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7장

파랑새는 날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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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의 뿌리를 가진 인생관과 무게 있는 정열은 마침내 하나의 윗트(機智 [기지])와 재롱으로서 힘써 그으려하던 오 유경의 경계선을 돌파하고야 말았다.

정면으로 준혁의 정열과 마주선 오 유경이었다. 조만간 오리라고 믿었던 준혁의 정열이었으며, 그리고 만일 백 영민이란 하나의 새로운 꿈이 유경의 생활권내(生活圈內)에 뛰어 들지 않았던들 조만간 이 믿음직한 사나이의 정열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게 되리라고 믿었던 유경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유경이.」

준혁은 침대 앞으로 의자를 바싹 당기며 유경을 불렀다.

「네?」

새하얀 잠옷을 입은 유경은 침대 위에 업딘 채 유리창에 아롱진 수증기 방울을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으로 빡빡 문질르고 있다.

「아까 사모님이 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이번 방학엔 약혼식이라두 지내구 동경엘 가두 가라구요?」

「그래 뭐라구 대답했소?」

「하룻밤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구 그랬죠 뭐.」

유경은 유리창에서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열심히 손가락으로 문질더 댄다. 손가락이 휘어, 아프도록 문질러 댄다. 왜 그러고 있는지 유경 자신도 알수 없다.

「그래 생각해 봤어요?」

「오빠!」

하고 유경은 그때 힘있게 부르며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나 좀더 이대루 두어 주세요, 네?」

준혁은 놀래어 유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대루 一[일]년만 더 내버려 둬 주세요. 一[일]년만 ── 꿈이, 꿈이, 좀 더 아름다운 꿈이 있을 것만 같아요. 그것이……그먼 산너머에 있는 그것이 행복 자체가 아니고 <행복 같은 것> ── 행복의 그림자 일런지 몰라두……」

「그러나 유경이……」

「오빠, 一[일]년만 더 유경이의 오빠가 되어 주세요 네?……아버지와 어머니는 날 어린애처럼 생각하구 걱정들을 하지만……오빠, 나 사람 잘못 보지 않어요. 나 준혁 오빨 잘못 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一[일]년만 더 꿈을 꾸고 싶어요. 꿈……꿈……그 꿈이……」

창 밖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밤이다.

「유경이.」

「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꿈이 깃들인 먼 산을 넘으려면, 거기에는 무성한 숲이 있고 험준한 골짜기가 있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었어?」

「넣었어요.」

「그 험준한 골짜기에서 쓰러져도 좋은가?」

「하는 수 없죠. 제가 좋아 떠난 길이니까요.」

「음 ──」

준혁은 깊은 신음을 하였다.

「오빠가 날 진정으로 귀여 한담, 이소원 들어 주세요, 네?」

「행복이 아니고 행복의 그림자라도 후회를 안 한다면……」

「아뇨!」

유경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음, 그이가……백 영민이란 학생이 유경의 마음을 그처럼 굳세게 붙잡았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준혁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눈오는 창 밖과 우뚝 마주 섰다.

「……? 백 영민씨 아세요?」

「그일…… 영민씨 어떻게 아세요?……」

유경은 후닥딱 놀래어 눈 내리는 캄캄한 들창 밖과 우뚝 마주선 준혁의 뒷모양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오빠, 그일……그일 어떻게 아세요?……」

「………」

팔짱을 끼고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김 준혁 박사였다.

「준혁 오빠! 어떻게 그일 아세요? 왜 대답을 안하세요?」

유경은 거의 부르짖 듯이 그렇게 준혁에게 대들어 물었건만 준혁은 통 대답이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준혁이가 백 영민을 알 리는 만무하거늘, 그리고 그 백영민이란 학생과 유경과의 관계를 알 리가 만무하거늘, 준혁은 백 영민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것은 참으로 오 유경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경인 몰라도 준혁은 백 영민이란 하나의 떳떳한 존재가 오 유경에게 아름다운 꿈을 던져주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경이.」

「네?」

「유경인 아까 날 보구 뭐라고 그랬었지? 이번 방학엔 암만해두 내가 좀 이상하다고 ── 어딘가 우울하고 때로는 심각하고……」

「그 이유를 알으켜 줄까?」

「………」

유경은 빤히 준혁의 시선을 맞이하였다.

「十[십]년 동안이나 제 것인 줄 알고 고이고이 길러오던 한 마리 귀여운 파랑새가 다른 사나이……백 영민이라고 부르는 낯설은 사나이의 손으로 나라 가려는 걸 보고도……유경인 날 우울하다고 원망을 할텐가?……」

「………」

「저번 수술을 한던날 밤, 유경이가 마취로부터 깨어날 때, 유경인 북으로 떠나간 백 영민의 이름을……」

「아, ──」

유경은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저 강렬한 마취제인

「에 ─ 텔」에서 깨어날 때 ── 그렇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는 곧잘 잠고대처럼 중얼거린다는 말을 유경은 여러번 들었다.

아아 그랬던가 그러고 , ! 보니 정거장에 나왔을때는 그렇지도 않던 준혁이가 수술을 한 다음부터 갑자기 우울한 사람이 되어버린 사실을 유경은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회상하여 보았다.

「오빠, 용서하세요!」

유경은 그만 격하여 침대 위에 쓰러지면서, 엎디어 울었다.

준혁은 천천히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서 이불을 끌어올려 흐늑거리는 유경의 어깨 위에 가만이 덮어 주면서

「유경씨!」

하고 다시 존칭을 써서

「여기에는 누구 한 사람 잘잘못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요. 그러니까 용서를 빌 필요도 없는 것이며 용서를 하여 줄 사람도 없는 것이요.」

그 한 마디를 조용히 남겨 놓고 준혁은 유경의 병실을 나와 진찰실로 들어갔다.

밤 아홉 시 ── 텅 비인 진찰실이다.

전기 스토 ─ 브가 빨갛게 닳아 올랐다. 준혁은 테이블 앞에 앉으면서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좀 있는가?」

그리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테이블 위에 쓰러지듯이 엎디면서 중얼거렸다.

「날아 갔다. 파랑새는 홀랑 날아가고 말았다!」

너무 쉽사리 날아가버린 파랑새였다. 그리고 너무 쉽사리 날려 보낸 준혁 이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준혁의 마음 한 구석에 광명과 함께 탐탁하니 자리를 잡고 있던 행복의 매듭(節[절])이 뻥 뚫려진 것과 같은 무서운 공허감이 일순간에 김준혁을 질식할 것처럼 덮어 눌렀다.

오랫동안 혀 끝으로 대굴대굴 굴리던 사탕알을 잠깐 곁눈을 파는 사이에 홀랑 땅에 떨어뜨려버린 어린애와도 같은 허무감이다.

눈은 그칠줄 모르는 듯이 자꾸만 내리고 준혁은 쓸쓸한 진찰실 안에서 언제까지나 무서운 허무와 마주앉아 있었다.

「백 영민! 백 영민!」

준혁은 열병 환자 처럼 중얼거리며 처방전(處方箋)위에다 “Paik Young Min”(백영민)이라는 글자를 마치 무슨 약 처방이나 한 듯이 수 없이 써 본다.

「백 영민이란 대체 어떠한 사나일까? 만일 그의 인격이 나의 것보다 휼륭하다면 나는, 나는 분하지만 유경을 그의 품안으로 날려 보내도 한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그러나……그렇지 않다면……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희롱을 즐겨하는 신의 불공평한 장난일 수 밖에 없다. 아아, 유경이……」

준혁은 또다시 머리를 움켜쥐고 책상 위에 엎디었다.

그때 현관 문이 열리며 검은 손가방을 든 파출부 허 운옥이가 눈을 털면서 병원 안으로 선뜻 들어 섰다.

운옥은 대합실과 약국을 잠깐 기웃하고 나서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곧 진찰실 문을 열었다.

「……?」

운옥은 테이블 위에 엎디어 있는 준혁을 발견하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준혁의 옆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운옥은 재빠르게 벽에 걸린 준혁의 외투를 벗기어 들고 준혁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이 어깨 위에 씌워 주었다.

「선생님, 감기 드시면 어떻거시려구?……」

준혁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아, 운옥씨가 아니요?」

「선생님, 어디 편찮으시나요?」

「어떻게 이 밤중에……?」

「안색이 나쁘신 것 같으신데……?」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소?」

「눈이 벌개 졌어요, 선생님 신열이 나시는 게 아니세요?」

「………?」

「………?」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말이 얽히질 않는다.

그것은 분명히 대화(對話)는 아니었다.

준혁은 이윽고 운옥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맞은편 벽에 걸린 조그만 체경을 들여다 보았다. 눈이 발갛다.

「선생님, 몸이 고단한신데 무릴 하신 게 아니세요?」

운옥은 걱정스러운 눈치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별로 무리랄 것도 없지만……」

준혁은 허벙지벙이다.

「신열이 있으시죠?」

「아, 약간……」

「어서 들어가서 누셔야 겠어요.」

운옥은 손가방을 테이블 위에 던지 듯이 하고 거의 달음박질을 하듯이 진찰실을 나와 좌우에 입원실이 주루루 달린 복도를 거쳐 준혁이가 거처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