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戊戌)년 이월 초이틀이었다. 정월부터는 봄이라 하되 이름이 봄이지, 이월 중순까지도 날이 춥기가 여간이 아니었다. 아침 저녁은커녕 낮에도 혹혹 쏘는 바람이 나뭇등걸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길이며 뜰에 널린 나무 부스러기이며 종이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날 운현궁 안의 공기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무슨 커다란 수심이 있는 듯이, 하인들이 동으로 서로 분주히 왕래하며, 구석마다 모여서 무엇이 근심스러운 듯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오정이 지나면서부터는 하인들의 수선거리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연하여 밖으로 심부름을 나가는 하인들이 있었다. 대궐이며 각 궁이며 권문들에게도 연하여, 혹은 대감 혹은 청지기들이 운현궁으로 왔다.

밖의 싸늘한 바람은 더욱 강하여졌다. 펄펄 종이 조각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햇빛도 그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였다. 휙휙거리는 바람 소리도 꽤 강렬하여, 뜨뜻이 불을 땐 방 안에서라도 그 소리만 들어도 추위를 느낄 만하였다.

그런 심한 바람 가운데서도 무엇이 분주한지 무엇이 근심스러운지, 하인들은 방 안에 들어가지도 많고 뜰을 수군거리며 왕래하였다.

문득―

안에서 곡성이 울려 나왔다.

"아이고―아이고!"

한 마디에 시작된 그 곡성은 삽시간에 퍼졌다. 내전 사랑 할 것 없이 그 곡성은 삽시간에 전파되어 온 궁내가 곡성으로 화하였다. 궁밖으로 모여든 많은 백성들이 궁문 밖에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손을 읍하고 서 있었다. 궁에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백성들은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하여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스러운 소식, 듣기 싫은 소식, 그러나 또한 십중 팔구는 반드시 나올 소식을 그들은 겁 먹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귀에도 그 궁 안에서 나오는 곡성이 들렸다.

"운명하셨다!"

누구의 입에선가 이런 말이 나왔다. 모두들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들의 깨끗한 옷이 더럽힌다 하지 않고 땅에 꿇어 앉았다.

"가셨구나!"

"대감 가셨구나!"

궁 안에서 시작된 통곡성은 밖에서도 화창되었다.

이 날이 조선 근대의 괴걸이요, 유사 이래 어떤 제왕이든 감히 잡아 보지 못하였던 '절대'적 권리를 손에 잡고 이 팔도 삼백여 주를 호령하며, 밖으로는 불란서, 미국, 청국 들을 내려 누르고, 안으로는 자기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친 흥선 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이 별세한 날이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 있어서 조선을 사랑할 줄 알고, 왕가와 서민, 정치가와 백성, 웃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참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인 우리의 위인 이하응이 그 일생을 마친 날이다.

"우―위!"

내일 모레면 섣달 그믐이라는 대목이었다.

어떤 길 모퉁이에서 한 취객이 큰길로 나왔다.

"우―위!"

꽤 깊은 밤이었다. 큰길이라야 당시의 장안의 길은 그다지 크지를 못하였다. 게다가 허투루 내버린 물이 모두 얼어서 미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취하는군!"

꽤 취한 모양이었다. 걸음걸이가 그야말로 이보 전진 일보 후퇴였다. 한 걸음 나가서는 팔짱을 찌르고 몸의 중심을 잡으며 한참씩 서서 있고 하였다.

근본은 양반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행색이 초라하기가 짝이 없었다. 해어진 도포, 떨어진 갓, 어느 모로 뜯어 보든지 한 표랑객에 지나지 못하였다.

개가 한 마리 따라오면서 짖었다. 마치 물고 늘어지려는 듯이 그에게 달려들면서 짖었다.

그는 비틀거리던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초라한 옷, 작다란 몸, 어디로 보아도 시원치 못한 이 취객은 자기에게 드리다가 달려드는 개를 굽어 보았다. 객을 짖던 개는 그 취객이 돌아서므로,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고 뒷다리를 버티고 이제라도 취객의 목을 향하여 올라뛸 듯한 자세로서 잠시 마주 보았다. 취객은 개를 돌아보았다. 돌아볼 동안 아직껏 비틀거리던 그의 몸이 멎었다. 그는 자기에게 달려드는 개를 호령을 할지 어를지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이 주저하는 양을 개는 알아보았다. 잠시 뒷다리를 버티고 겨누고 서 있던 개는, 한 소리 지르며 취객의 몸을 향하여 올라뛰었다. 순간이었다. 취객은 몸을 비꼈다. 자기가 몸을 비끼기 때문에 올라뛰다가 도로 떨어지는 개에게 향하여 그의 호령이 내렸다.

"요 망할 강아지!"

놀랍게 우렁찬 음성이었다. 그 초라하고 왜소한 취객이 어디서 그런 우렁찬 소리가 나는가 의심할 만큼 놀라운 소리였다. 대지가 울리었다. 하늘까지 울리는 듯하였다. 그 우렁찬 소리에 놀란 것은 그를 물려고 달려들었던 개였다. 개는 이 우렁찬 소리에 위압되어 힐끗 그를 향하여 돌아는 섰지만, 잠시 멍하니 그 취객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개는 취객을 쳐다보았다. 취객은 개를 굽어보았다. 잠시 개를 굽어보고 있던 취객은 오른편 발을 들었다가 땅을 쿵 하니 내려 찧었다.

"지리 가!"

한 마디의 호령이나마 이 취객에게 위압된 개는 즉시 복종하였다. 개는 잠시 더 취객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꼬리를 내려 끼고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여음과 같이 두어 마디 더 킹킹 짖어 보면서 골목으로 돌아갔다.

"망할 놈의 강아지, 남의 술을 다 깨우는군!"

취객은 그 개 때문에 취기가 깨는 것을 애석히 여기는 듯이, 기다랗게 숨을 한 번 쉰 뒤에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곳서 발을 떼었다.

"우―위! 백설이 만건곤하니……"

아까 어느 기생집에서 기생이 부르던 노래를 코로 흥얼거리면서 얼음진 대지를 비틀비틀, 어둠 가운데로 사라졌다.

―낙척 시대의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이었다.

후일에 조선 팔도 삼백 주를 호령하던 대원군―당시의 한 가난한 종친에 지니지 못하는 흥선군 이 하응은 취한 걸음을 비틀비틀 옮겼다. 향하는 곳은 경운동 자기의 집이었다.

왕족의 한 사람으로 흥선도 자라서는 봉군(封君)이 되어 '군'이라는 명칭은 붙어서 흥선군이라는 명색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세력 없고 그 위에 당시의 권문(權門)인 김씨 일족이며 그 밖 권도가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리의 무뢰한들과 짝하여 술이나 먹고 투전이나 하러 다니는 그는, 어디로 보든지 한 개의 표랑객이지, 왕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때때로 뜻 없이 호령을 할 때나, 혹은 무슨 마음에 맞지 않는 일 때문에 획 돌아서고 말 때에 그의 무서운 위압력이, 걸핏 보아서 범인(凡人)이 아닌 그림자가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이는 뿐이었다. 가난한 종친, 권세 없는 왕족―이 주정뱅이 공자는 어두운 밤바람 찬 거리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레가 그믐이라, 떡쌀이나 있나?"

물론 없을 것이었다. 떡쌀은커녕 내일 아침 조반쌀이 있을지 없을지도 의문이었다. 아침에 부인에게 꼭 좀 마련하여 오란 당부를 단단히 받고 나온 흥선군은, 나오다가 어떤 술 친구를 만나서 술 친구가 끄는 바람에, 부인의 당부도 잊어버리고 어떤 기생집에서 진일을 술로써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의 당부는 잊었던 것이었다. 술 때문에 얼마만큼 마음이 호젓하게 된 그였지만 발이 집에 가까워짐을 따라서 흥그럽던 마음이 차차 무거워졌다. 그리고 마음의 무거움음 발로 전염되어 발의 걸음도 차차 무거워졌다.

"우―위! 취하는군!"

타성으로 다시 한 번 트림을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아까 개의 사건과 차차 가슴을 무겁게 하는 근심에 취기도 꽤 깨었다.

금옥낭청에 운학선은 바라지 않는 바다. 그러나 종친 공자로서 쌀 걱정, 설 지낼 걱정까지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게 어찌된 세상이냐? 태조의 거룩한 피를 물려받은 자기로서, 어디 개뼈다귀인지 알 수도 없는 외척들에게 눌리어서 감히 머리도 들지를 못하니 이것이 무슨 세상이냐?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도 이제는 바르게 되었다. 추위도 막기 겸, 비틀거리는 걸음에 중심도 잡기 겸, 깊이 팔짱을 찌르고 머리를 가슴에 묻고 길을 걷던 그는 활개를 펴고 머리까지 높이 들었다.

"화무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

시조라 할까 노염의 부르짖음이라 할까, 이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이 소리는 해석할 자 없었다.

명문 민씨의 가문에 태어난 부인은 짜증을 부린다든가 바가지를 긁는다든가 그런 여도(女道)를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을 지낼 쌀이 떨어진 집안의 주부로서 화평한 얼굴은 할 수가 없었다.

술이 취하여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흥선을 부인은 미소로서 쳐다보았다.

"어디서 잘 잡수셨구료?"

마음의 모든 불평과 불안은 '여덕(女德)'이라는 커다란 보자기로 싸고 온순과 인종이란 미덕으로써 장식한 귀여운 마음씨였다.

여기 대하여 흥선은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여 버렸다. 그 미안을 감추기 위하여,

"어, 취하는군!"

하면서 추운 듯이 몸을 한 번 떨었다.

부인이 물었다.

"나가셨던 일은 마음대로 되셨습니까?"

결기 있던 흥선이었다. 부인에게 이런 채근을 받을 때에 이전과 같으면,

"되고 안 되는 것을 여편네가 참견할 것이 아니오."

하고 튀겨 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기 전부터 벌써 꽤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흥선은 힐끗 곁눈으로 부인을 한 번 본 뒤에,

"내일 되겠소. 날도 춥기도 하고."

하면서 한 번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일이라 말은 하였다. 그러나 흥선에게는 내일이 아니라 열흘을 연기할지라도 과세 준비를 할 플랜이 서지를 않았다.

김모 민모 홍모 조모 이모, 지금의 세가요 지금의 금만가인 수없는 사람의 이름과 형지가 어른어른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갔지만, 그 아무한테도 가서 지금 자기의 궁경을 호소할 곳이 있음직도 안했으며, 호소할 지라도 그 호소에 얼마만큼이라도 동정하여 줄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부인에게 향하여 내일이면 되리라고 너털웃음으로 넘겨 버리기는 하였지만, 그 내일 일이 딱하기 가이 없었다. 모일이 딱하고 기막힌 흥선은 다시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어서 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이튿날, 이 파립폐의의 공자의 모양은 다시 거리에 나타났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을 받는 이 공자는, 그래도 행여 구박하지 않는 고마운 세가가 하나 있지 않나 하여, 대목의 바람 찬 거리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각 척신과 세가며, 노론, 소론, 남인, 북인(戚臣, 勢家, 老論, 少論, 南人, 北人)의 틈에 끼어서 돈 없고 세력 없는 이 공자는 기침 한 번을 크게 할 수가 없고, 아무리 굶어 죽는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 쌀 한 되를 청하여 볼 집이 없었다. 그러나 섣달 대목을 당하여 몰려올 빚쟁이도 피할 겸 부인에게 맹세도 한 체면상,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과세의 준비를 좀 해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날이다.

―사람의 종자는 거리에 우글우글하되 나 갈 곳은 없구나!

거리를 둘러 보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쁜 듯이 왕래를 하며, 벽제 소리 요란하게 저편 앞에는 어떤 세가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이 공자의 입가에는 쓴웃음의 자취가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를 거리를 헤매고 있던 이 공자의 작다란 몸집은, 그 날 낮 좀 지나서 권문 팽경장(彭景長)의 집 사랑에 나타났다.

"대감, 그간 무양하시오?"

인사를 하는 체면상 흥선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안 하지 않을 수 없는 창피하고도 괴로운 말 때문에 그의 미소의 뒤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두세 문객을 앞에 앉히고 아랫목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있던 경장은, 힐끗 눈을 굴려서 흥선을 바라보았다. 검은자위보다도 흰자위가 많은 눈찌였다. 무엇하러 왔느냐는 표정이었다. 그 경장의 흰 눈자위에 향하여 다시 한 번 미소하여 보이지 않을 수가 없는 흥선이었다. 흥선은 또 한 번 미소하였다.

"에이, 날도 지독히 춥게 되었읍니다."

하면서 손을 비비며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지벌로 보아서 거기 있는 문객들은 당연히 흥선보다 아랫사람이매, 들어오는 흥선에게 대하여 당연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세가 팽 판서의 문객인 그들의 눈에는 , 가난하고 세력 없는 이 공자는 사람으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한 번씩 힐끗 돌아본 뒤에는 모두 흥선에게는 등을 지고 말았다.

팽도 무론 흥선을 대척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인사에 대하여 한 번의 대답도 안 하였다. 그리고 차디찬 일벌을 다시 한 번 흥선의 위에 던진 뒤에 둘러앉은 문객들과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책망을 하지 않았겠소? 아 참, 어이가 없어서……"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좌우간 팽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사뭇 우스운 듯이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둘러앉았던 무리들도 이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들 있었다. 웃목에 종그리고 앉은 이상 이제 일어서서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미 앉은 이상 이제 일어서서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앉았자니 누구 하나 자기를 대척하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경솔히 앉았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아니, 이 집에 들어온 것―그보다 더 앞서서 누구의 힘을 입으려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이러한 냉대를 받을 것은 당연히 예측이 될 것이어늘 구구히 남의 집을 찾을 생각을 내었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다시 일어설 수도 없고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된 흥선은, 자기의 거취를 찾지를 못하고 다시 아랫목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팽과 그의 문객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아까의 이야기를 그냥 계속하였다. 때때로 팽이 웃었다. 그러면 문객들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 하였다. 그다지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팽이 웃기만 하면 문객들은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우스운 이야기인 듯이 방바닥을 두드리며 웃고 하였다.

웃목에 웅크리고 앉은 가난하고 세력 없는 공자 흥선의 가슴은 타는 듯하였다. 오래 겪어 온 모멸(侮蔑)이며, 경험하고 또 경험한 수치도, 너무 받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모멸에 대하여는 거의 신경이 마비된 흥선이로되, 오늘은 유난히도 가슴 쏘았다. 일어서려 일어서려 몇 번을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거저 일어서기도 너무 싱거웠다. 여기서 일어서려면 땅을 한 번 차고 발을 한 번 구른 뒤에 왜가닥하니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었다. 그러나 몸은 아무리 왕가의 피를 받은 흥선이로되, 권도로서 도저히 팽의 뒤천보를 따를 수 없는 그는 그것은 할 수가 없었다. 도로 나가려도 나갈 만한 빌미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아랫목에서는 한 토막의 이야기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팽이 앞에 놓였던 기다란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러매 그의 앞에 있던 한 문객은 황급히 담배를 담아 바쳤다. 유황 성냥을 황급히 화로에 긋는 사람도 있었다. 한 대의 담배에 대하여 경쟁하듯이 제각기 팽의 심부름을 하였다.

팽은 담배를 붙여 물었다. 삼등초(三登草)의 푸르른 연기가 한 순간 그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 연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렬 때에 팽은 비로소 흥선에게 향하여 첫 말을 던졌다.

"아 참, 대감 언제 오셨소?"

흥선이 온 것을 이제사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마음이 이리 끓고 저리 끓던 흥선이었다. 그러나 오랜동안의 그의 습관으로 그의 얼굴에는 이 때에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왔읍니다. 날도 몹시 차게 되었읍니다."

팽의 얼굴에 어리어 돌던 연기가 사라졌다. 두 번째의 연기가 다시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 가운데서 팽의 두 번째의 말을 던졌다.

"이즈음 어떠시오? 방에 불이나 때구 살으시오? 아이구 얼어서 면상이 모두 허옇게 부었군."

지근한 모멸(侮蔑)의 말이었다. 흥선의 얼굴에는 칵피가 피어 올랐다. 숨까지 딱 막히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노염을 눌렀다. 그리고 그 팽의 말에 달려 늘어졌다.

"대감,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오. 이즈음 곤란하여 참 죽을 지경이외다."

"참 그럴 걸! 내 좀 돌려 드릴까?"

"네, 그러면 고맙겠읍니다."

"얼마나? 한 두어 번이면 될까?"

팽은 좌우를 둘러 보았다. 좌중 문객들에게서 돈을 수렴하려는 눈치였다. 문객들은 눈치가 빨랐다. 팽이 둘러 보는 기수에 제각기 얼른 꺼내려는 주머니를 뒤졌다. 한 문객이 팽의 앞에 돈 두 돈을 웃음과 함께 공손히 바쳤다. 팽은 그 돈을 받았다. 한 닢 두 닢 세어 보았다. 그런 뒤에 웃목에 있는 흥선에게 향하여 스무 닢의 엽전을 뿌려 던졌다.

"과세나 잘 허우."

아랫목에서는 집이 무너져 나갈 듯이 웃는 소리―

흥선은 눈과 코와 귀가 모두 아득하여졌다. 아랫목에서 여러 사람이 크게 웃는 소리가 마치 십 리 밖에서 나는 소리같이 작다랗게 들렸다. 흥선은 일어섰다뿐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여 문을 열자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의 등을 향하여 웃음 소리가 또 한번 굉장히 울렸다.

"퉤!"

입을 벌리기조차 추운 겨울날이었다. 바람이 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극도의 분노와 불쾌 때문에 입의 침이 죽과 같이 걸게 된 흥선은, 연하여 얼어붙은 땅에 침을 뱉으며, 어디인지 자기로도 목적이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쌀? 과세? 그런 문제는 이제는 생각도 않았다. 어디 개뼈다귀인지 알지도 못하는 팽 경장에게 수모를 받고, 거기 모여 있는 하향 천인들에게 웃기운 것이 분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놈들을!"

아아, 마음대로 하자면 뼈를 갈아 먹어도 시원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뻔히 자기로서는 어찌하지 못할 일임을……

이런 때에 임하여 이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다 겪고 또 겪은 흥선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상감께는 가까운 혈기가 안 계시다. 상감 승하하신 뒤에는 이 팔도 삼백 주의 어른이 될 분은 당연히 종친 중에서 골라 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아, 장래에 만약 그런 날이 생긴다면―자기에게는 아들이 있다. 종친 중의 한 사람인 자기에게는 장래 이 나라의 통치자로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을 훌륭한 아들이 있다. 그 때―만약―만약……

팽? 김? 민? 이? 이 세상에 두려울 자 누구랴. 지금 자기를 이렇듯 수모한 팽도 그 날에는 땅에 코를 끌면서 자기에게 절하리라.

추위도 감각하지 못하였다. 자기가 걷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분노와 망상 때문에 흥선은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땅만 내려다보며 연하여 퉤 퉤 침을 뱉으며 걸었다. 이 망상에 빠져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 흥선의 귀에 그의 분노를 더욱 돋구려는 듯이 저편 길 모퉁이에서 벽제 소리가 요란히 나기 시작하였다.

"물렀거라 비껴라! 에―이놈들, 모두 앉거라!"

그 요란스럽고 호기 있는 벽제 소리로 미루어, 어떤 권문의 행차인 것이 짐작되었다. 아직껏 깊이 머리를 가슴에 묻고 걷던 흥선은 그 머리를 번쩍 들었다. 분노에 불붙는 눈자위였다. 작은 몸집이나마, 초라한 행색이나마, 그 흥분된 눈을 치뜰 때에는, 그 눈에는 장래 이 삼백여 주를 호령한 운현 대감 이하응의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 벽제 소리 요란히 지나가는 놈은 또 어떤 놈이냐? 마주 서서 욕하고 꾸짖을 신분은 못 되나마, 하다 못해 백제 소리를 향하여서라도 노염의 눈을 던져 보자는 것이었다.

행차는 가까워 왔다. 대제학(大提學) 김병학(金炳學)의 행차였다.

"자, 추운데 이 아래로 쑥 내려오시지요."

대제학 김 병학의 사랑, 권하는 사람은 주인 병학이요, 권을 받는 사람은 파립폐의의 흥선이었다. 팽에게 받은 수모 때문에 머리가 거의 혼란하게 되었던 흥선은, 또한 이 뜻하지 않은 병학의 호의에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이 방에 불 더 때라. 자, 대감 담배나 붙이시오. 여보게, 대감께 얼른 담배 붙여 올리게."

사면을 지휘하여 흥선을 환대하려는 눈치가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방에 불까지 더 때라고 야단이었다. 흥선은 눈을 들어서 병학을 바라보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수모와 멸시만 받는 이 공자는, 병학의 환대와 호의가 고맙기보다 오히려 무시무시하였다. 눈을 부릅뜨면 해라도 그 빛을 흐리게 할 만한 병학으로서, 아무 돌아볼 곳이 없는 자기에게 이런 호의를 쓴다는 것이 흥선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기적이었다. 흥선은 잠시 병학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의 명령에 의지하여 공손이 바치는 담배를 흥선은 받아서 피웠다. 가난에 가난을 거듭한 몇 해, 수수밭 귀퉁이에 심었던 상담배에나 익은 흥선의 입에는 좀 과히 독한 성천초(成川草)였다. 재채기가 나려 하였다.

"대감, 이 즈음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내 살림이 곤궁할 것은 너희들이 번히 아는 바가 아니냐? 내 쓴 갓을 보아라. 내 입은 옷을 보아라. 휘늘어진 비단 옷에 싸인 병학을 흥선은 대답 없이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대답 없는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였다.

―걱정 마오. 당신네의 덕분에 잘 사오. 딸 잘 둔 당신네 집안보다는 조상 잘 둔 우리 집안은 좀 못 하기는 하지만 굶지는 않소.

흥선은 입이 비로소 열렸다.

"조상이 막혀(莫如)딸이라―대감은 이런 상문자 아시오?"

비틀어진 미소 아래서 새어 나온 물음이었다. 병학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시정의 무뢰한 가운데 섞여서 시민들의 상말과 속담과 재담과 해학에 능한 이 타락한 공자의 기상천외의 질문은, 명문 김 병학에게는 알지 못할 말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하고 흥선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씩 웃고 말았다. 흥선의 입가에 떠돌던 비틀어진 미소는 드디어 홍소로 변하였다.

"하하하하! 조상이 막여 딸이라― 하하하하, 하하하하!"

폭발된 노염 띤 홍소였다. 처치할 곳 없는 분노를 홍소로서 처치하려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대감 모르시는구료. 우리 같은 상놈이나 알지 대감이 어떻게 그런 문자를 아시겠소?"

체기가 내려가는 것같이 흥선의 가슴은 얼마만큼 시원하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 있는 객과, 눈을 둥그렇게 하고 있는 주인―이 방에는 잠시 이상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에 가득 부어……"

"자 대감, 잔을 드세요."

기생이 부르는 권주를 따라서 병학은 흥선에게 술을 권한다. 흥선은 잔을 들었다. 연거푸 마셨다. 또 먹고 연거푸 먹었으나 취기는 도무지 돌지 않았다. 아니, 취기가 돌지 않았다면 어폐가 있다. 취기는 돌았으나―취기가 곧기 때문에 정신은 더욱 똑똑하여갔다.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여간 어지럽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세 가지의 생각이 엉기어서 돌아갔다. 팽의 집에서 받은 수모―그 기억이 더 확대되어 그를 괴롭게 하였다. 잔을 들다가도 그 잔을 도로 놓고 킁킁 코를 울리곤 하였다.

병학의 이 환대가 또한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아무 환대 받을 까닭이 없다. 자기는 아무리 종친이라고 하나 세력 없고 돈 없고―시정에 배회하는 한낱 부랑자요, 저편 쪽은 나는 새라도 떨굴 만한 세력가이어늘, 무슨 까닭으로 오늘 이렇게 자기를 환대하나? 아까도 어떤 그렇지 못할 손님이 온 것도 '일이 있어 못 만나겠다'고 그냥 돌려 보내고 자기를 환대를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문제도 그의 머리를 꽤 어지럽게 하였다.

세째는 자기의 가사 문제였다. 아까는 팽에게 대한 분노 때문에 거기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으나, 술 때문에 머리가 사면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그에게는, 지금 그 가사 문제가 머리에 걸리어 돌아갔다.

집을 나올 때에 부인은 중문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를 바래 주었다. 점잖은 집 부인이라, 그 뜻을 입 밖에까지 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꼭 좀 마련하여 오라는 당부에 틀림이 없는 것은 흥선도 잘 알았다. 그러나 어디서? 이제는 어디 가서 말해 볼 용기도 없었다. 바로 굶어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다시는 거기 대하여 입을 뗄 수 없었다. 이렇게 입을 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또한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지 않으면 또 안 될 일이었다.

병학에게 말하여 볼까, 이렇듯 자기를 환대하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호의를 가지고 있다치면 팽과 같이 자기를 망신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술 기운도 합하여 좀 용기를 얻은 흥선은, 몇 번을 이렇게 마음먹고 입을 열려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급기 입을 열려면 차마 벌려지지를 않고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기가 짝이 없는 흥선은 그 분풀이라는 듯이 연하여 술만 공격하였다. 병학은 끊임없이 권하였지만 병학이 권하기 전에 흥선은 잔을 들고 하였다.

"대감, 어떠세요?"

병학이 이렇게 물을 때에 흥선은 방금 받은 잔을 땅하니 상에 놓으며, 취기를 한꺼번에 토하고 머리를 번쩍 들었다.

"나 늘 먹는 막걸리보다는 맛이 좀 낫소."

하구 무엇을 살피는 듯이 사면을 한 번 둘러 본 뒤에 주인을 찾았다.

"대감!"

"네?"

"한참 앉아서 보아야 지금이 대목인데 이 댁에는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대체 대감은 빚을 안 지셨소? 혹은 지고도 받으러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소?"

병학은 눈을 크게 하였다. 그 뒤에 눈을 삼박거렸다. 이 질문을 그냥 웃어 버릴지 혹은 변명이나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 것이었다. 뒤따라 흥선의 말이 그냥 계속되었다.

"만약 받으러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으면 내게 좀 전수를 하시오. 오늘 당장부터라도 써 먹어야겠소."

눈만 삼박거리리던 영초(潁樵) 김 병학은 싱겁게 씩 웃었다. 그리고 기생에게 흥선이 놓은 술잔을 눈짓하였다.

"자, 약주나 드세요."

"아니, 술이 아니라 하 이상해서 그러오. 대목이면 빚쟁이들이 대문이 메어서 들어오는 법인데, 이 댁에는 아무리 보아야 그런 기색도 없으니 말이외다. 보아하니 대감네 가사 비용은 우리 따위보다는 퍽 많이 들 게외다. 술도……"

흥선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코로 술의 냄새를 맡아 보고 혀 끝으로 맛을 보았다.

"우리 먹는 먹걸리보다는 훨씬 비쌀 게야. 안주도―이건 뭐요? 해파리? 이건 또 비철의 오이? 톡톡히 걸렸을걸! 이런 건 나 같은, 조상이나 잘 둔 사람을 위해서 따로이 마련한 것은 아니겠지요? 대감 댁에서 보통 쓰시는 것이겠지요? 그 많은 가사 비용을 빚 안 지고야 어떻게 당하겠소? 빚은 나보다 몇 천 곱 몇 만 곱 되리다. 한데 빚쟁이가 안 오니 웬 일이오?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소?"

주정군의 헛소리로 넘기기에는 너무도 쏘는 말이었다. 진정한 질문으로 듣기에는 너무도 기경한 말이었다. 영초는 이 잘못하다가는 재미 없는 시비가 일어날 듯한 장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하여 연하여 미소를 그의 얼굴에 나타내었다.

"대감, 그런 농담은 차차 하시고 잔이나 드세요. 오래간만에 대감과 대작을 하게 되니 퍽 반갑소이다. 자, 어서 잔을 드세요."

영초의 눈짓에 기생은 흥선을 위하여 다시 권주가를 뽑아 내었다.

그러나 흥선은 완강히 잔을 들지 않았다. 공복에 독한 술을 먹었기 때문에 검붉게 된 얼굴에다가 기괴한 미소를 띠고, 정면으로 영초의 낯을 바라보면서 완강히 '묘책 전수'를 요구하였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호구지책으로 변변치 않은 난초 장도 그려서 팔고, 투전판에도 뽑이나 하거니와, 대감은 그런 재간도 있다는 소문도 없으니 돈 생길 데가 없어. 그러면서 이 많은 비용을 어디서 구해 내시오?"

"하하하하, 대감도 농담도 너무 심하시구료."

"농담? 내가 농담이오?"

흥선은 정색을 하였다. 그리고 획 기생을 돌아보았다.

"야, 너의 집에는 빚쟁이가 안 오느냐?"

기생도 미소하였다.

"왜 안 올 리가 있읍니까?"

"와? 오며는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느냐?"

"그러기에 이런 대감 댁에 와서 숨어 버리지 않습니까?"

"여기 숨는다? 그걸 보오. 이 댁에는 빚쟁이가 못 오게 하는 무슨 묘책이 있기에 여기 피신까지 하는 게 아니오? 자, 대감 응? 그―그―어 취한다."

휙 지독한 취기가 한 번 그의 머리를 덮고 지나갔다. 그 취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몸을 그냥 팔꿈치로 상에 기대고 흥선은 푹 머리를 수그렸다. 과세 비용의 걱정이 술 때문에 무섭게 확대되어 갑자기 그의 가슴을 눌렀다.

"에, 가 봐야겠군?"

잠시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흥선은 갑자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러나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온 몸이 마비된 흥선은, 자기의 몸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반만큼 일어나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허허, 몹시 취했군!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담? 대감! 영초! 영초! 나 여기서 한잠 자겠소."

흥선은 몸을 번 듯이 거기 뉘었다.

"한송정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무어―어, 취한다! 우리 늙은 마누라 쌀이나 좀 바꾸어 왔나……"

흥선은 거기서 혼혼히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거기서 혼혼히 잠은 들었으나 흥선의 잠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커다란 수심 때문에,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못하여 번쩍 눈을 떴다.

"으…ㅁ!"

소리 기지개와 함께 흥선은 사면을 살펴 보았다. 처음 한 순간은 부드러운 처네와 뜨뜻한 넓은 방이 낯설었지만, 그것이 영초의 집 사랑 정침(正寢)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흥선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매 아까의 기생이 시중을 들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흥선에게 수정과 한 대접을 바쳤다.

"응, 한잠 잘 잤군! 어서 집으로 가야겠군."

흥선은 양치를 한 뒤에 자기의 의관이 어디 있는지를 살필 때에, 침방 문이 열리며 거기서 주인 영초가 나타났다.

"벌써 다 주무셨소?"

"아이구, 잘 얻어먹고 낮잠까지 자고……인젠 가야겠소."

"왜 좀더 천천히 가시지요. 해정이나……"

말을 계속하는 것을 흥선은 가로막았다.

"해정이 뭐요? 어서 가야지. 집에서는 눈이 빠지게 기다릴 터인데―"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영초는 거기에는 대답지 않고 가까이 내려왔다. 그리고 흥선이 자리를 비키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고 자기는 발치에 물러앉았다.

"가신다 해도 그 옷이 모두 구겨져서 어떻게 그냥 가십니까? 저 방에……"

영초는 손을 들어서 제 침방 쪽을 가리켰다.

"잠깐 가 보세요. 변변치는 못하나마 갈아 입으실 옷을 준비했읍니다."

흥선은 눈을 들어서 영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주 자기를 돌아다보는 눈―그것은 결코 당대의 권문 대제학 김 병학의 눈이 아니요, 한 개 사람―서로 접근할 수가 있는 '사람' 김 병학의 눈이었다. 흥선은 잠시 영초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 없이 일어섰다. 영초의 눈에 조금이라도 불쾌한 자위가 있으면 여니와 흥선은(까닭을 모르지만) 호의로 찬 영초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침방에 들어가 보매 시동(侍童)이 의복 일습을 보료 아래 녹이고 있었다. 갓에서 버선 대님, 허리띠며 주머니에 이르기까지, 의복 일습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흥선은 거기서 시동의 손을 빌어서 옷을 갈아 입었다. 벗어 놓고 보니 자기의 낡은 옷은 구기기는커녕 때도 꽤 많이 끼어 있었다. 그것을 벗어 던지고 흐늘어지는 비단 옷을 입고 나니, 가난에 젖은 이 공자의 몸은 마치 하늘로 날아 올라라도 갈 듯하였다.

"우화 등선―그러나 몸이 헤픈 것이 옷을 입은 것 같지를 않소."

이것이 이 좋은 새 옷을 준 데 대한 흥선의 인사였다. 영초는 미소하면서 대답했다.

"변변치 않은 옷이외다."

"과연 변변치 않소이다. 대감께는 많이 있는 옷이니 변변치 않을 것이고, 내게는 입어도 입은 것 지 않으니 변변치 않고―나 같은 사람에게는 주어야 그럴 듯한 인사도 못 받는 법이외다. 하하하!"

이 자기에게 극진한 호의를 보여 주는 영초에게 대하여 얼마의 조력을 청하고 싶은 생각은 뒤를 이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의 위에 더 무엇을 청구할 만한 용기까지는 생겨 나지를 않았다. 영초는 자기의 초헌(軺軒)까지 등대하여 두었다가 돌아가는 흥선으로 하여금 타게 하였다. 비단 옷에 잠긴 몸을 초헌에 싣고 구종 별배를 앞뒤에 단 이 공자―세상일 것 같으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일일지나, 흥선은 마치 위압된 듯이 몸을 초헌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초헌에 몸을 싣고 구종 별배를 뒤에 단 이 호화로운 공자가 마음 가운데는 당장의 끼니와 쌀 걱정까지 하는 사람이라고는 알 사람이 없었다. 호화로운 초헌에 대하여 길 가는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였다.

이리하여 흥선은 표면으로는 위세 좋게 자기의 댁으로 돌아왔다. 집에까지 돌아온 흥선은 대문 밖에서 영초의 하인들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마치 피하듯이 몰래 사랑으로 들어갔다. 비록 가난은 하나마 자존심이 지극히 높은 그, 아침에 부인에게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변명을 하기가 귀찮았다. 팽 경장에게 눈물나는 수모를 받았다는 말은 체면상 못 할 일이었다. 김 병학에게 술을 얻어 먹고 옷을 얻어 입고 왔노라는 말도 역시 못 할 말이었다. 이 모는 못 할 말들을 피하기 위하여 흥선은 몰래 사랑으로 기어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에는 뜻밖의 광경이 그의 눈을 둥그렇게 되게 하였다. 당연하게 추울 사랑이었다. 해어진 보료며 해어진 장침(長枕)이며 해어진 안석이 놓여 있을 사랑이었다. 아침에 자기가 나갈 때도 그러하였다. 다시 돌아온 지금에도 당연히 그러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방 안에서 첫 번 주인을 맞은 것은 뜨뜻한 공기였다. 서늘하고 음침하여야 할 방에 뜨뜻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고, 아랫목에는 비단으로 꾸민 새로운 보료며 안석이며 장침 사방침들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멍이 여기 저기 뚫려 있을 문창도 어느 틈에 모두 깨끗이 발리었다. 이 (영초에게 얻어 입은 것이나마) 비단 옷에 감긴 공자에게 그다지 손색이 없는 방으로 어느덧 변하여 있었다.

"?"

아직 술이 채 깨지 않은 흥선은 눈을 이리 그리고 저리 찡그리며 살펴보았다. 틀림없는 자기의 집이었다. 내다보면 쓰러져 가는 아래채며 거미줄 천지의 추녀며―자기의 집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쓰러져 가는 집의 방 안뿐은 아침과는 형태를 완전히 달리한 것이었다.

흥선은 이것을 부인이 한 일로 알았다. 자기를 내보내기는 하였지만, 아무리 하여도 변통해 올 듯싶지 않아서, 부인이 직접 다른 방면으로 활동을 하여 과세의 준비를 넉넉히 한 것이어니, 이렇게 생각하였다. 궁핍하여 부인에게까지 이런 수고를 끼치는 것이 더욱 마음에 불안하였다.

오늘 두 개의 인정을 보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만 듣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수모만 받아서, 울분과 반발성만 마음 속에 잔뜩 길렀던 흥선은 오늘 본 두 개의 인정 때문에 눈물겨워졌다. 잠시 두 자리에 서 있다가 흥선은 갓과 웃옷을 벗어 걸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모든 자기의 자존심을 벗어 버리고, 부인에게 미안하노라는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겸하여 김 병학의 호의를 말하고 팽 경장의 횡포를 말하여 같이 분해하고 같이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안뜰에 들어서 보니 아침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던 안뜰에 활기를 띠었다. 부엌이며 뜰이며 쪽마루며 할 것이 없이, 하인들은 과세의 음식을 차리느라고 욱적하고 있었다. 세찬 한 군데 들어올 곳이 없는 이 가난한 공자의 집에도 하인들이 뜰에 우글거리고 다니니, 겨우 대목 같기도 하였고 사람 사는 집 같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서 흥선은 자기의 몸에 감기운 비단 옷을 서투른 듯이 굽어보며 댓돌 위에 올라섰다.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이런 싱거운 때의 기분을 감추기 위하여 노래를 코로 부르면서 안방으로 들어오는 흥선을 부인은 일어서면서 맞았다. 이 부인을 따라서 일어서서 아버지의 귀택을 맞는 소년―애명(兒名)을 개똥이라 하는 이재황(李載晃)이었다.

"사동 김 판서가 세찬을 보내 주셔서……."

부인이 흥선에게 이 말을 할 때는 부인의 눈에는 눈물까지 있었다. 모든 것이 영초의 보낸 물건이었다. 명색은 세찬이라 하되, 그것은 세찬이 아니요 당분간의 흥선 댁의 생활비와 생활 필요품 전부였다. 금전, 미곡, 그 밖에 생활품이 몇 짐, 영초에게서 세찬이란 명목으로 흥선에게 온 것이었다. 흥선은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아까 팽 경장에게 욕을 보고 추운 겨울의 거리를 지향 없이 돌아다닐 때에, 길에서 영초의 행차를 만나서 억지로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던 영초―그 뒤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환대하던 영초―자기가 돌아올 때에 격식에 벗어나서 중문까지 자기를 보내 주던 영초―세력 없고 돈 없는 자기인지라, 거리의 마바릿군 하나도 자기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사람이 없는 이 기박한 세상에서, 당대의 권문인 영초 김병학이 이렇게 호의를 보여 준 것에 대하여 흥선은 감사하기가 짝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현 상감의 직접 인척되는 김씨의 일족은 물론이요, 심모 남모 이모 홍모를 막론하고 동석(同席)하기조차 창피하다고 피하는 자기에게, 영초는 무슨 호의로서 이런 것을 보내었는가? 받을 가망이 없는 빚은 절대로 주지 않는 이 기박한 세상에서 영초는 무슨 까닭으로 자기에게 이렇듯 호의를 쓰나?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눈을 뜨면서 흥선은 이렇게 말하였다.

"응, 영초를 정승(政丞)을 시켜 주지."

부인이 미소하면서 흥선을 쳐다보았다.

"정승은커녕 대감께 녹사(錄事) 하나를 시킬 권한이 있읍니까?"

"시켜 주지, 시켜 주어. 하다 못해 꿈에라도 시켜 주지."

"그렇지요. 꿈에나 시켜 주지 생시에야 어떻게 시키겠읍니까?"

흥선은 잠시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때때로 생각하는 망상이 또 다시 그를 엄습하였다. 그 망상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는 오늘과 같은 폐의파립의 가련한 공자가 아니요, 이 삼백여 주의 큰 나라를 호령할 대원군인 자기였다. 지금 영초가 보내 준 새 옷을 갈아 입고 아랫목에 기쁜 듯이 앉아 있는 재황은, 그 때는 아들이라는 명칭으로는 부르지도 못할 이 나라의 지존이었다. 그 때는, 그때야말로―

"부인!"

흥선은 눈을 감은 채로 부인을 찾았다.

"대왕대비마마(먼젓 번 임금 헌종의 어머니) 조씨(趙氏)께 진상할 무슨 세찬이라도……"

"아, 참 깜빡 잊었읍니다. 무슨―어떤 것을 하리까?"

"무엇이고 대비마마께서도 우리가 곤핍한 줄은 다 잘 아시니까 ××을 팔아서라도 대비께 세찬뿐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왕대비(이 종실의 가장 웃어른)―비록 지금 낙척하여 조석의 끼니까지 부자유를 느끼는 형편이지만, 종의 한 사림이요 영특한 아들을 가지고 있는 흥선은, 거기 대하여 어떤 야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사가 없으시고 몸이 약하신 현 상감―상감 불행히 승하하신 뒤에는 신왕을 지정할 권리는 종실의 어른되는 대왕대비가 가지게 될 것이다. 야심과 패기를 마음 속에 가득히 가지고 있는 흥선은, 아무 보잘것이 없는 지금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갈 계획뿐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런 필요상 대왕대비뿐은 자기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늘 환심을 사 두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흥선은 고요히 눈을 다시 떴다.

"영초는 영의정(領議政)의 재목은 못 돼. 우의정이나 주지."

그리고 이 말에 미소로써 자기를 바라보는 부인을 흥선도 또한 미소로써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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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