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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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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三十八年○新羅赫居世元年○年宣帝五鳳元年○日皇崇神四十一年○西歷紀元前五十七年夏四月丙辰에新羅太祖朴赫居世ㅣ立ᄒᆞ다先是에朝鮮遺民이慶州六部에分居ᄒᆞ니此ᄂᆞᆫ곳辰韓의始라君長이無ᄒᆞ더니赫居世ㅣ生ᄒᆞᄆᆡ爲人이英俊ᄒᆞ거ᄂᆞᆯ六部ㅣ推立ᄒᆞ야君을삼으니年이十三이라國號ᄅᆞᆯ徐羅伐이라ᄒᆞ고辰韓地에都ᄒᆞ며朴으로ᄡᅥ姓을稱ᄒᆞ니그始生時에匏中에셔出ᄒᆞ엿다ᄒᆞᄂᆞᆫᄃᆡ匏ᄂᆞᆫ俗言에朴인고로謂ᄒᆞᆷ이오赫居世ᄂᆞᆫ王이라ᄒᆞᆷ이러라

東史에曰新羅建國時에號曰徐羅伐又曰斯羅曰斯盧曰新羅曰鷄林이라ᄒᆞ더니智證王時에至ᄒᆞ야新羅라確定ᄒᆞ며辰韓은今慶州郡이라

【마한 개국 138년 ○ 신라 혁거세(赫居世) 원년 ○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 ○ 일황 숭신(崇神) 41년 ○ 서력(西歷) 기원전 57년】

여름 4월 병진(丙辰)에 신라(新羅) 태조(太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경주(慶州) 6부(部)에 나뉘어서 정착하니, 이것이 바로 진한(辰韓)의 시초이다. 군장이 없었는데 혁거세가 태어나니 사람 됨됨이가 영민하고 준수하였기 때문에 6부가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았으니 나이가 13세였다.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고 진한 땅에 도읍을 정했으며 박(朴)을 성씨로 칭하였다. 처음 태어났을 적에 박[匏]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박은 속언에 박(朴)이라고 하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고, 혁거세는 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사(東史)』에서 이르길, 신라 건국 때에 국호를 서라벌, 또는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 계림(鷄林)이라고 불렀는데, 지증왕(智證王) 때에 이르러 신라라 확정하였으며, 진한은 지금의 경주군이다.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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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四十二年○新羅赫居世五年○漢宣帝甘露元年○日皇崇神四十五年○西歷紀元前五十年春正月에新羅ㅣ閼英을立ᄒᆞ야妃ᄅᆞᆯ封ᄒᆞ다初에龍이閼英井에見ᄒᆞ야右脇으로女ᄅᆞᆯ生ᄒᆞ거ᄂᆞᆯ老嫗ㅣ곳收養ᄒᆞ고因ᄒᆞ야井으로ᄡᅧ名ᄒᆞ엿더니밋長成ᄒᆞᄆᆡ才德이俱有ᄒᆞ거ᄂᆞᆯ赫居世ㅣ納ᄒᆞ야妃ᄅᆞᆯ삼으니妃가賢行이有ᄒᆞ야能히內輔ᄒᆞᄂᆞᆫ지라時人이二聖이라謂ᄒᆞ더라

【마한 개국 142년 ○ 신라 혁거세 5년 ○ 한 선제 감로(甘露) 원년 ○ 일황 숭신 45년 ○ 서력 기원전 53년】

봄 정월에 신라(新羅)가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았다. 초기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을 보면서 오른쪽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는데, 노파가 바로 거두어서 길렀고 그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 성장함에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혁거세가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행실이 어질어서 내조를 잘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二聖]이라고 말하였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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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四十五年○新羅赫居世八年○漢宣帝甘露四年○日皇崇神四十八年○西歷紀元前五十年倭國이新羅邊境을侵ᄒᆞ다가王의神德이有ᄒᆞᆷ을聞ᄒᆞ고乃還ᄒᆞ더라

倭ᄂᆞᆫ卽今日本이라其國이我國東南에在ᄒᆞ야三島ᄅᆞᆯ合ᄒᆞ야成ᄒᆞ고至今二千五百五十餘年에一姓이相傳ᄒᆞ며其始祖ᄂᆞᆫ神武天皇이오崇神天皇에至ᄒᆞ야비로소我邦에通ᄒᆞ며其後垂仁天皇時에新羅脫解王과交聘ᄒᆞ고百濟近肖古王時에王仁을遣ᄒᆞ야論語와千字文을傳授ᄒᆞ니其國의文字가有ᄒᆞᆷ이自此로始ᄒᆞ며百濟聖王이金銅佛과밋佛經을送ᄒᆞ니此ᄂᆞᆫᄯᅩ佛法이日本에入ᄒᆞᆫ始初오ᄯᅩ百濟가天文曆法과醫博士와樂人과陶匠瓦匠과鞍工과釀酒人과縫衣工等을遣ᄒᆞ니日本이다此法을仿行ᄒᆞ야其國의學術技藝가自此로發達ᄒᆞ며新羅文武王時에天武天皇이비로소孔子ᄭᅴ祀ᄒᆞ고新羅眞聖女主時에宇多天皇이關白의게委政ᄒᆞ니高麗季世로부터 本朝宣祖時ᄭᆞ지干戈ᄅᆞᆯ屢構ᄒᆞᆫ者ㅣ다關白의所使오至今睦仁皇帝ᄂᆞᆫ泰西諸國의富强을慕ᄒᆞ야關白을廢ᄒᆞ고政治ᄅᆞᆯ改革ᄒᆞ며疆土ᄅᆞᆯ益拓ᄒᆞ니大抵政權을關白이執ᄒᆞᆫ지凡六百六十年이러라

【마한 개국 145년 ○ 신라 혁거세 8년 ○ 한 선제 감로 4년 ○ 일황 숭신 48년 ○ 서력 기원전 50년】

왜국(倭國)이 신라(新羅)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왕에게 신덕(神德)이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돌아갔다.

왜는 지금의 일본(日本)이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3개의 섬이 합해서 이루어졌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2550여 년 동안 하나의 성씨가 서로 왕위를 전하였으며, 그 시조는 진무천황[神武天皇]이다. 수진천황[崇神天皇]에 이르러서 비로소 우리나라와 교류하였으며, 이후 스이닌천황[垂仁天皇] 때에 신라 탈해왕(脫解王)과 교빙(交聘)하였다. 백제(百濟)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수해 주니, 그 나라에서 문자가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백제 성왕(聖王)이 금동불(金銅佛)과 불경(佛經)을 보내니 이 또한 불법(佛法)이 일본에 들어간 시초이다. 또 백제가 천문 역법(天文曆法)과 의박사(醫博士), 악공, 도자기 장인[陶匠], 기와 장인[瓦匠], 말안장 장인[鞍工], 술 만드는 사람과 옷 만드는 기술자 등을 보내니 일본이 모두 그 기술을 모방하였다. 그 나라의 학술과 기술이 모두 이로부터 발달하였으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텐무천황[天武天皇]이 비로소 공자(孔子)께 제사를 지냈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때에 우다천황(宇多天皇)이 관백(關白)에게 정사를 맡기니 고려(高麗) 말기부터 본조(本朝) 선조(宣祖) 때까지 전쟁을 여러 차례 일으킨 것은 모두 관백의 소행이다. 지금에 이르러 무츠히토황제[睦仁皇帝]는 서양의 여러 나라가 부강한 것을 흠모하여 관백을 없애고 정치를 개혁하였으며 강토를 더욱 개척하였다. 대략 관백이 집권한 지 660년이었다.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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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五十八年○新羅赫居世二十一年○高句麗高朱蒙元年○漢元帝建昭二年○日皇崇神六十一年○西歷紀元前三十七年新羅ㅣ京城을築ᄒᆞ고號曰金城慶州郡東이라ᄒᆞ다○高句麗始祖高朱蒙이立ᄒᆞ니朱蒙은北扶餘玄菟屬開原縣東明聖王後漢書及魏書에幷云ᄒᆞᄃᆡ北扶餘始祖의名은東明이의子라骨表가英偉ᄒᆞ고年이七歲에弓矢ᄅᆞᆯ自作ᄒᆞ야百發百中ᄒᆞᄂᆞᆫ지라後에其異母兄弟七人이朱蒙의才能을忌ᄒᆞ야殺코ᄌᆞᄒᆞ거ᄂᆞᆯ朱蒙이逃難ᄒᆞ야卒本扶餘國名이니在今寧古塔南이오俗本에成川이라에至ᄒᆞ니扶餘王이無子ᄒᆞ야朱蒙을見ᄒᆞ고女로ᄡᅥ妻ᄒᆞ엿다가扶餘王이崩ᄒᆞ고朱蒙이嗣位ᄒᆞ야卒本에始都ᄒᆞ고子琉璃王二十二年에國內城今楚山北隔水之地오鴨綠婆猪兩水가未合ᄒᆞᆫ處라에移都ᄒᆞ고漢의高句麗縣을襲取ᄒᆞ야國號ᄅᆞᆯ高句麗라ᄒᆞ고因ᄒᆞ야高로ᄡᅥ姓ᄒᆞ고國境을廣拓ᄒᆞ야北은扶餘地와眞蕃玄菟故地오南은浿南과漢北을占踞ᄒᆞ고山上王十三年에丸都城滿浦堡北岸이라에移居ᄒᆞ고東川王二十一年에平壤에移都ᄒᆞ니其地ᄂᆞᆫ五穀이宜ᄒᆞ고良馬貂㺚美珠가有ᄒᆞ며其人은强勇ᄒᆞ고會同揖讓의禮가有ᄒᆞ며衣服은白色을崇尙ᄒᆞ더라

【마한 개국 158년 ○ 신라 혁거세 21년 ○ 고구려 고주몽(高朱蒙) 원년 ○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 ○ 일황 숭신 61년 ○ 서력 기원전 37년】

신라(新羅)가 경성(京城)을 쌓고 이를 금성(金城)【경주군(慶州郡) 동쪽】이라고 하였다.

○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고주몽이 즉위하니 주몽은 북부여(北扶餘)【현도(玄菟)에 속한 개원현(開原縣)】 동명 성왕(東明聖王)【『후한서(後漢書)』와 『위서(魏書)』에서 함께 언급하기를, “북부여 시조의 이름은 동명이다.”라고 하였다.】의 아들이다. 골격과 생김새가 아름답고 장대했으며, 나이 7세에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어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다. 후에 이복형제 7명이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주몽이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남쪽에 있고, 『속서(俗書)』에는 성천(成川)이라고 하였다.】에 이르니 부여 왕이 아들이 없어서 주몽을 보고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부여 왕이 돌아가시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졸본에 처음 도읍을 정하고 아들 유리왕(琉璃王) 22년(3)에 국내성(國內城)【지금의 초산(楚山) 북쪽 강 건너 땅으로, 압록강(鴨綠江)과 파저강(婆猪江)이 서로 만나지 않는 곳이다.】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공격하여 빼앗아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고 국경을 널리 개척하여 북쪽으로는 부여 땅과 진번(眞蕃), 현도의 옛 땅과, 남쪽으로는 패수(貝水) 남쪽과 한강(漢江) 북쪽을 점령하였다. 산상왕(山上王) 13년(209)에 환도성(丸都城)【지금의 만포보(滿浦堡) 북쪽 언덕에 있다.】으로 옮겨 정착하고 동천왕(東川王) 21년(247)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평양은 오곡이 잘 자라고 좋은 말과 담비, 수달, 아름다운 구슬이 있으며, 그 나라 사람은 강하고 용맹하였다. 함께 모여서 읍양(揖讓)하는 예의가 있었으며,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였다.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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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六十一年○新羅赫居世二十四年○高句麗高朱蒙四年○漢元帝建昭五年○日皇崇神六十四年○西歷紀元前三十四年秋七月에高句麗ㅣ卒本에城郭을築ᄒᆞ고宮室을營ᄒᆞ다

【마한 개국 161년 ○ 신라 혁거세 24년 ○ 고구려 고주몽 4년 ○ 한 원제 건소 5년 ○ 일황 숭신 64년 ○ 서력 기원전 34년】

가을 7월에 고구려(高句麗)가 졸본(卒本)에 성곽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었다.


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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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六十七年○新羅赫居世三十年○高句麗高朱蒙十年○漢成帝河平元年○日皇垂仁二年○西歷紀元前二十八年夏에樂浪人이新羅ᄅᆞᆯ侵ᄒᆞ다가邊界에至ᄒᆞ야夜戶가不扃ᄒᆞ고露積이被野ᄒᆞᆷ을見ᄒᆞ고相謂曰人民이相盜치아니ᄒᆞ니可謂有道ᄒᆞᆫ國이라吾儕가掩襲ᄒᆞᆷ이不可ᄒᆞ다ᄒᆞ고引還ᄒᆞ더라

【마한 개국 167년 ○ 신라 혁거세 30년 ○ 고구려 고주몽 10년 ○ 한 성제(成帝) 하평(河平) 원년 ○ 일황 수인(垂仁) 2년 ○ 서력 기원전 28년】

여름에 낙랑(樂浪)인이 신라(新羅)를 침략하려고 변경에 이르렀는데 밤에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이슬 맞은 곡식이 들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래 습격하는 것을 옳지 않다.”라고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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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六十八年○新羅赫居世三十一年○高句麗高朱蒙十一年○漢成帝河平二年○日皇垂仁三年○西歷紀元前二十七年冬十一月에高勾麗ㅣ北沃沮今咸鏡北道ᄅᆞᆯ滅ᄒᆞ다北沃沮ᄂᆞᆫ北으로挹婁ᄅᆞᆯ接ᄒᆞᄆᆡ挹婁의寇掠을畏懼ᄒᆞ야恒常巖穴에避居ᄒᆞ다가冬時에至ᄒᆞ야挹婁의不來ᄒᆞᆷ을見ᄒᆞ고바야흐로下居ᄒᆞ더니맛ᄎᆞᆷᄂᆡ麗의게滅ᄒᆞᆫᄇᆡ되고挹婁ᄂᆞᆫ肅愼氏니卽靺鞨이러라

【마한 개국 168년 ○ 신라 혁거세 31년 ○ 고구려 고주몽 11년 ○ 한 성제 하평 2년 ○ 일황 수인 3년 ○ 서력 기원전 27년】

겨울 11월에 고구려(高句麗)가 북옥저(北沃沮)【지금의 함경북도(咸鏡北道)】를 멸망시켰다. 북옥저는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인접해 있었으므로 읍루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항상 바위 굴속에 피하여 지냈다. 겨울철에 이르러 읍루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내려와서 지냈는데, 마침내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였다. 읍루는 숙신씨(肅愼氏)이니 바로 말갈(靺鞨)이다.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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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七十五年○新羅赫居世三十八年○高句麗高朱蒙十八年○漢成帝鴻嘉元年○日皇垂仁十年○西歷紀元前二十年春二月에新羅ㅣ瓠公을遣ᄒᆞ야馬韓에聘ᄒᆞ니馬韓王이讓責ᄒᆞ야曰辰卞二韓은我의屬國이어ᄂᆞᆯ近年에職貢을不輸ᄒᆞ니事大ᄒᆞᄂᆞᆫ禮가如此乎아ᄒᆞ거ᄂᆞᆯ對曰我國이二聖二聖은赫居世及閼英이라이肇興ᄒᆞᆷ으로브터國內가大治ᄒᆞ고辰卞二邦과樂浪과日本이다畏懷ᄒᆞ나吾王이謙虛ᄒᆞᄂᆞᆫ心으로貴國에修聘ᄒᆞ니可謂禮에過ᄒᆞ다ᄒᆞ겟거ᄂᆞᆯ今에王이도로혀怒ᄒᆞᆷ은何故오ᄒᆞᆫᄃᆡ馬韓王이益怒ᄒᆞ야殺코자ᄒᆞ니左右ㅣ諫止ᄒᆞ야이에許還ᄒᆞ니라先是에秦人이始皇의苛政을苦ᄒᆞ야馬韓에來居ᄒᆞ다가至是ᄒᆞ야다시新羅의게依附ᄒᆞᄂᆞᆫ고로馬韓이忌嫉ᄒᆞ더라

【마한 개국 175년 ○ 신라 혁거세 38년 ○ 고구려 고주몽 18년 ○ 한 성제 홍가(鴻嘉) 원년 ○ 일황 수인 10년 ○ 서력 기원전 20년】

봄 2월에 신라(新羅)가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馬韓)을 방문하니 마한 왕이 조용히 꾸짖기를,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屬國)인데 근년에 공물을 바치지 않으니 사대(事大)하는 예가 어찌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두 성인【두 성인은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이다.】이 일어나기 시작한 이후부터 국내가 크게 다스려지고 진한과 변한, 낙랑(樂浪)과 일본(日本)이 모두 두려움을 품고 있으나, 우리 왕이 겸허한 마음으로 귀국에 신하를 보내었다. 이는 예를 갖춤이 지나치다고 할 만한데, 지금 왕이 도리어 화를 내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라고 하니 마한 왕이 더욱 화를 내어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좌우가 진언하여 그치게 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보다 먼저 진(秦)나라 사람이 시황제(始皇帝)의 학정을 괴로워하여 마한으로 와서 정착하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다시 신라에게 의지하는 까닭에 마한이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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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七十六年○新羅赫居世三十九年○高句麗高朱蒙十九年○漢成帝鴻嘉二年○日皇垂仁十一年○西歷紀元前十九年春에馬韓王이崩ᄒᆞ거ᄂᆞᆯ或이新羅王을勸ᄒᆞ야曰韓王이前日에我의使臣을辱ᄒᆞ엿스니今에맛당히其喪을乘ᄒᆞ야伐ᄒᆞ자ᄒᆞᆫᄃᆡ王曰人의災ᄅᆞᆯ幸ᄒᆞᆷ이不仁이라ᄒᆞ고遣使弔慰ᄒᆞ니라○高勾麗王이崩ᄒᆞ고子琉璃ㅣ類利ㅣ立ᄒᆞ다初에朱蒙이北扶餘에在ᄒᆞᆯ時에禮氏ᄅᆞᆯ先娶ᄒᆞ야類利가生ᄒᆞᄆᆡ息信이遂絶ᄒᆞ다가其後에類利ㅣ王의所遺ᄒᆞᆫ斷劍을得ᄒᆞ야王ᄭᅴ進呈ᄒᆞ고父子ㅣ비로소相聚ᄒᆞ야太子ㅣ되엿더니至是ᄒᆞ야立ᄒᆞ니라

【마한 개국 176년 ○ 신라 혁거세 39년 ○ 고구려 고주몽 19년 ○ 한 성제 홍가 2년 ○ 일황 수인 11년 ○ 서력 기원전 19년】

봄에 마한(馬韓) 왕이 돌아가셨는데[崩] 어떤 사람이 신라 왕에게 권하기를, “마한 왕이 전날에 우리의 사신을 모욕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그 상중(喪中)을 틈타서 정벌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인(仁)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유리(琉璃, 類利)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주몽(朱蒙)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와 먼저 혼인하여 유리를 낳았는데 소식이 끊겼다. 그 후에 유리가 왕이 남겨 두었던 단검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 올리니 부자가 비로소 서로 만나 태자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즉위하였다.


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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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七十七年○新羅赫居世四十年○高句麗琉璃王元年○百濟溫祚王元年○漢成帝鴻嘉三年○日皇垂仁十二年○西歷紀元前十八年春에百濟始祖高溫祚ㅣ立ᄒᆞ니此ᄂᆞᆫ곳溫祚王이라初에高句麗王高朱蒙이卒本扶餘에逃難ᄒᆞ엿다가卒本扶餘主의第二女ᄅᆞᆯ娶ᄒᆞ고ᄯᅩ其王의位를繼ᄒᆞ야二子를生ᄒᆞ니長曰沸流오次曰溫祚라밋禮氏의生ᄒᆞᆫ類利가高句麗太子ㅣ되ᄆᆡ沸流兄弟가太子ㅣ不容ᄒᆞᆯ가恐ᄒᆞ야烏干馬黎等十人으도더브러南遁ᄒᆞ야漢山에至ᄒᆞ야慰禮城을築ᄒᆞ고居ᄒᆞ더니其後十三年에沸流ᄂᆞᆫ其民을海濱彌鄒今仁川府에居케ᄒᆞ고溫祚ᄂᆞᆫ河南慰禮城今廣州古邑에定都ᄒᆞ야十臣으로ᄡᅧ輔相을삼고國號ᄅᆞᆯ十濟라ᄒᆞ더니其後에沸流ㅣ彌鄒의地方이土濕水鹹ᄒᆞ야安居치못ᄒᆞ고慰禮城에來ᄒᆞ야人民이安泰ᄒᆞ고都邑이旣定ᄒᆞᆷ을見ᄒᆞ고慙恚ᄒᆞ야死ᄒᆞ니이에其民이다慰禮에歸ᄒᆞᄂᆞᆫ지라다시國號ᄅᆞᆯ定ᄒᆞ야百濟라ᄒᆞ고ᄯᅩ疆域을定ᄒᆞᆯᄉᆡ北은浿河今谷山能成江이니卽浿江上流라에至ᄒᆞ고南은熊川今公이오西ᄂᆞᆫ大海오東은走壤今春에至ᄒᆞ더라

【마한 개국 177년 ○ 신라 혁거세 40년 ○ 고구려 유리왕 원년 ○ 백제 온조왕(溫祚王) 원년 ○ 한 성제 홍가 3년 ○ 일황 수인 12년 ○ 서력 기원전 18년】

봄에 백제(百濟) 시조(始祖) 고온조(高溫祚)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온조왕이다. 처음에 고구려(高句麗) 왕 고주몽(高朱蒙)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난을 피하였는데, 졸본부여 왕의 두 번째 딸과 혼인하고 또한 그 왕위를 물려받아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첫째가 비류(沸流)이고 둘째가 온조이다. 예씨(禮氏)에게서 태어난 유리(琉璃, 類利)가 고구려 태자가 되었으므로 비류 형제가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가 한산(漢山)에 이르러서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살았다. 그 후 13년에 비류는 그의 백성을 해안가 미추(彌鄒)【지금의 인천부(仁川府)】에 정착하게 하였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지금의 광주(廣州) 옛 읍】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10명의 신하를 보필하는 재상[輔相]으로 삼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그 후에 비류가 미추 지역이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지내지 못하였는데, 위례성에 와서 백성이 편안하고 태평하며 도읍이 이미 정해진 것을 보고 부끄럽고 화가 나서 죽었다. 이에 그 백성이 모두 위례에 귀화하였으므로 다시 국호를 정하여 백제라고 하였다. 또한 강역(疆域)을 정할 때에 북쪽은 패하(浿河)【지금의 곡산(谷山) 능성강(能成江)이니 바로 패강 상류이다.】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지금의 공주(公州)】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이며, 동쪽은 주양(走壤)【지금의 춘천(春川)】에 이르렀다.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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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八十六年○新羅赫居世四十九年○高句麗琉璃王十年○百濟溫祚王十年○漢成帝元延四年○日皇垂仁二十一年○西歷元紀前九年夏四月에高句麗王이群臣다려謂ᄒᆞ야曰鮮卑가今俄屬西伯里亞其險固ᄅᆞᆯ恃ᄒᆞ고我國을屢侵ᄒᆞ니이졔此患을能制ᄒᆞᆯ者ㅣ有ᄒᆞ면重賞을與ᄒᆞ리라ᄒᆞᆫᄃᆡ扶芬奴ㅣ獻策曰鮮卑ᄂᆞᆫ勇悍ᄒᆞ고ᄯᅩ愚蠢ᄒᆞ니力鬪치못ᄒᆞᆯ지라今에反間을設ᄒᆞ야我의國少兵弱ᄒᆞᆷ을示ᄒᆞ면彼가應當設備치아니ᄒᆞ리니臣이其隙을俟ᄒᆞ야間道로精兵을進ᄒᆞ고王은佯敗ᄒᆞ야彼로ᄒᆞ여곰空城來追케ᄒᆞ야臣은其城에入ᄒᆞ고王은回軍返擊ᄒᆞ면鮮卑ᄅᆞᆯ可克ᄒᆞ리이다ᄒᆞ거ᄂᆞᆯ王이其計ᄅᆞᆯ從ᄒᆞ엿더니鮮卑가果然來追ᄒᆞ거ᄂᆞᆯ扶芬奴ㅣ其城에入ᄒᆞ야前後夾攻ᄒᆞ니鮮卑ㅣ計窮力盡ᄒᆞ야降服ᄒᆞᄂᆞᆫ지라王이扶芬奴ᄅᆞᆯ賞ᄒᆞ야食邑을予ᄒᆞᆫᄃᆡ扶芬奴ㅣ辭曰此ᄂᆞᆫ王의德이라臣이何功이有ᄒᆞ리오ᄒᆞ고不受ᄒᆞ거ᄂᆞᆯ王이이에黃金三十斤과良馬十匹을賜ᄒᆞ다

【마한 개국 186년 ○ 신라 혁거세 49년 ○ 고구려 유리왕 10년 ○ 백제 온조왕 10년 ○ 한 성제 원연(元延) 4년 ○ 일황 수인 21년 ○ 서력 기원전1) 9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선비(鮮卑)【지금의 러시아 소속 시베리아[西伯里亞]이다.】가 지역이 험하고 견고한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침략해 오니, 이제 그러한 근심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후한 상을 하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분노(扶芬奴)가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선비는 용맹하고 사나우나, 또한 어리석고 우둔하여 힘으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지금 반간(反間)2)의 계책을 써서 우리나라가 작고 병사가 약한 것처럼 보이면 저들이 분명 미리 대비하지 않을 것이니, 신이 그 틈을 타서 사잇길로 정예병을 이끌고 나아가겠습니다. 왕께서는 거짓 패배하는 척하며 저들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쫓도록 하시면, 신이 그 성에 들어갈 것입니다. 왕께서는 회군하여 반격하시면 선비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계책대로 따랐더니 선비가 과연 추격해 왔다. 부분노가 그 성에 들어가서 앞뒤로 협공하니 선비가 계책이 다하고 힘이 다해서 항복하였다. 왕이 부분노에게 상으로 식읍(食邑)을 주었는데 부분노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는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어찌 공(功)이 있겠습니까?” 하고 받지 않으니, 왕이 이에 황금 30근(斤)과 좋은 말 10필(匹)을 하사하였다.


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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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九十五年○新羅赫居世五十八年○高句麗琉璃王十九年○百濟溫祚王十九年○漢平帝元始元年○日皇垂仁三十年○西歷紀元元年

【마한 개국 195년 ○ 신라 혁거세 58년 ○ 고구려 유리왕 19년 ○ 백제 온조왕 19년 ○ 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원년 ○ 일황 수인 30년 ○ 서력 기원 원년】


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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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九十七年○新羅赫居世六十年○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百濟溫祚王二十一年○漢平帝元始三年○日皇垂仁三十二年○西歷紀元後三年三月에高句麗ㅣ國內城今楚山北隔水ᄒᆞᆫ淸國地라에移都ᄒᆞ고慰那岩城을築ᄒᆞ다

【마한 개국 197년 ○ 신라 혁거세 60년 ○ 고구려 유리왕 21년 ○ 백제 온조왕 21년 ○ 한 평제 원시 3년 ○ 일황 수인 32년 ○ 서력 기원 3년】

3월에 고구려(高句麗)가 국내성(國內城)【지금의 초산(楚山) 북쪽 강 건너 청(淸)나라 땅이다.】으로 옮겨 도읍하고 위나암성(慰那岩城)을 쌓았다.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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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一百九十八年○新羅赫居世六十一年○高句麗琉璃王二十二年○百濟溫祚王二十二年○漢平帝元始四年○日皇垂仁三十三年○西歷紀元後四年三月에新羅王赫居世ㅣ崩ᄒᆞ고其後七日에王妃閼英이ᄯᅩᄒᆞᆫ崩ᄒᆞ거ᄂᆞᆯ子南解王南解ㅣ立ᄒᆞ야赫居世ᄅᆞᆯ蛇陵에葬ᄒᆞ다

【마한 개국 198년 ○ 신라 혁거세 61년 ○ 고구려 유리왕 22년 ○ 백제 온조왕 22년 ○ 한 평제 원시 4년 ○ 일황 수인 33년 ○ 서력 기원 4년】

3월에 신라(新羅) 왕 혁거세(赫居世)가 돌아가시고[崩] 그 후 7일에 왕비 알영(閼英)이 또한 돌아가셨다. 그의 아들 남해왕(南解王) 남해가 즉위하여 혁거세를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다.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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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開國二百二年○新羅南解王四年○高句麗琉璃王二十六年○百濟溫祚王二十六年○漢孺子嬰初始元年○日皇垂仁三十七年○西歷紀元後八年春正月에新羅王이長女로ᄡᅥ昔脫解의게妻ᄒᆞ다脫解의身長이九尺이오風神이秀朗ᄒᆞ고才識이過人ᄒᆞ더라○秋七月에百濟王이諸將과議論ᄒᆞ야曰馬韓이漸漸疲弱ᄒᆞ야上下ㅣ離心ᄒᆞ니萬一他人의幷呑ᄒᆞᆫᄇᆡ되면唇亡齒寒이라後悔莫及ᄒᆞ리니我ㅣ先取ᄒᆞᆷ이可타ᄒᆞ고冬十月에出獵ᄒᆞᆫ다稱ᄒᆞ고潛師掩襲ᄒᆞ야其國을遂幷ᄒᆞ니오작圓山과錦峴在今羅州郡二城이固守不下ᄒᆞ다가翌年己巳에降ᄒᆞ거ᄂᆞᆯ百濟ㅣ其民을漢山에移送ᄒᆞ니馬韓이亡ᄒᆞ다其後八年을經ᄒᆞ야馬韓舊將周勤이箕氏의故國을興復고ᄌᆞᄒᆞ야起兵ᄒᆞ야百濟十谷城今谷을據ᄒᆞ거ᄂᆞᆯ百濟王이軍士五千을率ᄒᆞ고來攻ᄒᆞ니勤이力盡自殺ᄒᆞ더라

【마한 개국 202년 ○ 신라 남해왕 4년 ○ 고구려 유리왕 26년 ○ 백제 온조왕 26년 ○ 한 유자영(孺子嬰) 초시(初始) 원년 ○ 일황 수인 37년 ○ 서력 기원 8년】

봄 정월에 신라(新羅) 왕이 장녀를 석탈해(昔脫解)에게 시집보냈다. 석탈해의 신장이 9척(尺)이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재주와 식견이 다른 사람을 능가하였다.

○ 가을 7월에 백제(百濟) 왕이 여러 장수와 의논하여 말하기를, “마한(馬韓)이 점점 쇠약해져서 관리와 백성의 마음이 떠났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병탄된다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우리가 먼저 취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사냥을 나간다고 말하고 몰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마침내 마한을 병탄하였다.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지금의 나주군(羅州郡)】 두 성(城)만이 견고하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그 다음해(9) 기사(己巳)년에 항복하였는데, 백제가 그 백성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보내니 마한이 망하였다. 그 후 8년이 지나서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기씨(箕氏)의 옛 나라를 부흥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백제 십곡성(十谷城)【지금의 곡산(谷山)】에 웅거하였다. 백제 왕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니 주근이 힘이 다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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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南解王十四年○高句麗琉璃王三十六年○百濟溫祚王三十六年○漢王莽簒位十年○日皇垂仁四十七年○西歷紀元後十八年夏에高句麗의屬ᄒᆞᆫ七國이新羅에投降ᄒᆞ다○冬十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大武神王無恤이立ᄒᆞ다

【신라 남해왕 14년 ○ 고구려 유리왕 36년 ○ 백제 온조왕 36년 ○ 한 왕망(王莽) 찬위(簒位) 10년 ○ 일황 수인 47년 ○ 서력 기원 18년】

여름에 고구려(高句麗)에 속해 있던 7국이 신라(新羅)에 투항하였다.

○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이 돌아가시고 아들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無恤)이 즉위하였다.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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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南解王二十年○高句麗大武神王六年○百濟溫祚王四十二年○漢更始二年○日皇垂仁五十三年○西歷紀元後二十四年秋에新羅王이崩ᄒᆞ고子儒理王儒理ㅣ立ᄒᆞ다初에王이崩ᄒᆞᆯ時에儒理와밋昔脫解의게遺言ᄒᆞ야曰我ㅣ死後에朴昔兩姓이年長으로ᄡᅧ嗣位ᄒᆞ라ᄒᆞ더니밋王이崩ᄒᆞᄆᆡ儒理ㅣ脫解의게讓位ᄒᆞᆫᄃᆡ脫解曰神器ᄂᆞᆫ庸人의堪任ᄒᆞᆯᄇᆡ아니라ᄒᆞ고固辭ᄒᆞ거ᄂᆞᆯ이에儒理王이卽位ᄒᆞ다

【신라 남해왕 20년 ○ 고구려 대무신왕 6년 ○ 백제 온조왕 42년 ○ 한 경시(更始) 2년 ○ 일황 수인 53년 ○ 서력 기원 24년】

가을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아들 유리왕(儒理王) 유리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왕이 돌아가실 때에 유리와 석탈해(昔脫解)에게 유언을 남겨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박, 석 두 성씨가 나이가 많은 순서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이 돌아가시자 유리가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왕위[神器]는 용렬한 사람이 감히 맡을 자리가 아닙니다.”라고 하고 한결같이 사양하였다. 이에 유리왕이 즉위하였다.


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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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四年○高句麗大武神王十年○百濟溫祚王四十六年○東漢光武建武四年○日皇垂仁五十七年○西歷紀元後二十八年二月에百濟始祖高溫祚ㅣ崩ᄒᆞ고子多婁王多婁ㅣ立ᄒᆞ다○秋七月에漢이遼東兵을發ᄒᆞ야高句麗丸都在今滿淸北隔江ᄒᆞᆫ地ᄅᆞᆯ攻ᄒᆞ거ᄂᆞᆯ麗人이守城ᄒᆞᆫ지數旬에漢圍가不解ᄒᆞᄂᆞᆫ지라左輔乙豆智ㅣ獻策ᄒᆞ야曰漢이我城中에無水ᄒᆞ다ᄒᆞ야久圍ᄒᆞᆷ이니맛당히池魚ᄅᆞᆯ水草로ᄡᅧ包裹ᄒᆞ야漢軍을犒饋ᄒᆞ소셔ᄒᆞ거ᄂᆞᆯ王이其計ᄅᆞᆯ從ᄒᆞ야漢軍에貽書ᄒᆞ야曰寡人이愚昧ᄒᆞᆷ으로貴國에開罪ᄒᆞ야將軍으로ᄒᆞ야곰百萬의師ᄅᆞᆯ弊境에暴露ᄒᆞ니今에厚意ᄅᆞᆯ答키難ᄒᆞ야敢히薄物로ᄡᅧ左右에供ᄒᆞ노라ᄒᆞᆫᄃᆡ於是에漢將이城內에有水ᄒᆞᆷ을知ᄒᆞ고猝拔키難ᄒᆞ다ᄒᆞ고引還ᄒᆞ니라○冬十一月에新羅王이國內ᄅᆞᆯ巡行ᄒᆞ다가老嫗가凍餒ᄒᆞᆷ을見ᄒᆞ고曰予ㅣ菲德으로ᄡᅧ民上에忝居ᄒᆞ야老幼로ᄒᆞ여곰此에至케ᄒᆞ엿다ᄒᆞ고因ᄒᆞ야有司ᄅᆞᆯ命ᄒᆞ야鰥寡孤獨을存問ᄒᆞ고ᄯᅩ老病ᄒᆞ야自活키難ᄒᆞᆫ者ᄅᆞᆯ賑給ᄒᆞ니隣國百姓이來者ㅣ甚衆ᄒᆞ더라

【신라 유리왕 4년 ○ 고구려 대무신왕 10년 ○ 백제 온조왕 46년 ○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4년 ○ 일황 수인 57년 ○ 서력 기원 28년】

2월에 백제(百濟) 시조(始祖) 고온조(高溫祚)가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다루왕(多婁王) 다루가 즉위하였다.

○ 가을 7월에 한(漢)나라가 요동(遼東) 지역의 군사를 선발하여 고구려(高句麗) 환도(丸都)【지금의 청(淸)나라 북쪽 강 건너편 지역】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지킨 지 수십 일이 지났지만 한나라의 포위가 풀리지 않자 좌보(左輔)【대관(大官)】 을두지(乙豆智)가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한나라가 우리 성안에 물이 없다고 여겨 오래도록 포위한 것이니, 마땅히 연못의 물고기를 수초(水草)로 포장해서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 먹이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계책을 따라서 한나라 군사에게 서찰을 보내서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우매하여 귀국에게 죄를 지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의 군사를 곤란한 지경에서 비바람을 맞게 하였습니다. 지금 두터운 뜻으로 보답하기조차 어려우나 감히 변변치 못한 물품을 좌우에 공급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나라 장수가 성안에 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금방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 겨울 11월에 신라(新羅) 왕이 나라 안을 순행하다가 한 늙은 노파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내가 보잘것없는 덕으로 백성 위에 있으면서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하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노인들을 직접 찾아가 살펴보도록 하였다. 또한 늙고 병들어서 스스로 생활하기 어려운 자를 진휼(賑恤)하니 이웃 나라 백성이 몰려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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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八年○高句麗大武神王十四年○百濟多婁王四年○東漢光武建武八年○日皇垂仁六十一年○西歷紀元後三十二年夏四月에高句麗ㅣ樂浪을襲擊ᄒᆞ야受降ᄒᆞ다先是에王子好童이南沃沮에遊ᄒᆞᆯᄉᆡ樂浪王崔理ㅣ好童을愛ᄒᆞ야謂曰君의相貌ᄅᆞᆯ見ᄒᆞ니常人이아니라ᄒᆞ고드ᄃᆡ여其女로ᄡᅧ妻ᄒᆞ니時에樂浪에鼓角이有ᄒᆞ야만일敵兵이有ᄒᆞ면自鳴ᄒᆞᄂᆞᆫ지라好童이將還ᄒᆞᆯᄉᆡ其女다려潛謂曰汝가武庫에入ᄒᆞ야鼓角을割破ᄒᆞ면我ㅣ汝ᄅᆞᆯ禮聘ᄒᆞ리라ᄒᆞᆫᄃᆡ女ㅣ곳武庫의鼓面과角口ᄅᆞᆯ裂割ᄒᆞ고好童의게報ᄒᆞ거ᄂᆞᆯ好童이歸ᄒᆞ야王을勸ᄒᆞ야樂浪을襲取ᄒᆞ니崔理ㅣ鼓角이不鳴ᄒᆞᆷ을見ᄒᆞ고設備치아니ᄒᆞ엿다가麗兵이城下에奄至ᄒᆞ거ᄂᆞᆯ그졔야鼓角이皆破ᄒᆞᆷ을知ᄒᆞ고드ᄃᆡ여其女ᄅᆞᆯ殺ᄒᆞ고出降ᄒᆞ니라○十一月에高句麗王子好童이自殺ᄒᆞ다好童이容貌가甚美ᄒᆞ고王의게有寵ᄒᆞ더니至是ᄒᆞ야王의元妃가奪嫡ᄒᆞᆯ가恐ᄒᆞ야讒訴ᄒᆞ야曰好童이妾의게無禮코자ᄒᆞᆫ다ᄒᆞ니王이懷疑ᄒᆞᄂᆞᆫ지라或이好童을勸ᄒᆞ야自白ᄒᆞ라ᄒᆞᆫᄃᆡ好童曰此ᄂᆞᆫ母惡을顯ᄒᆞ고父憂ᄅᆞᆯ貽ᄒᆞᆷ이라ᄒᆞ고드ᄃᆡ여自殺ᄒᆞ니라

【신라 유리왕 8년 ○ 고구려 대무신왕 14년 ○ 백제 다루왕 4년 ○ 동한 광무제 건무 8년 ○ 일황 수인 61년 ○ 서력 기원 32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가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항복을 받아 냈다. 이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남옥저(南沃沮)를 돌아다닐 때에 낙랑 왕 최리(崔理)가 호동을 아껴 말하기를, “그대의 외모를 보니 일반 사람이 아닌 듯하다.”고 하며 드디어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때에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어서 만약 적병이 있으면 저절로 울렸다. 호동이 장차 돌아올 때에 그 부인에게 몰래 이야기하기를, “당신이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찢고 파괴하면 내가 당신을 예(禮)를 다해 맞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부인이 곧 무기고에 있는 북의 한 면과 나팔의 입구를 찢고 파괴하여 호동에게 보답하였다. 호동이 돌아와서 왕에게 낙랑을 습격할 것을 권하였다. 최리가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은 것을 보고 대비하지 않았다. 고구려 병사가 성 아래에 몰래 이르니 그제야 비로소 북과 나팔이 모두 파괴되었음을 알고 결국 그 딸을 죽이고 나아가 항복하였다.

○ 11월에 고구려 왕자 호동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동이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왕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이에 이르러서 왕의 원비(元妃)가 적통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참소(讒訴)하여 말하기를, “호동이 저에게 무례하게 굴려고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마음속으로 의심을 품었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권하여 솔직하게 아뢰라고 하였으나 호동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친의 악함을 드러내어 부친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다.”라 하고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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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九年○高句麗大武神王十五年○百濟多婁王五年○東漢光武建武九年○日皇垂仁六十二年○西歷紀元後三十三年二月에百濟王이國南州郡을命ᄒᆞ야비로소稻田을作ᄒᆞ다

【신라 유리왕 9년 ○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 백제 다루왕 5년 ○ 동한 광무제 건무 9년 ○ 일황 수인 62년 ○ 서력 기원 33년】

2월에 백제(百濟) 왕이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명하여 비로소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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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十八年○高句麗大武神王二十四年○百濟多婁王十四年○東漢光武建武十八年○日皇垂仁七十一年○西歷紀元後四十春三月에駕洛國始祖金首露ㅣ立ᄒᆞ다初에駕洛의部落이九가有ᄒᆞ야各其酋長을立ᄒᆞ고山野에居ᄒᆞ야君臣位號가無ᄒᆞ더니男子兄弟六人이有ᄒᆞ야다英偉ᄒᆞ고長은曰首露니首露ㅣ其地에開國ᄒᆞ고號曰伽耶今金海郡이오加耶ᄂᆞᆫ駕洛의同音을異譯ᄒᆞᆷ이라라ᄒᆞ고其弟五人이ᄯᅩ五伽耶主ㅣ되니曰阿羅伽耶今咸安郡曰古寧伽耶今咸昌郡曰星山伽耶今星州郡曰大伽耶靈郡이니日本이謂之任那라曰小伽耶今固城郡니其地가新羅西南에在ᄒᆞ야總稱駕洛國이러라首露ㅣ城郭을築ᄒᆞ고宮室을營ᄒᆞ며許氏ᄅᆞᆯ納ᄒᆞ야九子ᄅᆞᆯ生ᄒᆞᄆᆡ二子가母姓을從ᄒᆞ니今에金海金氏와밋許氏가다其苗裔러라

駕洛國記에曰東漢建武二十四年에駕洛의許皇后ㅣ阿踰陀國今印度國으로브터渡海ᄒᆞᆯᄉᆡ緋帆과茜旗가北指ᄒᆞᄂᆞᆫ지라首露王이宮西에幔殿을設ᄒᆞ고迎候ᄒᆞ다가밋后ㅣ至ᄒᆞᄆᆡ同輦入闕ᄒᆞ야后ᄅᆞᆯ封ᄒᆞ엿다ᄒᆞ고輿地勝覽에曰許皇后ᄂᆞᆫ南天竺國王의女라大抵首露王이몬져印度로브터駕洛에來住ᄒᆞ고其夫人이ᄯᅩᄒᆞᆫ繼至ᄒᆞ엿다ᄒᆞ나荒誕ᄒᆞ야不可信이러라

其後에王이崩ᄒᆞ니年이一百五十八歲오其子居登이立ᄒᆞ야新羅救援을請ᄒᆞ야外寇ᄅᆞᆯ防禦ᄒᆞ고其子ᄅᆞᆯ送質ᄒᆞ더니居登이卒ᄒᆞ고麻品과居叱彌와伊尸品을歷ᄒᆞ야坐知가立ᄒᆞᄆᆡ女色을貪ᄒᆞ고ᄯᅩ其黨을寵任ᄒᆞ야國勢가大亂ᄒᆞ다가其臣朴元道의諫을從ᄒᆞ야其女ᄅᆞᆯ擯斥ᄒᆞ니此時에新羅ㅣ攻伐코ᄌᆞᄒᆞ다가王의悔改ᄒᆞᆷ을見ᄒᆞ고其謀가遂止ᄒᆞ며其後에ᄯᅩ吹希와銍知와鉗知ᄅᆞᆯ歷ᄒᆞ고仇衡에至ᄒᆞ야新羅와失和ᄒᆞ야其北境을屢次見侵ᄒᆞ야能히自主치못ᄒᆞ고新羅法興王十八年에畢竟新羅에降ᄒᆞ거ᄂᆞᆯ羅王이客禮로ᄡᅥ待ᄒᆞ고其國을賜ᄒᆞ야食邑을삼으니駕洛國이凡十世에歷年이四百九十一年이러라

【신라 유리왕 18년 ○ 고구려 대무신왕 24년 ○ 백제 다루왕 14년 ○ 동한 광무제 건무 18년 ○ 일황 수인 71년 ○ 서력 기원 42년】

봄 3월에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金首露)가 즉위하였다. 처음 가락에는 부락이 9개 있어서 각기 추장을 세우고 산과 들에서 생활하며 군신(君臣) 간의 위계[位號]가 없었다. 남자 형제 6명이 있었는데 모두 영특하고 장대하였으며, 첫째를 수로라 불렀다. 수로가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가야(伽倻)【지금의 김해군(金海郡)이고 가야는 가락의 동음을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아우 5명이 또한 5가야의 우두머리가 되니 아라가야(阿羅伽倻)【지금의 함안군(咸安郡)】,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함창군(咸昌郡)】, 성산가야(星山伽倻)【지금의 성주군(星州郡)】,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군(高靈郡)이니, 일본(日本)이 임나(任那)라고 불렀다.】,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군(固城郡)】라고 불렀다. 그 지역이 신라(新羅) 서남쪽에 있어 모두 가락국이라고 불렀다. 수로가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으며, 허씨(許氏)를 부인으로 받아들여 9명의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으니, 지금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허씨가 모두 같은 후예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이르기를,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에 가락의 허 황후(許皇后)가 아유타국(阿踰陀國)【지금의 인도국(印度國)】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올 때에 붉은 돛과 진홍색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수로왕이 궁궐 서쪽에 휘장으로 된 임시 궁궐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황후가 도착하자 맞이하여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서 황후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르기를, “허 황후는 남천축국(南天竺國) 왕의 딸이다. 대개 수로왕이 먼저 인도로부터 가락으로 와서 정착하고 그 부인이 또한 이어서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나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다.

그 후에 왕이 돌아가시니 나이 158세였다. 그의 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신라에 구원을 청하여 왜구를 방어하고 그의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거등이 죽고 마품(麻品), 거질미(居叱彌), 이시품(伊尸品)을 거쳐 좌지(坐知)가 즉위하였는데, 여색(女色)을 탐하고, 또한 그 무리를 총애하여 직임을 맡겼다. 이로 인해 나라의 정세가 크게 어지러워지다가 신하 박원도(朴元道)의 간언에 따라서 여자들을 물리쳤다. 이때에 신라가 정벌하려고 했는데, 왕이 회개한 것을 보고 계획을 중지하였다. 그 후에 또 취희(吹希), 질지(銍知), 겸지(鉗知)를 거쳐 구형(仇衡)에 이르러서 신라와 사이가 나빠져 북쪽 경계를 여러 차례 침략당했지만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신라 법흥왕(法興王) 18년(531)에 결국 항복하였다. 신라 왕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禮)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으니, 가락국이 10대를 이어 온 햇수가 491년이었다.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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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二十年○高句麗大武神王二十六年○百濟多婁王十六年○東漢光武建武二十年○日皇垂仁七十三年○西歷紀元後四十秋九月에漢이樂浪을取ᄒᆞ야郡縣을作ᄒᆞ니薩水今安州淸川江以北이다漢에屬ᄒᆞ더라○冬十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太子解憂ㅣ年幼ᄒᆞ거ᄂᆞᆯ國人이王의弟閩中王解邑朱ᄅᆞᆯ立ᄒᆞ다

【신라 유리왕 20년 ○ 고구려 대무신왕 26년 ○ 백제 다루왕 16년 ○ 동한 광무제 건무 20년 ○ 일황 수인 73년 ○ 서력 기원 44년】

가을 9월에 한(漢)나라가 낙랑(樂浪)을 취하여 군현을 만드니, 살수(薩水)【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 이북 지역이 모두 한나라에 예속되었다.

○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해우(解憂)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백성이 왕의 아우 민중왕(閔中王) 해읍주(解邑朱)를 왕으로 세웠다.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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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二十四年○高句麗閩中王四年○百濟多婁王二十年○東漢光武建武二十四年○日皇垂仁七十七年○西歷紀元後四十八春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其侄慕本王解憂ㅣ立ᄒᆞ다○高句麗ㅣ漢의北平漁陽上谷太原等地ᄅᆞᆯ襲取ᄒᆞ엿다가旣而오漢으로더브러和親ᄒᆞ다

【신라 유리왕 24년 ○ 고구려 민중왕 4년 ○ 백제 다루왕 20년 ○ 동한 광무제 건무 24년 ○ 일황 수인 77년 ○ 서력 기원 48년】

봄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조카 모본왕(慕本王) 해우(解憂)가 즉위하였다.

○ 고구려가 한(漢)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공격하여 취하였다가 얼마 후에 한나라와 함께 화친하였다.


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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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二十九年○高句麗慕本王五年○百濟多婁王二十五年○東漢光武建武二十九年○日皇垂仁八十二年○西歷紀元後五十高句麗王이暴虐無道ᄒᆞ야坐ᄒᆞ면人을藉ᄒᆞ고臥ᄒᆞ면枕ᄒᆞ다가人이或動搖ᄒᆞ면곳殺ᄒᆞ며群臣의諫ᄒᆞᄂᆞᆫ者ᄂᆞᆫ射殺ᄒᆞ더니其後에其臣杜魯ㅣ王을侍ᄒᆞ엿다가見殺ᄒᆞᆯ가恐ᄒᆞ야王을弑ᄒᆞ거ᄂᆞᆯ國人이琉璃王의曾孫太祖王寔을立ᄒᆞ니年이七歲라太后ㅣ垂簾聽政ᄒᆞ니라

【신라 유리왕 29년 ○ 고구려 모본왕 5년 ○ 백제 다루왕 25년 ○ 동한 광무제 건무 29년 ○ 일황 수인 82년 ○ 서력 기원 53년】

고구려(高句麗) 왕이 포학하고 무도하여 앉으면 사람을 짓밟고 누우면 베개로 삼다가 사람이 혹 움직이면 바로 죽였으며, 군신 가운데 간언하는 자는 활로 쏴 죽였다. 그 후에 신하 두노(杜魯)가 왕을 모시다가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서 왕을 시해하였다. 백성이 유리왕(琉璃王)의 증손 태조왕(太祖王) 궁(宮)을 왕위에 세우니, 나이가 7세였으므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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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理王三十三年○高句麗太祖王四年○百濟多婁王二十九年○東漢光武中元二年○日皇垂仁八十六年○西歷紀元後五十七年冬十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南解王의壻脫解王昔脫解ㅣ立ᄒᆞ다先是에王이不豫ᄒᆞᆯᄉᆡ臣僚ᄅᆞᆯ囑ᄒᆞ야曰脫解ᄂᆞᆫ國戚이오功名을屢著ᄒᆞ야朕의二子가其才ᄅᆞᆯ不逮ᄒᆞ고ᄯᅩ先君의命이有ᄒᆞ시니朕이死ᄒᆞᆫ後에大位에卽케ᄒᆞ라ᄒᆞ더라

【신라 유리왕 33년 ○ 고구려 태조왕 4년 ○ 백제 다루왕 29년 ○ 동한 광무제 중원(中元) 2년 ○ 일황 수인 86년 ○ 서력 기원 57년】

겨울 10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남해왕(南解王)의 사위 탈해왕 석탈해(昔脫解)가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편치 않을 때에 신료들에게 부탁하기를, “탈해는 왕의 인척이고 공명(功名)이 여러 차례 드러났다. 2명의 아들이 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하고 또한 선대 왕의 명이 있으시니 짐이 죽은 후에 탈해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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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脫解王八年○高句麗太祖王十二年○百濟多婁王三十七年○東漢明帝永平八年○日皇垂仁九十四年○西歷紀元後六十五年春三月에新羅王이小兒閼智로ᄡᅧ太子ᄅᆞᆯ삼다先是에王이夜坐ᄒᆞ엿다가金城西偏始林間에鷄聲이有ᄒᆞᆷ을聞ᄒᆞ고大輔瓠公을遣ᄒᆞ야視ᄒᆞ니金櫝이樹梢에掛ᄒᆞ고白鷄가其下에셔鳴ᄒᆞ거ᄂᆞᆯ其櫝을開ᄒᆞ니小兒ㅣ有ᄒᆞ야姿貌가奇偉ᄒᆞᆫ지라王이喜曰此ᄂᆞᆫ天이子ᄅᆞᆯ與ᄒᆞ심이라ᄒᆞ고名ᄒᆞ야曰閼智라ᄒᆞ니閼智ᄂᆞᆫ方言에小兒오其金櫝에셔出ᄒᆞ엿다ᄒᆞ야姓은金이오鷄鳴의祥이有ᄒᆞᆷ으로ᄡᅧ始林을改ᄒᆞ야鷄林이라ᄒᆞ고因ᄒᆞ야國號ᄅᆞᆯ稱ᄒᆞ다

【신라 탈해왕 8년 ○ 고구려 태조왕 12년 ○ 백제 다루왕 37년 ○ 동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 일황 수인 94년 ○ 서력 기원 65년】

봄 3월에 신라(新羅) 왕이 어린아이 알지(閼智)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앞서 왕이 밤에 앉아 있다가 금성(金城) 서쪽 변두리 시림(始林) 사이에서 닭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대보(大輔)【관직명】 호공(瓠公)을 보내서 확인하도록 하였다. 금빛의 상자가 나무 사이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장대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아들을 내려주신 것이다.” 하고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으니, 알지는 방언(方言)으로 작은 아이라는 뜻이고, 금빛 상자에서 나왔으므로 성은 김(金)이라 했다. 닭 울음소리에 상서로움이 있다고 해서 시림을 계림(鷄林)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을 국호로 칭하였다.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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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脫解王十九年○高句麗太祖王二十三年○百濟多婁王四十八年○東漢章帝建初元年○日皇景行六年○西歷紀元後七十六年九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己婁王己婁ㅣ立ᄒᆞ다

【신라 탈해왕 19년 ○ 고구려 태조왕 23년 ○ 백제 다루왕 48년 ○ 동한 장제(章帝) 건초(建初) 원년 ○ 일황 경행(景行) 6년 ○ 서력 기원 76년】

9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기루왕(己婁王) 기루가 즉위하였다.


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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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脫解王二十三年○高句麗太祖王二十七年○百濟己婁王四年○東漢章帝建初五年○日皇景行十年○西歷紀元後八十年秋八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儒理王의第二子婆娑王婆裟ㅣ立ᄒᆞ다

【신라 탈해왕 23년 ○ 고구려 태조왕 27년 ○ 백제 기루왕 4년 ○ 동한 장제 건초 5년 ○ 일황 경행 10년 ○ 서력 기원 80년】

가을 8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 파사왕(婆娑王) 파사가 즉위하였다.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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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婆娑王二十一年○高句麗太祖王四十八年○百濟己婁王二十五年○東漢和帝永元十三年○日皇景行三十一年○西歷紀元後百春二月에新羅ㅣ城을金城東南에築ᄒᆞ고號曰月城慶州郡東이라ᄒᆞ니周가一千二十三步라秋七月에王이移居ᄒᆞ다

【신라 파사왕 21년 ○ 고구려 태조왕 48년 ○ 백제 기루왕 25년 ○ 동한 화제(和帝) 영원(永元) 13년 ○ 일황 경행 31년 ○ 서력 기원 101년】

봄 2월에 신라(新羅)가 성을 금성(金城)의 동남쪽에 쌓고 월성(月城)【경주군(慶州郡) 동쪽】이라 불렀는데, 둘레가 1천 23보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옮겨 거주하였다.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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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婆娑王三十二年○高句麗太祖王五十九年○百濟己婁王三十六年○東漢安帝永初六年○日皇景行四十二年○西歷紀元後百十冬十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子抵摩王抵摩ㅣ立ᄒᆞ다

【신라 파사왕 32년 ○ 고구려 태조왕 59년 ○ 백제 기루왕 36년 ○ 동한 안제(安帝) 영초(永初) 6년 ○ 일황 경행 42년 ○ 서력 기원 112년】

겨울 10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지마왕(祗摩王) 지마가 즉위하였다.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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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抵摩王六年○高句麗太祖王六十五年○百濟己婁王四十八年○東漢安帝元初五年○日皇景行四十八年○西歷紀元後百十八年夏六月에高句麗王이濊貊으로더브러漢玄菟ᄅᆞᆯ襲ᄒᆞ야華麗城을攻ᄒᆞ다濊貊은朝鮮의地라南北은辰韓과沃沮ᄅᆞᆯ接ᄒᆞ고東은大海오西ᄂᆞᆫ樂浪이라漢武帝元朔五年에濊君南閭ㅣ朝鮮을畔ᄒᆞ야其民을率ᄒᆞ고遼東에降ᄒᆞ거ᄂᆞᆯ漢이其地로ᄡᅥ凔海郡을삼고建武中에其渠帥ᄅᆞᆯ封ᄒᆞ야縣侯ᄅᆞᆯ拜ᄒᆞ고朝貢케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玄菟ᄅᆞᆯ襲取ᄒᆞ니漢忠州刺史馬煥과玄菟太守姚光과遼東太守蔡諷等이高句麗ᄅᆞᆯ侵略ᄒᆞ고濊貊의將帥ᄅᆞᆯ擊殺ᄒᆞ고兵仗과財物을盡奪ᄒᆞᄂᆞᆫ지라麗王이이에其弟遂成으로ᄒᆞ여곰軍士二千餘人을率ᄒᆞ야漢軍을遮擊ᄒᆞ고가만이奇兵을遣ᄒᆞ야西玄菟와遼東의二郡을焚ᄒᆞ고翌年에ᄯᅩ馬韓遺民과밋濊貊人으로더브러遼東을伐ᄒᆞ다

【신라 지마왕 6년 ○ 고구려 태조왕 65년 ○ 백제 기루왕 42년 ○ 동한 안제 원초(元初) 5년 ○ 일황 경행 48년 ○ 서력 기원 118년】

여름 6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예맥(濊貊)과 함께 한(漢)나라 현도(玄菟)군을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침공하였다. 예맥은 조선(朝鮮)의 땅이다. 남북은 진한(辰韓)과 옥저(沃沮)와 인접하고, 동쪽은 큰 바다이고, 서쪽은 낙랑(樂浪)이다. 한(漢) 무제(武帝) 원삭(元朔) 5년(서기전 124)에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조선을 배반하여 백성을 이끌고 요동(遼東)에 항복하였다. 한나라가 그 지역을 창해군(滄海郡)으로 삼고 건무(建武) 재위 중에 그 거사(渠師)를 봉해서 현의 제후[縣侯]로 삼아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현도를 습격하여 취하니 한나라 충주 자사(忠州刺史) 마환(馬煥)과 현도 태수(太守)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諷) 등이 고구려를 침략하고 예맥의 장수를 공격하여 죽이고, 병장기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고구려 왕이 이에 그의 아우 수성(遂成)으로 하여금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한나라 군사를 공격하도록 하고 몰래 정예병[奇兵]을 보내서 서쪽의 현도와 요동 2개 군을 불태웠다. 그 다음해에 또 마한(馬韓)의 유민(遺民)과 예맥 사람과 함께 요동을 정벌하였다.


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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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抵摩王十五年○高句麗太祖王七十四年○百濟己婁王五十一年○東漢順帝永建二年○日皇景行五十七年○西歷紀元後百二十百濟王이崩ᄒᆞ고子蓋婁王蓋婁ㅣ立ᄒᆞ다

【신라 지마왕 15년 ○ 고구려 태조왕 74년 ○ 백제 기루왕 51년 ○ 동한 순제(順帝) 영건(永建) 2년 ○ 일황 경행 57년 ○ 서력 기원 127년】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개루왕(蓋婁王) 개루가 즉위하였다.


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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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抵摩王二十二年○高句麗太祖王八十一年○百濟蓋婁王七年○東漢順帝陽嘉三年○日皇成務四年○西歷紀元後百三十四年秋八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無子ᄒᆞ거ᄂᆞᆯ儒理王太子逸聖王逸聖이立ᄒᆞ다

【신라 지마왕 22년 ○ 고구려 태조왕 81년 ○ 백제 개루왕 7년 ○ 동한 순제 양가(陽嘉) 3년 ○ 일황 성무(成務) 4년 ○ 서력 기원 134년】

가을 8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유리왕(儒理王)의 태자 일성왕(逸聖王) 일성이 왕위에 올랐다.


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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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逸聖王十二年○高句麗太祖王九十三年○百濟蓋婁王十九年○東漢質帝本初元年○日皇成務十六年○西歷紀元後百四十六年高勾麗王이其弟遂成의게傳位ᄒᆞ니此ᄂᆞᆫ次大王이라先是에左輔高福章이太祖王을勸ᄒᆞ야曰遂成이反意가有ᄒᆞ야大王의子孫을害ᄒᆞ리니請컨ᄃᆡ誅ᄒᆞ소셔ᄒᆞᆫᄃᆡ王이不聽ᄒᆞ더니밋遂成이受禪ᄒᆞᄆᆡ高福章을戮ᄒᆞ고ᄯᅩ太祖王의元子莫根을殺ᄒᆞ니其弟莫德이其手에死ᄒᆞᆯ가恐ᄒᆞ야自經ᄒᆞ니라

【신라 일성왕 12년 ○ 고구려 태조왕 93년 ○ 백제 개루왕 19년 ○ 동한 질제(質帝) 본초(本初) 원년 ○ 일황 성무 16년 ○ 서력 기원 146년】

고구려(高句麗) 왕이 그의 아우 수성(遂成)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차대왕(次大王)이다. 이에 앞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이 태조왕(太祖王)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수성이 반란의 뜻이 있어서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이니 청컨대 죽이십시요.”라고 하였다. 하지만 왕이 듣지 않았는데, 결국 수성이 왕위를 물려받고 고복장을 죽였다. 또 태조왕의 원자(元子) 막근(莫根)을 죽였으며, 동생 막덕(莫德)은 그의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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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逸聖王二十年○高句麗次大王八年○百濟蓋婁王二十七年○東漢桓帝永興二年○日皇成務二十四年○西歷紀元後百五十四年春二月에新羅王이崩ᄒᆞ다王이在位時에政事堂을置ᄒᆞ고隄防을修ᄒᆞ야田野ᄅᆞᆯ闢ᄒᆞ고ᄯᅩ民을命ᄒᆞ야金銀珠ᄅᆞᆯ不用케ᄒᆞ더라子阿達羅王阿達羅ㅣ立ᄒᆞ다

【신라 일성왕 20년 ○ 고구려 차대왕 8년 ○ 백제 개루왕 27년 ○ 동한 환제(桓帝) 영흥(永興) 2년 ○ 일황 성무 24년 ○ 서력 기원 154년】

봄 2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셨다. 왕이 재위 시에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고 제방(堤防)을 수축하여 들판을 개간하고 또한 백성에게 명하여 금, 은, 구슬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아달라왕(阿達羅王) 아달라가 즉위하였다.


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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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阿達羅王十一年○高句麗次大王十九年○百濟蓋婁王三十八年○東漢桓帝延憙八年○日皇成務三十五年○西歷紀元後百六十高句麗前王이崩ᄒᆞ니年이百十九歲러라○高句麗王遂成이無道ᄒᆞ거ᄂᆞᆯ明臨答夫ㅣ弑ᄒᆞ고王의弟伯固ᄅᆞᆯ立ᄒᆞ니此ᄂᆞᆫ新大王이라先是에伯固ㅣ禍가及ᄒᆞᆯ가恐ᄒᆞ야山谷에遁ᄒᆞ엿다가至是ᄒᆞ야群臣이迎立ᄒᆞ거ᄂᆞᆯ王이明臨答夫로ᄡᅥ國相을拜ᄒᆞ고前王太子鄒安으로讓國君을封ᄒᆞ다

【신라 아달라왕 11년 ○ 고구려 차대왕 19년 ○ 백제 개루왕 38년 ○ 동한 환제 연희(延憙) 8년 ○ 일황 성무 35년 ○ 서력 기원 165년】

고구려(高句麗) 전(前)왕이 돌아가시니 그의 나이 119세였다.

○ 고구려 왕 수성(遂成)이 무도하였으므로 명림답부(明臨答夫)가 그를 살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伯固)를 왕위에 세우니 그가 신대왕(新大王)이다. 이에 앞서 백고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군신의 환영을 받으며 즉위하였다. 왕이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전왕의 태자 추안(芻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였다.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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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阿達羅王十二年○高句麗新大王元年○百濟蓋婁王三十九年○東漢桓帝延憙九年○日皇成務三十六年○西歷紀元後百六十六百濟王이崩ᄒᆞ고子肖古王肖古ㅣ立ᄒᆞ다先是에蓋婁王이其臣都彌의妻가艶美ᄒᆞᆷ을聞ᄒᆞ고몬져近臣으로ᄒᆞ여곰거짓王의衣裝을飾ᄒᆞ고都彌의妻ᄅᆞᆯ私코자ᄒᆞ니妻ㅣ更衣ᄒᆞᆫ다稱ᄒᆞ고一婢ᄅᆞᆯ假裝ᄒᆞ야蔫枕ᄒᆞ거ᄂᆞᆯ王이見欺ᄒᆞᆷ을怒ᄒᆞ야都彌ᄅᆞᆯ罪로ᄡᅥ誣ᄒᆞ야兩目을矐ᄒᆞ고小船에置ᄒᆞ야河水에泛ᄒᆞ고다시其妻ᄅᆞᆯ亂코자ᄒᆞ니妻ㅣ曰今에良人이已逝ᄒᆞ엿스니妾이맛당히大王을事ᄒᆞᆯ지라然니나今에月事가有ᄒᆞ니請컨ᄃᆡ他日을俟ᄒᆞ소셔ᄒᆞ거ᄂᆞᆯ王이許諾ᄒᆞ엿더니妻ㅣ江口에逃至ᄒᆞ야其夫ᄅᆞᆯ遇ᄒᆞ야드ᄃᆡ여高句麗에同奔ᄒᆞ니라

【신라 아달라왕 12년 ○ 고구려 신대왕 원년 ○ 백제 개루왕 39년 ○ 동한 환제 연희 9년 ○ 일황 성무 36년 ○ 서력 기원 166년】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초고왕(肖古王) 초고가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개루왕(蓋婁王)이 신하 도미(都彌)의 처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가까운 신하에게 거짓으로 왕의 의상을 입게 하고는 도미의 처를 사통(私通)하려고 하니, 도미의 처가 옷을 갈아입는다고 핑계대고 계집종을 거짓으로 꾸며서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왕이 속은 사실에 분노하여 도미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작은 배에 태워서 강가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도미의 처를 겁간하려고 하니 처가 말하기를, “지금 남편[良人]이 이미 죽었으니 소첩이 마땅히 대왕을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거리[月事]가 있으니 청컨대 다른 날을 기다려 주십시요.”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그 아내는 강 입구까지 도망가서 남편을 만나 결국 고구려(高句麗)로 함께 달아났다.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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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阿達羅王十八年○高句麗新大王七年○百濟肖古王六年○東漢靈帝憙平元年○日皇成務四十二年○西歷紀元後百七十二年冬十一月에漢玄菟太守耿臨이大兵을率ᄒᆞ고高句麗ᄅᆞᆯ攻ᄒᆞ거ᄂᆞᆯ明臨答夫ㅣ嬰城固守ᄒᆞ다가그引還ᄒᆞᆷ을乘ᄒᆞ야追戰大破ᄒᆞ니耿臨이匹馬도不返ᄒᆞ니라

【신라 아달라왕 18년 ○ 고구려 신대왕 7년 ○ 백제 초고왕 6년 ○ 동한 영제(靈帝) 희평(憙平) 원년 ○ 일황 성무 42년 ○ 서력 기원 172년】

겨울 11월에 한(漢)나라 현도 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였다.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영성(嬰城)을 지키다가 그들이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는 틈을 타서 추격하여 싸워서 크게 무찌르니, 경림이 한 필의 말과도 함께 돌아가지 못하였다.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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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阿達羅王二十五年○高句麗新大王十四年○百濟肖古王十三年○東漢靈帝光和二年○日皇成務四十九年○西歷紀元後百七十高句麗王이崩ᄒᆞ고太子男武ㅣ立ᄒᆞ니此ᄂᆞᆫ故國川王이라王의姿表가雄偉ᄒᆞ고事ᄅᆞᆯ臨ᄒᆞ야寬猛이得中ᄒᆞ며于氏ᄅᆞᆯ立ᄒᆞ야后ᄅᆞᆯ삼다

【신라 아달라왕 25년 ○ 고구려 신대왕 14년 ○ 백제 초고왕 13년 ○ 동한 영제 광화(光和) 2년 ○ 일황 성무 49년 ○ 서력 기원 179년】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남무(男武)가 즉위하니 그가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왕의 용모가 웅장하고 장대하여 일에 임할 때는 관대하고 엄중하여 정확했으며,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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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阿達羅王三十年○高句麗故國川王五年○百濟肖古王十八年○東漢靈帝中平元年○日皇成務五十四年○西歷紀元後百八十四春三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國人이脫解王의孫伐休王伐休ᄅᆞᆯ立ᄒᆞ다王이風雲을占ᄒᆞ야水旱과豊儉을豫知ᄒᆞ며ᄯᅩ能히人의邪正을知ᄒᆞᄂᆞᆫ지라世人이聖王이라稱ᄒᆞ더라

【신라 아달라왕 30년 ○ 고구려 고국천왕 5년 ○ 백제 초고왕 18년 ○ 동한 영제 중평(中平) 원년 ○ 일황 성무 54년 ○ 서력 기원 184년】

봄 3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이 탈해왕(脫解王)의 손자 벌휴왕(伐休王) 벌휴를 왕으로 세웠다. 왕이 바람과 구름의 움직임을 점쳐서 홍수와 가뭄,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았으며, 또한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잘 알아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왕(聖王)이라고 칭하였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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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伐休王七年○高句麗故國川王十二年○百濟肖古王二十五年○東漢獻帝初平二年○日皇成務六十一年○西歷紀元後百九十一高句麗處士乙巴素ㅣ鴨綠谷에隱居ᄒᆞ야性質이剛毅ᄒᆞ고智慮가淵深ᄒᆞ거ᄂᆞᆯ麗臣晏留ㅣ王ᄭᅴ薦ᄒᆞᆫᄃᆡ王이卑辭重禮로ᄡᅧ聘請ᄒᆞ야國相을拜ᄒᆞ엿더니貴戚大臣이다忌嫉ᄒᆞᄂᆞᆫ지라王曰國相을不從ᄒᆞᄂᆞᆫ者ᄂᆞᆫ貴賤을毋論ᄒᆞ고다族誅ᄒᆞ리라ᄒᆞᆫᄃᆡ巴素ㅣ그知遇ᄅᆞᆯ感激ᄒᆞ야政敎ᄅᆞᆯ明ᄒᆞ고賞罰을愼ᄒᆞ니人民이安業ᄒᆞ고內外가無事ᄒᆞ거ᄂᆞᆯ王이이에晏留ᄅᆞᆯ厚賞ᄒᆞ다

【신라 벌휴왕 7년 ○ 고구려 고국천왕 12년 ○ 백제 초고왕 25년 ○ 동한 헌제(獻帝) 초평(初平) 2년 ○ 일황 성무 61년 ○ 서력 기원 191년】

고구려(高句麗) 처사(處士) 을파소(乙巴素)가 압록강(鴨綠江) 골짜기에 은둔하여 살면서 성품이 강직하고 지혜와 사려가 깊었으므로 고구려 신하 안류(晏留)가 왕에게 천거하였다. 왕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청하여 국상으로 삼으니, 왕의 인척과 대신이 모두 시기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모두 일족(一族)을 죽일 것이다.”라고 하니, 을파소가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감격하여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하게 하므로 백성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내외가 무사하였다. 왕이 안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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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伐休王十年○高句麗故國川王十五年○百濟肖古王二十八年○東漢獻帝興平元年○日皇仲哀三年○西歷紀元後百九十四年冬十月에高句麗ㅣ쳐음으로賑貸法을立ᄒᆞ다先是에麗王이出獵ᄒᆞ다가哭者ᄅᆞᆯ見ᄒᆞ고問ᄒᆞᆫᄃᆡ對曰臣이貧窮ᄒᆞ야傭力養母ᄒᆞ더니今年이歲가不登ᄒᆞ야養母키難ᄒᆞ다ᄒᆞ거ᄂᆞᆯ王曰此ᄂᆞᆫ朕의罪라ᄒᆞ고곳下令ᄒᆞ야每歲三月로브터七月ᄭᆞ지官穀을出ᄒᆞ야百姓의게賑貸ᄒᆞ엿다가冬月歲熟後에輸還케ᄒᆞ야恒式을定ᄒᆞ니百姓이大悅ᄒᆞ더라

【신라 벌휴왕 10년 ○ 고구려 고국천왕 15년 ○ 백제 초고왕 28년 ○ 동한 헌제 흥평(興平) 원년 ○ 일황 중애(仲哀) 3년 ○ 서력 기원 194년】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가 처음으로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울고 있는 자를 보고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빈궁하여 품을 팔아 모친을 봉양하였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서 모친을 봉양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짐의 죄이다.” 하고 곧 명령을 내려서 해마다 3월부터 7월까지 관곡(官穀)을 내어 백성에게 빌려주었다가 겨울 수확한 후에 갚도록 하였다. 이를 항상 시행할 것을 법으로 정하니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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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伐休王十二年○高句麗故國川王十七年○百濟肖古王三十年○東漢獻帝建安元年○日皇仲哀五年○西歷紀元後百九十六年夏四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王의第二子伊買의子奈解王奈解ㅣ立ᄒᆞ다○五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王后于氏ㅣ遺命을矯ᄒᆞ야王의弟延優ᄅᆞᆯ立ᄒᆞ니此ᄂᆞᆫ山上王이라初에王이崩ᄒᆞ거ᄂᆞᆯ后ㅣ發喪치아니ᄒᆞ고夜에王弟發岐의게往ᄒᆞ야謂曰王이無後ᄒᆞ니子ㅣ嗣立ᄒᆞ라ᄒᆞ거ᄂᆞᆯ發岐ㅣ責曰婦人의夜行이禮乎아ᄒᆞᆫᄃᆡ后ㅣ慙ᄒᆞ야다시延優의第에至ᄒᆞ니延優ㅣ迎入ᄒᆞ야禮待가極厚ᄒᆞ거ᄂᆞᆯ后ㅣ곳延優에手ᄅᆞᆯ握ᄒᆞ고入宮ᄒᆞ야翌日에立ᄒᆞ니發岐ㅣ곳遼東太守公孫度의게請兵ᄒᆞ야延優ᄅᆞᆯ攻ᄒᆞ다가不克ᄒᆞ고死ᄒᆞ거ᄂᆞᆯ延優ㅣ이에于氏ᄅᆞᆯ立ᄒᆞ야后ᄅᆞᆯ삼더라

【신라 벌휴왕 12년 ○ 고구려 고국천왕 17년 ○ 백제 초고왕 30년 ○ 동한 헌제 건안(建安) 원년 ○ 일황 중애 5년 ○ 서력 기원 196년】

여름 4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왕의 둘째 아들 이매(伊買)의 아들인 내해왕(奈解王) 내해가 즉위하였다.

○ 5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후 우씨(于氏)가 왕의 유언[遺命]이라고 속여서 왕의 동생 연우(延優)를 왕위에 세우니 그가 산상왕(山上王)이다. 처음 왕이 돌아가셨을 때에 왕후가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밤에 왕의 동생 발기(發岐)에게 가서 말하기를, “왕이 후사가 없으니, 당신이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하였다. 발기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부인께서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예(禮)입니까?” 하니 왕후가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다시 연우의 집에 이르니, 연우가 환대하여 예를 다해 모시는 것이 두터웠다. 이에 왕후가 바로 연우의 손을 붙잡고 궁궐로 들어가서 다음 날 즉위하였다. 발기가 곧바로 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에게 병사를 요청하여 연우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연우가 이에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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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解王十三年○高句麗山上王十三年○百濟肖古王四十三年○東漢獻帝建安十四年○日后攝政九年○西歷紀元後二百九年冬十月에高句麗ㅣ丸都滿浦北隔水之地에移都ᄒᆞ다

【신라 내해왕 13년 ○ 고구려 산상왕 13년 ○ 백제 초고왕 43년 ○ 동한 헌제 건안 14년 ○ 일본 황후 섭정 9년 ○ 서력 기원 209년】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가 환도(丸都)【만포(滿浦) 북쪽 강 건너 지역】로 도읍을 옮겼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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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解王十八年○高句麗山上王十八年○百濟肖古王四十八年○東漢獻帝建安十九年○日后攝政十四年○西歷紀元後二百十四秋九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仇首王仇首ㅣ立ᄒᆞ다

【신라 내해왕 18년 ○ 고구려 산상왕 18년 ○ 백제 초고왕 48년 ○ 동한 헌제 건안 19년 ○ 일본 황후 섭정 14년 ○ 서력 기원 214년】

가을 9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구수왕(仇首王) 구수가 즉위하였다.


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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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解王三十一年○高句麗山上王三十一年○百濟仇首王十三年○蜀漢後帝建興五年○日后攝政二十七年○西歷紀元後二百二十七夏五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太子憂位居ㅣ立ᄒᆞ니此ᄂᆞᆫ東川王이라性이寬仁ᄒᆞ거ᄂᆞᆯ王后ㅣ其心을試코자ᄒᆞ야王이出遊ᄒᆞᆯ時에人으로ᄒᆞ여곰路馬의鬛을截ᄒᆞᆫᄃᆡ王이還宮ᄒᆞ야曰馬가鬛이無ᄒᆞ니可憐ᄒᆞ다ᄒᆞ고ᄯᅩ侍者로ᄒᆞ여곰進食ᄒᆞᆯ時에거짓羹을衣上에覆ᄒᆞᆫᄃᆡ王이ᄯᅩᄒᆞᆫ不怒ᄒᆞ더라

【신라 내해왕 31년 ○ 고구려 산상왕 31년 ○ 백제 구수왕 13년 ○ 촉한(蜀漢) 후제(後帝) 건흥(建興) 5년 ○ 일본 황후 섭정 27년 ○ 서력 기원 227년】

여름 5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 우위거(憂位居)가 즉위하니, 그가 동천왕(東川王)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는데, 왕후가 그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왕이 궁 밖을 나갔을 때에 사람을 시켜 왕의 수레를 끌던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는데, 왕이 궁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엾다.”고 하였다. 또한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수라를 올릴 때에 거짓으로 국을 옷 위에 엎지르게 하였는데 왕이 또한 화를 내지 않았다.


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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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解王三十四年○高句麗東川王三年○百濟仇首王十六年○蜀漢後帝建興八年○日后攝政三十年○西歷紀元後二百三十年春三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遺命으로其壻助賁王助賁이立ᄒᆞ니助賁은伐休王에孫이러라

【신라 내해왕 34년 ○ 고구려 동천왕 3년 ○ 백제 구수왕 16년 ○ 촉한 후제 건흥 8년 ○ 일본 황후 섭정 30년 ○ 서력 기원 230년】

봄 3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유언으로 그의 사위 조분왕(助賁王) 조분이 즉위하니, 조분은 벌휴왕(伐休王)의 후손이다


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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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助賁王三年○高句麗東川王六年○百濟仇首王十九年○蜀漢後帝建興十一年○日后攝政三十三年○西歷紀元後二百三十三年夏五月에日人이新羅ᄅᆞᆯ侵犯ᄒᆞ거ᄂᆞᆯ伊飡于老ㅣ迎戰ᄒᆞ다가風을乘ᄒᆞ야縱火ᄒᆞ니日兵이赴水ᄒᆞ야盡死ᄒᆞ더라

【신라 조분왕 3년 ○ 고구려 동천왕 6년 ○ 백제 구수왕 19년 ○ 촉한 후제 건흥 11년 ○ 일본 황후 섭정 33년 ○ 서력 기원 233년】

여름 5월에 일본(日本) 사람이 신라(新羅)를 침범하였는데, 이찬(伊飡) 우노(于老)가 맞서 싸우다가 바람을 틈타서 불을 놓으니 일본 병사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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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助賁王四年○高句麗東川王七年○百濟仇首王二十年○蜀漢後帝建興十二年○日后攝政三十四年○西歷紀元後二百三十四年魏主曹叡ㅣ使臣을遣ᄒᆞ야高句麗에來ᄒᆞ다○秋九月에百濟王이崩ᄒᆞ거ᄂᆞᆯ國人이肖古王母弟古爾王古爾ᄅᆞᆯ立ᄒᆞ다

【신라 조분왕 4년 ○ 고구려 동천왕 7년 ○ 백제 구수왕 20년 ○ 촉한 후제 건흥 12년 ○ 일본 황후 섭정 34년 ○ 서력 기원 234년】

위(魏)나라 왕 조예(曹叡)가 보낸 사신이 고구려(高句麗)에 왔다.

○ 가을 9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니, 백성이 초고왕의 동생[母弟] 고이왕(古爾王) 고이를 왕위에 세웠다.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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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助賁王六年○高句麗東川王九年○百濟古爾王二年○蜀漢後帝建興十四年○日后攝政三十六年○西歷紀元後二百三十六年吳主孫權이胡衛ᄅᆞᆯ遣ᄒᆞ야高句麗와通和코ᄌᆞᄒᆞ거ᄂᆞᆯ王이其使ᄅᆞᆯ斬ᄒᆞ야首ᄅᆞᆯ魏에傳ᄒᆞ고翌年秋에魏에遣使ᄒᆞ야改元을賀ᄒᆞ고後에ᄯᅩ其臣大加로ᄒᆞ여곰軍士千人을率ᄒᆞ고魏ᄅᆞᆯ助ᄒᆞ야公孫淵을伐ᄒᆞ다

【신라 조분왕 6년 ○ 고구려 동천왕 9년 ○ 백제 고이왕 2년 ○ 촉한 후제 건흥 14년 ○ 일본 황후 섭정 36년 ○ 서력 기원 236년】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호위(胡衛)를 보내서 고구려(高句麗)와 화친을 맺고자 하였는데, 왕이 사신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위(魏)나라에 전하였다. 그 다음해 가을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개원(改元, 연호를 바꾸는 일)을 축하하고, 후에 또한 사신 대가(大加)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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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助賁王十二年○高句麗東川王十五年○百濟古爾王八年○蜀漢後帝延熙五年○日后攝政四十二年○西歷紀元後二百四十二年高句麗王이遼東과西安平을襲破ᄒᆞ엿더니其後二年에魏ㅣ幽州刺史毌丘儉을遣ᄒᆞ야高句麗丸都城을攻陷ᄒᆞ거ᄂᆞᆯ麗王이出奔ᄒᆞ엿더니東部人紐由ㅣ魏營에詐降ᄒᆞ야魏將을刺殺ᄒᆞ고드ᄃᆡ여俱死ᄒᆞ니魏軍이大亂ᄒᆞᄂᆞᆫ지라王이이에三道進兵ᄒᆞ야魏軍을大破ᄒᆞ고다시還都ᄒᆞ더라

【신라 조분왕 12년 ○ 고구려 동천왕 15년 ○ 백제 고이왕 8년 ○ 촉한 후제 연희(延熙) 5년 ○ 일본 황후 섭정 42년 ○ 서력 기원 242년】

고구려(高句麗) 왕이 요동(遼東)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파괴하니, 2년 후에 위(魏)나라가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구려 왕이 성을 나와 달아났다. 동부인(東部人) 유유(紐由)가 위나라 진영으로 거짓으로 항복하여 들어가서 위나라 장수를 칼로 찔러 죽이고 결국 같이 죽으니, 위나라 군사들이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이에 왕이 세 갈래 길로 병사를 출진시켜 위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왔다.


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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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助賁王十七年○高句麗東川王二十年○百濟古爾王十三年○蜀漢後帝延熙十年○日后攝政四十七年○西歷紀元後二百四十七春二月에高句麗ㅣ平壤城을築ᄒᆞ고移都ᄒᆞ다○夏五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母弟沾解王沾解ㅣ立ᄒᆞ다

【신라 조분왕 17년 ○ 고구려 동천왕 20년 ○ 백제 고이왕 13년 ○ 촉한 후제 연희 10년 ○ 일본 황후 섭정 47년 ○ 서력 기원 247년】

봄 2월에 고구려(高句麗)가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

○ 여름 5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아우[母弟] 첨해왕(沾解王) 첨해가 즉위하였다.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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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沾解王元年○高句麗東川王二十一年○百濟古爾王十四年○蜀漢後帝延熙十一年○日后攝政四十八年○西歷紀元後二百四十秋九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中川王然弗이立ᄒᆞ야前王을東川에葬ᄒᆞ니國人이莫不哀傷ᄒᆞ야至於自殺ᄒᆞᄂᆞᆫ者ㅣ有ᄒᆞ더라

【신라 첨해왕 원년 ○ 고구려 동천왕 21년 ○ 백제 고이왕 14년 ○ 촉한 후제 연희 11년 ○ 일본 황후 섭정 48년 ○ 서력 기원 248년】

가을 9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아들 중천왕(中川王) 연불(然弗)이 즉위하여 전(前) 왕을 동천(東川)에 장례하니, 백성이 애통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심지어 자살하는 자도 있었다.


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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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沾解王十二年○高句麗中川王十一年○百濟古爾王二十五年○蜀漢後帝景耀二年○日后攝政五十九年○西歷紀元後二百五十冬十二月에高句麗王이杜訥谷에畋ᄒᆞᆯᄉᆡ魏將尉遲楷ㅣ襲擊ᄒᆞ거ᄂᆞᆯ王이精騎五千을發ᄒᆞ야魏兵을大破ᄒᆞ고八千餘級을斬ᄒᆞ다

【신라 첨해왕 12년 ○ 고구려 중천왕 11년 ○ 백제 고이왕 25년 ○ 촉한 후제 경요(景耀) 2년 ○ 일본 황후 섭정 59년 ○ 서력 기원 259년】

겨울 12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두눌곡(杜訥谷)에서 사냥할 때에 위(魏)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가 습격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위나라 병사를 크게 격파하고 8천여 급(及)의 머리를 베었다.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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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沾解王十四年○高句麗中川王十三年○百濟古爾王二十七年○蜀漢後帝景耀四年○日后攝政六十一年○西歷紀元後二百六十新羅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國人이助賁王의壻味鄒王金味鄒ᄅᆞᆯ立ᄒᆞ니곳閼智의七世孫이러라○百濟ㅣ犯贓法을立ᄒᆞ야官人의受財와밋貪盜ᄒᆞᄂᆞᆫ者ᄂᆞᆫ其贓을三倍徵出ᄒᆞ고禁錮終身ᄒᆞ다

【신라 첨해왕 14년 ○ 고구려 중천왕 13년 ○ 백제 고이왕 27년 ○ 촉한 후제 경요 4년 ○ 일본 황후 섭정 61년 ○ 서력 기원 261년】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백성이 조분왕(助賁王)의 사위 미추왕(味鄒王) 김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곧 알지(閼智)의 7세손이다.

○ 백제(百濟)가 범장법(犯贓法)을 세워서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자는 그 장물(臟物)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었다.


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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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味鄒王九年○高句麗中川王二十二年○百濟古爾王三十六年○晋武帝泰始六年○日皇應神元年○西歷紀元後二百七十年冬十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西川王藥盧ㅣ立ᄒᆞ야爲人이聰明仁慈ᄒᆞ니國人이愛戴ᄒᆞ더라○新羅臣寮ㅣ宮室을改築코ᄌᆞᄒᆞ거ᄂᆞᆯ王이民力의勞苦ᄅᆞᆯ念ᄒᆞ야不聽ᄒᆞ다

【신라 미추왕 9년 ○ 고구려 중천왕 22년 ○ 백제 고이왕 36년 ○ 진(晋) 무제(武帝) 태시(泰始) 6년 ○ 일황 응신(應神) 원년 ○ 서력 기원 270년】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서천왕(西川王) 약로(藥盧)가 즉위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총명하고 인자하니 백성이 사랑으로 받들었다.

○ 신라(新羅)의 신료가 궁궐을 새로 짓고자 하였으나 왕이 백성의 수고로움을 걱정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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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味鄒王二十三年○高句麗西川王十四年○百濟古爾王五十年○晋武帝太康五年○日皇應神十五年○西歷紀元後二百八十四年冬十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儒禮王昔儒禮ㅣ立ᄒᆞ니此ᄂᆞᆫ助賁王의長子러라

【신라 미추왕 23년 ○ 고구려 서천왕 14년 ○ 백제 고이왕 50년 ○ 진 무제 태강(太康) 5년 ○ 일황 응신 15년 ○ 서력 기원 284년】

겨울 10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유례왕(儒禮王) 석유례가 즉위하니, 그는 조분왕(助賁王)의 첫째 아들이다.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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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禮王二年○高句麗西川王十六年○百濟古爾王五十二年○晋武帝太康七年○日皇應神十七年○西歷紀元後二百八十六年冬十一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責稽王責稽ㅣ立ᄒᆞ다○高句麗ㅣ帶方今黃海道東이오京畿西라을伐ᄒᆞ니帶方이百濟의게求救ᄒᆞ거ᄂᆞᆯ百濟王이出師救援ᄒᆞ다

【신라 유례왕 2년 ○ 고구려 서천왕 16년 ○ 백제 고이왕 52년 ○ 진 무제 태강 7년 ○ 일황 응신 17년 ○ 서력 기원 286년】

겨울 11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책계왕(責稽王) 책계가 즉위하였다.

○ 고구려(高句麗)가 대방(帶方)【지금의 황해도 동쪽이고 경기도 서쪽이다.】을 정벌하니, 대방이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백제 왕이 군사를 보내 도와주었다.


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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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禮王八年○高句麗西川王二十二年○百濟責稽王六年○晋惠帝元康二年○日皇應神二十三年○西歷紀元後二百九十二年春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烽上王相夫ㅣ立ᄒᆞ다王이卽位後에其叔父安國君達賈와밋其弟咄固ᄅᆞᆯ忌嫉ᄒᆞ야罪로ᄡᅧ誣殺ᄒᆞ다先是에肅愼國이來侵ᄒᆞ거ᄂᆞᆯ達賈ㅣ掩擊大破ᄒᆞ고檀盧城을進拔ᄒᆞ야酋長을殺ᄒᆞ고其民六百餘戶ᄅᆞᆯ扶餘에遷ᄒᆞ고ᄯᅩ梁貊梁貊은貊의一種이니라을破ᄒᆞ니自後로國人이크게倚望ᄒᆞ더니이에無罪被殺ᄒᆞᆷ을見ᄒᆞ고다哀傷ᄒᆞ야曰肅愼梁貊의役에安國君이아니면吾等이엇지免禍ᄒᆞ리오ᄒᆞ고流涕相弔치아니ᄒᆞᄂᆞᆫ者ㅣ無ᄒᆞ더라○燕慕容廆ㅣ高句麗ᄅᆞᆯ侵犯ᄒᆞ야西川王의塚을發掘ᄒᆞ다가壙內에樂聲이出ᄒᆞ거ᄂᆞᆯ神靈이有ᄒᆞ다ᄒᆞ고大懼ᄒᆞ야引退ᄒᆞ니라

【신라 유례왕 8년 ○ 고구려 서천왕 22년 ○ 백제 책계왕 6년 ○ 진 혜제(惠帝) 원강(元康) 2년 ○ 일황 응신 23년 ○ 서력 기원 292년】

봄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봉상왕(烽上王) 상부(相夫)가 즉위하였다. 왕이 즉위한 후에 그의 숙부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와 그의 동생 돌고(咄固)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죄를 덮어씌워서 죽였다. 이에 앞서 숙신국(肅愼國)이 와서 침범하니 달가가 몰래 습격하여 대파하고 단로성(檀盧城)으로 나아가 함락시키고 추장(酋長)을 죽인 후 성안의 백성 600여 호를 부여(扶餘)로 옮겼다. 또한 양맥(梁貊)【양맥은 맥족(貊族)의 일종이다.】을 격파하니 그 이후로 백성이 크게 의지하고 우러러 보았다. 이에 아무런 죄가 없이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 모두 슬퍼하며 말하기를, “숙신, 양맥과의 전투에서 안국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찌 화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의를 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연(燕)나라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침범하여 서천왕(西川王)의 무덤을 파헤치다가 무덤 속에서 악기 소리가 울리니 신령(神靈)이 있다고 생각하고 크게 두려워하여 물러났다(296).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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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儒禮王十四年○高句麗烽上王六年○百濟責稽王十二年○晋惠帝元康八年○日皇應神二十九年○西歷紀元後二百九十八年秋에貊人이百濟ᄅᆞᆯ攻ᄒᆞ거ᄂᆞᆯ王이親히禦敵ᄒᆞ다가見殺ᄒᆞ고子汾西王汾西ㅣ立ᄒᆞ다○高句麗王이宮室을增築ᄒᆞᆯᄉᆡ窮極奢侈ᄒᆞ야百姓이困瘁ᄒᆞ며群臣이諫爭ᄒᆞ야도不聽ᄒᆞ더니其後國相倉助利ㅣ다시極諫ᄒᆞᆫᄃᆡ王이怒曰國相이寡人을謗ᄒᆞ야百姓의게要譽ᄒᆞᆷ이라ᄒᆞ거ᄂᆞᆯ助利ㅣ王의不悛ᄒᆞᆷ을知ᄒᆞ고國人을糾合ᄒᆞ야王을別宮에幽ᄒᆞ니王이自殺ᄒᆞᄂᆞᆫ지라助利ㅣ이에乙弗을立ᄒᆞ야王을삼으니此ᄂᆞᆫ美川王이오西川王의孫이라初에烽上王이乙弗의父咄固ㅣ異心이有ᄒᆞ다ᄒᆞ고賜死ᄒᆞ거ᄂᆞᆯ乙弗이野에遁ᄒᆞ야人家傭作이되얏다가ᄯᅩ鹽賈가되야艱苦를備嘗ᄒᆞ더니今에迎立ᄒᆞ니라○冬十二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其侄基臨王基臨이立ᄒᆞ야日本으로더부러交聘ᄒᆞ다

【신라 유례왕 14년 ○ 고구려 봉상왕 6년 ○ 백제 책계왕 12년 ○ 진 혜제 원강 8년 ○ 일황 응신 29년 ○ 서력 기원 298년】

가을에 맥족(貊族) 사람들이 백제(百濟)를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방어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그의 아들 분서왕(汾西王) 분서가 즉위하였다.

○ 고구려(高句麗) 왕이 궁궐을 증축할 때에 극도로 사치스러워서 백성이 곤궁하고 고달팠으며 여러 신하가 다투어 간언해도 듣지 않았다. 그 후에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다시 힘써 간언하였는데 왕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국상이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에게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창조리가 왕이 고치지 않을 것을 알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왕을 별궁(別宮)에 유폐시키니 왕이 자살하였다. 이에 창조리가 을불(乙弗)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미천왕(美川王)으로 서천왕(西川王)의 손자이다. 처음에 봉상왕(烽上王)이 을불의 부친 돌고(咄固)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죽였는데, 을불이 들판으로 달아나 숨어서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거나 소금장수가 되어 어려움을 두루 겪었는데 지금에 와서 왕으로 모셔진 것이다.

○ 겨울 12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조카 기림왕(基臨王) 기림이 즉위하여 일본(日本)과 서로 교류하였다.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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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基臨王六年○高句麗美川王四年○百濟汾西王六年○晋惠帝永興元年○日皇應神三十五年○西歷紀元後三百四年春二月에百濟ㅣ樂浪의西縣을襲破ᄒᆞ엿더니冬十月에樂浪太守ㅣ刺客을遣ᄒᆞ야百濟王을殺ᄒᆞ거ᄂᆞᆯ國人이仇首王의子比流王比流ᄅᆞᆯ立ᄒᆞ다

【신라 기림왕 6년 ○ 고구려 미천왕 4년 ○ 백제 분서왕 6년 ○ 진 혜제 영흥(永興) 원년 ○ 일황 응신 35년 ○ 서력 기원 304년】

봄 2월에 백제(百濟)가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겨울 10월에 낙랑 태수가 자객을 보내서 백제 왕을 살해하였으므로 백성이 구수왕(仇首王)의 아들 비류왕(比流王) 비류를 왕위에 세웠다.


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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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基臨王十二年○高句麗美川王十年○百濟比流王六年○晋懷帝永嘉四年○日皇應神四十一年○西歷紀元後三百十年夏五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群臣이角干【官名】의子訖解ᄅᆞᆯ立ᄒᆞ야王을삼으니此ᄂᆞᆫ訖解王이라越三年에日本이請婚ᄒᆞ거ᄂᆞᆯ王이阿飡急利의女로ᄡᅥ許ᄒᆞ다

【신라 기림왕 12년 ○ 고구려 미천왕 10년 ○ 백제 비류왕 6년 ○ 진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 ○ 일황 응신 41년 ○ 서력 기원 310년】

여름 5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군신이 각간(角干)【관등명】의 아들 흘해(訖解)를 세워서 왕으로 삼으니, 그가 흘해왕이다. 3년이 지난 뒤 일본(日本)이 청혼을 해 왔으므로 왕이 아찬(阿飡)【관등명】 급리(急利)의 딸을 허락하였다.


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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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訖解王二十一年○高句麗美川王三十一年○百濟比流王二十七年○東晋成帝咸和六年○日皇仁德十九年○西歷紀元後三百三十一春二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故國原王斯由ㅣ立ᄒᆞ다

【신라 흘해왕 21년 ○ 고구려 미천왕 31년 ○ 백제 비류왕 27년 ○ 동진(東晋) 성제(成帝) 함화(咸和) 6년 ○ 일황 인덕(仁德) 19년 ○ 서력 기원 331년】

봄 2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고국원왕(故國原王) 사유(斯由)가 즉위하였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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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訖解王三十二年○高句麗故國原王十一年○百濟比流王三十八年○東晋成帝咸康八年○日皇仁德三十年○西歷紀元後三百四十二秋八月에高句麗ㅣ丸都城을修葺ᄒᆞ고移居ᄒᆞ다가ᄯᅩ東黃城府東에遷都ᄒᆞ다○先是에高句麗ㅣ遼東을攻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燕王慕容皝이高句麗ᄅᆞᆯ攻陷ᄒᆞ고王太后와밋王妃ᄅᆞᆯ擄ᄒᆞ고前王의墓ᄅᆞᆯ發ᄒᆞ야屍ᄅᆞᆯ載歸ᄒᆞ거ᄂᆞᆯ翌年에高句麗ㅣ其弟ᄅᆞᆯ燕國에遣ᄒᆞ야和親을請ᄒᆞ고年貢을輸ᄒᆞ니燕이其屍ᄅᆞᆯ還ᄒᆞ고太后ᄂᆞᆫ留質ᄒᆞ엿다가其後七年에遣還ᄒᆞ니라

【신라 흘해왕 32년 ○ 고구려 고국원왕 11년 ○ 백제 비류왕 38년 ○ 동진 성제 함강(咸康) 8년 ○ 일황 인덕 30년 ○ 서력 기원 342년】

가을 8월에 고구려(高句麗)가 환도성(丸都城)을 수리하고 옮기려고 하였으나 다시 동황성(東黃城)【평양부(平壤府) 동쪽 산】으로 천도하였다.

○ 이보다 앞서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연(燕)나라 왕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왕태후와 왕비를 포로로 잡고 전(前) 왕의 묘를 파헤쳐서 시신을 싣고 돌아갔다. 그 다음해에 고구려가 그의 아우를 연나라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고 해마다 공물을 보내니 연나라가 시신을 돌려주고 태후를 인질로 잡고 있다가 7년 뒤에 돌려보냈다.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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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訖解王三十四年○高句麗故國原王十三年○百濟比流王四十年○東晋康帝建元二年○日皇仁德三十二年○西歷紀元後三百四十四春二月에日本이新羅에遣使ᄒᆞ야請婚ᄒᆞ거ᄂᆞᆯ不答ᄒᆞ엿더니其後에日本이移書絶交ᄒᆞ더라○冬十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汾西王長子契王契ㅣ立ᄒᆞ다

【신라 흘해왕 34년 ○ 고구려 고국원왕 13년 ○ 백제 비류왕 40년 ○ 동진 강제(康帝) 건원(建元) 2년 ○ 일황 인덕 32년 ○ 서력 기원 344년】

봄 2월에 일본(日本)이 신라(新羅)에 사신을 파견하여 혼인을 청하였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니 그 후로 일본이 서신을 보내 교류를 끊었다.

○ 겨울 10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분서왕(汾西王)의 첫째 아들 계왕(契王) 계가 즉위하였다.


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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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訖解王三十六年○高句麗故國原王十五年○百濟契王二年○東晋穆帝永和二年○日皇仁德三十四年○西歷紀元後三百四十六秋九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比流王第二子近肖古王近肖古ㅣ立ᄒᆞ다○日本이新羅金城在今慶州을來圍ᄒᆞ거ᄂᆞᆯ王이閉門不出ᄒᆞ니日兵이食盡ᄒᆞ야撤退ᄒᆞᄂᆞᆫ지라王이康世로ᄒᆞ여곰勁騎ᄅᆞᆯ發ᄒᆞ야擊敗ᄒᆞ다

【신라 흘해왕 36년 ○ 고구려 고국원왕 15년 ○ 백제 계왕 2년 ○ 동진 목제(穆帝) 영화(永和) 2년 ○ 일황 인덕 34년 ○ 서력 기원 346년】

가을 9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 근초고왕(近肖古王) 근초고가 즉위하였다.

○ 일본(日本)이 신라(新羅) 금성(金城)【지금의 경주(慶州)에 있다.】에 와서 포위하였는데 왕이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으니, 일본 병사들의 식량이 떨어져서 물러났다. 이때 왕이 강세(康世)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선발하게 하여 추격해 격퇴하였다.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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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訖解王四十六年○高句麗故國原王二十五年○百濟近肖古王十年○東晋穆帝永和十二年○日皇仁德四十四年○西歷紀元後三百五十六年夏四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國人이味鄒王의侄奈勿王奈勿을立ᄒᆞ니自此로昔氏의祀ㅣ遂絶ᄒᆞ다

【신라 흘해왕 46년 ○ 고구려 고국원왕 25년 ○ 백제 근초고왕 10년 ○ 동진 목제 영화 12년 ○ 일황 인덕 44년 ○ 서력 기원 356년】

여름 4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백성이 미추왕(味鄒王)의 조카 내물왕(奈勿王) 내물을 왕위에 세우니, 이로부터 석씨(昔氏)의 후사가 단절되었다.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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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八年○高句麗故國原王三十三年○百濟近肖古王十八年○東晋哀帝興寧二年○日皇仁德五十二年○西歷紀元後三百六十四夏四月에日本이新羅ᄅᆞᆯ侵犯ᄒᆞ거ᄂᆞᆯ王이草偶人으로ᄡᅧ兵器ᄅᆞᆯ執ᄒᆞ고吐含山在慶州東下에羅列ᄒᆞ야疑兵을삼고勇士ᄅᆞᆯ斧峴東原에埋伏ᄒᆞ엿더니日兵이恃勇輊進ᄒᆞ다가伏兵이出其不意ᄒᆞ야擊殺殆盡ᄒᆞ다

【신라 내물왕 8년 ○ 고구려 고국원왕 33년 ○ 백제 근초고왕 18년 ○ 동진 애제(哀帝) 흥령(興寧) 2년 ○ 일황 인덕 52년 ○ 서력 기원 364년】

여름 4월에 일본(日本)이 신라(新羅)를 침범하였으므로 왕이 풀로 만든 인형에게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吐含山)【경주(慶州)의 동쪽에 있다.】 아래에 늘어 세워 병사로 위장하게 하고, 용맹한 병사들을 부현(斧峴) 동쪽 언덕에 매복시켰다. 일본 병사들이 용맹함만 믿고 곧바로 진격하다가 매복병들이 뜻하지 않게 뛰쳐나와 습격하므로 거의 모두 죽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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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十三年○高句麗故國原王三十八年○百濟近肖古王二十三年○東晋帝奕太和四年○日皇仁德五十七年○西歷紀元後三百六十九年秋九月에高句麗王이步騎二萬을率ᄒᆞ고百濟ᄅᆞᆯ伐ᄒᆞ니百濟ㅣ其太子로ᄒᆞ여곰迎戰ᄒᆞ야麗兵五千餘級을獲ᄒᆞ고越二年에百濟ㅣ高句麗平壤城을攻ᄒᆞ거ᄂᆞᆯ麗王이拒戰ᄒᆞ다가流矢ᄅᆞᆯ中ᄒᆞ야崩ᄒᆞ고子小獸林王丘夫ㅣ立ᄒᆞ다○百濟ㅣ漢山城今漢에移都ᄒᆞ다

【신라 내물왕 13년 ○ 고구려 고국원왕 38년 ○ 백제 근초고왕 23년 ○ 동진 폐제(廢帝) 혁(奕) 태화(太和) 4년 ○ 일황 인덕 57년 ○ 서력 기원 369년】

가을 9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가 태자에게 맞서 싸우도록 하여 고구려 병사의 목 5천여 급을 얻었다. 2년 뒤에 백제가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으므로 고구려 왕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 구부(丘夫)가 즉위하였다.

○ 백제가 한산성(漢山城)【지금의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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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十六年○高句麗小獸林王元年○百濟近肖古王二十六年○東晉簡文帝咸安二年○日皇仁德六十年○西歷紀元後三百七十二夏六月에秦王符堅이高句麗에遣使ᄒᆞ야浮屠順道와밋佛像佛經을送ᄒᆞ니東方의佛法이自此로始ᄒᆞ니라○高句麗ㅣ太學을立ᄒᆞ야子弟ᄅᆞᆯ敎ᄒᆞ다

【신라 내물왕 16년 ○ 고구려 소수림왕 원년 ○ 백제 근초고왕 26년 ○ 동진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 ○ 일황 인덕 60년 ○ 서력 기원 372년】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高句麗)에 사신을 보내서 승려[浮屠] 순도(順道)와 불상, 불경을 보내니 동방의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고구려가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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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十七年○高句麗小獸林王二年○百濟近肖古王二十七年○東晋孝武帝寧康元年○日皇仁德六十一年○西歷紀元後三百七十三年春에百濟禿山城在水原南主ㅣ人民三百餘로ᄡᅥ新羅에來附ᄒᆞ거ᄂᆞᆯ王이六部에分居케ᄒᆞ엿더니百濟王이致書ᄒᆞ야責讓曰我兩國이和好ᄒᆞ야兄弟ᄅᆞᆯ結ᄒᆞ엿거ᄂᆞᆯ今에王이我의叛民을納ᄒᆞ니此ᄂᆞᆫ和誼ᄅᆞᆯ不顧ᄒᆞᆷ이라請컨ᄃᆡ其民을遣還ᄒᆞ라ᄒᆞ거ᄂᆞᆯ王이答曰民은常心이無ᄒᆞ야君이愛懷ᄒᆞ면來ᄒᆞ고殘虐ᄒᆞ면去ᄒᆞᆷ이곳常理라王은百姓을不恤ᄒᆞ고다만寡人을責ᄒᆞᆷ이可乎아ᄒᆞᆫᄃᆡ百濟王이다시敢言치못ᄒᆞ더라○高句麗ㅣ비로소律令을頒行ᄒᆞ다○百濟ㅣ高興으로ᄡᅧ博士ᄅᆞᆯ拜ᄒᆞ니百濟ㅣ開國以來로文字가未有ᄒᆞ다가至是ᄒᆞ야비로소書記ᄅᆞᆯ置ᄒᆞ니라

【신라 내물왕 17년 ○ 고구려 소수림왕 2년 ○ 백제 근초고왕 27년 ○ 동진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원년 ○ 일황 인덕 61년 ○ 서력 기원 373년】

봄에 백제(百濟) 독산성(禿山城)【수원(水原) 남쪽에 있다.】의 성주가 백성 3백여 명과 함께 신라(新羅)에 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6부에 나누어 살도록 하였다. 백제 왕이 서신을 보내 꾸짖기를, “우리 양국이 서로 화친하여 형제의 관계를 맺어 왔는데, 지금 왕이 우리의 반란민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이 답신하기를, “백성은 항심이 없어서 왕이 사랑으로 품으면 오고 잔학하면 떠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왕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고 다만 과인을 꾸짖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하니 백제 왕이 다시는 감히 언급하지 못하였다.

○ 고구려(高句麗)가 비로소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행하였다.

○ 백제가 고흥(高興)을 박사(博士)로 임명하니, 백제가 개국 이래로 문자가 없다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서기(書記)』를 두었다.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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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十九年○高句麗小獸林王四年○百濟近肖古王二十九年○東晋孝武帝寧康三年○日皇仁德六十三年○西歷紀元後三百七十五年秋七月에高句麗ㅣ百濟十谷城今谷을攻ᄒᆞ거ᄂᆞᆯ百濟ㅣ遣將拒戰ᄒᆞ다○冬十一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近仇首王近仇首ㅣ立ᄒᆞ다

【신라 내물왕 19년 ○ 고구려 소수림왕 4년 ○ 백제 근초고왕 29년 ○ 동진 효무제 영강 3년 ○ 일황 인덕 63년 ○ 서력 기원 375년】

가을 7월에 고구려(高句麗)가 백제(百濟) 십곡성(十谷城)【지금의 곡산(谷山)】을 공격하였는데, 백제가 장수를 보내 막아 싸우도록 하였다.

○ 겨울 11월에 백제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 근구수가 즉위하였다.


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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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二十二年○高句麗小獸林王七年○百濟近仇首王三年○東晋孝武帝太元三年○日皇仁德六十六年○西歷紀元後三百七十八秋九月에契丹이高句麗ᄅᆞᆯ犯ᄒᆞ야北邊八部落을陷ᄒᆞ다○新羅ㅣ秦에遣使ᄒᆞ다

【신라 내물왕 22년 ○ 고구려 소수림왕 7년 ○ 백제 근구수왕 3년 ○ 동진 효무제 태원(太元) 3년 ○ 일황 인덕 66년 ○ 서력 기원 378년】

가을 9월에 거란[契丹]이 고구려(高句麗)를 침범하여 북쪽 변방 8개 부락이 함락되었다.

○ 신라(新羅)가 진(秦)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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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二十八年○高句麗小獸林王十三年○百濟近仇首王九年○東晋孝武帝太元九年○日皇仁德七十二年○西歷紀元後三百八十四年夏四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枕流王枕流ㅣ立ᄒᆞ다○秋七月에百濟ㅣ使臣을晉에遣ᄒᆞ다○九月에胡僧摩難羅陀ㅣ晉으로브터百濟에至ᄒᆞ거ᄂᆞᆯ王이禮로ᄡᅧ迎接ᄒᆞ다○冬十一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母弟故國讓王伊連이立ᄒᆞ야翌年에軍士四萬을發ᄒᆞ야遼東玄菟ᄅᆞᆯ攻陷ᄒᆞ고男女一萬을擄還ᄒᆞ다○百濟王이崩ᄒᆞ고弟辰斯王辰斯ㅣ立ᄒᆞ다

【신라 내물왕 28년 ○ 고구려 소수림왕 13년 ○ 백제 근구수왕 9년 ○ 동진 효무제 태원 9년 ○ 일황 인덕 72년 ○ 서력 기원 384년】

여름 4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침류왕(枕流王) 침류가 즉위하였다.

○ 가을 7월에 백제가 진(秦)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나라로부터 백제에 이르니 왕이 예로써 영접하였다.

○ 겨울 11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동생 고국양왕(故國壤王) 이련(伊連)이 즉위하였다. 그 다음해에 군사 4만 명을 선발하여 요동(遼東)과 현도(玄菟)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서 돌아왔다.

○ 백제 왕이 돌아가시고 아우 진사왕(辰斯王) 진사가 즉위하였다.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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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三十六年○高句麗故國讓王八年○百濟辰斯王八年○東晋孝武帝太元十七年○日皇仁德八十年○西歷紀元後三百九十春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廣開土王談德이立ᄒᆞ다○百濟王이崩ᄒᆞ고枕流王의子阿辛王阿辛이立ᄒᆞ다○夏五月에日本이新羅金城을來圍ᄒᆞ거ᄂᆞᆯ將士ㅣ다出戰코ᄌᆞᄒᆞᆫᄃᆡ王曰今에賊이捨舟深入ᄒᆞ야死戰코ᄌᆞᄒᆞ니其鋒을不可當이라ᄒᆞ고이에閉城固守ᄒᆞ더니밋日兵이退ᄒᆞ거ᄂᆞᆯ王이몬져勇騎二百을遣ᄒᆞ야其歸路ᄅᆞᆯ遮截ᄒᆞ고ᄯᅩ步卒一千으로ᄡᅧ禿山在慶州郡東에追至ᄒᆞ야夾擊大破ᄒᆞ야殺獲이甚衆ᄒᆞ다

【신라 내물왕 36년 ○ 고구려 고국양왕 8년 ○ 백제 진사왕 8년 ○ 동진 효무제 태원 17년 ○ 일황 인덕 80년 ○ 서력 기원 392년】

봄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광개토왕(廣開土王) 담덕(談德)이 즉위하였다.

○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침류왕(枕流王)의 아들 아신왕(阿莘王) 아신이 즉위하였다.

○ 여름 5월에 일본(日本)이 신라(新羅) 금성(金城)에 와서 포위하니 장수와 군졸이 모두 나아가 싸우고자 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자 하니 그 예봉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고 이에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일본 병사들이 물러났다. 왕이 먼저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보내어 그들의 귀로를 막아 끊고, 또 보병 1천 명으로 추격하여 독산(禿山)【경주군(慶州郡) 동쪽에 있다.】에 이르렀다. 함께 공격하여 크게 무찔러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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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奈勿王四十六年○高句麗廣開土王十年○百濟阿辛王十年○東晉安帝元興元年○日皇履仲三年○西歷紀元後四百二年春二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太子ㅣ年幼ᄒᆞ거ᄂᆞᆯ國人이實聖王實聖을立ᄒᆞ니實聖은金閼智의孫이러라○先是燕王慕容盛이軍士三萬을率ᄒᆞ고驃騎大將軍慕容熙로ᄡᅧ前鋒을삼고高句麗ᄅᆞᆯ來侵ᄒᆞ야新城南蘇竝在遼東二城을拔ᄒᆞ고土地七百餘里ᄅᆞᆯ開拓ᄒᆞ고五千餘戶ᄅᆞᆯ徙去ᄒᆞ거ᄂᆞᆯ至是ᄒᆞ야高句麗ㅣ燕의平州ᄅᆞᆯ伐ᄒᆞ니刺史慕容歸ㅣ城을棄ᄒᆞ고走ᄒᆞ더니其後二年에慕容熙ㅣ燕王이되야다시遼東城을來攻ᄒᆞ다가敗還ᄒᆞ니라

【신라 내물왕 46년 ○ 고구려 광개토왕 10년 ○ 백제 아신왕 10년 ○ 동진 안제(安帝) 원흥(元興) 원년 ○ 일황 이중(履仲) 3년 ○ 서력 기원 402년】

봄 2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백성이 실성왕(實聖王) 실성을 왕으로 세우니 실성은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다.

○ 이에 앞서 연(燕)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하였다. 신성(新城)과 남소(南蘇)【모두 요동(遼東)에 있다.】 두 성을 빼앗고, 토지[上地] 700여 리를 개척하고 5천여 호를 이주시켰다(400). 이때에 고구려가 연나라의 평주(平州)를 정벌하니 자사(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2년 후에 모용희가 연나라 왕이 되어 다시 요동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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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實聖王三年○高句麗廣開土王十三年○百濟阿辛王十三年○東晋安帝義熙元年○日皇履仲六年○西歷紀元後四百五年秋九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典支王典支ㅣ立ᄒᆞ다先是에百濟ㅣ日本과結和ᄒᆞ고典支ᄅᆞᆯ爲質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王의訃音을接ᄒᆞ고痛哭請歸ᄒᆞᆫᄃᆡ日本이兵士百人으로ᄡᅧ護送ᄒᆞᆯᄉᆡ時에典支의弟磔禮ㅣ自立ᄒᆞ거ᄂᆞᆯ國人이磔禮ᄅᆞᆯ殺ᄒᆞ고典支ᄅᆞᆯ迎立ᄒᆞ다

【신라 실성왕 3년 ○ 고구려 광개토왕 13년 ○ 백제 아신왕 13년 ○ 동진 안제 의희(義熙) 원년 ○ 일황 이중 6년 ○ 서력 기원 405년】

가을 9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전지왕(腆支王) 전지가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가 일본(日本)과 화친을 맺고 전지를 인질로 두었다. 이에 이르러 왕의 부음(訃音)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가길 청하니, 일본이 병사 1백 명으로 호송하였다. 그때에 전지의 아우 책례(磔禮)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백성이 책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으로 세웠다.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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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實聖王六年○高句麗廣開土王十六年○百濟典支王三年○東晋安帝義熙四年○日皇反正三年○西歷紀元後四百八年春二月에日本이軍營을對馬島에置ᄒᆞ고鍊兵儲糧ᄒᆞ야新羅ᄅᆞᆯ掩襲코ᄌᆞᄒᆞ거ᄂᆞᆯ新羅王이聞ᄒᆞ고發兵先攻코ᄌᆞᄒᆞ니其臣未斯品이諫止ᄒᆞ다○三月에高句麗ㅣ北燕에遣使ᄒᆞ고ᄯᅩ宗族의誼ᄅᆞᆯ敍ᄒᆞ니北燕王雲이李拔을遣ᄒᆞ야報聘ᄒᆞ다雲은本高勾麗의支庶라燕國에仕ᄒᆞ야公爵을封ᄒᆞ엿더니燕王熙가死ᄒᆞᄆᆡ馮跋의推戴ᄒᆞᆫᄇᆡ되야北燕王이되니라

【신라 실성왕 6년 ○ 고구려 광개토왕 16년 ○ 백제 전지왕 3년 ○ 동진 안제 의희 4년 ○ 일황 반정(反正) 3년 ○ 서력 기원 408년】

봄 2월에 일본(日本)이 군영(軍營)을 쓰시마 섬[對馬島]에 설치하여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저축하여 신라(新羅)를 몰래 습격하고자 하였다. 신라 왕이 이 사실을 듣고 병사를 내어 선제공격하고자 하나, 신하 미사품(未斯品)이 간언하여 그만두었다.

○ 3월에 고구려(高句麗)가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고 또한 종족(宗族)의 도리를 펼치니, 북연 왕 운(雲)이 이발(李拔)을 보내서 답례[報聘]하였다. 운은 본(本)이 고구려의 지서(支庶)이다. 연(燕)나라에서 관료가 되어 공작(公爵)에 봉해졌는데, 연나라 왕 희(熙)가 죽자 풍발(馮跋)의 추대를 받아 북연 왕이 되었다.


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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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實聖王十一年○高句麗廣開土王二十一年○百濟典支王八年○東晉安帝義熙九年○日皇允恭二年○西歷紀元後四百十三年冬十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長壽王巨璉이立ᄒᆞ다

【신라 실성왕 11년 ○ 고구려 광개토왕 21년 ○ 백제 전지왕 8년 ○ 동진 안제 의희 9년 ○ 일황 윤공(允恭) 2년 ○ 서력 기원 413년】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 거련(巨連)이 즉위하였다.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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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實聖王十五年○高句麗長壽王四年○百濟典支王十二年○東晋安帝義熙十三年○日皇允恭六年○西歷紀元後四百十七年夏五月에新羅訥祗ㅣ實聖王을弑ᄒᆞ고自立ᄒᆞ니此ᄂᆞᆫ訥祗王이니奈勿王의子라初에奈勿王이實聖을高句麗에遣質ᄒᆞ엿더니實聖이因ᄒᆞ야訥祗ᄅᆞᆯ怨恨ᄒᆞ다가今에訥祗ᄅᆞᆯ殺코ᄌᆞᄒᆞ거ᄂᆞᆯ訥祗ㅣ곳王을弑ᄒᆞ니라

【신라 실성왕 15년 ○ 고구려 장수왕 4년 ○ 백제 전지왕 12년 ○ 동진 안제 의희 13년 ○ 일황 윤공 6년 ○ 서력 기원 417년】

여름 5월에 신라(新羅) 눌지(訥祗)가 실성왕(實聖王)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눌지왕이니, 내물왕(奈勿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高句麗)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이 때문에 눌지를 원망해 오다가 지금에 이르러 눌지를 죽이려고 했으므로 눌지가 곧바로 실성왕을 시해하였다.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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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訥祗王元年○高句麗長壽王五年○百濟典支王十三年○東晋安帝義熙十四年○日皇允恭七年○西歷紀元後四百十八年秋에新羅朴堤上이日本에至ᄒᆞ야見殺ᄒᆞ다初에羅王이二弟가有ᄒᆞ니曰卜好曰未斯欣이라卜好ᄂᆞᆫ高句麗에遣質ᄒᆞ고未斯欣은日本에爲質ᄒᆞ엿더니王이二弟ᄅᆞᆯ見코ᄌᆞᄒᆞ야몬ᄌᆞ堤上으로ᄒᆞ여곰高句麗ᄅᆞᆯ往說ᄒᆞ야卜好ᄅᆞᆯ回國케ᄒᆞ고旣而오王이ᄯᅩ未斯欣을思ᄒᆞ야堤上다려謂曰我의二弟ᄂᆞᆫ곳左右臂라今의一臂만只得ᄒᆞ니奈何오堤上이對曰臣이이믜以身許國ᄒᆞ엿스니엇지微勞ᄅᆞᆯ敢辭ᄒᆞ리오然이나高句麗ᄂᆞᆫ其王이賢ᄒᆞ니臣이能히一言으로相悟케ᄒᆞ엿거니와至於日本ᄒᆞ야ᄂᆞᆫ맛당히謀計로ᄡᅧ紿ᄒᆞᆯ지라今에臣이去ᄒᆞ거든王은곳臣과밋未斯欣의家屬을拘囚ᄒᆞ야臣이大王ᄭᅴ得罪ᄒᆞᆷ과如케ᄒᆞ시면臣이計策을出ᄒᆞ야未斯欣을送回ᄒᆞ리이다ᄒᆞ거ᄂᆞᆯ王이其計ᄅᆞᆯ用ᄒᆞ엿더니堤上이日本에至ᄒᆞ니日主ㅣ果然疑訝ᄒᆞ다가밋其家屬의被囚ᄒᆞᆷ을聞ᄒᆞ고이에堤上이新羅ᄅᆞᆯ叛ᄒᆞ엿다ᄒᆞ야곳命將出師ᄒᆞ야新羅ᄅᆞᆯ將襲ᄒᆞᆯᄉᆡ堤上과未斯欣으로ᄡᅥ鄕導ᄅᆞᆯ삼거ᄂᆞᆯ海島에至ᄒᆞ야堤上이未斯欣을勸ᄒᆞ야潛還ᄒᆞ라ᄒᆞ니未斯欣이曰我ㅣ엇지君을捨ᄒᆞ고獨行ᄒᆞ리오堤上曰만일公子ᄅᆞᆯ救出ᄒᆞ야大王의情을慰安ᄒᆞᆯ진ᄃᆡᆫ我ㅣ엇지一命을愛ᄒᆞ리오ᄒᆞ니未斯欣이泣辭遁還ᄒᆞ다旣而오日本이未斯欣의逃亡ᄒᆞᆷ을聞ᄒᆞ고探軍을派ᄒᆞ야四追ᄒᆞᆯᄉᆡ煙霧가晦暝ᄒᆞ야不獲ᄒᆞ더라이에日主ㅣ堤上을鞫問ᄒᆞ거ᄂᆞᆯ堤上曰我ᄂᆞᆫ鷄林의臣이라吾君의志ᄅᆞᆯ成코ᄌᆞᄒᆞᆷ이니何必多問ᄒᆞ리오ᄒᆞᆫᄃᆡ日主ㅣ怒曰汝ㅣ이믜我臣이되엿거ᄂᆞᆯ今에鷄林의臣이라ᄒᆞᆷ은何故오汝ㅣ만일日本의臣이되면重祿을賞賜ᄒᆞ리라ᄒᆞ거ᄂᆞᆯ堤上이曰吾ㅣ차라리鷄林의犬豕가될지언졍日本의臣子되기ᄂᆞᆫ不願이오鷄林의箠楚ᄅᆞᆯ受ᄒᆞᆯ지언졍日本의爵祿은不受ᄒᆞ리라ᄒᆞᆫᄃᆡ日主ㅣ더욱怒ᄒᆞ야堤上의脚을剝ᄒᆞ고蒹葭ᄅᆞᆯ刈ᄒᆞ야其上에趨ᄒᆞ라ᄒᆞ고ᄯᅩ熱鐵上에扶立ᄒᆞ고鞫問ᄒᆞ거ᄂᆞᆯ答曰鷄林의臣이로라ᄒᆞᆫᄃᆡ日主ㅣ其不可屈ᄒᆞᆷ을知ᄒᆞ고이에燒殺ᄒᆞ니라新羅王이其死ᄒᆞᆷ을聞ᄒᆞ고哀慟이殊甚ᄒᆞ며곳大阿飡을追贈ᄒᆞ고其家ᄅᆞᆯ厚給ᄒᆞ고未斯欣으로ᄒᆞ여곰其第二女ᄅᆞᆯ娶케ᄒᆞ다先是未斯欣이來ᄒᆞᆷ時에王이六部ᄅᆞᆯ命ᄒᆞ야郊迎ᄒᆞ고밋見ᄒᆞᄆᆡ握手涕泣ᄒᆞ며置酒極歡ᄒᆞ고憂息曲을作ᄒᆞ야慰勞ᄒᆞ다堤上의妻ㅣ三女ᄅᆞᆯ率ᄒᆞ고鵄述嶺在慶에上ᄒᆞ야日本을望ᄒᆞ고痛哭ᄒᆞ다가死ᄒᆞ니堤上은婆娑王의五世孫이러라

【신라 눌지왕 원년 ○ 고구려 장수왕 5년 ○ 백제 전지왕 13년 ○ 동진 안제 의희 14년 ○ 일황 윤공 7년 ○ 서력 기원 418년】

가을에 신라(新羅) 박제상(朴堤上)이 일본(日本)에 이르러서 살해되었다. 처음에 신라 왕에게 2명의 아우가 있었으니,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이었다. 복호는 고구려(高句麗)에 인질로 보냈고, 미사흔은 일본에 인질로 보냈는데, 왕이 2명의 아우를 보고 싶어 했다. 먼저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내어 설득하여 복호를 돌아올 수 있도록 하였다. 얼마 후 왕이 또 미사흔을 생각하면서 박제상에게 말하기를, “나의 두 아우는 곧 좌우의 팔과 같다. 지금 한쪽 팔만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박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어찌 작은 수고로움을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그러나 고구려는 그 왕이 현명하여 신이 한마디 말로 깨우칠 수 있었지만, 일본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계략을 세워서 속여야 합니다. 지금 신이 떠나거든 왕께서는 곧 신과 미사흔의 가속(家屬)을 붙잡아 가두십시오. 신이 대왕께 죄를 지은 것과 같이 하시면 신이 계책을 내어서 미사흔을 돌려보내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계책을 따라서 박제상이 일본에 이르니, 일본 왕이 과연 의심하였으나 그의 가속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듣고는 박제상이 신라를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곧 장수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출진시켜 장차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박제상과 미사흔을 길 안내자[鄕導]로 삼아서 섬[海島]에 이르렀다. 이때 박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자네를 버리고 홀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박제상이 말하길, “만일 공자(公子)를 구출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제가 어찌 제 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눈물을 흘리며 인사하고 도망하여 돌아갔다. 얼마 후 일본이 미사흔이 도망갔다는 것을 듣고 탐색군을 보내서 사방에서 추격할 때에 안개[烟霧]로 인해 어두컴컴해서 붙잡지 못하였다. 이에 일본 왕이 박제상을 잡아 심문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우리 국왕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인데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본 왕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 지금 계림의 신하라고 하니 어찌된 까닭인가. 네가 만일 일본의 신하가 된다면 많은 녹봉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제상이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계림의 회초리를 받을지언정 일본의 관직과 녹봉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니, 일본 왕이 더욱 화를 내면서 박제상의 다리 가죽을 벗기고 베어 낸 억새와 갈대 위를 걸어가도록 하였다. 또한 뜨겁게 달군 쇠 위에 세워 놓고 심문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이다.”라고 하였다. 일본 왕이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에 태워 죽였다. 신라 왕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곧 대아찬(大阿飡)【관등명】에 추증(追贈)하고, 그의 가족에게 후히 보답을 하였으며, 미사흔에게 그의 둘째 딸과 혼례케 하였다. 이에 앞서 미사흔이 돌아왔을 때에 왕이 6부에 명령하여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하였다. 왕이 미사흔을 만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따라 극진히 환영하였는데, 그때 「우식곡(憂息曲)」을 지어서 위로하였다. 박제상의 아내가 3명의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경주(慶州)에 있다.】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박제상은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이다.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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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訥祗王三年○高句麗長壽王七年○百濟典支王十五年○宋武帝永初元年是歲劉宋武帝簒晋○日皇允恭九年○西歷紀元後四百二十春三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久爾辛王久爾辛이立ᄒᆞ다

【신라 눌지왕 3년 ○ 고구려 장수왕 7년 ○ 백제 전지왕 15년 ○ 송(宋) 무제(武帝) 영초(永初) 원년. 이 해에 유송(劉宋) 무제가 진(晋)나라를 찬탈하였다 ○ 일황 윤공 9년 ○ 서력 기원 420년】

봄 3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이 즉위하였다.


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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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訥祗王九年○高句麗長壽王十三年○百濟久爾辛王六年○宋文帝元嘉三年○日皇允恭十五年○西歷紀元後四百二十六年冬十二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比有王比有ㅣ立ᄒᆞ다

【신라 눌지왕 9년 ○ 고구려 장수왕 13년 ○ 백제 구이신왕 6년 ○ 송 문제(文帝) 원가(元嘉) 3년 ○ 일황 윤공 15년 ○ 서력 기원 426년】

겨울 12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비유왕(毘有王) 비유가 즉위하였다.


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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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訥祗王十八年○高句麗長壽王二十二年○百濟比有王九年○宋文帝元嘉十二年○日皇允恭二十四年○西歷紀元後四百三十五春에新羅ㅣ歷代의園陵을修葺ᄒᆞ다○燕王馮弘이尙書陽伊ᄅᆞᆯ高句麗에遣ᄒᆞ야來投ᄒᆞᆷ을豫約ᄒᆞ니此ᄂᆞᆫ魏가數伐ᄒᆞᆷ을苦ᄒᆞᆷ이러라翌年에魏ㅣ燕을伐ᄒᆞᆯᄉᆡ麗에遣使ᄒᆞ야燕을勿助ᄒᆞ라ᄒᆞ거ᄂᆞᆯ王이不聽ᄒᆞ고葛盧와孟允을命ᄒᆞ야軍士數萬을率ᄒᆞ고燕使陽伊ᄅᆞᆯ隨ᄒᆞ야燕王弘을迎至ᄒᆞ엿더니其後三年에燕王弘이麗王이不禮ᄒᆞᆫ다ᄒᆞ고宋帝의게往依코ᄌᆞᄒᆞ거ᄂᆞᆯ麗王이怒ᄒᆞ야殺ᄒᆞ니라

【신라 눌지왕 18년 ○ 고구려 장수왕 22년 ○ 백제 비유왕 9년 ○ 송 문제 원가 12년 ○ 일황 윤공 24년 ○ 서력 기원 435년】

봄에 신라(新羅)가 역대의 원(園)과 능(陵)을 수리하였다.

○ 연(燕)나라 왕 풍홍(馮弘)이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고구려(高句麗)에 보내서 항복하겠다는 뜻을 미리 약속하였으니, 이는 위(魏)나라가 수차례 침략함을 고통스러워한 것이다. 그 다음해에 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할 때에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연나라를 돕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갈로(葛盧)와 맹광(孟光)1)에게 명하여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가서 연나라 왕 풍홍을 맞이하였다. 3년이 지난 후에 연나라 왕 풍홍이 고구려 왕이 예가 없다고 하고 송제(宋帝)에게 가서 의탁코자 하였으므로, 고구려 왕이 분노하여 죽였다.


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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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訥祗王三十八年○高句麗長壽王四十二年○百濟比有王二十九年○宋孝武帝孝建二年○日皇安康二年○西歷紀元後四百五十秋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蓋鹵王餘慶이立ᄒᆞ다○冬十月에高句麗ㅣ百濟ᄅᆞᆯ侵攻ᄒᆞ거ᄂᆞᆯ新羅ㅣ遣兵救援ᄒᆞ다○高句麗ㅣ宋에遣使ᄒᆞ다○百濟ㅣ魏에遣使ᄒᆞ다

【신라 눌지왕 38년 ○ 고구려 장수왕 42년 ○ 백제 비유왕 29년 ○ 송 효무제(孝武帝) 효건(孝建) 2년 ○ 일황 안강(安康) 2년 ○ 서력 기원 455년】

가을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개로왕(蓋鹵王) 여경(餘慶)이 즉위하였다.

○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가 백제를 침공하였는데 신라(新羅)가 지원병을 보냈다.

○ 고구려가 송(宋)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백제가 위(魏)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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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訥祗王四十一年○高句麗長壽王四十五年○百濟蓋鹵王三年○宋孝武帝大明二年○日皇雄略二年○西歷紀元後四百五十八年秋에新羅王이崩ᄒᆞ고子慈悲王慈悲ㅣ立ᄒᆞ다

【신라 눌지왕 41년 ○ 고구려 장수왕 45년 ○ 백제 개로왕 3년 ○ 송 효무제 대명(大明) 2년 ○ 일황 웅략(雄略) 2년 ○ 서력 기원 458년】

가을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자비왕(慈悲王) 자비가 즉위하였다.


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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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慈悲王十七年○高句麗長壽王六十二年○百濟蓋鹵王二十年○宋後廢帝元徽三年○日皇雄略十九年○西歷紀元後四百七十五春正月에新羅王이月城에移居ᄒᆞ다○秋九月에高句麗王이百濟ᄅᆞᆯ攻ᄒᆞ야其王을殺ᄒᆞ니王의太子文周王文周ㅣ立ᄒᆞ다初에浮屠道琳이麗王의密旨ᄅᆞᆯ受ᄒᆞ고거짓麗王ᄭᅴ得罪ᄒᆞ엿다ᄒᆞ고亡命ᄒᆞ야百濟에入ᄒᆞ니時에濟王이奕碁ᄅᆞᆯ嗜ᄒᆞᄂᆞᆫ지라道琳이이에碁術로進ᄒᆞ야甚히親昵ᄒᆞ거ᄂᆞᆯ이에濟王을勸ᄒᆞ야城郭을廣ᄒᆞ고宮室을崇ᄒᆞ야國威ᄅᆞᆯ壯케ᄒᆞ라ᄒᆞ니王이其言을惑ᄒᆞ야聽從ᄒᆞ더니自此로倉庾가虛竭ᄒᆞ고人民이困窮ᄒᆞ거ᄂᆞᆯ道琳이逃還ᄒᆞ야麗王의게告ᄒᆞᆫᄃᆡ王이이에軍士三萬을率ᄒᆞ고百濟의漢城을圍ᄒᆞ야七日에拔ᄒᆞ니濟王이數十騎ᄅᆞᆯ率ᄒᆞ고出城西走ᄒᆞ다가麗將桀婁의게被害ᄒᆞ다時에太子文周ㅣ新羅의게求救ᄒᆞ야軍士一萬을得ᄒᆞ엿더니밋還來ᄒᆞᄆᆡ王은死ᄒᆞ고麗兵이已退ᄒᆞ엿더라

【신라 자비왕 17년 ○ 고구려 장수왕 62년 ○ 백제 개로왕 20년 ○ 송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3년 ○ 일황 웅략 19년 ○ 서력 기원 475년】

봄 정월에 신라(新羅) 왕이 월성(月城)에 옮겨 지냈다.

○ 가을 9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백제(百濟)를 공격하여 그 왕을 죽이니, 왕의 태자 문주왕(文周王) 문주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승려 도림(道琳)이 고구려 왕의 밀지를 받아서 거짓으로 고구려 왕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고 망명하여 백제로 들어갔다. 그때에 백제 왕이 바둑을 즐겼는데, 도림이 이에 바둑 기술로 다가가 매우 친밀해졌다. 이에 백제 왕에게 성곽을 넓히고 궁궐을 더욱 높여서 나라의 위엄을 장대하게 하라고 권하니, 왕이 그 말에 솔깃하여 듣고 따랐다. 이로부터 창고가 비어 고갈되고 백성이 곤궁하였다. 도림이 도망하여 돌아가서 고구려 왕에게 알리니, 왕이 이에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의 한성(漢城)을 포위하여 7일 동안 공격하였다. 백제 왕이 수십 기의 기마를 거느리고 성을 나와 서쪽으로 도주하다가 고구려 장수 걸루(桀婁)에게 살해되었다. 그때에 태자 문주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서 군사 1만 명을 얻었는데, 돌아와 보니 왕은 죽고 고구려 병사는 이미 물러나 있었다.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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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慈悲王十八年○高句麗長壽王六十三年○百濟文周王元年○宋後廢帝元徽四年○日皇雄略二十年○西歷紀元後四百七十六年夏四月에耽羅ㅣ今濟方物을百濟의게獻ᄒᆞ다耽羅ᄂᆞᆫ或曰耽牟羅라南海中에在ᄒᆞ야古昔에ᄂᆞᆫ人物이無ᄒᆞ더니三人이有ᄒᆞ야地로죳ᄎᆞ湧出ᄒᆞ니長曰良乙那오次曰高乙那오三曰夫乙那라이에荒地에游獵ᄒᆞ야衣皮食肉ᄒᆞ더니一日은紫泥로封ᄒᆞᆫ木函이海濱에浮來ᄒᆞ거ᄂᆞᆯ開見ᄒᆞ니內에石函이有ᄒᆞ고一紅帶紫衣使者ㅣ隨來ᄒᆞ고函內에靑衣處女三과諸駒犢과五穀의種子가有ᄒᆞ고使者ㅣ曰我ᄂᆞᆫ日本使臣이라吾王이此三女ᄅᆞᆯ生ᄒᆞ고言ᄒᆞ되西海中岳에神子三人이將且開國코ᄌᆞᄒᆞ되配匹이無ᄒᆞ다ᄒᆞ고臣을命ᄒᆞ야三女ᄅᆞᆯ送來ᄒᆞ엿스니맛당히配耦ᄅᆞᆯ作ᄒᆞ야大業을成ᄒᆞ라ᄒᆞ고곳乘雲忽去ᄒᆞ거ᄂᆞᆯ三人이이에分娶ᄒᆞ고各其泉甘土肥處ᄅᆞᆯ擇ᄒᆞ야居ᄒᆞᆯᄉᆡ良乙那所居ᄂᆞᆫ第一都라ᄒᆞ고高乙那所居ᄂᆞᆫ第二都라ᄒᆞ고夫乙那所居ᄂᆞᆫ第三都라ᄒᆞ고五穀을播ᄒᆞ며駒犢을牧ᄒᆞ야漸漸富盛ᄒᆞ더라○六月에日本이新羅東邊을侵攻ᄒᆞ거ᄂᆞᆯ王이將軍德智ᄅᆞᆯ命ᄒᆞ야擊敗ᄒᆞ다○冬十月에百濟ㅣ熊津今公에移都ᄒᆞ다

【신라 자비왕 18년 ○ 고구려 장수왕 63년 ○ 백제 문주왕 원년 ○ 송후폐제 원휘 4년 ○ 일황 웅략 20년 ○ 서력 기원 476년】

여름 4월에 탐라(耽羅)【지금의 제주(濟州)】가 지역의 특산물[方物]을 백제(百濟)에게 바쳤다. 탐라는 혹 ‘탐모라(耽牟羅)’라고도 불렀으며 남쪽 바다에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다. 첫째는 양을나(良乙那), 둘째는 고을나(高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불렀다. 이들은 황지(荒地)에서 사냥을 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는데,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해진 나무 상자가 해안가에 떠내려왔다.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 돌 상자가 있고, 붉은 허리띠와 자줏빛 옷을 입은 1명의 사자(使者)가 나오고, 상자 안에 청색 옷을 입은 처녀 3명과 여러 마리 망아지와 송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日本)의 사신입니다. 나의 왕이 여기 3명의 딸을 낳고 말하기를, ‘서쪽 바다 한가운데 큰 산에 신의 아들 3명이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할 것인데 배필(配匹)이 없다.’고 하고 신에게 명하여 3명의 딸을 보내 왔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서 대업을 이루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곧 구름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세 사람이 나누어 혼인을 하고, 각기 물이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택하여 정착하였다. 그때에 양을나의 거처는 제1도(都)라 하고, 고을나의 거처는 제2도라 하고, 부을나의 거처는 제3도라 하고 오곡을 심었으며, 망아지와 송아지를 방목하여 점점 부유해졌다.

○ 6월에 일본이 신라(新羅) 동쪽 변경을 침공했는데,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격퇴하였다.

○ 겨울 10월에 백제가 웅진(熊津)【지금의 공주(公州)】으로 도읍을 옮겼다.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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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慈悲王十九年○高句麗長壽王六十四年○百濟文周王二年○宋順帝昇明元年○日皇雄略二十一年○西歷紀元後四百七十七年夏에百濟의解仇ㅣ其君을弑ᄒᆞ고太子三斤王三斤을立ᄒᆞ니三斤王이解仇ᄅᆞᆯ誅ᄒᆞ다

【신라 자비왕 19년 ○ 고구려 장수왕 64년 ○ 백제 문주왕 2년 ○ 송 순제(順帝) 승명(昇明) 원년 ○ 일황 웅략 21년 ○ 서력 기원 477년】

여름에 백제(百濟)의 해구(解仇)가 왕을 시해하고 태자 삼근왕(三斤王) 삼근을 왕으로 세우니, 삼근왕이 해구를 죽였다.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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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慈悲王二十一年○高句麗長壽王六十六年○百濟三斤王二年○齊高帝建元元年是歲齊高帝簒宋爲帝○日皇雄略二十三年○西歷紀元後四百七十九年春二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子炤智王炤智ㅣ立ᄒᆞ다○百濟王이崩ᄒᆞ고文周王母弟昆支의子牟大ㅣ立ᄒᆞ니此ᄂᆞᆫ東城王이러라

【신라 자비왕 21년 ○ 고구려 장수왕 66년 ○ 백제 삼근왕 2년 ○ 제(齊)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 이 해에 제나라 고제가 송나라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었다. ○ 일황 웅략 23년 ○ 서력 기원 479년】

봄 2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소지왕(炤知王) 소지가 즉위하였다.

○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문주왕(文周王)의 동생 곤지(昆支)의 아들 모대(牟大)가 즉위하니, 그가 동성왕(東城王)이다.


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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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炤智王八年○高句麗長壽王七十四年○百濟東城王八年○齊武帝永明五年○日皇顯宗三年○西歷紀元後四百八十七年春에新羅ㅣ四方郵驛을置ᄒᆞ다

【신라 소지왕 8년 ○ 고구려 장수왕 74년 ○ 백제 동성왕 8년 ○ 제 무제(武帝) 영명(永明) 5년 ○ 일황 현종(顯宗) 3년 ○ 서력 기원 487년】

봄에 신라(新羅)가 사방에 역참[郵驛]을 두었다.


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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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炤智王十一年○高句麗長壽王七十七年○百濟東城王十一年○齊武帝永明八年○日皇仁賢三年○西歷紀元後四百九十年春에新羅ㅣ市肆ᄅᆞᆯ初置ᄒᆞ야四方의貨ᄅᆞᆯ通ᄒᆞ다

【신라 소지왕 11년 ○ 고구려 장수왕 77년 ○ 백제 동성왕 11년 ○ 제 무제 영명 8년 ○ 일황 인현(仁賢) 3년 ○ 서력 기원 490년】

봄에 신라(新羅)가 시전[市肆]을 처음 설치하여 사방의 재화가 유통되도록 하였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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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炤智王十二年○高句麗長壽王七十八年○百濟東城王十二年○齊武帝永明九年○日皇仁賢四年○西歷紀元後四百九十一年冬十二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太孫文咨王羅雲이立ᄒᆞ다

【신라 소지왕 12년 ○ 고구려 장수왕 78년 ○ 백제 동성왕 12년 ○ 제 무제 영명 9년 ○ 일황 인현 4년 ○ 서력 기원 491년】

겨울 12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태손(太孫) 문자왕(文咨王) 나운(羅雲)이 즉위하였다.


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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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炤智王二十一年○高句麗文咨王九年○百濟東城王二十一年○齊東昏侯永元二年○日皇武烈二年○西歷紀元後五百年春에百濟ㅣ臨流閣을建ᄒᆞ니高가五丈이오ᄯᅩ酒池ᄅᆞᆯ穿ᄒᆞ고奇禽과異卉ᄅᆞᆯ養ᄒᆞ거ᄂᆞᆯ群臣이諫諍ᄒᆞ되不聽ᄒᆞ고諫者가更有ᄒᆞᆯ가恐ᄒᆞ야宮門을閉ᄒᆞ더라○冬十一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王의從祖弟智大路ㅣ立ᄒᆞ니此ᄂᆞᆫ智證王이러라

【신라 소지왕 21년 ○ 고구려 문자왕 9년 ○ 백제 동성왕 21년 ○ 제 동혼후(東昏侯) 영원(永元) 2년 ○ 일황 무열(武烈) 2년 ○ 서력 기원 500년】

봄에 백제(百濟)가 임류각(臨流閣)을 세우니 높이가 5장(丈)이고, 또한 술이 가득 찬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과 진귀한 식물을 심어 기르니, 군신이 다투어 간언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고 간언하는 자가 또 있을까 두려워하여 궁궐 문을 닫아 버렸다.

○ 겨울 11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왕의 육촌 동생[再從弟] 지대로(智大路)가 즉위하니, 그가 지증왕(智證王)이다.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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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智證王元年○高句麗文咨王十年○百濟東城王二十二年○齊和帝中興元年○日皇武烈三年○西歷紀元後五百一年百濟芍加ㅣ其君을弑ᄒᆞ다初에王이芍加로ᄡᅧ加林城今林을鎭撫ᄒᆞ라ᄒᆞᆫᄃᆡ芍加ㅣ稱疾不往ᄒᆞ거ᄂᆞᆯ王이益勸ᄒᆞᄂᆞᆫ지라芍加ㅣ怨恨ᄒᆞ다가至是ᄒᆞ야王의出獵을乘ᄒᆞ야刺殺ᄒᆞ거ᄂᆞᆯ太子餘隆이立ᄒᆞ니此ᄂᆞᆫ武寧王이라翌年에芍加ㅣᄯᅩ加林城을據ᄒᆞ야叛ᄒᆞ거ᄂᆞᆯ王이扞率解明으로ᄒᆞ여곰往討ᄒᆞ야芍加ᄅᆞᆯ執ᄒᆞ야白江今白馬江이라에投ᄒᆞ다○二月에新羅ㅣ殉葬을禁ᄒᆞ다先是에ᄂᆞᆫ王이崩ᄒᆞ면殉葬者가男女各五人이러라○三月에新羅ㅣ各州郡을命ᄒᆞ야勸農ᄒᆞᆯᄉᆡ비로소牛로ᄡᅥ耕田케ᄒᆞ다

【신라 지증왕 원년 ○ 고구려 문자왕 10년 ○ 백제 동성왕 22년 ○ 제 화제(和帝) 중흥(中興) 원년 ○ 일황 무열 3년 ○ 서력 기원 501년】

백제(百濟)의 백가(苩加)1)가 왕을 시해하였다. 처음에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加林城)【지금의 임천(林川)】을 진무(鎭撫)하도록 하였는데, 백가가 병을 빙자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더욱 재촉하여 권하니 백가가 원한을 품고 있다가 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서 칼로 찔러 죽였다. 태자 여륭(餘隆)이 즉위하니, 그가 무령왕(武寧王)이다. 그 다음해에 백가가 또다시 가림성에 거처하면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한솔(扞率)【관등명】 해명(解明)에게 가서 토벌하도록 하여 백가를 붙잡아 백강(白江)【지금의 백마강(白馬江)이다.】에 던져 버렸다.

○ 2월에 신라(新羅)가 순장(殉葬)을 금지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죽으면 순장자가 남녀 각각 5명이었다.

○ 3월에 신라가 각 주군(州郡)에 명하여 권농(勸農)하였는데, 이때 비로소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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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智證王三年○高句麗文咨王十二年○百濟武寧王二年○梁武帝天監二年○日皇武烈五年○西歷紀元後五百三年秋九月에靺鞨이百濟高木城在喬을攻ᄒᆞ거ᄂᆞᆯ濟王이遣兵擊退ᄒᆞ다○新羅ㅣ비로소國號ᄅᆞᆯ定ᄒᆞ고王을稱ᄒᆞ며二十二世ᄅᆞᆯ追尊ᄒᆞ야王이라ᄒᆞ고翌年에ᄯᅩ喪服法을制定ᄒᆞ다

【신라 지증왕 3년 ○ 고구려 문자왕 12년 ○ 백제 무령왕 2년 ○ 양(梁) 무제(武帝) 천감(天監) 2년 ○ 일황 무열 5년 ○ 서력 기원 503년】

가을 9월에 말갈(靺鞨)이 백제(百濟) 고목성(高木城)【교동(喬桐)에 있다.】을 공격하였으므로 제(濟)나라 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격퇴하였다.

○ 신라(新羅)가 비로소 국호를 정하고 왕을 칭하기 시작하였으며, 22대를 추존(追尊)하여 왕이라 하고 다음해에 또한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였다.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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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智證王五年○高句麗文咨王十四年○百濟武寧王四年○梁武帝天監四年○日皇武烈七年○西歷紀元後五百五年冬十一月에新羅ㅣ비로소有司ᄅᆞᆯ命ᄒᆞ야氷을藏케ᄒᆞ고舟楫의制ᄅᆞᆯ定ᄒᆞ다

【신라 지증왕 5년 ○ 고구려 문자왕 14년 ○ 백제 무령왕 4년 ○ 양 무제 천감 4년 ○ 일황 무열 7년 ○ 서력 기원 505년】

겨울 11월에 신라(新羅)가 비로소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고, 배 만드는[舟楫] 제도를 정하였다.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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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智證王十二年○高句麗文咨王二十一年○百濟武寧王十一年○梁武帝天監十一年○日皇繼體六年○西歷紀元後五百十二年春三月에高句麗ㅣ梁에遣使ᄒᆞ다○夏四月에百濟ㅣ梁에遣使ᄒᆞ다○六月에于山國이新羅에降ᄒᆞ다于山은東海中小島라一名은鬱陵이니地方이百里오其險阻ᄅᆞᆯ恃ᄒᆞ고不服ᄒᆞ거ᄂᆞᆯ伊飡異斯夫ㅣ木으로ᄡᅧ螄子ᄅᆞᆯ製ᄒᆞ야戰船에載ᄒᆞ고其島에抵ᄒᆞ야誑嚇ᄒᆞ야曰汝ㅣ만일不降ᄒᆞ면곳此獸ᄅᆞᆯ放ᄒᆞ야踏殺ᄒᆞ리라ᄒᆞ니國人이懼ᄒᆞ야降ᄒᆞ니라

【신라 지증왕 12년 ○ 고구려 문자왕 21년 ○ 백제 무령왕 11년 ○ 양 무제 천감 11년 ○ 일황 계체(繼體) 6년 ○ 서력 기원 512년】

봄 3월에 고구려(高句麗)가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여름 4월에 백제(百濟)가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新羅)에 항복하였다. 우산은 동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일명 울릉(鬱陵)이라고도 하니 대지가 100리(里)이고 지세가 험난한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伊飡)【관등명】 이사부(異斯夫)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배에 싣고 그 섬에 도달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돌아다니며 살상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니 백성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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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智證王十四年○高句麗文咨王二十三年○百濟武寧王十三年○梁武帝天監十三年○日皇繼體八年○西歷紀元後五百十四年秋七月에新羅王이崩ᄒᆞ거ᄂᆞᆯ諡ᄒᆞ야曰智證이라ᄒᆞ니新羅의諡法이自此로始ᄒᆞ고子法興王原宗이立ᄒᆞ다

【신라 지증왕 14년 ○ 고구려 문자왕 23년 ○ 백제 무령왕 13년 ○ 양 무제 천감 13년 ○ 일황 계체 8년 ○ 서력 기원 514년】

가을 7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諡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아들 법흥왕(法興王) 원종(原宗)이 즉위하였다.


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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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五年○高句麗文咨王二十八年○百濟武寧王十八年○梁武帝天監十八年○日皇繼體十三年○西歷紀元後五百十九年高勾麗王이崩ᄒᆞ고子安藏王興安이立ᄒᆞ다

【신라 법흥왕 5년 ○ 고구려 문자왕 28년 ○ 백제 무령왕 18년 ○ 양 무제 천감 18년 ○ 일황 계체 13년 ○ 서력 기원 519년】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안장왕(安藏王) 흥안(興安)이 즉위하였다.


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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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九年○高句麗安藏王四年○百濟武寧王二十二年○梁武帝普通四年○日皇繼體十七年○西歷紀元後五百二十三年夏五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諡曰武寧이라ᄒᆞ니百濟의諡法이ᄯᅩᄒᆞᆫ自此로始ᄒᆞ고太子聖王明穠이立ᄒᆞ다○新羅ㅣ官制와服色을定ᄒᆞ다

【신라 법흥왕 9년 ○ 고구려 안장왕 4년 ○ 백제 무령왕 22년 ○ 양 무제 보통(普通) 4년 ○ 일황 계체 17년 ○ 서력 기원 523년】

여름 5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시호(諡號)를 무령(武寧)이라 하니 백제가 시호법을 또한 이때부터 시행하였고, 태자 성왕(聖王) 명농(明穠)이 즉위하였다.

○ 신라(新羅)가 관제(官制)와 복색(服色)을 정하였다.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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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十四年○高句麗安藏王九年○百濟聖王五年○梁武帝太通二年○日皇繼體二十二年○西歷紀元後五百二十八年新羅ㅣ비로소佛敎ᄅᆞᆯ行ᄒᆞ다先是訥祗王時에沙門墨胡子ㅣ高勾麗로브터來ᄒᆞᆯᄉᆡ時에王의女ㅣ病亟ᄒᆞ거ᄂᆞᆯ胡子ㅣ焚香祝禱ᄒᆞ니病이곳愈ᄒᆞᄂᆞᆫ지라王이奇喜ᄒᆞ야이에佛敎ᄅᆞᆯ大興ᄒᆞᆯᄉᆡ群臣이諫止ᄒᆞ거ᄂᆞᆯ近臣異次頓이曰佛法이深奧ᄒᆞ니不可不崇奉ᄒᆞᆯ지라請컨ᄃᆡ臣의頭ᄅᆞᆯ斬ᄒᆞ야衆議ᄅᆞᆯ定ᄒᆞ소셔ᄒᆞ거ᄂᆞᆯ王曰佛道ᄅᆞᆯ興코ᄌᆞᄒᆞ고不辜ᄅᆞᆯ先殺ᄒᆞᆷ이可乎아ᄒᆞᆫᄃᆡ對曰만일道가行ᄒᆞ면비록死ᄒᆞ야도無憾이로소이다ᄒᆞ거ᄂᆞᆯ王이다시群臣과會議ᄒᆞ고異次頓을殺ᄒᆞᆯᄉᆡ異次頓이臨死에曰我ㅣ佛을爲ᄒᆞ야就刑ᄒᆞ니佛이有靈ᄒᆞ면我ㅣ死後에異祥이有ᄒᆞ리라ᄒᆞ더니밋斬ᄒᆞᄆᆡ乳와如ᄒᆞᆫ白血이湧出ᄒᆞ거ᄂᆞᆯ衆이다시佛法을毁謗치못ᄒᆞ더라

【신라 법흥왕 14년 ○ 고구려 안장왕 9년 ○ 백제 성왕 5년 ○ 양 무제 태통(太通) 2년 ○ 일황 계체 22년 ○ 서력 기원 528년】

신라(新羅)가 비로소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에 앞서 눌지왕(訥祗王) 때에 승려[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高句麗)로부터 왔을 적에 왕의 딸이 병이 위급하였는데, 묵호자가 향을 피워 기도[祝禱]하니 병이 곧 나았다. 이에 왕이 매우 기뻐하며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할 때에 군신들이 그만둘 것을 간언하였다. 이때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이 말하기를, “불법이 심오(深奧)하니 숭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의 머리를 베어서 중의(衆議)를 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불도(佛道)를 일으키고자 하는데 죄 없는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말하니 대답하기를, “만일 불도가 시행된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다시 군신들과 의논하여 이차돈을 죽이려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을 맞으며 말하기를, “내가 부처를 위하여 형벌을 받으니, 만약 부처가 영험함이 있다면 내가 죽은 후에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의 목을 벤 뒤 우유와 같은 하얀 피가 솟구치니 무리가 다시는 불법을 훼방하지 못하였다.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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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十七年○高句麗安藏王十二年○百濟聖王八年○梁武帝中太通三年○日皇繼體二十五年○西歷紀元後五百三十一年夏五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弟安原王寶延이立ᄒᆞ다

【신라 법흥왕 17년 ○ 고구려 안장왕 12년 ○ 백제 성왕 8년 ○ 양 무제 중태통(中太通) 3년 ○ 일황 계체 25년 ○ 서력 기원 531년】

여름 5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우 안원왕(安原王) 보연(寶延)이 즉위하였다.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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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二十二年○高句麗安原王五年○百濟聖王十三年○梁武帝大同二年○日皇宣化元年○西歷紀元後五百三十六年秋에高句麗ㅣ東魏에遣使ᄒᆞ다○新羅ㅣ비로소年號ᄅᆞᆯ建ᄒᆞᆯᄉᆡ建元元年이라ᄒᆞ다

【신라 법흥왕 22년 ○ 고구려 안원왕 5년 ○ 백제 성왕 13년 ○ 양 무제 대동(大同) 2년 ○ 일황 선화(宣化) 원년 ○ 서력 기원 536년】

가을에 고구려(高句麗)가 동위(東魏)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신라(新羅)가 비로소 연호를 세웠는데,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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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二十四年○高句麗安原王七年○百濟聖王十五年○梁武帝大同四年○日皇宣化三年○西歷紀元後五百三十八年百濟ㅣ泗泚今扶餘郡에移都ᄒᆞ고國號ᄅᆞᆯ南扶餘라ᄒᆞ다

【신라 법흥왕 24년 ○ 고구려 안원왕 7년 ○ 백제 성왕 15년 ○ 양 무제 대동 4년 ○ 일황 선화 3년 ○ 서력 기원 538년】

백제(百濟)가 사비(泗沘)1)【지금의 부여군(夫餘郡)】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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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二十六年○高句麗安原王九年○百濟聖王十七年○梁武帝大同六年○日皇欽明元年○西歷紀元後五百四十年新羅王이崩ᄒᆞ고侄眞興王彡麥宗이立ᄒᆞ다

【신라 법흥왕 26년 ○ 고구려 안원왕 9년 ○ 백제 성왕 17년 ○ 양(梁) 무제 대동 6년 ○ 일황 흠명(欽明) 원년 ○ 서력 기원 540년】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조카 진흥왕(眞興王) 삼맥종(彡麥宗)이 즉위하였다.


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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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元年○高句麗安原王十年○百濟聖王十八年○梁武帝大同七年○日皇欽明二年○西歷紀元後五百四十一年百濟ㅣ梁에遣使ᄒᆞ야毛詩博士와涅槃經義와工匠과畫師等을請來ᄒᆞ다

【신라 진흥왕 원년 ○ 고구려 안원왕 10년 ○ 백제 성왕 18년 ○ 양 무제 대동 7년 ○ 일황 흠명(欽明) 2년 ○ 서력 기원 541년】

백제(百濟)가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경의(涅槃經義)』, 장인[工匠], 화가 등을 청해서 왔다.


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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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五年○高句麗安原王十四年○百濟聖王二十二年○梁武帝大同十一年○日皇欽明六年○西歷紀元後五百四十五年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陽原王平成이立ᄒᆞ다○秋七月에新羅ㅣ國史ᄅᆞᆯ修撰ᄒᆞᆯᄉᆡ伊飡異斯夫ㅣ請ᄒᆞ야曰國史ᄂᆞᆫ君臣의善惡을記ᄒᆞ야褒貶을後代에示ᄒᆞᄂᆞ니만일修撰치아니면後代가何ᄅᆞᆯ監戒ᄒᆞ리오ᄒᆞ거ᄂᆞᆯ王이곳大阿飡金居柒夫等을命ᄒᆞ야文士ᄅᆞᆯ集ᄒᆞ야撰輯ᄒᆞ다

【신라 진흥왕 5년 ○ 고구려 안원왕 14년 ○ 백제 성왕 22년 ○ 양 무제 대동 11년 ○ 일황 흠명 6년 ○ 서력 기원 545년】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양원왕(陽原王) 평성(平成)이 즉위하였다.

○ 가을 7월에 신라(新羅)가 『국사(國史)』를 수찬(修撰)할 적에 이찬(伊飡)【관등명】 이사부(異斯夫)가 청하여 말하기를, “국사는 군신(君臣)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포폄(褒貶)을 후대에 보이고자 하는 것이니, 만일 수찬하지 않으면 후대인이 무엇을 거울로 삼아 경계[鑑戒]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곧 대아찬(大阿飡) 김거칠부(金居柒夫) 등에게 명령하여 문사(文士)를 모집하여 찬집하게 하였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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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九年○高句麗陽原王四年○百濟聖王二十六年○梁武帝大淸三年○日皇欽明十年○西歷紀元後五百四十九年梁이佛의舍利ᄅᆞᆯ新羅에送ᄒᆞ거ᄂᆞᆯ王이百官으로ᄒᆞ여곰奉迎ᄒᆞ다

【신라 진흥왕 9년 ○ 고구려 양원왕 4년 ○ 백제 성왕 26년 ○ 양 무제 대청(大淸) 3년 ○ 일황 흠명 10년 ○ 서력 기원 549년】

양(梁)나라가 부처의 사리(舍利)를 신라(新羅)에 보냈는데, 왕이 모든 관료에게 받들어 맞이[奉迎]하도록 하였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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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法興王十一年○高句麗陽原王六年○百濟聖王二十八年○梁簡文帝太寶二年○日皇欽明十二年○西歷紀元後五百五十一年新羅ㅣ改元ᄒᆞ야開國이라ᄒᆞ다○秋九月에突厥今土耳基部落이니其時에今俄屬西比利亞에居ᄒᆞ고一名은鮮卑라이高句麗城을圍ᄒᆞ다가敗歸ᄒᆞ다○新羅ㅣ將軍金居柒夫ᄅᆞᆯ遣ᄒᆞ야高句麗의十郡을攻取ᄒᆞ다初에柒夫ㅣ僧裝을被ᄒᆞ고高句麗의强弱을覘ᄒᆞᆯᄉᆡ其境에入ᄒᆞ니法師惠亮이란者ㅣ有ᄒᆞ야居柒夫다려謂ᄒᆞ야曰此國이雖小ᄒᆞ나無人타謂치못ᄒᆞᆯ지라恐컨ᄃᆡ子ㅣ見執ᄒᆞ리니速反ᄒᆞ라ᄒᆞ더니至是ᄒᆞ야居柒夫ㅣ戰勝ᄒᆞ고惠亮을携歸ᄒᆞ거ᄂᆞᆯ王이ᄡᅧ僧統을삼고비로쇼百座講會와밋八關의法을置ᄒᆞ다

【신라 진흥왕 11년 ○ 고구려 양원왕 6년 ○ 백제 성왕 28년 ○ 양 간문제(簡文帝) 태보(太寶) 2년 ○ 일황 흠명 12년 ○ 서력 기원 551년】

신라(新羅)가 연호를 바꿔서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 가을 9월에 돌궐(突厥)【지금의 터키[土耳基]이고 그 당시에는 지금의 러시아[俄國] 시베리아[西比利亞]에 속해 있었고, 다른 말로는 선비(鮮卑)다.】이 고구려(高句麗) 성을 포위하였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 신라가 장군 김거칠부(金居柒夫)를 보내서 고구려의 10개 군을 공격하여 취하였다. 처음에 김거칠부가 승복을 입고 고구려의 강약(强弱)을 엿보려고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법사(法師) 혜량(惠亮)이란 자가 있었는데 김거칠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가 비록 작으나 인물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붙잡힐까 두려우니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거칠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혜량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는데, 왕이 승통(僧統)으로 삼고 비로소 백좌 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을 설치하였다.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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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十二年○高句麗陽原王七年○百濟聖王二十九年○梁元帝承聖元年○日皇欽明十三年○西歷紀元後五百五十二年初에伽耶國王嘉悉이唐樂部의箏을效法ᄒᆞ야十二絃琴을製ᄒᆞ고樂師于勒을命ᄒᆞ야十二曲을造ᄒᆞ엿더니後에于勒이國이作亂ᄒᆞᆷ을知ᄒᆞ고樂器ᄅᆞᆯ携ᄒᆞ고新羅에來ᄒᆞ거ᄂᆞᆯ羅王이召見ᄒᆞ야奏樂케ᄒᆞ고다시法知와階古와萬德等을命ᄒᆞ야勒의게樂을學ᄒᆞ라ᄒᆞ니勒이其材ᄅᆞᆯ隨ᄒᆞ야敎ᄒᆞᆯᄉᆡ階古ᄂᆞᆫ琴을學ᄒᆞ고法知ᄂᆞᆫ歌ᄅᆞᆯ學ᄒᆞ고萬德은舞ᄅᆞᆯ學ᄒᆞ야三人이十二曲을學得ᄒᆞ고相謂曰此樂이繁淫ᄒᆞ야古雅치못ᄒᆞ다ᄒᆞ고이에五曲을製就ᄒᆞ니于勒이聞ᄒᆞ고怒ᄒᆞ다가밋其曲을聽ᄒᆞ고歎曰此ᄂᆞᆫ正聲이라드ᄃᆡ여王ᄭᅴ奏ᄒᆞ니王이大悅ᄒᆞ야其琴을名ᄒᆞ야曰伽耶라ᄒᆞ고ᄯᅩ玄琴이有ᄒᆞ니此ᄂᆞᆫ國相王山岳이晉人의送ᄒᆞᆫ바七玆琴을仿ᄒᆞ야製ᄒᆞᆫ者라奏ᄒᆞᆯ時에玄鶴이來舞ᄒᆞ거ᄂᆞᆯ因ᄒᆞ야名曰玄鶴琴이라ᄒᆞ더니後에다시玄琴이라稱ᄒᆞ고ᄯᅩ玉寶高란者ㅣ智異山에入ᄒᆞ야學琴ᄒᆞᆫ지五十年에三十曲을自製ᄒᆞ야續命得의게傳ᄒᆞ고續命得은貴金의게傳ᄒᆞ니貴金이ᄯᅩᄒᆞᆫ智異山에入ᄒᆞ야不出ᄒᆞ거ᄂᆞᆯ王이琴道가不傳ᄒᆞᆯ가恐ᄒᆞ야伊飡允興으로ᄒᆞ여곰親往ᄒᆞ야其秘ᄅᆞᆯ傳ᄒᆞ고ᄯᅩ琵琶가有ᄒᆞ야唐制로더브러大同小異ᄒᆞ고其音이三調가有ᄒᆞ니一은宮調오二ᄂᆞᆫ七賢調오三은鳳凰調ㅣ러라

【신라 진흥왕 12년 ○ 고구려 양원왕 7년 ○ 백제 성왕 29년 ○ 양 원제(元帝) 승성(承聖) 원년 ○ 일황 흠명 13년 ○ 서력 기원 552년】

초기에 가야국(伽倻國) 왕 가실(嘉悉)이 당(唐)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모방해서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들고,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후에 우륵이 나라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新羅)에 왔다. 신라 왕이 그를 불러서 악기를 연주하도록 하고 다시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 등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이 그들의 재능에 따라서 가르칠 때에 계고는 거문고를, 법지는 노래를, 만덕은 춤을 배우도록 하였다. 세 사람이 12곡을 모두 배우고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은 번잡하고 음란하여 고풍스럽거나 우아하지 못하다.”라고 하고 이에 5곡을 제작하였다. 우륵이 이를 듣고 화를 내다가 그 곡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것은 바른 소리의 음악이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왕에게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 악기의 이름을 ‘가야(伽倻)’ 또는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국상 왕산악(王山岳)이 진(晋)나라 사람이 보내 준 칠현금(七絃琴)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연주할 때에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으므로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했는데 이후에 다시 ‘현금’이라고 칭하였다. 또 옥보고(玉寶高)라는 자가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거문고[琴]를 배운 지 50년 만에 30곡을 스스로 지어서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전하니, 귀금이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왕이 거문고 연주법이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으로 하여금 직접 지리산에 가서 그 비법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또 비파(琵琶)가 있어서 당나라의 그것과 함께 대동소이하고 음에 3조(調)가 있으니, 첫째는 궁조(宮調)이고, 둘째는 칠현조(七賢調)이며, 셋째는 봉황조(鳳凰調)이다.


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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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十四年○高句麗陽原王九年○百濟聖王三十一年○梁元帝承聖三年○日皇欽明十五年○西歷紀元後五百五十四年秋에百濟王이新羅ᄅᆞᆯ侵ᄒᆞ거ᄂᆞᆯ羅將金武力이逆戰ᄒᆞ야濟王을殺ᄒᆞ니濟太子威德王昌이立ᄒᆞ다

【신라 진흥왕 14년 ○ 고구려 양원왕 9년 ○ 백제 성왕 31년 ○ 양 원제 승성 3년 ○ 일황 흠명 15년 ○ 서력 기원 554년】

가을에 백제(百濟) 왕이 신라(新羅)를 침략하였으므로 신라 장수 김무력(金武力)이 역습하여 백제 왕을 살해하니, 백제 태자 위덕왕(威德王) 창(昌)이 즉위하였다.


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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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十九年○高句麗陽原王十四年○百濟威德王五年○陳武帝永定三年○日皇欽明二十年○西歷紀元後五百五十九年春三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平原王陽城이立ᄒᆞ다

【신라 진흥왕 19년 ○ 고구려 양원왕 14년 ○ 백제 위덕왕 5년 ○ 양 무제(武帝) 영정(永定) 3년 ○ 일황 흠명 20년 ○ 서력 기원 559년】

봄 3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평원왕(平原王) 양성(陽城)이 즉위하였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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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三十四年○高句麗平原王十五年○百濟威德王二十年○梁宣帝大建六年○日皇敏達三年○西歷紀元後五百七十四年春에新羅ㅣ新宮을捨ᄒᆞ야皇龍寺ᄅᆞᆯ삼고丈六佛像을鑄造ᄒᆞ니銅이三萬五千七斤이오鍍ᄒᆞᆫ金이百二兩重이러라畫工率居ㅣ老松을寺壁에畫ᄒᆞ니鳥雀이往往이飛入ᄒᆞ다가蹭蹬ᄒᆞ야落ᄒᆞ더니後에畫色이漫漶ᄒᆞ거ᄂᆞᆯ寺僧이다시補畫ᄒᆞ엿더니自後론鳥雀이不來ᄒᆞ더라

【신라 진흥왕 34년 ○ 고구려 평원왕 15년 ○ 백제 위덕왕 20년 ○ 양 선제(宣帝) 대건(大建) 6년 ○ 일황 민달(敏達) 3년 ○ 서력 기원 574년】

봄에 신라(新羅)가 신궁(新宮)을 고쳐서 황룡사(皇龍寺)를 세우고, 장육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하였는데 동(銅)이 3만 5천 7근(斤)이고 도금한 금이 1백 2냥이었다. 화공(畵工) 솔거(率居)가 노송(老松)을 사찰의 벽면에 그리니 가끔씩 참새가 날아들다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이후에 그림 색이 흐릿해져서 절의 승려가 다시 색깔을 덧칠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참새가 날아오지 않았다.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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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興王三十六年○高句麗平原王十七年○百濟威德王二十二年○梁宣帝大建八年○日皇敏達五年○西歷紀元後五百七十六年新羅王이崩ᄒᆞ다王이鴻濟라改元ᄒᆞ고末年에佛을好ᄒᆞ야剃髮ᄒᆞ고僧衣ᄅᆞᆯ披ᄒᆞ며自號曰法雲이라ᄒᆞ고王妃도ᄯᅩᄒᆞᆫ尼가되더니至是ᄒᆞ야王의次子眞智王金輪이立ᄒᆞ다

【신라 진흥왕 36년 ○ 고구려 평원왕 17년 ○ 백제 위덕왕 22년 ○ 양(梁) 선제 대건 8년 ○ 일황 민달 5년 ○ 서력 기원 576년】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셨다. 왕이 홍제(鴻濟)라 연호를 고치고 말년에 부처를 좋아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으며 스스로 부르기를 ‘법운(法雲)’이라 하였다. 왕비도 또한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의 둘째 아들 진지왕(眞智王) 금륜(金輪)이 즉위하였다.


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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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智王三年○高句麗平原王二十年○百濟威德王二十五年○梁宣帝大建十一年○日皇敏達八年○西歷紀元後五百七十九年秋七月에新羅王이崩ᄒᆞ고眞興王太子銅輪의子伯淨이立ᄒᆞ니此ᄂᆞᆫ眞平王이러라○新羅ㅣ伊飡金后稷으로ᄡᅥ兵部令을拜ᄒᆞ다羅王이畋獵을好ᄒᆞ야后稷이切諫ᄒᆞ되不聽ᄒᆞ더니后稷이將死에其子다려謂曰吾ㅣ人臣이되야能히君의惡을匡救치못ᄒᆞ니恐컨ᄃᆡ王이遊誤不已ᄒᆞ다가畢竟國을亡ᄒᆞᆯ지니此ᄂᆞᆫ吾의憂라吾ㅣ雖死ᄒᆞ야도王에意ᄅᆞᆯ悟케ᄒᆞ리니我ㅣ死後에我ᄅᆞᆯ王의遊畋ᄒᆞᄂᆞᆫ路側에瘞ᄒᆞ라其子ㅣ從ᄒᆞ엿더니他日에王이出獵ᄒᆞᆯᄉᆡ中路에聲이有ᄒᆞ야曰王은毋去ᄒᆞ라ᄒᆞᄂᆞᆫ지라王이驚怪ᄒᆞ야問ᄒᆞ니左右ㅣ曰聲이后稷墓에셔出ᄒᆞᆫ다ᄒᆞ고드ᄃᆡ여后稷의遺言을陳ᄒᆞᆫᄃᆡ王이潸然流涕ᄒᆞ야曰夫子ㅣ生時에忠諫ᄒᆞ더니今에死ᄒᆞ야도不忘ᄒᆞ니其愛我ᄒᆞᆷ이甚ᄒᆞ다ᄒᆞ고自此로終身토록出獵지아니ᄒᆞ니라○新羅ㅣ改元ᄒᆞ야建福이라ᄒᆞ고調府令을置ᄒᆞ야貢賦ᄅᆞᆯ掌ᄒᆞ고乘府令을置ᄒᆞ야車乘을掌ᄒᆞ다○高句麗ㅣ長安城平壤南城에移都ᄒᆞ다○新羅ㅣ大水ᄒᆞ야民家三萬三百六十戶가漂沒ᄒᆞ거ᄂᆞᆯ使者ᄅᆞᆯ發ᄒᆞ야賑給ᄒᆞ다

【신라 진지왕 3년 ○ 고구려 평원왕 20년 ○ 백제 위덕왕 25년 ○ 양 선제 대건 11년 ○ 일황 민달 8년 ○ 서력 기원 579년】

가을 7월에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伯淨)이 즉위하니 그가 진평왕(眞平王)이다.

○ 신라가 이찬(伊飡) 김후직(金后稷)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았다. 신라 왕이 사냥을 좋아해서 김후직이 간곡히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김후직이 죽을 때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신하가 되어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두렵도다! 왕이 놀이를 좋아하는 잘못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니 이것이 나의 근심이다. 내가 비록 죽어서라도 왕이 깨치도록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 나를 왕이 사냥하러 가는 길가에 묻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이 이를 따랐다. 어느 날 왕이 사냥하러 가는 도중에 소리가 들렸는데 “왕은 가지 마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놀라서 물으니 좌우가 말하기를, “저 소리는 김후직의 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김후직의 유언을 아뢰었다. 이에 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자네가 생전에 충성으로 간언하더니 지금 죽어서도 잊지 않고 나를 아끼는 마음이 깊도다.” 하고는 이후부터는 죽을 때까지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 신라가 연호를 고쳐서 건복(建福)이라 하였다. 조부령(調府令)을 두어서 공부(貢賦)를 관장하도록 하고, 승부령(乘府令)을 두어서 마차를 관장하게 하였다(584).

○ 고구려(高句麗)가 장안성(長安城)【평양(平壤)의 남쪽에 있는 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신라가 홍수로 인해 민가 3만 3백 6십 호가 물에 잠겼으므로 사자를 보내서 진휼하였다(589).


경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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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十一年○高句麗平原王三十一年○百濟威德王三十六年○隋文帝開皇十年○日皇崇峻三年○西歷紀元後五百九十年冬十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子嬰陽王元이立ᄒᆞ야翌年에遣使ᄒᆞ야隋國에至ᄒᆞ다○新羅ㅣ明活城慶州月城東을改築ᄒᆞ고ᄯᅩ西元山城을築ᄒᆞ다

【신라 진평왕 11년 ○ 고구려 평원왕 31년 ○ 백제 위덕왕 36년 ○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0년 ○ 일황 숭준(崇峻) 3년 ○ 서력 기원 590년】

겨울 10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영양왕(嬰陽王) 원(元)이 즉위하여 다음해에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신라(新羅)가 명활성(明活城)【경주(慶州) 월성(月城) 동쪽】을 개축하고, 또한 서형산성(西兄山城)1)을 쌓았다(593).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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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十九年○高句麗嬰陽王八年○百濟威德王四十四年○隋文帝開皇十八年○日皇推古六年○西歷紀元後五百九十八年春에高句麗王이靺鞨兵을率ᄒᆞ고遼西ᄅᆞᆯ侵伐ᄒᆞᆫᄃᆡ隋主ㅣ怒ᄒᆞ야楡關에出兵ᄒᆞ엿다가乏食ᄒᆞ야還ᄒᆞ거ᄂᆞᆯ麗王이ᄯᅩᄒᆞᆫ遣使和親ᄒᆞ다○冬十二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第二子惠王季明이立ᄒᆞ다

【신라 진평왕 19년 ○ 고구려 영양왕 8년 ○ 백제 위덕왕 44년 ○ 수 문제 개황 18년 ○ 일황 추고(推古) 6년 ○ 서력 기원 598년】

봄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말갈(靺鞨) 병사를 이끌고 요서(遼西)를 공격하였는데, 수(隋)나라 왕이 노하여 유관(楡關)에 군사를 보냈으나 식량이 떨어져서 돌아갔다. 고구려 왕이 또한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 겨울 12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둘째 아들 혜왕(惠王) 계명(季明)이 즉위하였다.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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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二十年○高句麗嬰陽王九年○百濟惠王元年○隋文帝開皇十九年○日皇推古七年○西歷紀元後五百九十九年百濟王이崩ᄒᆞ고子法王宣이立ᄒᆞ야下令ᄒᆞ야殺生을禁ᄒᆞ고民家의鷹鷂ᄅᆞᆯ放케ᄒᆞ고ᄯᅩ漁獵의具ᄅᆞᆯ焚ᄒᆞ다

【신라 진평왕 20년 ○ 고구려 영양왕 9년 ○ 백제 혜왕 원년 ○ 수 문제 개황 19년 ○ 일황 추고 7년 ○ 서력 기원 599년】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법왕(法王) 선(宣)이 즉위하였는데, 명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의 사냥 매를 모두 풀어 주게 하고 또 물고기 잡는 도구들을 불태웠다.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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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二十一年○高句麗嬰陽王十年○百濟法王元年○隋文帝開皇二十年○日皇推古八年○西歷紀元後六百年

春에高句麗ㅣ太學博士李文眞을命ᄒᆞ야國史ᄅᆞᆯ修撰ᄒᆞ다先是에國史記事一百卷이有ᄒᆞ더니至是ᄒᆞ야新集五卷이更成ᄒᆞ니라○夏五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武王璋이立ᄒᆞ다

【신라 진평왕 21년 ○ 고구려 영양왕 10년 ○ 백제 법왕 원년 ○ 수 문제 개황 20년 ○ 일황 추고 8년 ○ 서력 기원 600년】

봄에 고구려(高句麗)가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수찬하였다. 이에 앞서 『국사기사(國史記事)』 100권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신집(新集)』 5권이 다시 완성되었다.

○ 여름 5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 장(璋)이 즉위하였다.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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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三十二年○高句麗嬰陽王二十一年○百濟武王十一年○隋煬帝大業七年○日皇推古十九年○西歷紀元後六百十一年冬十月에百濟ㅣ新羅椵嶺城을攻陷ᄒᆞ니縣令讚德이死ᄒᆞ다讚德이固守ᄒᆞᆫ지百餘日에糧盡水渴ᄒᆞ되오히러力戰不怠ᄒᆞ다가城이將陷ᄒᆞ거ᄂᆞᆯ讚德이仰天大呼曰吾王이一城으로ᄡᅧ我의게委任ᄒᆞ엿거ᄂᆞᆯ我ㅣ此ᄅᆞᆯ能保치못ᄒᆞ니我ㅣ雖死ᄒᆞᆯ지라도厲鬼가되야百濟人을殲ᄒᆞ리라ᄒᆞ고드ᄃᆡ여攘臂瞋目ᄒᆞ고槐樹에觸頭ᄒᆞ야死ᄒᆞ니新羅ㅣ其子奚論大로ᄡᅥ奈麻ᄅᆞᆯ拜ᄒᆞ다

【신라 진평왕 32년 ○ 고구려 영양왕 21년 ○ 백제 무왕 11년 ○ 수 양제(煬帝) 대업(大業) 7년 ○ 일황 추고 19년 ○ 서력 기원 611년】

겨울 10월에 백제(百濟)가 신라(新羅)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여 함락되자 현령(縣令) 찬덕(讚德)이 죽었다. 찬덕이 성을 지킨 지 100여 일 만에 식량과 물이 떨어졌지만 오히려 힘을 다해 싸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는데 찬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고함지르기를, “나의 왕이 하나의 성을 나에게 위임하였는데, 내가 이를 지키지 못하니, 내가 비록 죽을지라도 악귀가 되어 백제인을 섬멸할 것이다.”고 하고 드디어 팔을 걷어 올리고 눈을 부릅뜬 채 홰나무에 머리를 들이받고 죽었다. 이에 신라가 그의 아들 해론(奚論)을 대나마(大奈麻)【관등명】에 임명하였다.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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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三十三年○高句麗嬰陽王二十二年○百濟武王十二年○隋煬帝大業八年○日皇推古二十年○西歷紀元後六百十二年春正月에隋帝楊廣이親히大兵을擧ᄒᆞ야高勾麗ᄅᆞᆯ攻ᄒᆞ거ᄂᆞᆯ麗將乙支文德이迎擊大破ᄒᆞ다先是에裴矩ㅣ隋帝ᄅᆞᆯ勸ᄒᆞ야高句麗ᄅᆞᆯ脅降ᄒᆞ라ᄒᆞ니隋帝ㅣ其言을從ᄒᆞ야麗王에게諭ᄒᆞ거ᄂᆞᆯ麗王이不聽ᄒᆞ엿더니隋帝ㅣ이에天下兵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을發ᄒᆞ야號曰二百萬이라ᄒᆞ고九道로出ᄒᆞ야平壤에總集코자ᄒᆞᆯᄉᆡ宇文述來護兒等이先鋒이되고旌旗가九百六十里ᄅᆞᆯ亘ᄒᆞ며首尾ㅣ相繼ᄒᆞ고鼓角이相聞ᄒᆞ더라二月에隋帝가遼水에至ᄒᆞ거ᄂᆞᆯ麗王이文德으로ᄒᆞ여곰禦敵ᄒᆞ라ᄒᆞ니文德이述軍의飢色이有ᄒᆞᆷ을見ᄒᆞ고疲弊코자ᄒᆞ야거즛七戰七走ᄒᆞᆫᄃᆡ述等이驟勝ᄒᆞᆷ을恃ᄒᆞ고드ᄃᆡ여薩水安州淸川江ᄅᆞᆯ渡ᄒᆞ야平壤城과相距ᄒᆞᆫ三十里地에依山ᄒᆞ야軍營을設ᄒᆞ거ᄂᆞᆯ文德이遣使詐降ᄒᆞ고述의게請ᄒᆞ야曰公等이萬一返師ᄒᆞ면我ㅣ降服ᄒᆞ리라ᄒᆞᆫᄃᆡ述이自軍이疲弊ᄒᆞ야復戰키難ᄒᆞᆷ을知ᄒᆞ고ᄯᅩ平壤은城池가險固難拔ᄒᆞ다ᄒᆞ야이에許諾ᄒᆞ거ᄂᆞᆯ文德이곳出兵ᄒᆞ야四面鈔擊ᄒᆞᆯᄉᆡ且戰且行ᄒᆞ다가秋七月에薩水에至ᄒᆞ니隋軍이半渡ᄒᆞᄂᆞᆫ지라이에尾擊大破ᄒᆞ니隋將辛世雄이戰死ᄒᆞ고諸軍이다潰散ᄒᆞ야將士ㅣ奔還ᄒᆞᆯᄉᆡ一日一夜에鴨綠江에至ᄒᆞ니凡四百五十里라來護兒ㅣᄯᅩᄒᆞᆫ引還ᄒᆞ더라初에隋의九軍이遼東을度ᄒᆞᆫ者ㅣ凡三十萬五千이러니밋遼東에還至ᄒᆞ니오작二千七百人이오資儲器械가失亡殆盡이러라文德의爲人이沈鷙ᄒᆞ고智數가有ᄒᆞ며兼히屬文을善ᄒᆞ야隋軍과相持ᄒᆞᆯᄉᆡ隋將于仲文의게贈詩ᄒᆞ야曰神策은究天文이오妙算은窮地理라戰勝功旣高ᄒᆞ니知足願云止어다ᄒᆞ니東方의五言詩가自此倡始ᄒᆞ엿더라

【신라 진평왕 33년 ○ 고구려 영양왕 22년 ○ 백제 무왕 12년 ○ 수 양제 대업 8년 ○ 일황 추고 20년 ○ 서력 기원 612년】

봄 정월에 수(隋)나라 황제 양광(楊廣)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맞서 싸워서 크게 무찔렀다. 이에 앞서 배구(裴矩)가 수나라 황제에게 고구려를 협박하여 굴복시키라고 권하였다. 수나라 황제가 그 말을 따라서 고구려 왕을 회유하였으나 고구려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수나라 황제가 천하의 병사 113만 3천 8백 명을 선발하여 ‘2백만 명’이라고 호령하고는 아홉 갈래의 길로 나아가서 평양(平壤)에 총집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우문술(宇文述)과 내호아(來護兒) 등이 선봉이 되었는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진 깃발이 960리를 휘날리며,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렸다. 2월에 수나라 황제가 요수(遼水)에 도달하니, 고구려 왕이 을지문덕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을지문덕이 우문술의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는 지치도록 하기 위해 거짓으로 7번 싸워서 7번을 도주하였다. 우문술 등이 곧 승리할 것이라 믿고 드디어 살수(薩水)【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를 건너서 평양성과 거리 30리 지역의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설치하였다. 을지문덕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하고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공(公) 등이 만일 군사를 되돌리면 우리가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문술이 자신의 군사가 지쳐 있어 다시 싸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또 평양은 성과 못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곧바로 군사를 보내 사방에서 습격하였는데, 싸우기도 하고 또는 쫓기도 하여 가을 7월 살수에 도달하니 수나라 군사들이 절반 정도 건너고 있었다. 이에 후미를 습격하여 크게 무찌르니, 수나라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많은 군사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장수와 병사들이 하루 낮 하루 밤을 도망쳐 돌아가서 압록강(鴨綠江)에 도달하니 450리였다. 내호아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처음에 수나라 9개 군대 중 요동(遼東)을 건넌 자가 대략 30만 5천 명이었으나, 요동에 돌아온 자가 겨우 2천 7백 명이고, 군량과 무기의 태반을 잃었다. 을지문덕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온화하며 지혜가 있었다. 또한 글을 잘 지어서 수나라 군사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시를 써서 보냈는데,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흐름을 알고,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알았으니, 싸움에서 승리한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그만하면 만족할 만하니 이제 그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동방의 오언시(五言詩)가 이로부터 시작하여 유행하였다.


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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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三十四年○高句麗嬰陽王二十三年○百濟武王十三年○隋煬帝大業九年○日皇推古二十一年○西歷紀元後六百十三年夏四月에隋帝ㅣᄯᅩ大軍을親率ᄒᆞ고高句麗遼東城을攻ᄒᆞᆯᄉᆡ圍城ᄒᆞᆫ지二十餘日에不拔ᄒᆞ더니맛ᄎᆞᆷ楊玄感의反書가至ᄒᆞ거ᄂᆞᆯ隋帝ㅣ大懼ᄒᆞ야回軍ᄒᆞ고其後에다시來攻코자ᄒᆞ야涿郡에親至ᄒᆞ야戎服을御ᄒᆞ고懷遠鎭ᄭᆞ지至ᄒᆞ거ᄂᆞᆯ高句麗ㅣ비로소其不敵ᄒᆞᆷ을知ᄒᆞ고遣使請和ᄒᆞ고斛斯政을送ᄒᆞᆫᄃᆡ隋帝ㅣ大悅ᄒᆞ야班師ᄒᆞ니斛斯政은楊玄感과相善ᄒᆞ다가來奔ᄒᆞᆫ人이러라

【신라 진평왕 34년 ○ 고구려 영양왕 23년 ○ 백제 무왕 13년 ○ 수 양제 대업 9년 ○ 일황 추고 21년 ○ 서력 기원 613년】

여름 4월에 수(隋)나라 황제가 대군을 직접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할 때, 성을 포위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함락하지 못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서신이 도착하니, 수나라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그 이후 다시 공격하기 위해서 탁군(涿郡)에 직접 도달하여 갑옷을 입고 나아가 회원진(懷遠鎭)에까지 이르렀다. 고구려가 감히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수나라 황제에게 화친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보냈다. 수나라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곡사정은 양현감과 서로 잘 지내다가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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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三十九年○高句麗嬰陽王二十八年○百濟武王十八年○唐高祖武德元年是歲唐高祖滅隋卽帝位○日皇推古二十六年○西歷紀元後六百十八年秋九月에高句麗王이崩ᄒᆞ고異母弟榮留王建武ㅣ立ᄒᆞ다○唐이高句麗에遣使ᄒᆞ야麗人이隋軍의게被擄ᄒᆞᆫ者ᄅᆞᆯ送還ᄒᆞ거ᄂᆞᆯ高句麗ㅣᄯᅩᄒᆞᆫ隋人의未還ᄒᆞᆫ者數萬人을刷還ᄒᆞ다

【신라 진평왕 39년 ○ 고구려 영양왕 28년 ○ 백제 무왕 18년 ○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원년 이 해에 당 고조가 수(隋)나라를 멸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일황 추고 26년 ○ 서력 기원 618년】

가을 9월에 고구려(高句麗)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배다른 동생 영류왕(榮留王) 건무(建武)가 즉위하였다.

○ 당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서 수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혀 있던 고구려인을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또한 돌아가지 못한 수나라 사람 수만 명을 돌려보냈다.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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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四十六年○高句麗榮留王七年○百濟武王二十五年○唐高祖武德八年○日皇推古三十三年○西歷紀元後六百二十五年百濟ㅣ唐에遣使ᄒᆞ다○高句麗ㅣ唐에遣使ᄒᆞ야佛老法을學ᄒᆞ다○新羅ㅣ唐에遣使ᄒᆞ다

【신라 진평왕 46년 ○ 고구려 영류왕 7년 ○ 백제 무왕 25년 ○ 당 고조 무덕 8년 ○ 일황 추고 33년 ○ 서력 기원 625년】

백제(百濟)가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 고구려(高句麗)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웠다.

○ 신라(新羅)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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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五十年○高句麗榮留王十一年○百濟武王二十九年○唐太宗貞觀三年○日皇舒明元年○西歷紀元後六百二十九年秋八月에新羅金庾信이高句麗娘臂城今淸을攻拔ᄒᆞ다庾信은首露王後裔오舒玄의子라羅王이舒玄을遣ᄒᆞ야娘臂城을攻ᄒᆞᆯᄉᆡ麗人이逆戰ᄒᆞ야羅軍이失利ᄒᆞᄂᆞᆫ지라時에庾信이中幢主가되야其父의게告曰庾信이平生에忠孝ᄅᆞᆯ自期ᄒᆞ엿스니今에臨陣ᄒᆞ야不可不勇戰ᄒᆞ겟다ᄒᆞ고이에跨馬突陣ᄒᆞ야麗將을斬ᄒᆞ고其首ᄅᆞᆯ提來ᄒᆞ니諸軍이곳乘勝奮擊ᄒᆞ야드ᄃᆡ여其城을拔ᄒᆞ다初에舒玄이新羅宗室의女萬明을潛通ᄒᆞ야有娠ᄒᆞᆫ지二十朔에庾信을生ᄒᆞ니背上에七星文이有ᄒᆞ고밋長成ᄒᆞᄆᆡ麗濟와靺鞨이新羅ᄅᆞᆯ侵軼ᄒᆞᆷ을見ᄒᆞ고慨然히削平ᄒᆞᆯ志가有ᄒᆞ야獨히中嶽慶州斷石山石窟에入ᄒᆞ야劍을鍊ᄒᆞ고作誓告天ᄒᆞ엿더니忽然이老人이來ᄒᆞ야秘決을傳ᄒᆞᄆᆡ自後로智略이益廣ᄒᆞ더라

【신라 진평왕 50년 ○ 고구려 영류왕 11년 ○ 백제 무왕 29년 ○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3년 ○ 일황 서명(舒明) 원년 ○ 서력 기원 629년】

가을 8월에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高句麗) 낭비성(娘臂城)【지금의 청주(淸州)】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김유신은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고,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다. 신라 왕이 김서현을 보내 낭비성을 공격할 적에 고구려가 역습하여 신라 군사들이 손실을 입었다. 그때에 김유신이 중당주(中幢主)【관직명】가 되어 그 아비에게 말하기를, “저 김유신이 평생에 충효를 스스로에게 약속하였으니 지금 전투에 나아가 용맹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이에 말에 올라타 돌진하여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가지고 왔다. 모든 병사가 곧 승리의 기세를 타고 분격하여 드디어 그 성을 빼앗았다. 처음에 김서현이 신라 종실의 딸 만명(萬明)과 몰래 정을 통하여 임신한 지 20개월에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의 등에 칠성(七星) 문양이 있고, 자라면서 고구려, 백제(百濟), 말갈(靺鞨)이 신라를 번갈아 침략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평소 그들을 평정할 뜻이 있었다. 홀로 중악(中嶽)【경주(慶州) 단석산(斷石山)】 석굴에 들어가서 검술을 연마하고 맹세하는 글을 지어서 하늘에 고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노인이 와서 비결(秘訣)을 전하였는데, 이후부터 지략이 더욱 넓어졌다.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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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平王五十三年○高句麗榮留王十四年○百濟武王三十二年○唐太宗貞觀六年○日皇舒明四年○西歷紀元後六百三十二年新羅王이崩ᄒᆞ고無嗣ᄒᆞ거ᄂᆞᆯ國人이王의女德曼을立ᄒᆞ니此ᄂᆞᆫ善德女主라初에唐帝ㅣ牧丹花圖와밋其花種을贈ᄒᆞ거ᄂᆞᆯ眞平王이德曼을示ᄒᆞ니德曼이曰此花가반다시香氣가無ᄒᆞ리이다ᄒᆞ거ᄂᆞᆯ王이笑曰爾가何以知之오ᄒᆞᆫᄃᆡ對曰花가絶艶ᄒᆞ나其畫에蜂蝶이無ᄒᆞ니此ᄂᆞᆫ無香ᄒᆞᆫ花라ᄒᆞ더니種之ᄒᆞ니果然이오東國의牡丹이自此始盛ᄒᆞ더라

【신라 진평왕 53년 ○ 고구려 영류왕 14년 ○ 백제 무왕 32년 ○ 당 태종 정관 6년 ○ 일황 서명 4년 ○ 서력 기원 632년】

신라(新羅) 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백성이 왕의 딸 덕만(德曼)을 세우니, 그가 선덕 여왕(善德女王)이다. 처음에 당(唐)나라 황제가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 와서 진평왕(眞平王)이 덕만에게 보여 주었더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꽃이 매우 예쁘지만 그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더니 과연 그러하였고, 우리나라[東國]의 모란꽃이 이때부터 많아지기 시작했다.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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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二年○高句麗榮留王十六年○百濟武王三十四年○唐太宗貞觀八年○日皇舒明六年○西歷紀元後六百三十四年春正月에新羅ㅣ改元ᄒᆞ야仁平이라ᄒᆞ다○三月에百濟王이池ᄅᆞᆯ宮南에鑿ᄒᆞ고二十餘里ᄅᆞᆯ引水ᄒᆞ야池中에注ᄒᆞ고島嶼ᄅᆞᆯ築ᄒᆞ야海上仙山이라ᄒᆞ고ᄯᅩ臨水ᄒᆞ야王興寺ᄅᆞᆯ創建ᄒᆞᆯᄉᆡ窮極히壯麗ᄒᆞ고ᄆᆡ양親詣行香ᄒᆞ더라○新羅宮西玉門池에蝦蟆ㅣ大集ᄒᆞ거ᄂᆞᆯ羅主ㅣ曰蝦蟆ㅣ怒目ᄒᆞ니此ᄂᆞᆫ兵象이라意者컨ᄃᆡ西方玉門谷에隣兵이至ᄒᆞ엿다ᄒᆞ고이에將軍閼川을遣ᄒᆞ야搜探ᄒᆞ라ᄒᆞ엿더니果然百濟의甲士五百이解鞍休息ᄒᆞ거ᄂᆞᆯ곳掩擊盡殺ᄒᆞ니羅主ㅣ喜ᄒᆞ야閼川을賞賜ᄒᆞ다

【신라 선덕 여왕 2년 ○ 고구려 영류왕 16년 ○ 백제 무왕 34년 ○ 당 태종 정관 8년 ○ 일황 서명 6년 ○ 서력 기원 634년】

봄 정월에 신라(新羅)가 연호를 고쳐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 3월에 백제(百濟) 왕이 연못을 궁궐 남쪽에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다가 연못에 채웠으며, 크고 작은 섬을 만들어서 바다 위의 선산(仙山)이라고 하였다. 또 연못 근처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니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매일 왕이 직접 가서 향을 피워 올렸다.

○ 신라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두꺼비가 많이 모여드니 신라 왕이 말하기를, “두꺼비가 성난 눈을 하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생각건대 서쪽 옥문곡(玉門谷)에 이웃 나라 병사가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을 보내서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과연 백제의 병사 5백 명이 말안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곧바로 몰래 공격하여 모두 죽이니 신라 왕이 기뻐하여 알천에게 상을 내렸다(636).


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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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八年○高句麗榮留王二十二年○百濟武王四十年○唐太宗貞觀十四年○日皇舒明十二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年夏五月에新羅高句麗百濟ㅣ다唐國에遣子ᄒᆞ야入學ᄒᆞ다

【신라 선덕 여왕 8년 ○ 고구려 영류왕 22년 ○ 백제 무왕 40년 ○ 당 태종 정관 14년 ○ 일황 서명 12년 ○ 서력 기원 640년】

여름 5월에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모두 당(唐)나라에 자식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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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九年○高句麗榮留王二十三年○百濟武王四十一年○唐太宗貞觀十五年○日皇舒明十三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一年春三月에百濟王이崩ᄒᆞ고子義慈王義慈ㅣ立ᄒᆞ다

【신라 선덕 여왕 9년 ○ 고구려 영류왕 23년 ○ 백제 무왕 41년 ○ 당 태종 정관 15년 ○ 일황 서명 13년 ○ 서력 기원 641년】

봄 3월에 백제(百濟) 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 의자왕(義慈王) 의자가 즉위하였다.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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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十年○高句麗榮留王二十四年○百濟義慈王元年○唐太宗貞觀十六年○日皇皇極元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二年先是에高句麗太子桓權이唐에至ᄒᆞ니唐帝ㅣ郎中陳大德等을遣ᄒᆞ야報聘ᄒᆞᆯᄉᆡ大德이山水ᄅᆞᆯ遊覽ᄒᆞ다稱ᄒᆞ고山川道里의險易ᄅᆞᆯ다探悉ᄒᆞ고밋還國ᄒᆞᄆᆡ高句麗의虛實을備陳ᄒᆞ니唐帝ㅣ이에東伐ᄒᆞᆯ志가有ᄒᆞ더라○冬十月에高句麗泉蓋蘇文이其君達武ᄅᆞᆯ弑ᄒᆞ고王의侄臧을立ᄒᆞ니此ᄂᆞᆫ寶藏王이러라蘇文의狀貌ㅣ雄偉ᄒᆞ고意氣가鷙悍ᄒᆞ며其父ᄅᆞᆯ嗣ᄒᆞ야東部大人이되니諸大人이其凶殘ᄒᆞᆷ을憎惡ᄒᆞ야王으로더브러謀誅코자ᄒᆞ다가事泄ᄒᆞ거ᄂᆞᆯ蘇文이部兵을埋伏ᄒᆞ고諸大人百餘ᄅᆞᆯ召宴ᄒᆞ야盡殺ᄒᆞ고드ᄃᆡ여入宮ᄒᆞ야王을弑ᄒᆞ고自己ᄂᆞᆫ莫離支官名이니卽兵部尙書라가되야國事ᄅᆞᆯ專擅ᄒᆞ고恒常五刀ᄅᆞᆯ佩ᄒᆞ며出入時에ᄂᆞᆫ반다시貴人武將으로ᄒᆞ여곰伏地케ᄒᆞ고足으로ᄡᅥ踏ᄒᆞ야馬ᄅᆞᆯ乘ᄒᆞ고下馬時에도亦然ᄒᆞ더라○十一月에新羅ㅣ伊飡金春秋ᄅᆞᆯ遣ᄒᆞ야高句麗에乞師ᄒᆞ다先是에百濟ㅣ新羅西方獼猴等四十城을取ᄒᆞ고ᄯᅩ百濟將軍允忠이新羅大耶城今陜을攻陷ᄒᆞ야新羅都督金品釋이戰死ᄒᆞ엿더니至是ᄒᆞ야春秋ㅣ百濟ᄅᆞᆯ滅ᄒᆞᆯ志가有ᄒᆞ야將行ᄒᆞᆯᄉᆡ金庾信으로더부러歸期ᄅᆞᆯ六旬爲限ᄒᆞ고드ᄃᆡ여麗王을往說ᄒᆞ야曰今에百濟ㅣ無道ᄒᆞ야我의疆場을侵軼ᄒᆞ니願컨ᄃᆡ大王의威ᄅᆞᆯ仗ᄒᆞ야雪恥코자ᄒᆞ노이다ᄒᆞᆫᄃᆡ麗王曰麻峴과竹嶺今丹陽郡南地은元來我國의土地라만일還送ᄒᆞ면곳出兵相助ᄒᆞ리라ᄒᆞ거ᄂᆞᆯ春秋ㅣ對曰臣이君命을奉ᄒᆞ고乞師ᄒᆞᆷ이어ᄂᆞᆯ今에大王이䘏難救隣을不思ᄒᆞ고도로혀土地ᄅᆞᆯ歸ᄒᆞ라ᄒᆞ시니臣이死ᄒᆞᆯ지언뎡奉命치못ᄒᆞ리라ᄒᆞᆫᄃᆡ麗王이怒ᄒᆞ야囚執ᄒᆞ거ᄂᆞᆯ春秋ㅣ靑布로ᄡᅧ麗王의寵臣을賂遺ᄒᆞ고ᄯᅩ麗王의게移書曰麻峴과竹嶺은本是貴國의地라今에臣이返國ᄒᆞ야此地ᄅᆞᆯ不還ᄒᆞ면곳天日이在上ᄒᆞ니願컨ᄃᆡ王은勿疑ᄒᆞ소셔ᄒᆞ더라此時에金庾信이春秋의不返ᄒᆞᆷ을見ᄒᆞ고王ᄭᅴ請ᄒᆞ야兵士三千을召募ᄒᆞ야高句麗ᄅᆞᆯ將伐ᄒᆞᆯᄉᆡ漢江을渡ᄒᆞ니麗王이新羅ㅣ起兵ᄒᆞᆷ을聞ᄒᆞ고이에春秋ᄅᆞᆯ厚禮遣歸ᄒᆞ거ᄂᆞᆯ春秋ㅣ境外에出ᄒᆞ야送者다려謂ᄒᆞ야曰國家疆土ᄂᆞᆫ使臣의敢專ᄒᆞᆯᄇᆡ아니라ᄒᆞ고歸ᄒᆞ니라

【신라 선덕 여왕 10년 ○ 고구려 영류왕 24년 ○ 백제 의자왕 원년 ○ 당 태종 정관 16년 ○ 일황 황극(皇極) 원년 ○ 서력 기원 642년】

이에 앞서 고구려(高句麗) 태자 환권(桓權)이 당(唐)나라에 이르니, 당나라 황제가 낭중(郎中) 진대덕(陳大德) 등을 보내서 답방[報聘]하게 하였다. 이때 진대덕이 산수를 유람하겠다고 말하고는 산과 강, 도로와 마을의 험난함과 평탄함을 모두 탐색하여 살펴보고 돌아가서 고구려의 허실(虛實)을 모두 갖추어 진언하였다. 이에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뜻을 갖게 되었다.

○ 겨울 10월에 고구려 천개소문(泉蓋蘇文)이 그의 왕 건무(建武)를 시해하고 왕의 조카 장(臧)을 옹립하니, 그가 보장왕(寶藏王)이다. 천개소문은 용모가 웅장하고 장대하였으며, 기상은 억세고 사나웠다. 그 아비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東部大人)이 되니 여러 대인이 그의 흉악함을 증오하여 왕과 함께 일을 꾸며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천개소문이 부병(部兵)을 매복시키고 여러 대인 1백여 명을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모두 죽였다. 곧바로 궁으로 들어가서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관직명이니, 즉 병부 상서(兵部尙書)이다.】가 되어서 국사(國事)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 몸에는 항상 5개의 칼을 차고 다녔으며, 출입할 적에는 반드시 귀인(貴人)이나 무장(武將)을 땅에 엎드리도록 하고 발로 그 위를 밟고 말 위에 올라탔고, 말에서 내릴 때에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 11월에 신라(新羅)가 이찬(伊飡) 김춘추(金春秋)를 보내서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百濟)가 신라 서쪽 지역 미후(獼猴) 등 40여 개 성을 함락하고 또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陜川)】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는데 신라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킬 뜻이 있었다. 그가 장차 떠날 때에 김유신과 함께 돌아올 기한을 60일로 정하고, 드디어 고구려 왕에게 가서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우리의 영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니, 원컨대 대왕의 위엄에 의지하여 복수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이 말하기를, “마현(麻峴)과 죽령(竹嶺)【지금의 단양군(丹陽郡) 남쪽 지역】은 원래 우리의 영토이다. 만일 돌려준다면 곧 병사를 보내 서로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요청하러 온 것인데, 지금 대왕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구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영토를 돌려달라 하시니 신이 죽을지언정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고구려 왕이 노하여 잡아 가두었다. 김춘추가 청포(靑布)를 고구려 왕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뇌물로 주고, 또한 고구려 왕에게 서신을 보내서 말하기를, “마현과 죽령은 본시 귀국의 영토입니다. 지금 신이 돌아가서 이 지역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곧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원컨대 왕은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김유신이 김춘추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왕께 청하여 병사 3천을 소집하여 고구려를 장차 공격하려고 한강(漢江)을 건너니, 고구려 왕이 신라가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김춘추를 후한 예로 돌려보냈다. 김춘추가 경계 밖으로 나와서 환송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한 나라의 영토는 사신(使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돌아갔다.


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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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十一年○高句麗寶藏王元年○百濟義慈王二年○唐太宗貞觀十七年○日皇皇極二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三年高句麗ㅣ唐에遣使ᄒᆞ야道敎ᄅᆞᆯ求ᄒᆞᆫᄃᆡ唐帝가道士叔達等八人을遣ᄒᆞ고兼ᄒᆞ야老子道德經을送ᄒᆞ더라○冬十一月에百濟ㅣ高句麗와合兵ᄒᆞ야新羅黨項城을攻破ᄒᆞ야唐國에入ᄒᆞᄂᆞᆫ路ᄅᆞᆯ塞ᄒᆞ거ᄂᆞᆯ新羅ㅣ唐에求救ᄒᆞ니二國이聞知ᄒᆞ고乃還ᄒᆞ니라

【신라 선덕 여왕 11년 ○ 고구려 보장왕 원년 ○ 백제 의자왕 2년 ○ 당 태종 정관 17년 ○ 일황 황극 2년 ○ 서력 기원 643년】

고구려(高句麗)가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황제가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 주고, 이와 함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냈다.

○ 겨울 11월에 백제(百濟)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는 길목이 막혔으므로 신라가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니, 두 나라가 그 소식을 듣고는 바로 돌아갔다.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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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十二年○高句麗寶藏王二年○百濟義慈王三年○唐太宗貞觀十八年○日皇皇極三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四年冬十一月에唐太宗李世民이大軍을親率ᄒᆞ야高句麗ᄅᆞᆯ攻ᄒᆞᆯᄉᆡ先是에唐帝ㅣ蔣儼을遣ᄒᆞ야麗王의게送書ᄒᆞ야新羅의來路ᄅᆞᆯ毋遏ᄒᆞ고ᄯᅩ百濟로더브러各其戢兵ᄒᆞ라不然이면곳發兵攻擊ᄒᆞ리라ᄒᆞ거ᄂᆞᆯ泉蓋蘇文이曰往者에隋兵이伐我ᄒᆞᆯᄉᆡ新羅ㅣ乘隙ᄒᆞ야我地五百里ᄅᆞᆯ奪ᄒᆞ엿스니今에其地ᄅᆞᆯ不返ᄒᆞ면兵事ᄅᆞᆯ未弭ᄒᆞ리라ᄒᆞ고곳蔣儼을窟室中에囚ᄒᆞ엿더니唐帝ㅣ怒ᄒᆞ야軍士十萬三千을發ᄒᆞ야水陸竝進ᄒᆞᆯᄉᆡ張亮으로ᄡᅥ平壤道行軍大摠管을拜ᄒᆞ고李世勣으로遼東道行軍大摠管을拜ᄒᆞ야諸軍을分領ᄒᆞ고因ᄒᆞ야新羅百濟奚契丹으로ᄒᆞ여곰分道來擊ᄒᆞ더라

【신라 선덕 여왕 12년 ○ 고구려 보장왕 2년 ○ 백제 의자왕 3년 ○ 당 태종 정관 18년 ○ 일황 황극 3년 ○ 서력 기원 644년】

겨울 11월에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당나라 황제가 장엄(蔣儼)을 보내서 고구려 왕에게 서신을 전달하여 ‘신라(新羅)가 당나라로 오는 길을 막지 말고 또한 백제와 함께 병사를 거두어들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병사를 보내서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천개소문(泉蓋蘇文)이 말하기를, “지난번 수(隋)나라 병사가 우리를 공격할 때에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 영토 5백 리를 빼앗았으니, 지금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장엄을 토굴에 가두었다. 당나라 황제가 노하여 군사 10만 3천 명을 선발하여,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 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에 임명하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나누어 지휘하도록 하고, 또한 신라, 백제(百濟), 해(奚), 거란[契丹]으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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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十三年○高句麗寶藏王三年○百濟義慈王四年○唐太宗貞觀十九年○日皇孝德元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五年春正月에百濟ㅣ新羅ᄅᆞᆯ侵ᄒᆞ다가敗還ᄒᆞ다時에金庾信이百濟의七城을取ᄒᆞ고還都ᄒᆞᆯᄉᆡ濟軍이買利浦城을來攻ᄒᆞ거ᄂᆞᆯ羅主ㅣᄯᅩ庾信으로ᄒᆞ야곰拒敵ᄒᆞ라ᄒᆞ니庾信이聞命ᄒᆞ고妻子ᄅᆞᆯ不見ᄒᆞ고다시濟軍을逆擊ᄒᆞ야二千餘級을斬ᄒᆞ고回軍ᄒᆞᆯᄉᆡ濟軍이ᄯᅩ大擧ᄒᆞᄂᆞᆫ지라羅主ㅣ庾信다려謂曰國의存亡이公一身에繫ᄒᆞ니不可不公을請ᄒᆞ야再往케ᄒᆞ노라ᄒᆞ거ᄂᆞᆯ庾信이ᄯᅩ歸家치못ᄒᆞ고遂行ᄒᆞ니衆이曰大將軍도오히려如此ᄒᆞ거든況我輩乎아ᄒᆞ고踴躍爭先ᄒᆞ야敵陣을向ᄒᆞ니濟軍이望風退去ᄒᆞ더라○夏五月에唐帝ㅣ高句麗安市城在遼을攻ᄒᆞ다가無功而還ᄒᆞ다初에唐帝ㅣ定州遼東에至ᄒᆞ야侍臣다려謂曰遼東은元來中國의地오隋氏ㅣ四次出師ᄒᆞ되다大敗ᄒᆞ엿스니朕이今에中國子弟ᄅᆞᆯ爲ᄒᆞ야其讎ᄅᆞᆯ報雪ᄒᆞ리라ᄒᆞ고親히弓矢ᄅᆞᆯ佩ᄒᆞ고雨衣ᄅᆞᆯ鞍後에結ᄒᆞ고遼水의歸橋ᄅᆞᆯ斷ᄒᆞ야必死ᄒᆞᆯ心을示ᄒᆞ고遼東城을圍ᄒᆞᆯᄉᆡ其下에至ᄒᆞ야親히土ᄅᆞᆯ負ᄒᆞ야塹을塡ᄒᆞ고圍城ᄒᆞᆫ지十三日에鼓噪ᄒᆞᄂᆞᆫ聲이天地ᄅᆞᆯ振動ᄒᆞ니此戰에麗兵이死者ㅣ萬餘人이러라ᄯᅩ白巖城을下ᄒᆞ고安市城을進攻ᄒᆞ니麗將高延壽ㅣ靺鞨兵十五萬을合ᄒᆞ야來救ᄒᆞᆯᄉᆡ陣勢가四十里ᄅᆞᆯ連亘ᄒᆞ거ᄂᆞᆯ唐帝ㅣ望見ᄒᆞ고大懼ᄒᆞ야敢히迎戰치못ᄒᆞ고이에詭計로延壽ᄅᆞᆯ紿ᄒᆞ야曰吾의來ᄒᆞᆷ은泉蓋蘇文의弑君ᄒᆞᆫ罪ᄅᆞᆯ討ᄒᆞᆷ이오他意가無ᄒᆞ다ᄒᆞᆫᄃᆡ延壽ㅣ其言을信ᄒᆞ고設備치아니ᄒᆞ거ᄂᆞᆯ唐帝ㅣ世勣을命ᄒᆞ야西嶺에埋伏ᄒᆞ고다시小軍을出ᄒᆞ야延壽ᄅᆞᆯ誘引ᄒᆞ니延壽ㅣ果然來追ᄒᆞ거ᄂᆞᆯ唐將薛仁貴ㅣ大呼陷陣ᄒᆞ야所向無敵이라이에麗軍이大敗ᄒᆞ야死者ㅣ二萬餘人이오延壽等이降ᄒᆞ거ᄂᆞᆯ唐帝ㅣᄯᅩ進軍ᄒᆞ야安市城을攻圍ᄒᆞ니城主梁萬春이死守不下ᄒᆞ고時에唐帝ㅣ臨陣ᄒᆞ엿다가流矢에目이傷ᄒᆞ고ᄯᅩ遼東이早寒ᄒᆞ며糧食이且盡ᄒᆞᆫ지라이에班師ᄒᆞᆯᄉᆡ麗軍과唐兵의死者ㅣ甚衆ᄒᆞ거ᄂᆞᆯ唐帝ㅣ成功치못ᄒᆞᆷ을深悔ᄒᆞ야歎曰魏徵이若在ᄒᆞ면吾ㅣ엇지此行이有ᄒᆞ리오ᄒᆞ고其國에還ᄒᆞ야李靖다려謂曰吾ㅣ天下의衆으로ᄡᅧ高句麗數城의게困ᄒᆞ엿다ᄒᆞ더라延壽ㅣ唐의게降ᄒᆞᆫ後로브터憤歎을不勝ᄒᆞ야맛ᄎᆞᆷᄂᆡ憂死ᄒᆞ니라薛仁貴ᄂᆞᆫ本遼東人이라驍勇으로世上에聞ᄒᆞ더니밋麗人이門地로ᄡᅧ用人ᄒᆞᄆᆡ仁貴ㅣ見用치못ᄒᆞᆷ을忿恨ᄒᆞ야唐國에入ᄒᆞ야太宗의信任ᄒᆞᆫᄇᆡ되엿다가至是ᄒᆞ야麗軍을破ᄒᆞ니라時에新羅人薛罽頭ㅣᄯᅩᄒᆞᆫ唐兵을隨ᄒᆞ야高句麗ᄅᆞᆯ伐ᄒᆞ다先是에罽頭ㅣ常曰我國의用人ᄒᆞᆷ이骨品을論ᄒᆞ야其族이아니면비록鴻才傑功이有ᄒᆞ야도能히振發치못ᄒᆞᄂᆞ니我ㅣ中原에遊ᄒᆞ야不世의雄略을奮ᄒᆞ고非常ᄒᆞᆫ功業을立ᄒᆞ리라ᄒᆞ더니至是ᄒᆞ야唐帝의게自薦ᄒᆞ야臨陣先鬪ᄒᆞ다가死ᄒᆞ거ᄂᆞᆯ唐帝ㅣ泫然流涕ᄒᆞ고御衣ᄅᆞᆯ脫ᄒᆞ야其身을覆ᄒᆞ고大將軍을追贈ᄒᆞ니라○新羅主ㅣ改元ᄒᆞ야太和라ᄒᆞ다

【신라 선덕 여왕 13년 ○ 고구려 보장왕 3년 ○ 백제 의자왕 4년 ○ 당 태종 정관 19년 ○ 일황 효덕(孝德) 원년 ○ 서력 기원 645년】

봄 정월에 백제(百濟)가 신라(新羅)를 침략하였는데 패하고 돌아갔다. 이때에 김유신(金庾信)이 백제의 7개 성(城)을 함락하고 돌아갈 때에 백제군이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신라 왕이 또다시 김유신에게 맞서 싸우도록 하니 김유신이 명을 듣고 처자식을 보지도 않고 다시 백제군을 역습하여 2천여 급(及)의 목을 베고 회군하였다. 그때 또다시 백제군이 크게 공격하여 왔으므로 신라 왕이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공 한 몸에 달려 있으니, 공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청컨대 다시 가도록 하라.”고 하니, 김유신이 또다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명을 따랐다. 이에 병사들이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들이야.”라며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향하니 백제군이 멀리서 보고 퇴각하였다.

○ 여름 5월에 당(唐)나라 황제가 고구려(高句麗) 안시성(安市城)【요동(遼東)에 있다.】을 공격하였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갔다. 처음에 당나라 황제가 정주(定州)【요동 지역】에 도달하여 곁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원래 중국의 땅이고, 수(隋)나라가 4차례 군사를 보냈지만 모두 크게 패하였으니, 짐이 지금 중국의 자제(子弟)들을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직접 활과 화살을 어깨에 차고 비옷을 안장 뒤편에 묶은 뒤 요수(遼水)의 돌아갈 다리를 끊어 죽음을 각오하는 마음을 보였다. 요동성을 포위하고, 성 아래에 도달해서는 직접 흙을 짊어지고 참호를 메우기도 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13일에 북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이 전투에서 고구려 병사 가운데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또 백암성(白巖城)을 함락하고 안시성으로 나아가 공격하니 고구려 장수 고연수(高延壽)가 말갈병(靺鞨兵) 15만 명과 연합하여 와서 지원하였다. 이때 그 군진의 형세가 40여 리에 이어져 있었는데, 당나라 황제가 이를 바라보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였다. 이에 기만하는 계책으로 고연수를 속여서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왕을 시해한 죄를 묻고자 한 것이지 다른 뜻이 없다.”라고 하니, 고연수가 그 말을 믿고 방비를 세우지 않았다. 당나라 황제가 이세적(李世勣)에게 명령하여 서쪽 언덕에 매복하고 다시 소수의 군사를 보내서 고연수를 유인하니 고연수가 과연 추격하여 왔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고 돌진하니 대적할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2만여 명이고, 고연수 등이 항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또 진군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니 성주(城主) 양만춘(梁萬春)이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당나라 황제가 전투에 나아갔다가 날아온 화살을 눈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또 요동이 일찍 추워지며 식량이 다 소진되었으므로 이에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다. 고구려 병사와 당나라 병사 가운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당나라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매우 후회하며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와 같은 행동을 했겠는가?”라고 하였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이정(李靖)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의 무리들을 데리고 고구려 여러 성에서 곤욕을 당했다.”라고 하였다. 고연수는 당나라에 항복한 이후부터 분함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심하다가 죽었다. 설인귀는 본래 요동 사람이다. 날래고 용맹함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고구려 사람이 문벌로써 사람을 등용하였으므로 설인귀가 등용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여 당나라에 들어가서 태종(太宗)의 신임을 받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때에 신라 사람 설계두(薛罽頭)가 또 당나라 병사를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설계두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功)이 있어도 선발되지 못하니, 내가 중원으로 가서 세상에 없는 뛰어난 지략을 펼치고 비상한 공적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당나라 황제에게 직접 자신을 천거하여 전투에 나아가 앞장서 싸우다가 죽으니, 당나라 황제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자신의 옷을 벗어 그 시신을 덮어 주고 대장군(大將軍)으로 추증하였다.

○ 신라 왕이 연호를 고쳐서 태화(太和)라고 하였다.


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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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善德主十五年○高句麗寶藏王五年○百濟義慈王六年○唐太宗貞觀二十一年○日皇孝德三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七年新羅女主ㅣ崩ᄒᆞ다主ㅣ平日에死期ᄅᆞᆯ豫言ᄒᆞ더니其日에至ᄒᆞ야崩ᄒᆞ고眞平王母弟國飯의女勝曼이立ᄒᆞ니此ᄂᆞᆫ眞德女主ㅣ러라

【신라 선덕 여왕 15년 ○ 고구려 보장왕 5년 ○ 백제 의자왕 6년 ○ 당 태종 정관 21년 ○ 일황 효덕 3년 ○ 서력 기원 647년】

신라(新羅) 여왕이 돌아가셨다. 왕이 평일에 죽을 날짜를 예언하였는데, 그 날짜에 이르러서 돌아가시고 진평왕(眞平王)의 아우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진덕 여왕(眞德女王)이다.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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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德主元年○高句麗寶藏王六年○百濟義慈王七年○唐太宗貞觀二十二年○日皇孝德四年○西歷紀元後六百四十八年春正月에唐帝ㅣ大將軍薛萬徹을命ᄒᆞ야軍士三萬餘人과樓船과戰艦을率ᄒᆞ고萊州로브터泛海ᄒᆞ야高句麗ᄅᆞᆯ攻ᄒᆞ더라○冬에新羅ㅣ金庾信으로ᄒᆞ여곰百濟ᄅᆞᆯ攻ᄒᆞ야大耶城【今陜川】을進攻ᄒᆞ니百濟ㅣ逆戰ᄒᆞ거ᄂᆞᆯ庾信이佯敗ᄒᆞ야玉門關에設伏ᄒᆞ엿다가掩擊大破ᄒᆞ고드ᄃᆡ여乘勝大進ᄒᆞ야十二城을拔ᄒᆞ고ᄯᅩ九城을屠ᄒᆞ며二萬餘級을斬ᄒᆞ고九千餘人을虜ᄒᆞ거ᄂᆞᆯ羅主ㅣ論功行賞ᄒᆞᆯᄉᆡ庾信으로ᄡᅥ行軍大摠管을拜ᄒᆞ다○時에唐帝ㅣ蘇定方을命ᄒᆞ야軍士二十萬을帥ᄒᆞ고百濟ᄅᆞᆯ攻ᄒᆞ다가旣而오唐帝ㅣ崩ᄒᆞᄆᆡ遺詔로罷兵ᄒᆞ니라

【신라 진덕 여왕 원년 ○ 고구려 보장왕 6년 ○ 백제 의자왕 7년 ○ 당 태종 정관 22년 ○ 일황 효덕 4년 ○ 서력 기원 648년】

봄 정월에 당(唐)나라 황제가 대장군(大將軍) 설만철(薛萬徹)에게 명하여 군사 3만여 명과 누선(樓船), 전함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였다.

○ 겨울에 신라(新羅)가 김유신(金庾信)에게 백제(百濟)를 공격하도록 하여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陜川)】으로 나아가 치도록 하니, 백제가 역습하였다. 김유신이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여 옥문관(玉門關)에 매복하고 있다가 몰래 급습하여 대파하였다. 마침내 승세를 타고 나아가서 12개 성을 빼앗고 또한 9개 성을 무찔렀으며, 2만여 급의 목을 베고 9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신라 왕이 논공행상(論功行賞)할 때에 김유신을 행군 대총관(行軍大摠管)에 임명하였다.

○ 그때에 당나라 황제가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에 당나라 황제가 돌아가시면서 조서[詔旨]를 남겨 병사를 거두어들이도록 하였다.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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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德主四年○高句麗寶藏王九年○百濟義慈王十年○唐高宗永徽二年○日皇孝德七年○西歷紀元後六百五十一年新羅ㅣ珍飡金仁問을唐에遣ᄒᆞ니仁問은春秋의第二子라幼時에群書ᄅᆞᆯ博覽ᄒᆞ고兼ᄒᆞ야莊老와浮屠의說을涉獵ᄒᆞ고射御ᄅᆞᆯ善ᄒᆞ며音律을曉通ᄒᆞ고識量이宏遠ᄒᆞ거ᄂᆞᆯ唐帝ㅣ寵愛ᄒᆞ야特히左領軍衛將軍을拜ᄒᆞ니時年이二十三이라先時에羅主ㅣ金春秋ᄅᆞᆯ唐에遣ᄒᆞ니唐太宗이春秋의儀表가英偉ᄒᆞᆷ을見ᄒᆞ고厚待ᄒᆞ고ᄯᅩ國學에送ᄒᆞ야釋奠을觀케ᄒᆞ거ᄂᆞᆯ春秋ㅣ이에唐兵을請ᄒᆞ야百濟ᄅᆞᆯ伐코자ᄒᆞᆫᄃᆡ太宗이곳蘇定方으로ᄒᆞ여곰百濟ᄅᆞᆯ伐ᄒᆞ라ᄒᆞ거ᄂᆞᆯ春秋ㅣ곳海上에還至ᄒᆞ다가高句麗의邏卒ᄅᆞᆯ遇ᄒᆞ니從者溫君이春秋ᄅᆞᆯ代ᄒᆞ야高冠大衣로船上에坐ᄒᆞᆫᄃᆡ邏兵이春秋라ᄒᆞ야곳殺ᄒᆞ니라

【신라 진덕 여왕 4년 ○ 고구려 보장왕 9년 ○ 백제 의자왕 10년 ○ 당 고종(高宗) 영휘(永徽) 2년 ○ 일황 효덕 7년 ○ 서력 기원 651년】

신라(新羅)가 파진찬(波珍飡)【관등명】 김인문(金仁問)을 당(唐)나라에 보내니, 김인문은 김춘추(金春秋)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적에 여러 서책을 두루 보았으며, 동시에 장자(莊子)와 노자(老子), 그리고 불교의 교리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고 식견이 넓었다. 당나라 황제가 총애하여 특별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에 임명하니 이때 나이가 23세였다. 이에 앞서 신라 왕이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니 당 태종(太宗)이 김춘추의 몸가짐이 훌륭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접하고 또한 국학(國學)에 보내서 석존제(釋尊祭)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당나라 병사를 요청하여 백제(百濟)를 공격하고자 하니 태종이 곧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곧 바다를 건너 돌아오다가 고구려의 순찰병을 만났는데, 따르던 온군해(溫君解)가 김춘추를 대신하여 김춘추의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찰병이 그를 김춘추라고 생각하여 곧바로 죽였다.


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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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眞德主七年○高句麗寶藏王十二年○百濟義慈王十三年○唐高宗永徽五年○日皇孝德十年○西歷紀元後六百五十四年春三月에新羅女主ㅣ崩ᄒᆞ거ᄂᆞᆯ群臣이金春秋ᄅᆞᆯ奉ᄒᆞ야王位에陞ᄒᆞ니此ᄂᆞᆫ太宗武烈王이오眞智王後孫龍春의子ㅣ러라○夏四月에新羅王이其考ᄅᆞᆯ追尊ᄒᆞ야文興王이라ᄒᆞ고其妃ᄂᆞᆫ王太后라ᄒᆞ고律令을參酌ᄒᆞ야六十餘條ᄅᆞᆯ定ᄒᆞ다

【신라 진덕 여왕 7년 ○ 고구려 보장왕 12년 ○ 백제 의자왕 13년 ○ 당 고종 영휘 5년 ○ 일황 효덕 10년 ○ 서력 기원 654년】

봄 3월에 신라(新羅) 여왕이 돌아가시니, 많은 신하가 김춘추(金春秋)를 받들어 왕위에 올리니 그가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고, 진지왕(眞智王)의 후손 김용춘(金龍春)의 아들이다.

○ 여름 4월에 신라 왕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존하여 문흥왕(文興王)이라 하고, 그 비(妃)를 왕태후라 하였다. 또 율령을 참작하여 60여 조를 정하였다.


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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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太宗武烈王元年○高句麗寶藏王十三年○百濟義慈王十四年○唐高宗永徽六年○日皇齊明元年○西歷紀元後六百五十五年春에高句麗ㅣ百濟와靺鞨로더브러連兵ᄒᆞ야新羅北境의三十三城을取ᄒᆞ거ᄂᆞᆯ羅王이唐에遣使ᄒᆞ야救援을請ᄒᆞ다○百濟王이諫臣成忠을殺ᄒᆞ다先是에王이望海亭을建ᄒᆞ고宮女ᄅᆞᆯ率ᄒᆞ야淫酗耽樂ᄒᆞ거ᄂᆞᆯ成忠이極諫ᄒᆞᆫᄃᆡ王이怒ᄒᆞ야賜死ᄒᆞᄂᆞᆫ지라成忠이臨死에上書曰忠臣은死不忘君ᄒᆞᄂᆞ니願컨ᄃᆡ一言을獻ᄒᆞ노이다臣이時變을察ᄒᆞ니반다시兵革이有ᄒᆞᆯ지라만일敵兵이來ᄒᆞ거든陸地에ᄂᆞᆫ炭峴을不過케ᄒᆞ고水路에ᄂᆞᆫ白江今扶餘白馬江을不入케ᄒᆞ고險阻ᄅᆞᆯ據ᄒᆞ야敵을禦ᄒᆞ소셔ᄒᆞᆫᄃᆡ王이不省ᄒᆞᄂᆞᆫ지라自後로다시敢言ᄒᆞᄂᆞᆫ者가無ᄒᆞ더라○秋九月에新羅金庾信이百濟刀比川城을攻拔ᄒᆞ다先是에汲飡未坤이百濟에被擄ᄒᆞ야人의奴ㅣ되엿다가後에逃歸ᄒᆞ야庾信을見ᄒᆞ고百濟의事勢ᄅᆞᆯ悉言ᄒᆞ거ᄂᆞᆯ自是로庾信이百濟ᄅᆞᆯ倂呑ᄒᆞᆯ謀가益急ᄒᆞ더라

【신라 태종 무열왕 원년 ○ 고구려 보장왕 13년 ○ 백제 의자왕 14년 ○ 당 고종 영휘 6년 ○ 일황 제명(齊明) 원년 ○ 서력 기원 655년】

봄에 고구려(高句麗)가 백제(百濟), 말갈(靺鞨)과 함께 연합하여 신라(新羅) 북쪽 경계 지역의 33개 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신라 왕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 백제 왕이 간언하던 신하[諫臣] 성충(成忠)을 죽였다. 이에 앞서 왕이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궁녀를 데리고 음란하게 주색(酒色)을 탐하며 즐겼다. 성충이 간곡히 간언하니 왕이 노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성충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원컨대 한마디 말을 바치겠습니다. 신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적병이 오거든 육지에는 탄현(炭峴)【지금의 공주(公州)에 있다.】을 지나게 하지 마시고, 수로(水路)로는 백강(白江)【지금의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을 방어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새겨듣지 않았으므로 이후로 다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 가을 9월에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백제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에 앞서 급찬(汲飡)【관등명】 조미곤(租未坤)이 백제에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되었다가 이후에 도주하여 돌아가서 김유신을 만나 백제의 형세를 모두 말하였다. 이때부터 김유신이 백제를 병탄할 계책이 더욱 빨라졌다.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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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太宗武烈王六年○高句麗寶藏王十八年○百濟義慈王十九年是歲亡○唐高宗顯慶五年○日皇齊明六年○西歷紀元後六百六十春三月에唐帝ㅣ蘇定方으로ᄡᅧ神丘道行軍大摠管을拜ᄒᆞ고金仁問으로ᄡᅧ副摠管을拜ᄒᆞ야水陸兵十三萬을率ᄒᆞ고百濟ᄅᆞᆯ攻ᄒᆞᆯᄉᆡ德物島在今仁川西卽德積廢鎭에至ᄒᆞ거ᄂᆞᆯ羅王이庾信等을遣ᄒᆞ야軍士五萬으로ᄡᅧ會ᄒᆞ다先是에百濟에災異가多ᄒᆞ야鬼가宮中에셔大呼曰百濟가亡ᄒᆞᆫ다百濟가亡ᄒᆞᆫ다ᄒᆞ고곳地中에入ᄒᆞ거ᄂᆞᆯ王이掘見ᄒᆞ니龜가有ᄒᆞ고其背에文이有ᄒᆞ야曰百濟ᄂᆞᆫ月輪과同ᄒᆞ고新羅ᄂᆞᆫ月新과如ᄒᆞ다ᄒᆞ엿거ᄂᆞᆯ王이巫者의게問ᄒᆞᆫᄃᆡ曰同月輪은滿也니滿ᄒᆞ면虧ᄒᆞ고如月新은未滿이니未滿ᄒᆞ면盈이라ᄒᆞ거ᄂᆞᆯ王이怒ᄒᆞ야殺ᄒᆞ니或이諂ᄒᆞ야曰月輪은盛ᄒᆞᆷ이오月新은微ᄒᆞᆷ이니意者컨ᄃᆡ國家ᄂᆞᆫ盛ᄒᆞ고新羅ᄂᆞᆫ微ᄒᆞᆯ가ᄒᆞ노이다ᄒᆞᆫᄃᆡ王이悅ᄒᆞ더니至是ᄒᆞ야佐平興首의게問計ᄒᆞ거ᄂᆞᆯ興首ㅣ對曰勇士ᄅᆞᆯ簡選ᄒᆞ야白江白馬江上流과炭峴在今公州을扼守ᄒᆞ야羅唐兩軍을拒遏ᄒᆞ고我ᄂᆞᆫ深閉固守ᄒᆞ엿다가其兵疲食盡ᄒᆞ기ᄅᆞᆯ俟ᄒᆞ야奮擊ᄒᆞ면必破ᄒᆞ리이다ᄒᆞᆫᄃᆡ王이能用치못ᄒᆞ더라○秋七月에庾信等이黃山今連에進軍ᄒᆞ니百濟ㅣ階伯을遣ᄒᆞ야死士五千을率ᄒᆞ고拒戰ᄒᆞᆯᄉᆡ階伯이曰一國偏師로兩國兵을當코자ᄒᆞ니存亡을不可知오ᄯᅩ妻子의累ㅣ되리니그生ᄒᆞ야辱될진ᄃᆡᆫ死ᄒᆞᆷ이오히려快ᄒᆞ다ᄒᆞ고드ᄃᆡ여家屬을盡殺ᄒᆞ고黃山에至ᄒᆞ다가猝然이羅兵을遇ᄒᆞ야死之ᄒᆞ니라○羅兵이唐兵으로더브러百濟都城을攻拔ᄒᆞ다時에定方等이濟軍을熊津公州錦江에셔大破ᄒᆞᆯᄉᆡ庾信이唐營에至ᄒᆞ니定方이庾信의麾下士ᄅᆞᆯ執ᄒᆞ고軍期ᄅᆞᆯ遲誤ᄒᆞ엿다ᄒᆞ고斬코자ᄒᆞ거ᄂᆞᆯ庾信이大怒曰將軍이黃山의戰捷ᄒᆞᆷ을不知ᄒᆞ고다만違期로ᄡᅥ歸罪ᄒᆞ니吾ㅣ엇지無罪受辱ᄒᆞ리오今에몬져唐兵과決戰ᄒᆞᆫ然後에百濟ᄅᆞᆯ破ᄒᆞ리라ᄒᆞ고이에鈇鉞을仗ᄒᆞ고軍門에立ᄒᆞ니怒髮은上指ᄒᆞ고腰間의寶劍이自躍ᄒᆞ야鞘에出ᄒᆞᄆᆡ庾信의威風과劍光의閃爍ᄒᆞᆷ이人으로ᄒᆞ야곰懼怕ᄒᆞᆯ지라定方이大驚ᄒᆞ야庾信의게謝罪ᄒᆞ고곳合兵ᄒᆞ야百濟都城을進圍ᄒᆞ니濟王이不免ᄒᆞᆷ을知ᄒᆞ고嘆息曰吾ㅣ成忠의言을不聽ᄒᆞ야至此ᄒᆞ도다ᄒᆞ고太子孝ᄅᆞᆯ率ᄒᆞ고逃亡ᄒᆞ야熊津을保守ᄒᆞ고次子泰가自立ᄒᆞ야城을守ᄒᆞ거ᄂᆞᆯ定方이兵士로ᄒᆞ여곰城堞에登ᄒᆞ야唐國의旗幟ᄅᆞᆯ立ᄒᆞ니於是에泰가開門出降ᄒᆞ고濟王義慈도ᄯᅩᄒᆞᆫ來降ᄒᆞ야百濟가遂亡ᄒᆞ다百濟ㅣ溫祚王으로브터義慈王ᄭᅡ지三十世에共六百七十八年이러라八月에庾信이大讌을排設ᄒᆞ고定方을饗ᄒᆞᆯᄉᆡ義慈로ᄒᆞ여곰堂下에坐ᄒᆞ야行酒케ᄒᆞ니百濟群臣이다嗚咽流涕ᄒᆞ더라定方이드ᄃᆡ여濟王義慈와밋其子孝泰隆演等과大臣將士八十八人과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을擄ᄒᆞ야唐國으로還ᄒᆞ더니冬十一月에義慈ㅣ唐에셔病卒ᄒᆞ거ᄂᆞᆯ唐帝ㅣ尉衛卿을贈ᄒᆞ고陳叔寶墓側에葬ᄒᆞ니라

【신라 태종 무열왕 6년 ○ 고구려 보장왕 18년 ○ 백제 의자왕 19년 이 해에 망하였다 ○ 당 고종 현경(顯慶) 5년 ○ 일황 제명 6년 ○ 서력 기원 660년】

봄 3월에 당(唐)나라 황제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에 임명하고 김인문(金仁問)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임명하여 수군과 육군 13만여 명을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공격할 때에, 덕물도(德物島)【지금의 인천(仁川) 서쪽, 즉 덕적폐진(德積廢鎭)】에 이르니 신라(新羅) 왕이 김유신(金庾信) 등을 보내서 군사 5만으로 회동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에 재이(災異)가 많이 발생했다. 귀신이 궁궐 안에서 크게 소리치기를,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하고 곧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그 땅을 파서 보니 거북이가 있고 등에 문자가 있었는데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새겨져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이니 차지 않았으면 앞으로 찰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노하여 죽였다. 혹자가 아첨하여 말하기를, “둥근 달은 번성한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번성하고 신라는 미약한 것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좌평(佐平)【관직명】 흥수(興首)에게 계책을 물으니 흥수가 대답하기를, “용맹한 군사를 골라 선발해서 백강(白江)【백마강(白馬江)의 상류】과 탄현(炭峴)【지금의 공주(公州)에 있다.】을 지키도록 하여 나당 양군을 막게 하고, 우리는 성문을 닫아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가 저들 병사들이 지치고 식량이 모두 소진되기를 기다려서 공격하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수용하지 못하였다.

○ 가을 7월에 김유신 등이 황산(黃山)【지금의 연산(連山)】에 진군하니 백제가 계백(階伯)을 보내 죽기를 각오한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다. 이때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의 군사로 두 나라의 군사를 당해 내야 하니 존망을 알 수가 없고, 또한 처자식에게 누가 될 것이니 살아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결국 가족을 모두 죽이고 황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신라 병사를 만나게 되어 죽었다.

○ 신라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 도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때에 소정방 등이 백제군을 웅진(熊津)【공주 금강(錦江)】에서 대파하였다. 이때 김유신이 당나라 진영에 이르니 소정방이 김유신의 휘하 군사들을 붙잡고 기일을 지체하여 어겼다고 목을 베고자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크게 노하며 말하기를, “장군이 황산의 승전을 알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삼으니 내가 어찌 죄 없이 치욕을 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 먼저 당나라 병사와 결전을 치른 연후에 백제를 물리칠 것이다.”라고 하고는 도끼를 짚고 군문(軍門)에 서니, 성난 머리털은 곤두서고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뛰쳐 올라 칼집에서 나왔다. 이때 김유신의 위풍과 검날의 번쩍임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다. 소정방이 크게 놀라서 김유신에게 사죄하고 곧 병사들을 합하여 백제 도성을 포위하니, 백제 왕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고 태자 효(孝)를 데리고 도망하여 웅진을 지키고, 둘째 아들 태(泰)가 홀로 성을 지켰다. 소정방이 병사들로 하여금 성첩(城堞)에 올라가 당나라의 깃발을 세우도록 하니, 이에 태가 성문을 열고 나아가 항복하고 백제 왕 의자(義慈)도 또한 와서 항복하니 백제가 드디어 망하였다. 백제가 온조왕(溫祚王)으로부터 의자왕까지 30대에 모두 678년이었다. 8월에 김유신이 큰 연회를 베풀고 소정방을 대접할 때에 의자왕에게 당(堂) 아래에 앉아서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가 모두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정방이 결국 백제 왕 의자와 그의 아들 효, 태, 융(隆), 연(演) 등과 대신, 장수 88명과 백성 12,807명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돌아갔다. 겨울 11월에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나라 황제가 의자왕을 위위경(尉衛卿)으로 추증하고 진숙보(陳叔寶) 묘 옆에 안장하였다.


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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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太宗武烈王七年○高句麗寶藏王十九年○唐高宗龍朔元年○日皇齊明七年○西歷紀元後六百六十一年夏五月에高句麗ㅣ靺鞨과連兵ᄒᆞ야新羅北漢山城今漢을攻ᄒᆞ다가不克ᄒᆞ고還ᄒᆞ다○故百濟王義慈의子豊이周留城을據ᄒᆞ고王이라稱ᄒᆞ거ᄂᆞᆯ新羅ㅣ遣將ᄒᆞ야豊을伐ᄒᆞ니豊이高句麗로奔ᄒᆞ니라初에豊이日本에爲質ᄒᆞ더니百濟가亡ᄒᆞᆫ後에其宗室福信等이迎立ᄒᆞ야王을삼고周留城을據ᄒᆞ니西北部ㅣ다響應ᄒᆞ거ᄂᆞᆯ豊이諸軍을率ᄒᆞ고唐將劉仁願을熊津城에圍ᄒᆞᄂᆞᆫ지라新羅王이金欽純을遣ᄒᆞ야擊敗ᄒᆞ니豊은高句麗에奔ᄒᆞ고餘衆이皆降ᄒᆞ니라○六月에新羅王이崩ᄒᆞ거ᄂᆞᆯ廟號ᄅᆞᆯ太宗이라ᄒᆞ고子文武王法敏이立ᄒᆞ다太宗이在位時에時和歲豊ᄒᆞ야聖代라稱ᄒᆞ고其后ᄂᆞᆫ金庾信의妹러라

【신라 태종 무열왕 7년 ○ 고구려 보장왕 19년 ○ 당 고종 용삭(龍朔) 원년 ○ 일황 제명 7년 ○ 서력 기원 661년】

여름 5월에 고구려(高句麗)가 말갈(靺鞨)과 연합하여 신라(新羅) 북한산성(北漢山城)【지금의 한양(漢陽)】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고(故) 백제(百濟) 왕 의자(義慈)의 아들 풍(豊)이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신라가 장수를 보내 풍을 공격하니 풍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처음에 풍이 일본(日本)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백제가 망한 후에 그의 종실 복신(福信) 등이 옹립하여 왕으로 삼고 주류성에 웅거하니, 서북부가 모두 호응하였다. 풍이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당(唐)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熊津城)【공주(公州)】에서 포위하였다. 신라 왕이 김흠순(金欽純)을 보내서 격퇴하니 풍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였다.

○ 6월에 신라 왕이 돌아가시니,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고 그의 아들 문무왕(文武王) 법민(法敏)이 즉위하였다. 태종이 재위 시에 시절이 평화롭고 풍년이어서 성대(聖代)라 일컬어졌다. 그 왕후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이다.


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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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文武王元年○高句麗寶藏王二十年○唐高宗龍朔二年○日皇齊明八年○西歷紀元後六百六十二年春正月에新羅王이唐으로더브러合兵ᄒᆞ야高句麗ᄅᆞᆯ伐ᄒᆞ다時에唐帝가太宗이安市城에셔敗還ᄒᆞᆫ恥ᄅᆞᆯ雪코자ᄒᆞ야任雅相과契苾何力과蘇定方等을遣ᄒᆞ야高句麗ᄅᆞᆯ擊ᄒᆞᆯᄉᆡ定方이몬져馬邑山在平壤西南을奪ᄒᆞ고平壤을進圍ᄒᆞ거ᄂᆞᆯ於是에羅主ㅣ金庾信等九將軍을命ᄒᆞ야助援케ᄒᆞ엿더니旣而오定方이食盡ᄒᆞ야班師ᄒᆞ니庾信이ᄯᅩᄒᆞᆫ退還ᄒᆞ다○耽羅ㅣ新羅에來朝ᄒᆞ다初에高厚高淸等이新羅에來朝ᄒᆞᆯᄉᆡ時에客星이南方에見ᄒᆞ거ᄂᆞᆯ太史ㅣ奏ᄒᆞ되異國人이來朝ᄒᆞ리라ᄒᆞ더니旣而오高厚等을見ᄒᆞ고其來ᄒᆞᆷ을嘉尙ᄒᆞ야長子ᄅᆞᆯ稱ᄒᆞ야曰星主라ᄒᆞ니그星象을動ᄒᆞ엿다ᄒᆞᆷ이러라

【신라 문무왕 원년 ○ 고구려 보장왕 20년 ○ 당 고종 용삭 2년 ○ 일황 제명 8년 ○ 서력 기원 662년】

봄 정월에 신라(新羅) 왕이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였다. 그때에 당나라 황제가 태종(太宗)이 안시성(安市城)에서 패하여 돌아온 수치를 복수하고자 하여 임아상(任雅相), 계필하력(契苾何力), 소정방(蘇定方) 등을 보내서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소정방이 먼저 마읍산(馬邑山)【평양(平壤)의 서남쪽에 있다.】을 빼앗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이때에 신라 왕이 김유신(金庾信) 등 9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지원토록 하였다. 얼마 후에 소정방이 식량이 모두 소진되어 군사를 되돌리니 김유신이 또한 물러나 돌아왔다.

○ 탐라(耽羅)가 신라에 내조(來朝)하였다. 처음에 고후(高厚)와 고청(高淸) 등이 신라에 내조할 때에 혜성이 남쪽에서 보였다.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이국인(異國人)이 내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고후 등을 보고, 방문하여 온 것을 가상히 여겨서 첫째 아들을 ‘성주(星主)’라고 칭하니, 별의 형상이 움직였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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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文武王七年○高句麗寶藏王二十六年是歲高句麗亡○唐高宗總章元年○日皇天智元年○西歷紀元後六百六十八年秋九月에新羅王이唐兵과合ᄒᆞ야高句麗平壤城을攻拔ᄒᆞ다先是에唐이李勣으로ᄡᅧ遼東行軍大摠管을拜ᄒᆞ고諸將을督率ᄒᆞ야高句麗의大谷漢城等二郡을拔ᄒᆞ고新羅에遣使ᄒᆞ야發兵을請ᄒᆞ거ᄂᆞᆯ羅王이其弟仁問과밋金庾信의弟金欽純으로ᄡᅧ率軍助戰ᄒᆞ니時에庾信은老病ᄒᆞ야在家ᄒᆞ거ᄂᆞᆯ欽純等이庾信의게問計ᄒᆞ고卽行ᄒᆞ야李勣等으로더브러合圍ᄒᆞ엿더니月餘에麗王이泉男生蘇文을遣ᄒᆞ야首領九十八人을率ᄒᆞ고白旗ᄅᆞᆯ豎ᄒᆞ고來降ᄒᆞ거ᄂᆞᆯ勣이麗王臧과밋其二子福男德男과大臣男建等二十餘萬을擄ᄒᆞ고回軍ᄒᆞ니高句麗ㅣ亡ᄒᆞ다唐이安東都護府ᄅᆞᆯ平壤에置ᄒᆞ고薛仁貴로ᄡᅥ都護ᄅᆞᆯ拜ᄒᆞ야鎭撫ᄒᆞ니高句麗ㅣ朱蒙으로브터寶藏王ᄭᆞ지至ᄒᆞ기凡二十八世에歷年이七百五年이러라其後에唐帝ㅣ寶藏王을遼東에送還ᄒᆞ엿더니王이靺鞨과潛謀ᄒᆞ야故國을恢復고자ᄒᆞ거ᄂᆞᆯ唐帝ㅣ王을召還ᄒᆞ야未至ᄒᆞ고中道에셔死ᄒᆞ니唐帝ㅣ頡利墓側에葬ᄒᆞ다

【신라 문무왕 7년 ○ 고구려 보장왕 26년 이 해에 고구려가 망했다○ 당 고종 총장(總章) 원년 ○ 일황 천지(天智) 원년 ○ 서력 기원 668년】

가을 9월에 신라(新羅) 왕이 당(唐)나라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에 앞서 당나라 이적(李勣)을 요동 행군 대총관(遼東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통솔하여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개 군을 빼앗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다. 신라 왕이 그의 아우 김인문(金仁問)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에게 군사를 데리고 도와서 싸우도록 하였다. 그때에 김유신은 늙고 병들어서 집에 있었는데, 김흠순 등이 김유신에게 계책을 묻고 즉시 행하여 이적 등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한 달 남짓 지나서 고구려 왕이 천남생(泉男生)【천개소문(泉蓋蘇文)의 아들】을 보내서 수령(首領) 98명을 거느리고 백기(白旗)를 세우고 와 항복하였다. 이적이 고구려 왕 장(臧)과 그의 두 아들 복남(福男)과 덕남(德男), 대신 남건(男建) 등 20여만 명을 포로로 삼아서 돌아가니 고구려가 망하였다. 당나라가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도호(都護)에 임명하여 다스리게[鎭撫] 하였다. 고구려가 주몽(朱蒙)으로부터 보장왕(寶藏王)까지 28대에 왕업을 이어 온 해가 705년이었다. 그 이후에 당나라 황제가 보장왕을 요동(遼東)으로 돌려보냈는데, 왕이 말갈(靺鞨)과 몰래 계책을 세워 옛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왕을 소환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서 죽었다. 당나라 황제가 힐리(頡利)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