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양/21
21
편집며칠째 끈끈하고 불쾌한 더위가 계속되었다. 새벽녘이라는 시각은 좀 서늘해지는 법이지만 이 공식을 무시하고 새벽녘도 도무지 서늘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조반 때 좀 지나서는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비는 비지만 냉기를 퍼쳐 주는 줄기찬 비가 아니요 침침하고 음산한 기분만 더 늘려 주는 시원치 못한 비였다. 더위는 줄지 않고, 날은 캄캄하고 비는 내리고─역한 날씨였다.
빈전(殯殿)은 더 축축하고 더 침침하였다. 향 연기 서리어, 지척을 분간키 어려울 지경이었다. 정신까지 혼미하여질 듯하였다.
열두 살의 어린 신왕(新王─瑞宗)은, 그새 여러 날 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지냈기 때문에 극도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끄덕 끄덕 조을고 있다. 신왕을 모시고 있는 뭇 종친(宗親)들, 종친 중의 장로 수양.
웃 항렬도 백부 양녕이 있기는 하지만 양녕은 나이도 많은 위에 태종대왕의 처분으로 공공한 시사는 근신하는 신분이라 대행전하(文宗)의 아우님이요 신왕의 숙부되는 수양이 지금의 왕실의 장로였다.
수양은 눈을 조금 구을려서 존귀한 조카님의 용안을 엿보았다. 끄덕끄덕 조을고 있는 용안에 사무친 피곤, 번질하게 내돌은 기름 땀, 눈의 주위가 푹 들어가고 검푸르게 야위었고, 뵙기 민망하도록 덜미었다.
수양은 합죽선을 내어서, 급격하지 않게 용안에 바람을 보내어 드리었다. 그리고 내관을 손짓으로 불러서 사방침을 가져오게 하여, 몸소 가만히 붙안아 오른편 팔을 들게 하고 내관에게 사방침을 그리로 갖다 대개 하였다.
신왕은 당신의 몸을 누가 건드리므로, 한 순간 눈을 뜨는 듯하였으나, 그냥 왼손으로 수양이 부쳐 드리는 부채바람이 상쾌하여 다시 안정을 내려뜨리며 사방침에 옥체를 의지하였다.
수양은 살근살근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적적하십니까.
이 아직 어머님 그리워할 유년에 양친을 다 저 세상으로 보낸 어린 상감의 심경을 생각하면 수양은 눈물겨웠다.
이 세상에 떨어지면서 어머님을 잃어버린 가련한 고아─
그 뒤는 어머님을 대신하여 사랑해 주시던 할머님마저, 이 왕이 겨우 여섯 살 잡히던 해에 떠났다. 그로부터 겨우 사 년이 더 지나서는, (어린 왕손이 가장 응석을 부릴 수 있었고 그 응석을 늘 즐겁게 받아 주시던) 할아버님(世宗)까지 잃어버렸다.
아버님은 좀 어려웠다. 자애보다 감독이 더 많았다. 애무보다 꾸중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어린 왕손에게는 이 세상에 단 한 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 분마저 지금 또한 이 고아를 버리고 떠나니, 신세 외롭기 어찌 이루 다 말하랴.
수양은 잘 안다. 이 어린 상감이 수양 자기를 무서워하고 꺼리는 것을…… 형왕 (신왕께 아버님) 생존 중에 늘 수양 자기를 삼가라는 교훈을 듣고 자란 왕이라, 언제든 자기를 보면 의포(畏怖)와 아첨의 기색이 넘치던 분이다. 지금 아버님까지 잃었으니 얼마나 외롭고 주위가 무서우랴.
그 심경을 생각하면 수양 자기가 물러 비켜 드리고 싶다.
그러면 약간은 안심을 드릴 수가 있을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국가 다난하고 더욱이 왕실이 하도 창성하여, 어린 왕 한 분만을 동그랗게 내어놓고 굳센 보호의 손이 없으면, 차차 무슨 화단이 생겨날는지를 알 수 없다. 자기의 종실 장로라는 지위와 억센 팔로써 튼튼히 보호하지 않으면 어린 왕의 신변이 위태롭다.
─전하여. 고독하신 전하여.
무상한 인간 세계─
할머님(太宗妃)의 재궁(梓宮)을 모신 것이 지금부터 겨우 육 년 전.
아버님(世宗)의 재궁을 모신 것이 또 겨우 이년 전. 지금 벌써 또 형님의 재궁을 모시게 되었구나.
─네가 보좌해라. 너를 믿는다.
─어린 조카도 네가 보좌해야 한다.
아버님 말년에 자기게 늘 하시던 말씀. 이 유촉 가운데서 형님은 종내 보좌를 해드리기 전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대상(大祥)을 방패로 굳이 안 듣기 때문에 종내 보좌할 기회─ 날짜가 없는 동안에 승하하니 어찌할 수가 없는 천명이다.
형님께 못해 드린 보좌를 어린 조카님께는 반드시 이곱, 삼곱으로 하리라. 혹은 조카님은 당신의 아버님(文宗)이 늘 훈계하시던 말씀을 좇아서 수양 자기를 꺼리고 멀리하려 하고 두려워하고 피하려 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괄시를 탓하지 않고 자기의 힘껏, 지혜껏, 지식껏, 보좌해 드리리라. 일년, 이년, 삼 년, 사 년, 오 년…… 아무런 괄시 박대도 기탄치 않고 그냥 충심으로 모시는 동안에는 오랜 날짜를 지나면 조카님도 그 오해를 푸실 날이 있겠지. 그럴 날이 이르겠지.
경오년 이월 아버님의 환후 급변하시자, 대신들에게보다도, 재상들에게보다도 다른 종친들에게보다도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수양에게, 형왕을 도와라, 어린 조카를 보호해라, 고 부탁하신 그 부탁을 저버리지 말자.
결코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늘에 계오신 아버님의 영을 안 심케 하리라. 장차 그곳서 아버님을 뵈올 때, 자랑하는 심경 으로 뵈올 수 있게, 만난을 물리치고 어리신 조카님을 보호 하고 붙들리라.
부채질을 하면서 간간 용안을 엿보면, 피곤한 용안, 겁에 띄운 용안, 피지 못한 용안, 어머님의 몸에서 이 세상에 떨어진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내 불행에 이은 또 불행으로, 그 성장(成長)이 호화로운 궁중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치가 한창의 열두 살임에도 불구하고, 시들고 초췌한 양 눈물겨웠다.
수양 자기네 형제가 아버님의 슬하에서 자랄 때에, 마음껏 피고 마음껏 벋었던 그 기상과 이다지도 판이할까.
같은 대궐, 같은 왕손……
『덜컥!』
밖에서 나는 무슨 소리에, 왕은 흠칫하며 안정을 떴다.
『아아!』
하품, 기지개─
『좀 더 주무세요. 오죽이나 피곤하실까. 사방침에 좀 더 옥체 편히 의지하시구.』
수양이 권하였다.
왕은 용안을 음성 들리는 편으로 돌렸다. 겁에 뜨인 안정, 다시 더 돌이켜 안평(수양의 다음 아우)을 스치어 그냥 더 돌았다. 종조부 양녕에게까지 미쳐서 약간 안심의 표정이 보였다.
『조부님.』
양녕을 찾았다.
『오오.』
양녕은 황급히 그의 늙은 몸을 무릎을 짚으며 일으켜서, 어전 가까이 와서 부복하였다.
『불러 계시오니까?』
『조부님, 비가 그냥 오지요?』
『네이, 오나 보옵니다.』
『아아, 지루두 해라.』
『장마가 질까 봅니다.』
『…………』
사방침에 의지하고 있는 왕의 손가락은 포르르 끊임없이 떨린다. 쇠약 때문이다.
수양은 무언히 부채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조카님의 떨리는 손가락, 꺼지는 듯한 호흡, 가슴 쓰라린 일이었다.
고귀하게 탄생하여 고귀하게 자란 조카님……
우르르면 우르를수록 애처롭고 민망하였다. 왜 형님은 이다지도 빨리 떠나시어서 당신의 아드님으로 하여금 이런 답답한 지경에 빠지게 하였다.
조카님의 정경을 우(哭)는 것과 동시에 떠나신 형님의 일생이 또한 통곡하고 싶도록 동정이 갔다. 형왕이 겨우 수(壽) 서른 아홉이라는 짧은 일생은, 왕자(王子)답지 못하고 왕자(王者)답지 못한 고적한 생애였다.
태조, 이씨 조선을 창건한 뒤에 이 형님이 진정한 의미의 초대(初代)의 왕자(王子)였다.
태조는 본시 고려의 장수였다. 쉰여덟이라는 만년에야 임금이 된 분이다. 그 다음의 공정왕(恭靖王─正宗)도 역시 고려의 신하로서, 서른 여섯에야 비로소 왕자(아버님 태조 이씨조선 창건)가 되고 마흔둘에 임금이 되었으며, 제 삼대 태종도 역시 고려의 신하로 태어나서 스물여섯에야 왕자가 되고, 스물 여덟에야 임금이 되었다. 그 뒤, 제 사대 세종(대행왕과 수양의 아버님)은 이씨조선 창업 이후에 탄생하였으매 본시부터 왕자로는 탄생하였지만 제삼 왕자이기 때문에, 일곱 살까지는 다만 왕자 일 따름이지 세자가 못 되어, 장래의 왕위는 기약할 수가 없던 바이다.
승하한 이 형님이야말로 본시부터 왕실의 적장(嫡長)으로 탄생하여 이씨조선 최초의 「진정한 세자」로 대위에까지 올랐던 분이다.
그러나 일만 가지의 복(福) 가운데 으뜸인 건강을 못 가진 불행한 분이었다.
그 위에 또 가정적으로 끝끝내 낙을 보지를 못하였다. 두 번 맞아들이었던 세자빈(세자빈)을 다 폐하지 않을 수 없는 불행, 그 뒤 세 번째의 빈 (처음은 궁녀로 들였다가 두 빈이 폐하게 되면서 세자빈이 되었다)도 겨우 십 년 뒤에 왕자(어린 신왕)를 탄생하고는 저세상으로 갔다.
본시 허약하여 그다지 여인에 관심치 않던 위에 세분의 빈(嬪)과 다 불행한 결말을 지었는지라, 다시는 빈을 맞지 않고 쓸쓸한 자선당(慈善堂─동궁처소)을 어린 세자를 기르며 홀로이 지켰다. 왕세자로 삼십 육 년의 의로운 삶을 살다가 부왕 승하 후에 보위에 올랐으나 왕비는 종내 맞지 않고 그냥 홀몸으로 이년 조금 남짓이, 그러고는 당신도 또 승하하였다.
세자생활에서 왕 생활─이 존귀한 삶을 끝끝내 인생 최대의 복(福)인 건강을 잃고, 인생 최대의 낙(樂)인 짝을 모르고 지낸 이 형님의 일생은 「비극의 삼십구 년」이랄 밖에는 없었다.
외로운 일생을 보낸 형왕.
고달픈 장래를 맞을 신왕(端宗).
이 부자간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할 때에 수양의 입에서도 한숨이 나왔다.
『전하, 식혜라도 부르오리까? 갈하시지……』
수양은 작은 소리로 조카님께 여쭈어 보았다.
왕은 수양의 말소리에 비로소 삼촌이 부채질하고 있던 것을 안 모양이었다.
『아이, 숙부님, 덥지 않습니다. 부채질 그만 두서요. 언제부터시라구, 팔 고단하시게, 민망스러워.』
『신은 괜찮습니다. 식혜 부르오리까?』
『그만 두서요. 야, 자치(自治)야 좀 이리 온.』
신왕은 내관을 불렀다.
『자치야, 네 대군께 부채 받어서 제조부(諸祖父)며 숙을 부쳐 올려라.』
─괜찮습니다.
─신들은 덥지 않습니다.
대군들에게는 일제히 사양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자치는 부채를 수양에게서 받아서, 임금께 부쳐 드리었다. 고요하기 때문에 일직선으로 하늘로 올라가던 향로의 연기는 부채 바람에 어즈러이 흩어진다.
『수양 숙부님!』
왕은 안정을 고요히 수양에게 돌리었다.
『네이?』
『저─저─』
용안에 눈물 한 줄기.
『이즈음 두구두구 생각하는데, 천리(天理)가 너무도 불공평해요』
『…………』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는 모르나, 용안의 눈물이 수양에게서도 눈물을 자아내려 하였다. 수양은 푹 머리를 숙였다.
간신히 한 마디─
『네……』
『왜오니까?』
곁에 있던 안평이 끼었다. 왕은 한순간 안평숙을 보았다.
안평숙의 묻는 말에 수양숙께 대답하기도 어렵고, 수양숙께 시작한 말을 안평숙께 대답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안평은 양녕 조부께로 돌아갔다.
『조부님, 하늘은 왜─ 왜─』
또 더듬었다. 눈물이 또 한 줄기.
『왜─ 대행(大行)전하껜 동궁으루 삼십육 년 수를 비시구, 내겐 단─』
드디어 참지 못하여 쿡 느끼었다. 그 가운데서,
『이년─하구 겨우 석 달 더……』
수양에게서도 종내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병풍을 격하여 있던 내명부(內命婦)들의 느끼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전하.』
수양이 느낌을 억지로 감추고 아뢰었다.
『─대행전하께서 남은 수를 다 전하께 물려 드렸습니다.
전하, 동궁으로 오래 계시기보다 지존(至尊)으로 천세만세 하시라고 먼저 가셨습니다.』
수양의 뒤를 양녕이 받았다.
『전하의 수, 신보다 십 백배 하소서.』
안평도 한 마디, 금성(錦城)도 한 마디, 모두 한 마디씩 위로의 말씀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위로는 왕의 구슬픈 심경을 위로치 못하는 모양으로, 왕은 드디어 마리(머리)를 사방침에 엎드리며, 흐득흐득 느끼기 시작하였다.
소년 부마(駙馬) (왕의 매부) 영양위 정종(寧陽尉 鄭悰)은 한편에서 코를 골면서 잔다.
밖에서는 장맛비 가랑잎에 내리는 소리가 우수수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