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와 회견한 이튿날 수양은 신숙주를 숙주의 집으로 찾았다.

안평(安平)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한명회와는 단지 그 꾀─ 지혜를 의논하였다. 유문(儒門)의 출신인 신숙주와는 의리와 도덕이 겹친 꾀를 의논하고 싶었다.

신을 거꾸로 신으며 뛰어나오는 신숙주와 함께 조용한 산정(山亭)으로 돌아갔다. 먼저 한훤의 인사 한두 마디가 지나간 뒤에, 수양은 한 무릎 다가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뜻을 알아챈 숙주는 마주 다가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양은 숙주의 양손을 자기의 양손으로 꽉 잡었다.

『신서장(申書狀)!』

연경(燕京)을 다녀왔으면 인제는 서장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수양은 그냥 숙주를 「서장」이라 부르고 하였다.

『?』

『이즈음 집현전이나 성균관(成均館) 소년들 사이에 어떤 말이 돌아가나?』

숙주는 대답치 않았다. 난처한 질문이었다. 바른대로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또한 감추기도 어려웠다.

『응? 어디 바른대로 말해 보게.』

수양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나 있었다. 기쁨을 나타내는 미소도 아니요 우습다는 미소도 아니요 또는 고소(苦笑)도 아니요─ 호기심으로 기다린다는 미소였다.

숙주는 주저하다가 매우 말하기 어렵다는 듯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였다.

『철없는 소년들의 말을 무엇을 괘념하리까?』

『그러기에 바른대로 알려달란 말이 아닌가? 내가 그런데 괘념하겠는가?』

『철없는 사람들의 말이 나으리께서 대보(大寶: 옥새)를 엿보신다고요.』

수양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는 한층 더 농후해졌다.

『고마울세. 자네 입에서 내 뜻에 맞을 거짓말이 나올 줄 알았더니 들은 대로 말해 주니 참으로 고마울세.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인이야 나으리의 뜻을 모르오리까? 다시 안 물으실지라도……』

『그것은 그렇다 하고……』

수양은 자기의 손에 잡혀 있는 숙주의 양손을 마치 장난하듯 주무르면서 말소리를 더 낮추었다.

『안평대군의 일이 걱정일세그려. 저를 어쩌나? 절재의 심술로 자기 혼자 죄를 쓰겠나? 안평대군을 물고 들어 갈겔세 그려. 그 아니 탈인가?』

숙주는 얼른 수양의 낯을 한번 쳐다보았다. 숙주의 생각으로는 안평이고 누구고 간에 이번의 숙청에 방해되는 사람은 일소하여 버리고 싶었다. 조정의 인심이라는 것을 잘 아는 숙주는 지금 어린 왕이 위에 임한 이 기회에 한몫 보려는 사람이 비단, 모모뿐이 아님을 짐작한다. 수양이라 하는 튼튼한 기둥이 버티고 있기에 표면 소동이 못 일어나지, 만약 수양이 나약한 사람이든지, 혹은 수양이 엄중히 감시하고 있지 않으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울근불근 덤벼들 사람이 많다. 어린 왕이고 그 위에 또 한 아직 총각이니, 이 왕의 신상에 여차하는 일이 생기는 날에는, 숙행(叔行)이 당연히 나설 차례라 좀 눈치가 든 어떤 숙(叔)들은 딴 궁리 수군거리는 형적이 보였다. 어느 숙에게는 누구가 문객으로─ 누구에게는 누구가 문객으로 필요 이상 자주 출입하는 형적이 뻔하였다. 안평을 찾는 사람들은 이 나라의 정승들이라, 가장 형세가 급박할 뿐이지 안평이 없어지면 그 뒤가 또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수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양의 그 명민한 관찰안도, 동기간의 문제에는 무디게 되는 모양으로 수양의 생각은 지금 안평은 (본시 주착없는 사람이라) 뒤에서 충돌하는 무리들 때문에 놀림감에 놀아나지, 뒤에서 딴 사람의 충동만 없으면 잠잠하여 버릴 것이고, 태평 무사한 세월이 되리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수양이 지금 말하는 바 「이 아니 딱한가」 하는 것은 안평까지 걸려들 것을 근심하는 뜻에 틀림이 없었다.

형님의 마음이 이러하거늘 동생은 사사에 형님을 배반하는 행위만 하는가? 일전에도 수양과 조용히 의논을 하던 때에 또 이 문제가 난 일이 있었다. 그때 숙주는 수양께,

『죄에는 수(首)와 종(從)이 있삽고 수범이 있사오면 종범은 면사(免死)를 하게 되는 게라,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면사키 위해서 수범을 반드시 불어 넣으리다. 대군은 면치 못할 줄로 생각되옵니다.』

하였더니 수양은 질색을 하며 엄책을 하였다.

이 수양의 심경을 잘 아는지라 숙주는 수양께,

『만약 안평대군을 온전히 불문하오면 국인이 승복치 않을 터이오니, 논죄하는 마당에서 어명을 받자와 가까운 어느 섬에 찬배를 보냈다가 국인들이 잊어버린 때쯤 해서 소환(召還)하오시도록 하오면 최상책일까 하옵니다.』

하여 그렇게 하기로 내정하였다.

어차피 일을 결행하는 이상에는 이편에서 먼저 손 써야지 저편이 먼저 손쓰는 날에는 되려 뒤집혀 잡혀 이편이 패배를 할 것이니 이편에서 먼저 손쓰되 중십일(重十日)인 시월 열흘날로 기일을 정하고,

결행하는 세목 절차에 관해서는 한명회에게 꾀를 꾸미게 하게 하고,

지금의 정부에서 뽑아 쓸 사람과 제거해 버릴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신숙주에게 맡기기로 하고,

장사패 지휘에는 홍윤성(洪允成)이 담당하기로 하고,

─이렇게 대개 담임 사항까지도 내정이 되었다.

그러나 장차 결행할 일이 어떤 일인지며, 또 그 결행한 날짜가 어느 날인지는 두드러진 몇몇 사람밖에는 알지 못하였다. 단지 수양의 놀라운 지배력과 감화력이 그들에게 작용되어 수양의 지휘에는 무조건으로 복종하려는 사상만이 굳게 뿌리박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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