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집

일환아!

오늘─ 삼월 스무 닷샛날─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오늘은 다른 날이 아니다. 지금부터 약 일천 구백 년 전에 한 개의 귀한 생명이 이 세상 사람의 모든 죄악을 대신하여 유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 얼마나 위대한 이름이냐? 유대의 이름도 없는 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 이름이 지금은 넓은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크게 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위대한 이름을, 너는 아직껏 들은 일이 있느냐?


거짓 착함과, 거짓 지혜로움과, 거짓 헤가림으로 사람들의 눈만 속이어 넘기고, 발잔등의 불만 끄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제각기 표면만 차리는 당시에 나서 진리를 가르치고 사상을 가르치고, 장래라는 것을 가르치고, 위대한 일이란 것을 가르친 예수는 얼마나 귀한 사람이냐? 이런 것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당시의 세도가인 바리새 교인이며, 로마의 관리, 군인들을 모두 비웃고, 그 권력과 세도를 한 떨기의 꽃만도 못하다고 차버린 예수의 용기는 얼마나 컸느냐?

이런 일들로 그들의 노염을 사서 혹세무민하는 자라고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 못을 박히게 될 때도,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없었다. 그리고 끝끝내 사랑을 가르치고 의로움을 가르치셨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일천 구백 년─ 비록 그때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하나, 그가 세상에 남긴 도(道)는 퍼지고 또 퍼져서, 지금 이 세상의 어느 곳이든 예수를 모르는 곳이 없으니, 그때에 그는 십자가 위의 원혼이 되었다 하나, 그의 정신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지금까지 그냥 살아 있는 셈이다.

어떤 촌락, 어떤 도회를 가든 그곳에 가장 큰 집은 예배당이며, 이 예배당은 일천 구백 년 전의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의 도를 가르치는 곳임은 너도 잘 알 터이다. 그러면 비록 그때에 그의 육체의 생명은 끊어졌다 하나, 신령한 생명은 그냥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더욱 왕성함을 알 것이다.

그러면 일환아!

아버지는 이 기회에 임하여, 그 예수의 도 가운데 신교를 가장 먼저 조선에 퍼치러 왔다가 그만 잡혀서 순교한, 한 애처로운 혼의 비창한 이야기를 여기 쓰려 한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을 결코 아끼지 않는 예수교의 전도율에 의지하여, 아직 신교라는 것이 그 첫 씨도 뿌리어지지 않은 조선에 신교를 퍼치어 보고자, 산 설고 말 모르는 조선에까지 왔다가, 오해를 입고 그때 군인에게 잡히어 죽은 토오마스의 순교 사실을 여기에 쓰고자 한다. 이 감동할 만한 죽음, 이 감동할 만한 순교─ 이 순교가 있었기에, 오늘날 조선의 예수교는 이만큼 퍼진 것이다.


2 편집

지금부터 약 칠십 년 전에, 광무주(光武主)께서 등극을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왕의 자리에 앉으신 광무주께서는 너무도 어리시므로 왕의 아버님 되시는 대원군 이하응이라는 이가, 어리신 왕을 도와서 정사를 보시게 되었다.

일환아! 네가 이 후에 자라서 조선 역사를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으면 그때에 자연히 알게 되려니와, 근대의 조선이 낳은 가장 위엄성 있는 정치가가 이 대원군이시다. 그이가 조선에 베푼 많고 많은 정치를 일일이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 정치가 모두 조선을 이롭게 하였는지 해롭게 하였는지, 그것을 알아 보잘 필요도 없다. 그이는 극진히도 조선을 사랑하셨다 하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이가 조선에 베푼 모든 정치가, 그 결과는 혹은 조선에 해로운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이의 뜻만은 조선을 더 잘 되게 하고자 하여 한 일이다. 그런지라, 결과가 나빴다고 곧 그이를 책할 것이 아니다. 왕의 어버이시고 나라의 정치를 한 손에 잡으신 그이가, 마음에만 있으면 무슨 호강인들 못하였으랴마는, 그이는 몸에는 무명옷을 감고 소찬을 잡수시면서, 밤이고 낮이고 이 조선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훌륭한 나라로 만들까, 이런 생각만 늘 하셨다.

그때의 조선이란 나라는 아주 보잘 것이 없었다. 나라에는 지키는 군사가 없고, 국고에는 돈이 없으며, 사람은 제각기 제 욕심만 채우고, 제각기 당파를 세워서 다투기나 하고─ 이렇게 혼란한 나라였다. 이러한 나라의 정치를 잡으신 대원군은 차례차례로 그 못된 정치를 부수어 나갔으니, 인재 등용이라, 서원 철폐라, 당벌 타파라, 문호 엄쇄라, 그 밖에 긴 대를 금하고, 큰 갓을 없이 하고─ 소소한 일에까지 그의 관심이 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동양 문명은 차차 쇠하여 가고, 서양 문명은 차차 찬란하여 갈 때였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동양의 각 곳을 침노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경쟁하다시피 하던 때였다.

이 서양인의 야심을 알아보신 대원군은 조선 땅에는 일체 서양인을 들이지 않으려 하였다. 약하고 또 약한 이 조선의 안에 서양인을 들이기만 하였다가는, 곧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양인의 식민지가 될 것을 짐작하고, 서양인이 들어오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이 엄금도 쓸데없이 서양인의 세력은 차차 조선 안에 새어 들어왔다. 그것은 썩 이전부터 조선 안에 포교된 천주교를 통하여 들어온 것이다.

대원군도 처음에는 이 천주교만은 그냥 버려 두었다. 그러나 버려 두니까 그 세력은 차차 무섭게 퍼지기 시작하였다. 퍼지고 퍼져서 그 세력은 삽시간에 조선의 방방곡곡에까지 믿게 되었다.

그 세력이 너무도 놀랍게 너무도 빨리 퍼지는 것을 볼 때에, 대원군도 겁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버려 두었다가는 삽시간에 온 조선은 천주교 천지가 되고, 따라서 서양인의 세력 아래 들어갈 듯하였다.


3 편집

여기서 드디어 대원군도 최후의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천 팔백 육십 육년 이월 이십 일 일이다. 그날 새벽 대원군의 밀령을 받은 이경하(李景夏)는, 삼만의 군사를 풀어 가지고, 천주교도 혹은 그의 친척들을 모두 잡았다. 그리하여 혹은 총살하고 혹은 때려서 죽였다. 그날 온 장안은 죽음의 거리로 변하였다.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시구문 안에는 맞아 죽은 천주교도의 시체가 뫼와 같이 가리어졌으며, 거기서 흐르는 피는 사람의 신을 넘어서 버선까지 붉게 물들였다 하니, 그 참상은 능히 짐작할 바이다.

종로 네거리에는 커다란 비를 해 세우고, 그 비에는

『양고자와 화목하는 자는 나라의 역적이라.』

하는 뜻을 새겼다.

장안뿐 아니라, 각 도의 수령들에게도 역시 같은 뜻을 전하여, 온 조선 안에 있는 천주교도는 모두 잡히는 대로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조선의 안에서는 천주교의 종자를 한 때 없이 하여 버렸다.

그때에 죽은 사람의 수효 사만여 명─ 이 얼마나 많은 생명이냐! 사만이라는 생명이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원통한 죽음을 한 것이다.

이 소문은 청국까지 전하여져서, 천진(天津)에 묵어 있던 불란서 수사제독(水師提督) 로제는 대원군의 그 일을 응징하려고 군함을 끌고 인천으로 왔다.

그러나 대원군의 집정 수년간, 이전과 달라서 조선의 군대도 꽤 강하게 되었는지라, 몇 번을 싸운 뒤에 불란서 함대는 대원군의 군사를 당하지 못하고 그만 쫓기어 돌아갔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외국 사람들은 조선을 매우 두렵게 보았다. 뜻밖에 조선의 군사가 강하다는 것도 외국 사람들을 겁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양인을 보면 곧 잡아 죽여 버린다.」

하는 것이 더욱 그들에게 두려운 것이었다. 미국 함대도 한 번 왔다가 쫓기어 가고, 불란서 함대도 쫓기어 갔는지라, 서양인들은 다시는 조선에 발길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성경 몇 백 권을 들고 조선에 뛰쳐들어온 사람이 토오마스였다. 겨우 스물여섯 살 난 젊은이로서 다른 사람 같으면 한창 멋이나 부리며 놀 나이에 예수교를 전하겠다는 정성으로서, 이 공포와 살육의 나라인 조선에 몇 권의 성경을 들고 뛰쳐들어온 것이었다.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무지하다면 무지한 일이었다.


4 편집

토오마스는 일천 팔백 사십년 구월 이렛날 영국 웨일스 주(州)의 어떤 지방에서 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교(新敎) 목사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업을 이으려고 신학과를 전공하였다.

스물세 살에 그는 결혼하였다.

결혼한 뒤에 곧 그는 청국을 향하여 고국을 떠났다. 아직 혈기에 날뛰는 젊은이로 그는 사억이 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하려는 굳은 결심으로, 온갖 애련을 끊어버리고 사랑하는 부모와 친척을 작별하고 고국을 떠난 것이었다. 오묘하고도 귀한 하나님의 도를 이방 민족에게 전하겠다는 정성은, 젊은 그로 하여금 온갖 다른 애욕을 잊게 한 것이었다.

그 해 겨울, 그는 동양의 어떤 항구까지 이르렀다. 산 설고, 물 설고, 사람 선 땅이었다. 그러나 산이 설면 선 만큼, 물이 설면 선 만큼, 사람이 설면 선 만큼 그의 젊은 마음에는 이 온갖 것이 선 땅에 하나님의 도를 전하여 보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도를 퍼치고자, 상해에서 한구(漢口)로, 한구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 천진으로, 지극히 교통이 불편한 청국의 땅을 몇 권의 성경을 벗 삼아서 돌아다녔다.

토오마스가 선교회의 지휘로 한구(漢口)로 떠난 것은 일천 팔백 육십 사년 삼월 열 하루였다. 그런데 토오마스가 한구로 떠난 뒤에, 홀로 이역에서 집을 지키고 있던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갔다. 이역에서 서로 도와주며 일생을 보내기를 맹세하였던 아내를 잃은 뒤로 토오마스의 슬픔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느냐?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소소한 일보다도 더 큰 사업이 있었다. 이 세상은 잠시의 기류소─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노력하여야겠다는 커다란 사업이 남아 있었다. 아내의 죽음을 조상하기가 바쁘게 그는 또 다시 북경으로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청국에서 하나님의 도를 퍼치기에 열심이던 토오마스가 청국과 한편 끝이 연닿은 조선이라는 나라에 흥미를 가지고 조선으로 전도하러 첫길을 떠난 것은 일천 팔백 육십 오년 구월 초닷샛날이었다.

「은사국(隱士國)!」

「모를 나라!」

이러한 대명사로 불리던 조선의 땅에도, 신교의 씨를 뿌려 보려는 토오마스의 열성이었다.

토오마스가 탄 배는 황해도의 어떤 해안에 도착하였다. 토오마스는 그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조선말도 배우며 성경책도 전하며 하나님의 도도 퍼치며,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는 갔으나, 이 흰옷을 입은 순진하고 점잖은 국민의 모양은, 늘 그의 마음에 어릿거렸다. 언제 다시 기회를 얻어 가지고, 이 흰옷의 나라를 두루 편답하면서, 하나님의 기꺼운 도를 전하여 보고 싶었다. 자기면 넉넉히 이 흰옷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할 자신까지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조선에서는 대원군의 영으로 천주교도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토오마스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를 위하여 이미 목숨을 내어 놓은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조선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아무러한 힘으로도 꺾을 수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 미국 상선(商船) 제네럴 셔맨호가, 장사를 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 용감한 젊은 목사는 곧 사람들의 충고를 물리치고 감연히 그 배에 몸을 싣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5 편집

양력 팔월 중순께 어떤 날, 제네럴 셔맨호는 오랜 항해를 계속한 뒤에 조선 땅 보산(保山)에 들어왔다.

흰옷이 움직이었다. 아지랭이 낀 붉은 산이 바라보였다.

커다란 희망을 품고 두 번째 이 땅을 찾아오는 토오마스는, 몸을 난간에 기대고 그림 같은 은사국(隱士國)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의 복음─ 온갖 것을 사르고 씻어버릴 수 있는 귀한 말씀을 전하러 낯선 이 땅에 오는 젊은 목사의 마음은 자랑과 긴장으로 떨리었다.

물에서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이 괴상한 검은 배를 구경하느라고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무리들을 바라볼 때에 젊은 목사의 마음은 더욱 기쁨으로 찼다.

─착하지만 가련한 인생들아! 하나님의 도를 모르는 빈약한 무리들아! 그대들에게 귀한 도를 가르치며, 귀한 복음을 전하러 한 사람의 외국 젊은이가 그대들에게 오는 것을 그대들은 모르리라.

배는 점점 상류로 상류로 올라갔다.

맑고 푸르기로 이름 높은 대동강에 웬일인지 붉은 물이 물결치며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거슬리며 배는 더욱 위로 올라갔다.

배가 바야흐로 조선의 요새 지대를 지날 때였다. 문득 언덕에서 총소리가 났다. 놀라서 그리로 머리를 돌리고 보니, 거기서는 조선의 군인들이 이 괴상한 양국 배를 향하여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토오마스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이미 청국을 떠날 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바 있으니 죽음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이곳에서 마음이 거친 선원(船員)들과 조선의 군인 사이에 싸움이라도 시작되면 아직 조선 땅에 말 한 마디 전해 보지 못하고, 자기의 사업은 깨어져 나갈 것이다.

물결치며 흐르는 강에, 조선 군인의 탄환은 연하여 내려졌다. 어떤 것은 거의 제네럴 서맨호의 갑판까지 오는 것도 있었다.

이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토오마스는, 돌아서서 선장을 찾으러 선장실로 갔다. 그랬더니, 선장실에는 선장 이하 높은 선원들이 모두 모여서, 긴장된 얼굴로 무엇을 의논하고 있었다.

「마주 쏩시다.」

어떤 고급 선원의 부르짖는 소리가 토오마스가 문 안에 들어설 때에 들렸다.

토오마스는 짐작하였다. 조선 군인에게 포격을 당한 선원들은 거기 대항하자고 의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네럴 셔맨호의 선원들이 제아무리 강하기로, 유명한 평안도 군인의 포격에 대항을 하자면, 거기는 반드시 커다란 싸움이 일어날 것이었다. 만약 거기서 커다란 싸움이 일어나면, 제네럴 셔맨호와 조선 사람의 사이에는 다시 볼 길이 없는 담이 쌓여질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온 귀한 생명의 양식은, 다시 전할 가망이 없어질 것이었다.

여기서 토오마스는 빨리 선장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아직껏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을 그의 앞에 탁 놓았다.


6 편집

「선장!」

토오마스는 거의 부르짖는 듯한 커다란 소리로 선장을 찾았다. 그리고 선장에게 누누히 설명하였다. 그저 뛰자. 그저 이곳만 벗어나서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평양까지 가기만 하면, 평안감사 박규수는 자기와 친한 사이니, 넉넉히 무역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뒤의 무역을 약속할 수도 있으니, 이 총알을 피해서 어서 소강(溯江)만 하자. 만약 여기서 조선의 군인과 싸움을 시작하여 놓으면 이번의 길이 헛데로 돌아갈 뿐 아니라, 이 뒤에도 다시 교역할 길까지 끊어지지 않느냐? 참아라! 참고 어서 평양으로 올라가기만 힘쓰자 누누 수만 어를 토하여 어떻게 하여서는 이곳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에 힘썼다.

제네럴 셔맨호는 그 목적은 동양 무역에 있지만, 만약 무역에 응하지 않을 때는 대포로 위협하여서라도 자기네의 목적을 달하고자 상당한 무기도 실은 배였다. 그런지라, 만약 여기서 싸움이 일어나기만 하면 그것은 상당한 범위까지 크게 될 것이었다.

이런 점을 잘 아는 토오마스는, 여기서 결코 조선 군사와 제네럴 셔맨호와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도록 힘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장 이하 뭇 선원들이 그래도 토오마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그냥 싸움을 주장할 때에 토오마스는 (계명에는 위반되지만), 거짓말을 하기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이전에 한번 조선에 온 때에 그 강하고, 날쌔고, 빠르던 조선 군인의 위력을 보았노라는 거짓말까지 한 것이었다.

그리고 숱한 노력을 하여 겨우 선장과 그 밖의 모든 선원들을 설복시킨 것이었다.

조선 군인에게 포격을 당한 그들은, 거기서 더욱 빨리 배를 몰아서 물결 빠른 대동강을, 평양을 향하여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서포리(西浦里)에 정박하였다. 그날 토오마스는 자기의 일생 중에 가장 감격된 한 가지의 일을 당하였다. 그것은 토오마스가 선실 안에서 이제 장차 전도할 일을 이리 저리 궁리를 할 때였다. 저편 갑판에서 무슨 지껄이는 소리가 났다. 토오마스는 문을 열고 내다 보았다. 웬 어부 모양을 한 조선 사람 몇이 갑판에서 신부들과 무슨 힐난을 하는 것이었다. 토오마스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여기서 또 다시 일을 저지르기가 싫었다. 토오마스는 뛰어나갔다. 그리고 한두 마디 통하는 조선말로써 그 어부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어부들은 토오마스를 보고, 뜻밖에도 천주교의 성호(聖號)를 하는 것이었다.

토오마스는 짐작하였다. 어부들은 천주교도였다. 대원군의 엄명 아래서도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던 천주교도들이, 이곳에 온 양국 배를 보고 신부라도 없나 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토오마스는 그들을 맞아들였다. 맞아들일 때는 토오마스의 눈에도 눈물이 보였다. 그것은 인적 끊인 심심산곡에서 사람을 만난 것과 같은 억하고도 기쁨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7 편집

거기서 그 사람들에게 몇 권의 성경을 전하고, 그들과 작별을 한 뒤에 제네럴 셔맨호는 다시 상류로 상류로 올라갔다. 그동안 배가 머무르는 곳에서마다, 토오마스는 구경군들에게 성경책 퍼치기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들이 탄 제네럴 셔맨호는 양력 팔월 스무 닷샛날 봉황진(鳳凰津)에까지 와서 닻을 주었다.

여기서 조선 역사에도 유명한 양란(洋亂)은 시작된 것이었다.

그 역사를 대략 적자면 이러하다.

중군(中軍) 이익현(李翼鉉)은 강을 경계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돌다가, 그때 이리로 오는 양국 배를 보고 알아보기 위하여 그 배로 갔다. 그랬더니, 그 배에서는 중군을 잡아 올리고 중군의 인부까지 빼앗고, 그냥 다시 닻을 떼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이리하여 그 이튿날은 황강정(黃江亭)까지 가서 거기서 또 다시 닻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선원 및 사람은 종선에 내려서 그 근처의 물의 깊이를 측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군을 양선에게 빼앗긴 조선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의 날랜 기운이 충일된 그들은, 중군을 그냥 빼앗기고도 눈감을 군인들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양선에게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인지라, 중군을 빼앗긴 그 원한까지 합하여 즉시로 양선을 향하여 총과 활을 놓기 시작하였다. 그 군인 가운데는 평양 포수까지 섞이어 있었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와 공기를 헤치는 살소리─ 이러한 가운데서 셔맨호의 선원들은 연하여 거꾸러졌다. 이제는 더 유예할 수도 없었다. 흰 기를 내어둘러도 조선 군사는 흰 기를 알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미국 배와 조선 군사 사이에는 마침내 싸움이 시작되었다.

여기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군이었다. 중군이 양선에 있는지라, 아무리 미운 양선이라도 조선 군사는 함부로 양선을 포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박춘권(朴春權)이라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양선까지 배를 저어 가서 중군도 도로 빼앗아 왔다.

이제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물의 이(利)까지 있었다. 양선이 올라올 때는 대동강에 장마가 져서 그냥 이곳까지 왔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물이 도로 찌어서 강은 몹시 얕게 되었다. 그 때문에 양선은 모래바닥에 걸리어서 이제는 뛰려야 뛸 수도 없이 되었다.

양선에서는 할 수가 없이 되매, 중군의 인부를 돌려보내고 항복을 하였다. 그러나 항복을 한 뒤에도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다시 조선군을 향하여 대포를 놓았다. 여기서 조선군의 노염은 끝없이 올랐다.

옛날 제갈공명이 조조의 함대를 불로서 사른 그 지혜를 본받아서 조선군에서는 솔가지를 많이 짙은 배를 상류에 띄워 놓고 거기다가 불을 질러서 양선을 향하여 놓아 주었다. 이리 하여 양선을 불로 살라버렸다.

이것이 그 때의 역사의 대요다.


8 편집

이렇게 조선의 군사와 제네럴 셔맨호의 사이에는 마침내 싸움이 일어난 것이었다.

정식으로 싸움이 일어나려는 동안 토오마스는 얼마나 이 싸움을 중지시키려 애썼던가? 그는 선장에게 가서 빌어 보았다. 흰 기를 둘러서 조선 군사에게 딴 뜻이 없음을 알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헛데로 돌아가고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동양 침략을 목적으로 한 제네럴 셔맨호에서는, 조선의 군대를 향하여 대포를 놓았다. 조선의 군대에서는 총과 활로써 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토오마스는 자기의 철없는 행동을 뉘우쳤다. 동양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제네럴 셔맨호와 같은 배를 타고 조선에 오기가 애당초 불찰이었다. 어서 조선으로 가서 그 공포의 나라에 하나님의 도를 퍼치고 싶은 열성은, 그로 하여금 아무 고찰도 없이 이 배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구나 같은 언어를 쓰는 인종의 배이기 때문에 또 한 조선으로 가는 제일 첫번 선편이기 때문에 이 배에 몸을 싣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커다란 오산이었다. 양선을 보면 당연히 경계를 할 조선에 양선을 타고 간다는 것은 무지라 하여도 좋은 일이었다.

청국 종선만 탔던들, 그리고 청국 종선을 어떤 조용한 해안에 대고 몰래 내리기만 하였던들 이런 일을 겪지를 않고, 다만 몇 권의 성경이라도 이 나라 사람에게 전하였을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묘하신 도를 다만 몇 가족에게라도 전하였을 것을─

하루바삐 조선으로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무 고찰도 없이 이 배에 탔던 탓에 지금 한 권의 성경도 전하지 못하고, 한 마디의 도도 전하지 못하고, 서로 적대 행동을 취하게까지 되었다.

「선장 잠시만 참아 주오. 잠시만, 잠시만 뒷일은 내가 맡을께─」

두 손을 저으며 선장에게 탄원할 때에, 선장은 귀찮은 듯이 토오마스를 밀어버렸다.

「저리 가요. 무섭거든 선실에 들어박혀 있소. 일에 방해되오.」

그리고 다시 토오마스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에 선장은 홱 포수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명령을 하였다.

제네럴 셔맨호에서 쓰는 대포알은 연하여 뭍에서 폭발되었다. 뭍에서 쏘는 활과 총은 연하여 배로 날아왔다. 사상자는 연하여 났다.

이 가운데를 혹은 선장에게로 혹은 선원들에게로, 탄환과 위험을 무릅쓰고 중지시키지 못할 이 일을 어떻게든 중지시켜 보려고 돌아다니는 토오마스는 사태가 다 틀린 것을 보고 하릴없이 제 선실로 돌아왔다.

이것을─ 이 배를 자기 혼자서 빠져서 도망을 하나? 그러나 사면으로 에워싸인 이 배에서는 도망할 길이 없었다. 그러면 이곳에서 죽나? 그러나 죽자 하니, 한 권의 성경도 한 마디의 도도 전하지 못하고 죽기는 너무도 원통하였다. 피할 수도 없고 죽자니 억울한 토오마스의 처지였다.


9 편집

배에서 놓는 대포소리, 뭍에서 쏘는 총소리, 배 돛에 와 맞는 총알과 살의 소리, 선원들의 부르짖음─ 비록 토오마스는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 지금 연출되는 광경은 눈에 선하였다. 그것은 참담한 일이었다. 동시에 도에 어그러진 일에 다름없었다.

잠시 정신없이 선실 복판 가운데 서서 지금 연출되는 참담한 광경을 머리에 그리어 보고 있던 토오마스는 털썩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두어 걸음 걸었다.

선실 벽 예수의 화상을 걸어 놓은 아래까지 가서, 토오마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예수여! 당신은 지금 당신의 눈앞에서 실행되는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리고 당신의 충복되는 제가 당신의 도를 이 나라에 퍼치어 보려 하던 일도 그 때문에 깨어져 나갑니다. 당신은 이 일을 보십니까? 보시면서도 가만 계십니까?

토오마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그 눈물로써 그는 어떻게든 이 참극을 멎게 하여 보려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와!」

문득 밖에서 무서운 함성이 났다. 쾅쾅 쾅쾅!

낭패한 듯이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선원들의 발소리가 어지러이 들리었다. 와와! 함성은 연하여 났다. 무슨 뜻하지 않은 괴변이 이 배에 생긴 것이 분명하였다.

토오마스는 고즈너기 일어섰다. 그리고 선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동시에 뜨거운 기운이 확 하니 안으로 몰리어 들어왔다.

거기 놀라서 토오마스가 뛰쳐나가 보매, 강은 불로 덮이었다. 저편 상류에서는 불배가 연하여 이 제네럴 셔맨호를 향하여 흘러 내려온다. 오십 척, 백 척─ 몇 척이라 헤일 수 없는 수없는 불배는, 이 제네럴 셔맨호를 살라버리려고 흘러 내려온다. 화광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수없는 배에서 오르는 연기는 맑은 하늘을 캄캄하게 하였다.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보다 더한 일이었다. 총알에는 면할 수가 있으나 가까운 데서 불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대포로써 조선 군대를 쏘고 있던 선원들도 이 불에는 어쩔 수가 없어서 함성을 하여 내며, 어지러이 이리 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조선군에서도 양선에게 불벼락을 띄워 내려 보낸 뒤부터는 총과 활은 중지하였다. 이제는 피할 길이 없이 죽을 사람에게 구태여 총과 활을 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때문이었다. 조선군은 멀리서 바야흐로 불타려는 제네럴 셔맨호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도망하여 나오는 사람만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제네럴 셔맨호에도 불이 당기었다.

10 편집

확확 다는 뜨거운 공기에 잠시 얼굴을 쏘이고 있던 토오마스는 최후의 결심을 하였다. 이제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 살아날 가망이 없을 진대 하다못해 두 세 권의 성경이라도 이 나라에 남겨 놓고 죽고 싶었다.

도를 전한다 하는 중대한 사업은 비록 못한다 할지라도, 그 도를 기록한 책 몇 권이라도 뿌리고 싶었다. 그 책을 뿌리지도 못하고 불에 살라버리는 것은 너무도 애석한 일이다. 토오마스는 황급히 자기의 선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성경을 가득히 담은 상자를 끌고 도로 갑판으로 나왔다. 상자의 뚜껑은 벗기어 졌다. 그리고 그 첫 권을 손에 들 때에 토오마스는 공포와 비통 가운데서도 일종의 기꺼움을 느꼈다.

한 권의 성경은 힘있게 배에서 언덕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 뒤에 또 한 권 또 한 권, 성경은 연하여 언덕을 향하여 날아갔다. 벌써 이 배에까지 불이 당기어서 불길은 때때로 바람결에 토오마스가 있는 곳까지 훅훅 뻗쳤다. 언덕에서는 흰옷의 무리들이 왁자하니 지껄이고 있다.

그 가운데서.

「받으시오.」

「자, 받으시오.」

힘을 다하여 고함치며 토오마스는 연하여 성경을 그 무리들에게 던졌다. 토오마스는 불길 때문에 세 번을 자리를 옮겼다. 배 뒤쪽부터 타 오는 불은 토오마스의 오른편 옷을 너덜너덜 태워버렸다. 오른편 손 오른편 뺨, 오른편 머리칼은 죄 불 때문에 상하였다. 그러나 토오마스는 불을 피하여 일변 자리를 옮기면서 연하여 성경을 언덕으로 던졌다. 다만 한 권이라도 더 많이 이 흰옷의 나라에 더 퍼치고 싶은 그의 정성 때문이었다.

상자는 차차 차차 깊어갔다. 권수는 차차 줄었다. 불길을 넘어서 책은 펄럭거리며 뒤를 이어서 흰옷의 무리의 사이에 떨어졌다.

그것은 과연 처참한 광경이었다. 타오르는 배 가운데서 불길에 싸이어서 한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연하여 무슨 책을 언덕을 향하여 던졌다.

「받으시오.」

하는 소리는 연하여 났다. 언덕에 선 무리들은 그 괴상한 인물을 향하여,

「양고자 죽여라!」

하고 부르짖으며 돌을 던졌다.

던지는 성경과 던지는 돌─ 이러한 가운데서 사정없는 불은 점점 더 타올랐다. 차차 불에 쫓긴 토오마스는 배 맨 뒤에까지 갔다. 역시 성경의 상자는 끌고서─ 그리고 연하여 언덕을 향하여 책을 던졌다.

제네럴 셔맨호의 갑판에 불이 다 당기었다. 이제는 사람 하나 섰을 자리도 없게 되었다.

그때는 토오마스는 온몸이 불로 되어서 형지가 없었으며, 그의 몸을 장식하던 옷은 모두 타서 벗어지고 떨어진 뒤였다. 머리터럭도 모두 타서 벗어졌다.

성경도 다 뿌리었다. 이제는 성경도 한 권밖에는 남지 않았다. 물에 혹은 언덕에 많던 성경도 다 달아났다.


11 편집

다만 한 권 남은 성경을 들고 맹렬히 타는 불 가운데 일어설 때에, 토오마스의 마음에는 비록 죽음에 직면하였으나, 일종의 승리적 자랑과 기쁨을 느꼈다.

「아아! 의무의 절반을 치렀다.」

그는 한 권 남은 성경을 오른손에 단단히 잡은 뒤에, 제네럴 셔맨호의 갑판에서 물을 향하여 뛰어내렸다. 그리고 익은 솜씨로 헤엄쳐서 언덕으로 향하여 갔다.

얼굴이 모두 타지고 터져서 마치 괴물과 같이 된 토오마스가 언덕 위에 기어오를 때에 언덕에 있던 흰옷의 무리는 이 괴물에 놀라서,

「에그머니!」

소리를 치며 모두 피하였다.

「양고자다!」

「양고자가 기어올랐다!」

뭇 입은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에 응하여 한 사람의 군인이 칼을 든 채로 이리로 달려왔다.

뛰는 무리, 달려오는 병정─ 이런 것을 보면서 토오마스는 천천히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는) 관리 쪽으로 발을 옮기었다. 온몸이 시꺼멓게 타져서 마치 괴물과 같은 토오마스는, 팔을 힘껏 앞으로 내어 밀고, 두려움 없이 병정에게로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겼다. 그의 높이 들리운 손에는 마지막 한 권의 성경이 들리어 있었다.

달려오던 병정은 토오마스의 앞에 멈칫 섰다. 아무 무기도 없고 다만 책 한 권을 높이 들고 오는 토오마스를 향하여 병정은 칼을 들었다.

칼이 바야흐로 토오마스의 어깨로 향하여 내려오려 할 때였다. 토오마스는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눈으로 병정을 쳐다보며, 두 손으로 성경을 받들어서 병정의 앞에 내어밀었다.

병정은 토오마스를 내려다보았다. 토오마스는 병정을 쳐다보았다.

내려다보는 눈과 쳐다보는 눈─ 두 눈은 딱 마주쳤다.

「자, 이 책을 받으시오.」

토오마스의 말이었다.

칼을 높이 들고 바야흐로 토오마스를 찍으려던 병정은, 잠시 더 토오마스를 내려다보다가 왼손을 내밀어 그 책을 받았다.

병정에게 책을 전한 뒤에 토오마스는 머리를 숙이었다. 그리고 고즈너기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아버님이시여! 마지막 책까지 전하였읍니다. 이제는 더 전할 책도 없읍니다. 그러면 이 혼이 이제 아버님의 나라로 가겠사오니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바야흐로 자기의 목을 향하여 내려오려는 칼 아래서 토오마스는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병정을 쳐다보았다. 병정은 칼은 높이 들었으나, 이 괴물의 괴상한 행동에 그만 멍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 토오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어서 죽여 주시오.」

멍하니 서 있던 병정은 토오마스의 이 말에 펄떡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의 손에 높이 들리었던 칼은 바람을 날리며 내려왔다.

이리하여 토오마스는, 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12 편집

일환아!

토오마스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꼬리를 두어 마디 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때에 토오마스는 죽었다. 몇백 권의 성경을 뿌렸을 뿐, 한 마디의 말도 전해 보지 못하고 칼 아래 원혼이 되었다.

그러나 일환아!

이렇듯 귀한 희생의 뒤에 어찌 좋은 열매가 안 맺겠느냐?

그때에 아무 철도 없이 양선을 구경하러 강 언덕에 갔다가, 토오마스의 던지는 책을 우연히 주워 온 사람들은 그 책을 들치어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오묘하고도 귀한 말을 많이 발견하였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해라.」

「가난한 이는 복이 있느니라.」

「사랑이 제일이니라.」

「누가 너의 웃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벗어 주어라.」

「이 세상에 죄 없는 자는 없느니라. 다만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느니라.」

아아! 이것은 과연 귀하고 또 귀한 말씀이었다. 더구나 이런 귀한 말씀이 적힌 책을 이 민족에게 전하기 위하여 목숨조차 내어버린 괴상한 양인을 생각할 때에 이 말씀의 귀함은 더욱 그들을 감동케 하였다.

그때에 토오마스를 죽인 그 병정도 죽음에 임하여서까지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책 한권만 받아 달라고 탄원하던 그 양고자를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서 그 책을 펴 본 결과, 그 속에 기록된 크고 큰 진리를 보고 번연히 전의 잘못을 뉘우쳤다.

토오마스는 죽었다. 한 마디의 도도 전하여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입으로는 한 마디의 도도 전하지 못하였다 하나, 그가 던진 책에서 퍼져나간 예수의 도는 은연중 차차 넓게 전파되었다. 평양 및 그 남부 일대에는 비록 선교사는 없었다 하나, 예수교가 차차 세력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나라의 문호가 열리고, 예수교를 내놓고 전파할 때에, 온 조선 안에서 평양이 가장 예수교 열이 강하였으며, 예수교 중심지로 된 것은 평양에는 미리부터 예수교가 암암리에 전파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조선의 예수교인 백만─, 그 커다란 세력의 첫씨가 그때에 벌써 뿌리어진 것이다. 그때 토오마스가 마지막의 책 한 권을 자기를 죽이려는 병정에게 전하고 칼 아래 두 조각이 될 때에, 어느 누가 가까운 장래에 이렇듯 번성할 예수교를 예측이나 하였겠느냐? 어느 촌락, 어느 산골을 무론하고 그곳의 가장 높고 큰 집은 예배당이요, 주일마다 거기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의 소리가 높이 울리니, 이것을 생각할 때는, 토오마스의 죽음은 결코 헛 죽음이 아니었다.

순교자─

아아! 이것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말이냐? 자기와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자,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은 순교자─

이 이름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자랑의 하나다.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