더니 국가가 쇠락해지는 것을 보고는 무리를 모아서 북원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양길이 곧 군사를 나누어 주고 동쪽 지역을 빼앗도록 하였다.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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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後百濟甄萱元年○唐昭宗景福元年○日皇宇多五年○西歷紀元後八百九十二年이라甄萱이叛ᄒᆞ야完山今全을據ᄒᆞ다萱은尙州人이오本姓은李라幼時에父阿慈介ㅣ野에耕ᄒᆞᆯᄉᆡ母ㅣ往耨ᄒᆞ다가萱을林下에置ᄒᆞ얏더니虎가來乳ᄒᆞ더라萱의體貌가雄奇ᄒᆞ고志氣가倜儻ᄒᆞ며智略이大有ᄒᆞ야戰功으로ᄡᅥ裨將이되엿다가時에朝綱이紊亂ᄒᆞ고盜賊이竝起ᄒᆞ거ᄂᆞᆯ萱이異志ᄅᆞᆯ潛懷ᄒᆞ고亡命을嘯聚ᄒᆞ야旬月에衆이五千이라武珍州今光ᄅᆞᆯ襲取ᄒᆞ고自立ᄒᆞ야王이되고遙히北原賊梁吉로ᄡᅧ裨將을삼더라○弓裔ㅣ北原으로브터何瑟羅夫餘ᄅᆞᆯ寇ᄒᆞᆯᄉᆡ衆이六百이라將軍이라自稱ᄒᆞ고士卒과甘苦ᄅᆞᆯ同ᄒᆞ고予奪ᄒᆞᆷ이無私ᄒᆞ니衆이愛畏ᄒᆞ더라

진성왕 5년【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원년 ○ 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 ○ 일황 우다 5년 ○ 서력 기원 892년】이었다.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완산(完山)【지금의 전주(全州)】을 차지하였다. 견훤은 상주(尙州) 사람으로 본래 성은 이씨(李氏)이다. 어릴 적에 부친 아자개(阿慈介)가 밭을 갈 때에 모친이 김을 매러 가면서 견훤을 수풀 아래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견훤은 풍채가 웅장하고 기이하였고 의지와 기개가 빼어났으며, 지략이 많아서 전공(戰功)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에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도적이 도처에서 일어났는데, 견훤이 다른 뜻을 몰래 품고 망명한 자들을 불러 모았다. 열흘 사이에 모인 자들이 5천 명이었다.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光州)】를 습격하여 점거하고 스스로 옹립하여 왕이 되었으며, 멀리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을 비장으로 삼았다.

○ 궁예(弓裔)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와 부여(夫餘)를 노략질할 때 무리가 6백이었다.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사졸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고 상벌에 사사로움이 없게 하니 무리가 좋아하고 두려워했다.


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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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後百濟甄萱四年○唐昭宗乾寧二年○日皇宇多八年○西歷紀元後八百九十五年이라秋八月에弓裔ㅣ漢州와鐵圓今鐵等十餘郡을破ᄒᆞ고松岳郡에都ᄒᆞ엿다가다시鐵圓에遷都ᄒᆞ고國號ᄅᆞᆯ泰封이라ᄒᆞ니라弓裔ㅣ恒常前王의見棄ᄒᆞᆷ을怨恨ᄒᆞ야其畫像을見ᄒᆞ고劍으로ᄡᅧ擊ᄒᆞ더라○弓裔ㅣ王建으로ᄡᅧ鐵圓太守ᄅᆞᆯ拜ᄒᆞ다建은漢州松嶽郡人이라初에父隆이韓氏ᄅᆞᆯ娶ᄒᆞ고松岳山南에築室ᄒᆞ엿더니異僧道詵이來視ᄒᆞ고謂曰此ᄂᆞᆫ聖人이出ᄒᆞᆯ地라明年에公이貴子ᄅᆞᆯ必得ᄒᆞ리라ᄒᆞ더니及期ᄒᆞ야果然建을生ᄒᆞ니龍顔日角이오器度가雄深ᄒᆞ고語音이洪大ᄒᆞ며濟世ᄒᆞᆯ大志가有ᄒᆞ더라年이十七에道詵이다시至ᄒᆞ야請見曰足下ㅣ百六의會ᄅᆞᆯ値ᄒᆞ야三國蒼生이公의弘濟ᄅᆞᆯ待ᄒᆞᆫ다ᄒᆞ고因ᄒᆞ야出師置陣과天時地利의法을傳授ᄒᆞ더니至是ᄒᆞ야弓裔의게往投ᄒᆞ니라

진성왕 8년【후백제 견훤 4년 ○ 당 소종 건령(乾寧) 2년 ○ 일황 우다 8년 ○ 서력 기원 895년】이었다.

가을 8월에 궁예(弓裔)가 한주(漢州)와 철원(鐵圓)【지금의 철원(鐵原)】 등 10여 군을 격파하고 송악군(松嶽郡)에 도읍하였다가 다시 철원으로 천도(遷都)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궁예가 항상 전(前) 왕에게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여 그의 초상화[畵像]를 보고는 칼로 찢어 버렸다.

○ 궁예가 왕건(王建)을 철원 태수(鐵圓太守)로 삼았다. 왕건은 한주 송악군 사람이다. 처음에 부친 융(隆)이 한씨(韓氏)를 아내로 삼고 송악산(松岳山) 남쪽에 집을 지으니, 승려 도선(道詵)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곳은 성인(聖人)이 나올 땅이니 내년에 공이 귀한 아들을 반드시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한이 되니 과연 왕건이 태어났다. 얼굴[龍顔]이 귀인의 상[日角]이고 기품과 도량이 웅대하고 깊으며,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 세상을 구할 만한 큰 뜻이 있었다. 나이가 17세에 도선이 다시 이르러 청하여 보고 말하기를, “그대[足下]가 사나운 운수가 모이는 때[百六의 會]를 만나니 삼국의 백성이 공이 널리 구제해 주기를 기다린다.”고 하고 군사를 내어 진을 치는 방법과 천시(天時), 지리(地利)의 법을 전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궁예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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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後百濟甄萱六年○唐昭宗乾寧四年○日皇宇多十年○西歷紀元後八百九十七年이라夏六月에主ㅣ太子嶢의게禪位ᄒᆞ니嶢ᄂᆞᆫ憲康王의庶子러라○冬十二月에主ㅣ崩ᄒᆞ다○梁吉이國原今忠等三十餘城을取ᄒᆞ고弓裔의地廣民衆ᄒᆞᆷ을怒ᄒᆞ야襲擊고ᄌᆞᄒᆞ거ᄂᆞᆯ弓裔ㅣ몬져往攻大破ᄒᆞ니라

【후백제 견훤 6년 ○ 당 소종 건령 4년 ○ 일황 우다 10년 ○ 서력 기원 897년】이었다.

여름 6월에 왕이 태자 요(嶢)에게 선위(禪位)하니 요는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이다.

○ 겨울 1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 양길(梁吉)이 국원(國原)【지금의 충주(忠州)】 등 30여 성을 함락하고는 궁예(弓裔)의 땅이 넓고 백성이 많은 것에 노하여 궁예를 습격하고자 하였는데, 궁예가 먼저 와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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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恭王의諱ᄂᆞᆫ嶢니在位十五年이라

효공왕(孝恭王)의 휘(諱)는 요(嶢)이니,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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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後百濟甄萱九年○唐昭宗光化三年○日皇醍醐三年○西歷紀元後九百年이라冬十月에弓裔ㅣ王建을遣ᄒᆞ야廣州忠州唐城今南菁州今晋槐壤今槐等을破ᄒᆞ다○甄萱이西으로完山에至ᄒᆞ니百姓이迎勞ᄒᆞ거ᄂᆞᆯ萱이左右다려顧謂曰吾ㅣ三國의事ᄅᆞᆯ見ᄒᆞ니馬韓이先起ᄒᆞ고赫居世가後興ᄒᆞ며ᄯᅩ百濟ᄂᆞᆫ開國ᄒᆞ야傳世가六百이어ᄂᆞᆯ新羅ㅣ無故히唐으로더브러攻滅ᄒᆞ엿스니今에予ㅣ비록不德ᄒᆞ나義慈王의宿憤을雪코ᄌᆞᄒᆞ노라ᄒᆞ고드ᄃᆡ여完山에定都ᄒᆞ고國號ᄂᆞᆫ後百濟라ᄒᆞ고官職을設ᄒᆞ고吳越에遣使ᄒᆞ야請好ᄒᆞ더라

효공왕 3년【후백제 견훤 9년 ○ 당 소종 광화(光化) 3년 ○ 일황 제호(醍醐) 3년 ○ 서력 기원 900년】이었다.

겨울 10월에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을 보내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지금의 남양(南陽)】, 청주(菁州)【지금의 진주(晋州)】, 괴양(槐壤)【지금의 괴산(槐山)】 등을 격파하였다.

○ 견훤(甄萱)이 서쪽으로 완산(完山)에 이르니 백성이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견훤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일을 바라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赫居世)가 뒤에 흥했으며, 또한 백제(百濟)는 개국하여 왕업을 전한 햇수가 600여 년인데, 신라(新羅)가 이유 없이 당(唐)나라와 함께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지금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의자왕(義慈王)의 원한을 풀고자 한다.”고 말하고 드디어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관직을 두고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 관계를 청하였다.


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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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後百濟甄萱十四年○泰封弓裔五年○唐昭宗天祐二年○日皇醍醐八年○西歷紀元後九百五年이라弓裔ㅣ紀元ᄒᆞ야曰武泰라ᄒᆞ더니다시改ᄒᆞ야元聖이라ᄒᆞ고王建을命ᄒᆞ야甄萱을尙州에셔破ᄒᆞ니이에土地가益廣ᄒᆞ고士馬가漸强ᄒᆞᆫ지라더욱新羅ᄅᆞᆯ倂呑코ᄌᆞᄒᆞ더라時에王建이弓裔의驕奢가日甚ᄒᆞᆷ을見ᄒᆞ고心內에不安ᄒᆞ더니맛ᄎᆞᆷ弓裔ㅣ羅州ᄅᆞᆯ往鎭ᄒᆞ라ᄒᆞ거ᄂᆞᆯ建이舟師로ᄡᅧ몬져光州鹽海縣在今靈光郡에至ᄒᆞ야甄萱의使者ㅣ吳越에往ᄒᆞᆷ을見ᄒᆞ고其艦을奪ᄒᆞ니弓裔ㅣ大喜ᄒᆞ야ᄯᅩ光州珍島郡을往伐ᄒᆞ라ᄒᆞ거ᄂᆞᆯ建이ᄯᅩ攻破ᄒᆞ다時에建이士卒을撫愛ᄒᆞ야威惠가幷行ᄒᆞ고敵境이讋服ᄒᆞ더라

효공왕 8년【후백제 견훤 14년 ○ 태봉 궁예 5년 ○ 당 소종 천우(天祐) 2년 ○ 일황 제호 8년 ○ 서력 기원 905년】이었다.

궁예(弓裔)가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더니 다시 고쳐서 성책(聖冊)이라 하고, 왕건(王建)에게 명하여 견훤(甄萱)을 상주(尙州)에서 무찌르니 이에 영토가 더욱 넓어졌다. 군사와 세력이 점차 강해지니, 더욱 신라(新羅)를 병합하고자 하였다. 이때에 왕건이 궁예의 교만함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불안해 했다. 마침내 궁예가 나주(羅州)에 가서 진압하라고 하였기에 왕건이 수군을 데리고 먼저 광주(光州) 염해현(鹽海縣)【지금의 영광군(靈光郡)에 있다.】에 이르렀다. 견훤의 사자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에 가는 것을 보고 그 배를 빼앗으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였다. 또 광주 진도군(珍島郡)으로 가서 정벌하라고 하여 왕건이 또다시 공격하여 물리쳤다. 이때에 왕건이 사졸들을 위로하고 아끼니 위엄과 은혜로움이 함께 행해지고, 적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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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後百濟甄萱二十一年○泰封弓裔十二年○後梁太祖乾化二年○日皇醍醐十五年○西歷紀元後九百十二年이라夏四月에王崩ᄒᆞ고朴景暉ㅣ立ᄒᆞ다

【후백제 견훤 21년 ○ 태봉 궁예 12년 ○ 후량(後梁) 태조(太祖) 건화(乾化) 2년 ○ 일황 제호 15년 ○ 서력 기원 912년】이었다.

여름 4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박경휘(朴景暉)가 즉위하였다.


신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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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德王의姓은朴이오諱ᄂᆞᆫ景暉니阿達羅王의遠孫이오在位五年이라

신덕왕의 성(姓)은 박(朴)이고, 휘(諱)는 경휘(景暉)이니, 아달라왕(阿達羅王)의 먼 후손이다. 재위 기간은 5년이었다.


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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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後百濟甄萱二十二年○泰封弓裔十三年○後梁末帝仍稱乾化三年○日皇醍醐十六年○西歷紀元後九百十三年이라弓裔ㅣ王建이邊功을屢著ᄒᆞ엿다ᄒᆞ야侍中을拜ᄒᆞ니이에建의位가百僚의上이되고大事ᄅᆞᆯ다自決ᄒᆞ나禍가及ᄒᆞᆯ가恐ᄒᆞ야外補ᄒᆞ기ᄅᆞᆯ求ᄒᆞ니弓裔ㅣ다시建으로ᄡᅧ百船將軍을拜ᄒᆞ야水軍을領率ᄒᆞ고羅州ᄅᆞᆯ鎭撫ᄒᆞ라ᄒᆞ니甄萱과밋海上諸賊이다懾伏ᄒᆞ야動치못ᄒᆞ더라○弓裔ㅣ其妻康氏ᄅᆞᆯ殺ᄒᆞ다康氏ㅣ弓裔의無道ᄒᆞᆷ을見ᄒᆞ고數諫ᄒᆞᆫᄃᆡ裔ㅣ不答ᄒᆞ고但曰汝ㅣ他人과通奸ᄒᆞᆷ은何也오我ㅣ彌勒佛의觀心法으로汝의行爲ᄅᆞᆯ觀ᄒᆞᆫ다ᄒᆞ고烈火로ᄡᅥ鐵杵ᄅᆞᆯ燒赤ᄒᆞ야撞殺ᄒᆞ고幷히其兩兒ᄅᆞᆯ殺ᄒᆞ고ᄯᅩ其下ᄅᆞᆯ誣構ᄒᆞ야數百人을日殺ᄒᆞ니將相의遇害ᄒᆞᄂᆞᆫ者ㅣ十에八九러라

신덕왕 원년【후백제 견훤 22년 ○ 태봉 궁예 13년 ○ 후량 말제(末帝)도 거듭 건화(乾化) 3년으로 칭함 ○ 일황 제호 16년 ○ 서력 기원 913년】이었다.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이 변경에서의 공이 여러 차례 드러났다고 하여 시중(侍中)에 임명하였다. 이에 왕건의 지위가 신하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큰일을 모두 스스로 결정하였으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외직을 요청하였는데, 궁예가 다시 왕건을 백선 장군(百船將軍)에 임명하여 수군을 통솔하고 나주(羅州)를 지키라고 하였다. 이에 견훤(甄萱)과 해상의 여러 도적이 모두 두려워하여 엎드려 움직이지 못하였다.

○ 궁예가 그의 처 강씨(康氏)를 죽였다. 강씨가 궁예의 무도함을 보고 수 차례 간언하였는데 궁예가 답을 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당신이 다른 사람과 간통한 것은 어찌할 것인가. 내가 미륵불(彌勒佛)의 관심법(觀心法)으로 당신의 행동을 볼 수 있다.”고 하고 뜨거운 불로 쇠 방망이를 벌겋게 달구어서 때려 죽이고, 아울러 두 아이까지 죽였다. 또 그 아랫사람들을 무고하게 얽어서 수백 명을 날마다 죽였으니, 장수와 재상 가운데 해를 입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915).


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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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年後百濟甄萱二十六年○泰封弓裔十七年○後梁末帝貞明三年○日皇醍醐二十年○西歷紀元後九百十七年이라秋七月에王이崩ᄒᆞ고太子昇英이立ᄒᆞ다

신덕왕 5년【후백제 견훤 26년 ○ 태봉 궁예 17년 ○ 후량 말제 정명(貞明) 3년 ○ 일황 제호 20년 ○ 서력 기원 917년】이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승영(昇英)이 즉위하였다.


경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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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明王의諱ᄂᆞᆫ昇英이니在位七年이라

경명왕의 휘(諱)는 승영(昇英)이니, 재위 기간은 7년이었다.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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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後百濟甄萱二十七年○泰封弓裔十八年是歲亡○高麗太祖元年○後梁末帝貞明四年○日皇醍醐二十一年○西歷紀元後九百十八年이라夏六月丙辰에泰封諸將이王建을推戴ᄒᆞ야王을삼고國號ᄂᆞᆫ高麗오建元ᄒᆞ야曰天授라ᄒᆞ고弓裔ᄂᆞᆫ避走ᄒᆞ다가死ᄒᆞ니泰封이亡ᄒᆞ니라先是에將軍洪儒와裴玄慶과申崇謙과卜智謙等이王建宅에至ᄒᆞ야建다려謂ᄒᆞ야曰今에王의暴虐이日甚ᄒᆞ니桀紂의惡이라도過치아닐지라大抵廢昏立明ᄒᆞᆷ은天下大義니請컨ᄃᆡ公은殷周故事ᄅᆞᆯ行ᄒᆞ소셔ᄒᆞ거ᄂᆞᆯ建이作色曰吾ㅣ忠義로ᄡᅥ自許ᄒᆞ니王이비록暴亂ᄒᆞ나엇지二心을有ᄒᆞ리오ᄒᆞᆫᄃᆡ諸將曰時ᄂᆞᆫ難遭오易失이라天與不取ᄒᆞ면其殃을反受ᄒᆞ리니엇지天命을違ᄒᆞ고獨夫의게死ᄒᆞ리오ᄒᆞ거ᄂᆞᆯ建이오히려力拒ᄒᆞ엿더니其夫人柳氏ㅣ帳中에셔窺聽ᄒᆞ다가出ᄒᆞ야建다려謂曰義ᄅᆞᆯ擧ᄒᆞ야虐夫ᄅᆞᆯ伐ᄒᆞᆷ은自古皆然이라今에諸將의言을聞ᄒᆞ니妾도오히려奮發ᄒᆞ거든況大丈夫乎잇가ᄒᆞ고親히甲領을提ᄒᆞ야建의게被ᄒᆞ거ᄂᆞᆯ이에諸將이建을擁出ᄒᆞ야君臣의禮을行ᄒᆞ고人으로ᄒᆞ여곰馳呼曰王公이이믜義旗ᄅᆞᆯ擧ᄒᆞ엿다ᄒᆞ니百姓이此ᄅᆞᆯ聞ᄒᆞ고몬셔宮內에至ᄒᆞ야鼓噪ᄒᆞ고建을待ᄒᆞᆫ者ㅣ이믜萬餘人이라드ᄃᆡ여布政殿에셔卽位ᄒᆞ니弓裔ㅣ聞變ᄒᆞ고驚駭ᄒᆞ야曰王公이天下ᄅᆞᆯ得ᄒᆞ니吾事가已矣라ᄒᆞ고微服으로北門을出ᄒᆞ야巖谷間에서信宿ᄒᆞ고飢餓가甚ᄒᆞ야麥穗ᄅᆞᆯ截食ᄒᆞ다가맛ᄎᆞᆷᄂᆡ斧壤今平百姓의게遇害ᄒᆞ다○高麗ㅣ비로소官制ᄅᆞᆯ定ᄒᆞᆯᄉᆡ下詔ᄒᆞ야曰往者에泰封主ㅣ新羅의官職과郡邑의名號ᄅᆞᆯ多改ᄒᆞ엿스나今에그便易可曉ᄒᆞᆯ者ᄅᆞᆯ參酌施行ᄒᆞ라ᄒᆞ다○秋七月에高麗王이ᄯᅩ下詔曰泰封主ㅣ其慾을從ᄒᆞ야오쟉聚斂을日事ᄒᆞ고至於一頃田에六碩租稅ᄅᆞᆯ收ᄒᆞ야百姓으로ᄒᆞ야곰撤耕廢職ᄒᆞ야流亡이相繼ᄒᆞ니엇지人民의父母된本意리오自今으로天下의通法을遵ᄒᆞ야恒例ᄅᆞᆯ定ᄒᆞ라ᄒᆞ니라○高麗王이論功行賞ᄒᆞᆯᄉᆡ洪儒等二千餘人을各其金銀과錦繡와米穀을賜ᄒᆞ다○甄萱이一吉飡과閔郃을高麗에遣ᄒᆞ야卽位ᄅᆞᆯ賀ᄒᆞ거ᄂᆞᆯ王이厚禮ᄒᆞ다○高麗의熊今公今洪等十餘州縣이叛ᄒᆞ야後百濟의게降ᄒᆞ거ᄂᆞᆯ麗王이金行濤로ᄡᅧ東南招討使ᄅᆞᆯ拜ᄒᆞ야防備ᄒᆞ다○高麗王이松岳에移都ᄒᆞ고鐵圓으로ᄡᅧ東州라ᄒᆞ니곳今의鐵原郡이러라○甄萱이吳越에遣使ᄒᆞ다○十一月에高麗有司ㅣ上言ᄒᆞ되前王時에每歲仲冬에八關會ᄅᆞᆯ大設ᄒᆞ야福佑ᄅᆞᆯ祈ᄒᆞ엿스니請컨ᄃᆡ其制ᄅᆞᆯ遵行ᄒᆞ소셔ᄒᆞ거ᄂᆞᆯ王이이에法王王輪等十寺ᄅᆞᆯ都內에創立ᄒᆞ고八關會ᄅᆞᆯ仍設ᄒᆞ니八關은卽八戒라不殺生과不偸盜와不淫佚과不忘語와不飮酒와不坐高大牀과不著香華와不自樂觀聽이오關者ᄂᆞᆫ곳閉禁ᄒᆞᆫ다ᄂᆞᆫ意니八罪ᄅᆞᆯ犯치아니ᄒᆞᆫ다ᄒᆞᆷ이러라

경명왕 원년【후백제 견훤 27년 ○ 태봉 궁예 18년 이 해에 죽음 ○ 고려(高麗) 태조(太祖) 원년 ○ 후량 말제 정명 4년 ○ 일황 제호 21년 ○ 서력 기원 918년】이었다.

여름 6월 병진(丙辰)에 태봉(泰封)의 여러 장수가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아 국호는 고려라 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궁예(弓裔)는 피하여 도망가다가 죽으니, 태봉이 망하였다. 이에 앞서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의 집에 이르러서 왕건에게 말하기를, “지금 왕의 포학함이 날로 심하니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의 악함이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사리에 어긋난 왕을 몰아내고 사리에 밝은 왕을 세우는 것[廢昏立明]은 천하의 큰 뜻이니, 청컨대 공께서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고사(古事)를 행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건이 얼굴색이 바뀌며 말하기를, “내가 충의(忠義)로써 스스로 허락하였는데 왕이 비록 난폭하기는 하나 어찌 두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말하기를, “때를 만나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부여한 것을 취하지 않으면 그 재앙을 도리어 받을 것이니 어찌 천명을 거역하고, 포악한 군주[獨夫]에게 죽음을 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건이 오히려 힘써 거절하니 그의 부인 유씨(柳氏)가 장막 속에서 몰래 듣다가 나와서 왕건에게 말하기를, “의(義)를 들어 포학한 군주를 죽이는 것은 예부터 모두 그러했습니다. 지금 여러 장수의 말을 들으니 소첩도 오히려 힘이 떨쳐 일어나는데 하물며 대장부께서는 어떻겠습니까?” 하고 직접 갑옷을 가져다가 왕건에게 입혔다. 이에 여러 장수가 왕건을 호위하고 나아가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말을 타고 달리며 말하기를, “왕 공(公)이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고 하니 백성이 이를 듣고 먼저 궁 안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면서 왕건을 기다린 자들이 이미 1만여 명이었다. 드디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니 궁예가 변란 소식을 듣고 놀라서 말하기를, “왕 공이 천하를 얻었으니 나의 일은 끝났다.”라고 하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북문을 나가 바위 골짜기 사이에서 이틀 밤을 지샜다.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 이삭을 잘라서 먹다가 마침내 부양(斧壤)【지금의 평강(平康)】의 백성에게 해를 당하였다.

○ 고려가 비로소 관제를 정함에 조서를 내리기를, “예전에 태봉 왕이 신라(新羅)의 관직과 군읍(郡邑)의 명칭을 많이 고쳤으나 지금 그 편리하고 쉬운 것을 참작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 가을 7월에 고려 왕이 또한 조서를 내리기를, “태봉 왕이 그 욕심을 좇아서 오직 취렴(聚斂)을 일삼고 1경(頃)의 밭에서 6석(碩)의 조세를 거두어서 백성이 농사와 길쌈을 버리고 유망함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백성의 부모 된 본뜻이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천하에서 통용되는 법에 따라 항례(恒例)를 정하라.”고 하였다.

○ 고려 왕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에 홍유 등 2천여 명에게 각기 금은과 비단, 미곡을 하사하였다.

○ 견훤(甄萱)이 일길찬(一吉飡)과 민합(閔郃)을 고려에 보내서 즉위를 축하하니, 왕이 후한 예로 대하였다.

○ 고려의 웅주(熊州)【지금의 공주(公州)】와 운주(運州)【지금의 홍주(洪州)】 등 10여 주현(州縣)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後百濟)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김행도(金行濤)를 동남 초토사(東南招討使)로 임명하여 방비토록 하였다.

○ 고려 왕이 송악(松嶽)으로 도읍을 옮기고 철원(鐵圓)을 동주(東州)라고 하니 곧 지금의 철원군(鐵原郡)이다.

○ 견훤이 오(吳), 월(越)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11월에 고려 유사(有司)가 왕에게 아뢰기를, “전(前) 왕 때에 매년 11월에 팔관회(八關會)를 크게 열어서 복을 기원하였으니, 청컨대 그 제도를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에 법왕(法王)과 왕륜(王輪) 등 10개의 사찰을 도성 안에 새롭게 세우고 팔관회를 거듭해서 열었다. 팔관은 즉 팔계(八戒)이다. 죽이지 말 것, 도적질하지 말 것, 음란하고 방탕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 높고 큰 의자에 앉지 말 것, 향이나 꽃으로 꾸미지 말 것, 스스로 노래하거나 보거나 듣지 말 것이다. 관(關)이란 곧 막고 금지한다는 뜻이니, 여덟 가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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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後百濟甄萱三十三年○高麗太祖七年○後唐莊宗同光二年○日皇醍醐二十七年○西歷紀元後九百二十四年이라王이崩ᄒᆞ고母弟魏膺이立ᄒᆞ야高麗와聘好ᄒᆞ다

경명왕 7년【후백제 견훤 33년 ○ 고려 태조 7년 ○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2년 ○ 일황 제호 27년 ○ 서력 기원 924년】이었다.

왕이 돌아가시고 아우 위응(魏膺)이 즉위하여 고려(高麗)와 교빙하여 우호 관계를 맺었다.


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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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哀王의諱ᄂᆞᆫ魏膺이니在位三年이라

경애왕의 휘(諱)는 위응(魏膺)이니, 재위 기간은 3년이었다.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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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後百濟甄萱三十四年○高麗太祖八年○後唐莊宗同光三年○日皇醍醐二十八年○西歷紀元後九百二十五年이라高麗ㅣ征西大將軍庾黔弼로ᄒᆞ여곰後百濟의燕山鎭을攻ᄒᆞ야將軍吉奐을殺ᄒᆞ고ᄯᅩ任存郡今大에셔三千餘人을殺獲ᄒᆞ니甄萱이懼ᄒᆞ야乞和ᄒᆞ더라

경애왕 원년【후백제 견훤 34년 ○ 고려 태조 8년 ○ 후당 장종 동광 3년 ○ 일황 제호 28년 ○ 서력 기원 925년】이었다.

고려(高麗)가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黔弼)에게 후백제(後百濟)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도록 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한 임존군(任存郡)【지금의 대흥(大興)】에서 3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으니 견훤이 두려워하여 화친을 요청하였다.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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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後百濟甄萱三十六年○高麗太祖十年○後唐明宗天成二年○日皇醍醐三十年○西歷紀元後九百二十七年이라冬十月에甄萱이京都ᄅᆞᆯ攻入ᄒᆞ야王을弑ᄒᆞ고王의表弟金傅ᄅᆞᆯ立ᄒᆞ거ᄂᆞᆯ麗王이親히萱을討擊ᄒᆞ다가敗績ᄒᆞ다先是에萱이新羅의郊畿ᄅᆞᆯ進逼ᄒᆞ거ᄂᆞᆯ王이高麗의게告急ᄒᆞᆫᄃᆡ麗王이遣援ᄒᆞ야未至에萱이猝然히王都에入ᄒᆞ니時에王은鮑石亭에出遊ᄒᆞ야置酒歡樂ᄒᆞ다가萱兵의至ᄒᆞᆷ을聞ᄒᆞ고大驚ᄒᆞ야곳夫人으로더브러城南離宮에走匿ᄒᆞ니萱이王을索ᄒᆞ야弑ᄒᆞ고王妃ᄅᆞᆯ强辱ᄒᆞ며子女와珍寶ᄅᆞᆯ盡取ᄒᆞ야歸ᄒᆞ거ᄂᆞᆯ麗王이新羅에遣使ᄒᆞ야弔祭ᄒᆞ고親히精騎五千을率ᄒᆞ고甄萱을公山今大에셔邀擊ᄒᆞ다가萱兵의게被圍ᄒᆞᆷ이甚急ᄒᆞ더니大將申崇謙이貌가麗王과類ᄒᆞᆫ지라王ᄭᅴ奏曰臣이請컨ᄃᆡ敵人을誑ᄒᆞ리니다ᄒᆞ고이에王을林藪中에匿ᄒᆞ고自己가其車ᄅᆞᆯ代乘ᄒᆞ고將軍金樂으로더브러力戰ᄒᆞ다가死ᄒᆞ니王이此時ᄅᆞᆯ乘ᄒᆞ야得脫ᄒᆞ고旣歸에寺ᄅᆞᆯ建ᄒᆞ야二人의忠誠을報ᄒᆞ고申崇謙의諡ᄂᆞᆫ壯節이라ᄒᆞ다

경애왕 3년【후백제 견훤 36년 ○ 고려 태조 10년 ○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2년 ○ 일황 제호 30년 ○ 서력 기원 927년】이었다.

겨울 10월에 견훤(甄萱)이 경도(京都, 경주)를 공격하여 들어가서 왕을 시해하고 왕의 외종 동생[表弟] 김부(金傅)를 왕위에 세웠다. 고려 왕[麗王]이 직접 견훤을 공격하다가 패하였다. 이에 앞서 견훤이 신라(新羅)의 도성 가까이에 바짝 다가오니 왕이 고려에게 급히 알렸다. 고려 왕이 구원병을 보냈으나 도달하기 전에 견훤이 갑자기 왕도(王都)에 들어가니 그때에 왕은 포석정(鮑石亭)에 나아가 술을 마시며 노래를 하다가 견훤의 병사가 다다른 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곧 부인과 함께 성 남쪽 이궁(離宮)으로 달려가 숨었다. 견훤이 왕을 찾아내 죽이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자녀와 진귀한 보물을 모두 취하여 돌아갔다. 고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고 친히 날쌘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公山)【지금의 대구(大丘)】에서 맞아 싸웠다. 견훤의 병사들에게 포위를 당해 매우 위급하였는데 대장 신숭겸(申崇謙)의 외모가 고려 왕과 유사하였으므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청컨대 적들을 속이겠습니다.”하고 이에 왕을 수풀 속에 숨기고 자신이 왕의 수레를 대신 타고 장군 김낙(金樂)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 틈을 타서 탈출하여 돌아가서 사찰을 지어서 두 사람의 충성에 보답하였으며, 신숭겸의 시호는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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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王의姓은金이오諱ᄂᆞᆫ傅니伊飡孝宗의子오文聖王의後孫이오在位八年이라

경순왕의 성은 김(金)이고 휘(諱)는 부(傅)이니, 이찬(伊飡) 효종(孝宗)의 아들이고,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재위 기간은 8년이었다.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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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後百濟甄萱三十八年○高麗太祖十二年○後唐明宗天成四年○日皇醍醐三十二年○西歷紀元後九百二十九年이라先是에甄萱이甲卒五千을率ᄒᆞ고高麗ᄅᆞᆯ攻ᄒᆞ야將軍洪術을殺ᄒᆞ거ᄂᆞᆯ至是ᄒᆞ야春正月에麗王이古昌郡에셔今安甄萱과大戰ᄒᆞ야八千餘人을殺獲ᄒᆞ니於是에永安河曲安東近縣等三十餘城이다高麗에降ᄒᆞ다○冬十二月에麗王이西京에至ᄒᆞ야學校ᄅᆞᆯ創設ᄒᆞ고六部生徒ᄅᆞᆯ聚集ᄒᆞ야敎授ᄒᆞ고兼ᄒᆞ야醫卜二業을置ᄒᆞ다

경순왕 2년【후백제 견훤 38년 ○ 고려 태조 12년 ○ 후당 명종 천성 4년 ○ 일황 제호 32년 ○ 서력 기원 929년】이었다.

이에 앞서 견훤(甄萱)이 갑졸(甲卒) 5천 명을 거느리고 고려(高麗)를 공격하여 장군 홍술(洪術)을 죽였다. 이에 이르러서 봄 정월에 고려 왕이 고창군(古昌郡)에서【지금의 안동(安東)】 견훤과 크게 싸워 8천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으니 이때에 영안(永安), 하곡(河曲)【안동 근처의 현】 등 30여 성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 겨울 12월에 고려 왕이 서경(西京)에 이르러서 학교를 세우고 6부(部) 생도(生徒)를 모집하여 가르치고, 이와 함께 의업(醫業)과 점술업[卜業] 2개를 설치하였다(930).


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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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後百濟甄萱四十年○高麗太祖十四年○後唐明宗長興二年○日皇朱雀元年○西歷紀元後九百三十一年이라春二月에王이高麗王과國都에셔會ᄒᆞ다先是에王이高麗에遣使ᄒᆞ야相見ᄒᆞ기ᄅᆞᆯ請ᄒᆞ거ᄂᆞᆯ麗王이곳五十騎ᄅᆞᆯ率ᄒᆞ고至ᄒᆞ니王이臨海殿에셔設宴ᄒᆞᆯᄉᆡ酒酣에王曰小國이天祐ᄅᆞᆯ未獲ᄒᆞ야甄萱의㧻喪ᄒᆞᆫᄇᆡ되니엇지痛忿치아니ᄒᆞ리오ᄒᆞ고因ᄒᆞ야泫然流涕ᄒᆞᄂᆞᆫ지라麗王이ᄯᅩᄒᆞᆫ泣下ᄒᆞ고數旬을留ᄒᆞ다가還ᄒᆞ다麗王이初至ᄒᆞᆯ時에隊伍가整肅ᄒᆞ고秋毫ᄅᆞᆯ不犯ᄒᆞ니都中士女ㅣ擧手相慶ᄒᆞ야曰昔者甄氏가來ᄒᆞᆯ時ᄂᆞᆫ豺狼을逢ᄒᆞᆫ듯ᄒᆞ더니今에王公의來ᄒᆞᆷ은곳父母ᄅᆞᆯ見ᄒᆞᆷ과如ᄒᆞ다ᄒᆞ더라

경순왕 4년【후백제 견훤 40년 ○ 고려 태조 14년 ○ 후당 명종 장흥(長興) 2년 ○ 일황 주작(朱雀) 원년 ○ 서력 기원 931년】이었다.

봄 2월에 왕이 고려(高麗) 왕과 국도(國都, 경주)에서 회동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서로 보기를 청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곧 50여 기마병을 거느리고 도달하니 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술에 취한 왕이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견훤(甄萱)으로 인해 상(喪)을 치르게 되었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고려 왕이 또한 눈물을 흘리고 수십 일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고려 왕이 처음에 이르렀을 때에 대오가 정숙하고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도성 안 남녀가 손을 들어 환영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견씨(甄氏)가 왔을 때는 승냥이나 이리를 만난 듯하였는데 지금 왕 공의 방문은 곧 부모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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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後百濟甄萱四十三年○高麗太祖十七年○後唐閔帝應順元年○日皇朱雀四年○西歷紀元後九百三十四年이라高麗王이運州今洪ᄅᆞᆯ伐ᄒᆞ니甄萱이甲士五千을率ᄒᆞ고迎戰ᄒᆞ다가和親을請ᄒᆞ거ᄂᆞᆯ右將軍庾黔弼이不可ᄒᆞ야曰今日事勢ᄂᆞᆫ罷戰치못ᄒᆞ리라ᄒᆞ고곳勁騎數千으로ᄡᅧ甄萱을突擊ᄒᆞ야三千餘級을斬獲ᄒᆞ니自是로熊津今公以北三十餘城이다聞風自降ᄒᆞ니라

경순왕 7년【후백제 견훤 43년 ○ 고려 태조 17년 ○ 후당 민제(閔帝) 응순(應順) 원년 ○ 일황 주작 4년 ○ 서력 기원 934년】이었다.

고려(高麗) 왕이 운주(運州)【지금의 홍주(洪州)】를 공격하니, 견훤(甄萱)이 갑사(甲士)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우다가 화친을 청하였다. 우장군(右將軍) 유금필(庾黔弼)이 불가하다며 말하기를, “지금의 형세는 전쟁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날쌘 기병(騎兵) 수천을 데리고 견훤에게 돌격하여 3천여 급의 목을 베어 가져왔다. 이로부터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 이북 30여 성이 모두 소식을 듣고 항복하였다.


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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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年是歲新羅亡○後百濟甄萱四十四年○高麗太祖十八年○後唐閔帝應順二年○日皇朱雀五年○西歷紀元後九百三十五年이라春에甄萱의子神劍이其父ᄅᆞᆯ金山佛寺金溝金山寺에幽ᄒᆞ고其弟金剛을殺ᄒᆞ고自立ᄒᆞ다○甄萱이高麗에來奔ᄒᆞ다萱이金山寺에在ᄒᆞᆫ지三月에守卒을飮醉ᄒᆞ고季子能乂와밋其女와嬖妾等을率ᄒᆞ고羅州에至ᄒᆞ야高麗王을請見ᄒᆞ거ᄂᆞᆯ王이遣使迎接ᄒᆞ고南宮을予ᄒᆞ야厚禮로ᄡᅧ待ᄒᆞ며位ᄅᆞᆯ百僚上에置ᄒᆞ고楊州ᄅᆞᆯ賜ᄒᆞ야食邑을ᄉᆞᆷ다○冬十月에王이高麗의게降ᄒᆞ니新羅ㅣ亡ᄒᆞ다時에王이土地가日削ᄒᆞᆷ을見ᄒᆞ고이에群臣으로더브러高麗에降코ᄌᆞᄒᆞᆫᄃᆡ王子某ㅣ諫ᄒᆞ야曰國家存亡은天命이自在ᄒᆞ니맛ᄃᆡ히忠臣義士ᄅᆞᆯ合ᄒᆞ야死守ᄒᆞ다가力盡ᄒᆞᆫ後에已ᄒᆞᆯ지라엇지一千年社稷을一朝에他人을輕予ᄒᆞ리오王曰孤危가如此ᄒᆞ니吾ㅣ無辜ᄒᆞᆫ人民으로ᄒᆞ여곰肝腦塗地ᄒᆞᆷ을不忍ᄒᆞᆫ다ᄒᆞ고드ᄃᆡ여高麗에請降ᄒᆞ거ᄂᆞᆯ王子ㅣ泣辭ᄒᆞ고皆骨山金剛에入ᄒᆞ야麻衣草食으로其身을終ᄒᆞ니라王이高麗에至ᄒᆞ니麗王이郊外에出ᄒᆞ야迎勞ᄒᆞ고柳花宮을賜ᄒᆞ고長女樂浪公主로ᄡᅧ妻ᄒᆞ고ᄯᅩ政丞을拜ᄒᆞ야位가太子의上에在케ᄒᆞ고其故都로ᄡᅧ慶州라ᄒᆞ고因ᄒᆞ야其食邑을삼다新羅繼統이朴氏가十王이오昔氏가八王이오金氏가三十七王이니合五十五王이오歷年이共九百九十二年이러라

경순왕 8년【이 해에 신라가 망했다 ○ 후백제 견훤 44년 ○ 고려 태조 18년 ○ 후당 민제 응순 2년 ○ 일황 주작 5년 ○ 서력 기원 935년】이었다.

봄에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이 그 아비를 금산(金山)의 불사(佛寺)【금구(金溝)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그의 아우 금강(金剛)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 견훤이 고려(高麗)로 도망쳐 왔다. 견훤이 금산사에 있은 지 3개월에 지키던 병졸들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고,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딸, 총애하던 애첩 등을 이끌고 나주(羅州)에 이르러 고려 왕을 만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영접하고 남궁(南宮)을 내어 주며 후한 예로써 대하였다. 직위를 신하들 위에 두고 양주(楊州)를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왕이 고려에 항복하니 신라(新羅)가 망하였다. 이때에 왕이 영토가 날마다 줄어드는 것을 보고 군신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왕자 모(某)가 간언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천명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과 의사가 힘을 합하여 죽음으로써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칠 것입니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쉽게 넘겨 주겠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내가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하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왕이 고려에 이르니 고려 왕이 교외 밖에 나와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유화궁(柳花宮)을 하사하였다. 장녀 낙랑 공주(樂浪公主)를 처로 맞이하고 또한 정승(政丞)에 임명하여 직위가 태자의 위에 있게 하고 그 옛 도성으로써 경주(慶州)라 하여 식읍으로 삼았다. 신라가 왕통을 계승한 것이 박씨가 10명의 왕이고, 석씨가 8명의 왕이며, 김씨가 37명의 왕이었으니 통합 55명의 왕이다. 왕업을 이어 온 햇수는 모두 992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