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4/칠휴의 삼배주

성종대왕 어대의 일─

성종은 세종대왕의 손주님이었다. 할아버님 되시는 세종대왕이 여러 왕손들을 슬하에 부르시고 담화를 즐기실 적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크게 일었다. 그때 여러 다른 왕손들은 창황민망하여 그 어쩔 바를 모르고 돌아갔으나, 당년 아홉 살의 성종 뿐은 태연히 앉아서 이것을 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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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조선도 세종대왕의 문치(文治)와 세조대왕의 무비(武備)를 겪고 나서 이제는 튼튼히 자리잡혀서, 성종대왕의 어대에는 반석과 같이 굳게 되었다.

이 태평 시대에 조선의 국왕으로 올라앉으신 성종대왕은 (왕비 문제 때문에 가정적으로는 약간 불쾌한 일을 보셨으나) 성대의 군왕으로서 화기로 찬 일생을 보내셨다.

이 임금이 매우 사랑하시는 신하 가운데 찬성 겸 태학사 칠휴 손순효(贊成兼 太學士 七休 孫純孝)가 있었다. 태평 시대의 선비답게 시에 능하고 가무에 능하고 그 위에 또한 술을 즐겨 하는 사람이었다.

왕은 이 손순효를 매우 사랑하시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과주(過酒)를 근심하셔서 늘 「술을 먹되 석 잔을 넘기지 말라」고 충고하고 하셨다. 그러면 순효는 「하교를 어찌 거역하겠습니까?」하고 석 잔을 넘기지 않기로 맹세하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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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왕은 편전에 납셔서 승문원(承文院)에서 올린 사대문서(事大文書)를 보시다가 그 표문(表文)이 뜻에 맞지 않으셔서 표문을 다시 짓게 하시려고 급히 대제학 손순효를 부르셨다.

그러나 순효의 집까지 달려갔던 별감은 순효를 동반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어디 있는지 갈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은 다시 별감을 보내셨다. 또 다시 보내셨다. 별감은 가고 또 가고─ 열 사람이나 갔었지만 아무도 순효를 못 데리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하였다.

별감이 돌아올 때마다 왕은 용상에서 몸까지 일으키시며 기다리셨지만 기다리는 순효는 안 오고 부르러 갔던 사람만 무위히 돌아왔다.

이리하여 순효 부르시는 사자가 가고 또 가고 이러기 십여 차─ 황혼이 거의 되어서야 기다리던 순효가 붙들려 왔다. 그러나 이때는 왕은 순효 때문에 마음이 매우 불쾌하시게 된 때였다.

왕의 심사가 가뜩이나 불쾌한 데 입궐한 순효의 꼬락서니를 보니, 의관이 정제되지 않고 술기운이 얼굴에 차고 넘고 걸음걸이조차 똑똑치 않게 들어와서, 되는 대로 꿇어 곡배(曲拜)를 드리는 것이었다.

왕은 이제는 그 불쾌하심을 더 참으실 수가 없었다.

『전하, 어명에 의하와 신이 등대하왔습니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서 순효가 이렇게 아뢸 때, 왕은 불쾌한 안정으로 잠시 굽어보시다가 누차 전인을 했는데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셨다.

『신의 딸이 출가하와 오래 보지 못하였삽다가 오늘 지나는 길에 우연히 잠깐 들러서 시간이 지체되왔습니다.』

이것이 순효의 변명이었다.

『내 일찌기 술을 석 잔을 넘기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는데 오늘 이 꼴은 웬일이오?』

『신이 엄교(嚴敎)를 어찌 어기오리까? 삼배주는 넘기지 않았사옵니다.』

『석 잔? 석 잔에 그렇듯 취한단 말이오?』

『네이, 단 석 잔이옵니다. 주발로 단 석 잔─』

할 수 없다. 총애를 믿고 어전에 떼거리를 쓰는 것이다. 아무리 대제학이요 글에 능하다 할지라도, 이렇듯 취해서는 표문 찬하기를 맡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부제학을 부르셔서 둘이서 함께 짓게 하려 하니까, 이것은 순효가 승낙하지 않는다.

『신 혼자서 당하오리다. 아무리 취했다 하오나 신의 직책이야 못 감당하오리까.』

고집하여 듣지 않는다. 더우기 주정군의 고집으로서 왕도 사랑하시는 순효라, 어디 그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허락을 하시매, 순효는 취한 머리를 몇 번 이리저리 젓더니

『표문이 다 됐으니 지필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글씨에 능하지만 취필(醉筆)이 어찌 능히 당하랴 하고 사서(寫書)할 사람을 부르려 하시나, 이 주정군은 그냥 버티고 스스로 쓰겠노라 청한다. 그래서 왕도 시험 삼아 필연을 내어주라 명하시니, 순효는 그 가운데서 몇 자루 골라잡아 취한 눈을 연하여 찡그리며 손바닥 위에 글을 써 보다가 모두 다 내어던지고 모두 못쓸 붓뿐이라고 이번엔 붓 투정이다.

어명에 의지하여 이번은 어필(御筆)이 나왔다. 그러매 그 가운데서 한 자루 골라 잡고

『이 붓이 겨우 소용되옵니다. 그러하오나 신이 연로(年老)하와 허리는 굽히기가 힘드오니 책상을 하나 주시옵소서.』

또 투정이다.

책상도 등대되었다. 그 책상 앞에 꿇어앉아 순효는 눈의 점을 맞추는 듯이 연하여 얼굴을 찡그리며 글을 다 초하여 한 번 다시 읽어 보고는 어전에 바친다.

왕은 받아 보셨다. 한 줄 두 줄 읽어 내려가시는 동안 용안에 차차 어리는 환희의 표정.

글로든 글씨로든,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표문이었다. 시험 삼아 명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과연 뜻밖이었다.

왕은 이 순효의 취작(醉作) 표문을 그대로 승문원에 내리셔서 보내게 하시고 사옹원(司甕院)에 명하시어 크게 잔치를 하시고 순효에게 대취하도록 술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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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순효가 대취하여 정신을 잃을이만 하여, 왕은 다시 순효에게 이제도 넉넉히 지을 수 있겠는가고 물으셨다. 그 하문에 대하여는 역시 분부대로 하오리다고 즉답하였다.

여기서 왕은 시제(詩題)를 장량(張良)으로 하시고 운으로 중(中)자를 내어 주시니, 순효는 왕에게서 운자가 떨어지자말자 즉시로

奇謀不售浪沙中

이라고 취한 음성이나마 명료히 읊었다. 다음 연하여 공(公)자를 부르시매

杖劍的來相沛公

이라고 즉시 응하였다.

이리하여 왕이 운을 부르시면 순효는 즉시로 응하고 하여 이룩한 노래가

借筋己能成漢業
令弟却目讓齊封
平生智謀傳黃石
末政功名付赤松
堪恨韓彭竟菹醢
功成身退是英雄

이라고 생겨났다.

『참, 노당익장이오.』

시험하시려던 왕은 드디어 탄복하셨다.

왕은 마음에 흡족하시어 궁인을 불러서 비파를 뜯으며 노래하라 하시고, 순효에게 일어서 춤추기를 명하셨다. 그러나 술에 과히 취한 순효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도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왕은 몸소 입으셨던 의대를 끄르셔서 이 사랑하시는 신하를 덮어 주시고 내전으로 들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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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건국 이후 명군이 연하여 나셔서 나라이 한창 아름답고 기름졌으며, 또한 후일 이 나라를 망케 한 당쟁이 아직 일지 않았을 때─ 그 시대에는 군신이 서로 이렇듯 즐겁고 화목한 세월을 보냈거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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