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제11장
인간 체화와 동시에 품부족 문제, 기타
편집시방 사랑에서는 일흔두 살 먹은(가칭 예순다섯 살 먹은) 증조할아버지가, 열다섯 살 먹은 애인과 더불어 그처럼 구수우하니 연애 흥정이 얼려 가고 있겠다요. 그리고 안에서는…….
경손이가 아까 안방에서 열다섯 살 동갑짜리 대부 태식이와 같이 싸우며 놀리며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아랫목에 가 버얼떡 드러누워 뒹굴고 있었습니다.
다른 식구는 죄다 물러가고, 야속히 배짱 안 맞는 대고모 서울아씨와 지지리 보기 싫은 대부 태식이와 그 둘이만 본전꾼으로 달랑 남아 있는 안방에, 가뜩이나 서울아씨는『추월색』으로 아닌 이를 앓고, 태식은 조선어독본 권지일로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고, 이런 부동조(不同調)의 소음 속에서 그 애 경손이가 그 소갈찌에 천연스레 섭쓸려 있다니 매우 희귀한 현상입니다. 고양이와 개와 원숭이와가, 싸우지 않고 같은 울안에서 노는 격이랄까요.
경손이는 실상 어떤 궁리에 골몰해서 깜빡 잊어버리고 그대로 처져 있는 것입니다.
골몰한 궁리란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모로코'의 재상연이 있고, 또 중일전쟁의 뉴스 영화가 좋은 게 오고 해서 꼭 구경은 가야만 하겠는데, 정작 군자금이 한푼도 없어, 일왈 누구를, 이왈 어떻게 엎어 삶았으면 돈을 좀 발라 낼 수가 있을까, 이 궁리를 하던 것입니다.
뚱뚱보 영감님……? 안 돼!
건넌방 겡카도리……? 안 돼!
제 조모 고씨가 집안 사람 아무하고나 싸움을 하자고 대든대서 진 별명입니다.
서울아씨……? 안 돼!
숙모……? 안 돼!
대복이……? 글쎄? 에이, 고 재리 깍쟁이! 제가 왜 제 돈도 아니면서 그렇게 치를 떨까!
어머니……? 글쎄.
하니 그 중에 가능성이 있자면 아무래도 대복이와 제 모친입니다. 대복이는 대장대신이요, 제 모친은 모친이니까요.
종차 삼십 년이나 사십 년 후에 가서야 백만 원을 상속받을 장손일 값에, 시방은 단돈 이십 전이나 삼십 전이 없어 이다지 머리를, 그 연한 머리를 썩입니다그려.
경손이는 두루 두통을 앓는데, 서울아씨는 이를 생으로 앓느라 퇴침을 돋우 베고 청을 높여,
"각설이라 이때에……."
하고 양금채 같은 목에다가 멋이 시큰둥하게,
"……하징 아니헤야……."
하면서 콧소리를 양념 쳐 흥을 냅니다.
그건 바로 음악입니다. 얼마큼이나 음악적이냐 하는 것은 보장키 어려워도, 음악은 분명 음악입니다.
인간은 번뇌가 있으면 노래를 하고 싶어진다고요. 번뇌까지 안 가고라도 마음이 싱숭생숭하게 되면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물론 슬퍼도 노래를 부르고 기뻐도 노래를 부르고, 또 춤을 추기도 하고 하기는 하지만, 그 중의 한 가지 마음 싱숭거릴 때에 부르는 노래는 새짐승이 자웅을 찾느라고 묘한 소리로 우는 것과 가장 공통된, 동물의 한 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나 인간은 그 동물적인 본능을 보다 맹목적으로 이용을 하는 제이의 본능이 있답니다.
철들어 가기 시작한 총각이 봄날 산나무를 하러 가면서 지겟목발을 장단삼아,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 들어를 온다……."
하고 멋등그러지게 넘깁니다.
또 궂은비 축축이 내리는 가을날, 노랫장이나 부를 줄 아는 기생이 제 방 아랫목에 오도카니 꼬부리고 누워 손가락장단을 토옥톡,
"약사 몽혼으로 향유적이면……."
하면서 다뿍 시름 겨워 콧노래를 흥얼흥얼 흥얼거립니다.
무릇 그 총각이면 총각, 기생이면 기생이 깊숙한 산중이나 또는 아무도 없는 제 집의 제 방구석에서, 대체 누구더러 들으라고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그게 가로되, 흥이라구요. 새짐승이 자웅을 후리려고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총각은 거기 어디 촌 처녀색시더러 들으란 노래고, 기생은 또 저대로 제 정랑(情郞)더러 들으란 노래고.
이렇듯 본능에서 우러나서 노래를 부르기는 짐승이나 인간이나 매일반이지만, 그 다음이 다르답니다.
인간은 제가 부르는 제 노래에, 남은 상관 않고 우선 제가 먼저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촌 계집애가 들어를 주는지 않는지, 어느 놈팽이가 들어를 주는지 않는지, 그런 것은 생각도 않는답니다.
그런 타산은 도시에 의식 가운데 떠오르지도 않고, 괜히 그저 마음이 싱숭생숭하길래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괜히 그저 불러지는 대로 한마디 부르고 보니까는 어떻게 속이 더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지는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일언이폐지하면 소위 흥이라는 게 나는 거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방 서울아씨와 이야기책『추월색』도 꼬옥 그렇습니다.
공자님은 가죽 책가위가 세 번이나 해지도록 책 한 권을 가지고 오래 읽었다더니만, 서울아씨는『추월색』한 권을 무려 천독(千讀)은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아직도 놓지를 않는 터이니까 앞으로 만독을 할 작정인지 십만독 백만독을 할 작정인지 아마도 무작정이기 쉽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아씨는 책 없이, 눈 따악 감고 누워서도『추월색』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르 내리 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게 천하 명작의 시집(詩集)도 아니요, 성경책이나 논어 맹자나 육법전서도 아닌 걸, 글쎄 어쩌자고 그리 야속스럽게 파고들고, 잡고 늘고 할까마는, 실상인즉 서울아씨는『추월색』이라는 이야기책 그것 한 권을 죄다 외우는만큼 술술 읽기가 수나롭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취하는 점이 없습니다.
그는 무시로 마음이 싱숭생숭할라치면 얼른『추월색』을 들고 눕습니다. 누워서는 처억 청을 높여 읽는데,
"각설이라 이때에……."
하고 양금채 같은 목으로 휘청휘청 멋들어지게 고저와 장단을 맞춰 가면서 (다리와 몸을 틀기도 하면서) 가끔 시큰둥한,
"……하징 아니헤야……."
조의 콧소리로 양념까지 치곤 합니다. 이렇게 멋지게 청을 돋워 읽고 있노라면, 싱숭거리던 속이 어떻게 더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지는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일언이폐지하면 그 소위 흥이라는 게 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촌 나무꾼 총각이 육자배기를 부른다든가, 또는 기생이 궂은비 오는 날 제 방 아랫목에 누워 콧노래로 수심가를 흥얼거린다든가 하는 근경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지 않다구요.
그러므로 노래가 아무것이라도 제게 익은 것이면 익을수록 좋듯이, 서울아씨의『추월색』도 휑하니 외우게시리 눈과 입에 익어, 서슴지 않고 내려 읽을 수가 있으니까, 그래 좋다는 것입니다. 결단코『추월색』이라는 이야기책의 이야기 내용에 탐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바이면 차라리 책을 걷어치우고 맨으로 누워서 외우는 게 좋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건 또 재미가 없는 것이,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안 끌고는 뛰기가 싱겁고, 광대가 동지섣달이라고 부채를 들지 않고는 노래가 헤먹고 하듯이, 서울아씨도 다 외우기야 할망정 그래도 그 손때 묻고 낯익은『추월색』을 펴들어야만 제대로 옳게 노래하는 흥이 납니다.
진실로 곡절이 그러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이야 이를 앓는다고 흉을 보거나 말거나? 또 오뉴월에도 이야기책을 차고 누웠다고 비웃음을 하거나 말거나 아무것도 상관할 바 없고 사시장철 밤낮없이 손에서『추월색』을 놓지 않는 서울아씨요, 그래 오늘 저녁에도 일찌감치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헤야 드디여 돌아오징 아니……."
이렇듯 서울아씨의 추월색 오페라가 적이 가경에 들어가고 있는데, 이짝 한편으로부터서는 도무지 발성학상 계통을 알 수 없는 버스 음악 하나가 대단히 왁살스럽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비― 비―가, 오―오…… 모― 모―가, 모―가, 모―가……."
태식이가 방 한가운데 배를 깔고 엎디어, 조선어독본 권지일, 비가 오오, 모가 자라오를 읽던 것입니다.
좀 민망한 비유겠지만 발음이 분명치 못한 것까지도 흡사 왕머구리(큰개구리) 우는 소리 같습니다.
그러나 열심은 무서운 열심입니다. 재작년 봄에 산 조선어독본 권지일 그것을 오로지 이 년하고도 반 년 동안 배워 온 것이 이 대문인데, 물론 그전엣치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한편으로 잊어버려 가면서도 끄은히 읽기는 읽으니까 그게 열심이던 것입니다.
"비― 비―가, 오―오. 비―가 오―오. 모― 모―가, 모―가…… 이잉, 잊어버렸저……! 경손아."
"왜 그래?"
"잊어버렸저!"
"잊어버렸으니 어쩌란 말야?"
"……"
"고만둬요! 제―발…… 그거 한 권 가지구 도통할 텐가? 대학까지 졸업할 작정인가!"
"누―나?"
"……"
"누―나?"
"……"
"누―나―?"
"왜 그래?"
"잊어버렸저!"
"비가오오모가자라오."
"잉?"
"참 너두 딱하다……! 비가 오오― 모가 자라오― 그래두 몰라?"
"히히…… 비―가 오―오, 모―가 자―자―라 자―라오, 히히…… 비―가 오―오, 모―가 자―라 자―라오."
"에이 귀따가워!"
경손이는 비로소 제가 어디 와서 있던 줄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마루의 뒷문에 연한 툇마루를 타고 뒤채의 큰방인 제 모친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 방에는 경손의 숙모 조씨까지 건너와서 동서가 바느질을 하고 앉아 소곤소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경손이가 달려드는 설레에 뚝 그칩니다.
"넌 네 방에서 공부나 하던 않구, 무엇 하느라구 앞뒤루 드나들구 이래?"
경손의 모친 박씨가 지날말로 나무람 겸 하는 소립니다.
"놀구 싶을 땐 책 덮어 놓구서 맘대루 유쾌하게 놀아야 합니다요!"
경손이는 떠벌거리면서 바느질판 한가운데로 펄씬 주저앉습니다. 바느질감이 모두 날리고 밀리고 야단이 납니다.
"아, 이 애가 웬 수선을 이리 피워…… 공분 밤낮 꼴찌만 하는 녀석이, 놀 속은 남보담 더 바치구……."
"어머니두……! 내가 공부 못한다구 우리집 재산이 딴 데루 갈까……? 태식이 천치는, 비가 오오 모가 자라오, 그거 두 줄 가지구 한 달을 배워두 천석꾼인데…… 아 그런데 이 경손 씨가 만석 상속을 못 받어요?"
"넌 어디서 중동이만 생겼나 보더라……! 쓸데없는 소리 말구, 공부 잘해!"
"낙제만 않구 올라가믄 돼요…… 학교 성적 좋은 녀석 죄다 바보야…… 아 참, 우리 작은아버진 말구서…… 그렇죠? 아즈머니……."
무슨 일인지, 경손이는 이 집안의 그 많은 인간 가운데 유독 그의 숙부 종학 하나만은 존경을 합니다.
"말두 말아!"
조씨가 그러잖아도 뚜― 나온 입술을 좀더 내밀고 쭝긋거리면서, 경손의 말을 탓을 하던 것입니다.
"……세상, 그런 못난 사람두 있다더냐?"
"우리 작은아버지가 못나요? 난 보니깐, 우리집에선 제일 잘나구 똑똑합디다. 단, 경손이 대감만 빼놓구서, 하하하…… 나두 우리 작은아버지 닮아서 이렇게 똑똑해……! 그렇죠, 어머니? 내가 똑똑하죠?"
"옜다, 이 녀석! 까불기만 하는 녀석이, 어디서……."
"하하하하……."
"사내가 오즉 못나믄 첩 하날 못 얻어 살구서……."
조씨는 혼자 말하듯 구느름을 내다가, 바늘귀를 꿰느라고 고개를 쳐듭니다. 새초옴한 게 벌써 새서방 종학이한테 귀먹은 푸념깨나 쏟아져 나올 상입니다.
"첩 얻으믄 못써요! 태식이 같은 오징어(연체동물) 생겨나요, 시들부들…… 그렇죠? 아즈머니!"
"말두 말래두……! 첩을 백은 못 얻어서, 새장가 든다구 조강지처 이혼하려 들어? 그게 못난 사내 아니구 무어라더냐……? 그리구서두 머? 경찰서장……? 흥, 경찰서장 똥이나 빨아 먹지!"
"흥! 작은아버지가 경찰서장 할 사람인 줄 아시우? 참 어림없수!"
"그래두 그럴 양으루 법률 공부 배운다믄서?"
"말두 마시우. 큰사랑 뚱뚱할아버지, 헷다방이지……! 아주, 작은손자가 경찰서장 될라치믄 영감님이 척 뽐낼 양으루! 흥!"
"너 이 녀석,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지망지망 해라?"
경손의 모친은 경계하는 소립니다. 그 소리가 시할아버지 귀에라도 들어가고 보면 생벼락이 내릴 테요, 따라서 말을 낸 경손이도 한바탕 무슨 거조든지 당할 터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조씨는 연방 더 전접스럽게,
"워너니 자기가 진작 맘 돌리기 잘했지야…… 주제에 무슨 경찰서장은……."
"아즈머니두……! 아즈머니두 경찰서장 등대구 있었수? 그랬거덜랑 얼른 이혼하시우. 경찰서장 오백 리 갔수!"
"아, 저놈이 못 할 소리가 없어!"
경손의 모친이 눈을 흘기면서 나무랍니다.
"어머니두! 이혼하는 게 왜 나뿐가? 내가 여자라믄 백 번만 결혼하구 백 번만 이혼해 보겠던걸…… 헤헤…… 그런데 참, 어머니!"
"듣기 싫여!"
"아냐, 저 거시키…… 서울아씨 시집 안 보내우!"
"매친 녀석!"
"뭘 그래! 시집 보내예지. 난 꼴 보기 싫여!"
"이 녀석이 시방 맞구 싶어서……."
"내버려두시오! 그 애야 다아 옳은 말만 하는걸…… 난 그리잖어두 맘 없는 집살이에, 덮친 디 엎친다구, 시고모 등쌀에 생병이 나겠습디다…… 난 그 아씨 꼴 아니 봤으면 살이 담박 지겠어!"
"오―라잇! 우리 아즈머니 부라보……! 아 그렇구말구요. 서울아씬 시집 보내구, 아즈머니두 이혼하구서 새루 결혼하구, 응? 아즈머니!"
"네 요놈, 경손아!"
"네에?"
"너, 정녕 그렇게 까불구 그럴 테냐?"
"하하하…… 그럼 다신 안 그러께요…… 그 대신 오십 전만……."
"망할 녀석?"
경손의 모친은 일껏 정색을 했던 것이, 경손이가 더펄대는 바람에 그만 실소를 해버립니다.
"응? 어머니…… 오십 전만……."
"돈은 무엇에 쓸 양으루 그래?"
"하, 사내대장부가 돈 쓸 데 없어요? 당당한 백만장자 윤직원 윤두섭 씨의 맏증손자 윤경손 씨가!"
"난 돈 없으니, 그렇거들랑 큰사랑 할아버지께 가서 타 쓰려무나?"
"피― 무척 내가 이뻐서 돈 주겠수…… 어머니 히잉― 오십 전마아안……."
"없어!"
"이 애야, 그럴라 말구……."
조씨가 옆에서 꼬드기는 소립니다.
"……서울아씨더러 좀 달래려무나……? 넌 그 아씨 시집 보내 줄 걱정까지 해주는데, 그까짓 돈 오십 전 아니 주겠니? 오십 전은 말구 오 원, 오십 원두 주겠다!"
물론 서울아씨가 미워라고 시방 그 쑥 나온 입술로 비꼬는 솜씨지요. 그런데 경손이는 거기 귀가 반짝 하는지 눈을 깜작깜작 고개를 깨웃깨웃,
"서울아씰……? 시집 보내 준다구……? 하하, 오옳지, 옳아!"
하면서 무릎을 탁 치고 일어서더니,
"됐어, 됐어……! 왜 아까 그때 바루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어쩐 말이냐!"
하고 거드럭거리고 나갑니다.
박씨는 아들놈 등뒤를 걱정스럽게 바라다보면서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하다가 그만둡니다.
분배를 놓던 경손이가 나가고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하자, 두 동서는 제각기 제 생각에 잠겨 한동안 바느질 손만 바쁩니다.
"때그르르."
마침 박씨가 굴리는 실패 소리에 정신이 들어 조씨는 자지러지듯 한숨을 내쉽니다.
"형님은 그래도 좋시겠수……."
"……"
"아즈바님이 따루 계시긴 하세두, 다아 마음은 아니 변허시구…… 다아 저렇게 똑똑한 아들두 두시구…… 난 전생에 무슨 업원이 그대지두 중했는지, 팔자가 이 지경이니……! 차라리 죽은 목숨만두 못한 인생……! 그래두 우리 어머니 아버진, 날 이 집으루 시집 보내믄서, 만석꾼이 집 지차 손주며느리래서, 호강에 팔자에, 모두 늘어질 줄 알았을 테지!"
"그런 소리 하지 말소!"
박씨가 위로의 말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박씨는 이 동서를 위로해 줄 말이 딱합니다.
번번이 마주 앉으면 노래 부르듯 육장 두고서 하는 꼭 같은 푸념이요 팔자 탄식인 걸, 그러니 인제는 듣기도 헤먹거니와 이편의 위로엣 말도 밤낮 되풀이하던 그 소리라 말하는 나부터가 헤먹습니다.
"……난들 무슨 팔자가 그리 우나게 좋다던가……? 남편이 저럭허구 다닐 테믄 맘 변하나 안 변하나 매일반이지…… 자식은 하나 두었다는 게 벌써 에미 품안에서 빠져나간걸…… 그러니 동세나 내나 고단하긴 매양 같지, 별수 있는가……? 다같이 부잣집 이름 좋은 종이요 하인이지…… 대체 이 집은……."
안존하던 박씨의 음성은 더럭 보풀스러워지면서, 아직 고운 때가 안 가신 눈이 샐룩 까라집니다.
"……무얼루, 무엇이 만석꾼이 부잔고……? 이 옷 주제 허며 손이 이게 만석꾼이 집 며느리들이람? 끌끌……."
미상불 동서가 다 영양이 좋지 못한 얼굴입니다. 손은 작년 겨울에 터진 자국이 여름내에 원상 회복이 못 된 채 북두갈고리 같습니다.
박씨는 여태도 인조항라 고의를 입고 있고, 조씨는 역시 배 사먹으러 가게 실렁한 검정 목 보일 치마를 휘감고 있습니다.
박씨는 저네들의 주제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방 안 짐을 둘러봅니다.
화류 의걸이에 이불장에 삼층장에 머릿장에 베갯장에 양복장에, 이칸 장방이 그득, 모두 으리으리합니다.
"……저런 게 다아 무슨 소용인구……! 넣어 두구 입을 옷이 있어야 저런 것두 생색이 나지…… 저런 걸 백 개 들여노니, 얼명주 단속곳 한 벌만한가! 아무짝에두 쓸디없는 치레뻔…… 난 여름부터 고기가 좀 먹구 싶은 걸 못 얻어먹었더니……."
동서의 위로가 아니고 어쩌다가 제 자신의 구느름이 쏟아져 나와서 마악 거기까지 말이 갔는데, 헴 하는 연한 밭은기침 소리에 연달아 미닫이가 사르르 열립니다.
옥화가 왔던 것입니다. 창식이 윤주사가 올 봄에 새로 얻은 기생첩, 그 옥화랍니다.
기생으론 그다지 세월도 없었으나 어느 여학교를 이 년인가 다녔고, 그런데 어디서 배웠는지 묵화를 좀 칠 줄 아는 것으로, 그 소위 아담한 교양이 윤주사의 눈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 생김새는 도저히 아담함과는 간격이 뜹니다.
도량직한 얼굴이면서 어딘지 새침한 바람이 돌고, 그런가 하고 보면 생긋 웃는데 눈초리가 먼저 웃습니다.
이 새침새가 남의 조강지처로는 아무래도 팔자가 세겠는데, 마침 고놈 눈웃음이 화류계 계집으로 꼭 맞았습니다. 다시 그의 흐뭇하니 육감적으로 두터운 입술은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구요.
옥화는 이 큰댁엘 자주 드나들어,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의 귀염을 일쑤 받고, 외동서 조씨의 성미를 맞추기에 노력을 하고, 서울아씨나 이 두(남편의) 며느리와도 사이가 좋습니다. 능한 외교수완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러고서도 기생으로 세월이 없었다니 좀 이상은 합니다마는, 실상인즉 그러니까 윤주사 같은 봉을 잡았지요.
옥화는 언제고 여학생 차림을 합니다. 기생의 여학생 차림이란 어딘지 좀 빤지르르한 게 암만해도 프로 취(職業臭)가 흐르기는 하는 것이지만, 당자들은 그걸 교정할 용기가 없어, 옥화도 그 본에 그 본입니다. 그래도 옥화 저더러 말하라면 기생은 일시 액운이었었고, 인제 다시 예대로 여학생 저를 찾은 것이랍니다.
"두 동세분이 바누질을 하시는군?"
옥화는 영락없이 눈으로 웃으면서, 깍듯이 며느리들더러 허우를 하여, 어서 오시라고 일어서는 인사를 맞대답합니다.
"……그새 다아 안녕허시구?"
옥화는 손에 사들고 온 과자 꾸러미를 내놓으면서 주객 셋이 둘러앉습니다.
"무얼 오실 때마다 늘 이렇게…… 허긴 잘 먹습니다마는!"
박씨가 치하를 합니다. 미상불 옥화는 언제고 빈손으로 오는 법은 없습니다.
"잘 자시니 좋잖우? 호호…… 그런데 저어, 새서방 소식이나 들었수?"
이건 조씨더러 가엾어하는 기색으로 묻는 말!
"내가 그이 소식을 알다간 서쪽에서 해가 뜨라구요?"
"원 저를 어째……! 부부간에 의초가 그렇게 아니 좋아서 어떡허우!"
"어떡허긴 무얼 어떡해요……! 날, 잡아먹기밖에 더 허까!"
"아이, 숭헌 소릴……."
옥화는 박씨가 풀어 놓는 비스켓을 저도 하나 집어넣으면서,
"……그 얌전한 서방님이, 어째 색신 마댄담……? 그 아우 형제가 둘이 다아 얌전하기야 조옴 얌전한가……! 아이 참, 어디 나갔수?"
"누가요?"
박씨는 무슨 소린지 몰라 뚜렛뚜렛합니다.
"누구라니 새서방…… 경손 아버지 말이지……."
"그이가 오기나 했나요?"
"오기나 하다께……? 아, 온 줄 몰루?"
"내애."
"어쩌나!"
"왔어요?"
"오기만……! 아까 저어, 아따 우미관 앞에서 만난걸…… 그리구 언제 왔느냐니깐 아침차루 왔다구, 그 말꺼정 했는데!"
"그래두 집엔 아니 왔어요!"
"어쩌나……! 저거 야단났군! 호호."
"야단날 일이나 있나요……! 아마 볼일이 바빠서 미처 집엔 들를 틈이 아니 난 게죠."
속은 어떠했던지 박씨는 그래도 이만큼 사람이 둥글고 덕이 있습니다.
세 여자는 잠깐 말이 없이 잠잠합니다. 시방 박씨는 남편 종수가 분명 어디 가서 난봉을 피우고 있으려니, 그래도 올라는 왔으니까 얼굴이라도 뵈기는 하겠지, 이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고, 옥화는 옥화대로 긴한 사무가 있어, 인제는 이만해도 마을 나온 증거는 만들어 놓았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정작 가볼 데를 가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리고 조씨는, 옥화의 백금반지야 금반지야 다이아반지가 요란한 고운 손길이며 진짜 비단으로 휘감은 옷이며를 골고루 여새겨 보면서, 논다니요 첩데기란 아무래도 이렇게 제 티를 내는 법이니라고, 에이 더럽다고 속으로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 속의 속을 캐고 볼 양이면 조씨는, 옥화가 그렇듯 좋은 패물이며 값진 옷을 입고 이쁘게 단장을 하고서 한가로이 마음 편히 놀러 다니는 팔자가 부러워 못 견딥니다.
부러웠고, 부러우니까는 오기가 나고, 그래 앙앙한 오기가 바싹 마른 교만을 부리던 것입니다.
이편, 경손이는 다뿍 불평스런 얼굴을 우정 만들어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옵니다.
서울아씨와 태식이의 두 가수(歌手)는 여전히,
"……헤야, 하징아니 하고오!"
의『추월색』오페라와,
"비― 비―가 오―오. 모―모―가 모―가 자―자―라 자―라오."
의 맹꽁이 음악을 끈기 있게 쌍주하고 있습니다.
경손이는 심상찮이 불평스런 얼굴은 얼굴이라도, 일변 매우 조심성 있게 서울아씨가 누웠는 옆에 가 앉습니다.
"그게 무슨 책이죠?"
"{추월색』이란다."
서울아씨는 긴치 않다고 이맛살을 약간 찌푸립니다.
그러나 경손이는 더욱 은근합니다.
"퍽 재밌죠?"
"그렇단다!"
"그럼 나두 한번 봐예지!"
경손이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한참 있다가 또,
"……전서방, 저녁 다아 먹었나……? 대고모가 아까 차려 내보낸 게 전서방 밥상이죠?"
서울아씨는 속이 뜨끔했으나 겉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경손을 바라봅니다.
"그렇단다…… 왜 그러니?"
"아뇨, 밥 다 먹었으믄 나가서 돈 좀 달라구 하게요."
"……"
서울아씨는 아까 대복이의 저녁 밥상을 차리러 나서느라고 저도 모르게 일으킨 이변을 비로소 깨달았으나, 그래서 속이 뜨끔했던 것이나, 경손이가 막상 눈치를 채지는 못한 것 같아서 적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안심은 할 수가 없어 좀더 속을 떠보아야 하겠어서, 슬며시 오페라를 중지하고 짐짓 제 말 나오는 거동을 살피려 드는데, 경손이는 연해 혼자말로 두런두런,
"에이! 고 재―리, 깍쟁이!"
"……"
"고거, 죽어 버렸으믄 좋겠어!"
"……"
"그 중에 그 따위가 병신이 지랄하더라구, 내 참!"
"……"
"아, 글쎄 대고모!"
"왜?"
"아, 대복이녀석이, 말이우……."
"그래서?"
"내 참……! 내 인제, 마구 죽여 놀 테야!"
"아―니, 왜 그래? 무어라구 욕을 하든?"
"욕은 아니라두, 욕보다 더한 소리지 머!"
"무어랬길래 그래?"
"아, 고 병신이, 밤낮 절더러, 대고모 말을 하겠지! 망할자식 같으니라고!"
서울아씨는 얼굴이 화끈 다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무어라구 내 말을 한단 말이냐?"
"머, 별소리가 많아요! 느이 대고모님은 참 얌전한 부인네라구, 그런 소리두 하구…… 또오……."
"또오?"
"퍽 불쌍하다구…… 소생이 무언지, 소생이라두 하나 있었더라믄 그래두 맘이나 고난치 않았을걸, 어쩌구 그런 소리두 하구……."
"주제넘은 사람두 다아 보겠다! 제가 무엇이 대껴서 날 가지구 그러네저러네 해?"
말의 뜻에 비해서는 악센트가 그다지 강경하진 않습니다. 대복이를 꾸짖자기보다, 경손이한테 발명이기가 쉽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내 인제, 다시 그따위 소릴 하거던 마구 그냥 죽여 놀 테에요!"
"……"
"큰사랑 할아버지께 고해서, 아주 밥통을 떼어 놓던지…… 망할자식! 상놈의 자식이!"
"경손아?"
서울아씨는 긴장한 태를 아니 보이느라고 내려놓았던『추월색』을 도로 집어 들면서 경손이를 부르는 음성도 대고모답게 상냥하고도 위의가 있습니다.
경손이의 대답 소리도 거기 알맞게 대단히 삼가롭습니다.
"너, 애여 남허구 시비할세라?"
"내애."
"대복이가 했단 소리가, 다아 주저넘구 하긴 하지만, 넌 아직 어린애니깐 남하구 시빌 하구 그래선 못써요……! 좀 귀에 거실리는 소릴 하더래두 거저 들은 숭 만 숭하는 것이지, 응?"
"내애."
"그리구, 그런 되잖은 소리 들었다구, 이사람 저사람한테 옮기지두 말구…… 그따위 소린 한 귀루 듣구 한 귀루 흘려 버릴 소리 아냐?"
"내애, 아무더러두 얘기 아니 허께요!"
경손이는 푸시시 일어서고, 서울아씨는 도로 오페라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밥이나 다아 먹었나? 작자가!"
경손이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미닫이를 열다가 짐짓 머뭇머뭇하는 체하더니,
"대고모?"
하고 어렵사리 부릅니다.
"왜?"
"저어, 저녁이라 말하기가 안돼서 그러는데요!"
"그래?"
"내일 대복이한테 타서 도루 가져다 드리께, 저어, 돈 이 원만!"
"돈은 이 원씩이나 무엇에 쓰니?"
"좀 살 게 있어서 그래요!"
서울아씨는 더 묻지도 않고 일어서더니 의걸이를 열쇠로 열고는 속서랍에서 일 원짜리 두 장을 꺼내다가 줍니다.
대체 서울아씨가 다른 사람도 아니요, 경손이한테 돈을 이 원씩이나 주다니, 그것 또한 이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저녁처럼 경손이가 서울아씨를 존경(?)하고 서울아씨는 경손이한테 상냥하게 굴고 한 적도 물론 전고에 없는 일이고요.
"내일 대복이한테 타서 드리께요?"
경손이는 두 손 받쳐 돈을 받고, 서울아씨는 그 소리를 도리어 나무람하되,
"내가 네게다가 돈 취해 줄 사람이더냐……? 그런 소리 말구, 가지구 가서 써요!"
다 이렇습니다.
가령 받고 싶더라도 아니 받을 생각을 해야지요. 살쾡이가 닭 물어다 먹고서 갚는 법 있나요.
경손이는, 네에 그러겠습니다고, 더욱 공손히 대고모 안녕히 주무세요란 인사까지 한 후에 마루로 나오더니 안방에다 대고 혓바닥을 날름, 코를 실룩, 눈을 깨끗, 오만 양냥이짓을 다 합니다.
구두를 신노라니까 등뒤에서 마루의 괘종이 아홉시를 칩니다.
아홉시면 지금 가더라도 '모로코'밖에 못 볼 텐데 어쩔까 싶어 작정을 못 한 대로 나가기는 나갑니다. 아무튼 나가 보아서 영화를 보든지, 영화는 내일 밤으로 미루고 동무를 불러 내어 그 돈 이 원을 유흥을 하든지 하자는 것입니다.
안대문은 잠겼고, 그래 사랑 중문으로 가는데 큰사랑에 춘심이가 와서 있는 것이 미닫이의 유리쪽으로 얼핏 들여다보였습니다.
경손이는 잠깐 서서 무엇을 생각하다가, 잠자코 대문 밖으로 나가더니 조금 만에 되짚어 들어오면서,
"삼남아?"
하고 커다랗게 부릅니다. 삼남이는 벌써 십오 분 전에 잠이 들었으니까 대답이 없고, 대복이가 건넌방 앞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여기 춘심이라구 왔수? 어떤 여편네가 대문 밖에서 좀 불러 달래우!"
경손이는 대단히 성가신 심부름을 하는 듯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려 놓고는, 이내 돌아서서 씽씽 나가 버립니다.
대복이가 전갈을 하기 전에 춘심이는 제 귀로 알아듣고 뛰어나와서 납작구두를 신는 둥 마는 둥 대문 밖으로 달려나옵니다.
대복이나 윤직원 영감은 경손이가 하던 소리를 곧이를 들은 건 물론이요, 춘심이도 깜빡 속아 제 집에서 누가 부르러 온 줄만 알았습니다.
춘심이는 대문 밖으로 나가서 문등이 환히 비치는 골목을 둘레둘레, 왔으면 어머니가 왔을 텐데 어디로 갔는고, 하고 밟아 나옵니다.
마침 옆으로 빠진 실골목 앞까지 오느라니까, 경손이가 그 안에서 기침을 합니다.
춘심이는 비로소 경손한테 속은 줄을 알고는 골딱지가 나려다가 생각하니 반가워, 해뜩해뜩 웃으면서 쫓아갑니다. 경손이도 말없이 웃고 섰습니다.
"울 어머니 어딨어?"
"느이 집에 있지, 어딨어?"
"난 몰라……! 들어가서 영감님더러 일를걸?"
"머야……? 흥! 연앨 톡톡히 하시는 모양이군……? 오래잖아 우리 큰사랑 할머니 한 분 생길 모양이지?"
"몰라이! 깍쟁이……."
춘심이는 마구 보풀을 내떱니다. 속이 저린 탓으로, 경손이가 혹시 아까 윤직원 영감과 반지 조건을 가지고 연애 계약을 하던 경과를 죄다 듣고서 저러는 게 아닌가 싶어, 젖내야 날 값에 그래도 계집애라고 그런 연극을 할 줄 알던 것입니다. 게나 가재는, 나면서부터 꼬집을 줄 알듯이요.
"……머, 내가 누구 때문에 밤낮 여길 오는데 그래…… 늙어 빠지구 귀인성 없는 영감님이 그리 좋아서……? 남 괜히 속두 몰라주구, 머……."
춘심이는 제가 지금 푸념을 해대는 말대로, 늙어 빠지고 귀인성 없는 윤직원 영감이 결단코 좋아서 오는 게 아니라, 윤직원 영감한테 오는 체하고서 실상은 경손이를 만나러 온다는 게,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춘심이 저도 모르는 소립니다. 아마 보나 안 보나 윤직원 영감과 경손이를 다 같이 만나러 오는 것이기 십상일 테지요.
그러나 시방 이 경우 이 자리에서는 단연코 경손이 때문에 온다는 것으로, 팔팔 뛰지 않지 못할 만큼 춘심이도 본시, 그리고 벌써, 계집이던 것입니다. 천하의 계집치고서, 멍텅구리 외에는 남자를 속이지 않는 계집은 아마 없나 보지요?
춘심이는 윤직원 영감한테 다니기 시작한 지 세 번째 만에 경손이를 알았습니다.
석양쯤 해선데, 춘심이가 윤직원 영감이 있으려니만 여겨 무심코 방으로 쑥 들어서니까, 커―다란 윤직원 영감은 간데없고, 웬 까까중이의 죄꼬만 도련님이 연상 앞에서 라디오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좀 무색했으나, 고 도련님 이쁘게도 생겼다고, 함께 동무해서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손이는 뚱뚱보 영감한테 들켰나 해서 깜짝 놀랐으나, 이어 아닌 걸 알고, 한데 요건 또 웬 계집앤고 싶어 춘심이를 마주 짯짯이 쳐다보았습니다.
전에 이 큰사랑에 오던 계집애는 이 계집애가 아닌데…… 그것들은 모두 빌어먹게 보기 싫었는데…… 이건 어디서 깜찍하니 고거 이쁘게는 생겼다…… 동무해서 놀았으면 좋겠다…… 경손이 역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애에는 소위 퍼스트 임프레션이라는 게 제일이라구요. 과연 둘이 다 같이 첫인상이 만점이었습니다.
그래, 하나는 문지방을 잡고 서서, 하나는 라디오의 스위치를 잡고 앉은 채 한참이나 서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경손이가 먼저,
"너, 누구냐?"
하면서 눈에 나타난 호의와는 다르게 텃세하듯 따지고 일어섭니다.
"넌, 누구냐?"
춘심이 역시 말소리는 강경합니다. 적어도 이 댁에서 제일 어른이요 제일 크고 뚱뚱한 영감님, 그 어른한테 다니는 낸데, 제까짓것 까까중이 도련님이면 소용 있느냔 속이겠다요.
경손이는 장히 시쁘다고 바짝 다가와 춘심이를 들여다봅니다.
"그래, 난 이 댁 되련님이다!"
"피이…… 되련님이 아니구 영감님이믄 사람 하나 궂힐 뻔했네!"
"요 계집애 건방지다!"
"아니믄……? 병아리새끼처럼 텃셀 해요!"
"요것 보게…… 너 요것, 주먹 하나 먹구퍼?"
"때리믄 제법이게?"
"정말?"
"그래!"
"요―걸!"
경손이가 번쩍 들이대는 주먹이 코끝으로 육박을 해도 춘심이는 꼼짝 않고 서서 웃습니다. 웃음도 나름이지만, 이건 호의가 가득한 웃음입니다.
"하하, 고거 야!"
경손이는 주먹을 도로 내리면서 좋게 웃습니다. 역시 춘심이처럼 호의가 가득한 웃음입니다.
"왜 안 때려?"
"울리믄 쓰나!"
"내가 울어?"
"네 이름이 무어지?"
"알면서 물어요!"
"내가, 알아?"
"그―럼!"
"내가?"
"너―너― 하는 건 무언데?"
"오옳지! 너라구 했다구! 하하하…… 그럼, 아가씨 존함이 누구시오?"
"누가 아가씨랬나? 해해해……."
"하하하…… 무어냐? 이름이……."
"춘, 심……."
"응, 춘심이…… 그리구, 나인?"
"열다섯 살……."
"하! 나허구 동갑이다!"
"정말?"
"응!"
"이름은?"
"경손 씨."
"경손 씨……? 활동사진 배우 이름매니야……."
"안 됏! 되련님 이름을 그런 데다가 빗대다니……."
"피이!"
"그래두!"
"어쩔 테야?"
"한 대 먹구 싶어?"
경손이는 또 주먹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게 아까 먼저보다는 도리어 무름하건만, 무름할 뿐더러 정말 때릴 의사가 아닌 줄을 빠안히 알면서도 춘심이는 허겁스럽게 엄살 엄살, 다시 안 그런다고 항복을 합니다.
"다신 안 그러기다?"
"응!"
"응…… 그리구……."
"무어?"
"아―니…… 참, 너두 기생이냐?"
"응!"
"요릿집이두 댕기구? 응, 인력거 타구?"
"응!"
"그리구서?"
"무얼?"
"인력거 타구, 요릿집이 가서?"
"손님 앞에서 소리두 하구, 술두 치구……."
"그리구?"
"다― 놀믄 인력거 타구 집으로 오구……."
"그거뿐?"
"뿐!"
"돈은? 아니 받구?"
"왜 안 받아!"
"얼마?"
"한 시간에 일 원 오십 전……."
"꽤다……! 몇 시간이나?"
"대중없어……."
"갈 땐 이렇게 입구 가니?"
"야단나게……? 쪽찌구 긴치마에 보선 신구 그리구……."
"하하하."
"해해해."
이때 마침 대문간에서 윤직원 영감의 기침 소리가 들려, 이 장면은 그대로 커트가 됩니다. 그러나 경손이가 총총히,
"저―기, 뒤채 내 방으루 놀러 오너라, 응? 꼭……."
하고 부탁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부터 두 아이의 연애는 급속도로 발전을 해갔습니다. 무대는 이 집의 뒤채 경손이의 방과, 영화 상설관과 안국동에 묘한 뒷문이 있는 청요릿집과, 등이구요.
그 사이에 경손이는 춘심이한테 코티의 콤팩트와 향수 같은 것을 선사했고, 춘심이는 하부다이 손수건에다가 그다지 출 수는 없으나 제 솜씨로 경손이와 제 이름을 수놓아서 선사했습니다. 두 아이의 대강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 밤으로 돌아와서 실골목의 장면인데…….
경손이는 춘심이가 너무 억울해하니까, 그를 믿고(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도시에 의심을 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아무려나 농담이 과했음을 속으로 뉘우쳤습니다.
아마 인간이라고 생긴 것이면, 사내치고서 계집한테 속지 않는 녀석은 없나 보지요.
"극장 가자……."
경손이는 이내 잠자코 섰다가 불쑥 하는 소립니다.
이 기교 없는 기교에, 정말 아닌 노염이 났던 춘심이는 단박 해해합니다. 가령 정말로 성이 났었더라도 그러했겠지마는요.
"늦었는데?"
"괜찮아?"
"영감님?"
"그걸 핑곌 못 해?"
춘심이는 좋아라고 연신 생글뱅글, 사랑으로 들어가더니, 대뜰에 올라서서,
"영감님? 나, 집이 가봐야겠어요!"
합니다.
"오―냐!"
윤직원 영감의 허―연 수염이 미닫이의 유리쪽을 방 안에 가리며 내다봅니다.
"……누가 불르러 왔더냐?"
"내…… 우리 아버지가 아푸다구, 어머니가 왔어요!"
"그렇거들랑 어서 가보아라…… 거, 무슨 병이 났단 말이냐?"
"모르겠어요. 갑자기, 그냥……."
"그럼 무엇 먹은 게 체히여서 곽란이 났넝가 부구나?"
"글쎄, 잘 모르겠어요!"
"어서 가부아라…… 그리구, 곽란이거던 와서 약 가져가거라…… 사향소합환 주께."
"내."
"어서 가부아라…… 그리구 내일 낮에 올라냐? 반지 사러 가게……."
"내."
"꼭 올 티여?"
"내, 꼭 와요!"
"지대리마……? 반지 꼭 사주마?"
"내……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너 혼자 가겄냐?"
"아이! 괜찮아요!"
"무섭거던 삼남이 데리구 가구!"
"무섭긴 무엇이 무서요!"
"그럼 어서 가보구, 내일 오정 때쯤 히여서 꼭 오니랭? 반지 사러 진고개 가게, 응?"
"내."
"잘 가거라, 응!"
"내,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어서 가거라…… 그리구, 내일 반지 사러 가자?"
반지 소리가 드리 수없이 나오나 봅니다.
걱정도 되겠지요. 제 아범이 병이 났다니, 그게 중해서 내일 혹시 오기가 어렵게 되면 또다시 연애를 연기해야 할 테니까요.
그 육중스런 임시 첩장인을 위해, 중값 나가는 사향소합환을 주마는 것과 과연 근경속이 그럴듯하기는 합니다.
아무려나 이래서 조손간에 계집애 하나를 가지고 동락을 하니 노소동락(老少同樂)일시 분명하고, 겸하여 규모 집안다운 계집 소비절약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소비절약은 좋을지 어떨지 몰라도, 안에서는 여자의 인구가 남아 돌아가고(그래 한숨과 불평인데) 밖에서는 계집이 모자라서 소비절약을 하고(그래 칠십 노옹이 예순다섯 살로 나이를 야바위도 치고, 열다섯 살 먹은 애가 강짜도 하려고 하고) 아무래도 시체의 용어를 빌려 오면, 통제가 서지를 않아 물자배급에 체화(滯貨)와 품부족(品不足)이라는 슬픈 정상을 나타낸 게 아니랄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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