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47장

사랑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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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동안 곁눈을 파는 사이에 행복의 파랑새를 그만 홀랑 날려 버리고 만 김 준혁이었다.

그것이 벌써 넉 달 전 일이다.

그 당시는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리만큼 넋을 잃어버리고 무서운 고민 속을 헤매이던 준혁이었다.

그러나 진실한 과학자요 현실주의자인 준혁은 그 고민 속에 오랫동안 파묻쳐 있으면서 그 숨 막힐 것 같은 감상에 젖어 있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하루바삐 정신적으로 갱생할 길을 준혁은 찾았다.

그리고 그 갱생도상(更生途上)에서 준혁은 운옥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발견하였다. 그것은 결코 유경이에게 실연을 당한 커다란 공허감을 운옥이에게서 채우려는 공리적인 심산은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준혁의 생리(生理)와 이성관에는 유경이 보다도 운옥이가 알맞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오 유경이와 허 운옥이가 아무런 부대조건(附帶條件)도 없이 동시에 김 준혁이 앞에 나타났다면 …… 서슴치 않고 운옥을 택했을 것임에 틀림 없었다.

유경이가 떠나가 버린지 두 주일만에 김 준혁은 유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서신을 받았다.

준혁 오빠.

오빠는 나의 육체의 절반 이상을 본, 이 세상에서는 단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정(旣定) 사실을 무조건 승인을 하고 오빠의 진실하고 따사로운 품안에서 나의 보잘 것 없는 일생을 보내 볼 생각도 해 봤어요.

그러나 준혁 오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꿈만 먹구 사는 맥(.)의 동족(同族)인가 봐요. 그래서 일 년만 더 一[ ] 꿈을 꾸겠노라고 오빠에게 간청을 했었죠? 그리고 一 [일]년만 더 오빠 노릇을 하여 달라고 어리광을 피었죠?

그러나 오빠, 그 맥이 마침내 현실을 맛 보았답니다. 맥에게도 꿈이 있나 봐요. 꿈만 먹고 산다는 맥에게는 현실이 꿈이 아닐까요?

준혁 오빠.

오빠가 그림자라고 깨우쳐 준 행복의 실체(實體)를 유경은 마침내 붙들었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에도 행복의 그림자가 아니고 행복 그 자체였읍니다.

나 준혁 오빠에게 대해서 무척 미안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조금도 쓰고 싶지 않아요. 一[일]년 동안이라는 조건이 붙었던 오빠에게서 인제는 그 조건을 영구히 떼어 버릴 수 밖에 없는 유경이가 되었어요.

원컨대 영원히 유경의 오빠가 되어 주세요.

동생 유경 올림이 편지를 읽고 준혁은 완전히 유경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운옥에게 향하는 자기의 정열이 조금도 허위가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시간적으로 유경이 보다 먼저 운옥을 만나지 못한 것만이 슬펐다.

「왜 좀 더 일찍암치 운옥을 만나지 못했는고?… 유경은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이나 운옥을 현실 속에서 힘차게 호흡을 하고 있는 사람이로다!」

유경이가 자기에게 기다림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최후의 선언을 한 것처럼 준혁이도 은인인 오 창윤씨 내외에게 대하여 기다림의 초조를 덜어 드리기 위하여 오늘 밤 아현동 댁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 밤으로라도 나는 운옥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할 수 밖에 없다!」

준혁은 아현동 고개를 내려 오면서 힘차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애꾸눈 박 준길의 얼굴이 또다시 병원에 불쑥 나타날 것 같아서 장 일수가 북지로 떠나가 버린 후에도 운옥은 그냥 청량리 집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운옥의 입장으로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준길은 다시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될 수 있는한 운옥은 외출을 삼가고 병원에만 파묻쳐 있었다.

신 성호는 그동안 두어 번 병원에 찾아 와서 장 일수가 무사히 북경에 도착 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김 준혁 박사와 운옥에게 진심으로 치사를 하였다.

그때 운옥은 장 일수의 소식 보다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의 소식을 살그머니 물어 보았다.

그리구 그 꼬마 신랑이라는 「 분두 무사히 동경으로 건너 가셨는지요?」

「네, 바루 그 이튿날 떠났지요.」

「모두들 무사히 가셔서 기쁘시겠어요. 참 어쩌면 그처럼 사이가 좋으실까? 학생 땐 무슨 삼총사라고 그랬다면서요?」

「아, 장군에게 모두 들으셨군요. 하하하……」

신 성호는 유쾌한 웃음을 남겨 놓고 돌아갔었다.

이리하여 간신히 장 일수의 침묵의 정열로부터 몸을 살그머니 빼낼 수 있는 운옥이었다. 그리고 애꾸눈이 박 준길이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비교적 평온한 생활이 일시적이나마 운옥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아, 수난의 여인 허 운옥의 고달픈 삶이여!

젊은 혁명가 장 일수의 영웅적인 침묵의 정열보다도 좀더 현실적인, 좀 더 진실성을 지닌 김 준혁 박사의 강렬한 정열이 운옥의 고달픔을 한층 더 고달프게 하였던 것이니, 박 준길의 야수의 정열과 장 일수의 영웅적인 정열에도 마침내 휩쓸려 버리지 않은 운옥이도 김 준혁의 가장 도덕적인, 그리고 인격적인 정열에 접할 때마다 자칫하면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릴 뻔한 적이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

만일 허 운옥의 과거에 백 영민이라는 존재가 없이 준혁의 애정을 맞이 하였다면 운옥은 아무런 비판도 없이 준혁의 품 안에 들었을런지도 몰랐다.

그 묵직한 정열 속에서 운옥은 삶의 보람을 찾았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렸을 것이다.

「선생님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운옥은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실연의 고독에서 오는 일종의 희롱이 아닐까?」

사실 처음에는 옆에서 보기에도 가엾으리 만큼 준혁은 괴로워하고 쓸쓸해 하였다.

그래서 운옥은 준혁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마치 자기가 영민에게 받은 것과 똑같은 그러한 혹독한 정신적인 아픔임을 운옥은 한없이 마음 속으로 동정하였다.

그 동정 속에서, 그 위안 속에서 준혁은 마침내 소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생 도상에서 준혁은 운옥의 애정 속에 완전히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밤 열시 준혁이가 ── 아현동에서 돌아 왔을 때 운옥은 텅 비인 진찰실에서 준혁의 털 조끼를 뜨고 있었다.

「선생님, 또 약주 잡수셨어요?」

「아, 조금 먹었습니다.」

운옥은 준혁의 손에서 스프링을 받아 걸면서

「왜 인젠 약주 안 잡수신다구 그르시더니……」

유경을 떠내 보낸 후, 먹을 줄도 모르는 술로 동무를 삼아 온 준혁이었다.

「잡수실 줄두 모르는 술, 인제 정말 그만 두셔야지요. 받지 않는 술은 몸에 몹시 해롭다지 않아요?」

「운옥씨, 고맙소!」

그러면서 준혁은 귀여워서 못견디겠다는 듯이 우뚝 마주 서서 운옥의 가련스런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본다

「아아, 선생님두, 제 얼굴을 왜 자꾸만 들여다 보세요.」

「…………」

「아이, 선생님, 무서워요. 암만해두 오늘 밤 약주가 좀 과하셨나 봐요.

── 자아, 어서 안방으로 들어 가서 주무셔야겠어요.」

「…………」

그때, 준혁은 힘 있는 어조로

「운옥씨.」

하고, 불렀다.

「네?」

「운옥씨」

「선생님, 왜 그러셔요?」

「운옥씨에게 조용히 이야기 할 말이 있읍니다.」

「무슨 말씀이신데?……」

「여기 좀 앉으시요.」

준혁은 암록색 팔거리 의자에 털썩 앉으며 절반이나 짠 …… 털 조끼와 실 뭉치가 얹혀져 있는 걸상을 자기 앞으로 당겨 놓았다.

운옥은 실 뭉치와 털 조끼를 자기 무릎 위에 집어 올리며 준혁이 앞에 조용히 앉았다.

이제부터 내가 운옥씨에게 「 하는 말을 운옥씨는 솔직하게 들어 주기 바랍니다. 제 말에는 농간이 없을 것이며 허위와 장식이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기에 그처럼……」

운옥은 똑바로 준혁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술 기운을 빌어서 하는 말이라고 넘겨 잡아도 아니 됩니다. 오늘은 우연히 술을 몇 잔 먹었지만……」

「혹시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셔요?」

운옥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아현동 댁에서 누구하구 말 다툼 같은 것이나…」

「운옥씨.」

「네?」

「나 혼자 생각으로서는 벌써부터 결정된 문제였읍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운옥씨는 나를 무서운 고민 속에서 건져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운옥씨의 다사로운 배념(配念) 속에서 나는 완전히 소생하였읍니다.」

「…………」

운옥은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나로 하여금 좀 더 …… 운옥씨와 만나게 하여주지 않는 신(神)을 나는 원망하고 있읍니다.」

「…………」

운옥은 머리를 푹 숙인채 가만히 손가락을 놀려 살그머니 조끼를 뜨기 시작하였다. 아주 조용한 모습이었다.

준혁이가 흥분하면 흥분할 수록 심산의 호수인 양 운옥은 조용하다. 폭풍 지대(暴風地帶)와 무풍지대(無風地帶)의 경계선을 운옥은 그으려는 것이다.

그 경계선으로서 운옥은 일부러 참대 바늘을 놀리는 것이다.

「나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로서 깨달았읍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완전히 자존심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추호의 허세(虛勢)도 있을 수 없읍니다. 나는 그런 사랑을 운옥씨 앞에서 용감하게 고백할 수가 있읍니다!」

「…………」

운옥의 손가락은 점점 더 열심히 바늘을 놀리기 시작하였고 운옥이의 표정은 점점 더 고요해졌다.

자칫하면 자기도 폭풍지대의 거주인(居住人)이 될런지 모를 위험을 전신에 느끼면서 운옥은 열심히 바늘을 놀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