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8장

제 2의 연인 편집

1 편집

병원에선 간호부요 회계요, 안방에선 가정부요 침모인 허 운옥이었다.

입원 환자가 많아 식모가 혼자서 손이 돌지 않으면 부엌에도 운옥은 섰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애들두 방이나 좀 치어 드리지 않구.」

먼지가 하얗게 뜬 물접시이며 담뱃재가 가득 찬 재털이며 벗어 놓은 양말 짝이며 펴진 채 굴러댕기는 책, 잡지 같은 것이 방안에 너저분히 널려져 있다.

그러나 게으름뱅이 식모나 까불어대는 나어린 간호원들에게는 이 방안에는 통 책임이 없다.

운옥은 아래목으로 내려가 방바닥을 만져 보았다. 차지는 않으나 덥지도 않다.

「어멈.」

식모를 불렀다.

「네.」

뜰 아랫방 문이 열리며

「아이유, 언제 오셨수?」

「지금 왔어요. 그런데 안방에 불 좀더 때 줘요. 선생님이 감길 드시나봐요.」

「아이유 어쩌면……」

식모는 수선을 떨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운옥은 방안을 깨끗이 치고 아랫목에 이부자리를 폈다.

독신자에게는 빈 틈이 많다. 그 많은 빈 틈을 운옥은 돌아가면서 꼭꼭 막았다. 나 어린 영민을 五[오]년 동안이나 모신 운옥이가 아니었던가.

이윽고 복도에서 콩콩 소리가 나더니 문이 홱 열리면서

「아이 언니, 언제 오셨수?」

경숙이가 뛰어 들어오며 운옥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아이……아이구 숨……숨이 막혀서……」

운옥은 경숙의 팔을 끌르려 한다.

「언니, 보구 싶었수! 흐응……」

경숙은 어린애처럼 운옥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어리광을 부린다.

「난 꼭 언닐 떼우는 줄만 알았구려.」

「경숙이두……누가 나 같은 걸 떼 갈 사람이 있을라구?」

「말 맙슈. 파출부에겐 유혹이 많다던데 뭐.」

「유혹?……흥, 요것이 못하는 재롱이 없어.」

그러면서 운옥은 귀여운 듯이 경숙의 몸둥이를 꼭붙안아 주었다. 장 일수의 타오르는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늘 언니하구 같이 자다가 혼자 자려니까 가슴패기가 허순해서 잘 수가 없는걸 뭐.」

「어린앤가?」

「언니 또 가슈?」

「아니.」

「아이 좋와. 좋은 언니야!」

경숙은 재빠르게 운옥의 뺨에다가 키쓰를 한다.

「요것이……그러믄 못써. 자아, 저리 비켜.」

운옥은 경숙의 어깨를 살그머니 밀면서

「다들 어디 갔어?」

「정동 예배당에 성탄제 구경 갔다우. 나 혼자 당번으로 남었지. ── 아, 그런데 언니!」

하고 그때 경숙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낮으막한 목소리로

「뉴 ─ 스가 있어. 아주 굉장한 뉴 ─ 스야.」

「뉴 ─ 스?」

「인제 병실에 검온을 하러 들어갔다가 진찰실엘 들렸드니, 선생님이 책상에 엎디어서……이렇게 머리를 움켜쥐구……」

경숙은 두 손으로 머리털을 움켜쥐는 흉내를 낸다.

「아, 그것 말이야? 그건 선생님이 신열이 나서, 오한 때문에 그러시는 거야. 그래 지금 식모더러 불을 때라구 그랬어.」

「오한?……후후훗……」

경숙은 웃음을 죽이며

「오한 난 양반이 이렇게 머리를 독수리처럼 움켜 쥐구, 아아, 유경이, 유경이 ── 하고 외쳐요?」

「유경이라니?……」

2 편집

경숙은 눈이 둥그래지며

「언닌, 一[일]호실에 입원한 오 유경이란 여잘 모르슈?」

「몰라, 어떤 여자야?」

「아 저 아현동 오 선생 따님 말이예요. 이 병원의 물주(物主)……아, 참 언닌 정말 모르겠수. 언니가 파출부로 떠나는 날 저녁에 수술을 했다우.」

오 창윤과 김 준혁 박사와의 관계라던가, 또는 멀지 않아 동경 가 있는 오씨의 딸과 준혁이가 약혼을 하리라는 추측은 벌써부터 운옥도 하고 있었다.

「 그래 그이가 무슨 수술을 했어?」

「맹장염.」

「경과는 어때?」

「아주 좋아요. 이삼 일 후엔 퇴원을 한다구요.」

「아이 다행이지.」

「한번 보세요. 언니처럼 이쁘구 언니처럼 똑똑허구……동경 무슨 대학엘 다닌다는데, 아이 공불 많이 한 사람은 어딘가 좀 건방진 것같아서 난 싫어요.」

「대학엘 댕긴다믄 건방져두 하는수 없지.」

「글쎄 아까 一[일]호실에 검온을 하러 들어갔더니 유리창에 어린 수증기에다 이렇게 썼겠죠. ── 행복은 어디 있나요! 행복은 행복을 그리워 하는 순간에 있다. 그리고 또 뭐라고 썼더라?……그래 우리 언니두 그런 시 같은 걸 좋아한다구, 내 저번 언니가 써준 한실 끄내 뵜죠.」

「아이 경숙이두……그런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게 아니래두!」

「그랬더니 얼굴이 샐쭉해 지면서 암말 않겠죠. 그래 난 나오구 말았어요.」

「그이처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의 생각은 우리들과 다를테니까……」

「그런데 말이유 언니. 내가 나오자 선생님이 얼마 있다가 一[일]호실엘 들어 가겠죠 그래 . 무슨 이야길 하나 하구 문 밖에서 가만히 들어 봤어요.」

「어쩌면 경숙이두……」

「말이 잘 들리지 않아서 똑똑힌 모르지만……툇자야, 툇자!」

「툇자라니?」

「발길로 채웠다는 말이지 뭐야요. 그 여자에겐 딴 남자가 있대요. 뭐 박응빈(백 영민을 잘못 들은 것)이라던가 뭔가 하는 사람이래요.」

「박 응빈?……」

「아, 참 내가 깜박 잊어 먹었네. ── 저번 수술할 때두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박 응빈, 박 응빈 하면서……뭐라구 그러드라?……뭐 내 아름다운 꿈을 담뿍 싣고 북쪽 나라로 훨훨 날아간 박 응빈, 박 응빈……그래서 선생님이 지금 머리털을 독수리처럼 쥐어 뜯는 거야요, 언니 뭘 아슈……」

「오오, 그래?……난 또 감기가 드시나 하구……」

「그런데 언니 주의 하슈!」

「뭣을?」

「선생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는 오 유경이었고 그 담으로 좋아하는 이는 언니야요. 그러나 인젠 순서가 꺼꾸로 됐을 꺼야요. 언니 담에 유경이 ── 하하하……아까 언니가 선생님의 요를 펴구 있는걸 보니 어쩐지 꼭 언니가 사모님 노릇을 할것만 같구료! 하하하……」

그 순간 경숙이의 철 없는 웃음 가운데 운옥의 표정이 꾁하고 소리를 쳤다. 그리나 다음 순간 운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어조였다.

「경숙이!」

「응?……」

「말을 삼가요!」

「………」

「말이란 하면 되는게 아니야. 생각해서 해야만 되는 거야.」

그때 복도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준혁의 발자국 소리다.

경숙이가 냉큼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과 엇바꾸어 준혁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