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8장
結婚[결혼]의 條件[조건]
편집1
편집지운의 악수를 거절하고 총총히 사라져가는 신사의 심중에는 어딘가 석연하지 못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삼십 대의 젊은이의 말을 한낱 자기네들의 불량성을 옹호하는 궤변이라는 생각을 끝끝내 포기치 못하면서도 논리에 궁하여 대답을 못한 자기 자신의 무기력한 모랄리티가 그지없이 분했다.
『아, 하하핫……』
그때 돌연 석란의 유쾌한 웃음 소리가 소프라노의 음계를 가지고 폭발하였다.
저만큼 걸어가던 신사가 또 걸음을 멈추며 괘씸하다는 얼굴로 후딱 돌아섰다. 논쟁에 진것만도 분한 노릇인데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양공주의 동족 같이 타락한 계집애가 또다시 나를 비웃어?……사십 여 년 동안 지니고 온 도덕적인 감정은 아무리 정연한 논리 앞에서도 그리 쉽사리 머리를 숙이지 않는 법이다.
『왜 또 웃는 거야? 응?……』
신사는 발을 구르면서 소리소리를 쳤다.
『아이구, 글쎄 그만하구 가요.』
부인은 정말 골치를 앓는다.
『아, 하하핫……』
석란은 허리를 꼬며 그냥 웃어만 댔다. 손뼉도 두어 번 쳤다. 멀리서 보면 무슨 보건 운동이나 하는 것 같다.
『뭐가 우서워, 응?……』
신사는 신사대로 또 소리를 쳤다.
『우서운게 한 가지 있대요. 아, 하하핫……』
『뭐야? 빨랑빨랑 말을 못하겠나?』
『인제 할 께요.』『뭔데, 빨리 해 봐!』
이 감정, 저 감정이 한데 뭉치어 신사의 얼굴은 푸르락 푸르락이다.
『오늘은 정말 대성공이야요.』
『뭐가 대성공이야? 그런 궤변만 논하면서도 그대들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반성을 모르는……』
『아냐요.』
『그럼 뭔데?』
『우리 선생님이 말야요.』
『뭣이?』
『우리 선생님이 종시……』
『뭐가 어쨌서?』
『우리 선생님이 말야요.』
『그대의 선생이 어쨌다는 말이야?』
『우리 선생님이 종시 지셨다는 말이야요.』
『졌다?……언제는 뭐 이겼다고 대성공이라면서……』
『그런 문제가 아니래요.』
『아니다?……』
『보는 눈이 다르고 생각하는 과정이 서로 달라서 혼선(混線)을 일으키는 거에요.』
『음, 괘씸한 사람들이다! 어디까지나 웃사람을 놀려만 먹으려고…… 패덕의 종자들! 타락한 학생들!』
신사는 치를 부들부들 떨었다.
『혼선이라니까요.』
『뭐가 혼선이야?』
『우리 선생님이 종시 지셨어요.』
『똑똑히 말을 해! 누구한테 졌다는 말이야?』
『나 한테요.』
『뭣이?……』
『나는 아직 우리 선생님한테 약혼 신청을 한 일도 없는데 말이야요.』
『응?……』
『아까 우리 선생님이 뭐라고 그러셨는지, 들으셨죠?』
석란은 그러면서 익살맞게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에헴, 우리도 야합은 아닙니다. 이 학생은 나의 약혼자입니다!…… 아, 하하핫…… 아, 하하핫.』『으왓……』
지운도 커다란 웃음을 폭발시키면서 벅적벅적 머리를 긁었다.
2
편집석란과 지운이가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어대고 있는 동안, 신사 부부는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했다.
『설명을 좀 해 드려야겠어요. 저희들만 기쁘게 웃어서 미안하지 않아요?』
석란은 지운을 힐끔 쳐다보고 나서,
『우리 선생님에겐 예쁜 여자가 많이 따라 다닌답니다. 나 같은 건 어림도 없대요. 그래서 우리 선생님이 마음속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던 참에 약혼자가 튀어나왔거든요. 그건 오직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덕분이지요. 후훗 ……』
석란은 쿡쿡 웃었다.
『호호호……알고 보면 저렇게 유쾌한 아가씬데……』
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고,
『음 ㅡ』
신사는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뻑 내려 쓰는데,
『하하핫……그러나 그건 실언이다! 아차, 실수라는 말이 있지 않아?』
지운은 또 지운대로 통쾌하게 웃었다.
『어머나! 저를 어째?……』
석란은 일부러 표정을 쓰며,
『아주머니, 증인 좀 서 주셔야겠어요. 아주머니도 분명히 들으셨죠?』
부인도 그만 유쾌해져서,
『예예, 분명히 듣구 말구요. 아차, 실수로 약혼하는 양반이 어디 있어요?』
『거 좀 보세요, 선생님!』
『아하핫……증인이 한 분 생겼으니 꼼짝도 못하게 되었소.』
지운은 또 머리를 긁었다.
『왜 한 분 뿐이예요? 아저씨도 들으셨죠?』
그 말에는 신사도 빙그레 웃으면서 『어쨌든 굉장한 아가씨요!』했다. 그리고는 부인과 함께 돌아서 갔다. 그 돌아서는 순간을 붙잡아 석란의 카메라가 책칵하고 두사람의 푸로필을 필름에 넣었다.『기념으로 한 장 찍어 둬야지.』
그러나 이 한 장의 필름이 후일에 이르러 실로 중요한 역할을 할 줄은 석란도 모르고 지운도 몰랐다.
『우리도 저리로 좀더 올라가지.』
신사와는 딴 갈래 길을 걸어 숲 사이로 올라갔다.
『어떻거나?……승낙을 할까? 말까?……』
올라가면서 석란은 혼잣말처럼 종알거렸다.
『무얼 말이야.』
『선생님의 결혼 신청 말에요.』
『흥, 누구가 신청을 했어?』
『증인이 두 사람씩이나 있대요. 그래서 한 커트 찍은 거에요. 무슨 트러블이 생김 증인으로 불러 와야잖아요?』
『그건 신청이 아니고 승낙을 의미했을 뿐이야.』
『내가 언제 푸로포우즈를 했어요?』
『아까 올라 올 때, 결혼을 하면 남편 교육을 톡톡히 해야겠다는 말은 누구가 했어?』
『그건 제 마음의 풍경이었지, 정식 발언은 아니었으니까요.』
『요것이!』
지운은 석란의 보드러운 손 하나를 휘어잡으며 아프도록 힘껏 쥐어짰다.
『흥, 누가 아프달까 봐서?……』
『이래두 안아퍼?』
『아야얏 ㅡ』
『항복을 해요. 요 깜찍한 심리학자!』
『항복, 항복.』
석란은 손을 부비며,
『남자들의 나쁜 버릇이야요. 말로 해서 못당함 금방 완력을 사용하지요.
아, 참 나 조건이 있어요.』
『조건?……』
『결혼 조건이 한두 가지 있대요.』
『뭔데?……』
『저기 저 풀밭에 올라가서 이야기 해요.』
3
편집『계곡을 멀리 내려다보는 산중턱에 사랑의 말들을 바꾸기에는 아주 십상인 풀밭 하나가 있었다.
푸른 하늘과 나무가지의 새들만 잔소리가 없다면 두 사람의 행복은 영구히 순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석란은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호물호물 초콜렛을 녹이고 있었고 지운도 업디어서 포켓위스키를 기울어고 있었다.
『그래 어서 말 좀 해 봐요. 결혼의 조건이란 무언데?』
『후훗!』
하고 석란은 쿡쿡 웃다가,
『첫째로……』
『첫째로……?』
『절대로 아내를 때리지 말 것! 힘깨나 쓴다고들 걸핏하면 주먹을 들지만.』
지운은 웃었다. 귀여운 말이었다.
『둘째로는……?』
『둘째로는……어떤 일이 있더라도 최소한 하루에 한 번 씩은 꼭꼭 안아 줄 것!』
순간, 지운은 후딱 얼굴을 들었다. 대지(大地)위에 되는대로 내맡긴 석란의 쭉쭉 뻗은 사지가 눈앞에 지극히 미츠럽다. 지운은 차차 황홀해졌다.
『포옹은 여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본을 의미하고 있지요.』
지운은 약해져 갔다. 처녀의 몸뚱이를 저처럼 아무렇게나 내맡겨도 좋을 만한 대지의 성실한 인격이 지운은 점점 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세째로……』
『…………』
지운은 이미 대꾸를 잃고 조그만 구릉이 두 개 볼룩볼룩한 석란의 흰 부라우스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작가지만……그렇지만 예술을 아내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
순간, 지운의 손길이 얼굴과 함께 쭉 뻗어 왔다. 가슴이 부딪치며 입술도 왔다.
하늘을 향하여 호물호물 초콜렛을 녹이고 있던 빨간 입술이었다. 그 입술이 기습을 받고 호닥닥 놀랐다. 뭐라고 또 익살맞은 발언을 하려는데 위스키의 향기가 덮어 씌워 왔다. 발언은 소리를 잃고 숨길만 파동쳤다. 위스키 초콜렛의 감미로운 미각 속에서 두 줄기의 애정은 황홀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초가을의 푸르디 푸른 하늘 아래였다. 대지는 영원한 침묵을 지켜주었고 하늘은 잔소리도 질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조그만 불행이 하나 지운에게 왔다. 그것은 창경원 연못가에서의 소녀의 환영이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그 한 조각 아득한 기억의 소생은 지운의 포옹에의 정열을 오랫동안 방해하지는 않았다. 환영은 단지 지운의 뇌리를 순간적으로 스치고 다시금 까맣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운에게 있어서 하나의 불행이라는 것은 아득한 그 소녀의 환영이 아니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발동하기 시작한 한 줄기의 몽롱한 자의식(自意識)이었다.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이 행동이 과연 연애라는 것인가?……』
지운의 의식 세계에 의혹이 왔다. 동시에 그것은 포옹에의 정열을 분렬시키고 약화시키는 불행을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이 황홀은 흡사 연애 감정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 편으로 또 생각하면 그것과는 적지않게 거리가 있는 단순한 욕망의 부속물 같기도 하였다.
4
편집『정열을 분열시키는 불행한 의식!』
그것은 현대 지식인의 비극을 의미하고 있었다. 자기의 행복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자기를 항상 대동하고 다녀야만 하는 작가 임지운의 불행은 동시에 인간 임지운의 성격을 분열시키는 현대적 비극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정열의 통일을 방해하고 행동의 약화를 가져옴으로써 마침내는 인격의 파탄을 점차로 조성하게 되는 비극의 원인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 황홀 속에서 나는 과연 죽을 수가 있는 것일까?……』
지운은 마음 속으로 돌이돌이를 하였다. 석란의 편에서 만일에 죽음이 요망한다손 치더라도 지운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 무엇인가 한 가지, 연애 감정의 요소같은 것이 이 정열 속에는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지운은 몰랐다.
『선생님.』
포옹이 끝난 후, 석란은 조용히 불렀다.
『응?……』『이상해요.』
『무엇이?』
『온갖 기억을 망각할 수 있는 정열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말에요?』
『…………』
지운은 적지않게 마음으로 놀랐다.
자기와는 다른 석란이었다. 자기 비판 앞에 의식의 분별과 정열의 약화를 쓰라리게 맛본 지운으로서는 석란의 통일된 정열이 부럽기도 하였고 한 편 측은하기도 하였다.
『선생님!』
『응?……』
『선생님이 정말루 정주 언니와 결혼하고 싶으시담, 하셔도 무방해요.』
눈동자와 함께 목소리도 젖어있는 조용한 한마디였다.
『누구가 그런 말을 했어?……』
지운은 또 한 번 놀라며 감정 이상의 표정을 썼다.
『선생의 그 망설이는 마음을 제가 그만 유혹을 해서 미안해요.』
『석란! 쓸데없는 말 말아요. 유혹을 해서 유혹을 당했다면 그건 석란을 결국 좋아했다는 증거가 아니야?』
『사랑했다는 말은 왜 안 쓰세요?』
『마찬가지 뜻이다! 다만 나는 요즈음 헌 신짝 처럼 천해진 사랑이란 말에 구역질을 느꼈을 뿐이니까 ──』
『실언은 아니죠?……』
『응?……』
『아까 쌈할 적에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그런 종류의 농담 쯤 이해 못하면 어떻거나?……애정도 필요하지만, 결혼 생활에는 이해가 좀 더 필요 할 텐데……』
『결혼함 행복하겠지?……』
『서로가 이해를 많이 해야지.』
『아버지 되시는 임교수에게 제 선을 한 번 보여 드려야겠어요. 암말도 하지 않고……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나쁜 점 좋은 점……그래야만 나중에 실망이 없지.』
『철학 강의 시간에 한 번 들어가 봐요.』
선택 과목으로 된 철학 강의를 석란은 선택하지 않고 있었다.
『들어가서 멋진 질문을 하나 해야겠어. 임교수의 인상에 남도록……』
이러한 결과가 오늘에 와서 임학준 교수와 이석란의 대면을 가져오게 하였고 또한 그러한 결과로서 지운과 석란의 결혼 문제에 대하여 정식으로 임 교수 내외의 승인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긴 회상이었다. 십년에 걸친 이 기나긴 회상에 잠겨있는 동안 꽃봉투는 완전히 재가 되어 재털이 속에 도사리고 앉았다.
책상 위에 두 팔고비를 올려놓고 업디어 있던 지운은 눈을 뜨고 방안을 돌아다보았다.
문은 한쪽이 열린 채 밤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말라빠진 은행잎과 파란 손수건과 「愛人[애인]」의 두 글자가 씌어 있는 장지 한 장은 그냥 책상 위에 널려져 있었다.
지운은 다시 성냥을 그어 은행잎을 태웠다. 성냥갑에는 이제 두 가치밖에 알맹이가 남지 않았다. 그 한 가치를 집어 파란 손수건을 다시 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손수건은 은행잎처럼 쉬이 타 주지는 않았다. 타다가는 껌뻑껌뻑 불길이 스러진다. 마지막 한 가치를 켜가지고 갖다 대는데 바람에 휙 불이 꺼지고 말았다.
지운은 다른 성냥을 찾았다. 그러나 성냥갑은 보이지 않았다. 지운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양복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그러나 들어있는 줄 알았던 라이터는 없다.
『참, 안방에다 놓고 왔었군!』
아까 안방에서 아버지가 담배 한 꼬치를 빼들었을 때 지운이가 얼른 자기 라이터로 붙여 드린 생각이 났다.
지운은 뜰안으로 통하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방을 엿보았다. 그러나 안방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지운은 하는 수 없이 부엌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부엌에도 공교롭게 성냥갑은 보이지 않았다. 지운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찢어 버리거나 쓰레기통에 구겨넣기는 어쩐지 싫었다. 불살라 버리는 것이 지운에게는 흡족했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운은 모른다. 어쨌든 이 순간에 있어서의 지운으로서는 자기의 의욕대로 행동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내일 태우지.』
지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 쪽 귀때기가 타 버린 파란 손수건에다 편지 한 장을 착착 접어서 도로 쌓았다.
『어디다 둘까?』책장 설합에다 넣고 다시 쇠를 잠거 둘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책상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세계문화사대계」(世界文化史大系) 한질이 눈앞에 주루루 꽃혀있는 것을 보는 순간, 지운은 무심코 손을 뻗쳐 그 중 한 권을 뽑아 쥐었다. 그것은 보급판 제 삼권이었다.
지운은 그 책갈피에 편지를 싼 납작한 손수건을 끼워두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았다.
이윽고 지운은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 십년 동안에 걸친 자기의 창백한 감정을 깨끗이 청산해 버렸다는 사실이 지운의 몸과 마음을 지극히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정주와의 관계도 아름답게 결말을 지었고……』
정말로 기분이 홀가분했다.
『좋은 남편이 되자!』
지운은 석란을 생각하였다.
더구나 오늘, 조금도 장식 없는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보여준 석란의 명랑하고 투명한 행동이 귀여웠다고, 지운은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