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명종(明宗) 때의 일이다.

그 때 김효원(金孝元)이라는 사람이 이조전랑(吏曹銓郞)에 뽑히었다. 이조전랑이라는 것은 조정의 백관을 전형하여 쓰고 안 쓰는 것을 고선하는 권리를 잡은 지위였다.

그런데 명종비(妃)의 오빠되는 심의겸(沈義謙)이라는 사람이 거기 대하여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는 심의겸이 이전 어떤 날 당시의 재상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가 보니까, 김 효원이 그 집 문객으로 있었다. 김효원은 깨끗한 선비의 신분을 지키지 않고, 청년 선비로 재상가의 문객 노릇을 하는 것은 비루한 일이라, 이런 사람을 전형관을 시키면 벼슬이 공평하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들어 반대를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 효원은 심 의겸을 매우 속으로 밉게 여겼다.

이로부터 얼마 뒤에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전랑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매 이것을 본 효원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었다. 충겸은 사림(士林)에 아무 명망도 없는 사람―단지 궁중의 척권을 자세(藉勢)삼아 이런 벼슬에 뽑힘은 가당하지 않다고 효원이 또한 들고 일어섰다.

이리하여 심씨는 김씨를 가리켜 이전 원한을 이런 곳에 풀려는 소인이라고 일컫고, 김씨측은 심씨를 가리켜 뒷힘을 입는 비루한 사람이라 하여 서로 시비가 분분하였다. 이 시비가 차차 벌어져서, 단지 심씨 김씨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심씨 편을 돕는 패와 김씨 편을 돕는 패가 생겨서, 차차 두 패가 서로 맞서서 시비를 하게까지 되었다. 즉 벼슬아치 집안과 사림의 대립이었다.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서 이 시비는 더욱 커졌다. 당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 파 저 파로 붙어서 서로 시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발(李潑), 유성룡(柳成龍) 등이 김씨파가 되고, 윤두수(尹斗壽), 박순(朴淳), 정철(鄭澈) 등이 심씨의 파가 되었다.

김씨는 동촌(東村)에 살았으므로 김씨파는 동인(東人)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심씨는 서촌(西村)에 살았으므로 심씨파는 서인(西人)이라 불렀다. 이 때에 서로 맞서서 군자라 소인이라 하는 시비가 생겨나니, 동인과 서인이 차차 벌어지고 또 벌어져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잡아 먹는 큰 불집이 되는 당쟁(黨爭)을 낳게 된 것이다.

동인과 서인은 서로 갈라져서 국사에는 생각을 두지 않고, 심지어 사소한 일까지라도 모두 '당파'라 하는 안경으로 내다보면서, 반대파에서 하는 일이라면 좋고 그르고 잘하고 못하고를 막론하고 반대하고, 시비를 생각지 않고 반대파에서 하는 일의 반대되는 일을 자기네의 정책으로 쓰고 하였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나라의 정치라 하는 것은 모두 하나도 행하여지는 것이 없고, 오로지 머리를 모으고는 반대파를 거꾸러뜨릴 의논만 거듭하고 하였다.

동인이 세력을 잡을 때는 서인 중에 아무리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녹사 하나를 얻어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인의 세상이 되면 어제까지의 재상명현이던 동인들은 모두 원배를 하거나 혹형을 당하고, 조그만 당하관까지라도 모두 서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고 하였다.

왕의 전권 시대라 왕의 총애를 사는 파이면 득세하였다. 왕의 총애를 잃은 파이면 실세하였다. 그런지라 그들은 오로지 왕의 총애를 얻으려고 별별 천한 음모까지도 다 하였다. 그리고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기가 어렵게 되면 그들은 다른 묘책(―즉 그 왕을 폐하고 자기네를 총애하는 새 왕을 만들어 세우려는)을 꾸며 내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쟁의 폐는 나날이 다달이 더 심하고 심각하여 갔다.

당시의 명유(名儒) 이이(李珥)가 이 당쟁을 근심하여 어떻게 하여서든 두 파를 조정을 시켜 보려 하였다. 그리고 누누히 상감께 그 일을 계달하였다.

이 이이의 노력이 성공을 하여 나라에서는 두 파의 사람을 조정시키기 위하여 두 파의 근원인 심의겸과 김효원을, 심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김은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정책이 오히려 두 파의 대립을 더욱 크게 한 것이었다.

개성은 이 나라의 중요한 고장이요, 경흥은 함경도 한편 구석에 달린 외따른 색북이라, 그러니 개성 유수라는 것은 영직이려니와, 경흥 부사라는 것은 개성 유수에 비기건대 창피한 벼슬이다. 이 조처는 두 파를 조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을 높여 주고 동인을 낮추어 주는 것이라―동인측에서 이러한 반대성이 일어다. 그리고 이 조처의 장본이 되는 이이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동인측의 송응개(宋應漑), 박근원(朴謹元), 허봉(許篈)의 세 사람을 정배를 보냈다. 이것이 소위 계미 삼찬(癸未三竄)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이이는 어느덧 중립자의 지위에서 서인의 거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동인 가운데서도 또한 그 안에서 파가 갈리어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구별이 생겼으니, 그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즉, 이이의 조정으로 말미암아 정부에는 동인과 서인이 아울러 서게 되었는데, 동인 가운데서 정여립(鄭汝立)이라는 사람을 쓰는 데 대하여 동인 가운데 이발(李潑)과 우성전(禹性傳)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씨의 당인 정인홍(鄭仁弘)이 상감께 우성전을 공격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 때문에 우씨를 옹호하는 유성룡(柳成龍), 이덕형(李德馨) 등과 이씨를 옹호하는 파와의 사이가 또한 벌어졌다. 우씨는 남산동에 살았으므로 남인(南人)이라는 지명을 받았고, 이씨는 북촌에 거하였으므로 이씨파는 북인(北人)이라는 지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지만, 본시는 같은 당이므로 서로 모함하고 죽이고 하는 일은 없이 그렁저렁 지냈다.

유명한 기축 옥사(己丑獄事)도 동인 서인의 당쟁이었다. 서인 정철(鄭澈)이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대역죄를 다스렸는데, 그 때 동인으로 지목받은 명사들도 죄없이 벌 받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동서의 당쟁은 이 뒤에는 도저히 조정할 수가 없도록 서로 원한은 크게 되었다.

그 뒤 광해군(光海君)의 조에 이르러서 광해군을 가운데 두고 북인 가운데 대북(大北) 소북(小北)이 갈리우고 대북에는 또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의 파가 생겨서, 대북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가 인조의 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파는 역모로 몰려서 전멸하여 버리고, 소북만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원체 소북은 그 사람 수효도 적고 세력도 없었으므로, 정권 쟁탈의 제일선에는 나서 보지를 못하였다.

동인의 한 갈래인 남인과 서인과의 정쟁만 계속되었다.

인조 등극 후에 정권을 잡은 것은 서인이었다. 그러나 남인 가운데서 이원익(李元翼) 같은 명사를 기용하여 한때 남인과 서인의 다툼이 주춤하게 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서인이 잡았다. 남인들은 자연히 명목만 있고 실권은 없는 벼슬로 몰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표면적이나마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쟁탈전은 한때 식어진 듯이 보였다.

효종(孝宗)이 등극하였다.

효종은 세자 시절에 심양(瀋陽―奉天)에 잡혀 가서 욕을 본 일이 있는지라, 그 철천지한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라를 독려하여 예외로 국력 배양에 힘썼다. 그 위에 당시의 명신이요 유명한 학자인 우암 송 시열(尤庵 宋時烈)은 서인의 거두라,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일어날 겨를도 없었고 감히 일으키지도 못하였다.

청국을 정벌한다는 커다란 희망을 품은 채 실행하지 못하고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顯宗)이 등극하였다.

그 때에 효종의 모후(母后)의 복제 문제로 남인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과 서인 송시열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여기서 한때 죽었던 남인의 다툼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 예송(己亥禮訟)으로서, 효종이라 하는 튼튼한 돌쩌귀가 없어지기 때문에 다시금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다음 숙종(肅宗) 때에는 유명한 '폐비(廢妃) 사건'이 생겼다.

숙종에게는 장씨라 하는 아리따운 후궁이 있었다. 숙종은 그 후궁에 혹하여서 왕비 민씨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데 장씨라 하는 후궁은 본시 음탕하고 간교한 여인으로서, 왕의 총애뿐은 부족히 생각하여 종친 동편군(東平君)과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왕의 총애를 자세삼아 방자한 행동이 많았다.

숙종, 왕비 민씨, 후궁 장씨―이 델리키트한 관계를 두고 또 여기서 맹렬한 당쟁이 일어났다.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등 당시의 재상들은 모두 서인이었다. 이 재상들은 모두 민왕비의 두호자(斗護者)로서, 사리를 들고 의를 들어서 왕께 후궁 장씨를 멀리 하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장씨에게 깊이 마음을 잡힌 왕은 이 재상들의 간을 즐겁게 여길 수가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이 궁중의 애욕 문제를 당쟁에 쓰려고 일어선 것이 남인(南人)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등이었다. 그들은 왕께 품하여 자기네들의 정적(政敵)인 서인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고 혹은 정배보내고 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비 민씨는 떨구어서 서인(庶人)으로 하게 하여 안국동 자기의 집으로 내어 쫓았다.

후궁이던 장씨는 여기서 당당한 왕비로 승격을 하였다. 동시에 그 세력이 커짐과 함께 남인들의 세력도 커져서 세상은 남인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정부의 중요한 자리, 각 곳 수령 방백은 모두 남인 혹은 남인의 집안 사람이 점령하였다. 한때 찬란한 남인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본래 어둡지 않은 숙종은 오래 혼미한 꿈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장씨의 허물을 겨우 알았다. 동평군과의 사이도 또한 눈치채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력 잃은 서인들의 책동도 여기 가하게 되어 어젯날의 재상이요 권력가들은 오늘 다시 야에 내려가게 되고, 다시금 서인의 천지를 이루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기서 당쟁은 고조에 달해서, 이 때에 맺힌 원한은 서로 풀 길이 없게 되었다.

이 숙종 때에 서인은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게 되었다. 변변찮은 문제로서 또한 서인도 두 파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여기 네 가지의 당파가 생겼다. 본시 서인으로서 지금은 두 파가 된 노론 소론과, 본시 동인으로 지금은 두 파가 된 남인 북인(북인은 또 여러 파로 갈렸지만), 이것이 소위 사색(四色)으로서, 조선 정권의 쟁탈전은 이 뒤로부터 늘 이 네 파에서 하게 되었다.

내려와서 영종(英宗) 때에는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하게 되매, 영종은 현철한 군주라 탕평 정책으로 두 파를 융화시키려 했지만 잘 가리지 못하였고 오늘은 노론, 내일은 소론, 이렇게 정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한때는 노론들 때문에 소론은 씨도 없이 전멸될 뻔까지 하였다.

그 때에 당쟁열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아래의 한 예를 보아도 알 것이다.

이인좌(李麟佐)가 청주 땅에서 반역의 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이인좌가 소론의 한 사람이라는 빌미로,

'소론의 난리는 소론이 진정시켜라.'

고 대장, 중군에서 영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론 가운데서 내보냈다.

이리하여 그 때는 노론 혹은 소론 가운데 한 사람의 개인적 행동까지라도 모두 당쟁에 이용하고 세력 다툼에 이용하였다. 사도세자의 비참한 최후도 노론 소론의 당쟁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영종은 정궁께 아드님을 못 보고 후궁 이씨에게서 경의군(敬義君)이 탄생하였는데, 영특하고 총명하므로 왕은 이를 세자로 봉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불행히 열 살에 하세하였다.

여기서 노론들은 종친 가운데서 동궁을 한 분 간택합시사는 의견을 내었다. 거기 반하여 소론측에서는 상감이 아직 춘추가 많지 않으시니 기다려 보는 것이 옳은 일이라 반대하였다.

왕은 소론의 말을 옳게 여기고 기다리는 동안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다.

이 이가 즉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이 이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당쟁과 음모 등이 계속되어, 마지막에는 세자가 부왕의 오해를 사서 뒤주 속에서 굶어서 하세하게 된 비참한 사실까지 생겨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드님이요 영종의 손주되는 정종(正宗)은 현철하고 명석한 군주였다.

정종은 이 당쟁의 폐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없이하여 버리기는 매우 힘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색 당인들로 하여금 당쟁에 마음을 두 겨를이 없게 하려고, 그 수단으로서 여러 가지 사업을 일으켰다.

편찬, 효자 열녀의 표창, 과거, 치수 치산, 온갖 일을 안출하여 내어서 당쟁에 마음을 둘 틈이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씨조의 중흥 사업은 성취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순조(純祖)의 대부터 다시금 당쟁은 시작되었다.

순조의 재위 삼십사 년간, 또한 그 뒤를 이은 헌종(憲宗) 재위 십오 년간, 한 대 더 내려와서 철종(哲宗)의 대에 이르기까지 순조의 등극한 것이 열 한 살 되던 해요, 헌종은 홑 여덟 살 되던 해며, 철종은 강화도의 한 초동(樵童)으로서 열 아홉 살에 등극을 하여서 그 때부터야 비로서 글을 배웠으니, 이 삼 대의 임금의 군권이 펼 까닭이 없었다. 이 삼 대의 임금의 뒤에서 수렴 청정(垂簾聽政)한 이가 대대의 대비였다. 이리하여 당쟁은 통어할 이가 없어 그 극도에 달하고, 정사는 극도로 어지럽게만 된 것이다. 오늘의 공신이 내일은 역신으로 몰리고, 어제의 역신이 오늘의 공신으로 되고―이렇듯 그 변천이 짝이 없었다. 그리고 또 변천이 무쌍한지라 안정되는 일이 도무지 없었다.

이런 당쟁의 틈에 끼어서 가련한 생활을 계속한 사람은 왕족들이었다. 왕자(王子), 왕형제(王兄弟), 왕손(王孫), 왕숙질(王叔姪)을 무론하고, 왕실의 피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참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쟁에 있어서 자기네의 세력을 펴기에 제일 간단하고 경편한 수단은, 자기네들 가운데서 딸이나 누이를 궁중에 들여보내서 후궁이나 혹은 왕비를 삼는 것이었다. 척신이 되어 가지고야 그들은 마음대로 세력을 펼 수가 있었고 마음대로 자세를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세력 잡는 제일의 수단으로서 누이나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냈다. 그런지라, 당파의 세력의 증장(增長)을 따라서 비(妃)가 빈(嬪)이나 서인(庶人)으로 떨어지고, 빈이나 서인이 일약 비로 승격을 하고 하는 일이 무상하였다. 거기 따라서는 또한 어젯날의 세자(世子)이던 분이 오늘은 역모로 몰려서 극형을 당하고, 어제의 무명한 종친이 동궁(東宮)으로 책립이 되고 하는 일이 무상하였다.

조금만 왕과 촌수가 벌어지는 종친은 누구든 경이원지(敬而遠之)하였다. 왕족의 생명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시대에 있어서 왕족과 친히 하다가는, 만약 어떤 정책상 그 왕족이 역모로 몰리는 날에는, 자기도 애매한 죽음을 하기가 쉬워서 왕족과의 교제는 서로 꺼렸다.

이씨 조선의 역사를 뒤져 보자면, 명료하지 못한 죄명으로 혹은 유배, 혹은 극형을 당한 왕족이 수가 없다. 현왕의 충신으로서 후대 왕께까지 총애를 받으려면 반드시 자기네와 마음이 맞는 이를 세자로 정하도록 책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네와 마음이 맞지 않는 종친은 이 세상에서 존재를 없이하여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 필요상 가장 손쉽고 중한 벌을 가할 죄명은 역모(逆謀)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모라는 죄명에 몰려서 비명에 타계(他界)한 왕족의 수효는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노론이 세력을 잡은 때는 소론측에서 추대하려던 세자는 반드시 해를 보았다. 소론측에서 세력을 잡은 때는 남인은 왼편으로 한 왕자는 반드시 해를 보았다.

이리하여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이 바꾸어 가면서 정권을 잡는 동안 종친은 무수히 해를 보았다.

이 때문에 좀 슬기로운 종친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왕실을 벗어났다. 정계(政界)를 멀리 하였다. 그리고 삼촌이 사촌이 되고 사촌이 오촌 육촌으로, 왕실과 사이가 벌어져 가는 동안, 이 가련한 종친들은 밥을 위하여 혹은 낙향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락의 지위에서 어떻게 어떻게 능지기라는 소역(小役)이나 얻어서 겨우 그들의 굶주린 입을 쳐 나아가는 것이었다.

왕족이 벼슬을 하는 것은 금하는 바였다. 그 금령 때문에 벼슬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왕족으로서 상인(商人)이나 공인(工人)이 될 수도 없는 영락된 공자들은 자기네의 사촌 혹은 육촌이 팔도 삼백 주를 호령하는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갓집 개 모양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 쥐고 헤헤하며 장안 대도를 헤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낙향을 하여 몸소 낫을 잡아 새를 베며 보습을 끌어 밭을 가는 것이었다.

왕족 끼리끼리의 교제도 없었다. 만약 섣불리 교제를 하다가는 어떤 죄명 아래 어떤 형벌이 자기네의 위에 가해질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궁을 떠난 종친―이야말로 고래 싸움에 치인 새우의 격으로서, 당쟁에 희생되어 몸은 당당한 종실 공자면서도 굶주림에 헤매는 가련한 사람들이었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은 이씨조 이십일대 영종의 현손(玄孫)이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증손이었다.

영종의 세손이요 사도세자의 아드님인 정종이 등극을 하고, 그 뒤 순조를 지나서 순조의 세손 헌종(憲宗)이 등극할 동안―흥선군의 집안으로 보자면 흥선의 할아버지 은신군 충헌공(恩信君 忠獻公)의 대에는 지존과는 동기이던 것이, 흥선의 아버지 남연군 충정공(南延君 忠正公)으로부터 흥선에게 이를 동안―궁중에서는 사도세자로부터 사 대째 내려오고 흥선가에서는 사도세자로부터 삼 대째 내려올 동안―동기가 삼촌이 되고 삼촌이 사촌 오촌으로 벌어져서 헌종과 흥선군과는 칠촌 숙질로 벌어질 동안―궁을 떠난 이 집안은 영락되고 또 영락되었다.

순조의 뒤를 이어서 여덟 살에 등극하였던 세손 헌종이 기유(己酉) 유월 초엿새날, 보수 스물 셋으로 후사가 없이 승하하였다. 아직 청년이기 때문에 따로이 세자도 책립하지 않고, 헌종의 아버님인 익종도 소년 하세하기 때문에 세제(世弟)도 없었으므로, 종친 가운데서 지존을 모셔 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나이가 좀더 어려서 그 때의 척신인 김씨들에게 좌우될 만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몸가짐이라도 좀 단정하였더면, 헌종의 뒤를 이어서 제 이십 오대의 보위에 올라갈 자격이 넉넉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이 영락된 공자를 돌보지 아니하였다.

헌종이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갑자기 승하하고, 그 세자며 세제도 없었기 때문에 종친 회의가 열리고, 이 사직의 승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홀로 잡은 대왕비(순조비 김씨)께 중신들이 후사 지정을 간원할 적에, 대왕대비는 가까이 이 서울에 있는 흥선군을 지적하지 않고, 강화(江華)에 내려가서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철종(哲宗)을 지적한 것이었다. 같은 사도세자를 증조부로 하고 삼 대째 내려온 흥선의 육촌 동생이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승하하신 금상과 강화의 원범(元範)뿐―그를 모셔다가 이 사직을 잇게 하오."

이것이 대왕대비의 하교였다.

이리하여 행운의 신은 슬쩍 흥선의 집안을 그저 넘어가 버렸다.

궁중 부중은 그 때 김씨의 천지였다.

순조 왕비도 김씨였다. 순조의 아드님으로, 보위에 오르기 전에 하세한 익종의 비는 조씨(趙氏)이나, 익종의 아드님인 헌종의 비(妃)도 처음은 승지 김조은(金祖垠)의 따님이었다. 강화도에서 모셔 온 철종도 김문근(金汶根)의 따님을 비로 삼았다. 이리하여 삼 대째 내려온 김씨의 세력은 궁중 부중을 무론하고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런지라, 벌써 성년자요 대처자(帶妻者)인 흥선은 절대로 보위 후계자의 가운데 손꼽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전 상감은 자기의 칠촌 조카이며, 현 상감은 자기의 육촌 동생이로되, 이 영락된 공자 흥선은 척신 김씨의 세력에 압도되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이 주린 배를 움켜 쥐고 투전판이며 술집을 찾아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깨를 겨루고 배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술값이라도 정 몰리면 붓을 잡아 난초를 그려서 그것을 팔아 달라고 각 대관의 집을 지근지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마음이 끝없이 교만한 대관 댁 청지기며 하인들에게 갖은 비웃음을 다 받지만, 이 공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폐의파립으로 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것이었다.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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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