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청년
편집1
편집관동군에서 무슨 일을 보았는지 감히 추측할 수는 없으되 하여튼 거기 五[오]년에 가까운 관동군 생활은 하나의 확고한 인생의 길을 최 달근에게 가르쳐 준 것 같았다. 자기의 걸어가는 앞길에 이렇다할 조그만 의혹도 품지 않은 최 달근의 삶을 행복하다 아니 할 수 없으리라.
「힘을 길러야 한다.」
는, 하나의 야망이 최 달근의 가슴 속에서 불붙고 있었다. 그 힘이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현하의 법률이 그것을 저저하지 않는 이상, 이 힘은 최 달근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하나의 정의를 의미하였다.
「정의란, 그리고 도덕이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그리고 그 시대에 변함이 없는 이상, 새삼스레 그 정의와 도덕을 평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행동의 평가를 출세를 더디게 할 따름이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의 직무에 남달리 충실하였다. 담이 있고 머리가 좋은 그는 조금도 주저할 리 없이 출세의 층층대를 곧장 기어 올라 가기를 五[오] 년 ── 경관을 비웃고 헌병을 비웃는 소위 인테리 ─ 층의 조그만 양심을 그는 도리어 이편에서 비웃고 있었다.
「흐흥, 네게 양심이 있으면 도대체 몇 닙어치나 있게 그러는 거야?」
그러한 최 달근을 하나의 소위 호신용(護身用)으로 생각하고 편의를 보아 주는 오 창윤이나 또 세도가 오 창윤이를 하나의 파트론으로서 이용하는 최달근이나 결국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날밤도 최 달근은 시내 모처에 조그만 사건이 있어서 사복 속에 권총을 간직하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오 창윤의 집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어떤날 밤이었다.
「자네, 이런 이야기 어디서 못 들었었나?」
호화로운 응접실에 마주 앉아 립톤차를 마시고 있던 오 창윤이가 문득 생각난 듯이 찻잔을 놓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 말씀입니까?」
최 달근은 팔뚝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오 창윤의 팽팽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팔뚝시계가 아홉 시 十[십]분 ──
「아니, 내게 전할 말 뭐 없는가?」
「별로 전해 드릴 말이라군……」
「음, 그럼 아직 모르는 게로군.」
「뭘 말씀입니까?」
최 달근은 직업 의식의 충동을 느끼며
「제가 모르는 뉴 ─ 스가 있을 리 없을텐데요?」
「자넨 뭐 옥편인가?」
「옥편은 못 돼두 사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요지만……」
「자네 모르는게 한 가지 있는데 ──」
「그러지 마시구 어서 이야길 하십쇼. 오 선생 덕분에 별 한 개 더 붙을지 알겠읍니까?」
「한턱 하겠나?」
「합죠. 하구 말구요.」
「그렇다면 이야길 할까?」
그러면서 오 창윤은 애용하는 해태를 한 대 붙여 물면서
「어떤날 밤, 어떤 명사의 집에 어떤 집에 어떤 괴상한 청년이 한 사람 찾아 왔는데……」
「어째 이리 말씀이 막걸리처럼 껄쭉 하십니까?」
「왜?」
「어떤 명사란 대체 누굽니까?」
「그건 묻지 말구……그저 잠자코 들어만 두게.」
「하여튼 말씀을 하십쇼.」
최 달근은 바싹 다가 않는다.
2
편집「무슨 이야긴지 하여튼 들어 봅시다.」
최 달근은 귀가 번쩍 띠인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 수집에는 귀신 같다는 최 달근이다. 너무 조급히 굴다가 오 창윤의 입을 막아 버리면 큰 일이다.
「어떤날 밤, 어떤 명사의 집에 어떤 괴상한 청년이 한 사람 찾아 왔는데…… 그 명사란 소위 시국의 요청에 의하여 반도의 대중을 이끌고 나가는 인물이라고 쯤 생각해 두게. 누구라는 것은 물을 것 없구……」
「그저 오 선생 같은 분이라구 생각하면 되겠지요.」
최 달근은 빠른 육감(六感)으로 벌써 능쳐 버린다.
「나?……나야 어디 그런 훌륭한 인물인가?……하여튼 그 명사를 찾아온 그 괴청년은 다짜고짜로 조선 민중을 전쟁으로 끌어 넣는 그러한 언어와 행동을 금후 절대로 삼가라고 ──」
「허어?……」
최 달근의 표정이 긴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멀지 않아서 후회를 할 것이라고 ──」
「후회를 한다고요?…… 음, 일종의 협박이로군요.」
「그래 이 작자가 아마 요지음 용돈이 궁했나 보다구……몇 백 원 집어 줬더니만, 청년은 지폐를 오리오리 찢어 버리고 나갔다는 거야. ── 어때?
그만한 사건이면 별 한 개 더 붙을상 싶은가?」
「그 명사란 오 선생이 아니십니까?」
허어 이 사람 「 , 봐? 오 창윤이가 그처럼 열통이 작은가?……요즘 몇 백 원이란 담배값두 안돼. 저편이 백 원대를 계산하면 이편은 천 원대를 계산해야지. 시퍼런 놈을 수십 장 코앞에 내밀어 봐요. 흥, 애국잔 별다른가?」
「하하하……과연 세상의 오 창윤씨야! 그런데…」
「그래 그만 했으면 별 하나 못 얻어 붙이겠나?」
「하나는 너무 많구요. 반개 쯤은 희망이 있을 상두 싶지만……」
「하아, 그것이 그 명사 한 사람 뿐이 아니거든. 서울의 모모하는 지도자 몇 사람이 다같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두?……」
「그래요?」
호기심과 전투 의식이 무럭무럭 떠오르는 최 달근의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피해자들은 그런 사실을 감추는 겁니까?」
「글쎄 그것을 날더러 물어 본댓자 소용 없구…… 나는 아직 그런 꼴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이니까 ──」
「음, 게시카랑(괫심하다)!」
별 한 개쯤은 넉넉히 붙을 다시 없는 뉴 ─ 스였다.
그순간 야망에 타오르는 최 달근의 눈 앞에는 출세의 층층대가 무지개처럼 찬연히 뻗쳐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오 선생!」
저으기 흥분한 목소리다.
「어째, 한턱 하구 싶은 모양인가?」
하고, 유쾌한 듯이 허허 웃었다.
「하겠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비밀이 하여 주십쇼.」
「허허……공을 독차지 할 셈이로군!」
바로 그때였다. 현관에서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째르랑……째르랑…… 들려오지 않는가.
두 사람은 후딱 말을 끓고 긴장한 표정으로 마주쳐다 보았다.
「누굴까? ──」
벽에 걸린 시계가 열 시 반 ── 심야의 방문객은 과연 누구이뇨?……
이윽고 계집애가 명함을 한 장 들고 들어 오면서
「어떤 청년이 찾아 온뎁쇼.」
명함에는 「장 욱」(張旭)이라 씌어 있었다.
3
편집「장 욱? ──」
명함을 들여다 보던 오 창윤이가 머리를 들면서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떻걸 갑쇼?」
계집애가 독촉을 하듯이 여쭙는다.
「어떤 청년이드냐?」
하고, 그때 최 달근이가 물었다.
「키가 후리후리 하굽쇼. 안경을 쓰굽쇼. 아주 젊은이든데요.」
「음 ──」
하고, 오 창윤은 최 달근의 얼굴만 바라본다. 최 달근의 뜻대로 하겠다는 표정이다.
「하여튼 들어 오라구 그래.」
최 달근은 주인 대신 명령을 하고 나서
「시굴놈 제 이야기를 하면 불쑥 나타난다는 격이 아닌가?」
최 달근의 눈초리가 번적 빛난다.
「글쎄, 이와 같은 심야 방문은 여지껏 없었는데 ──」
오 창윤은 어지간히 불안을 느낀다.
「자아, 내 옆방 서재에 들어가 있을테니 맘 놓구 한바탕 연극을 해 보시요.」
「자네두 빈 몸이 아닌가?」
그때 최 달근은 빙그레 웃으면서 양복 주머니를 툭툭 손으로 쳐 보이며
「염려 마시래두 ──」
최 달근은 마치 사냥개처럼 흥분한 얼굴로 자기가 마시던 찻종지를 테 ─ 불 밑 선반에 내려 놓고 중문을 통하여 옆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찻종지가 두 개 놓여 있다는 사실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처음부터 경계심을 일으키게 할 것을 최 달근은 잘 안다. 그러한 사소한 행동에도 그의 치밀한 두뇌는 활발하게 움직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청년 한 사람이 응접실로 우뚝 들어 섰다. 그는 잠깐 동안 방안을 한번 휘이 둘러 보더니
「손님이 계신가요?」
최 달근의 것과는 또 좀 종류를 달리하는 날카로운 눈초리다.
「아닙니다. 않으시지요.」
오 창윤은 최 달근이가 앉았던 자기 앞의 의자를 권하였다.
「담배 연기가 하두 심하길래 말씀입니다.」
하하 오 창윤의 「 , 별명이 『담배벌레』인 줄을 모르시는 모양이로군요.」
하고, 오 창윤은 슬쩍 넘겨 버렸다.
「그럼 실례하겠읍니다.」
청년은 의자에 걸터 않으며
「오 선생은 담밸 그리 즐기십니까?」
「네, 하루 댓 갑씩 피지요. 자아, 한 대 피시지요.」하면서 해태를 내 놓았다. 하루 다섯 갑이란 물론 최 달근이가 피우고 나간 담배 연기를 숨기려는 거짓 말이었다.
청년은 서슴치 않고 답배를 한 대 꺼내면서
「히어, 해태만 다섯 갑?……」
「네, 나는 십여 년 동안 해태만 피웠읍니다. 담배란 맛 붙인게 아니면 아무리 좋은 담배라두 맛이 없거든요.」
오 창윤은 쓸데 없는 이야기를 벌려 놓으면서 청년을 관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밤 늦게 찾아 뵙는 것을 용서 하십시요.」
돌연 청년은 말머리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
「시간이 늦었으므로 길게 말씀 드릴 여유가 없읍니다만 ──」
청년은 잠시 오 창윤의 벌거스레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마침내 그 묵직한 입을 열었다.
「조선에 징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이 오 선생을 그처럼 기쁘게 한 것 같읍니 다만, 나로서는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읍니다. 설명해 주십시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 너무나 돌격적인 질문에 오 창윤은 어안이 벙벙하여 청년이 타는 듯한 얼굴만 묵묵히 바라보다가 대답하였다.
「나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해야 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요.」
「자기 행동에 책임을 가지시요!」
청년의 어투가 갑자기 거칠어 졌다.
4
편집만일 최 달근이란 하나의 꿋꿋한 무력이 배경에 없었다면 오 창윤의 태도는 좀더 딴 길로 접어 들었을른지도 몰랐다. 그래서
「당신은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거요?」
하고, 굴함이 없는 태도로 나왔다.
조선 청년들을 「 목적 없는 전쟁으로 몰아 넣는 민족 반역자요!」
「민족 반역자!」
배후에 있는 최 달근의 무기를 믿고 최후까지 굳세게 버티고 나가려던 오창윤의 결심이 일순간 흐려졌다.
「그렇소! 일본 제국주의의 허수아비가 되어 일신의 양명과 영화를 위하여……」
「…………」
오 창윤은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느냐고, 지금 옆방에 숨어 있는 최달근이가 무섭게 항의할 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대답을 못했다.
「조국의 귀중한 재산인 청년들의 생명을 목적 없는 전지로 내어보내 말살시키려는 행동을 삼가시오!」
「음 ──」
오 창윤은 깊은 신음과 함께 타오르는 듯한 청년의 얼굴을 일종 엄숙한 마음으로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순간, 청년의 시선이 문득 테 ─ 블 밑에 놓인 찻종지로 옮아 가서 청년은 휙 경계하는 눈초리로 방안을 한 번 둘러보며
「흥! 해태만 피운다는 당신이 이 재털이에 하도 꽁다리가 섞여 있구 ……」
그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나는 한 번 더 조용히 당신에게 충고를 하오. 멀지 않아 조국은 해방이 됩니다! 행동을 삼가시요! 그렇지 않으면 뉘우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니……」
그러시면 청년은 그 어떤 위험을 느끼고 발걸음을 돌려 휙 밖으로 나가려고 할 바로 그때였다.
옆방 문이 벙싯 열리면서 최 달근의 얼굴이 천천히 나타났다.
「장군! 이게 얼마 만인가?」
「…………?」
두어 걸음 걸어 나가던 청년의 발이 방바닥에 얼어 붙은 듯이 우뚝 멎었다. 긴장할대로 긴장 해진 얼굴의 표정이 그 무엇인가를 번개처럼 계산을 하면서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다가
「앗, 자네는?……」
하고, 외치면서 흠칫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일순간, 청년의 표정이 무서운 속도로 격동을 한다.
그렇다. 그것은 학생 때 「대통령」이라고 불리워온 장 일수였다.
「뭐, 장 욱?……언제부터 자네 변성명을 했나?」
최 달근은 천천히 장 일수 앞으로 다가오며 그렇게 물었다. 극히 여유 있는 목소리며 태도였다.
그때 장 일수는 이집 주인 오 창윤과 최 달근을 꿈결처럼 번갈아 바라보다가 돌연
「으와,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오 창윤씨 배후에 최 달근이가 숨어 있을 줄은 정말 뜻밖인걸!」
「음, 넓구두 좁은건 세상이라구 하더니만……흐, 흐, 흐, 흥……」
기미쩍은 웃음을 최 달근은 띄운다.
「최군, 오랫만인데 어디 악수나 한 번 해 볼까?」
그러면서 덥석 최 달근의 손을 장일수는 잡았다.
전연 방면을 달리하는 두 사람의 영웅이 아니, 먹느냐 먹히느냐의 적과 적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맹렬한 투지(鬪志)를 가슴 속 깊이 품은채 웃는 얼굴로 손에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