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한분
편집1
편집「운옥씨도 아다 시피 나는 과거에 어떤 여인을 한 사람 사모한 적이 있었읍니다. 시간적으로 무척 오랫동안 사모해 왔읍니다.」
준혁의 사랑의 고백은 열렬히 계속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가만히 과거의 자기를 회상해 볼 때, 그처럼 참되게 사랑했었다고 믿었던 나 자신을 돌아 볼 때, 나는 실로 많은 자존심과 허세를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였읍니다. 나의 자존심이 짓밟힐 때 나는 반발하였읍니다. 행동으로 반발을 못했을 때는 마음으로 반발을 하였읍니다.」
「…………」
아까부터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버린 운옥이었다. 오르지 준혁이의 털 조끼를 뜨는 것이 자기의 천직(天職)인 것처럼 운옥의 손가락은 잠시도 쉴 사이가 없다.
「운옥씨!」
「…………」
운옥은 머리도 들지 않고 손가락도 쉬지 않는다.
「나는 운옥씨 앞에서 완전히 자존심을 버릴 수가 있읍니다! 운옥씨의 그 성스러운 애정 속에서 나의 일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운옥씨!」
「…………」
「운옥씨에게서 나는 성모마리아의 어여쁨을 발견 하였읍니다! 운옥씨는……」
그때, 운옥은 비로소 손을 멈추고 조용히 머리를 들었다.
「선생님, 어서 들어 가셔서 주무셔야 되겠어요. 너무 흥분하신 것 같아요.」
그순간 준혁은 바늘을 쥔 운옥의 두 손을 덤썩 붙잡으며 애원 하듯이 외쳤다.
「나와 결혼을 하여 주시요! 운옥씬 나의 아내요, 나의 어머니요,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시요! 운옥씨는 나를 무서운 고민의 구렁지에서 건져 준 천사!
나를 다시금 그 혹독한 고독 속에 던져 넣지 말아요! 아니, 그보다 몇 갑절 몇 십 갑절의 무서운 고민 속에 쓸어 넣지 말아요! 운옥씨 앞에 나의 자존심은 있을 수 없어요! 나는…… 나는 이처럼 운옥씨 앞에 머리를 좁고 ……」
준혁은 운옥의 무릎 위에서 운옥의 두 손을 잡고 그 위에다 흐트러진 머리를 조았다.
운옥은 준혁이가 무척 가엾어 준혁이에게 잡혔던 오른손 하나를 살그머니 빼어 준혁이의 흐트러진 머리가락을 쓰다듬어 올리려다가 너무 송구하여 후닥딱 놀래면서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저 같은 미련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니…… 전 정말 뭐라고……」
운옥은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고맙읍니다. 선생님!」
운옥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운옥씬 무슨 말을…… 내가 운옥씨에게 머리를 숙이고 이처럼 비는 것이 아니요? 나와……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나와 결혼을 하여 주시요!」
「그러면 선생님!」
하고, 그때 운옥은 머리를 들며 물었다.
「내일 아침…… 내일 아침 대답을 하여 드려도 괜찮을까요?」
「아무 때도 좋읍니다! 내일이구 모레구, 아니, 一[일]년 후건 十[십]년 후건 나는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그러면 됐어요. 내일 아침 일찍감치 선생님을 뵙겠어요.」
「아, 운옥씨!……」
준혁은 희열이 만면하여 운옥의 손을 다시 잡았다.
2
편집이튿날 아침, 준혁은 자리 속에서 가장 행복한 아침을 맞이하였다.
어제와 오늘이 다름이 없건만 들창으로 스며드는 복숭아 빛 아침 햇살이 이 집에 행복을 가져오는 천사와도 같이 준혁이 앞에 찬연하다.
지나간 넉 달 동안의 아아, 그 암담하던 생활이여, 잿빛갈 돌던 태양이여!
「가거라! 모든 암흑과 온갖 불행은 모두 내 앞에서 물러 가거라!」
준혁은 한 번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그러면 식은 언제 지날꼬?…… 五[오]월이 좋을까? 六[유]월이 좋을까?
생명의 五[오]월? 신록의 六[유]월! 五[오]월은 너무 빠르니까 신록의 六 [유]월로 정하자.」
준혁은 손을 뻗쳐 머리맡에서 담배를 더듬어 한대를 피워 물고
「오 선생과 사모님이 무어라 하실까? 기뻐할까? 슬퍼할까?…… 하였튼 부모처럼 모셔 온 오 선생 내외분이다. 이삼 일 내로 찾아가서 이 경사를 보고 하고 오지 않으면 안되겠다.」
준혁은 담배 연기를 허공에 후우 하고 내 뿜으며
「아, 오늘 저녁에 운옥이와 같이 나가서 저녁을 먹고…… 그리고는 약혼 반지를 사야겠다!」
준혁은 약동하는 생명의 환희를 전신으로 호흡하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곧 세수를 하고 조반을 먹었다.
진찰실로 나갈 때 준혁은 벽에 걸린, 무슨 약방이라 상호가 박힌 조그만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 보았다. 자기 눈에도 완연히 띄우리만큼 생기 있는 얼굴빛이다. 행복한 미소를 거울 속에 남겨 놓은 채 준혁은 안방을 나섰다.
진찰실은 청결히 치워져 있었다. 경숙일 중심으로 한 간호원 세 사람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옥은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 이 화분, 아까 식전에 운옥 언니가 꽃방에 가서 사다 놨어요.
아주 꽃이 이쁘죠?」
경숙이가 아침 인사를 하고 나서 하는 말이다.
진 분홍 꽃이 다닥다닥 핀, 가지가 멎들어지게 구부러진 안즌뱅이 매화가 깨끗이 정돈된 준혁의 테이블 위에 정취있게 놓여 있지 않는가.
「아아, 이쁜 꽃인걸!」
진찰실이 갑자기 화안해진 것과 마찬가지 정도로 준혁의 가슴이 갑자기 화려해지는 것이다. 운옥이의 숨은 정이 준혁은 알뜰하게 반갑고 기쁘다.
「그래 운옥씬 어딜 갔소?」
「편지 붙인다고 나갔어요」
그러면서 경숙은 약국으로 들어가고 다른 간호원 들은 대합실로 나가서 소제를 시작하였다.
준혁은 행복한 웃음을 얼굴에 지으며 팔거리 의자에 걸터 앉아 마치 운옥을 바라다 보는 것처럼 진분홍 매화 꽃을 귀엽게 들여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행복이란 것은 먼 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눈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뜩 책상 설합을 열었을 때였다.
선생님께 드림 이라고 ── 씌어진 봉서가 한 장 준혁의 시선을 붙잡았다.
발신인의 성명은 없으나 분명희 운옥의 글씨였다.
그 순간 준혁은 처음으로 사랑의 편지를 받은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며 봉서를 떼었다.
3
편집운옥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선생님을 모신지 一[일]년 유여 월은 저에게는 평온한 생활의 복음자리였읍니다. 남과같이, 꽃피는 아침에 꽃을 사랑하고 달 뜨는 저녁에 달을 즐길 수 있는 평화로운 삶의 한 토막이었읍니다. 선생님의 다사로운 사랑과 높으신 혜덕을 입사와 운옥은 분에 넘치는 행복 속에서 오랫동안 잊어 버렸던 안식의 잠자리를 얻었사오나, 이 태산 같은 은혜를 무었으로써 보답하오리까.
선생님, 운옥은 송구합니다. 보잘것 없는 운옥이었읍니다. 보잘것 있는 사람처럼 대해 주신 선생님을 생각할 때 운옥은 황송하여 울었읍니다.
특히 어젯밤 주신 선생님의 말씀, 너무나 송구하여 입이 있으되 말을 지을 수가 없었사오니 이는 오로지 보잘것 없는 운옥이의 행복이 과분하게 컸던 때문이 올씨다. 그리고 그 과분한 선생님의 애정 속에 젖어 어제 하룻밤을 운옥은 뜬 눈으로 새웠읍니다.
선생님, 그러 하오나 선생님의 그 넓으신 사랑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운옥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제게는……
준혁은 후딱 편지에서 시선을 들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고?……」
준혁은 다시 편지를 읽는다.
……제게는 말 못할 그 어떤 사정이 있사오니 원래 같으면 그 사정을 선생님께 죄다 여쭈운 후에 용서를 빌 것이오나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운옥은 다만 선생님의 넓으신 배념과 용서를 비오며 선생님의 곁을 떠나오니 원컨대 선생님, 제가 끝없이 존경하옵는 선생님께서는 제가 떠나는 이유를 묻지 마옵시고 제가 떠나간 곳을 찾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면 선생님, 약주 많이 잡수시지 마시고 밤 늦게 앉아 계시지 마시고 내내 건강하시와 만백성에게 인술을 베푸시어 사회를 복되게 하시기 간절히 비오며 운옥은 갑니다.
四[사]월 二十八[이십팔]일 새벽 허 운옥 드림 준혁은 편지를 움켜 쥐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경숙이!」
하고, 부르짖는다.
「네?」
약국에서 쿵쿵쿵 경숙이가 뛰어 왔다.
「운옥씬 어디 갔소?」
「편지 붙이려 갔어요.」
「조반은 먹었소?」
「안 먹었어요. 일찌암치 나가서 화분을 사 가지고 들어 왔다가 다시 편지를 잊어 먹었다구 하면서…」
「그래 나가는 걸 보았소?」
「못 봤어요.」
「그럼 빨리 방으로 가서 운옥이의 물건들이 그대로 있나, 보고 오시요.」
「네.」
경숙은 쿵쿵쿵 복도로 뛰어갔다가 이윽고 다시 쿵쿵쿵 돌아왔다.
「없어요! 언니의 봇다리가 없어졌어요.」
「잘 알았소! 물러 가시요.」
경숙은 눈이 동그래진채 진찰실을 나와 동료들이 소제를 하고 있는 대합실로 뛰어 들어 갔다.
준혁은 허탈한 사람인 양 털썩 의자에 몸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갔다! 운옥은 갔다! 매화 화분을 선물로 남겨 놓고 허 운옥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