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14장

연애 화첩 편집

1 편집

「아버지.」

「응?」

「나 돈!」

「돈은 또 뭣 하련?」

「눈깔사탕 사 먹게요.」

「요것이!」

그러면서 아버지는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딸의 턱 아래를 만져 본다.

「흐응, 안 주믄 난 울테야. 정말 울테야.─」

딸은 자기 팔꼬비로 아버지의 넙적다리를 힘껏 누르면서 몸을 기댄다.

「정말 울테야.」

「요것이 정말 아버질 녹이네.」

「딸한테 좀 녹으믄 어떠우?」

「그러마. 네 눈깔사탕 값 대주는 맛두 무던 허더라.」

「아이 죤 아버지야!」

「그래두 원 네 눈깔사탕 값 너무 비싸더라.」

「비싸믄 좀 싸게허죠 뭐.」

「단골인데!」

「그럼요.」

아버지가 슬그머니 지갑에서 돈을 끄내 딸의 손에 쥐어 준다.

「이게 몇 장이죠?」

「다섯 장.」

「죤 아버지야!」

「아야, 얏……」

「호호호호 ─」

「야, 사람 본다!」

아버지가 그러면서 넙적다리를 부비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친족법(親族法)에 있어서의 아버지와 딸의 대화가 아니다. 명월관 아랫목 모본단 보료 위에서 바꾸는 아버지와 딸의 재롱스런 대화였다.

「장안의 일색이 장안의 구두쇠를 녹이는 풍경이로구나!」

저편에서 역시 기생을 끼고 술을 먹던 중늙은이가 야유를 보낸다.

장안의 일색이란 박 춘심을 일음이요, 장안의 구두쇠란 오 창윤을 말함이다.

한해에 몇 번씩 총독부 고관현직과 민간측의 명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연회중의 하나였다.

얼굴 잘 난 기생, 소리 잘 하는 기생, 춤 잘 추는 기생들이 세류 같은 허리를 꼬며, 없다던 물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주지육림(酒池肉林) 사이를 호첩 처럼 오락가락 ─ 한 고비를 넘어선 연회석 이 구석 저 구석에서는 가끔 가다 늙은이들의 짙은 「러브·씨인」이 곧잘 벌어지곤 한다.

「아가, 이리 좀 오너라.」

오 창윤이가 딸을 부르는 소리다.

「아버지, 나 불렀수?」

마즌 편에 앉은 무슨 국장이라는 일본인에게 술을 따르던 춘심이가 오 창윤을 힐끔 돌아다보았다.

「술 마저 따르고 이리 좀 오너라.」

「나 눈깔사탕 이젠 그만 먹을래요.」

오 창윤은 베게를 팔꿈치에 고이고 보료 위에 비스듬이 누으면서

「그래버릇하면 못 쓰느니라.」

그 말에 춘심은 냉큼 와 앉으며

「내가 아버질 박대했었군!」

「춘심아.」

「네?─」

「너 인젠 기생 노릇 그만 하렴.」

「…………」

이런 때 평양 기생은 대답을 안하는 법이다. 대답하는 시간으로 계산을 한다.

「아버지가 과히 싫지는 않느냐?」

「아니요.」

의외로 조용한 대답이었다.

「잘 생각해 보려므나.」

「나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구 올께요.」

오 창윤의 손바닥에서 자기 손을 살그머니 춘심은 뺐다.

2 편집

별은 땄다. 확실히 행운의 별이었다.

탑골동 구석에서 놀음군들만 바라보고 자란 분이로서는 확실히 호화로운 출세였다.

「세상의 오 창윤이가 아닌가! 돈이 없나 세도가 없나?……내가 바루 그 오 창윤씨의 소실!」

「토일렛」에서 화장을 고치며 춘심은 생각한다.

「그러나 벌써 들어 앉기는 아까운 청춘이야.」

가만이 거울을 들여다 보니 아직도 자기의 피부가 청춘을 버리기에는 너무나 예쁘다.

「뭘 그리 좋아 하세요?」

등 뒤에서 손수건을 들고 섰던 보이 녀석이 벙글벙글 웃는다.

「누가 좋왈 했게?」

「그러면 모를 줄 알아요? 여기 가만히 서서 화장 하시는 것만 봐두 다 알지요. 한턱 하세요.」

「맞았어! 그럼 한턱하지 뭐.」

지갑에서 十[십]원짜리 한 장을 꺼내 준다.

「고맙습니다. 이래서 자꾸만 아씨들과 농담을 하게 됩죠.」

춘심은 손을 씻으면서

「내게두 청춘이 있었나?……」

하였다. 있는것 같기도 하고 없는것 같기도 하였다.

부산행 급행열차 ─ 밤 바람이 회오리치는 캄캄한 승강구에 달 빛이 비끼고 ─ 밤새도록 군밤만 말없이 까던 밤!

「그것도 청춘일까?……」

그것이 청춘이라면 너무나 구슬픈 청춘이었다.

「소리에두 안 그랬어?…… 속절 없는 청춘이라구……일장 춘몽이라구……」

정말로 일장 춘몽과도 같은 낡은 기억이었다. 四[사]년이라는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건만 화류계의 四[사]년에는 十[십]년과 맞잡히는 인생의 유전(流轉)이 숨어 있었다.

그 격동하는 유전 속에서 춘심은 영민을 잊었다. 잊을래서 잊은 춘심은 아니다. 큰 물결 작은 물결이 쉴새없이 희롱하는 해변가의 조그만 모래알과도 같은 춘심의 생활이 아닌가. 한발 한발 깊은 바다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춘심이었다.

그러한 춘심이더러 낡은 기억만을 안고 있으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적으나마 신선한 정열이 춘심의 무기력한 생활을 수놓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적은 물결이었다. 그러나 신선한 물결 같았다. 신선하기 때문에 춘심은 마음을 놓고 그 적은 물결의 희롱을 받았다. 그 신선한 물결의 이름을 신 성호(申聖浩)라 불렀다.

보이가 들고 있는 손수건에 손을 씻으면서

「저 맨 끝 방에 지금 태양출판사 사람들이 와 있잖어요?」

「네, 면횝쇼?」

「나 저 신선생 좀 불러 줘요. 신 선생이램 알아요.」

「네이! 잠깐만 기다립쇼.」

보이의 발자욱이 한결 가볍게 달린다.

이윽고 거울을 들여다 보는 춘심이의 등 뒤에 미모의 청년이 한 사람 나타났다. 기름도 바르지 않은 긴 머리 털을 되는대로 뒤로 재껴 넘긴 것이 어여쁜 용모와 도리어 조화가 맞는 청년이었다.

「아, 춘심이, 어떻게 됐어?」

춘심은 거울을 들여다 보는 채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안 됐어?」

춘심은 돌아서며 허리춤에서 백 원 짜리 다섯 장을 꺼내 청년의 양복 웃주머니에다 꽂으며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흥 걸작은 언제 쓰는거요?」

「글쎄, 좀더 기다려요. 걸작이 그처럼 밥먹듯 되나?」

중학생 때 「콘사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던 신성호였다.

3 편집

「콘사이스」─ 아니, 인젠 신 성호라고 불러야겠다. 신성호와 박 춘심은

「슬리퍼」를 끌고 정원으로 내려 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수목사이로 조그만 못이 희끄러미 내다 보인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못 있는 데로 걸어 갔다.

춘심은 못 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약돌 하나를 주어 물 위에 던지면서

「성호씨 ─」

「응?」

「청춘이란 요것 뿐이요?」

조약돌이 첨벙 못 가운데 떨어진다. 달 없는 밤이건만 초롱 같은 별이었다. 물 위에 놀러 내려 왔던 조그만 별들이 조약돌에 놀래어 동그란 원을 그리면서 파들파들 떨고 있다.

「꿈이 너무 많았었던가 보지.」

성호는 담배를 피워 물고 못가를 어정거린다.

「후우 ─」

하고 춘심은 한숨을 꺼질 듯이 내쉬며

「성호씨.」

「응?─」

「나 들어 앉아두 괜찮수?」

「들어 앉다니?」

「그만한 말귀두 모르구 소설은 또 무슨 소설을 쓰겠다구……나 담배 ─」

성호의 입에서 담배를 빼 물며

「나 성호씨 걸작을 쓰는걸 보구 들어 앉을까 했었지만……사람의 일이란 어디 맘대루 되야죠?」

「아, 어디 좋은 이가 생겼나?」

「응, 그만하믄 괜찮어.」

「누군데?」

「아현동 사는 오 창윤 ─」

「아, 저 오 창윤씨?……」

성호는 춘심의 생각 많은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 보았다. 타오르는 눈이었다.

「아이, 귀여!」

춘심은 일어서며 돌 위에 앉은 성호의 두 볼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화 났어?」

성호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아아니.」

「그럼 왜?」

「내 뭐랬어?」

「눈물이 이처럼 글썽글썽……」

「기뻐서……」

「뭐가 기쁘긴……?」

「춘심이의 출세가……」

「요것이!」

춘심은 저고리 고름으로 성호의 눈물을 찍어 낸다.

「울믄 난 싫어!」

「누가 울긴?……어린앤가?─」

「흐, 응!……귀여!」

담배를 배앝은 춘심의 젖은 듯한 빨간 입술이 성호의 볼을 무섭게 스친다.

「화류계란 그런 거야! 그런 거래두!」

「춘심이!」

「응?」

「나의 청춘을 수 놓았던 춘심이!」

「…………」

「나의 고적한 영혼을 화려하게 수 놓았던 춘심이!」

「나 그만 둘테야, 그럼……」

「뭣을?……」

「들어 앉는것 말이야.」

「그건 안 되지. 춘심인 춘심이로서 출세를 해야만 되니까 ─」

신 성호는 격렬한 충동에 사로잡히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아, 이 고독한 감격과 쓸쓸한 정열을 구사하여 나는 걸작을 써야만 한다!」

강렬한 창작욕이 무서운 기세로 발동하는 순간을 성호는 느꼈다.

「나 그때를 손 꼽아 기다릴테야!」

그러면서 춘심은 신 성호의 가슴에다 얼굴을 파묻으며 애끓는 포옹 속에서 포옥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