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제12장
세계 사업 반절기(半折記)
편집역시 같은 날 밤이요, 아홉시가 한 오 분 가량 지나섭니다. 그러니까 방금 창식이 윤주사의 둘째첩 옥화가 계동 큰댁에 들렀다가 며느리뻘 되는 뒤채의 두 새댁들과 말말 끝에, 집에는 얼굴도 들여놓지 않은 종수를, 아까 낮에 우미관 앞에서 만났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각과 거진 같은 시각입니다.
과연, 그리고 공굘시, 그 시각에 종수는 그의 병정인 키다리 병호의 인도로 동관 어떤 뚜쟁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종수는 새삼스럽게 소개할 것도 없이, 만석꾼 윤직원 영감의 맏손자요, 창식이 윤주사의 맏아들이요, 경손이의 아범이요, 윤씨네 가문 빛내는 큰 사업의 제일선 용사 중 한 사람으로서 군수 운동을 하느라고 고향에 내려가 군 고원을 다니는 사람이요, 그리고 장차 경찰서장이 될 동경 어느 대학 법학과 학생 종학의 형이요, 이러한 그 종숩니다. 주욱 꿰어 놓구 보니 기구가 대단하군요. 뭐, 옛날 지나 땅의 주공(周公)이라든지 하는 사람은, 문왕의 아들(文王之子)이요, 무왕의 동생(武王之弟)이요, 시방 임금의 삼촌(今王之叔父)이요, 이렇대서 근본 좋고 팔자 좋고 권세 좋고 하기로 세상 우두머리를 쳤다지만, 종수의 기구도 그 양반 주공을 능멸하기에 족할지언정 못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렇듯 몸 지중한 종수가 어디를 가서 오입을 하면 못 해, 하필 구접스레한 동관의 뚜쟁이 집을 찾아왔을까마는 거기에는 사소한 내력과 곡절이 있던 것입니다.
종수는 시방 나이 스물아홉, 생김생김은 이 집안의 혈통인만큼 헤멀끔하니 어디 한 군데 야무지게 맺힌 데가 없고, 좋게 보아야 포류의 질(蒲柳之質)입니다. 혹시 눈먼 관상쟁이한테나 보인다면, 널찍한 그의 얼굴과 훤하니 트인 이마에 만석이 들었다고 할는지 모르지요. 하기야 또 시체는 상학(相學)도 노망이 나서, 꼭 빌어먹게 생긴 얼굴만 돈이 붙곤 하니까 종작할 수가 없지마는요.
열일곱에 서울로 공부를 올라와서 입학시험을 친다는 것이 단박 낙제를 했습니다. 그대로 주저앉아 강습소 나부랭이를 다니면서 준비를 하는 체하다가 이듬해 다시 시험을 치렀으나 또 낙제…….
열아홉 살에 세 번째 낙제, 그리고 다시 그 이듬해 스무 살에는, 스무 살이나 먹어 가지고 열서너 살짜리 조무래기들과 섭쓸려 입학시험을 칠 비위도 없거니와 치자고 해도 지원부터 받아 주질 않았습니다.
그해 그러니까 기사년(己巳年)에 종수의 아우 종학이 삼 년 동안 줄곧 낙제를 한 형의 분풀이나 하는 듯이 우등성적이요 겸하여 첫째로 ××고보에 입학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벌써 온 집안이 서울로 반이를 해왔고, 한데 종수는 일이 그 지경이고 보니 어디로 얼굴을 두르나 부끄러운 것뿐, 일변 또 공부 따위는 애초에 하기가 싫던 것이라 아주 작파를 해버렸습니다.
명색이나마 공부를 작파하고 나서는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이겟다, 할 노릇이란 빠안한 것, 그 동안 조금씩 익혀 온 술먹기와 계집질에 아주 털어놓고 투신을 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어린 손자자식이, 그야말로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주색에 빠졌으니 사람 버릴 것이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그보다는 소중한 돈을 물쓰듯 해서 더욱 심화요, 그런데 그보다도 또 속이 상한 건, 크게 바라던 군수가 장마의 개울물에 맹꽁이 떠내려가듯 동동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은 한번 실패로 큰 목적을 단념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루두루 남의 의견도 듣고 궁리도 해보고 한 끝에, 공부를 잘 시켜 고등관으로 군수가 되는 길은 글렀은즉, 이번에는 군 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본관을 거쳐 서무주임으로 서무주임에서 군수로, 이렇게 밟아 올라가는 길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고향의 군수와는 매우 임의로운 사이요, 또 도지사와도 자별히 가깝고 하니까, 종수를 군 고원으로 우선 앉혀 놓고서 운동만 뒷줄로 잘 하게 되면 자아 본관이요, 네에 서무주임이요, 옜소 군수요, 이렇게 수울술 올라가진다는 것입니다.
과연 고향의 군수는 윤직원 영감의 청대로 선뜻 고원 자리 하나를 종수에게 제공했을 뿐 아니라, 뒷일도 보장을 했습니다.
종수는 제가 군수가 되고 싶다기보다도, 일일이 감독이 엄한 조부 윤직원 영감 밑에서 조심스럽게 노느니, 고향으로 내려가서 마음 탁 놓고 지낼 것이 좋아, 매삭 이백 원씩 가용을 타쓰기로 하고, 월급 이십육 원짜리 군 고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꼬박 삼 년 전…….
그 삼 년 동안 윤직원 영감이 자기 손으로 쓴 운동비가 꽁꽁 일만 원하고 삼천 원입니다. 그리고 종수가 운동비라는 명목으로 가져간 것이 이만 원돈이 가깝습니다. 해서 도합 삼만 원이 넘습니다. 하기야 종수가 가져간 이만 원 돈은 그것이 옳게 제 구멍으로 들어갔는지 딴 구멍으로 샜는지, 알 사람이 드물지요마는…….
그러나 실상은 돈이 삼만여 원만 든 건 아닙니다.
종수가 가용으로 매삭 이백 원씩 가져갔으니 그것이 삼 년 동안 칠천여 원.
종수가 윤직원 영감의 도장을 새겨 가지고 토지를 잡혀 쓴 것이 두 번에 이만여 원이요, 그것을 윤직원 영감이 일보(日步) 팔 전씩 쳐서 도로 찾느라고 이만 오천여 원.
윤직원 영감의 명의로(도장은 물론 가짜지요) 수형 뒷보증(우라가키)을 해 쓴 것을 여섯 번에 사만 원을 물어 주고.
이 두 가지만 해도 칠만 원 돈인데, 그 칠만 원 가운데 종수가 제 손에 넣고 쓴 것은 다 쳐야 단돈 만 원도 못 됩니다. 윤직원 영감으로 보면 결국 손자 종수에게 사기를 당한 셈인데, 그러므로 물어주지 않고 버틸 수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버티고 볼 양이면 종수가 징역을 가야 하니, 이면상 차마 못 할 노릇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바라고 바라던 군수가 영영 떠내려가겠은즉, 목마른 놈이 우물 파더라고, 짜나따나 그 뒤치다꺼리를 다 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래, 이것저것을 모두 합치면 돈이 십만 원하고도 훨씬 넘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하도 화가 나고 기가 막혀서, 이 잡아 뽑을 놈아 이놈아, 돈은 무엇에다가 그렇게 물쓰듯 하느냐고, 번번이 불러 올려다가는 도둑놈 닦달하듯 조져 댑니다.
그럴라치면 종수는 군수 운동비와 교제비로 쓴다고 합니다.
그렇거들랑 왜 나더러 달래다가 쓸 것이지, 비싼 고리대금업자의 변전을 내느냐고 한다 치면, 할아버지가 언제 돈 달라는 족족 주었느냐고 되레 떠받고 일어섭니다.
물론 윤직원 영감은 곧이를 듣지는 않지만, 종수의 구실거리는 그만큼 유리했습니다.
해서 윤직원 영감의 무서운 규모로, 삼 년 동안에 십여 만 원을 그 밑구멍에다가 들이민 것으로 보아 군수, 즉 양반이라는 것의 매력이 위대함을 알겠는데, 그러나 종수는 아직도 한낱 고원으로 있지, 그 이상 더 올라가지는 못했습니다. 월급만은 한차례 삼 원이 승급되어, 이십구 원을 받지만요.
하니, 일이 매우 장황스러 성미 급한 윤직원 영감으로는 조바심이 나리라 하겠지만, 실상은 고원에서 본관까지 사 년, 본관에서 서무주임까지 삼 년, 서무주임에서 군수까지 다시 삼 년, 도합 십 개년 계획이었기 때문에, 아직 유유히 운동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그 덕에 거드럭거리는 건 종숩니다. 군에 다니는 건 명색뿐이요, 매일 술타령에 계집질, 게다가 한 달이면 사오 차씩 서울로 올라와서는 두드려 먹고 놉니다. 돈은 물론 제 집엣돈을 사기해 먹고, 또 그 밖에 중이 망건 사러 가는 돈이라도 걸리기만 하면 잡아 써놓고 봅니다. 그랬다가 다급하면 그 짓, 제 집 돈 사기를 해서 물어주든지, 직접 윤직원 영감한테 운동비랍시고 뻐젓이 돈을 타든지 합니다. 이번에 올라온 것도 그러한 일 소간입니다.
얼마 전에 군의 같은 동료가 맡아 보는 돈 천 원을 둘러 쓴 일이 있는데, 그 돈 채워 놓아야 할 날짜가 이삼 일로 박두했고, 일변 술도 날씨 선선해진 판에 한바탕 먹어 제끼고 싶고, 이참 저참 올라왔던 것인데, 방위가 나빴던지 일수가 사나웠든지, 첫새벽 정거장에서 내리던 길로 일이 모두 꿀리기만 했습니다.
첫째, 어제 시골서 떠나기 전에 전보를 쳐두었는데 키다리 병호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돈을 얻재도, 술을 먹재도, 오입을 하재도, 종수는 그의 병정인 키다리 병호가 아니고는 꼼짝을 못 합니다. 수형을 현금으로 바꾸어 오고, 요릿집과 기생을 분변을 시키고, 더러는 외상 요리의 교섭을 하고, 계집을 중매 서고, 이래서 종수가 서울서 노는 데는 돈보다도 더, 그리고 먼저 필요한 게 병호 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서 전보까지 쳐두었던 것인데, 정거장으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이건 병이 났거나 타관에를 갔거나 한 것이라고 낙심을 한 종수는, 그래도 막상 몰라 애오개 산비탈에 박혀 있는 병호의 집까지 찾아갔습니다.
역시 병호는 집에 없고 그의 아낙의 말이, 어제 낮에 잠깐 다녀온다고 나간 채 여태 안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 타관에는 가지 않은 듯싶고, 그것이 적이 다행해서, 들어오는 대로 곧 만나게 하라는 말을 이른 뒤에, 언제고 서울을 올라오면 집보다도 먼저 찾아드는 ××여관에다가 우선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관에서 종수는 조반을 먹고 드러누워 늘어지게 한잠을 잤습니다. 간밤에 침대차가 만원이 되어 잠을 못 잔 것이 피곤도 하거니와, 이따가 저녁에 한바탕 놀자면 정력을 길러 두는 것도 해롭진 않았습니다. 또 그러한 필요가 아니라도 병호가 없는 이상, 막대를 잃어버린 장님 같아 저 혼자서는 옴나위를 못 하니까, 낮잠이 제일 만만합니다.
한잠을 푹신 자고 나니까 오정이 지났는데, 병호는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습니다. 종수는 또 한번 애오개를 나갔다가 그만 허탕을 치고는 답답한 나머지 여기저기 그를 찾아다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미관 앞에서 재수 없이 옥화를 만났던 것입니다.
종수가 도로 여관으로 돌아와서 네시까지 기다리다가 그만 질증이 나서, 다 작파하고 조부 윤직원 영감한테 급한 돈 천 원이나 옭아 내어 가지고 내려가 버릴까, 내일 하루 더 기다려 볼까 망설이는 판에, 키다리 병호가 터덜터덜 달려들었습니다.
"허! 미안허이!"
병호는 말처럼 긴 얼굴을 소처럼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섭니다.
"무얼 핥어먹느라구 밤새두룩 주둥일 끌구 다녔수?"
종수는 일어나지도 않고 버얼떡 누운 채, 전봇대 꼭대기같이 한참이나 올려다보이는 병호의 얼굴을 눈흘겨 주다가 한마디 비꼬던 것입니다. 남더러 전접스런 소리를 잘하는 것도 아마 윤직원 영감의 대부터 내림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종수는 갈데없는 후레자식입니다.
한 것이, 병호와는 같은 고향인데, 나이 십오 년이나 층이 집니다. 십오 년이면 부집(父執)이 아닙니까. 종수 제 부친 창식이 윤주사가 마흔여섯이요 해서, 사실로 병호와는 네롱네롱하는 사이니까요.
그런 것을 글쎄, 절하고 뵙진 못할망정 버얼떡 자빠져서는 한단 소리가 무얼 핥아먹느라고 주둥이를 끌고 다녔느냐는 게 첫인사니, 놈이 후레자식이 아니라구요. 하나 병호는 아주 이상입니다.
"머, 그저 모처럼 봉을 하나 잡았더니, 그놈을 뚜디려 먹느라구."
"그래서……? 문 밖 별장으루 나갔던 속이구면?"
"응."
"각시 맛두 봤수?"
"미친 녀석! 늙은 사람두 그런 것 바친다드냐?"
"아―무렴! 개가 똥을 마대지?"
둘이는 걸찍하게 농지거리로 주거니받거니 합니다. 그러니 결국 종수로 하여금 버르장머리가 없게 하는 것은 이편 병호가 속이 없고 농판스런 탓이요, 그걸 받아 주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의 병정을 잘 서먹자면 그만큼이나 구―수하지 않고는 붙일성이 없겠으니 또한 직업인지라 어쩔 수 없다는 게 병호의 변명입니다.
"돈을 좀 마련해야 할 텐데?"
종수는 그제야 일어나더니 잔뜩 쪼글트리고 앉으면서 담배를 붙여 뭅니다.
"해보지…… 얼마나?"
병호의 대답은 언제나 선선합니다.
"꼭 천 원허구 또, 한 오백 원……."
"오늘루 써야 허나?"
"천 원은 내일 해전으루 되면 좋구, 오늘은 오백 원 가량만……."
"해보지……! 그렇지만 은행 시간이 지나서, 좀……."
"그러니까 진작 오정 때만 왔어두 좋았지! 핥어먹으러 싸아다니느라구……."
"허! 참, 잡놈이네! 비 올 줄 알면 어느 개잡년이 빨래질 간다냐? 네가 몇 시간만 더 일찍 전볼 치지?"
"긴소리 잔소리 인전 고만 해두구, 어서, 어떻게 서둘러 봐요!"
"날더러만 재촉을 하지 말구, 어서 한 장 쓰게그려!"
"그런데 이번은 말이죠……."
종수는 손가방에서 수형 용지를 꺼내 가지고, 일변 쓰면서 이야깁니다.
"……이번은 와리를 좀더 주더래두 내 도장만 찍어야 할 텐데?"
"건 어려울걸……! 그런데 왜?"
"아, 지난번에 논을 그렇게 해 쓴 거 일만 오천 원이 새달 그믐 아니오?"
"참, 그렇지…… 그런데?"
"그런데 그거가 뒤집어지기 전에 이거가 퉁겨서 나오구, 그리구서 얼마 아니 있다가 또 그거가 나오구, 그래 노면 글쎄 한 가지씩 졸경을 치루기두 땀이 나는데, 거퍼 두 가지씩!"
종수는 쓰던 만년필을 멈추고 혀를 날름날름하면서 고개를 내두릅니다. 졸경을 치른다는 것은 빗쟁이한테 직접 단련이 아니라, 조부 윤직원 영감한테 말입니다.
"그렇잖우? 드뿍 큰목아치는 크게 해먹은 맛으루나 당한다구, 요것 이천 원짜리 때문에 경은 곱쟁일 치긴 억울해!"
"그두 그렇긴 허이마는……."
병호는 깜작깜작 생각을 하다가는 종수가 도장까지 찍어 내놓는 이천 원 액면의 수형을 집어 듭니다. 아무리 가짜 도장일 값에 윤두섭이의 뒷보증이 없는, 단부랑지자 윤종수의 수형을 가지고 돈을 얻다께 하늘서 별 따깁니다.
"좀 어렵겠는데에……."
병호는 수형을 만지작만지작, 그 기다란 윗도리를 앞뒤로 끄덱끄덱 연신 입맛을 다십니다.
"쉬울 테면 왜 온종일 당신 기대리구 있겠소? 잔소리 말구 어여 갔다가 와요!"
"글쎄, 가보긴 가보지만……."
병호는 수형을, 빛 낡은 회색 포라 양복 속주머니에다가 건사하고 일어섭니다.
"……가보아서 되면 좋구, 안 되면 달리 또 무슨 방도를 채리더래두…… 아무려나 기대리게……."
"꼭 돼야 해요! 더구나 한 사오백 원은 오늘 우선……."
"흥, 이거 말이지?"
병호는 씨익 웃으며 손으로 술잔 기울이는 흉내를 냅니다. 종수도 따라 웃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대루 지내우?"
"염려 말게…… 돈이 못 되면 외상은 못 먹나?"
"싫소, 외상은…… 그리고, 요릿집 간죠뿐이우?"
"각시두 외상 얻어 줌세, 끙……."
"어느 놈이 치사하게 외상 오입을 하구 다니우?"
"난 없어 못 하겠더라!"
"양반허구 상놈허구 같은가?"
"양반은 별수 있다더냐?"
한 시간 안에 다녀오마고 나간 병호는, 두시간 세시간 눈이 빠지게 기다려 놓고서 일곱시 반에야 휘적휘적, 그나마 맨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윤직원 영감의 뒷보증이 없어도 종수의 도장만 보고서 돈을 줄 사람이 꼭 한 사람 있기는 있고, 또 그 사람이면 소절수를 받아다가 현금과 진배없이 풀어 쓸 수가 있는 자린데, 세상 기고 매고 아무리 찾아다녀야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따로이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 가지고는 짐짓 꾸며 대는 농간인 것을 종수는 알 턱이 없습니다.
윤종수의 도장 하나를 보고서 수형을 바꾸어 줄 실없는 돈장사라고는 이 천지에 생겨나지도 않았습니다. 병호는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어쩌면 될 듯한 눈치를 보이는 것은, 우선 수형을 쓰게 하자는 제일단의 공작이었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병호는 누구를 찾아다니기는커녕 제 집으로 가서 편안히 누웠다가 온 것도, 그러니까 종수는 알 턱이 또한 없습니다.
"빌어먹을……! 에이 속상해!"
종수는 슬며시 짜증이 나서 피우던 담배를 재털이에 북북 비벼 던지고는 나가 드러누우면서 두런거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까 저물기 전에 집으루나 가서 할아버지께라두 말씀을 했지! 에이, 빌어먹을……."
은연중 병호가 늦게 온 칭원까지 하는 소립니다. 그러나 병호는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보다는 일이 묘하게 얼려 간대서 속으로 기뻐합니다.
"여보게?"
"……"
"여기다가 자네 조부님 도장 찍어서 우라가키하게."
"싫소……! 다아 고만두고, 내일 할아버지께 돈 천 원이나 타서 쓰구 말겠소!"
"웬걸 주실라구?"
"안 주시면 고만두, 머…… 에잇, 속상해!"
"그렇게 있어두 고만, 없어두 고만일 돈이면 애여 왜 쓸려구를 들어?"
"남 속상하는 소리 말아요! 시방 돈 천 원에 여러 집 초상나게 된 걸 가지구……."
"허어! 그 장단에 어디 춤추겠나!"
"아―니, 할아버지 도장 찍구 우라가키할 테니, 당장 돈 만들어 올 테요?"
"열에 일곱은 될 듯하네마는…… 그러구저러구 간에, 여보게?"
"말 던지우!"
"만일 자네 조부님께 말씀을 해서 돈이 안 되면은 낭패가 생길 돈이라면서? 응?"
"낭패뿐이 아니우…… 내 온, 돈 고까짓 천 원 때문에 이렇게 속상하기라군 생전 츰이요!"
"그러니 말일세. 여그다가 우라가킬 해주면, 시방 나가서 주선을 해보구…… 하다가 안 되면 내일 해보구 할 테니깐, 자넬라커던 이놈은 꼭일랑 믿지 말구서, 내일 자네 조부님을 조르구. 그렇게 해서 두 군데 중에 되면은 좋잖은가?"
"아, 글쎄 이 당신아!"
종수는 답답하다고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삿대질을 합니다.
"맨 츰에 내가 하던 소린, 한 귀루 듣구 한 귀루 흘렸단 말이요?"
"온 참……! 저놈 논 잽혀 쓴 놈 일만 오천 원짜리허구 연거퍼 튕겨질 테니 안됐단 말이지?"
"이번 치가 먼점 뒤집어질 테니깐 더 걱정이란 말이랍니다요!"
"그러니깐 말이야. 이번 칠랑 이자나 주구서 두어 번 가키가엘 하면 될 게 아닌가?"
"가키가에? 누가 가키가엘 해준대나?"
"아니 해줄 게 어딨나? 이자를 주는데 왜 아니 해주나?"
"그럼 그래 보까? 히히."
종수는 별안간 싱겁게 웃으면서, 언제고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윤직원 영감의 도장으로 아까 그 수형에다가 뒷보증을 해놓습니다.
"되두룩 단돈 백 원이라두 현금을 좀 가지구 오시우?"
구두를 신고 있는 병호더러 부탁을 합니다.
"글쎄, 그렇게 해보지만……."
병호는 돌아서려다가 싱글싱글 웃습니다.
"……자네 거 기생 고만두고서 오늘 저녁일라컨 여학생 오입 하나 해볼려나?"
"여학생……? 그 희떠운 소리 작작 허슈!"
"아냐! 내 장담허구 대령시킬 테니……."
"진짤?"
"아무렴!"
"정말?"
"허어!"
"아니면 어쩔 테요?"
"내 목을 비어 바치지!"
"그럼, 내기요?"
"내기하세……! 그런데 진짜가 아니면 나는 목을 비여 놓구…… 또오, 진짜면?"
"백 원 상급 주지!"
"그래, 내 오는 길에 다아 주문해 놓구 오문세."
한 시간이 좀 못 되어서 돌아온 병호는 이번도 허탕이었습니다. 단골로 그새 거래를 하던 세 군데를 찾아갔는데, 하나는 타관에 가고 없고, 하나는 놀러 나갔고, 또 하나는 은행에 예금한 게 없어서 내일이나 입금시키는 형편을 보아야만 소절수라도 발행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꾸며 대는 소리요, 동관의 뚜쟁이 집에 가서 노닥거리다가 오는 길입니다.
"그러면 내일 될 상두 부르군요?"
종수는 생각하던 바와 달라, 소갈찌도 내지 않습니다.
"글쎄?"
"안 될 것 같아?"
"그럴 게 아니라, 이 수형일랑 내게 두었다가, 내가 한번 더 돌아다녀 볼 테니, 그렇지만 꼭 믿진 말구서, 자네 조부님한테 타내두룩 하게…… 그래야만 망정이지, 꼭 되려니 했다가 아니 되는 날이면 낭패가 아닌가? 지금두 오면서두 고옴곰 생각했지만, 그 남의 수중에 있는 돈을 얻어 쓴다는 게 무척 힘이 들구, 자칫하면 큰일을 잡치기가 쉬운 걸세그려! 아 오늘 저녁 일만 두구 생각해 보게? 남의 돈을 믿었다가 이렇게 누차 낭패가 아닌가?"
근경 있이 타이르듯 하는 말에, 종수는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종수가 다소곳하니 곧이듣는 것을 보고 병호는 일이 열에 아홉은 성사라서 속으로 좋아 못 견딥니다.
병호는 그 이천 원짜리 수형을 제 주머니 속에 넣어 두고 내놓지 않을 참입니다.
종수가 저의 조부 윤직원 영감한테 돈을 타서 쓰면 이 수형은 소용이 없으니까, 대개는 잊어버리고 시골로 내려가기가 십상입니다. 또, 혹시 생각이 나서 찾더라도 포켓을 부스럭부스럭하다가,
"아뿔싸! 간밤에 변소에 가서 휴지가 없어서 고만!"
이렇게 둘러댑니다.
만일 윤직원 영감한테 돈을 타지 못하고, 불가불 수형을 이용해야 할 경우라도 역시 뒤지를 해 없앤 줄로 둘러대고서, 새로 수형을 쓰게 합니다.
그래 좌우간 그 수형은 제가 훌트려 쥐고 있다가, 일 할 오부 할이를 뗀 일천칠백 원을 찾아서 집어삼킵니다.
삼켜도 아무 뒤탈이 없습니다. 우선 법적으로 따져서, 하나도 죄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시 문제가 그렇게 커지질 않습니다.
그 수형이 나중에 윤직원 영감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필경 종수가 닦달을 당하기는 당하는데, 종수는 그것이 병호의 야바윈 줄 단박 알아내기야 하겠지만, 그의 사람 된 품이 저만 알고서 제가 일을 뒤집어쓰지 결코 그 속을 들춰 내도록 박절하진 못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붓자식 옷 해입힌 셈만 대지야고, 버릇없는 소리나 해가면서 역시 전과 다름없이 병호를 심복의 병정으로 부릴 것이요, 그것은 사람이 뒤가 없는 소치도 있겠지만 일변 아쉽기도 한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이 뒤집어지기 전에 병호가 미리서, 아 이 사람 종수,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목이 달아나게 급한 사정이 있어서 약시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했네. 그러니 어떡허려나? 날 죽여 주게. 이렇게 빌기라도 한다면 종수는 그것을 순정인 줄 여겨 오히려 양복이라도 한벌 해입힐 것입니다. (옛날의 주공(周公)도 사람이 종수처럼 이렇게 어질었다구요?)
"자아, 어서 옷 입구 나서게!"
병호는 일천칠백 원을 먹어 둔 바람에 속이 달떠서는 연신 싱글벙글, 종수를 재촉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구…… 자아, 오늘 저녁일라컨 위선 산뜻한 여학생 오입을 속짜루 한바탕 한 뒤에, 어디 별장으루 나가서 밤새두룩, 응?"
"돈두 없으면서 무얼!"
"걱정 말래두! 요릿집은 내가 다아 그읏두룩 할 테니깐 염려 없구, 여학생 오입은 십 원이면 썼다 벗었다 하네!"
"십 원?"
"아무렴……! 잔돈 얼마나 있나?"
"한 삼십 원 있지만!"
"됐어! 십 원은 여학생 오입채루 쓰구 이십 원은 요릿집 뽀이 행하루 쓰구, 머어 넉넉허이!"
"그 여학생이라는 게 밀가루나 아니우?"
"천만에……! 글쎄, 목을 비여 바친대두 그러나?"
"더구나, 십 원이면 된다니, 유곽만두 못하잖아?"
"글쎄, 예서 우길 게 아니라, 좌우간 가보면 알 걸 가지구!"
"어디, 한번 속는 셈대구!"
사맥이 다 이렇게쯤 되어서, 당대의 주공 종수가 이 동관의 뚜쟁이 집엘 온 것입니다.
폐병 앓는 갈빗대 여대치게 툭툭 불거진 연목을 반자지도 아니요 거무데데한 신문지로 처덕처덕 처바른 얕디얕은 천장 한가운데 가서, 십삼 와트 전등이 목을 잔뜩 매고 높다랗게 달려 있습니다.
도배는 몇 해나 되었는지 하―얬을 양지가 노―랗게 퇴색이 된 바람벽인데, 그나마 이리저리 쓸려서 제멋대로 울퉁불퉁 떠 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빈대 피로 댓잎〔竹葉〕을 쳐놓았어야 제격일 텐데, 그 자국이 없는 것을 보면 사람이 붙박이로 거처를 않고, 임시 임시 그 소용에만 쓰는 게 분명합니다.
윗목으로 몇 해를 뜯이 맛을 못 보았는지, 차악 눌린 이부자리가 달랑 한 채, 소용이 소용인지라 잇만은 깨끗해 보입니다.
방 안에서는 눅눅한 습기와 곰팡 냄새가 금시로 몸이 끈끈하게시리 가득 풍깁니다.
이지러진 사기재떨이 하나가 방 안의 유일한 가구요, 그것을 사이에 놓고 병호와 종수는 위아랫목으로 갈라 앉아 입맛 없이 담배를 피웁니다.
"멀쩡한 뚜쟁이 집이구면, 무엇이 달라요? 까치 뱃바닥 같은 소릴……."
종수는 이윽고 방 안을 한바퀴 아까 처음 들어설 때처럼 콧등을 찡그리며 둘러보면서, 목소리 소곤소곤 병호를 구박을 주던 것입니다.
"글쎄 뚜쟁이 집은 뚜쟁이 집이라두, 시방은 다르다니깐 그래!"
"다를 게 무어람……! 여보, 나두 열여덟 살부터 다녀 본 다아 구로오도야!"
"그땐 말끔 은근짜들뿐이지만, 시방은 이 사람아, 오는 기집들이 모두 상당허네……! 여학생을 주문하면 꼭꼭 여학생을 대령시키구, 과불 찾으면 과불 내놓구, 남의 첩, 옘집 여편네, 버스 걸, 여배우, 백화점 기집애, 머어 무어든지 처억척 잡아 오지!"
"또 희떠운 소리를……! 아니 그래, 과부면 과부라는 걸 무얼루다가 증명허우? 민적등본을 짊어지구 오우? 여학생은 재학증명설 넣구 오구, 버스 걸은 가방을 차구 오우?"
"허허허…… 그거야 그렇잖지만…… 아냐, 대개 맞긴 맞느니…… 그렇게 널리 한대서 요샌 뚜쟁이 집이라구 아녀구, 세계사업사라구 하잖나?"
"당찮은 소릴! 여보, 세계사업사란 내력이나 알구서 그러우?"
연전에 관훈동에 있는 어떤 뚜쟁이의 구혈을 경찰서에서 엄습한 일이 있었습니다. 연루자가 수십 명 잡혔는데, 차차 취조를 해 들어가니까, 그 조직이 맹랑할 뿐 아니라, 이름은 세계사업사라고 지은 데는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별 의미는 없고, 아마 취체를 기이느라고 그런 엉뚱한 명칭을 붙였던 것이겠지요.
아무튼 그때부터 뚜쟁이 집을 어디고 세계사업사라고 불렀고, 시방은 한 개의 공공연한 은어(隱語)가 되어 버렸습니다.
종수가 그러한 내력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앉았던 병호는,
"허허, 날보담 선생이군!"
하면서 웃고 일어섭니다.
"……자아, 난 먼점 가서……."
"어디루?"
"××원 별장으루 먼점 나가서 이것저것 모두 분별을 해놓구 기대릴 테니, 자넬라컨 처억 재미 볼 대루 보구……."
"그럴 것 무엇 있소? 이왕이니 하나 더 불러 오래서, 둘이 같이, 응? 하하하하?"
"허허허허…… 늙은 사람 놀리지 말구…… 그리구, 참 돈은 음식값 무엇 할 것 없이 십 원 한 장만 노파 손에다가 쥐여 주구 나오게!"
"그러구저러구 간에, 진짜 여학생이 아니면 당신 죽을 줄 알아요! 괜히!"
"염려 말래두!"
병호는 마루로 나가더니 안방의 노파를 불러내어 무어라고 두어 마디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갑니다.
종수가 시계를 꺼내어 마침 아홉시 이십분이 된 것을 보고 있노라니까, 샛문을 배깃이 열고 노파가 담뱃대 문 곰보딱지 얼굴을 들이밉니다.
"한 분이 먼점 가세서 심심하시겠군!"
노파는 병호가 앉았던 자리로 가서 팔짱을 끼고 도사려 앉습니다.
"……아이! 그 새서방님 얼굴두 좋게두 생겼다! 오래잖아 색시가 올 테지만, 보구서 색시가 더 반하겠수, 호호오……."
언변이 벌써 뚜쟁이로 되어 먹었고, 게다가 겉목을 질러 웃는 소리가 징그러울 만큼 능청스럽습니다.
"시방 온다는 게 정말 여학생은 여학생입니까?"
종수는 하는 양을 보느라고 말을 시켜 놓습니다.
"온! 정말 아니구요! 아주 버젓한 고등학교 다니는 색시랍니다. 밀가룰 가져다가 복색만 여학생으루 채려서 들여밀 줄 알구들 그러시지만, 아 시방이 어느 세상이라구 그렇게 속힐래서야 되나요! 정말 여학생이구말구요, 온!"
"버젓한 여학생이 어째 하라는 공분 아니 허구서……."
"오온! 여학생은 멋 모르나요? 다아, 응? 멋이 들어서, 다아 심심소일루 다니는 색시두 있구, 또오 더러는 돈맛을 알구서 다니기두 허구…… 그렇지만 지끔 오는 색신 노상히 돈만 바라거나, 또 심심소일루 다니는 이가 아니랍니다! 그건 참, 잘 알아 두시구, 너무 함부로 다루질라컨 마시우! 괜히……."
"그럼 무엇 하러 다니는데요?"
"신랑! 신랑을 고르느라구 그래요. 꼬옥 맘에 드는 신랑을!"
"네에! 그래요오! 으응, 신랑을 고른다!"
"참, 인물인들 오죽 잘났어요. 머, 똑 떨어졌죠."
"네에! 그렇게 잘났어요?"
"말두 마시우! 괜히, 담박 반해 가지굴랑, 내일이래두 신식결혼하자구 치마끈에 매달리리다! 호호호……."
"피차에 맘에 들면야 그래두 좋죠. 마침 장가두 좀 가구푸구 하던 참이니깐……."
"그렇게 뒷심을 보실 테거들랑 돈을 애끼지 말구서, 우선 오늘 저녁버틈이라두 척 돈을 좀 몇십 환 듬뿍 쓰세야죠! 그래야 다아 색시두!"
"지끔 오는 인 돈을 바라구 오는 게 아니라면서요?"
"온! 시방야 돈을 아니 바라지만서두, 신랑 양반이 다아 돈이 많구 호협허신 그런 인 줄은 알아야, 다아 맘이 당기죠!"
"옳아! 그두 그렇겠군요……! 나인 몇이라죠?"
"온 어쩌나! 아, 말 탄 서방이 그리 급하랴구, 시방 곧 올 텐데, 호호, 미리서 반하셨구려! 호호호…… 올해 갓스물이랍니다. 나이두 꼬옥 좋죠!"
마침 대문 소리가 삐그덕 나더니 자박자박,
"기세요?"
하고 삼가로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왔군!"
어느결에 일어서서 샛문으로 나가려던 노파가 종수를 돌려다보고 눈을 찌긋째긋합니다.
종수는 저도 모르게 약간 긴장이 되어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는 아까부터 노파의 하는 수작이 속이 빠안히 들여다보여, 역시 여학생이란 공연한 소리요 탈을 쓴 밀가루기 십상이려니 하는 속치부는 하고 있으면서도, 급기야 긴장이 되는 것은 화류계 계집은 많이 다뤘어도 명색이 여학생은 접해 보지 못한 그인지라, 얼마간 최면에 걸리지 않질 못한 탓이겠습니다.
노파는 밖으로 나가서 한참 소곤소곤하다가 이윽고 샛문이 열립니다.
"자아, 내가 정말을 했는지, 거짓말을 했는지 보십시오! 이렇게 뻐젓한 여학생을 모셔 왔으니, 자아."
노파가 가려 서서 한바탕 장담을 치고 나더니,
"……자아…… 어여 들어와요! 온 부꾸럽긴 무에 그리 부꾸럽담! 다아 신식물 자신 양반들이, 자아……."
하고 또 한바탕 너스레를 떨면서 모로 비껴 섭니다.
십여 년 화류계에서 놀며 치여난 종수도, 어쩐지 압기가 되는 듯, 이 장면에서만은 단박 얼굴을 들고 쳐다볼 담이 나질 않고, 마침 문턱 안으로 한발 들여놓는 비단 양말을 신은 다리로부터 천천히 씻어 올라갑니다.
놀먐한 비단 양말 속으로 통통하니 살진 두 다리, 그 중간께를 치렁거리는 엷은 보일의 검정 통치마, 연하게 물결치는 치마 주름을 사풋 누른 손길, 곱게 끊진 흰 저고리의 앞섶 끝, 볼록한 젖가슴에 맺어진 단정한 고름, 이렇게 보아 올라가는 종수는 어느덧 저를 잊어버리고, 과연 시방 순결을 의미하는 여학생을 맞느니라 싶은 일종의 엄숙한 기분에 잠겨 갑니다.
필경 종수의 시선이 여자의 동그스름한 턱으로부터 얼굴 전체로 퍼지려고 하는데, 마침 저편에서도 외면했던 고개를 이편으로 돌리고, 돌려서 얼굴과 얼굴이 딱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입니다.
"어엇!"
"아이머닛!"
소리는 실상 지르지도 못하고, 남녀는 동시에 숨이 막히게 놀랍니다. 종수는 앉은 자리에서 뒤로 벌떡 자빠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가누어 고개를 푹 숙이고, 계집은 홱 몸을 날려 마루를 쿵쿵, 구두는 신었는지 어쨌는지 대문을 왈카닥 삐그덕, 그 다음에는 이내 조용하고 맙니다.
계집이 달아나자 종수는 정신을 차려 쫓기듯 세계사업사를 도망해 나왔습니다.
계집은 바로 창식이 윤주사의(그러니까 즉 종수의 부친의) 둘째첩 옥화였습니다.
종수는 사람이 밤에 불(光線)을 가진 것이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면서, 자동차를 몰아 동소문 밖 ××원 별장으로 나왔습니다.
병호는 아직 기생도 나오기 전이라 혼자 달랑하니 앉았다가, 종수가 뜻밖에 일찍 온 것을 의아해 자꾸만 캐고 묻습니다.
종수는 부르댈 데 없는 울화가 나는 깐으로는, 아무튼 여학생은 아니었으니 목을 베어 내라고 병호나마 잡도리를 해주고 싶었으나 그것도 객쩍은 짓이라서, 그저 온다는 그 여학생이 갑자기 병이 나서 못 온다는 기별이 왔기에, 또 마침 내키지도 않던 참이라 차라리 다행스러 얼핏 일어섰노라고 역시 종수 그 사람답게 쓸어 덮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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