運命[운명]의 女人[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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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작가 임지운이가 한 사람의 성실한 남편이 되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과거 십년 동안에 걸친 창백한 감정의 잔재를 깨끗이 불살라 버리려고 했다. 그것은 닥쳐올 결혼 생활에 있어서 불필요한 감정일 뿐 아니라 그것을 까딱 잘못 취급을 하다가는 단란한 부부애에 틈사리를 가져오는 위험한 잔재물이 될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밤, 임지운의 그러한 성실한 의욕이 분명히 발동을 하고 있었건만 비극은 한 가치의 성냥개비를 마음대로 손에 넣지 못하는 객관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까닭에 자기의 의욕대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과연 이것을 하나의 우연으로 볼 것인가, 필연으로 볼 것인가?……

인간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하나의 우연성을 의미할는지 모르지만 조물주의 입장에서 내려다 볼 경우에는 그것은 하나의 필연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말할 때, 운명이라고 불러왔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이 지닌 하나의 불구성(不具性)을 의미하고 있었다.

인간이 만일 같은 시각에 두 가지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던들운명은 오늘 날처럼 수많은 비극을 탄생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좀 더 합리적인 행복을 인간으로 하여금 누리게 했을 것이다.

여기 또 한 사람의 운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임학준 교수의 연애 강좌가 끝난 후, 크리임색 시보레 오 십 이 년도에 몸을 싣고 그림처럼 자주치마의 여인은 미끄러저 갔다. 바운드가 도리어 상쾌한 리듬을 주는, 보오얗게 반짝이는 녹색 비로드 쿠션이었다.

『그래 임교수의 연애 강의는 재미 있었소?』

손수 운전을 하면서 남자는 물었다.

중절모에 눈이 부시도록 보오얀 곤색 떠불을 남자는 입고 있었던. 삼십 이 삼 세의 연배로서, 일견 수재형의 모습을 가진 신사였다.

『네.』

여인의 대답에는 흥미 없다.

남자 옆에 여인은 앉아 있었다. 석란이 또레의 연령은 훨씬 넘어 선 조용한 인품을 여인은 갖고 있었다.

『무슨 이야긴데?……』

남자는 힐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미소를 띤 얼굴이었으나 눈초리가 날새다.

『그저 이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여인은 책가방 대신 무릎에 놓은 핸드백을 만지락거리고있었다.

『어째 흥이 없어 보이는데…… 별로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로군. 영심씨가 그처럼 기대를 갖고 온 강의가 아니요?』

금년 봄, M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오영심(吳英心)은 근엄한 철학자 임학준 교수의 특별연애 강좌가 모교에서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많은 기대를 품고 청강을 왔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긴데?……』

차는 서대문을 향하여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저어……』

오영심은 신 안나는 대답을 하며,

『애정 문제를 진실하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음, 진실하게……』

『인생을 장난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애정 문제를 취급해서는 안된다는거예요.』

『허어, 인생을 장난한다?……』

이 남자에게는 그러한 표현이 신통하게 들렸는지, 저으기 감탄을 하며 오영심을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물론 그래야지! 장난이란 말이 되나?……』

『요즈음 연애니, 사랑이니 하고 사람들이 흔히들 떠들지만요.』

말은 남자들 위해서 하고 있었으나 영심의 시선은 창밖에 흐르는 저녁 풍경을 몰래 감상 하고 있었다.

『그런 천박한 의미에서가 아니고 참으로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어요.』

『뭔데요?』

『사람은 자기 이상의 연애를 할 수 없다는 말이라든가 연애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고 인격 도야(陶冶)를 위한 행동이이라든가 하는 말, 참으로 좋은 이야기예요.

『음, 다소 엄숙하지만 ……그러나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요.』

실감을 잃은 동감을 남자는 했다. 그러나 그래야만 할 이유가 남자에게는 있었다.

변호사 유민호(劉敏豪)는 변호사로서보다도 덕흥상사(德興商社)의 젊은 사장으로서의 명성이 한층 더 높다. 그 유민호가 수일내로 오영심의 남편이 될 자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는 진검승부라고요. 잘못하면 목숨을 건드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만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라고요.』

『좋은 말이요! 그 한 마디는 바로 영심을 사모한 유민호의 심경을 두고 한 말이 분명한데……』

그러면서 유민호는 쾌활하게 웃었다. 영심도 쓸쓸히 따라 웃었다.

『전검승부! 참으로 좋은 말이요. 오늘부터 나도 임교수를 존경해야겠소.』

서울역 앞으로 해서 차자 남대문 옆을 지날 무렵,

『우리 임교수를 한 번 모시면 어때요?』

유민호가 불쑥 말했다.

『아, 임교수를……』

임교수를 한 번 찾아 뵙고 싶은 충동은 아까 교실을 나설 때부터 느껴 온 영심이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역설하여 영심의 불행한 심금을 울린 임교수가 아니었던가.

『임교수를 한 번 모시고 이번 결혼식에 주례를 좀 서달랄까?……그런 인격자요, 고명한 학자가 주례를 서 준다면 확실히 식장이 빛날게 아니요.』

약혼자가 갑자기 열을 띠어 왔다.

『주례를?……』

영심은 심중 저으기 놀라면서 약혼자를 쳐다보았다.

임교수 같은 성실한 분이 주례를 서 준다면 그것은 정말 분에 넘치는 행복이라고, 영심은 생각한다.

그러나 영심은 슬펐다. 임교수 같은 분을 주례로 모셔도 좋을만큼 오영심의 결혼은 진실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경하는 임 교수로 하여금 보람없는 설교를 강요하는 것밖에 아무런 것도 아니다.

『우리 꼭 그렇게 합시다. 더구나 영심이가 그처럼 존경하는 선생님인데……』

한 번 의견을 내면 좀처럼 철회할 줄을 모르는 성품이다.

『글쎄요. 서 주시기나 하실는지 선생님보구 한 번 말씀 드려 봐야지만……』

그러는데 차가 진고개 입구 어떤 고급 그릴 앞에서 멎었다.

그 그릴 이층 특별실에서 유민호와 오영심은 저녁식사를 했다. 유민호는 식사보다도 맥주를 더 자주 마셨고 오영심은 식욕을 잃고 디저어트까지 가기 전에 나프킨으로 입을 씻고 말았다.

식사중 두 사람은 별반 이렇다 할 회화를 바꾸지 않았다. 임교수를 꼭 주례로 모시자는 말과 결혼 후의 행복한 플랜에 대하여 유민호는 취흥과 함께 혼자말처럼 떠버렸으나 영심은 그저 모두가 지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자리를 일 무렵, 유 민호는 얼른 먼저 일어나 영심의 등뒤로 돌아가자 가벼운 포옹과 함께 약혼자의 귀밑에다 입술을 갖다 댔다.

『결혼식날이 기달려져서 못견디겠소!』

유 민호는 점잖게 속삭이며 정열의 아우성을 억제하는데 힘든 노력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심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오뚜기모양 오뚝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약혼자의 애정을 거절도 환영도 하지 않는 태도였다.

『인제 돌아가요.』영심은 이윽고 살그머니 몸을 빼며 식탁 위에놓인 핸드백을 들었다.

영심의 심중을 유 민호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유 민호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아는척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표정을 가지고 유 민호는 영심과 함께 그릴을 나섰다.

아직 채 어둡지 않은 황혼의 거리였다. 영심은 혼자서 거리를 걷고 싶어졌다. 일견 점잖고 상냥한 이 약혼자의 옆에서 한시바삐 떠나고 싶은 심정이 영심은 점점 되어 가고 있었다.

『바쁘실텐데 돌아가 보세요.』

명륜동 자기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약혼자의 말을 영심은 그런 말로서 가볍게 사양을 했다.

『괜찮소. 암만 바빠도 영심씨를 바래다 줄 만한 시간이야 없겠소?』

유민호는 부득부득 영심이더러 올라 타란다.

『밤길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도 하구……』

영심은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마음이 그만큼 겸허하다. 누구가 두 번만 권유하면 거절을 못하는 영심의 성품이었다.

종로를 거쳐서 돈화문 앞을 지날 무렵에는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원남동 창경원 담장을 끼고 차는 명륜동을 향하여 상쾌하게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창경원 문은 굳세게 잠겨져 있었다.

이 문앞을 지날 때마다 영심은 자기가 결코 불행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곤 한다. 처음에는 괴롭고도 서글픈 기억이었다. 그것이 차츰차츰 면역이 되어 버린 오늘에 와서는 한낱 아름다운 신화인 양 영심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 별 밑에 그이는 지금 살고 있을까?……』

무수한 별이 밤하늘에 떴다. 그 별 어느 하나를 그이는 지금 머리 위에 이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면 영심은 행복해진다. 슬픔은 이미 가고 행복감이 왔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불행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라고 영심은 믿는다.

『자아, 그럼 좋은 꿈 많이 꾸고 편히 쉬어요.』

경학원 마당에다 영심을 부리고 유민호는 다시금 전찻길을 향하여 차를 몰았다.

창경원 뒷 담장과 경학원 사이에 계곡이 한 줄기 흐른다. 일제 시대 이 근방에는 한 무더기 일인 주택이 서 있었다. 그 적산 주택 하나에 영심의 가족은 살고 있었다. 이층에 팔조방 하나를 가진 중류 주택이다.가족이래야 많은편은 아니고, 반신 불수로 누워있는 아버지와 팔순이 가까운 조모와 사십 대의 식모와, 영심을 넣어도 네 식구 뿐인 단출한 가정이었다.

『너 저녁 먹었니?』

아랫목 온돌방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할머니가 어두워진 눈을 들었다.

『네, 먹었어요. 할머니는?……』

『우리야 벌써 먹었다.』

부엌에서 식모가 서름질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지, 지금 돌아왔어요.』

영심은 미닫이를 열고 다음 육조방으로 들어갔다.

『음, 너 늦었구나.』

누워있던 아버지가 일어나 앉았다. 왼편 다리와 팔을 아버지는 쓰지 못한다. 변소 출입이 간신한 아버지였다.

『그래 무슨 이야길 하드냐?』

『참 좋은 말씀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의 흐트러진 자리에 손질을 하며 영심은 앉았다.

『그래? 무슨 이야긴데……』

아버지는 담배 한 꼬치를 집었다. 영심은 이내 재털이에 놓인 성냥을 켜 드렸다. 한 쪽 손을 쓰지 못하는 아버지는 성냥을 못 킨다. 영심은 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한 쪽 손이 되고 한 쪽 다리가 되어 있는 귀중한 존재였다.

『저 옷 좀 갈아 입고 내려와서 이야기 해 드릴께요.』

이 반신 불수의 아버지와 마주 앉으면 이야기는 자연히 길어진다. 길어져도 좋을 차비를 영심은 해 가지고 내려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영심은 옷을 갈아 입고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는 오늘 임 교수의 강의 내용을 쭉 이야기 하기시작 하였다.

바깥 출입을 못하는 아버지에게는 영심과 마주앉아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제일로 즐겨하였다. 한 시간이라도 영심이가 곁에 없으면 이 아버지는 정말로 쓸쓸해서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금년봄, 학교를 졸업하고 시내 모 사립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을 했다가 몸이 하도 고단해서 석달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아버지는 도리어 잃었던 친구 하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였다.

결핵성인 체질을 지닌 영심은 어렸을 적부터 줄곧 병원의 신세를 지면서 자랐다. 특히 여학교를 졸업할 무렵쯤에는 폐가 약해져서 대학 병원에 반년이나 출입을 했다. 영심에게는 결혼 생활이 다소 무리일 것 같다는 충고를의사는 하였다.

『음, 요즈음처럼 남녀의 풍기가 문란한 시대에는 참으로 주옥같이 귀중한 말들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보약이 될 거다. 훌륭한 학자인걸!』

아버지는 적지않은 감심의 뜻을 표시하였다.

『그래요. 임교수의 연애 철학은 아버지의 바둑 철학과 흡사히 통하는 데가 있어요. 바둑놀음이나 장난이 아니고 인격을 연마하는 하나의 도장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남녀간에 애정의 교환도 그래야만 한다는 말이겠다?』

『네.』

『음, 훌륭한 분이다!』

아버지가 이처럼 인간에 대하여 마음을 움직여보는 일은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핏기없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한 점 홍조의 빛조차 띄기 시작하였다.

듣는 것 보는 것이 모두 다 마음에 거슬려 이미 세상을 버린지 오래인 오진국(吳鎭國)씨 였다.

보기 싫은 세상을 보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한 줌 황토가 되어 버리는 것이 사람답기도 했고 마음도 편했으나 아직 노모가 앉아 계시는 몸이라, 먼저 가는 것이 불효 막심하여 구차한 목숨을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오진국씨였다.

기품 있는 얼굴에 이마가 다소 벗어졌으나 머리는 아직도 세지는 않고 어딘가 도학자의 풍모를 지닌 위인이었다.

세상 만사에 흥미를 잃고 노모가 돌아가시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오늘 임학준 교수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을 보고 영심은 또 영심대로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흥을 돋우어 드리는 결과가 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며,

『아버지도 말씀하셨지요. 사람은 자기 이상의 바둑을 둘 수 없다고……

고매한 사람은 고매하게, 야비한 사람은 야비하게……』

『음, 그와 마찬가지로 남녀의 애정도……』

『네. 임교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런 훌륭한 학자라면 내가 한 번 상종을 해볼까?……』

오 진국씨의 마음은 또 한 번 비약을 했다. 원체 성미가 다소 급한 위인이었다.『정말 아버지와는 이야기가 꼭 맞으실 거야요.』

『음 ──』

무슨 삶의 보람 같은 것을 갑자기 아버지는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변호사의 말은, 그런 훌륭한 분이라면 저희들의 결혼식 때 주례를 좀 부탁하는 것이 어떠냐구요.』

『무방하지!』

아버지는 당장에 쾌락을 하였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칼로 베는 듯한 아버지였다.

『내가 한 번 찾아 뵙고 청을 드려 보는 것이 온당하지만 너도 아다시피 자유롭지 못한 몸이어서……』

『아버지께서 진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옳지. 어디까지나 이 아비를 대신해서 가는 것이지 신부가 될 당자의 입장으로 가서는 당돌하다고 꾸지람을 받을 것이니까, 못써! 내 편지 한 장을 써 줄테니, 갈 때는 그걸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거야.』

그러다가 아버지는 훗닥 생각이 난듯이 물어 왔다.

『임교수는 바둑이 셀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린애 같은 데가 있는 법이다. 아버지는 대뜸 바둑 수부터 물었다.

『아이, 아버지도 참……』

영심은 우수워 죽겠다는 듯이 입을 막으며,

『그런 걸 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학문이야 나보다 훌륭하겠지만…… 바둑이야 될 말인가!』

했다.

그러한 아버지를 영심은 무척 좋아한다. 아버지와 마주앉기만 하면 영심의 마음은 고요히 가라앉는 것이다.

『아버지가 왜 학문이 훌륭하지 못하시나요?』

『안될 말! 동양학(東洋學)은 이미 세상을 잃었어!』

그리고는 심심했던 하루 동안을 성급히 메꿀 셈으로,

『자아, 영심아, 한 판 두자!』

손을 뻗혀 아버지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바둑판을 끌어 당겼다.

『아버지가 얼마나 심심했으면……』좀더 빨랑 빨랑 돌아오지 못한 자기가 영심은 저으기 뉘우쳐졌다.

낡아빠진 문갑 한 쌍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서적 한 무더기와 벼룻장이 초라하게 놓여 있었다.

영심은 얼른 일어서서 바둑판 이외에는 절대로 사용 못하는 마른행주를 가져다가 골고루 판을 닦아냈다. 갓들어 온 식모가 사정을 모르고 걸레로 바둑판을 닦았다가 아버지에게 벼락 꾸중을 당한 적이 있다.

『바둑판을 천대해서는 못써. 바둑은 놀음이 아니고 심신을 단련하는 인생의 도장이다.』

그것이 오진국씨의 기도(基道) 정신이었다.

『자아, 영심 선생, 오늘은 자신이 있을까?』

오진국씨는 정색을 하고 바둑판 앞에 홀연히 정좌하였다. 한 쪽을 잘 못 쓰면서도 바둑을 둘 때만은 의례히 다리를 가드러뜨렸다. 더구나 반은 농담조지만 상대편을 존칭으로 불러야만 바둑의 엄숙한 분위기를 아버지는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은 없읍니다만 투지만은 만만합니다.』

영심도 단정히 꿇어앉아서 안색을 가다듬었다. 평시에는 말끝을 흐려도 좋았지만 바둑을 둘 때만은 최경어를 열심히 썼다. 칠팔 세의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하도록 배워 주고 배워온 오진국씨 부녀의 습성이었다.

『어젯밤의 복수를 오늘은 해야겠소. 여섯 목만 떼 드리지요.』

아버지의 바둑수는 그리 센 것은 못되어 초단급을 오르내렸다.

『아니올씨다. 세 목만 떼 주십시오.』

영심의 바둑수는 그러한 정도였다. 십 육칠 세까지는 바둑의 진도가 상당히 빨랐던 영심이었다. 그러나 그후 청춘기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는 글자 그대로 지지부진, 한 때는 아버지를 능가할 줄로 믿었던 영심의 바둑 수는 별반 활발한 진보를 보이지 못하고 말았다.

『될 뻔한 말인가요. 그럼 다섯 목을……』

『아니올씨다. 그럼 네 목만……』

거기서 두 부녀의 바둑수는 타협을 보게 되어 흑백의 지도가 복잡하게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너희들, 또 맞섰구나.』

할머니가 사과 세 알을 들고 바둑판 옆으로 올라와 앉았다. 아버지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이 할머니였던 것이다. 돋보기를 할머니는 쓰고 왔다.

『오늘밤은 영심 선생의 바둑수가 대단히 높으시오.』영심의 검은 돌이 활발하게 뻗고 있었다.

『추켜 올리면서 슬쩍 복병(伏兵)을 쓰시려지만……』

『어, 허헛……그만 들키고 말았는 걸. 녹녹치 않은 선생이야.』

『말로 두는 바둑은 인격의 사기(詐欺)라고, 그건 어느 사범께서 가르치신 교훈이지요?』

『음, 기완력이 다소 좋은 것도 탈인가 보오.』

아버지는 나지도 않은 수염을 뻑 한 번 내려쓸었다. 흰 돌이 다소 궁지에 빠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교수의 강의도 말보다 인격을 소중히 하셨답니다.』

『옳소, 맞았소!』

아버지는 무릎을 탁 치며,

『임교수의 연애도(戀愛道)나 오진국의 기도(碁道)나 똑같은 철학적 정신에서 출발하는데…… 아뿔싸!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궁지(窮地)의 보급로를 끊기우고 말았구려!』

『호호훗……사범께서 다소의 악전 고투는 면치 못할까 하옵니다.』

『음 ─』

아버지는 바둑판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만 앉았다.

『너의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면 바둑수가 약하고 기분이 나쁘면 바둑수가 세지는 걸 알아야 한다. 자아, 사과나 한 쪽 들어라. 딸한테 질래기에 땀 바가지나 흘리겠다.』

할머니가 접시에 사과를 깎아 놓았다.

『응, 어디 내일 좀 보자.』

석 점으로 아버지가 졌다.

『내일은 임교수의 이야기를 많이 해야겠어요. 호호……』

『그래라. 너의 아버지가 임교수에게 홀딱 반한 모양인데……』

바둑판을 치우고 일동은 사과를 들었다.

조모는 바둑만이 아니라 서화(書畵)도 좀 했다. 평양에서도 이름이 높던 한학자가 오도원(吳道源) 선생의 부인으로서 바둑이나 서화는 말하자면 남편의 옆에서 보고 배운 솜씨였다. 남편을 일찌기 여윈조모는 외아들 진국에게 바둑과 서화를 가르치어 기도와 서도의 정신을 남편을 대신하여 넣어 주었다. 그것을 또 오진국씨는 무남 독녀외 딸인 영심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일제 시대 오진국씨는 평양 모 사립중학교에서 한글을 겸임한 한문 교사로 이십 여 년 동안을 썩고 있는 동안에 그 학교 교장으로 밀려 올라왔다. 일제 시대의 한글이나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의 지위가 어떠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으리만큼 미천하였다. 일제말기 한글 폐지 정책이 실시되자 오진국씨는 자신 교장의 직을 떠나고 말았다. 떠나는 이유 가운데는 민족적 운명에 대한 극도의 울분도 있었지만 풍증으로 말미암은 부자유한 건강에도 있었다.

해방을 맞이하는 해 봄, 오진국씨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마침내 몸 한 쪽을 쓰지 못하는 불수위 신세가 되었고 설상 가상으로 해방 직후 아내까지 병마에 빼앗기는 몸이 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실의(失意)의 인간이 되어 버린 오진국씨에게 있어서 외딸 영심은 반시라도 없어서는 아니될 귀중한 반려자가 되어 있었다.

『참, 허군에게서 편지가 왔던데……』

아버지는 문갑 위 책갈피에서 봉투 두 개를 꺼냈다.

중동부 일선 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XX연대장 허정욱(許正旭)중령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이번 결혼식에는 휴가를 얻어가지고 꼭 참석하겠다구……』

『네……?』

영심은 저으기 반색을 하며 아버지를 바라 보았다.

『어떻게 되면 후방으로 옮겨질는지도 모르겠구……』

『그러세요?』

영심은 자기에게 온 봉함을 뜯어 보았다.

두어 달 만에 한 번씩은 꼭꼭 아버지에게 문안 편지를 보내오는 허정욱 중령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영심에게 따로이 글을 쓰는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인 만큼 영심은 내심 일종의 불안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민호와의 결혼 문제가 최후적으로 결정을 본 이래, 영심과의 서신 왕래를 자진하여 끊어버린 허정욱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긴데?……』

아버지가 조용히 물어 왔다.

『아버지에게 온 편지와 같은 내용이어요. 결혼을 축하한다구…… 그리고 결혼식에는 꼭 오겠다구요.』

『음 ──』

그러나 영심에게 온 편지는 그 이외의 몇구절이 더 적혀 있었다. 그것을영심은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지 못할 이유가 영심에게는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