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15장

동창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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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을 하시다피 해서 대학 예과까지를 간신히 마친 신 성호였다. 학생시 대부터 시도 발표하고 단편도 몇 편 썼으나 세인의 주목을 끌만한 것은 못 되었다. 그러나 좋은 소설을 가진 청년이라는 것만은 인정을 받은 신 성호였다.

이튿날 아침 신 성호는 안국동 모말 같은 조그만 하숙 방에서 눈을 떴다.

「어제 저녁에 누가 찾아 왔었는뎁쇼.」

식모가 밥상을 들고 들어 왔다.

「누군데 ──」

「누구라구 말은 없어두, 신 선생님을 잘 아신다구 하면서 방에 들어 와서 기다리다가 가셨답니다. 또 오신다굽쇼.」

「누굴까? ──」

혹시나 책상 위에 명함이나 놓이지 않았나 하고 둘러 보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신성호는 문득 그 어떤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며 책상 설합을 열어 보았다.

「아, 역시……」

예감은 들어 맞았다 . 그 누굴가가 설합 속을 뒤진 흔적이 판연하다.

「벌써 손이 뻗쳤구나!」

예기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벌써부터 그 일이 있을 것을 짐작하고 대책을 강구한 신성호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양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끄내 보았다. 어젯밤 춘심에게 받은 백 원짜리 다섯 장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성호는 조반을 먹고 분주스레 하숙을 나왔다. 대문 밖을 나선 성호는 그때 저편 골목 밖에 국민복을 입은 사나이가 한 사람 서 있다가 훌떡 몸을 감추는 것을 보았다. 외눈깔이었다. 한편 눈을 못보는 애꾸눈이가 아닌가.

「흐응.」

성호는 모르는 척하고 그 앞을 지나 안국동 네거리로 천천히 걸어 갔다.

「뒤를 따르는구나.」

성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자기 뒤를 따르는 애꾸눈이의 인기척을 분명히 느꼈다.

광화문통을 꺾어져 태평통으로 접어 들면서 성호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우편국 앞 포스트 옆에 국민복이 우두커니 서 있질 않는가.

태양출판사는 태평통 입구에 있었다.

「여어 미남자, 어젯밤은 또 누굴 울리러 일찍암치 샜나?」

아직 술이 채 깨지 않은 벌거스레한 눈을 돌리며 동료 한 사람이 빙글거린다.

「물어선 뭘 해? 장안의 일색이지.」

성호는 그러면서 테 ─ 블 위에 놓인 엽서 한 장을 들고 들여다 보았다.

「백 영민 ──」

고향에서 띄운 영민의 엽서였다.

「귀향시에는 들리지 못하고 바루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번 동경으로 갈 때에는 꼭 서울에 들려서 군을 만나 보려 한다. ──」

는 뜻의 간단한 엽서였다. 영민을 만나 보는 것도 실로 오랫만이다. 재작년 여름에 보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성호는 그동안의 영민의 변화를 잠깐 상상해 보며 만나면 할 이야기가 태산처럼 쌓인 것같아서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때 급사가

「신 선생님, 이런 분이 찾아 왔읍니다.」

하면서, 명함 한 장을 들고 들어 왔다.

「헌병오장(憲兵伍長) 기무라.다까오(木村隆雄)?……」

신 성호는 한 번 깊이 심호흡을 하며

「음, 올 것이 마침내 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들어 오시라구 그래라.」

어젯밤 자기 하숙방에 들어 와서 책상 설합을 뒤진 자가 바루 이 헌병이로구나 하면서 신 성호는 급사에게 말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양갓에 검은 외투를 입은 사나이가 선뜻 안으로 들어선다.

「여어 신군, 이게 얼마 만인가?」

하면서 손을 내밀고 다가오는 것을 보니 「땅개」 최달근이가 아닌가.

「오오, 이게……난 누구라구?……」

신 성호는 명함과 최 달근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놀랜다.

「참 오랫만일세.」

최 달근은 중절모를 벗어 테 ─ 블 위에 놓았다. 박박 깎은 머리였다.

「어서 앉게.」

신 성호는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 당기며

「그래 같은 서울에 있으면서 어째 한번두 못 만났을까?」

「웬걸……그동안 만주에 가 있었지.」

「만주?……만주 어딜?……」

「관동군에서 일을 보다가 一[일]년 전에 이리로 왔네.」

「허어, 그럼 그 방면에선 이젠『엑스파 ─ 트』가 됐겠네 그려?」

그말에 최 달근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담배를 붙여 물고

「자네 지금도 영어를 그리 좋아하는군!」

「왜, 나 영어 하면 붙들어 갈테야?」

「도끼니와네(때로는 붙들어두 가지) ──」

급사가 차를 가져 왔다.

「거 무서워서 자네하구 맞서겠나?」

「뭘, 술 한턱 하면 다 되지.」

「술을 사면 안 붙들어 가나?」

「바아이니.욧데와네(그것두 경우에 따라서) ──」

「하, 하, 하……거 참 어려운 걸.」

「응, 좀 어려울 껄!」

처음에 신 성호의 손을 잡으며 반가운 듯이 흔들던 최 달근과는 좀 다르다. 중학 동창다운 모습이긴 하였으나 마음에 어딘가 틈이 있는 대화였다.

「그래 나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었나?」

「자네의 문명(文名)이 하두 유명한데 물라 봤어야 동창으로서의 예의가 되겠나?」

그러면서 최 달근은 그때 사무 탁자 위에 놓인 영민의 엽서를 문득 들여다 본다.

「허어, 백 영민?……동경 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용을 읽어보며

「음, 이번에 상경하면 나두 한 번 만나 봐야겠네. 꼭 내게 알려주게, 응?」

「알리지, 알리구 말구.」

「그땐 내가 술 한턱 하지.」

「자네 술 얻어 먹다가 목 걸리면 어떻게?」

「이 사람아!……」

하고, 성호의 어깨를 툭 한 번 치며

「문학하는 사람들은 어째 그리 열통이 작은가, 응?」

하고, 유쾌하니 하하하 웃었다. 아마 관동군에서 일을 보는 동안에 배운 웃음일 께다. 그 만주풍이 끼인 호탕한 웃음 소리에는, 그러나 어딘가 날카로운 관찰력이 숨어 있음을 신 성호는 보았다. 五[오]년 전과는 확실히 입장이 바뀌어진 두 사람이다.

「그런데 신군, 나 신군에게 조용히 이야기 할 말이 있는데 ──」

최 달근은 갑자기 주위를 돌아다보며

「어디 조용한 장소는 없는가?」

「아, 저편 응접실로 가세.」

신 성호는 최 달근을 응접실로 안내하면서 마음속으로

「하하, 땅개는 태도를 고쳐서 단도직입적으로 나올려는 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문제는 저 대통령에 관한 이야긴데 ──」

신 성호의 예상이 들어 맞았다. 응접실에서 최 달근은 마주 앉자 다짜고짜로 총알처럼 내 쏘면서 그 순간에 있어서의 신 성호의 표정을 날카롭게 관찰한다.

「대통령?……아니, 저……」

「장 일수(張逸秀) 말이야. 장 일수 ──」

「아, 장 일수가 대체 어떻게 됐어? 그동안 중국 가 있다는 말을 누구한테 들은 것 같은데 ──」

최 달근은 물끄러미 신 성호의 얼굴의 움직임을 쳐다보면서

「자네가 모른대서야 되나?」

「건 또 무슨 뜻인가?」

「장 일수, 백 영민, 신 성호 ── 이 셋은 말하자면 중학시대의 삼총사가 아닌가?」

「삼총사?……하하, 명예로운 이름인걸.」

「그 명예로운 삼총사의 대장격인 장 일수의 소식을 신 성호가 모른대서야 어디 될 법한 일인가?」

「글쎄, 될법 하진 않어두 전연 소식이 두절인걸 어떻거나? 자네가 알거든 좀 가르쳐 주게.」

「정말인가?」

「하아, 이 사람이……」

「아니, 정말 모르는가?」

최 달근의 눈이 싱글싱글 웃는것 같았다. 신 성호의 가슴 속을 께 뚫으는 것 같은 불유쾌한 눈초리다.

「이거 만나자 마자 왜 이리 깔끔한가?」

「깔끔해 보이나?……허, 허, 허……정말 모른다면 내 편에서 소식을 전할까?」

「…………」

신 성호는 대답이 없다.

「하하하……기분을 상했나? 용서하게. 직업의식이란 무서운 거야. 그만 나두 모르는 사이에 말씨가 깔금해지군 하는걸 어떻거겠나?」

하고, 신 성호의 어깨를 또 툭 치면서

「어젯밤, 나 신군의 하숙을 찾아 갔었지.」

하였다. 툭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하자는 최 달근에게 신 성호는 일종의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아, 그게 자네였던가?」

「용서하게. 책상 설합을 잠깐 들여다보았네.」

「흥, 직업이란 그런 건가?」

「그런 건줄 나두 실상은 몰랐어. 동창을 몰라보는 직업이 이 세상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말이야! 학생시대엔 그래두 영얼 잘하는 콘사이스를 어지간히 우러러 보았는데……이처럼 턱 사회엘 나와 보니, 신 성호쯤, 뭐냐?

── 하는 생각이 들겠지. 주제넘은 생각이야.」

땅개는 마침내 선전포고를 하였다. 너무나 명확한 선전포고였다.

「…………」

신 성호는 잠깐동안 말없이 최 달근을 바라보다가

「그만했으면 자네 심경도 알법 하네. ── 그건 하여튼 대통령의 소식이나 어서 좀 전해 주게.」

여기서 두 젊은이는 완전히 대립상태에 서게 되었다. 명확한 하나의 경계선이 두 젊은이 사이에 그어지는 순간이다.

「아, 이야기가 그만 탈선을 했네 그려. ── 그런데 그 대통령이 말이야.

아니, 그 대통령을 어떤 우연한 장소에서 실로 우연한 기회에 만났거든.」

「누구……자네가 말인가?」

「응, 학생 시대부터 대담하고 호탕하던 장 일수가 아닌가. 그 장 일수를 실로 우연한 장소에서……」

「아니, 그럼 장 일수가 중국서 돌아 왔는가?」

「응 ──」

하고, 최 달근은 또 한 번 날쌔게 신 성호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