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야 행로
편집1
편집여덟 시가 약간 지났을 무렵이다.
청량리행 전차를 타고 종점에서 운옥은 내렸다. 거기서 회기리 쪽으로 한참 걸어가다가 외인편으로 꺾어진 좁은 길로 운옥은 들어 섰다. 그 쓸쓸하고 캄캄한 논밭 사이로 한참 걸어가면 조그만 언덕 밑에 고아원은 있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오로지 운옥의 온 정신은 자기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어미 없는 나나의 애처로운 신세 위에 있었다.
「운명이다! 여기서 만일 박 준길이에게 붙들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나는 나나를 만나 줘야만 한다. 만나 주려고 애를 써 봐야만 한다! 붙들리고 안 붙들리는 건 운명이다! 하늘의 뜻이다!」
운옥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만일 현재 운옥의 손에 아버지의 유물인 권총이 들어 있다면 이제부터 자기의 앞길에 불쑥 나타날런지도 모를 그 짐승 같은 박 준길이를 서슴치 않고 운옥은 쏘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운옥의 손에는 그 무기가 없다. 태극형 고개에서 준길의 협박을 당하던 그 순간, 원앙금침 속에 들어 있는 권총을 운옥은 무척 그리워 했었다. 그와 마찬가지의 그리움을 가지고 운옥은 지금 아버지의 그 거룩한 유물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캄캄한 밤 길이며 고적한 밤 길이다. 운옥의 발길은 여러 번 돌 뿌리를 차고 쓰러질 뻔 하였다. 그럴때마다 길 가의 으슥한 어둠 속에서 준길이의 무시무시한 애꾸눈이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밤 바람이 인다. 멀리 시내의 등불이 밤 바람 속에서 꿈결처럼 오쭐오쭐 춤을 추며 감실거린다.
조그만 산기슭을 운옥은 돌아 섰다. 그 산기슭을 돌아 서면서부터 운옥의 발걸음은 갑자기 무거워졌다. 고아원으로부터 비치어 나오는 연약한 불빛이 운옥의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마당이자 밭이요, 밭이자 행길인 초라한 고아원이듯 싶지는 않았다.
운옥은 발걸음을 더듬어 가만가만히 원장실 앞으로 걸어 갔다. 유리창으로 살그머니 들여다 보니 차원장이 테이블 앞에 걸터앉아서 무슨 서류 같은 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님, 원장 선생님!」
운옥은 유리창을 가만히 열고 낮은 목소리로 원장을 불렀다.
「응?」
원장은 후딱 머리를 들고 바로 눈 앞 유리창 밖에 운옥의 긴장한 얼굴을 발견하자
「아, 홍 선생!」
「쉬이!」
하고, 운옥은 주위를 돌아보며
「헌병대에서 오지 않았읍니까?」
「왔었읍니다. 와서 나나를 데려 갔지요.」
「아, 역시……」
운옥의 예감이 들어 맞았다.
「홍, 선생을 찾던데요.」
「아 ──」
이미 각오는 했었으나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2
편집헌병이 자기를 찾더라는 말에 운옥은 놀라며
「그래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하고, 자세히 캐물었다.
「아침에 나나의 아버지 되는 사람을 만나러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구 했더니, 자기가 바로 그 나나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홍 선생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 나나를 데리고 갔지요.」
「다른 말은 없었나요?」
「아, 참 홍 선생이 돌아오시면 드리라고 하면서 편지 한 장을 써놓고 갔읍니다.」
「편지라고요?」
「네, 바로 이것인데요.」
원장은 테이블 서랍을 열고 봉투 한 장을 끄내면서
「왜 이리 좀 들어 오시지 않구……」
「괜찮아요.」
운옥은 권총을 허리춤에 찌른 후에 봉투를 받아 들고 들여다 보았다.
「홍 금순 선생 앞 ── 최 달근 ──」
이라고 씌여 있지 않는가.
「헌병은 몇 사람 왔었나요?」
「혼자 왔었읍니다. 바로 그 최 달근이라는 사람 혼자……」
그 말에 우선
「후우 ──」
한숨을 내쉬면서
「내게 무슨 편질까? ──」
설레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운옥은 최 달근의 편지를 초조한 눈초리로 읽어 보았다.
나나를 데리고 갑니다.
나나가 아비를 찾고 내가 딸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그것이 과연 나에게 있어서나 나나에게 있어서나 고마운 일인지 슬픈 일인지, 행복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를 나는 아직 분간하지 못하면서 나나를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 나는 아직까지 나의 과거에 있어서 일개 사정(私으로써 공무 情) (公務)를 저바려 본 적이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인 내가 오늘날 당신을 위하여 공무를 배반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과연 금후 나의 인생에 있어서 언제까지 지속(持續)될런지, 그것은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읍니다. 내일이라도 나의 생각이 그릇 된 줄을 깨달을 때, 나는 탑골동 예배당에서 애국가를 부른 사상범으로서 당신을 다시금 체포하러 올런지도 모르오니 당신은 당신대로 자신의 몸을 거두는데 있어서 선처하기를 바랍니다.
── 최 달근 ── 운옥은 얼른 편지를 접어 다시금 봉투에 쓰러 넣으며
「그럼 선생님, 편히 주무세요.」
하고, 황급히 유리문을 닫았다.
운옥은 허겁지겁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최 달근의 그 무척 차거우면서도 한편 또 무척 따사로운 배념을 감사히 생각하였다.
「그렇다. 최 달근은 종시 박 준길이에게 나의 처소를 알으켜 주지 않았고나!」
그러나 최 달근이의 말마따나 그의 생각이 언제 어느 때 다시금 변할런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당신은 당신대로 자기 몸을 거두는데 있어서 선처하기를 바랍니다.」
이 최후의 한 마디가 운옥의 신경을 긁어 쥐었다. 한 시 바삐 이 고아원에서 자취를 감추지 않으면 아니 될 운옥이었다.
숙희와 같이 지내던 자기 방으로 운옥은 들어가어 옷을 참기여 보따리에 쌌다. 쌀 적에 허리 춤에 찔렀던 쇠뭉치도 버선짝에 넣어서 같이 쌌다. 그리고는 연필과 종이를 끄내 차 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월을 썼다.
「원장 선생님, 저는 그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이 곳을 떠나오니 길이길이 불쌍한 아이들의 자부가 되어 주십시오.── 홍 금순 올림 ──」
그렇게 쓴 간단한 글월을 봉투에 넣어서 사람의 눈에 띄이기 쉽도록 방 한복판 적당한 장소에 놓아 둔 후에 운옥은 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운옥은 다시금 어린 것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침방 유리문 밖에서 작별의 인사를 눈으로 하고 반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정들어 버렸던 고아원을 등지었다.
캄캄한 밤이다.
그 캄캄한 밤 길을 정처없이 흘러만 가는 부평초와도 같이 운옥은 걸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