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제5장
五
편집『사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왕손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노래가 틀렸다―왕손은 여기 있되 산천은 간 데 없다―이렇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기생 계월이의 방―고즈너기 장구 소리에 어울리는 계월이의 시조를 듣고 있던 흥선은, 졸음 오는 몸을 조금 일으켜 앉으며 계월이의 노래를 가로막았다. 계월이는 장구를 멈추었다. 그리고 설레발이와 같이 기다란 눈썹 아래 있는 눈을 굴려서 흥선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왕손은 여기 있되 산천은 간 데 없네―다시 반 헌 불러 봐라.』
장구를 조금 밀어 놓았던 계월이는 다시 장구를 끌어당겼다. 땅 하는 장구소리에 연하여 계월이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다.
『사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왕손은 예대로나 산천은 변하였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왕손은 여기 있으나 왕의 터를 더럽히는 자 누구냐? 얼근히 취한 흥선은, 적적한 미소를 얼굴에 띄어 가지고 노래를 끝낸 뒤에, 장구채로 자기의 버선코를 두드리고 있는 계월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겨울날 밤은 꽤 깊었다. 저 어디선가―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다듬잇소리가 장단을 맞추어서 고요한 밤 공기를 흔들어 들려 왔다.
『계월아!』
흥선은 기생을 불렀다.
『네!』
장구채로 버선코를 두드리고 있던 계월이는 그 동작을 그냥 계속하면서 머리도 그냥 아래로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하였다.
『저기 어디서 다듬잇소리가 들리지. 들리느냐?』
『네. 아직껏 듣고 있었읍니다.』
『저 다듬이질하는 여인이 과부일까?』
아래로 향하고 있던 계월이의 눈은 구을러서 한 순간 흥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음의 자취가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어떻게 그걸 압니까? 대감 아세요?』
『암, 알지! 과부의 다듬잇소리로다. 적적한 소리가 아니냐? 짝을 찾는 소리로다. 올 길 없는 이를 찾는 소리로다. 밤을 새워 가면서―』
똑딱똑딱, 다듬잇소리는 그냥 연하여 들려 왔다. 세상이 모두 잠든 밤중에 규칙바르게 들려 오는 이 다듬잇소리는 흥선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였다. 한참 말 없이 그 다듬잇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흥선은, 자기의 우울한 기분을 한꺼번에 씻어 버리려는 듯이 손으로 툭 한 번 자기의 넓적다리를 쳤다.
『왕손은 예대로되 산천은……. 계월아! 왕손은 지금 영락되고 영락돼서 계월이 같은 기생한테도 구박을 받으면서, 그래도 무얼 찾아 먹자고 기신기신 찾아 다니누나. 그렇지?』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있던 계월이는 한 순간 흥선을 흘겼다. 무슨 말씀을 하시노 하는 표정이었다. 그 눈 흘김을 보면서 흥선은 몸을 조금 움직였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자 계월 아씨! 자리나 하시오. 곤하다! 아무리 왕손이라도 식색에는 이길 수가 없다. 몇 잔 술에 오늘은 지독히도 취하는군.』
그러나 계월이는 그냥 못 들은 듯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저편에서 들리는 다듬잇소리는 이 고요한 장면에 일점의 정취를 더하는 듯이 그냥 끊임없이 들려 왔다. 한참의 말 없이 장구채로 자기의 버선코만 두드리고 있던 계월이가, 귀찮은 듯이 장구채를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머리를 들었다.
『대감!』
『왜 그러느냐?』
『어제 김 판서 댁에 가셨어요?』
『김 판서란? 병기 말이냐?』
『네.』
『음 갔었다. 그래 왜?』
계월이는 흥선을 쳐다보던 눈을 도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무슨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듯 나올 듯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종내 삼켜 버리고 말았다.
『갔으면 어떻단 말이냐?』
계월이는 한참을 입만 우물거리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듣기 힘들도록 작은 소리였다.
『대감, 왜 그 댁에를 자주 가세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흥선은 계월이를 보았다. 사내의 하는 일은 일개 기생이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계월이가 말하였다.
『소인 같은 천비가 그럴 일에 참견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발 일 없이는 가시지 마세요.』
『왜 무슨 말들을 하더냐?』
『하다뿐이리까!』
『어떤 말을 하더냐?』
계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구를 끌어당겼다. 장구채는 저편으로 던졌기 때문에 손으로 장구를 두드렸다.
『왕손은 영락되고 김문만 흥성한다―
그 왕손이 무얼 하러 김문을 자주 찾아 다니세요?』
『글쎄 병기가 뭐라더냐?』
『대감 들으시면 좋지 못한 말들을 합지요.』
『어디 아무런 말을 해도 탓하지 않을 테니 말해 봐라.』
『상갓집 개같이 헤헤 해서 다니신다구……』
콱 얼굴에 피가 솟아올랐다. 그것을 흥선은 두어 번의 너털웃음으로 속여 버렸다.
『옳은 말이로다. 병기의 말이로다. 상갓집 개지. 옛 터를 잃고 굶주려 다니는 석파나, 주인을 잃고 구석을 찾아 다니는 상갓집 개나 다를 것이 뭐냐? 인제부터는 석파(石坡)라는 호를 버리구 상가구(喪家狗)라는 호를 쓸가 보다.』
『그러니 대감, 아예 다시는 가시지 마세요.』
『네 듣기에도 싫더냐?』
계월이는 그의 커다랗고 광채나는 눈을 굴려서 잠시 흥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 뒤에 도로 눈을 떨어뜨려 버렸다.
흥선은 고즈너기 눈을 감았다.
『상갓집 개라!』
이 상갓집 개는 내일도 또한 병기의 집을 찾아보자. 수모를 하면 수모를 하느니만큼 더욱 자주 찾아보자. 살틈으로 기어 나간 한 신이 있지 않으냐? 그만 수모를 무엇을 탓할 것인가? 임시―한때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다. 먼 장래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참고 온갖 고난을 참자. 한때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로라고 우쭐거리다가 큰 일을 저지르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그들이 자기를 바보로 여기고 속 없는 놈으로 여기면, 자기는 더욱 더 그들에게 그런 눈치를 보여서 당분간의 안전은 도모하여야겠네.
『내일도 또 거기를 가 보아야겠는데……』
『꼭 몸소 가 보셔야 될 일이 아니거든 소인께 대리를 맡기세요.』
『계집으로는 당하지 못할 일이다.』
계월이의 입에서는 약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한숨 소리를 들으면서 흥선은 곤한 듯이 몸을 장침에 기대었다. 그리고 팔다리를 기껏 펴면서 기지개를 하였다.
『어 졸려!』
몇 집 건너 다듬잇소리는 그냥 연하여 들렸다.
이튿날 이 「상갓집 개」는 그의 초라한 모양을 또 다시 세도 김 병기의 집 사랑에 나타내었다. 병기는 출타하고 집에는 청지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럼, 자네 방에 들어감세. 들어가서 대감 돌아오시기까지 기다리지.』
달가와하지 않는 청지기의 표정을 뻔히 보면서도 흥선은 앞장을 서서 청지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도집 청지기라 흥선 따위 영락된 군(君)은 눈꼬리로도 안 보이는 터이지만, 그래도 표면상 종실의 일원에게 대한 예의는 지키지 않을 수가 없는 그는 묵묵히 흥선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세도가 청지기의 방은 흥선의 사랑보다 훨씬 나았다. 그 꾸밈이며 방의 넓고 크기는 둘째 두고, 방바닥이 타도록 불을 뜨뜻이 때어 둔 것부터 흥선의 사랑보다 나았다.
『어, 방 뜨뜻하군! 나이 사십을 넘어서니깐 몸이 오삭오삭 늘 춥거던. 자네 방 참 뜨뜻할세.』
하면서 흥선은 대짜로 아랫목으로 내려가서 보료 아래 손을 넣으며 웅크리고 앉았다. 그 앉은 모양조차도 궁상스러웠다.
청지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흥선으로서 만약 제 격식 찾을 자격이 있더라면, 어디서 청지기가 흥선의 있는 방 웃목에 종그리고 앉으랴만, 흥선 따위는 눈 아래 깔고 보는 청지기는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흥선은 흥선대로 그것을 탓하지도 않았다.
『대감은 어디 행차하셨나?』
『알 수 없읍니다.』
흥선의 물음에 청지기는 뚝 하니 대답하였다.
『언제쯤 나가셨나?』
『그것도 소인은 알 수 없읍니다.』
청지기가 주인 대감의 출타한 시각을 모른다는 것은 너무도 사람을 무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흥선은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 언제쯤 돌아오실지도 모르겠구면?』
『네, 알 수 없읍니다.』
『언제 돌아오시든지 나도 어차피 한가한 사람이니깐 기다리지. 방도 뜨뜻한 것이 괜찮구면.』
청지기가 분명히 싫어하는 것을 흥선도 모르지는 알고도 모른 채하는지, 보료 아래서 녹이던 손을 뽑고 보료 위에 올라 앉았다. 그리고 담배서랍을 끌어당겼다. 흥선은 담배를 피우면서 연하여 청지기에게 무슨 이야기를 걸었다. 응대하기가 귀찮은 청지기는 되는 대로 대답을 하였지만, 그런 것을 구애하지 않고 흥선은 연하여 신통하지도 못한 질문을 발하였다.
주인 김 병기가 자기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저녁 때가 되어서였다. 세도의 귀택―골목 밖에서부터 벽재 소리가 요란히 울리면서 대문을 위세 좋게 열고 병기의 행차는 제 집으로 들어왔다. 응대하기 싫은 흥선과의 응대를 억지로 하고 있던 청지기는, 주인을 맞으러 흥선을 버려 두고 달려 나갔다. 그 뒤를 흥선은 또한 바삐 따라 나갔다.
댓돌을 올라오는 병기를 청지기가 맞을 때에 흥선도 청지기의 뒤에서 병기를 맞았다.
『대궐에서 나오시는 길이오니까?』
병기는 흥선을 쳐다보았다. 한 순간 귀찮다는 표정이 그의 눈썹 위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 날은 병기는 마음이 매우 유쾌한 날인 듯싶었다. 한 순간 그의 눈썹 위에 나타났던 어두운 그림자는 즉시로 사라졌다.
『대감 언제 오셨소?』
『벌써 왔소이다.』
『들어가십시다.』
병기는 자기의 늦은 것을 변명하면서 흥선을 사랑으로 인도하였다.
그 날은 유달리 병기는 유쾌한 모양이었다. 흥선을 보기만 하면 그의 입에서 연하여 나오던 독설도, 이 날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벗과 같이 흥선과 담소하였다.
이 유쾌한 듯한 병기의 태도 때문에 흥선의 가슴에 뭉켜 있던 덩어리도 얼마만큼 삭아졌다. 병기의 말마따나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수모만 받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구박만 받아 오던 흥선은, 이렇듯 자기에게 격의 없이 대하여 주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비록 어젯날까지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봄날 눈과 같이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대감, 난초를 잘 그리신다더군요? 그런 기예는 언제 배우셨소?』
병기는 이런 말을 물었다. 거기 대하여 흥선은 겸손하였다.
『잘 그리기야 무얼 잘 그리겠소? 아이들 장난과 같은 것이……』
『어제도 그런 이야기가 났었는데, 탈속(脫俗)을 한 솜씨라던데요? 그런 같았기를 가지셨을 줄은 몰랐소이다.』
『특기가 다 뭐오니까. 노는 틈틈이 장난삼아 배운 노릇―남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럽소이다. 그 서투른 재간을 그래도 보아 주는 이가 있어서 때때로는 술값이나 됩니다.』
『한 폭 이병기를 위해서 휘호해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흥선은 눈을 들어서 병기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를 놀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그러나 병기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대감께서는 그런 서투른 것이 아니라도 벽장 속에 진품이 많고 많을 터인데, 그런 변변치 않은 것은 드리기조차 부끄럽소이다.』
흥선은 이만큼 사양하여 두었다.
그러나 병기는 굳이 흥선에게 한 폭 그려 주기를 당부하였다. 사양하는 흥선에게 부디 그려 달라고 몇 번을 간청하였다. 여기서 흥선은 병기의 간청에 응하였다. 자기를 만나면 독설로서 자기를 늘 비웃기만 하던 병기가 오늘따라 유쾌히 다소를 하면서 그 위에 그런 간청을 하는 것이 흥선에게는 고마웠던 것이다.
『변변치는 못한 재간이나마 일간 하나 가져오리다.』
이렇게 약속하였다.
병기는 흥선의 가사 형편도 물었다. 언제 보니까 매우 총명하여 보이던 둘쨋 도령 재황이 잘 자라느냐고도 물었다. 흥선을 위하여 병기는 주안까지 차렸다. 그리고 흥선이 사랑하는 기생 계월이도 주석의 흥취를 돋구고자 불러 왔다.
어젯밤에도,
『아예 김 판서 댁에는 이후에는 가시지 마세요.』
하고 당부당부하였거늘, 그 이튿날인 오늘 또한 김 판서댁에 와서 술을 얻어 먹는 흥선을 계월이는 몰래 눈을 흘겨보았다. 흥선은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모른 체하고 외면하여 버렸다.
흥선은 밤이 매우 깊어서 병기의 집에서 나왔다. 자기의 타는 사인 남녀를 빌려 주려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흥선은 어둡고 추운 밤의 거리에 나섰다.
인정에 약한 흥선은 오늘 몇 시간의 병기의 환대 때문에 그 사이 깊이깊이 마음에 새기었던 병기에게 대한 원한의 절반을 잊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흥그러운 마음으로 콧소리를 하면서 교동 병기의 집에서 바로 건너편인 자기의 집으로 비틀비틀 돌아왔다. 벌써 거의 반원(半圓)에 가까운 달이 하늘 높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정월 초순 어떤 날이었다.
앞에 펴 놓은 명주―
그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은 흥선이었다.
붓에 먹을 듬뿍이 묻혀 가지고 한참 명주 폭만 내려다 보고 있다가 흥선은 왼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오른손에 잡았던 붓을 명주폭 위에 놀렸다. 손은 뛰놀았다. 위 아래 좌우로, 혹은 천천히 혹은 급속히―흥선의 손에 잡힌 붓이 노는 동안 한 포기의 난초는 명주 위에 그려졌다.
바위, 나무등걸―그 틈으로 벋은 길고 짧은 잎이며 점점이 빛을 자랑하는 몇 송이의 꽃―흥선의 정신을 모은 한 포기의 난초는 명주 위에 나타났다. 거기 낙관을 하고 흥선은 조금 물러앉아서 자기의 휘호한 난초를 굽어보았다. 기교보다도, 화법보다도 오히려 힘으로 찬 난초였다. 알지 못함이 아니며, 자각하지 못함이 아니로되, 패기에 난 그의 손끝은 기교를 무시하고 화법을 무시하고, 때때로 힘있게 길게 벋는 것이었다.
『싱거운 그림이로다!』
입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지만 그의 입 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 기교를 무시하고 벋어 나간 난초 잎의 힘―만약 당시의 권문 가운데 참으로 난초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면 홍선을 단지 한 주착 없는 부랑자로 보아 넘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법에 벗어나서 길게 벋어 나온 잎이 있었다. 법에 벗어나서 가로 두드러진 나뭇등걸이 있었다. 이 법을 무시한 자기의 의기를 자랑스러운 듯이 잠시 굽어 본 뒤에 그 폭을 고즈너기 걷어 치웠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명주를 자기의 앞에 펴 놓았다.
흥선이 걷어 치운 난초를 청지기 김 응원(金應元)이 굽어 보았다. 흥선이 다른 명주폭 앞에서 다른 난초의 구상을 하고 있는 동안, 응원은 흥선이 그려 던진 난초를 굽어 보고 있었다.
이 기괴한 난초 앞에 응원의 마음은 차차 혼란되는 듯하였다. 한 포기를 휘호하면 휘호하느니만큼 주인 대감의 필법은 나날이 법을 무시한다. 나날이 그 기교가 더하고 완벽에까지 도달하여야 할 것이로되, 흥선의 난초는 그와 반대로 나날이 법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 법을 무시한 난초의 위에 흐르고 넘치는 「힘」을 응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법을 무시하였으면 그것은 당연히 「싱거운 난초」일 것이다. 이러한 응원의 상식적 판단을 거슬려서 법을 무시한 흥선 대감의 난초에는 그 힘은 여전히 있을뿐더러 필법을 무시하면 하느니만큼 힘은 더 늘어가는 것이었다.
기교 극치가(技巧極致家)로서의 응원의 상식을 무시하고, 응원의 알지 못할 길을 걸어나아가는 이 난초의 앞에 응원은 혼란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되지 않았다고 튀겨 버리기에는 너무도 힘으로 찬 난초였다. 그렇다고 훌륭한 난초라고 칭찬하기에는 너무도 기교를 무시한 그림이었다.
잠시 굽어보고 있다가 응원은 탄식하였다. 이 탄식성에 명주폭을 내려다보고 있던 흥선의 머리는 응원에게로 돌아왔다.
『싱거운 난초지?』
이 질문에 대하여 응원은 손을 들어서 난초의 잎 한 개를 가리켰다.
『여기가 너무 굵게 되지 않았습니까?』
흥선은 응원의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잠시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동시에 오른손에 잡고 있던 붓이 응원의 가리키는 곳에 와 떨어졌다. 순간―그렇지 않아도 응원이 굵다던 잎은 마치 뭉치와 같이 굵게 변하였다.
『자 인제는 어떤가?』
악연히 흥선의 붓만 보고 있는 응원에게 대하여 흥선은 하하하하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여섯 간 병풍―
크고 작은 난초가 규칙 없이 벌여져 있는 병풍이다. 그 병풍 앞에 흥선은 청지기 응원과 함께 앉아서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김 병기에게서 난초에 대한 칭송을 들은 흥선은 그 돌아온 즉시로 자기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재료를 준비하여 몸소 그린 여섯 장의 난초로 한 개의 병풍을 만든 것이었다. 낙척 종친 흥선이 세도 김 병기에게 보내는 선사―아첨물이었다.
병풍 앞에 앉은 흥선의 얼굴에는 득의의 표정이 역연히 나타나 있었다. 그 곁에서 보고 있는 응원의 얼굴에는 마땅치 못하다는 듯한 불만의 표정이 있었다. 흥선은 의견을 묻는 듯이 응원을 돌아보았다. 응원은 즉시로 대답지 않았다. 잠시 더 무거운 눈을 병풍에 던지고 있다가야 겨우 대답하였다.
『×판서 댁에 보낸 병풍보다 못하게 되었읍니다.』
『그것보다 밑천이 적게 들었거든.』
응원은 병풍의 난초가 못하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흥선은 병풍 자체가 못하다고 들은 모양이었다.
『밑천도 적게 들었거니와 공력도 적게 들었읍니다.』
『?』
『휘호도 ×판서 댁 것만 못하게 되었읍니다.』
흥선은 눈을 굴려서 응원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병풍을 보았다.
분명히 난초 그것의 기교는 이전 것만 썩 못하다. 흥선 자기로도 그것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교 그것이 전엣 것만 못하다 할지라도 전엣 것보다 흥선의 마음에는 더 드는 병풍이었다. 이것보다 더욱 좋은 난초를 보낼지라도 알아볼 병기가 아니요. 단지 되는 대로 먹으로 끄적거리어 보낸다 할지라도 역시 알아볼 병기가 아닌지라, 아무런 병풍을 보낼지라도 「보냈다」는 명색 이상은 될 것이 없으되, 그림 자체로 보아서 ×판서 댁에 보낸 병풍보다 썩 낫게 되었다. 그것을 못하다 감정한 응원을 흥선은 다시 미소로써 돌아보았다.
『못해도 할 수 없지. 또 다시 새로 만들자면 돈이 또 삭고……』
흥선은 몸을 일으켜서 병풍 가까이 가서 한 번 다시 병풍을 훑어 본 뒤에 찬찬히 접었다. 그리고 응원에게 명하여 잘 싸게 하였다. 겨울 날의 짧은 해는 차차 서편 창으로 기울어졌다. 부엌 며느리들은 저녁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설 때다. 병기에게 난초 병풍을 보낸 삼사 일 뒤에 흥선의 작다란 몸집은 또 다시 병기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며칠 전에 그렇듯 자기의 난초를 칭찬하던 병기인지라 병풍을 보냈으면 당연 기뻐할 것이며 그것이 기쁠 것 같으면 당연히 자기를 환대할 것이며, 자기를 환대하면 그 꼬리에 무슨 좋은 떡이라도 달려 있지나 않을까―이런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병기의 댁을 찾게 된 것이었다.
『일간 무양하시오?』
이런 때에 늘 얼굴에 떠오르는 비굴한 미소를 또 띄어 가지고 흥선이 이렇게 인사할 때에 병기는 책상을 앞에 놓고 앉아서 무슨 글을 읽고 있다가 머리를 조금 들어서 흥선을 본 뒤에 같이 상례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읽던 책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가련한 공자 흥선―그는 며칠 전에 병기에게 난초 병풍을 선사하였는지라, 자기가 오기만 하면 병기는 당연히 기뻐서 맞아 줄 줄 알았다. 예기에 반하여 들어서는 참 차디 찬 눈찌를 본 흥선은 얼굴에 나타내었던 비굴한 미소를 걷어 치웠다. 그리고 주인이 지시도 하기 전에 발치로 들어가서 덜썩 주저앉았다.
병기는 눈을 굴려서 다시 한 번 흥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눈을 급히 도로 보던 책으로 옮겼다. 한참 책만 들여다보고 흥선의 존재는 모른 체하고 있던 병기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흘렀다. 책에 무슨 미소할 만한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기회를 기다리던 흥선은 이 모시에 달려 늘어졌다.
『무슨 책이오니까?』
병기는 눈 가에 그냥 미소를 띈 채 힐끗 흥선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으로 책을 조금 들어서 그 뚜껑을 흥선에게 보여 주고는 눈을 도로 책으로 떨어뜨렸다.
「금병매(金甁梅)」였다. 손님이 와도 모른 체하고 병기가 일심불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책은 무슨 귀중한 학문 경전이나 시서가 아니요, 한 개의 소설 비사였다. 그 소설에 열중하여 손님이 와도 모른 체하고 그냥 버려 둔 것이었다. 병기에게 있어서는 흥선 따위는 보통 사람의 축에 넣을 가치조차 없었다. 며칠 전에 조롱삼아 흥선의 난초를 칭찬은 하였지만, 그 뒤에 곧 그것을 잊어버린 그는, 그 뒤 흥선에게서 난초의 병풍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 병풍을 청지기에게 주어 버리고, 벌써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그에게 매일 들어오는 많은 선사품을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흥선의 온 정신을 박은 병풍 따위는 벌써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흥선의 얼굴에는 다시 비굴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 비굴한 미소에 어울리는 비굴한 말조차 그의 입에서 나왔다. 병기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맞추어 보려고, 마음에 없는 말로 「금병매」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두어 마디 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 때에 병기는 흥선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가지고 「금병매」를 읽었다. 병기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중얼거리는 흥선의 말은 단지 병기의 독서를 방해하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한 두어 마디 헛소리를 하다가 이 낌새를 보고 흥선도 입을 봉하여 버렸다. 묵연히 앉아서 소설을 읽고 있는 병기의 곁에 흥선도 묵연히 앉아서 허리만 좌우로 젖고 있었다.
불쾌한 기분이 흥선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호소할 곳이 없는 불쾌였다. 제 아무리 병기가 소설만 읽고 자기를 안 돌아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무람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석양녘까지 흥선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병기도 때때로 담배를 붙일 때만 몸을 움직이고는 다시 책을 보고 하였다.
흥선은 드디어 병기에게서 병풍에 대한 사례를 못 들었다. 사례가 나오면 거기 매달려서 무슨 다른 말을 꺼내려던 흥선은 그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석양녘까지 묵묵히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킬 때는, 흥선은 울고 싶은 듯한 또는 노여운 듯한 기괴한 감정 때문에 (작별에 임하여 반드시 나타내야 할) 비굴한 미소조차 안 나타났다.
병기에게 작별하고 문을 열려던 흥선은 거기서 드디어 자기의 가장 귀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독서에 정신이 팔려서 병기는 혹은 자기의 난초 병풍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늘 이렇듯 냉담한가 하여―
『대감, 일전에 변변치 않은 물건을 하나 보냈더니 받으셨는지요?』
『아 참!』
병기는 머리를 기울였다. 이즈음 수일 간 받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서, 흥선이 보낸 물건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여 보는 모양이었다.
『감사하게 받아서 잘 먹었는데―그……』
병기는 병풍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흥선의 얼굴에는 우는 듯한 미소가 나타났다.
『가난한 사람은 무사분주라, 휘호도 잘 되지를 않아서 부끄럽습니다.』
병기는 비로소 생각난 모양이었다.
『참 좋습니다. 석파께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참 몰랐소이다. 잘 골방에 싸 두었지요. 우리 집 가보외다.』
이 입에 발린 치사에 대하여 흥선은 우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하고 병기와 작별하고 나왔다. 내오던 흥선은 자기를 보내려고 제 방에서 나오는 청지기와 마주치자, 청지기의 방 안에 눈을 던졌다. 동시에 그의 발걸음은 그 곳에 붙은 듯이 딱 멎었다.
청지기의 방 발치에는 한 개의 병풍이 서 있었다. 그 병풍이야말로 아까 병기가 한 번은 잘 먹었노라 하고, 그 뒤에는 잘 싸서 골방에 비장하였노라던 병풍―흥선 자기가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감을 마련하여 정력을 다하여 흥선이 정성을 다하여 그려서 보낸 이 선물은, 병기의 댁 청지기의 방의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찬바람이 얼굴을 쏘는 한길에 나서서야 흥선은 비로소 이를 갈았다. 그의 양 뺨으로 흘러 내리는 눈물―그것은 단지 찬바람 때문뿐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감정―그것은 단지 김 병기에게 대한 이 하응의 억분이 아니라, 일개 세도에게 이렇듯 모멸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무력한 종친」의 억울함을 대표한 감정이었다.
『으―ㅁ!』
한 잔의 술로 그의 목을 적시지 못하였으되,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몸의 중심을 잡지를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흥선은 저물어가는 거리를 자기의 집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겨울날 혹혹 쏘는 찬바람이 이 불쌍한 중로(中老)를 놀리는 듯이 그의 옷소매며 자락을 휘날리며, 머리를 푹 가슴에 묻은 채 종친답지 못한 상걸음으로 흥선은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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