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제15장

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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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색 무문 갑사 창의(?衣) 정자관―

이런 편의(便衣)로서 김 병기는 자기 침방에서 안석에 기대어 앉아 있다. 그 창 밖 툇마루에 세간 청지기가 치부책을 들고 꿇어 앉아 있다. 금은으로 장식한 부산 연죽(煙竹)에서 피오 오르는 향그러운 삼등초(三登草)의 연기에 상쾌한 듯이 한 번 기다랗게 숨을 내어 쉬고 병기는 말하였다.

『××부사에게서는?』

청지기는 치부책을 뒤적이었다.

『정월 열 나흗날 삼천 냥, 삼월 스무 이튿날 천 냥이올씨다.』

『○○현령에게서는?』

청지기는 벌걱벌걱 책장을 뒤졌다.

『정월 여드렛날 이천 냥이올씨다.』

『△△군수에게서는?』

『이월 열 사흗날 천 냥뿐이올씨다.』

약채전(藥債錢―각 고을 수령에게서 권문에 보내는 공물)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단 천 냥이라는 데 병기는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군수에게서는?』

청지기는 책장을 이편으로 뒤적이고 저편으로 뒤적이고 한참을 뒤졌다. 한참을 뒤적일 동안 병기는 참을성 좋게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온 게 없는가 봅니다.』

병기는 숨을 내어 쉬며 눈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병기 자기의 손을 통하여 각 곳에 나간 수령들을 차례로 꼽는 것이었다.

『○○군수에게서는?』

『산삼 열 근과―그……』

청지기는 말을 주저하였다. 병기는 재쳐 물었다.

『그……?』

『그……』

『응!』

생각났다. 산삼 열 근과 몸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라는 명목으로 아리따운 처녀 한 명을 구해 보낸 것이었다.

『산삼 열 근과 돈 삼만 냥이지, ○○군수에게서는?』

『……』

『?』

『이만 냥을 추송한다 하옵니다.』

병기는 눈을 번쩍 떴다.

『외상이냐?』

『……』

『썩 물러가거라!』

청지기는 자기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코를 마루에 비볐다.

『이 놈! 외상이 무냐? 썩 직전을 가져오너라.』

청지기는 또 한 번 코를 마루에 비볐다.

어디 군수 어디 현령―병기가 주선하여 내보낸 수령들의 점검이 다 끝났다.

병기는 재떨이에 담배를 떨면서 말하였다.

『금년 정월부터 지금까지에 천 냥 미만을 가져온 사람들은 모두 따로이 적어 두어라.』

『네!』

『외상도 미봉 편이다. 응, 그리고 만 냥 이상 가져온 사람도 또 따로 적고…… 그 군수(산삼 열 근과 계집을 바친)는 만 냥 이상 편이다.』

『네!』

『또 그―××현령은 미봉이지만 특별히 눈감는다.』

특별이라는 것은 또한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병기와 그 당자―혹은 당자의 여권(女眷)의 사이에 남이 헤아리지 못할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물러가거라.』

상전에게 하고 물러가는 청지기를 힐끗 보면서, 병기는 비로소 이편으로 향하여 돌아앉았다.

『영감 미안하외다.』

『아니올씨다. 시생이 황공하옵니다.』

거기는 병기의 주선으로 어떤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게된 한 중로(中老)가, 부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기에게 하직을 하러 와 있었다. 그 사이의 보는 앞에서 병기는 약채전의 조사를 한 것이다. 장래 수령 영감은 눈이 부신 듯이 병기를 우러러보았다.

『영감!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하실 줄을 알아야 하오. 수령이 되어서 백성을 모르면 그 직책을 다할 수 없는 것이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파격(破格)의 예로서 영내(楹內)에 들어앉은 새 군수는 황공한 듯이 허리를 굽혔다.

『××는 산읍(山邑)이지만 산삼이며 돈피(?皮) 많이 나는 곳, 그 곳의 수령은 특별히 백성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하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지당한 말이나 또한 그 뜻을 알아 듣기 힘든 말이었다. 산삼이며 돈피가 생산되니 백성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수령들은 재상가에게 약채전이나 공물이나를 많이 보내는 것으로 주장을 삼지만, 백성의 어른되는 자의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외다. 혹은 공물이 부족하면 인부(印符)를 도로 거두어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공물을 위주해서는 안 되오. 제 일도 제 이도 제 삼도 백성뿐을 위주하여야 하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그 지방에 부유(富裕)하고 점잖은 사람이 있거든, 그런 인재는 그냥 흙에 묻어 둘 수가 없으니깐, 나라에 상계를 해서 무슨 벼슬을 시키도록 노력하시오. 그다지 많은 황금이 아닐지라도 인재만 있으면 벼슬은 시킬 수가 있으니깐―』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삼십 미만의 평안 감사를 지낸 일이 있는 병기는, 백성을 긁어 먹는 온갖 방법을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백성을 긁어 먹는 수령들을 또한 교묘히 코오치하고 벗길 줄을 아는 사람이었다.

『연전에 △△가 ××감사로 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소, ××은 부읍이라, 돈냥이나 가진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상계해서 벼슬을 시킬 수는 없으니깐, 얼마만치는 벼슬을 시키고 나머지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써, 그대의 행실이 갸륵하니 나라에 상계를 해서 벼슬을 시키겠노라고 즉 「말 벼」을 주었소. 그러면 그 사람들은 감사에게 대해서 그 상보를 그만두어 달라고 간청을 하지 않겠소? 그 사람들이 처지로 말하면 벼슬을 받자면 오만 냥 이상은 바쳐야 하겠고, 그 벼슬을 삭여 버리려면 감사께 이삼만 냥만 바쳐도 면할 수가 있으니까, 감사께 몇만 냥씩 바치고 벼슬을 구만둡니다 그려. 시속말로 말하자면 벼슬 환퇴금이지. 하하하하! 시골 수령살이를 다니자면 별별 일을 다 겪는 법이외다.』

이 때에 청지기가 왔다.

『대감마님, 김천(金泉) 사는 최 장의라는 선비가 왔읍니다.』

병기는 눈을 들어서 청지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뒷말을 채근하는 뜻이었다.

『도령님 연(鳶)줄 값으로 이백 냥을 갖고 왔읍니다.』

『외사로 모셔라.』

청지기가 도로 나갔다. 병기는 다시 군수에게 향하였다.

『영감, 춘추가 금년에 얼마시오?』

『쓸데없는 나이만 많이 먹었읍니다. 계유생이올씨다.』

『음! 계유라, 마흔 아홉이시군. ××군수로 있을 때 만고 절색을 하나구해 보내 주었더니. 참 ××는 색향이야.』

이런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가진 병기는 이 새 군수에게 대하여 차근차근 군수살이의 비결을 가르쳤다. 세 군수는 연하여 머리를 조으며 병기의 훈화를 들었다. 훈화를 다 듣고 일어나서 절하고 하직을 고할 때에, 병기는 청지기를 불러서 외사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천 선비 최 장의를 불러들였다. 병기는 사람 응대를 대개 침방에서 하였다.

두 손을 앞으로 읍하고 황공한 듯이 들어오면서 영외(楹外)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나이는 한 사십쯤 났을 비교적 초라한 옷을 입은 인물이었다. 청지기의 말로는 도령님께 연줄 값 이백 냥을 가져왔다 하나, 이십 냥도 손에 쥐어 보지도 못했을 인물 같았다.

『자네가 최 장의인가?』

병기는 고즈너기 물었다.

이 물음에 그 사람은 몹시 낭패한 모양이었다. 어릿어릿 미처 대답을 못하였다.

『네, 아니―저 소인……』

『김천 사는 최 장의 아닌가?』

『소인은―저, 남, 남산동 살으와요. 성명 삼자는……』

병기는 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리고 등대한 청지기에게 향하여 잠시 꾸짖는 눈을 붓고 있다가 물었다.

『이 사람이 김천 최 장의냐?』

청지기도 낭패한 모양이었다. 낭패하여 어릿거리는 청지기에게 향하여 연거푸 병기의 호령이 내렸다.

『눈이 눈이 아니고 티눈이기로서니 사람을 바꾼단 말이냐? 썩썩 내몰아라.』

남산동 산다는 모는 청지기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나갔다. 그러나 뜰에 내려서서는 하인과 무슨 승강을 하는 모양이었다. 듣노라니깐 돈 넉 냥이 어떻고 닷 냥이 어떻고 승강을 하고 있다. 잠시 듣고 있을 동안, 병기의 눈살은 차차 찌푸려졌다.

하인과 남산동인과의 승강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남산동인은 대감께 뵈려고 그것을 주선하여 달라고 하인에게 돈 닷 냥을 찔러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 덕으로 대감은 김천 최 장의를 부르는데, 하인이 남산동인을 들여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들어는 왔지만 한 마디도 아뢰어 보지 못하고 도로 쫓겨 나가는 남산동인은, 하인에게 아까 주었던 닷 냥을 도로 내라는 것이었다. 닷 냥을 도로 내라거니 안 주겠다거니 뜰에서는 그것으로 승강이가 났다. 병기가 소리를 높여서 세간 청지기를 불렀다.

『에서 무에 요란스러우냐?』

『잘 알 수 없읍니다.』

『알 수 없어? 대체 누구냐?』

『……』

『누구야?』

두 번째의 힐문에 세간 청지기는 드디어 지금 뜰에서 남산동인과 승강을 하고 있는 청지기의 이름을 대감께 아뢰었다. 동료의 한 일―그리고 또(규모의 크고 작은 구별은 있다 하나) 상전 대감도 만날 하는 일과 꼭 같은 일을 한 동료에 대하여 감싸 주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병기의 두 번째의 힐문에는 대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기의 가법에, 같은 말을 주인이 세 번째 묻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에 두 번까지는 질문을 하였지만, 거기 역시 대답하지 않아서 세 번째 질문하게 되는 날에는, 그 벌은 자기에게까지 이를 줄을 아는 세간 청지기는, 두 번째의 힐문에는 솔직하게 지금 뜰에서 승강이하고 있는 청지기의 이름을 알리었다.

병기는 잠시 노여운 눈으로 세간 청지기를 굽어 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씩 끊어서 분한 어조로써 엄명하였다.

『××놈은 광에 가두고 남산동 모는 곤장을 쳐서 내쫓으렷다. 조금이라도 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고약한 놈들!』

하인은 허리를 굽힌 채 이마 너머로 주인을 힐끗 보았다. 한 번 입 밖에 꺼낸 말은 절대로 번복하는 일이 없는 병기인지라, 힐끗 본 뒤에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물러갔다.

이 명령이 시행되느라고 뜰에서는 두선거리는 소리를 병기는 역한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듣고 있었다.

김천 최 장의가 병기를 만나게 된 것은 저녁때가 거의 되어서였다. 돈냥이나 있는 듯한 최 장의는 병기의 아들을 위하여 연줄 값으로 이백 냥을 내고, 청지기에게 또한 심부름 값으로 쉰 냥을 내고, 그 쉰 냥의 덕으로 여러 번 대감을 재촉하였지만 대감은 좀체 만나 주지 않았다. 남산동 모를 내쫓은 뒤에는 내실로 들어가서 한 시각이나 있다가, 다시 정침으로 나와서도 좀체 최 장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 점심 뒤에는 잠시 낮잠을 잔다, 낮잠에서 깨서는 어제 읽던 소설의 계속을 한참 읽는다 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 장의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최 장의는 나이는 거의 병기와 연갑이었다. 영외에서 인사를 드리는 최를 병기는 거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김천 사는 최 장의인가?』

『네, 그렇습니다.』

『거기 앉게.』

병기는 담뱃대로 최의 앉을 자리를 지적하였다.

『선향이 어딘가?』

『△△올씨다.』

『김천읍내 사는가?』

『네!』

『성주는 누구더라?』

최 장의는 성주의 이름을 말하였다.

『응, 정사는 어떤고?』

『선정이올씨다.』

『그래서 나를 찾은 연고는 무엇인고?』

『네,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은 남성사의 장의(掌議)이옵는데, 이번 남성묘에 충문공(忠文公―金祖淳) 어른의 위패를 모시고 선액(宣額)을 받잡고자 대감께 그 소장을―좀……』

병기는 눈을 천천히 굴려서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 소장은 하려면 예조를 통하여 대궐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자기에게로 떠들고 온 그 까닭을 얼굴의 표정으로 써 보고자 함이었다. 충문공 김 조순은 병기의 양할아버지다. 이러한 연줄로 자기에게 부탁함인가? 다른 데로 가져가면 당연히 거대한 황금을 바치고야 성공할 일을, 사손(嗣孫)에게 부탁하여 공짜로 하여 보려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가지고 온 것인가? 혹은 자기는 이 나라의 세도인지라, 자기라야 그 일이 성공될 줄 알고 다른 곳을 젖혀 놓고 자기를 찾아 온 것인가?

김천에서 남성사라는 서원이 있다는 말을 병기는 일찍 들은 일이 없다. 그런즉 남성사라는 것은 그다지 유명하지 못한 서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미약한 서원에 충문공(순조비 김씨의 아버지요, 지금 권문 김씨의 조상인)을 모시고, 충문공의 위패의 힘으로써 세력을 펴 보려는 계획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공자를 모시기보다도, 명나라 어떤 천자를 모시기보다도, 권문 김씨의 조상을 모시는 편이 더욱 세 쓰기에 첩경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충문공의 위패를 모심에 있어서 다른 곳을 찾지 않고 그의 자손되는 병기 자신을 찾은 까닭을 병기는 알아보려고 최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병기는 퉁기어 버렸다.

『그러면 자네는 길을 잘못 들었네. 나는 어떻다고 대답할 수가 없네.』

병기는 담배 서랍에서 삼등 엽초(三登葉草)를 꺼내어 손으로 말면서 고요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최 장의의 얼굴에는 낙심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만한 인사상의 거절은 미리부터 각오하고 왔던 모양이었다. 최 장의는 도포 자락을 좀더 헤치며 조금 나앉았다.

『대감, 길을 헛들은 줄은 소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올씨다. 그렇지만 다른 데 청을 드리기보다는 그 어른의 사손되시는 대감께 드리는 편이 좋겠읍고, 더구나 만약 그 어른의 사손이 안 계시면여니와, 계실뿐더러 현관으로 계신 이상에야 어찌 다른 곳을 찾게 되겠습니까? 다른 곳을 찾는다 할지라도 순서로서 대감께서 그 곳을 손수 지시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기는 담배를 대에 담았다. 그리고 부시쌈지를 얻으려고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매 최 장의가 영외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들어와서, 어느 틈에 꺼내었는지 자기의 부싯돌로 쑥에 불을 일으켰다. 쑥에 붙였던 불은 유황 성냥으로 옮아 갔다. 그 불을 최장의는 양 손으로 읍하고 기다란 병기의 담뱃대 끝에 달린 대통에 대었다.

뻑 뻑, 힘있게 담배를 빨면서 병기는 눈을 굴려서 최장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쥐와 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노란 수염이 몇 올 코 아래의 턱에 났으며, 하관이 빠른 그의 얼굴은, 사람을 비웃는 듯한, 또는 간사한 듯한, 그렇지 않으면 아첨하는 듯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고지식하지 않고, 꾀 고 간사하게 생긴 이 얼굴을 병기는 만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진행되려는 일에 있어서는, 고지식한 인물이 제일 다루기 힘들고 어려움을 병기는 오랜 경험으로 잘 알았다.

향그러운 삼등초는 최 장의의 켜 든 성냥 아래서 피어 올랐다. 최 장의는 한 번 엄지손가락으로 담배의 뿌리를 눌러서 자리를 잡아 놓은 뒤에 다시 성냥에 불을 옮겨서 대었다.

눈치 덩어리였다. 병기는 만족하였다. 대감께 담배를 다 붙여 올린 뒤에, 최장의는 그냥 허리를 구부린 채, 뒷걸음쳐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병기는 담배를 한 번 힘껏 빨아서, 그 연기로서 제 얼굴 전면을 감추면서 말하였다.

『최 장의!』

『네?』

『내가 그 어른의 사손이니깐 더욱 그런 일을 간섭하기 어렵지 않나? 밟을 길을 밟게. 내게는 귀찮게 굴지 말게.』

이런 말에 떨어질 최 장의가 아니었다. 또한 이런 말에 떨어질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에 병기는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처음 뵙고 너무 조릅니다마는 대감밖에는 이 일을 주장해 주실 분이 안 계십니다. 다른 길을 밟는다 해도 대감께서 지도해 주셔야 할 것이옵고, 그만둔다 할지라도 대감의 지시만 받을 것이옵고……소인은 모릅니다, 대감께 매달려 조르고 억지쓸 따름이올씨다.』

『허! 이 사람, 감질 났네그려. 그럼 내 편지……』

『아니올씨다. 소인은 대감밖에는 모릅니다. 죽여도 대감께서 죽이시고, 살려도 대감께서 살리셔야지 다른 데는 모릅니다. 대감께서 응낙하시기까지는 소인은 열흘이고 한 달이고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병기는 고소하였다. 웃으면 홍소(哄笑)―그렇지 않으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병기에게 있어서 고소라 하는 웃음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돈―금액에 대하여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병기 측에서는 최 장의가 꺼내기를 기다렸다. 최 장의 측에서는 대감이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금액이라는 문제를 가운데 놓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주위만 뱅뱅 돌았다.

이런 흥정에 있어서 최 장의는 상당한 수완을 가진 인물인 모양이었다. 천병만마지간을 다 다닌 병기도 그 수완을 넉넉하다 보았다. 그것은 구렁이와 여우와의 승강이였다.

흥정은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동복이 들어와서 백통 촛대에 촛불을 켜 놓고 나가기까지 흥정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최 장의가 이런 말을 꺼내게까지 되었다.

『대감, 대감 댁 도령님 지필가(紙筆價)로 남성사서 한 삼천 냥 드리겠읍니다.』

이 말에 담배만 뻐근뻐근 빨고 있던 병기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노염이 타올랐답니다. 병기는 고요히 말하였다.

『여보게!』

『네?』

『아직 젊은 사람이니 용서해 주거니와, 다시는 그런 버릇 없는 말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게. 내 자식은 아직 조상을 팔아서 지필을 살이만치 궁하지 않았네.』

그리고 거기 대하여 최 장의가 놀라서 무슨 변명을 하렬 때에, 병기는 내리 누르듯이 말을 계속하였다.

『아무리 나이가 못 들었기로서니 선비의 처신에 그맛 지각도 없을 까닭은 없겠지. 썩 돌아가게. 오늘 밤으로 김천으로 내려가게. 에이! 고약한 사람 같으니……』

그리고는 담뱃대를 들고 일어서서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병기는 내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내실에서 자겠노라는 뜻을 눈짓으로 부인에게 알게 한 뒤에, 천천히 다시 사랑으로 나왔다. 그것은 아까 병기가 최 장의를 버려 두고 내실로 들어갔던 때부터 약 한 시각쯤 뒤로서, 해시(亥時)가 거의 된 때였다.

병기는 나와서 세간 청지기를 불렀다. 대령한 청지기에게 향하여,

『김천 최가는 갔느냐?』

고 물었다.

『아직 외사에 있읍니다.』

『음, 고약한 사람 같으니……』

병기는 아직도 괘씸하다는 듯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문갑 위에 놓여 있는 주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양 두돈 오푼, 양 두돈 오 푼을 몇 번을 놓다가 그것을 멈추고, 천(千) 줄에다가 위에 한 알, 아래 두 알을 놓아서 칠천이라는 수효를 나타내어 가지고 물끄러미 주판을 굽어 보았다. 이 주판은 청지기도 넉넉히 볼 수 있도록 조금 밖쪽으로 젖혀 가지고―

그리고 잠시 가만 있다가, 청지기에게 도로 물러 가기를 명하고, 동복을 불러서 좌초롱에 불을 켜서 앞세우고 내실로 들어갔다. 병기가 내실로 들어간 뒤에 사랑 조용한 한 방에서는 김천 선비와 병기 댁 세간 청지기의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었다.

상의(商議)가 거듭되고 거듭되어 야반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결과 남성사이에서는 김 병기에서 구천 냥(만 냥이 아니면 안 될 것이로되, 청지기가 특별히 대감께 잘 알선하여 구천 냥에 떨구겠다고 장담하고)을 바치고, 남성사에는 충문공의 위패를 모시게 하도록 하여 주겠다는 약속이 성립되었다. 그 구전으로 청지기에게 남성사에서 삼백 냥을 뇌물하였다.

남성사에서는 병기 댁 청지기에게 구천 삼백 냥을 드렸다. 청지기가 맡은 치부책에는 남성사 앞으로 칠천 냥이 적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영의정 김 좌근의 상계로서 김천 남성사에 충문공의 위패를 모시는 사액(賜額)을 할 것이 윤허(允許)되었다.

그러나 그 윤허가 내리기 전에 벌써 남성사의 하인들은 각곳으로 헤어져서, 근린의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을 모두 김천 읍으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또 다른 상의(商議)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허가 내린 때쯤은 가난하고 가난하던 남성사는, 어느 덧 천 석에 가까운 제전이며 많은 산림을 소유하게 되었고, 여기저기 비싼 이자로써 빚을 줄 돈도 꽤 많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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