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6장

행복은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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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 있나요 행복은 행복을 그리워하는 순간에 있다 행복은 어디 있나요 행복은 행복은 그리워하는 마음에 있다 오오, 행복을 그리워하는 순간이여, 마음이여 새하얀 높다란 벽이 네모나게 둘러싼 호심(湖心)인양 고주낙한 병실이다.

하얀 백포를 덮은 침대 위에 엎디어 백어(白魚)같이 희고 날씬한 손가락 끝으로 수증기 어린 유리 들창에다 그적거려 본 유경의 심심풀이다.

뗑, 뗑, 뗑, 뗑……하고 성탄제 종소리가 평화스레 들리는 밤 ── 창 밖엔 눈이 온다. 희뜩희뜩 들창 유리에 나부끼는 눈송이가 하나, 둘, 셋, 넷……그렇다 十二[십이]도나 되는 방안 온도 때문에 눈송이는 날아 오기가 바쁘게 녹아버린다.

「행복은 어디 있나요?」

그렇다. 하늘이 맑다면 별이라도 세어보고 싶은 밤이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어린이들은 왜 별을 셀 때 자기도 함께 셀까?…

「행복은 어디 있나요?」

그렇다. 하늘에 달리 있다면 이 태백이와 함께 돌아보고 싶은 밤이다.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다지 않어?」

옥 도끼 금 도끼로 찍어 다듬어서 초가 三[삼]간 집을 지어 그이와 함께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이야기하고 싶은 밤이다.

아까 낮에 어머니가 오셔서 하신 말씀이, 이번에는 약혼식이라도 지나고 동경으로 가라고 ──

「약혼식이라뇨?」

알면서도 유경은 한사코 물었더니

「준혁 오빠와 말이다.」

「아이 웃어. 내 어머니 눈치 벌써부텀 다 알구 있었다우.」

「그러기에 말이다. 아버지두 그러시구 ── 또 너두 인젠 말만 한게……」

「왜 소만은 못 한가요?」

「얘 잠자쿠 어미 말 끝까지 못 듣겠니?」

「아이 글쎄 어머니, 웃어 죽겠는걸요. 하하하……」

유경은 허리를 꼬며 자즈러지게 웃는다.

「저게 아직 어린애지 글세. 준혁 오빠 만한 사람도 그리 쉽지 않단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께서 눈여겨 보시구……」

「아이 웃어! 누가 글세 오빠와 약혼식을 한담? 어머니두 참……」

「얘애, 글쎄 그런 쓸데없는 소릴랑 작작하구 어미 말 귀담아 들어야 하느니라.」

「어머니, 너무 웃기지 마세요 네. 그러다가 수술한데 실밥이 끊어짐 또 준혁 오빠가 이렇게 눈을 무섭게 해 가지구……」

유경은 그러면서 준혁의 흉내를 내는 식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무서운 눈으로 한 번 흘겨 본다.

「원, 저게 글쎄 언제 어미 말을 귀담아 들을런지 참……」

「어머니, 내 잘 생각해 보구 대답할께요, 네? 자아 손가락 ──」

유경은 자기 새끼 손가락으로 어머니의 새끼 손가락을 더듬어 잡고 서너 번 힘있게 흔들며 자아 약속 「 , ! 내 오늘밤 곰곰히 생각해 보구 대답 할께요. 아셨죠?」

유경은 아까 낮의 일을 그렇게 생각하며 흰 벽을 향하여 살그머니 돌아 누웠다. 돌아 누워서 흰 벽을 향하여 조용히 물어 보았다.

「행복은 어디 있나요?」

「녹크」 소리와 함께 간호부 경숙이가 체온기를 들고 들어 왔다.

「인젠 열두 없는데 재잖어두 되잖어요?」

유경은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간호부를 쳐다 보았다.

「아냐요. 선생님 한테 꾸중을 듣는 답니다. 직무태만으로요」

「그까짓 선생님이 뭐가 무서워요?」

「아냐요. 모루시게 그러시지, 순할땐 무척 순하셔두……」

그러다가 문득 들창을 바라보며

「행복은 어디 있나요? 행복은 행복을 그리워하는 순간……저게 시(詩)가 아냐요?」

「시?……호호호……시 같애요?」

「짤막짤막 한 게 시 같지 않으세요?」

「아, 짤막짤막 하니까……시 좋아 해요?」

「좋아 하지만……저 보다도 운옥 언니가 더 시를 좋아한답니다.」

「누구? 운옥 언니?」

「네, 지금은 출장을 나갔지만 운옥 언니는 한시를 더 좋아 한답니다.」

「한시를……한문 공부가 많은 이야요?」

「네, 어렸을 때 아버지 한테 많이 배웠다고요. ── 이거 운옥 언니가 써 준 거야요.」

그러면서 경숙은 허리춤에서 한지에다 모필로 쓴 시 한구를 꺼내 유경에게 보였다.

「운옥 언니가 젤 좋아하는 시라구요.」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구가 달필로 적혀 있었다.

약사 몽혼행유적(若使夢魂 行有跡) 문전석로 반성사(門前石路 半成砂)

「운옥 언니는 잠이 안옴 달을 쳐다보면서 이 시를 어여쁜 목소리로 읊는답니다. 꿈에도 발자취가 있다면 님이 계시는 집 대문 밖의 돌길이 절반은 모새가 됐을 꺼라구요. 호호……그만 했음 상당하죠?」

그러나 유경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한시를 집어서 도루 경숙에게 내 주었다 그리고는 안 재도 된다던 . 체온기를 경숙의 손에서 뺏듯이 하여 자기 겨드랑이 밑에다 꼈다.

「좋은 시죠?」

「좋은 시로군요.」

그리고는 몸을 돌려 벽을 향하여 누웠다.

이윽고 간호부가 나간 뒤에 유경은 다시 몸을 돌려 새하얀 천정을 꿈꾸는 사람처럼 쳐다보면서

「그이도 내게 그와 똑같은 시를 편지에 적어 보낸 적이 있었는데! 약사 몽혼으로 행유적이면 문전석로가 반성사라 ── 그렇다! 행복은 어디 있느뇨?

행복은 바루 거기에 있다! 설사 행복이라고 믿었던 그것이 결과에 있어서 불행과 파멸을 가져 올지는 몰라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믿고 그 행복을 그리워하는 순간이, 이 마음이 곧 행복 그 자체일께다! 영민, 영민, 백 영민 ── 」

유경은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내어 백 영민의 이름을 하얀 천정을 향하여 불러보았다.

흰 천정은 대답이 없다. 그러나 아까 낮에 어머니에게 하룻밤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던 행복의 위치(位置)가 하늘의 계시(啓示)인 양 유경을 격렬히 사로잡는다.

「동경 갈 때도 같이 가자고 약속한 그이 ── 그이가 상경 할 날도 멀지 않었는데……백, 영민!」

그때 「녹크」 소리가 들리며 김 준혁 박사가 들어왔다.

이상한 일이다.

전에는 남매처럼 허물없이 지나던 두사람이건만 오늘 이 순간에 있어서의 준혁과 유경은 마치 모르는 남남끼리 선이라도 보고 뵐려는 사람처럼 탄력성을 잃은 감정과 자유롭지 못한 행동이 자꾸만 앞장을 선다.

더구나 유경이 보다도 준혁에게 있어서 좀더 심하였다. 아까 낮에 오 창윤씨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준혁은 공연히 마음이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 수중으로 날아 들어온 파랑새가 ── 아니, 자기 손으로 근 十 [십]년을 고운 조롱 속에서 알뜰히 기른 행복의 파랑새가 잠깐 곁눈을 파는 동안에 포르릉 하고 먼 하늘 저편으로 날아 갈 것만 같았다.

「뭘 그리 유심히 들여다 보세요?」

준혁은 유리 들창 앞에 묵묵히 선채 행복을 찾아 헤매는 오 유경의 영혼의 노래를 수증기 위에 발견하였다.

준혁은 대답이 없다.

「오빠 얼굴 오늘밤 좀 심각한데, 후후후훗……」

하고 입에다 손을 대고 웃음을 깨물면서

「아까 낮에 아현동 가셨죠?」

「갔었지요.」

어는 때는 반말로 해라도 하던 준혁이가 존칭을 썼다. 유경은 힐끗 준혁의 표정을 살피며

「뭘 허러 오랬어요?」

「아까 낮에 어머니가 오셨지요?」

「오셨댔어요.」

「뭘 하러 오셨댔어요?」

「후훗……」

유경은 또 입에다 손을 갖다 댔다.

「웃긴 왜 웃어요?」

「웃기니까 웃죠 뭐.」

「누가 웃겨요?」

「어머니두 웃기구……또 오빠두 웃기구요?」

「내가 언제 유경씰 웃겼단 말이요?」

「후훗……후훗……아이 참 웃겨! 동생에게서 경어를 쓰는 오빠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담?」

그러면서 유경은 샛별같이 윤택있는 눈동자로 자기를 묵묵히 바라다 보는 준혁의 이글이글 한 얼굴을 눈부신 듯이 쏘아보았다.

「암만해두 이번 방학엔 준혁 오빠가 좀 이상한 걸요 뭐. 정거장에 마중 나왔을 땐 그렇지두 않었지만……수술을 하고 나선 어딘가 우울하고 때로는 심각하구 동생에게 경어를 쓰구, 유경이가 유경씨가 되구……」

「………」

김 준혁 박사는 대답을 못했다. 그만큼 능란하질 못했다. 유경이가 자꾸만 경계선을 그으면 그을수록 준혁의 마음은 자꾸만 굳어만 간다.

조롱 속에서 고스란히 자라던 파랑새가 자꾸만 창공(蒼空)을 그리워 한다.

그 푸르고 넓은 하늘을 무슨 컴컴한 장막으로 가리워 주고도 싶은 준혁이다.

「유경이.」

「네?」

준혁은 유리창에 씌인 유경의 행복의 위치를 신문지로 벅벅 문질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는 문학도 모르고 시도 모르는 하나의 과학자요, 현실주의자요. 행복이란 것은 먼 산너머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행복 같은 것>일런지는 몰라도 행복 그것은 아니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루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요. 바루 우리 눈 앞에 있는 것이요. 문제는 우리 눈 앞에 굴러 댕기는 행복을 잘 캣취 할 수 있는 명민(明敏)과 양식(良識)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하오. 유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