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곡예사
편집1
편집해외에 있는 혁명투사의 특명을 받고 동지 三十三[삼십삼]인과 함께 조선에 잠입한 장 일수의 사명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 삼천 만 동포여.
우리 조국이 해방될 날은 멀지 않았다. 해방의 성스러운 종소리가 제군의 머리 위에 울릴 날이 멀지 않아서 온다. 반드시 온다.
제군은 이 말을 굳게 믿고 제군의 생명을, 제군의 재산을, 그리고 제군의 재능을 아껴라. 제군은 일본 제국주의를 위하여 무의미한 생명을, 무의미한 재산을, 그리고 무의미한 재능을 낭비하여서는 아니된다.
제군의 그 생명, 그 재산, 그리고 그 재능은 멀리 않아 찾아올 해방 조국의 생명이요, 재산이요, 재능이기 때문에!
동포여, 이 말을 굳게 믿으라!
귀가 있으되 들을수 없고 눈이 있으되 볼 수 없는 쇄국(鎖國) 조선, 세계의 정세와는 전연 절연된 이 암흑과 같은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 가혹한 채찍과 무서운 착취 밑에서 무기력하게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 민중에서 이상과 같은 확고한 신념을 넣어주기 위한 하나의 힘찬 계몽적인 중대 사명을 띠고 들어온 그들 三十三[삼십삼]인의 젊은이 들이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여 조선 각도에 숨어 들어 유형 무형으로 반전운동(反戰運動)을 활발하게 전개시켰던 것이니, 그들의 총 참모격인 장 일수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땅개」와 지금 본의 아닌 악수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니,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요?」
뜻 밖에도 악수를 하는 두 젊은이를 오 창윤은 놀라며 바라보는 것이다.
「네, 학생 시대부터 가장 절친한 친구지요.」
절친하다는 말에 최 달근은 유달리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상대자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 보며
「그런데 자네 어딘가 해외엘 가 있다더니 좋은 장사를 차렸네 그려?」
최 달근이가 놓은 첫 화살이었다.
「좋은 장사?……」
장 일수는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아, 거 좋은 장사가 아닌가? 명사 한 사람에 五[오]백 원씩만 치더라두 열이면 五[오]천 원, 스물이면…」
그때야 비로소 장 일수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 채렸다.
「음, 님자 말 알아 듣겠네. 그래 님자는 요지음 무슨 장사를 벌려 놓았나? 보와하니 혈색두 좋구……」
그러나 극히 불리한 장 일수의 입장이다. 세상이란 넓고도 좁다는 「땅 개」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그래 내 장사는 님자의 말대로 금전편취(分錢騙取[분전편취]) ── 열이면 五[오]천 원, 스물이면 얼마( )지?」
「스물이면 만 원인가?……괜찮은 장사( )!」
최 달근은 빙글빙글, 장 일수도 빙글빙글, 그리고 오 창윤도 두 청년의 대화를 흥미있게 들으면서 역시 빙글빙글이다.
「그래 님자가 펴 놓은 장사는 대체 뭔가?」
「그만했으면 알법두 한데……」
「알법두 하네만…… 찻종지를 다 감출줄 알구…… 또 그 박박 깎아버린 머리만 봐두 오 선생 같은 세도가의 현관을 지키는 『땅개』와도 같은데 ── 」
「…………」
최 달근은 대답이 없다.
폭풍 전야(暴風前夜)의 무서운 순간이다.
2
편집오 창윤의 현 관직이 땅개와 같다는 말에 당연히 화를 벌컥 내야만 될 최달근이가 대답은 없이 빙글빙글 웃고만 있는 것이 장 일수에게는 내심 그 어떤 불길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였다.
「땅개?……」
도리어 오 창윤이가 묻는다.
「땅개 ── 모를십니까? 일본 개 ── 고 다리가 짧고 몸씨가 잰 놈 있지 않아요? 흰 바지 저고릴 입은 조선 사람에겐 한층 더 박박 겨 오르면서 해 보자는……」
「세상이란 글쎄 넓은것 같애두 좁다니까 그래!」
이 한 마디가 그때까지도 망설거리던 최 달근의 태도를 결정하였다.
「왜, 나 붙들어 갈래나? 금전편취 죄로……」
「장군, 나 별 하나 더 붙여야겠네!」
최 달근의 오른편 손이 스름스름 주머니를 향하여 기어들어 가며 권총을 힘있게 잡았다.
「별을 한 개 더 붙인다?」
고등계 형사 쯤으로 알았더니 헌병이 아닌가!
그리나 열통은 장 일수 편이 조금 더 컸다.
「흥, 그만하면 님자두 장사를 그동안 착실히 했겠네 그려?」
「나, 별 하나 더 붙이는거 그리 배 아파 하진 않겠지?」
「결국 님잘 출세시키려 내가 여길 찾아온 모양이지?」
「동창생 하나 출새 시키면 어떤가?」
주고 받는 대화가 봄바람처럼 태탕(.蕩)하다. 그 한가스런 대화 밑 바닥에는, 그러나 실로 몸부림 치는 무서운 투쟁이 불붙고 있음을 오 창윤은 주먹에 땀을 쥐어 가면서 덤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해면에 뾰죽 대가리만 조금 내 놓은 빙산(氷山)은 그 태산같은 몸둥이를 바다 밑에 숨긴다. 그 뽀죽한 대가리와도 같은 두 사람의 대화였다.
장 일수는 생각한다. 어떡허면 이 곤경에서부터 몸을 피할 수가 있을까?
── 를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자기에게 포승을 던지려는 최 달근이가 아닌가!
잠깐동안 침묵을 지키던 장 일수는 대담하게도
「님자, 자신은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를 체포할만한 완력에 자신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자신?……」
하고, 최 달근은 장 일수를 바라 보며
「자넨 검도 二[이]단이랬지! 그후 좀더 늘었나?」
「하하, 자신이 만만한걸. 어디 ──」
하고, 팔뚝시계를 들여다 보다가
「아차, 시간이 늦었는걸. 그럼 오 선생 오늘 그만 실례하겠읍니다.」
하고,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최군.」
「왜 그러나?」
최 달근도 천천히 일어섰다.
「또 보세.」
장 일수는 악수를 청하였다.
그러나 최 달근은 장 일수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바른 손은 지금 양복 주머니에서 무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손을 빼서 상대자가 청하는 대로 악수에 응하는 순간, 자기의 몸뚱이가 회초리에 얻어 맞은 참새처럼 쓰러질 것만 같아서 무섭다.
최 달근도 검도의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관동군 시대에 의무적으로 얼마동안 배우긴 했으되 그것을 이런 졸지에 임하여 사용할만한 자신은 전혀 없었다.
「왜 만날 때 했던 악수를 헤질 땐 못하느냐 말이야?」
「흐흥! 학교 도장(道場)인줄 알구?……도장에선 목도(木刀)를 사용하지만……」
「사회에선 권총을 써야만 하겠나?……」
조그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척지간에 우뚝 마주 선 아아, 정열의 곡예사(曲藝師) 두 사람!
3
편집오 창윤은 극도의 불안을 느끼며 힘차게 약동하려는 두 청년의 끓는 정열이 지척지간에서 무섭게 부딪치는 순간을 상상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담력으로나 지력으로나 그만 했으면 최 달근을 그래도 어느 정도 믿었던 오 창윤이다.
그러나 지금 열혈한(熱血漢) 장 일수와 최 달근을 눈 앞에 비교해 볼 때, 체구로서나 정신력으로서나 두 젊은이 사이에는 월등한 차이가 있음을 오창윤은 분명히 보았다.
최 달근의 얼굴은 벌써 아까처럼 빙글빙글 할 줄을 몰랐다. 악이 치받친 험악한 얼굴이다. 그때 돌연 장 일수는
「하, 하, 하, 핫………」
하고, 한번 웃어댄 후에 최 달근의 왼편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
「하는 수 없네! 자네의 바른편 손이 주머니 속에서 통 나올 줄을 모르니…… 그러나 자네가 졌네, 최 달근이가 졌어! 오늘밤 이 장 일수와의 승부는 최 달근이가 확실히 패전일세!」
「무슨 뜻이냐?……똑똑히 말을 해 봐라!」
최 달근의 목소리는 벌써 평화를 잃었다. 조절(調節)을 모르는 피의 외침이었다.
「어째 그처럼 무서운 얼굴이야? 왜 좀더 빙글거리지를 못하구, 응?…… 그래 고것 뿐인가?」
그순간, 최 달근은 상대자의 손을 힘차게 뿌리치며 외쳤다.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승부는 이제부터다!」
「하하, 자네의 계산으론 아직두 승부가 끝나지 않은 셈인가?」
일종의 연민의 정이 장 일수의 얼굴에 알알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제부터다 너와 나 사이의 승부를 결정할 시간이다!」
거친 숨결이다. 입술과 코가 무섭게 푸르럭 거린다.
「그러나 내 계산으론 벌써 승부가 끝난 줄로 믿고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네.」
그 한 마디를 남겨 놓고 장 일수는 휙 돌아서서 문을 향하여 걸어 나간다.
순간, 최 달근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자 묵묵히 걸어 나가는 장 일수의 등골을 겨누며 엄숙한 목소리로
「장 일수!」
「…………」
「군이 그 손잡이를 잡기 전에 오늘 밤의 승부는 끝날 것이다!」
「…………?」
장 일수는 우뚝 멎었다.
그러나 장 일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은 채 극히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 달근 자네가 「 ! 지금 바른 손에 잡고 있는 그 무기는 따로이 쓸 때가 있는 것이야! 잘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것 같으네. 나도 그만한 것 쯤 못 가진 배는 아니지만두 ──」
그러면서 자기 양복 주머니를 툭툭 쳐 보인 후에
「── 그러나 자네와 나와의 승부란 무기 없는 승부 ── 몸뚱이와 몸뚱이, 정열과 정열, 인생과 인생의 승부를 말함이다! 알겠나?……알겠으면 조용히 무기를 거두고 나를 이대로 돌려 보내는 것이 좋아!」
그러면서 서슴치 않고 장 일수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순간
「에잇, 장 일수!」
하고, 외치며 무기를 잡은 최 달근의 손이 번쩍 들리었다.
4
편집「최군, 안돼, 안돼!」
그렇게 외치면서 번쩍 들린 최 달근의 권총 쥔 손목을 부여잡는 것은 오 창윤이다.」
「놓세요, 오 선생!」
「안 되오. 오늘밤의 승부는 확실히 최군이 졌네!」
오 창윤의 인생관이 변모(變貌)를 일으키는 순간이다.
「빨리 손목을 놓세요! 그래 저 자식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말이요?」
한 자루의 권총을 중심으로 하고 네 개의 손이 허공중에서 우물쭈물 춤을 춘다.
「참아요. 참으시오!」
「아니, 정말 안 놀테요?」
약이 바짝 오른 최 달근은 마침내 오 창윤의 몸뚱이를 자기 어깨로 뿌리쳐 버리고
「장 일수, 거기 섰거라!」
하고, 고함을 치면서 복도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장 일수의 자태는 보이지가 않는다. 재빨리 현관 밖으로 몸을 피한 장 일수였다.
「네가 가면 어딜 갈테냐?」
하고, 부르짖으며 최 달근이가 현관 밖으로 뛰어 나왔을 때다.
「장 일수는 여기 있다!」
하는 대답과 함께 현관 밖 담벼락에 박쥐처럼 납작 붙어 있던 장 일수가 들고 있던 단장으로 권총을 잡은 최 달근의 손목을 무섭게 내려 갈겼다.
「아야얏 ──」
「탕 ──」
그것은 권총이 최 달근의 손에서 떨어지는 직전에 발사된 한 방의 탄환이었다. 그러나 탄알은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무한한 허공중을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자아, 나도 이 단장을 던지마! 너와 나와의 승부는 무기 없는 승부 ── 정열과 정열, 몸뚱이와 몸뚱이의 승부다!」
하면서, 단장을 휙 던지는 순간
「뭣이!」
하고, 외치자마자 무기를 잃은 최 달근의 주먹이 장 일수의 턱 밑으로 날아 들었다.
「에잇!」
주먹과 주먹 사이에 불꽃이 튄다.
뒤이어 두 개의 몸뚱이가 작열된 정열과 함께 땅위에서 딩군다.
그러기를 얼마 동안 ── 이윽고 기진맥진한 최 달근을 땅 위에 쓰러뜨려 놓은 채 장 일수는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최군, 그러면 나는 간다. 다시 볼 때까지 뉘우침을 청사(靑史)에 남기지 않도록 자중하기를 바란다!」
그 한 마디를 남겨놓고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정문을 향하여 다시 단장을 집어들고 쏜살같이 달음박질 치는 대통령 ──
「음 ──」
하고 신음을 하면서 최 근달은 쓰러진 채 손으로 땅위를 재빨리 쓰다듬었다. 쓰다듬은 손끝에 잡힌 무기가 지금 정문의 희미한 가로등 빛을 등지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 가려는 장 일수의 등골을 겨누고 ── 아니, 등골을 겨누다가 그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 다시 조준(照準)을 고쳐 다리를 겨누고
「타앙 ──」
그순간, 쏜살같이 달리던 장 일수의 몸뚱이가 훅딱 꺾어지면서 비틀비틀어둠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최 달근의 사격은 정확히 장 일수의 왼인편 다리를 분질러 놓았던 것이다.
캄캄한 추운 밤의 일이었다.
최 달근은 무기를 거두고 천천히 땅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승리의 쾌감을 맛 보려는 듯이 한 번 깊이 심호흡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