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41
41
편집시월 열흘날─
그 날 수양의 집에서는 경사(競射)회가 있다 하여 무사들을 불렀다.
사랑에서는 한명회와 홍윤성이 모여드는 사람들을 응대하고 후원에서는 주효까지 준비하여 놓고 백여 명이 모여서 일변 대작들을 하며 일변 사회의 예비 연습들을 하며 들썩하였다.
수양은 내실에서 나지 않고 묵연히 앉아 있었다.
부인과 단 둘이서─
어제까지도 이 일에 대하여 아무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급기 그 일을 결행하려는 오늘에 이르러서 차차 가슴이 무거워 왔다. 자기가 바야흐로 하려는 일은 나라를 위하여서요 사직을 위하여서라 하늘과 땅에 부끄러운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이 아직 조카님께 여쭈어 결재를 얻지 못한 일이요 또한 자기의 동생이 하나 걸려드는 일이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가?
단순히 그렇지도 않았다.
오늘 행하려는 일 자체가 그다지 마음 냅떠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사이 늘 사랑에서 한명회며 권남 등과 수군수군 의논은 하였지만 부인에게는 오늘이야 비로소 그 내막을 알리었다. 그러매 부인은 올라 뛰다시피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 기뻐하는 뜻을 알아보고 수양은 가슴이 선뜻하였다.
부인도 역시 지아버님의 참뜻을 모르고 자기 혼자의 해석을 내리고 기뻐하는 것이었다.
부인은 지아버님의 하는 일을 그릇 해석하여 지아버님은 장차의 국왕, 자기는 왕비가 될 그 예비 행동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렇다」고 입 밖에 나타내기까지는 않았다. 그것을 입 밖에 나타내는 것은 (아무리 내외 단둘의 의논일지라도) 역적 행위라 직접 말로는 하지 않지만, 그 기뻐하는 태도가 분명 장래의 왕비를 봉상하고 있는 것에 틀림이 없었다.
말─ 언어로 나타내지 않는 일이라 수양도 말로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알아들으리만치,
『장차 조카님이 장성하여서 친정을 하시기까지에 이 국가를 훌륭한 국가로 만들어서 조카님께 내어드리겠노라.』
는 뜻을 명백히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인은 역시 그 말의 뒤에는 다른 뜻이 포함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 뜻으로 지아버님의 등을 밀어 재촉하는 것이었다.
부인마저 이렇게 해석하니 수하인 한명회며 권남 배가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부인이며 수하 인물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 사람인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랴?
다른 사람이야 또 아무렇게 생각하든 간에 그다지 관심할 바가 아니지만, 만약 조카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으랴? 세상이 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카님인들 또 왜 그렇게 생각치 않으시랴?
조카님을 돕고자─ 조카님으로 하여금 부강한 국가의 임금이 되시도록 하게─ 일변으로는 한때 조카님이 위에 내리려는 박해를 없이하려는 고심이, 도리어 그 반대쪽으로 해석되어 지금껏 안심하고 계시던 조카님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지내시게 하면 이런 민망스러운 일이 어디 있나?
그러나 인제 중지하거나 뒷걸음칠 수는 없었다. 수양의 수하 가운데 입이 좀 경하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홍윤성이가 제 자랑을 하기 위하여 오늘의 계획의 일부를 누설을 한 모양이었다. 즉 수양대군은 오늘 정부의 못된 무리들을 일소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게 되며 홍윤성 자기는 훈련대장으로 내정이 되었노라는 말을 자랑삼아 하였다. 술기운에 에누리까지 합쳐서 한 이 호기에 소심한 어떤 사람은 겁이 나서 도망친 사람까지 있었다.
홍윤성이 호기를 뽑고 그 때문에 두선두선하는 기미를 본 한명회는 깜짝 놀라서 윤성을 꾹 찔러 가지고 조용한 데로 돌아갔다.
『여보 홍선달, 나으리께서 분부하시기까지 그냥 비밀히 해둘 게지 왜 그렇게 경망하오?』
『아무려면 알리지 않을 테요? 그래─』
『알려도 좀 있다가 알리지. 저 보오. 아, 벌써 슬금슬금 피하는 자가 있는 걸!』
아닌 게 아니라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도 몇이 있었다.
윤성이 벌꺽 주먹을 부르쥐었다.
『어느 놈이…… 내 당장에 박살을 하지.』
『여보. 그러면 소란만 더 커지지. 내 나으리를 모셔 내올게─』
이리하여 명회는 급히 내실로 하인을 들여보내서 수양을 사랑으로 청하였다.
수양은 먼저 사랑으로 나와서 사랑에 있는 무리들까지 데리고 후원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저편 사람들이 퍼진 소문으로 수양이 의심을 품고 있다는 평판이 적지 않게 높았던 위에 오늘 사회라 하여 백여 명의 무리를 모아 놓고도 주인 수양은 미시(未時)가 썩 지나도록 내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게다가 홍윤성의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들었기 때문에 모두 마음이 두선거리고 무슨 큰 변이나 생기지 않을까고 불안 가운데 싸여 있던 무리들은 수양을 보고야 겨우 좀 진정하고 수양이 앉은 호상(胡床)의 맞은편에 읍하고들 섰다.
수양은 한명회를 시켜 오늘 사람들을 모은 연유를 설명케 하였다.
황보인, 김종서 배가 불측한 마음을 품고 안평대군을 추대하고저 음모를 하고 있으니 그 무리들을 제거해야겠다. 오늘 사람들을 모은 것은 그 일을 결행키 위해서다. 수양대군이 친히 거느리고 지휘할 터이니 그 분부에 복종하자─
한명회는 이런 뜻을 말하였다.
드디어 두선거리고 당황해 하는 기색이 확연하여졌다. 몸을 빼서 이 집을 벗어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 집안에서나마 그다지 눈에 안 뜨이는 곳으로 숨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어서 대궐에 계달해서 금부에 분부하도록 하자는 사람, 혹은 순군에 알려서 일망타진하자는 사람, 또는 어명으로 대궐로 불러서 조사를 하자는 사람, 가지각색의 의견이 나왔다.
수양은 불쾌한 안색으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실에서도 불쾌한 일(부인의 오해)을 보고 마음이 불편하게 나왔는데, 여기 모인 무리들이 모두 제각기 모피하려는 기색만 보이니 매우 속이 좋지 않았다.
묵묵히 그 꼴들을 보고 듣고 있다가 입을 열 때는 수양은 자기의 불쾌한 기분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한서방. 다들 가라게.』
『나으리. 작사도방(作舍道傍)이면 삼년불성(三年不成)이라고 끝이 나지 않을 겝니다. 나으리께서 결정을 지으셔요. 그래야 끝이 나오리다.』
그 곁에서 홍윤성이 말을 끼었다.
『이런 일에는 얼른 손을 써야 합니다. 한서방의 말과 같이 나으리께서 직접 처단을 하서요.』
『그러기에 저자들은 돌려보내라는 것일세.』
수양은 먼지를 털면서 일어섰다.
『이미 사직에 바친 몸─ 내 스스로 당할 테니 모두들 비키거라! 고약한……』
분노에 불붙는 마지막 말을 내던지고, 수양은 그들을 남겨 두고 앞뜰로 돌아왔다.
중문 앞으로 돌아올 때에 누가 달려오면서 수양을 붙들었다. 획 돌아보니 부인이 갑옷을 가지고 따라온 것이었다.
『자, 이걸 입고 가세요.』
수하에 기르던 무리들에게 배반을 받은 불쾌감을 품고 나오던 수양은 부인의 정성이 한없이 고마웠다. 아까는 자기의 마음을 오해했기 때문에 불쾌히 생각하였던 부인이로되 지금 손아래 기르던 무리들이 배반할 때에 부인 혼자서 지아버님의 신상을 근심하여 갑옷을 지아버님의 몸에 입혀드리는 것이었다. 수양이 도포를 벗고 그 아래 갑옷을 입은 뒤에 다시 도포를 입을 동안 부인은 가동(家僮) 임운(林雲)을 내보내서 지아버님을 모시고 가게 하였다.
그때는 시월의 짧은 해는 벌써 서산으로 거진 그 자태를 감춘─ 황혼이었다.
황혼의 돈의문(敦義門) 근처에는 벌써 사람의 그림자도 드물었다.
돈의문 가까이까지 이른 때에 뒤에서 사람들의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마님. 저……』
임운이 이 기척을 듣고 수양께 아뢸 때는 수양도 그 소리를 듣고 품의 철퇴를 소매 안으로 잡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가까이 이르렀다. 보매 한명회 등이다.
수양이 몸을 떨치고 나가는 것을 보고 한명회는 권남이라 양정이라 몇몇 무리를 몰아 가지고 숨이 턱에 닿게 뒤를 따라온 것이다.
『나으리 혼자 가시면……』
『아무도 안 따르니 혼자라도 가야지.』
『설마 소인이야 안 따르겠습니까? 나으리 혼자야 어떻게 가셔요? 절재의 아들도 있겠거니와 문객들도 수두룩한 그 집에 나으리 혼자서─』
『고마우이. 나 혼자인들 어떠리마는 그럼 저 양정이, 홍순손이, 유수 세 명을 내가 데리고 감세.』
이런 때에 임하여 수양의 머리는 기민하게 활동하여 일호의 착오도 안 나게 지휘하였다.
『또 한서방(명회)은 홍선달(윤성)과 함께 여기 나를 기다리되 내가 돌아오기 전에 문(돈의문)을 닫으려거던 내 분부로 못 닫게 하고 또 다른 잡인은 문에 출입을 못하게 하고─』
그러고는 권남에게 향하여,
『자네는 순청(巡廳)에 가서 달손(達孫)에게 내 말로 순군을 그냥 멈추어 두게 하고─』
이번은 권연에게,
『자네는 내 집에 가서 오늘 왔던 사람들 아무도 못 나가게 붙들어 두고─ 자, 그렇게 하고는 나오도록 내 길보(吉報)를 기다리게.』
양정 등 장사들은 멀리 뒤따르게 하고 수양은 임운 단 한 사람을 데리고 돈의문을 나섰다. 수양의 주종이 집에 이른 때는 벌써 주위가 꽤 컴컴하였다.
종서의 집 솟을대문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몇 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양은 속으로 혀를 채었다. 자기가 이제 행하려는 일에 대하여 방해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이르러 보매 그것은 종서의 아들 승규(承珪)가 신사면(辛思勉)과 윤광은(尹匡殷)과 함께 무슨 한담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승규는 자기의 집 앞에서 말께 내리는 사람을 보고 누구인가고 와서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수양을 알아보고는 황공히 절하였다.
『춘부대감 계신가?』
수양은 가볍게 승규의 절을 받으면서 물었다.
『네이, 계시옵니다. 들어가 여쭈오리까?』
『여쭈어 주게.』
승규는 총총히 들어갔다. 들어갔다가 제 아버지를 인도하여 다시 나왔다.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줄 뻔히 아는 처지였다. 종서는 대문 안에 선 채로 달갑지 않은 듯한 태도로 수양께 인사를 하였다.
일찍이 빈청에서 큰 충돌까지 있었던 수양, 그 뒤 또 연경에 사행으로 떠날 때는 종서의 아들(승규)을 전당잡아 가지고 갔던 수양이, 이 두선거리는 시절에 더욱이 황혼을 타서 찾아온 것이 종서에게는 적지 않게 의외인 모양이었다. 대문 안에서 인사할 뿐 한순간 주저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왕의 아저씨요 선왕의 친아우님인 수양께 대한 대접으로도 잠자코 있지 못하겠는지,
『누추합지만 잠깐 들어오시오.』
말은 하였으나 그 태도가 얼음같이 차고 냉담하였다.
수양은 미소하였다. 아무 별 생각 없다는 듯이 명랑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흘렀다.
『문(돈의문)도 닫힐 시각이 임박했는데 들어갔다가는 큰일나게요? 대감께 잠깐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는데 잠깐만 틈을 내어 주십쇼.』
『무에오니까?』
수양은 종서에게 대답지 않고 승규며 사면 등을 돌아보았다.
『내 대감과 잠깐 내밀한 의논이 있는데 좀 피하거라.』
이 말에 승규 등은 약간 물러서는 듯하였다. 그러나 수양의 말에 대한 인사로 조금 물러선 뿐이지, 역시 조금 물러선 듯 만 듯한 정도였다.
수양은 눈을 들어 한 번 사면을 살폈다. 살핀 뒤에 다시 종서를 향하였다. 들릴까 말까 하는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대감, 내가 황혼을 타서 온 까닭을 짐작하시오?』
그 말의 이면에 섞인 다분의 위협미를 종서는 알아챈 모양이었다. 종서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나타났다.
『생이 어떻게 알리까?』
마치 구원을 부르짖듯 큰소리로 대답하며 한 걸음 뒤로 움쳤다.
그러나 움치던 종서의 옷소매는 수양에게 꽉 잡혔다. 잡히기 때문에 비츨하는 종서에게 수양의 두 번째 말이 내리씌우듯 나왔다.
『대감은─ 대감뿐 아니라 황보 정승까지도 이즈음 자주 안평을 찾아다니는 연유는 무엇이오? 왜 몰래 찾아다니며 병인(屛人)하고 밀담을 하고 하오?』
이 말에 종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와들와들 떨면서 수양의 손을 뿌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벌써 수양의 소매 안의 철퇴는 높이 들린 때였다.
『간물! 영묘와 현묘의 은총이 크거늘 감히 그런 생각을 낸단 말이냐? 간물을 보면 저절로 날뛰는 철퇴가 가만히 있지 않으련다!』
고함과 함께 종서의 머리에 정면으로 내리는 철퇴에 종서는 외마디 크게 부르짖으며 그 자리에 고꾸러졌다. 두 번째의 철퇴가 내리려 할 때는 (그다지 멀리 물러서지 않았던) 승규가 달려들며 제 아버지의 몸을 자기의 몸으로 덮어 막았다.
수양의 뒤에 등대하고 기다리던 임운도 칼을 뽑았다. 제 아비를 보호하는 승규에게로 임운의 칼은 힘차게 내렸다. 이때는 좀 멀리 뒤따르던 양정이며 홍순손, 유수 등도 달음질하여 달려온 때였다. 고꾸라진 종서의 부자에게 몽치는 어지러이 내렸다. 그 아래 종서 부자는 기다랗게 몸을 누이고 움직임 없이 되고 말았다.
『퍽! 퍽!』
철퇴가 내리는 육중한 소리가 몇 번 힘차게 났다. 첫 번 외마디의 부르짖음을 한두 번씩 낼뿐, 종서 부자에게서는 다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동안 수양은 두어 걸음 물러서서 철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땅에 엎쳐져 있는 부자를 굽어보았다.
─왜 딴 생각들을 하였느냐? 그만한 부귀와 그만한 영화면 넉넉하거늘 인제는 치사(致仕: 벼슬 사퇴)하고서 노후나 안락히 보냈으면 부족이 없겠거늘, 더 무슨 욕심을 내려 하였느냐? 세종께서도 말씀하신 바,
『너 아니면 이 일을 시킬 사람이 없다.』
하신 뜻을 옳게 해석하여, 좋은 지휘자 없으신 뒤에는 자기는 한낱 우용(愚勇)에 지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일찍이 물러섰더면, 육진 개척의 광휘 있는 영예는 영구히 청사 상에 빛날 것어어늘 당치 않은 욕망을 내었다가 와석 종신조차 못하고 오늘 이런 더러운 죽음을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꼴이냐? 푸들푸들 경련하는 부자의 시체를 굽어보며 수양은 잠연히 탄식을 하였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하나?
본시는 수하인 전부를 모아 부서(部署)를 갈라가지고 수양 자기를 반대하는 무리(전부 아홉 명이었다)를 같은 시각에 처치를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아서 수양 혼자서 김종서 하나만을 처치하였으니, 나머지 여덟 명(黃甫仁, 李穰, 閔伸, 趙克寬, 尹處恭, 李命敏, 元矩, 趙蕃)은 어떻게 처치하랴?
종서는 아래 깔리고 그 아들 승규는 아비를 보호하고자 그 위에 덧업힌 채 칼과 철퇴를 무수히 맞았는지라, 드디어 약간 경련하던 것까지도 없어지고 기다랗게 두 주검이 덧놓여 있을 뿐이었다. 신사면과 윤광은도 두 동강이에 나서 네 개의 고깃덩이가 따로 굴렀다.
이것을 보면서 잠깐 선후책을 생각하였다.
수양의 민첩한 머리에는 벌써 방침이 서게 되었다.
『인제는 돌아들 서자.』
이런 큰일을 저지른 사람 같지 않은 침착한 분부가 수양에게서 내렸다. 그리고 자기는 먼저 말께 (부축도 받지 않고) 올랐다.
돈의문까지 이르러 보매, 벌써 문이 닫힐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문은 그냥 열려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그 성벽(城壁) 위에는 한명회와 홍윤성이 서서 어둑컴컴한 성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수양 주종이 오는 것을 알아보고 내려와 맞는다.
『나으리 어떻게─?』
수양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한명회의 물음에는 대답지 않고 다른 말을 물었다.
『아까 내가 시킨 일은 다 어떻게 되었나?』
『그게야 분부대로 하왔습니다마는 나으리께서는?』
『내야 내가 몸소 간 이상에 실수가 있겠나? 여기 일을 내가 시킨 대로 했으면 어서 그 사연을 전하께 상계하고, 남은 적괴들을 법대로 처분해야겠으니 내 집에 있는 무리들도 이리로 부르거니와 순군도─ 순군은 그냥 멈추어 두었겠지?』
『네이 분부대로 하왔습니다.』
『그 순군들도 모두 이리로 부르고. 한서방(명회)은 내 의논할 일이 있으니 가지 말고 다른 사람들만 가게.』
수양은 홍윤성을 호위로 지키게 하고 한명회를 데리고 곁길로 들어가서 사람 기척 없는 곳에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한명회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생살부(生殺簿)는 준비됐겠지?』
『네 그건 됐습니다만 지금 전하께오서는 대궐에 계오시지 않습니다.』
『무얼? 그럼 어디 계신가?』
의외의 말이었다. 대궐에 계신 줄 알고 그 조건 아래 방침을 세웠거늘 그러면 어디 계신가?
한명회는 대답하였다.
『영양위 정종의 댁에 거동하오셨습니다……』
『언제? 아직 거기 계신가? 분명?』
『그럴 줄 사옵니다. 거기서 출어하오시면 즉시로 이리로 알리라고 해 두었삽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흠!』
수양은 한순간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은 벌써 새로운 대책이 생각이 났다.
『아무 데 계시고 간에 자네는 그 적괴들이 누구가 누군지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황보 이하 여덟 명 말일세.』
『소인은 한두 명밖에는 모르옵니다만 권생원(권남)은 다 짐작을 할 겝니다.』
『그럼 그렇게 하게. 나는 전하께 배알하고 간흉들의 흉계를 여쭈어서 친재를 받을 터이니 조사(朝士)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권생원(권남)을 시어소(時御所)의 대문 안에 장사 두어 명을 데리고 기다리게 해서, 참내하는 재상마다 배종한 하인은 대문 밖에 멈추어 두게 하고, 권생원은 매 사람마다 직함과 성명을 큰소리로 아뢰어 「모 직(職) 모(某) 참내요」 하고 외친단 말이어. 그러면 자네는 제2문에서 생살부와 대조해서 살려둘 사람이면 잠자코 인사하여 맞아들이고 없이 할 자이면 홍선달에게 눈짓해서 철퇴로 머리를 내려 부숴서 단매에─ 두 번 손질 않도록 단매에 거꾸러뜨리란 말일세. 불길한 소리가 들리시어 전하를 경동하시게 하지 않도록 꼭 단매에 꺼꾸러지도록 홍선달, 유선달(柳洙)등에게 단단히 잘 부탁하게. 알아듣겠나?』
『네 알겠습니다.』
『주의, 주의하게.』
『네!』
분부를 하고는 수양은 다시 말께 올랐다.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말을 몰아서 다른 무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왔다.
말께 앉아서 잠잠히 앞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양을 누가 볼진대, 그의 마음에 장차 큰일을 저지르려는 배포를 꾸미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아주 무심하고 태평한 태도였다. 이윽고 불린 무리들은 차례로 이르렀다. 먼저 수양댁에 있던 무리가 이르고 뒤이어 홍달손(洪達孫)의 거느린 순군이 이르렀다.
순군은 이미 수양의 지휘 아래 있는지라, 수양의 길을 막을 자는 없었다. 수양은 위의 당당히 순군에게 호위되어 시어소(時御所)인 영양위의 댁에까지 이르렀다. 놀라서 달려나오는 내금위(內禁衛) 봉석주(奉石柱)에게, 오늘 입직 승지(承旨)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고 최항(崔恒)이 입직했다는 대답을 듣고 수양은 최항을 급히 불러냈다.
최항에게 사연의 대강을 말하였다. 그러고 일이 급하므로 먼저 김종서만은 참(斬)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 그냥 있다는 말과 이것은 성재(聖裁)를 받아서 처치하여야겠으니 급히 전하께 이 뜻을 상계하여 곧 배알하도록 분부가 계시게 여쭈어 달라고 최항에게 부탁하였다.
최항도 이 의외의 사변에 두서를 차리지를 못하였다. 수양에게 채근을 받고 다시 또 채근을 받고야 간신히 들어가서 그 뜻을 아뢰었다.
최항의 상주에 왕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놀랐다. 꿈이나 아닌가, 무슨 착오나 아닌가고 당신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수양을 불렀다.
달음박질로 어전에 나온 수양─ 푹 그 자리에 부복하여 버렸다.
『전하!』
우러러보니 용안은 사색이 되었다.
아아, 수양 자기가 벌써 적괴 중의 수령인 김종서를 처치하였는데도 이렇듯 놀라시니 만약 돌연히 사변이 돌발하여 수양도 모르는 틈에 전하가 먼저 아셨다면, 어리신 마음에 얼마나 놀라시랴. 얼마나 가슴이 선뜩하셨으랴? 사전(事前)에 방지하기를 참으로 잘하였다. 사색이 되어 와들와들 떠시는 조카님─
『전하!』
『숙부님!』
떨리는 가운데서 간신히 옥음이 나왔다.
『전하! 안심합서요.』
『숙부님, 이 일을 어찌하리까. 숙부님 살려 주십쇼!』
수양은 침착한 소리로 복주하였다.
『전하. 수양이 전하를 모시옵니다. 수양이 불민하오나 전하를 모시오니 안심하오시오.』
왕은 안정을 수양에게로 옮겼다. 잠시를 (부복하고 있는) 수양을 굽어보았다. 그의 튼튼한 등판, 믿음성 있는 머리의 위에 한참 안정을 붓고 있었다. 드디어 옥음이 또 나왔다. 아까와 같은 낭패하고 떨리는 음성은 아니었다.
『숙부님, 이게 꿈은 아니지요?』
『왜 꿈이오리까!』
『아아─ 그 적당은 누구 누구오이까? 몇 명이나 됩니까?』
수양은 김종서 등 아홉 명의 두드러진 사람의 이름을 아뢰었다. 그 아홉 명의 전부가 안평 옹립의 무리는 아니었지만, 수양을 배격하자는 사람들이었다.
『전하, 수양 있사오매 푹 안심을 하오서요. 수양의 눈동자 검을 동안은 전하의 터럭 끝 한 올인들 다치게 하오리까? 만반사 신께 일임하시옵고 편히 침전에 드시옵소서. 오늘은 벌써 해도 졌삽고 길도 두선거리오니, 이곳서 이 밤을 쉬시옵소서. 내금위 봉석주 휘하의 금위병과 홍달손 휘하의 순군이 합세하여 겹겹이 시어소를 방위하옵는 위에, 적괴 중의 수령 김종서는 이미 처참되었사오니 아무 염려 마시고 신을 푹 믿고 계시옵소서.』
이 명쾌한 상주와 또한 수양의 믿음성 있는 태도에 왕은 약간은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사색으로 변하였던 용안에는 약간 순색이 나타났다.
『숙부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니까? 무슨 일이오니까?』
수양은 더욱 머리를 방바닥에 대었다. 작은 소리로 그러나 똑똑한 어조로 복주하였다.
『전하, 전혀 신의 탓이로소이다. 신 너무 경망한 탓이로소이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니까?』
수양은 이 하문에 극히 간단하게, 자기가 조카님을 애모하는 마음이 급급하여 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할 여유를 잃었고 그 때문에 저 사람들의 지위와 영화가 위태롭게 되어, 저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지위와 영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측한 생각을 품게 된 그 내력과 경과를 아뢰었다.
『신이 불민하고 경망하와 널리 뒷생각을 못한 탓이옵니다.』
『그게 무슨 숙부님의 탓이리까? 아아! 그러나 선묘의 고명까지 받은 몸으로─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가로 뻗는 것이오니까?』
『아룁기 황송하옵니다. 신 차차 전하께 신임을 받자옵자 좌상 이하의 그 사람들은 자기네의 힘이 꺾일 것을 두려워하와 벌써 딴 뜻을 폼기 시작한지는 오랬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 눈치를 알아채옵고 그들을 감시하기 엄중하옵기 때문에, 거사는 못하고 좋은 기회만 기다리면서 초조하게 주저하고 있삽던 것─ 신 연경에 사행으로 떠난 동안도 그네들의 자식들을 신이 전질해 가지고 갔기 때문에 꿈쩍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옵니다. 그것이 일자는 차차 길어지옵고 신의 감시는 그냥 풀리지 않으오매, 하릴없이 죽든 살든 간에 결말을 지으려고 근자에 더욱 밀의를 급급히 하와 형세 방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신도 드디어 이번의 거조에 나오게 된 바로소이다. 통촉합소서.』
왕은 잠자코 있었다. 있다가 간신히 들릴까 말까 하는 약한 소리로 말하였다.
『숙부님,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자(謨者)는 그들이라 하되 모자의 뒤에는 수령이 따로이 있을 게 아니오니까? 그 수령은 누구오니까?』
수양은 머리를 푹 숙였다. 아뢰지를 못하였다. 왕이 드디어 채근을 하였다.
『숙부님, 감추지 말고 알려 주십시오. 누가 수령이오니까?』
『전하, 그네들이 모자이옵고 모자 가운데 누구가 하나 수령이 될 것이옵니다. 신이 불민하와 그 점까지는 알아내지 못하왔습니다.』
『숙부님, 아니올시다. 나도 대궐 안에서 내관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로 들은 바가 있습니다. 기연가 미연가 해서 잠자코 있었지만, 오늘 숙부님의 말씀을 들으매 그 일이 전혀 황당한 헛소문도 아닌 듯하니 내가 들은 바 「수령」도 전혀 황당한 소리라고 돌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들은 바는 안평숙……』
계속하는 말을 수양은 당황히 막았다.
『아니옵니다. 천만에…… 전하 어떤 말씀을 누구에게 들으섰는지는 모르지만, 안평이 어찌 감히…… 천만의 말씀이옵니다.』
『아니, 그래도 내 그 소문을 들은 이래로 안평숙을 눈주어 보았는데 그 태도, 행동, 모두 의심하여 보자면 의심할 데가 부지기수옵니다. 첫째로……』
『전하, 아니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안평이 어찌 감히……』
『숙부님, 건방진 말이라고 꾸중을 하실지 모르지만, 기군(欺君)은 죄입니다. 숙부님, 분명 아니오니까?』
수양은 푹 머리를 방바닥에 대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말에는 아뢸 바이 없었다.
『어떻습니까? 숙부님 대답해 주서요.』
『신을 죽여 주십사.』
당신 스스로 기연가 미연가 하던 일─ 그러면서도 부인하고 싶던 일─ 엄하게 수양숙에게 그 대답을 채근하면서도 왕은 그래도 그냥 수양숙이 그 일을 부인하고, 부인할 수 있는 증거를 수양숙이 들어주기를 내심 기대하였던 것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랬는데 수양숙은 죽여 줍시사고 복죄를 하는 것은 안평숙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던 왕은 그만 맥이 탁 빠졌다.
『으음.』
아득하여지려는 정신을 왕은 간신히 걷어잡았다.
『숙부님?……』
내가 죽고 싶습니다 하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조카님이 기막혀 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수양도 기가 막혔다. 안평이 이 노물(老物)들에게 이용되었다는 점을 조카님께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국문(鞠問)이고 옥초고 모두 생략하여 버리고 장사들로 문간을 지켜서 벌할 자는 그냥 벌하여 멸구책(滅口策)을 쓰려던 것이 수양의 예정계획이었다. 이 나라의 신하들의 심리(수양이 잘 아는 바)는 아무리 수양이 멸구책을 쓴다 할지라도 그 사건을 왕께 일러바치는 것이 왕의 고임을 사는 것으로 알고 반드시 왕께 고자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수양이 정부의 실권을 잡고 이 고자질에 대하여,
『아마 몇몇 재상이 안평을 꾀러 다니기는 한 모양입니다마는 안평은 그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어름어름하여 두었던 모양입더이다.』
쯤으로 임금께 아뢰고 대신들을 누르면 (확증은 없는 일이라) 조카님의 마음을 과히 쓰고 아프게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이 미리 의심을 두셨다가 이번에 확증까지 나타났으니 어리신 마음에 얼마나 통분하시랴?
『죽고 싶소이다.』
말로까지는 안 나타내시나 마음으로 잡수신 그 고통─ 수양은 진실로 가슴이 쏘았다.
『전하.』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수양이 종내 입을 열었다.
『안평이 본시 약간 경망하와 성조 영묘(세종)께도 늘 꾸중을 들었습니다. 경망한 사람이 음흉한 노물들의 꼬임에 어름어름하기야 했겠습지만 설마 망령된 생각이야 품었사오리까? 신은 안평의 동기로서 한 어버이의 슬하에서 함께 길러 났사오매 그 마음보도 잘 아옵니다만, 안평 본시 성질은 경망하지만 망령된 생각은 결코 낼 위인이 못 되옵니다. 전하 자세히 들으옵소서. 망령된 생각을 안 낼 인물이 아니옵고 못 낼 인물이옵니다. 전하 안심하소서.』
그러나 왕의 마음에 생긴 불쾌감은 잘 삭지를 않는 모양이었다. 수양의 드리는 말씀에는 답이 없이 불쾌한 안정을 멀리 창밖(닫혀 있는)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양은 어서 이 안평의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말을 꺼내었다.
『전하, 적당의 수괴 김종서는 일이 급하옵기 미리 참해 버렸삽거니와 황보인, 이양 등 거괴 칠팔 명은 그냥 남아 있사옵니다. 그 무리들이 수괴 김종서 처참한 일을 듣사오면 무슨 불측한 일을 행할는지 예기치 못할 바오니, 그 소식 듣기 전에 명패로 부르시와 궐하에 치죄 하오시기를 바라옵니다.』
왕은 대답이 없었다.
수양은 참을성 좋게 한참을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왕이 대답하였다.
『숙부님, 당임(當任)해 주십쇼. 나는─ 난─ 난─』
뒷말이 끊어졌다. 머리를 좀 딴 데로 돌릴 뿐이었다.
그러나 수양은 말하지 않는 조카님의 뒷말을 알아들었다. 나는─ 난─ 가슴 아프외다 하는 말이었다. 수양도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야 아뢰었다.
『신이 당임하오리다. 전하는 침전에 드오서 쉬옵소서. 밤도 해시가 가까왔습니다.』
사직이 안정되면 영화는 조카님께로─ 만약 불행 일에 착오가 생기면 뒷감당은 수양 자기가─ 이렇게 마음먹고,
『그럼 신은 사랑으로 나가서 소문 퍼지기 전에 일 처리를 하오리다.』
하고 어전을 하직하였다.
『나도 하회를 기다리리다.』
물러 나가는 수양에게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초롱으로 길을 비취는 영양댁 하인의 인도로 수양은 사랑으로 나왔다. 부마 영양위는 왕과 함께 내실에 있고 사랑은 승지 최항이 혼자 있었다.
수양이 들어와 앉으매 청지기 방에 잇던 한명회와 권남이 분부를 받으러 따라 들어왔다.
따라와서 영외에 읍하고 서 있는 그들을 모른 체하고 수양은 아랫목에 내려가 앉았다.
수양의 마음은 차차 무겁고 괴로워 왔다.
조카님의 심경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기 한량없었다. 대신─ 대신 가운데도 선묘께 고명 받은 대신이 전부 당신을 배반하였다. 가장 신임해야 할 그들이 단지 허욕 때문에 선묘의 은총을 배반하고 선묘의 유명까지도 배반하니 원통하고 분한 마음 이를 데 있으랴.
대신들은 그래도 또한 남이로다. 친숙(叔)인 안평이 당신을 배반한 것은 얼마나 가슴 쓰리시랴. 부귀, 영화, 무엇이 부족하길래 그보다 무엇을 더 바라서 당신을 배반하는가? 인신으로서의 가장 가멸코 가장 귀한 자리에 있는 안평숙이 그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당신을 배반하였나?
이런 고통은 가장 마음 굳고 억센 사람으로도 참기 힘든 일이다. 용하게 참으셨다. 그 고통을 남에게 안 보이고 혼자 참으시느라고 얼마나 안타까와 하실까?
이런 때에 왕비라도 있어서 위로해 드린다면 그래도 약간의 위안은 되겠거늘, 넓고 쓸쓸한 대궐을 혼자 지키시고 어떠한 가슴 아픈 일이 계실지라도 위로 없이 혼자서 겪고 참고 지내셔야 할 고적하신 조카님─
선묘의 일년상이나 지나면 (예의며 격식을 다 무시하고라도) 왕비라도 영입하여, 고적한 대궐의 동무를 지어 드리자, 오늘 밤 장차 이 집에서 실행될 참극─ 수양 자기가 당임할 일도 할 수만 있으면 좀 연기하여 왕의 모르는 동안에 실행하고, 실행한 뒤에 사필 상주에 그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왕께 그 일을 실행하여 어리신 조카님의 가슴을 더 선뜩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의 일부분으로 김종서를 벌써 참했으니, 밝은 날 사대문이 열리기만 하면 그 소문은 쫙 장안에 퍼질 것이요, 그 소문이 저쪽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모피책 어떤 흉계를 꾸며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매 오늘 밤 안으로 일을 끝막음을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왕은 그냥 깨어서 하회를 기다리겠다 하니, 이미 왕께 그 일단이 알려진 이상은 끝막음까지 하여 안심을 드려야 할 것이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안심드릴 수 있는 그 끝막음─
수양은 눈을 들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수하인들은 그냥 영외에 읍하고 서 있다.
『최승지!』
수양은 발치에 읍하고 서 있는 최항을 불렀다.
『네이.』
『명패로 대신들을 부르게, 어명일세.』
『대신들 다 부르오리까?』
『문안에 있는 대신 재상 전부─ 그러고 한서방!』
수양은 한명회를 불렀다.
『네이.』
『한서방은 아까 내가 시킨 대로─ 잊지 않았지?』
『잊을 리가 있습니까?』
『아까 시킨 그대로 하게.』
『네이!』
한명회는 권남, 홍윤성 등과 함께 사랑 밖으로 나갔다.
한명회 등이 나간 뒤에 수양은 다시 최항을 불렀다.
『최승지, 이제 재상들을 부르지만 그 뒤에 여기서 생기는 일은……』
수양은 여기서 일단 말을 끊고 최항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특별나게 엄한 어조가 아니요 명령적 어조도 아니로되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끊어서 똑똑히 하는 수양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혹은 비상한 일, 놀라운 일일지도 몰라. 간담이 서늘한 일이 생겨날지도 몰라, 그러나 이건 어명으로 수양이 어명을 받들고 하는 일이니 영감은 잠자코 보고만 있게. 공연한 입을 놀렸다가는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온화하고 순조롭게 하는 말이지만 본시 천품으로 위압력을 타고난 데다가 또한 비상한 명령이라, 최항은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억제하고,
『알았습니다.』
고 여쭙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금군 불러서 재상들을 부르도록 차비하게.』
『네이!』
수양의 분부를 듣고 최항이 대청에 나서서 내금위 봉석주를 불러 지휘를 할 동안, 수양은 안석에 몸을 기대며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생각할 동안 오늘 이곳에서 처참될 재상들의 얼굴이 걸핏 걸핏 수양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인 황보인─ 호인이기 때문에 김종서에게 넘어서 딴생각 품었다가 그 탓으로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없는 영상 황보인이 가장 가엾었다. 한 포의(布衣)에서 몸을 일으켜 영영공공 오늘날의 지위를 쌓아 올렸던 그는 남의 탓으로 와석 종신도 못하는구나! 그 언제 수양 자기가 빈청에서 김종서의 멱살을 잡고 세찬 주먹을 한 번 내릴 때 몸을 벌벌 떨면서 나오지 않는 웃음을 연방 웃어가며 수양을 말리던 그의 모양─
아아! 욕심이란 것은 과연 무서운 것이로구나.
황보인도 황보인이려니와 또 안평─ 어린 조카님이 가엾지도 않더냐? 왕께서 비록 벌써 아셨다 해도 수양은 애써 안평을 보호하고 싶었다. 조카님도 안평의 행위를 괘씸히 생각은 하시겠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골육이시매 구태여 엄벌하실 생각까지는 없으실 것이다. 수양이 변명해 드리면 조카님도 수양의 의견을 좇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재상들이라는 것이 괴악하고 망측하여 안평의 죄목을 정면으로 들고 나서서 떼쓰면 이 일을 장차 어찌하랴?
재상들이 말썽을 내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서둘러서 안평을 근도(近島) 찬배쯤으로 끝막음하도록 하게 하자. 재상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 안평을 벌주어, 재상들의 말썽을 미리 방지하자. ─이윽고 우참찬(右參贊) 정인지(鄭麟趾) 참내라는 권남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잠겼던 수양은 고요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