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4/어전의 고마운 쥐
1
편집동방요순(東方堯舜)의 칭호를 인종대왕(仁宗大王)께서 승하하시고 경원대군(慶原大君)이 겨우 보령 십이세(寶齡 十二歲)의 어리신 몸으로써 대통(大統)을 이으사 천조(踐祚)하시니 즉 명종대왕(明宗大王)이시다.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신 뒤 여러 백성들은 새 인군의 성덕이 장차 장하실 것을 우러러 믿음이 심상치 아니하나 선왕의 그 어지심을 차마 잊지 못하여 극한 울음소리가 팔도강산을 물끓듯 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정에서는 인종대왕께서 승하하신 데 대한 망극한 일 이외에 또한 몇몇 사람의 쑤국대는 소리로써 은연히 수운(愁雲)의 그림자가 점점 깊어가니 이것은 분명 모진 바람이 몰려옴이 아니면 반드시 사나운 비가 쏟아질 징조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종대왕께서 승하하시고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신 뒤 조정에서는 소위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라는 두 당파가 생기었으니 즉 윤임(尹任)이란 사람은 인종대왕의 외삼촌이 되는 바 윤임을 가리켜 대운이라 하고 윤원형(尹元衡)이란 사람은 명종대왕의 외삼촌인 바 윤원형을 가리켜 소윤이라 하였다.
그 뜻은 인종대왕과 명종대왕께서는 비록 배는 다르실지라도 분명 형제분이 되시므로 윤임은 인종대왕의 외삼촌이 되는 동시에 명종대왕께도 외삼촌이 되고 윤원형은 명종대왕의 외삼촌이 되는 동시에 또한 인종대왕께도 외삼촌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윤임과 윤원형은 인종대왕 형제분의 외삼촌이 된 것은 다 똑같으나 윤임은 형님이 되시는 인종대왕의 외삼촌이 됨으로써 대윤이라 하였고 윤원형은 아우님이 되시는 명종대왕의 외삼촌이 됨으로써 소윤이라 한 것이니, 이것은 애초 나라 일에는 정성이 적고 공연한 말썽과 이간질로 일삼는 고약한 입버릇으로 지어낸 것이 마침내 큰 별명이 되고 또는 그 별명이 차차 자라서 큰 당파의 이름이 된 것이었다.
일찍이 인종대왕께서 즉위하신 뒤 유관(柳菅)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삼으시고 다음에 유인숙(柳仁淑)으로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윤임(尹任)으로는 좌찬성(左贊成)을 삼으시니 이 세 사람은 천성이 정직하여 정사를 처리함에 지극히 공평하게 다스리므로 먼저 인종대왕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누구든지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직 윤원형이 홀로 윤임을 시기하여 포장화심을 가졌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윤임으로 말미암아 사특한 짓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원래 윤원형은 천성이 간악하여 사람에게 용납됨이 적은 중 특히 유관과 유인숙과 윤임 등 세 사람의 눈에는 몹시 주의의 인물이 되었었다.
그런데 윤원형과 같이 사특한 행동을 행하지 못하게 된 자들도 역시 유관과 유인숙과 윤임에게 원앙을 품은 중 자연 초록은 동색으로 그 천성이 간특한 윤원형과 한 짝이 되어 부지중 한 당파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인종대왕께서 승하하시고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심을 따라 천하가 바뀌이매 오직 새로 활기가 생기며 가진 간악한 계교를 생각하게 된 사람은 윤원형이며 윤원형을 추종하는 그 무리들이었다.
특히 윤원형은 명종대왕의 외숙이 되고 따라서 명종대왕의 모후(母后)이신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오라버니가 될 뿐만 아니라 명종대왕께서 아직 어리시므로 필경 문정왕후께서 발을 느리시고 정사를 다스리게 되므로 윤원형은 그것을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라 하여 위로는 문정왕후의 성총(聖聰)을 가리우고 아래로는 그 여러 무리를 선동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 애첩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소식을 전하는 봉화불(烽火)을 삼아 우선 궐내에 돌아다니는 것을 비롯하여 각처로 다니며 쑤석이게 한 뒤 일찍부터 윤임에게 대한 그 앙앙을 소원대로 풀기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윤원형을 싸고도는 소위 소윤 패가 늘어가며 흉악한 훅작질이 생기게 되자 윤임과 유관과 또 유인숙 등은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으로써 윤원형 일파의 깜찍한 계획을 막으려는 소위 대윤파도 움직이게 되어 필경은 조정에 대윤과 소윤 두 패의 알륵이 생기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명종 을사사화(明宗乙巳士禍)의 시작이다.
2
편집그런데 윤원형을 싸고도는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순붕(鄭順鵬)과 형조판서(刑曹判書) 이기(李芑)와 호조판서(戶曹判書) 임백령(林百齡)과 공조판서(工曹判書) 허자(許磁) 등이니, 이 여러 사람이 윤원형을 싸고도는 뜻은 윤원형을 꼭 위한 것이 아니요 실상은 각각 자기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원한을 풀고자 한 것이었다.
즉 이기는 일찍 병조판서를 주선하였으나 대신 유관이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유관을 원망하게 되었고 임백령은 명기(名妓) 옥매향(玉梅香)을 사이에 놓고 윤임과 서로 다투다가 필경 윤임에게 빼앗기게 된 것을 원망하게 되고 정순붕과 허자는 부질없이 유관과 유인숙을 마땅치 못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벼슬 욕심이 옳고 그른 총명을 가리우게 된 것이며 윤원형이가 윤임을 원수로 아는 것은 먼저 대강 말한 바와 같이 첫째는 윤임이 그 천성이 정직하여 사사 의논을 청하되 듣지 아니한 것이요 둘째는 인종대왕께 총애를 받은 것을 시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윤임을 원수로 여기자 윤임과 가까이 지내는 유관과 유인숙까지 따라서 미워하고 유관과 유인숙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정순붕, 이기, 허자 등은 유관과 유인숙을 미워함을 따라 윤임까지 미워하게 되었고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윤임과 강짜 싸움을 일삼던 임백령도 역시 윤임을 원망하는 그 원망을 유관과 유인숙에까지 옮기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소위 대윤과 소윤 등 두 당파는 마치 고목에 칡넝쿨이 감기듯이 이리저리 긴 사정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된 바 윤원형은 밥을 먹고 잠자기를 잊어버리며 윤임의 일파를 없애버리기를 궁리하였다.
그래서 윤원형은 우선 그의 첩 난정을 궐내에 때때로 들여보내어 문정왕후와 명종대왕께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에 대하여 멀쩡한 허물을 만들어 큰 의심이 나도록 참소의 말씀을 아뢰게 하고 밖에서는 밤낮으로 정순붕, 이기, 임백령 등과 모여서 역시 윤임 등을 해치려는 계교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 웅이에 마디격으로 편지─ 고이한 언문 편지가 발견되어 큰 도화선이 되었다.
어느 날 내전 뜰에 윤임이가 대왕대비(大王大妃)께 올리는 편지 한 장이 떨어진 것을 어느 나인이 얻어내었다.
『이상도 하지. 이 편지가 어찌해 뜰에 떨어졌을까?』
하고 그 나인은 편지를 주워 즉시 문정왕후께 올리었다.
문정왕후께서는 크게 의아하시사 곧 편지를 빼시니 그 안에 쓰였으되
『근래에 나라 일이 갈수록 수상해 가는 것을 보게 되었나이다. 그리하와 노신은 죽고자 하오나 죽을 곳을 찾지 못하와 밤과 낮으로 울고만 있습니다. 유인숙도 크게 걱정하와 봉성군(鳳城君)을 추대하자고까지 대신 유관과 상의한 일이 있습니다.』
하였으니 그 편지의 뜻은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이 서로 부동이 되어 가지고 명종대왕을 폐위한 뒤에 봉성군을 추대하자는 뜻이다.
대신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이 명종대왕을 폐위하고 그 뒤로 추대하자는 봉성군은 중종대왕(인종의 아버님 되시는)의 여덟째 왕자로서 희빈(熙濱) 홍씨(洪氏)의 소생이니 즉 명종대왕과 형제간이다.
문정왕후께서 그 편지를 다 보신 뒤 일변으로는 크게 진노하시고 또 일변으로는 크게 놀래시사
『나라에 이런 흉한 일이 있을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 특히 윤임이 국은이 망극하겠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이런 불측한 일을 꾸밀꼬?』
하시고 곧 윤원형에게 밀지(密旨)를 내리시니 그 뜻은 물론 윤임 등의 죄상을 탐지하라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그 괴상한 편지는 사실 윤임의 편지가 아니요 실상은 윤원형이가 그와 같이 꾸미어 만든 편지로서 그 목적은 물론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역적죄로써 몰아넣으려는 흉계이었다.
윤원형은 내심 그런 편지로써 흉계를 꾸민 것이 오늘날 밀지가 내린 것으로 보아 잘 들어맞은 것을 속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며
『오오. 쇠뿔은 단결에 뽑는다는 세음으로 일이 이만큼 된 이상에는 시각을 머무를 수 없다.』
하고 한편으로는 정순붕을 충동이고 또 한편으로는 난정을 궐내에 들여보내어서 문정왕후의 성총을 어지러우시게 하려 작정하였다.
이에 윤원형은 그 흉악한 편지와 밀지를 가지고 정순붕을 찾아가며 난정을 불러서 궐내에 들어가 문정왕후께 아뢸 말씀을 낱낱이 가르쳤다.
3
편집윤원형은 정순붕을 찾아가서 대단히 기가 막힌 기색으로써
『대감! 윤임 등이 이렇게까지 큰 흉계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며 그 흉악한 편지를 정순붕의 앞에 내놓았다.
원래 정순붕은 그 성품이 매우 부픈 사람이라 무슨 일에나 실상보다 떠들어대는 것이 굉장하였다.
그런데 정순붕이 윤원형의 내놓는 편지를 훑어본 뒤에 역시 얼굴에 상기가 된 기색으로써
『불량 무식한 놈이라도 생의치 못할 일이어늘 국은이 망극한 현관으로서야 이 어찌 차마 행할 일이겠소이까?』
하고 곧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역적죄로써 고변하기로 하였다.
정순붕이 과연 고변을 한 후 이어서 경기감사 김명윤(京畿監司 金明胤), 승지 윤춘년(承旨 尹春年) 등이 또한 차례로 정순붕과 같이 고변하였다.
그런데 윤원형의 첩 난정은 궐내에 들어가 문정왕후께 아뢰기를 윤임이 유관과 유인숙으로 더불어 큰 흉계를 도모하는 중이나 윤임은 국척이라 여러 조신들은 장차 어떻게 처치하여야 좋을지 좋은 방법을 모르고 서로 쑤군댈 뿐이요 오직 윤원형 정순붕 임백령 등 몇몇 조신이 서로 모여 앉아서 울며불며 침식을 버리고 애를 씁니다고 하였다.
문정왕후께서는 그 괴상한 편지를 보신 후 크게 놀라시사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리시고 윤원형이가 무엇이라 아뢰일 것을 기다리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순붕의 고변이 들어오자 뒤미쳐 윤춘년 김명윤 등의 고변을 받아 보시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난정이 곧 큰일이 날 듯한 급한 어조로써 아뢰이는 것을 들으신 문정왕후께서는 그 편지 사연과, 정순붕, 윤춘년, 김명윤 등의 고변과 난정의 아뢰는 것이 조금도 틀린 것이 없는 것을 보사, 윤임 등의 소위가 헛말이 아닌 것이라 보시게 되셨다.
그뿐 아니라 형조판서 이기가 궐하에 들어가 머리를 조으며
『윤임, 유관, 유인숙이 일찍부터 포장화심으로 지내옵다가 필경은 천지신명까지도 놀라울 만한 불측한 뜻을 가슴에 품고 몰래 흉악한 행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실이 이제는 밝게 드러났사오니 성총으로서 종사(宗祀)의 위태하심을 빨리 붙드실 처분을 내리시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윤임 등이 곧 큰일을 경각이 일으킬 듯이 아뢰었다.
이기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신 문정왕후께서는 크게 진노하심을 이기지 못하사 이에 큰 결심을 하셨다.
을사(乙巳) 팔월 이십팔일.
명종대왕께서와 문정왕후께서 충순당(忠順堂)에 임어하시고 먼저 정순붕, 이기, 임백령, 허자 등을 입시케 하셨다.
그리고 또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영부사(領府事) 홍언필(洪彦弼), 좌찬성(左贊成) 이언적(李彦迪), 병조판서(兵曹判書) 권발(權撥), 좌참찬(左參贊) 정옥형(丁玉亨), 예조판서(禮曹判書) 윤개(尹漑), 판윤(判尹) 윤사익(尹思翼), 대사헌(大司憲) 민인제(閔仁齊), 대사간(大司諫) 김광준(金光準), 기사관(記事官) 송기수(宋麒壽) 안명세(安名世), 주서(注書) 유경심(柳景深) 등을 또한 입시케 하셨다.
윤인경 이하 신이 머리를 조으며 궐하에 엎드리매
『경 등은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 등이 흉악한 짓을 꾸미는 것을 들었소?』
『황송한 줄로 아뢰오.』
『경 등을 부른 뜻은 윤임 등의 죄상을 어찌할 것을 물으려는 것이오.』
『황송하오나 윤임의 흉계는 분명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큰 죄로써 엄히 처벌하사 국민을 경계하심이 마땅할 줄을 아뢰오.』
하고 정순붕이 먼저 윤임 등을 역률로써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아뢰었다.
정순붕의 입에서 이 무서운 주장이 떨어지자 충순당 안의 공기는 몹시 침울하여 군신 상하가 잠시 말이 없이 묵묵하였다. 그러다가 윤인경이 먼저 그 죄상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역죄로써 엄한 벌을 쓰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는 것을 굳세히 아뢰이고 또한 백인걸(白仁傑)이 급히 궐하에 들어와 대옥의 처형은 역시 국법대로 한번 사실을 알아보지 아니하고서는 중한 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 등 세 사람은 일시 정배 보냈다가 뒤이어 역죄로써 육시 처참을 행하고 그 나머지 오십여 명은 혹은 중벌, 혹은 귀양을 보내니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의 최종이었다.
4
편집그런데 일찍 윤원형이가 정순붕 등으로 더불어 고변할 계획을 세울 때에 임백경이 윤원형을 향하여
『윤임의 일은 심상히 볼 일이 못 되니만큼 반드시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대론(臺論)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하고 대관 중 신망이 있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을 시키어 대론을 일으키는 것이 더욱 힘이 있고 필요할 것을 말하였다.
『대감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고 천번 지당한 말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대관 중에 누가 능히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하고 윤원형은 임백령의 말이 가장 필요한 것을 깨달으나 그 대론을 일으킬 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양을 보이며 말하였다.
『유정언 희춘(柳正言 希春)은 원래 학식이 높고 또는 천성이 매우 정직한 사람인 고로 만일 유정언으로 하여금 대론을 일으키게 한다 할진대 대내의 통촉이 따르실 뿐만 아니라 조정도 더욱 긴장할 줄로 믿습니다.』
하고 임백령은 유희춘으로 하여금 대론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적당할 줄로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만일 유정언 같은 사람이 대론을 일으킨다 하면 다른 대관이 백 번 일으키는 것보담 몇몇 곱절 효력이 클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유정언을 누가 능히 움직이어 낼 사람이 있습니까?』
윤원형은 유희춘을 충중기어 낼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유정언으로 하여금 대론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내가 주선해 보지요.』
하고 임백령은 어떤 자신이 있는 듯이 말하였다.
『대감께서 친히 주선하신다면야 유정언의 대론이야 틀림없을 줄 믿사오며 그리되면 일은 사필귀정으로 잘되어 갈 줄로 생각이 됩니다.』
하고 윤원형은 임백령을 크게 칭찬하며 추켜 세웠다.
대체 임백령이 유희춘을 움직이어 낼 것을 자신 있게 말한 것은 원래 임백령은 유희춘과 같은 한 고향 사람일 뿐 아니라 유희춘 부인 최씨로 더불어 이종남매간의 관계가 있음으로써 한편으로는 그 동향의 정분을 믿고 또 한편으로는 이종남매라는 인척의 관계를 믿은 것이었었다.
이에 임백령은 친히 유희춘을 찾아가서 매우 정중한 기색으로써
『요사이 윤임 등이 불측한 마음으로써 장차 종사를 어지럽게 하려거니 대관으로써 어찌 안연히 있을 수 있소?』
하고 윤임의 편지에 대한 말과 또는 문정왕후께서 밀지를 내린 전후 사실을 자세히 말하고 빨리 대론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유희춘은 임백령의 말을 다 들은 뒤 임백령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만 발연변색을 할뿐이요 한 말도 대꾸를 아니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임백령은 유희춘에게 큰 무안을 당한 것이 부끄럽고 분할 뿐만 아니라 첫째 윤원형에게 대하여 대답할 말이 없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며 유희춘을 원한하는 생각까지 생기었다.
임백령이가 유희춘에게 크게 무안을 당하고 돌아간 뒤에 역시 윤원형의 한 패가 된 김광준(金光準)이 유희춘을 찾아와 조용한 방을 치고
『요사이 윤임의 일을 들으셨겠군요.』
『대강 들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대내에서는 윤임의 일을 매우 의심을 두는 터이니 이때 대론을 일으키어 그 뜻을 밝히는 것이 옳을 줄 아오.』
하고 김광준도 빨리 대론을 일으키기를 의논하였다.
유희춘은 김광준의 말을 자세히 들은 뒤에 또한 기색을 변하여
『안될 말씀이오. 재궁(梓宮)에 계신 선왕(仁宗大王을 일컬음)의 성체(聖體)에 더운 기운이 가시기도 전에 큰 옥사를 일으키어 공이 많은 각신(閣臣)에 대하여 살벌을 행하는 것은 오직 나라의 체면을 상하는 것뿐 아니라 성상(聖上)께서 대통을 이으시는 성덕에 부질없이 누(累)를 끼치심이 아니실까요. 안될 말씀이오.』
유희춘은 크게 노한 기색으로써 도리어 김광춘을 꾸짖듯 하였다.
김광준은 유희춘이 정정당당한 말로 꾸짖는 통에 다시 입을 벌리지 못하고 붉은 얼굴로써 돌아서며
『오오. 알고 보니 너도 윤임의 한 패로구나! 하하, 알았다!』
하며 유정언을 내심 원망하며 그 무안당한 것을 갚으려 하였다.
5
편집대체 유희춘은 자(字)는 인중(仁仲)이요 별호는 미암(眉岩)이요 본(本)은 문화(文化)니 헌납(獻納) 유성춘(柳成春)의 아우로써 여러 대를 해남(海南)에서 살았다.
일찍 중종(中宗) 무술(戊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차차 벼슬이 올라 명종대왕께서 즉위하신 때에는 정언(正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유희춘은 천성이 지극히 온량하고 정직하며 특히 재주가 뛰어나 책을 보기를 천으로 세이게 되고 또는 한 번 본 것은 능히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유희춘은 일찍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 가서 큰 선비의 실력을 양성하였음으로써 다문박식(多門博識)의 학자(學者)란 칭호를 들었다.
그러나 유희춘은 글을 보고 글을 알고 글을 되는 것 이외에는 세상 물정에 몽매하였다. 공사를 당하여 처리함에는 그 타고난 정직한 천성으로 말미암아 털끝만치라도 의리와 도리를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유희춘은 이와 같이 물속에 이끌리는 마음이 없고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다하여 다문박식의 별명을 들음으로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잠저(潛邸)하여 계실 때에 유희춘에게 글을 배우시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유희춘이 임백령과 김광준 등이 대론을 청하는 것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유희춘도 윤원형 일파의 눈에 모진 가시가 되었다. 그래서 유희춘은 반드시 어느 때든지 윤원형 일파가 권세를 잡은 때는 그 운수가 사나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때는 정히 그 무시무시하고 피 비린 냄새가 도성 안에 가득하던 을사사화가 지난 뒤 삼 년째 되던 정미(丁未)년 추구월이었다.
부제학(副提學) 정언각(鄭彦慤)이 그 딸을 전라도(全羅道)로 시집을 보낼 새 전송하기 위하여 양재역(良才驛=지금 西氷庫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양재역관 벽에 붉은 글씨로 쓴 글 한 장이 정언각의 눈에 띄었다. 그 글에,
「우로는 여왕(女王)이 정권을 잡고 아래로는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니 나라이 장차 망할 것을 앉아서 기다리는 셈이라 어찌 한심치 아니한고.』
이라 하였으니 그 여왕이라 함은 문정왕후를 가리킴이요 이기의 무리라 함은 물론 윤원형 정순붕, 임백령, 허자 등 을사사화를 꾸며내던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다.
『괴이한 벽서로군.』
하고 정언각은 그 벽서를 다 본 뒤에 너무나 그 사연이 놀라우므로 벽서를 떼어서 가지고 돌아와 명종대왕께 올리었다.
『신이 딸자식을 전라도로 시집을 보내게 되와 양재역까지 데리고 갔사온 바 뜻밖에 벽서 한 장이 벽에 붙어 있사온데 그 뜻이 너무나 황송하오므로 그것을 떼어 바치는 것이오니 통촉하소서.』
명종대왕께서는 놀라시는 빛을 따시고 곧 그 벽서를 재상 윤인경을 비롯하여 윤원형, 정순붕, 임백경, 김광준 등에게 내 뵈시며 누구의 위인 것을 알아보라 분부하셨다.
이에 임백경 등은 벽서를 쓴 사람으로 의심을 두는 사람의 성명을 발기잡아 올릴 새 첫째 봉성군(鳳城君)을 비롯하여 송기수(宋麒壽) 이약해(李若海) 이언적(李彦迪) 등을 쓴 바 그 중에는 유희춘도 끼었다. 그 발기에 올린 사람들은 일찍 윤임과 가까왔던 사람이요 특히 유희춘은 그 대론 문제로써 그와 같이 혐의가 되어 써 논 것이었다.
명종대왕께서 그 발기에 쓰인 여러 사람들을 각각 벌을 내리실 때 유희춘도 관직을 삭탈하고 제주도(濟州道)로 귀양을 보내시었다.
그러나 벽서로 말미암아 중한 벌을 당하게 된 여러 사람들은 실상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워낙이 그 벽서를 붙인 사람도 누구인지 이내 알지 못하였으나 그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또한 중한 벌을 당한 것은 을사사화의 남은 독이 아직도 풀리지 못하였던 까닭이었다. 특히 유희춘이 삭탈관직을 당하고 수륙 수천리의 먼 곳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된 것은 즉 임백령과 김광준이 대론으로 말미암아 유희춘에게 받은 부끄럼을 앙갚음한 것이 뚜렷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희춘은 미리 짐작한 바이라 아무에게 원망함이 없이 다만 금부 나졸에게 이끌리어 괴로움과 욕을 달게 받으며 절해고도인 제주도를 바라보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오직 한양(漢陽) 산천이 간사한 무리의 입김에 흐릿한 것을 크게 한탄하고 뜨거운 눈물을 능히 금치 못할 뿐이었다.
6
편집유희춘이 죄없는 몸으로 절해고도인 제주도로 귀양을 간 뒤에 얼마 아니하여 윤원형, 임백경, 김광준 등이 다시 의논하고 제주도에서 함경도 경성(鏡城) 땅으로 옮기게 되었다. 제주도는 비록 절해고도라 할지라도 기후가 온화하며 또한 제주도는 비록 물길로써 왕래하는 곳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넘나드는 배편으로 조정의 소문을 듣게 될 것을 꺼린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찬 기운이 살을 저미는 듯하고 서울 소식을 용이히 들을 수 없는 북도 지방인 경성으로 옮기게 된 것이니 유희춘의 앞길은 점점 험하고 모질어 갈 뿐이었다.
그런데 임백경 등은 유희춘을 제주도에서 경성(鏡城)으로 옮기되 육로로써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수로로써 옮기기를 작정하였다. 유희춘의 목숨은 이래도 매인 목숨이요, 저래도 매인 목숨이라 물로 간 들 어찌하며 육로로 간들 어찌하리. 조각배에 외로운 신세를 싣고 물결이 거친 서해(西海) 바다를 거쳐 역시 끝이 없는 동해 바다를 향하고 떠날 새 그 위대함을 이루 측량할 길이 없었다.
이때 유희춘을 실은 조각배가 그렁저렁 동해에 접어들 새 뜻밖에 장사배 세 척이 중류에 둥실 떠 동행하게 되었다.
유희춘은 금부나졸과 사공으로 더불어 만경창파를 헤쳐가다가 큰 배 세 척과 머리를 같이 대이고 흘러가며 여러 선객들의 짓지르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 저으기 외롭고 울적한 회포를 위로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네 배가 정답게 얼마를 흘러가는 중 별안간 바람 소리는 쏴쏴 요란하고 물결은 출렁출렁하며 모진 풍랑이 일어나서 그 네 배는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배 안의 사람 몸뚱이는 이리로 쏠리고 저리로 쏠리고 하다가 필경 한 배가 물에 가라앉았다.
『사람 살리우. 사람 살리우─.』
하는 아우성 소리가 물속에서도 울려 나오고 배 속에서도 떠들렸다.
그리다가 그 장사배 두 척이 마저 물에 가라앉고 나중에는 유희춘이 탄 배까지도 심히 기우뚱거리었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목을 놓아서 통곡하였다. 그러나 유희춘은 태연한 기색으로 그대로 앉아서
『나라에 죄를 짓지 아니한 몸을 어찌 하백(河伯=물귀신이 죽일 리 있을꼬.』
하고 조금도 놀래는 기색을 띠지 아니하였다.
과연 유희춘의 배는 그 모진 풍랑을 이기고 무사히 경성까지 당도하였다.
유희춘이 경성을 당도하니 산천 기후와 인정 풍속이 남방과 다르고 적적한 품이 진실로 되있는 자를 잡아매는 곳인 것일시 분명하였다.
그러나 유희춘은 모든 근심을 떨어 버리고 오직 머리속에 담아두었던 성경현전 가운데의 좋은 구절을 외어내어 그것으로써 책을 만들어 그곳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니 한 해 두 해 지남을 따라 글을 아는 자 늘어감은 물론이요 그중에는 특히 인격이 고결한 선비까지 생기고 학식이 고명한 선비가 생기니 경성 사람들은 유희춘의 은혜를 칭송함이 나날이 높아갔다.
유희춘의 부인 최씨는 그 가장을 생이별한 뒤 남으로 북으로 이끌리어 다니는 그 신세가 불쌍도 하거니와 피차 작별의 눈물을 흘린 지 어언 십년이 되나 소식조차 얻어들을 길이 없으매 인정으로나 의리로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쓰라린 회포를 과연 억제할 길이 없었다.
『오오. 이 몸은 분명 내 살덩이지만 이 살덩이는 유씨를 위하여 영영 바친 살덩이. 그러므로 이 몸은 잠시라도 유씨의 곁을 떠나지 못할 몸이 어언 십년이란 긴 세월을 떠났으니 이 무슨 인정이며 이 무슨 의리일꼬. 아서라 죽어도 유씨를 찾아가서 그 곁에서 약속대로 죽으리라!』
하고 끄레간발로 북방 산천을 짓밟으며 경성을 향하여 떠났다.
최씨 부인은 여러 날 만에 북청(北靑) 마천령(摩天嶺) 꼭대기에 올라 동해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애끓는 시(詩)를 지어 읊조리니 그 시에 하였으되
- 걷고 걸어 마천령에 오르니,
- 동해물 비친 끝이 역시 거울 같도다.
- 내 어찌타 멀고 또 먼 여기를 왔는고,
- 내 몸은 가벼웁고 삼종의는 중함이로다.
〈原文〉
- 行行遂至摩天嶺, 東海無涯鏡面平.
- 萬里婦人何事到, 三從義重一身輕.
이라 하였으니 원래 최씨 부인도 시문(詩文)이 능란한 여자이었다.
최씨 부인은 그 시를 지은 뒤 마천령을 넘어 마침내 경성 땅에 있는 유희춘의 적소(謫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가장과 같이 귀양살이를 달게 지날 새 광음이 무정하여 어느덧 십구 년이란 세월을 지내게 되었다.
7
편집유희춘이 경성에서 십구 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는 중 명종대왕께서 승하하시고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대통을 이으시게 되니 세월도 덧없거니와 인사도 무상한 것을 슬퍼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즉위하신 뒤 곧 유희춘을 부르사 대사헌(大司憲)을 삼으시고 겸하여 경연(經筵)에까지 입시케 하라시는 분부를 내리시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첫째는 유희춘이 죄가 없는 것, 둘째는 일찍 사제(師弟)간으로 지내던 것, 셋째는 그 학식(學識)을 사랑하신 것이었다.
유희춘이 뜻밖에 감사한 처분을 받고 그 적소로부터 돌아와 궐하에 사은(謝恩)하니 옛일이 한 꿈인 듯하였다.
유희춘은 진실로 왕은을 골수에 새기어 경연에 입시하여 선조대왕께 왕도(王道)를 지성으로 대당하게 되었다.
그 어느날 선조대왕께서 경연에 임어하사 시전(詩傳)의 석서장(碩鼠章)을 펴놓으시고 유희춘을 비롯하여 여러 유신(儒臣)에게 그 뜻을 물으실 새 때마침 쥐 한 마리가 어전을 지나갔다.
선조대왕께서 매우 의심쩍은 기색을 용안에 나타내시며
『쥐란 짐승이 저렇게 외화부터 못 생기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많거늘 어찌하여 육갑(六甲)에 쥐(子)로 십이간지(十二干支) 중에 첫 자리에 놓았는고, 경 등이 그 까닭을 아는가?』
하는 하교가 계셨다.
여러 문신들은 다만 황송한 태도를 지을 뿐이요 대답을 못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여러 문신들이 매우 난처하고 황송쩍게 생각하는 기색을 살피시고 유희춘을 향하사
『경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가?』
하시고 물으시며 유희춘의 기색을 살피시니 유희춘은 능히 대답하리라는 것은 믿으신 까닭이었다.
『그런 연유가 있습니다.』
하고 과연 유희춘은 그 까닭을 아는 양으로 대답하였다.
『응, 무슨 까닭인고.』
『다름 아니오라 쥐의 앞 발가락은 넷이요 뒷 발가락은 다섯입니다. 그러하온데 음양학(陰陽學)에 짝이 맞는 수는 음(陰)에 속하고 짝이 안 맞는 수는 양(陽)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넷은 음수(陰數)요, 다섯은 양수(陽數)입니다. 여러 짐승 중에 한 몸뚱이에 이와 같이 음양이 상반(相反)되는 짐승은 이외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하하데 원래 음기라는 것은 밤중이 되오면 사라지고 뒤미쳐 양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하와 쥐로써 열두 시 중에 첫 꼭대기에 놓아 자(子) 축(丑) 인(寅) 묘(卯) 등으로 나리게 되온 것은 음에 속하온 앞발을 내디딘 뒤에 양에 속한 뒷발을 내디디는 뜻을 취하온 것이오니 즉 밤 열두 시는 양기가 생기는 때인 까닭입니다.』
유희춘은 음양학의 이치를 들어서 쥐로 하여금 육갑의 첫 자리에 놓게 된 까닭을 자세히 설명하여 드렸다.
이 말을 들은 여러 문신들은 과연 유희춘의 학식이 뛰어난 것을 반복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더욱 유희춘의 학식을 귀엽게 통촉하사
『경은 과연 다문박식하도다. 내가 선생을 잘 얻었지!』
하시는 말씀으로 크게 칭찬하시고 뒤미쳐 또
『요사히 경서(經書)의 해석이 구구하거니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은 경의 박식이 아니면 능치 못할 일이니 경은 내 뜻을 받아서 힘쓸지어다.』
하시고 곧 유희춘으로 부제학(副提學)을 주시는 분부가 내리셨다.
그와 같이 큰 영광을 입게 된 것은 어전을 지나든 쥐와 큰 인연이 있었던 것이었다. 진실로 그 석서장의 강연이며 어전을 지난 쥐는 유희춘에 대하여 고마운 쥐이었다.
유희춘은 다시금 왕은을 사례할새 적소의 이십 년간이 한때 악몽이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최씨 부인의 마천령시(摩天嶺詩)를 한번 읊조리고 그 부인으로 더불어 영광의 기쁨을 큰 웃음으로써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