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네/석가여래

옥환아!

〈해적의 딸〉의 이야기를 쓰다가 보니까 어느덧 사월 파일이 이르렀다.

사월 파일─

대동강의 불놀이로서 알려져 있는 이 사월 파일이 무슨 날인지 너는 아느냐? 나이 어린 아이들은 대동강에 흐느적거리는 굉장한 불놀이를 구경하려고, 어서 사월 파일이 되기를 기다리곤 하지? 한가한 수상선의 노젓는 소리와 오르내리는 매생이의 수심가로써 흥그럽고 조용하던 대동강이 이날은 온통 불천지가 되며, 좌우 언덕은 사람의 범벅으로 묻히어서, 거기는 굉장한 〈불바다〉를 이루는 것을 너는 보았지?

그러면 이 날은 무슨 날이길래 이렇듯 만인이 축하를 하며 만인이 기뻐하는지 너는 아느냐? 이 날은 다른 날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오백 년 전에 인도 땅 어떤 곳에서 한 훌륭한 인물이 탄생한 날이다.

실달태자(悉達太子)─ 인도의 가비라(迦毘羅)라는 나라의 왕자요,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는 두 큰 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개조 되는 석가여래가 탄생한 날이다.

우리가 시골서 길을 다닐 때에, 거기 아름다운 시내가 있고 아름다운 산이 있으면, 울창한 소나무나 혹은 느티나무를 넘어서 이끼로 덮인 드높은 지붕이 바라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솔밭 사이로 길을 더듬어서 아까 보이던 그 지붕을 찾아가면, 거기는 단청으로 장식한 커다란 집이 맑은 공기 가운데 쑥 솟아오를 것이다. 그 안을 찾아 들어가면 회색 법의를 입은 늙은 중이 부처의 앞에 합장하고 서서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경을 외고 있을 것이다.

어느 산 어느 봉─ 아름다운 샘이 흐르고 아름다운 솔밭이 있고 아름다운 산이 있는 데는 어느 곳이고 절간이 없는 곳이 없다. 그리고 거기서는 늙은 중이 정성을 다하여 염불을 외며, 이 무지하고 몽매한 세상을 깨우칠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

한 개의 사람의 힘─ 그것은 지극히 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약한 힘도 그것을 자기를 위하여 쓰지를 않고 세상을 위하여 바치면, 이전에는 약하던 그 힘도 문득 강하게 되어서 천만 사람으로도 능히 꺾을 수 없게 되며 천만 년 뒤에도 사라지지 않게 된다.

지금 세계에 넓고 또 넓게 퍼져 있는 불교의 세력도 그 근본을 자면 가비라국 실달 태자에게서 나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한 사람의 힘을 약하다고 능히 비웃을 수가 있겠느냐?

옥환아!

아버지는 이 사월 파일을 기회로 너에게 실달태자의 일대기를 말하여 주마. 몸은 그 나라의 태자로 태어나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모두 차 던지고 몸소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쓰라림을 맛보아서, 그 가운데서 인생의 광명을 얻어낸 불교의 개조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이야기하여 주마.


2 편집

지금부터 이천 오백 십 년 전─

가비라라는 나라에 정반왕(淨飯王)이 등극하였다. 천비성(天臂城)의 어떤 왕족의 따님 마야(摩耶)라는 이가 정반왕의 왕비였다.

가비라국은 가멸은 나라였다. 옥야 천리의 좋은 강토와 순박한 백성과 풍부한 산물로서 이름 높은 나라였다. 그 나라에 군림한 정반왕은 또한 어질고 착하고, 총명하고 슬기로운 분이었다.

가면은 나라에 어진 임금─ 이리하여 거기는 아무 부족도 불만도 없을 듯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세상이란 어느 모퉁이에든 근심이 없는 곳은 없으니, 이 가멸은 나라의 어진 임금인 정반왕에게도 역시 한 가지의 근심은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대통을 이을 아드님이 없는 것이었다.

서른 살까지는 후사가 없는 것이 그다지 근심도 안되었다. 그러나 삼십 줄이 넘고 사십 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늘 그것이 마음에 걸리어서, 정반왕의 얼굴에는 늘 수심의 그림자가 있었다. 부강한 나라에서 부강한 강토를 다스리는 왕이로되, 후사가 없는 때문에 왕과 왕비의 얼굴은 늘 적적하였다.

마흔도 넘어섰다. 마흔 다섯도 넘어섰다. 이리하여 정반왕은 이제는 더 후사를 기다릴 용기까지 잃게 되었다.

이제는 후사를 볼 가망도 없겠다고 왕과 왕비가 거의 단념을 한 때였다. 이때에야 문득 왕비의 몸에 태기가 보였다. 왕비의 몸에 생긴 이상한 징조가 분명히 태기인 줄 안 뒤부터는, 왕과 왕비의 기쁨은 여간 아니었다. 거기 따라서 또한 근심은 이 태기가 사내겠느냐, 계집애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늙은이인 이 왕과 왕비는 매일 이것이 아들이 되게 해 줍시사고 신령께 축원을 드리고 하였다.

왕비의 뱃속의 아기는 나날이 자랐다. 왕과 왕비의 문무백관이며, 가비라 나라 온 백성의 축수를 받으면서 뱃속의 아기는 더욱더욱 자랐다.

만삭이 이르렀다.

이리하여 한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뛰쳐나오게 다 되어서, 왕비는 어떤 날 몸을 풀기 위하여 왕비의 친정 되는 비성으로 떠났다.

사월 초승, 온갖 꽃은 만발하고 가지마다 새들이 꽃의 아름다움을 찬송하고 있는 좋은 절기에, 마야 왕비는 시녀 몇 사람을 데리고 연에 몸을 싣고 천비성으로 길을 가고 있었다. 왕비의 일행이 남비니(藍毘尼)라는 동산 앞을 지날 때였다. 왕비는 거기서 문득 갑자기 치밀어 올라오는 복통을 느꼈다. 왕비는 황급히 연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녀에게 부축을 받아 연에서 내려서 동산으로 들어갔다. 어떤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 가서 몸을 잠시 쉬려다가 거기서 문득 산후가 보였다.

만발한 꽃, 그윽한 꽃 향내, 거기서 노래하며 돌아다니는 새들─ 이러한 가운데서 마야 왕비의 몸에서는 한 개의 새로운 생명이 튀어져 나왔다.

때는 서기 전 오백 육십 육년, 음력 사월 여드렛날 오정─


3 편집

정반왕의 후사가 거의 끊어질이만큼 되었다가 탄생한 태자라, 귀하고 사랑스럽기가 끝이 없었다. 그래서 불면 날까 만지면 꺼질까, 보옥과 같이 귀히 길렀다. 그리고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선비들을 불러 들여서 태자의 교육을 맡기었다.

태자는 매우 영리하였다. 옛 말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하는 것은 이 태자를 가리킴인 듯하였다. 이름 높은 학자들이 가르치는 학문을 모두 깨쳐 들을 뿐 아니라, 스승이 말하기 전에 미리 알아맞히는 일도 많았다.

태자를 가르치던 어떤 학자는 가르치던 막대를 내어던지며,

「태자는 가르칠 분이 아니요, 스스로 알 분이외다.」

하고 탄성을 낼 만큼 태자는 지극히 영리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그 끔찍이도 총명한 머리는 태자로 하여금 또한 번민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다.

궁중─ 아무 부자유가 없고 끝없이 자유롭고 끝없이 호화로운 궁중에서, 또한 태자의 한 마디의 명령이면 아무런 일이 실행되는 궁중에서, 누구 부럽지 않게 자라는 태자였지만, 태자의 나이가 차차 들어감에 따라서 그의 마음에는 이상한 번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사람이란 무엇이냐?

─세계─ 우주란 무엇이냐?

─사람은 왜 사느냐?

─사는 목적은 무엇이냐?

어린아이에게는 당치도 않은 이런 생각이 흔히 일어나서, 어린 태자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앞에서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춤추는 광대며, 풍악을 잡는 악수며, 자기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양거리는 뭇 소인을 귀찮은 듯이 바라보다가, 태자는 획 돌아서서 혼자 외딴 숲을 찾아가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리고는 그 숲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서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사람이란 무얼 하러 사느냐?

─돌이며 바위도 살았느냐?

─나는 무엇이며, 내 앞에서 내 환심을 사고자 온갖 아양을 다 부리는 광대들은 무엇이냐? 둘 다 같은 사람일진대, 어째서 나는 그것을 구경하며 그는 내 앞에서 나에게 구경을 시키느냐?

─해가 떴다가 진다. 졌다가 다시 뜬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리고 왜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느냐?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터질만큼 작은 벌레들도, 먹을 것을 찾아서 덤벼든다. 그것들이 그렇게까지 해서 먹고 살면 무엇하나?

어른도 그저 넘기기 쉬운 이런 소소한 문제에서 인생이라 하는 것을 내다보며, 어린 태자는 그 번민 때문에 조그만 머리를 가슴에 묻고, 고민하며 몸을 떨곤 했다. 이리하여 태자의 유년 시기가 지나갔다.


4 편집

태자가 열 두 살 나는 해 봄이었다.

그 봄 정반왕은 태자를 데리고 춘경제를 보러 나갔다.

화창한 봄날의 햇볕에서 농부들은 노래를 부르며 밭을 갈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농부가 소를 몰고 앞으로 감에 따라서, 소에게 메운 보섭은 흙을 좌우편으로 갈라서 헤치었다.

이때에 새로 들추어 놓은 흙 가운데 한 마리의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태자의 눈에 띄었다. 차디찬 땅 속에서 긴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봄 햇볕에 나온 벌레는, 한참은 약간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봄의 햇볕이 차차 벌레의 속속까지 비침을 따라서, 벌레의 움직임은 점점 활발하여 갔다.

이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태자가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 어디선지 한 마리의 새가 날아 내려와서 그 벌레를 집어삼키고 도로 날아갔다.

태자는 깜짝 놀랐다.

생명 있는 물건을 생명 있는 물건이 먹었다.

겁에 뜨인 눈을 태자는 부왕에게로 향하였다. 그리고 물었다.

「아버님, 새가 벌레를 먹었읍니다.」

부왕은 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새는 벌레를 먹고 사느니라.」

「생명 있는 물건을 생명 있는 물건이 먹었읍니다. 새가 벌레를......」

그러나 부왕에게는 그것은 너무도 평범한 일이었다. 새가 벌레를 먹었다. 새에게 먹히기 전까지는 벌레에게도 생명이 있었다. 그러면 그 생명은 지금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로 갔을까? 어린 마음에 일어난 이런 의문에 대하여는 부왕은 뜻도 못하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농부의 소를 가리켰다.

「저게 무엇인지 아느냐?」

「소올시다.」

「소에게는 생명이 있지?」

「예.」

「네 오늘 아침의 밥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고기찜이올시다.」

「무슨 고기냐?」

여기서 태자는 막혔다. 그는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는 것이었다. 부왕이 미소하며 설명하여 주었다.

「그게 쇠고기로다. 저기서 밭 갈고 있는 그 소의 고기로다. 소를 죽여서 가죽을 벗기면 그 속에 있는 것이 아까 그런 고기로다. 네가 가장 즐겨하는...... 자, 이봐라! 산 목숨을 가진 물건은 반드시 산 목숨을 가진 물건을 잡아먹고 사느니라, 네 식찬에 하루를 고기를 빼면 너는 그날은 밥을 안 먹지 않느냐?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것이나, 사람이 소를 잡아먹는 것이나 다 일반으로, 그런데 마음을 두고 번민할 필요는 없는 일이로다.

부왕은 태자를 위하여 찬찬히 깨쳐 주었다. 그러나 이 부왕의 깨침이 태자의 마음에 들어박히기 전에, 태자는 오히려 부왕의 설명에 놀랐다. 자기가 가장 즐겨하는 〈고기〉는 저 소, 생명 있는 물건을 죽여서 끄집어낸 것이라는 부왕의 설명은, 태자를 끝없이 놀라게 하였다.


5 편집

지금도 저 앞에서는 농부의 채찍을 받으면서 소는 뒷다리를 버티고 땅을 긁으며 나아간다. 그 산 목숨을 가진 것이 이 후 언제든 사람의 손에 죽어서 그 고기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다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오늘 아침에 먹은 그것이 역시 소의 고기라는 것을 알 때에 태자는 구역까지 나는 듯하였다.

땅을 긁는 소의 앞다리가 지금 자기의 배를 긁는 듯하였다.

차차 차차 상기가 되어 얼굴이 벌겋게 되던 태자는, 문득 아무 말도 없이 부왕의 앞을 떠났다. 그리고 밭두렁길을 더듬어서 저편 수풀로 찾아 들어 갔다. 어떠한 무성한 나무 아래 곤한 듯이 몸을 내던질 때는, 어린 태자의 얼굴에는 고민의 눈물 자취까지 있었다.

─산 목숨이 산 목숨을 잡아먹는다.

그것은 무지한 짐승의 일이라도 용서치 못하겠거늘,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역시 목숨을 잡아먹는다 하는 것은 단정코 용허치 못할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도 저기서 소는 채찍을 아프다 하지 않고, 햇볕을 뜨겁다 하지 않고, 노력을 쓰다 하지 않고, 보섭을 무겁다 하지 않고,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느냐? 자기를 위하여 일하여 주는 그 짐승에게 더 좋은 대접은 못할망정, 이 후에 그것을 죽여서 그 고기를 자기네가 먹는다 하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다.

─사람의 세상이란 이런 것이냐?

이 후에 자기를 잡아먹을 줄은 모르고 소는 그냥 숨을 씨근거리며 밭을 갈고 있다. 이런 몰인정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 또 이런 인정 문제는 둘째로 하고라도, 목숨 가진 것을 죽인다 하는 무섭고도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한 개의 생명이 있다가 홀연히 없어진다. 이렇게 쉽사리 없어질진대 있었던 보람은 어디 있으며, 있을 필요는 어디 있는가? 꿈과 같이 생겼다가 꿈과 같이 없어지는 것─ 이것이 이 세상 만물의 형태였던가?

태자는 날이 저물도록 거기 앉아서 이런 문제로 번민하고 있었다. 어린 머리에 과한 이런 번뇌로 태자의 몸은 떨리기까지 하였다.

태자가 어딜 갔는지 거처를 잃어버린 부왕은 이곳 저곳으로 찾아서 헤매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어떤 수풀, 어떤 무성한 나무 아래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정신없이 앉아 있는 태자를 발견하였다.

태자의 나날이 우울하여 가는 모양─ 더구나 오늘 본 변변치 않은 일 때문에 이렇듯 번민하는 양을 보고 부왕은 매우 근심하였다.

태자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번 일로서 왕은 태자의 마음을 돌이키게 해야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어떻게 하여서는 태자의 마음을 돌이켜서 좀더 활발한 아이로 만들지 않으면 태자의 건강에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장래에 이 나라를 지배할 태자의 건강이 나쁘게 되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에까지 흔들림이 생기리라는 원려 아래서, 왕은 어떻게든 활발한 태자를 만들어 보려고 힘썼다.


6 편집

왕은 먼저 태자를 위하여 사시의 궁전을 지어 주었다. 온갖 기화요초며 안개와 공작새와, 앵무로 장식한 봄의 궁과, 푸르른 그늘이며 폭포수며 연못이며 분수로써 장식한 여름 궁전, 단풍과 낚시질 못이며 바위로 장식한 가을 궁전, 뜨뜻한 설계 아래 고금의 명화며 진주 보석으로 기둥을 장식한 겨울 궁전─ 이런 네 가지의 궁전을 지어 주고, 그 가운데는 아름다운 처녀들이 밤낮을 무론하고 태자께 시중들며, 음악으로 태자의 귀를 즐겁게 하며, 만반 진찬으로 태자의 상을 꾸미고─ 이런 선경에 삶으로써 세상의 근심을 잊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마음은 이런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뿐더러, 이런 환락을 보면 볼수록, 그 뒤에 숨어 있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생각하고 더욱 우울하여지곤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앞에서 실행되는 온갖 소위 환락을 보면서, 그 가운데 보이는 사람의 천박한 방면을 발견하고, 더욱더 이 인간 세계를 싫어하였다.

─아아 천박한 모양이다. 사람이란 이렇듯 천박한 물건이냐?

짐승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다. 한 개의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그 앞에서 땀을 흘리며 노력한다. 듣건대 세상에는 그날 저녁 먹을 음식조차 없어서 굶는 사람이 많다는데, 여기서는 자기 하나를 위하여 커다란 궁전이 네 개나 서 있다. 사람의 세상이란 이렇듯 모순과 착오로 차 있느냐?

그리고 이런 모든 꼴을 눈앞에 보지 않기 위하여 태자의 마음은 연하여 무인 심산으로 향하였다. 이 천박스러운 사람의 무리의 발자취가 맞지 않는 깊은 산골에 숨어서 첫째로는 사람의 꼴을 안보고, 둘째로는 이 천박스러운 사람의 세상을 어떻게든 좀 좋은 세상으로 고칠 방책을 연구하여 보고 싶은 생각이 나날이 일어났다.

몸은 한 나라의 태자로 태어나서 위로는 왕과 뭇 대신이며, 아래로는 백만의 시민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사람의 흠앙과 신망을 한몸에 받고, 마음에만 있으면 어떤 호강이든 어떤 환락이 취할 수 있겠지만, 인생의 커다란 암흑면을 바라본 태자는 거기 대한 심뇌 때문에 잠시도 얼굴에 화기가 나타나는 때가 없었다.

왕의 근심은 여간 아니었다. 태자의 이 우울증을 고쳐 주기 위하여는, 왕은 아무런 일이라도 희생할 만큼 그 근심은 컸다. 왕은 춘하추동의 궁전에서까지 실패를 한 뒤에는 마지막 남은 한 가지의 방책을 썼다.

태자에게 비를 맞아들였다. 어떤 다른 나라 왕의 따님으로 나라를 기울일 만한 자태를 가지고, 재간과 학문 또한 당대에 유가 없는 수타라(輸陀羅)라는 공주를 맞아서 태자의 비로 책하였다.

그러나 세상 만사를 한 개의 꿈으로 보는 태자에게는, 비의 재색도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부왕의 명으로 태자비를 맞기는 하였지만, 한두 번 돌아본 뒤에는 역시 내전에는 발길도 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혼자서 생각에 빠지곤 하였다.


7 편집

어떤 날, 태자는 시종 몇 사람을 데리고 성을 한 번 순회하였다.

태자의 일행은 동문에 이르렀다.

그때 태자의 눈에는 한 기괴한 물건이 띄었다.

사람의 모양을 한 물건이었다. 얼굴은 지독히도 검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마치 산의 골짜기 같이 많은 주름이 있었다. 비츨비츨 몸의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이편으로 걸어오는 그것을 처음에는 사람으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허리가 앞으로 기역자로 꺾어지고, 얼른 보면 네 발로 기는 듯한 그 물건을 처음에는 짐승으로 보고 그저 넘기려 하였지만 좀 가까이서 보매 그것은 결코 네 발로 기는 것이 아니고 두 발로 걷는 것이며, 앞으로 쓰러지려는 몸집은 손의 막대로 버티어서 겨우 넘어지기를 면한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이면서도 짐승과 흡사한 그 괴물─ 걸음걸이마다 힘이 부족하여 후들후들 떠는 그 괴물을 태자는 두려움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종을 가까이 불렀다.

「저─ 저게 뭐냐?」

시중에게 이렇게 묻는 태자의 목소리는 저으기 떨리었다.

「예? 저것 말씀이오니까? 저건 늙은이올시다.」

늙은이? 뜻을 똑똑히 모르는 태자는 두려움에 얼뜬 눈을 시종에게 향하였다.

「늙은이가 뭐냐?」

「사람이 나이 많이 먹으면 늙습니다. 다시 말씀하자면, 오래 살자면 늙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늙으면 저 모양이 됩니다.」

「오래 살면 다 늙느냐?

「예.」

「늙으면 다 저모양이 되느냐?」

「예.」

「나도 아버님도, 너희들도, 늙으면 다 저 꼴이 되겠느냐?」

「예.」

태자는 몸을 떨었다. 지금 이렇듯 든든하고 명랑한 몸이 오래 살기 때문에 늙고, 늙기 때문에 저 꼴로 변한다고는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늙은이를 보고, 또한 시종들의 설명을 들으니 믿지 않으려 하여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인생의 장래에는 〈늙음〉이라는 것이 막혀 있고, 늙기만 하면 다 저 꼴을 하여야 하나? 그것을 피할 도리는 없나? 만약 그것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할진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의 욕심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모두 꿈이로다! 사람의 일생은─ 사람의 세상은 모두 꿈이로다. 이 한나절 꿈과 ■은 인생을 위하여 사람 사람이 그렇듯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꿈이로다. 꿈이로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가 바보에 지나지 못한다.

「자, 가시지 않겠습니까?」

시종이 이렇게 채근할 때까지, 태자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종의 채근을 받고도 태자는 여전히 정신 나간 사람같이 서 있었다.

늙은이─ 꼬부라진 몸을 겨우 지팡이로 지탱한 가련한 인생은, 이리 비츨 저리 비출 하면서 차차 저편 길모퉁이로 사라졌다. 태자는 정신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8 편집

태자의 일행은 남문으로 돌아왔다.

이 날은, 태자에게는 지극히 나쁜 날이었다. 남문 성 아래는 웬 초라한 사람 하나가 넘어져서 몸을 이리 비꼬고 저리 비꼬고 신음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시종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매, 시종은 병난 사람임을 알게 하였다.

「병이란?」

「몸에 고장이 생겨서 아프게 되는 것이올시다.」

「고장? 고장이 대체 어떻게 생기느냐? 말하자면 제가 실수해서 다치거나 하는 게냐?」

「아니올시다. 병이라고─ 그─ 몇 달 전에 전하께서도 감기를 앓지 않으셨읍니까? 그것도 일종의 병이옵니다. 이 사람은 그보다 중하고 아픈 병에 걸렸읍니다.」

「그러면 병이란 제가 실수한 일이 없어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로구나?」

「예.」

「그러면 왜 제 집으로 가서 앓지 않고 여기서 앓느냐?」

「그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이올시다.」

「집이 없어? 밥은 어디서 먹고, 잠은 어디서 자고?」

「밥은 이집 저집서 빌어 먹고, 잠은 이런 곳에서 자옵니다.」

「집 없는 사람도 있느냐? 그리고 그만큼 아프거든 왜 약이라도 먹지 않느냐? 그때 보니깐 약을 먹으면 곧 낫더구나.」

「약 살 돈도 없는 사람이올시다.」

태자는 놀랐다. 병인에게 향했던 눈을 시종에게 돌릴 때는, 그의 눈에는 놀란 빛이 역연히 드러나 있었다.

「약도 돈을 받고야 주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약─ 약이란 병을 고치기 위해서 만든 것이지? 그것을 돈이 없다고 주지를 않느냐? 사람이 이렇게 아파하는데도 약을 안주느냐?」

「의원도 돈을 받아야 밥을 먹습니다.」

돈? 몸소 돈을 갖지 못한 태자는 시종에게 명하여 돈을 병인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이 사람의 세상이냐? 사람이 오래 살자면 반드시 늙는다. 사람의 값이 없는 늙은이─ 이것이 인생의 앞에 딱 막아선 커다란 그림자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담벽이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세상이란 너무도 가엾은데, 또한 중도에 〈병〉이라는 괴물까지 매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병이란 것은 언제 뛰쳐나올지 짐작도 안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일단 뛰쳐나오기만 하면 사람의 몸을 여지없이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손을 들면 하인이 달려오고, 한 마디의 말이면 어떤 일이 실행되는 호화롭고 아무 부자유가 없는 궁전에서 살아가는 자기에게도 수없는 근심과 번민이 있거든, 이 늙음과 병과 아픔의 세상인, 보통 인민들의 살림은 얼마나 고달프고 쓰라리랴!

아아─ 아아! 사람의 세상이란 왜 이다지도 아프고 쓰린 것이냐? 사람의 일생이란 왜 이다지도 가엾고 초라하냐?

그 자리에서 발을 뗄 때는 태자의 눈에서는 쓰린 눈물이 한없이 한없이 흘렀다.


9 편집

동문과 남문에서 본 참담한 광경 때문에 우겨지는 듯한 가슴을 품고, 태자의 일행이 서문으로 온 때에, 서문에서는 한층 더 참담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두군의 노래도 구슬프게 한 패거리의 장사가 나가는 것이었다.

궁중 깊이서 자란 태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시종에게 물어서 겨우 〈죽은 사람을 땅에 묻으려고 가지고 나가는 것〉임을 알았다.

「누구한테 죽은 사람이냐?」

「글쎄올시다, 아마 병나서 죽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늙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이것도 또한 태자에게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병이나 늙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죽게까지 한다는 것은 태자는 아직 알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죽는 수도 있느냐?」

「늙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병 때문에도 죽느냐?」

「병이 과하면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오래 살면 아뭏든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겠구나? 병에 걸려서 죽든, 그렇지 않으면 늙어서 죽든 다 한 번씩은 죽겠구나?」

「그렇습니다.」

「안죽는 사람은 없느냐?」

「다 죽습니다. 아랫사람이건 웃사람이건 한 때는 다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최후는 죽음이냐?」

「네 그렇습니다.」

「아아! 그러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병이 있고─ 늙음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 죽는다면 사람의 일생이란 무엇 때문에 생겼느냐?」

「그래도 어떤 사람은, 오히려 죽음을 바라는 일도 있답니다.」

「무얼!」

태자의 눈은 번쩍 크게 띄었다. 죽음을 바라는 사람? 그런 기괴한 일이 어디 있을까? 만사의 끝인 죽음을 바라는 자는 어떤 자일까?

「죽음을 누가 바라느냐?」

「죽으면 쓰고 아픈 세상을 잊을 수가 있읍니다.」

이 말은 태자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벼락이었다. 사람의 세상의 쓰고 아픔은 짐작하는 바다. 그러나 죽음이란 만사의 끝이 아니냐? 따라서 가장 무서운 일이 아니냐? 이 명랑하고, 아름답던 육체가 한 고깃덩이로 변하는 것이 아니냐? 조그만 벌레라도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느냐? 그렇거늘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라는 자가 있다는 것은 웬일이냐?

그러면 사람의 세상이란 〈죽음〉보다도 더 쓰고 괴로운 것이냐? 사람은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는다 하는 이 사실조차 태자에게는 그렇듯 두렵거늘, 그 죽음을 오히려 바랄이만큼 세상은 쓰고 아픈 것이냐?

병─ 늙음─ 죽음─ 사람의 일생이 단지 이런 과정을 밟는데 지나지 못한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그 명색에 대하여도 부끄럽지 않으냐? 아아! 사람은 과연 무엇이냐?

눈을 고요히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태자는 맹연히 그곳에서 발을 떼었다.


10 편집

북문에서 태자는 한 행자(行者)를 보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고 태자가 물을 때에 시종은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행자올시다.」

「무어?」

「행자? 행자가 무엇이냐?」

「출가한 행자─ 세상의 모든 시끄러운 일을 잊고, 도를 닦고 있는 사람을 행자라 하옵니다. 온갖 상상도 못할 괴로움을 몸소 맛보며, 그 고생 가운데서 인간의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려 하는 사람을 행자라 하옵니다.」

태자는 눈을 들어서 다시 행자를 바라보았다. 지팡이를 끌며 성문 밖 광야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는 행자의 모양은 어디인지 모르지만, 거룩하고도 위엄 있어 보였다. 그리고 바람에 휘날리는 옷 속에 감추어 있는 그의 넓은 등판에는, 세상의 많고 많은 번뇌를 다 져다가 버리려는 지게가 있는 듯이 보였다.

태자는 취한 듯이 행자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는 동안, 태자의 마음에는 행자의 모양이 더욱더욱 거룩히 보였다. 두 팔을 천천히 저으며 걸어가는 행자의 모양은 이 세상의 온갖 잡스런 문제를 초월한 성인과 같았다. 머리에는 후광이 도는 듯하였다.

한참을 행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태자는 드디어 커다란 결심을 하였다.

이 쓰고 아픈 세상을─ 빠져나가자. 그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자. 도를 닦아서 인간 세계의 묘한 이치의 만분의 일이라도 체득하자. 사람이 사람인 이상,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 이상이 쓰고 아픈 것만이 사람의 일생을 지배할 운명은 아니겠지. 이 고민에서 벗어날 무슨 도리가 있겠지. 산으로 가자! 고행을 하자. 온갖 영화와 사치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거기서 커다란 진리를 얻자. 이 향할 곳을 몰라서 갈팡질팡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인생의 커다란 진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어서 얻어서 이 괴로움에 헤매는 무리들을 구원하자!

태자의 눈은 차차 빛나기 시작하였다.

행자의 거룩한 뒷모양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태자의 얼굴에는 화기조차 나타났다. 수 년 내로 늘 우울한 빛만 흐르고 있던 태자의 얼굴에 희망과 환희의 광채가 저기 떠돌았다.

「자, 이젠 환궁하자.」

종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는 태자의 음성은 근래에 볼 수 없는 쾌활한 음성이었다.

결심과 희망─ 이런 일로 태자는 마음이 저기 흥분되어 환궁하였다. 그러나 궁에서는 또한 시끄러운 일이 태자의 환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속세에서도 가장 속된 일─ 한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뛰쳐나왔다고, 궁중에서는 봉축의 만세소리가 요란하였다.

태자비가 몸을 푼 것이었다. 즉 왕손이 탄생을 한 것이었다. 성중은 만세소리로 터질 듯하였다.


11 편집

왕손이 탄생하였다고 만세를 부르는 소리며, 음악 소리가 요란한 대궐로 돌아 왔지만 태자에게는 그 일조차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왕손이 탄생하였다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지만, 태자의 눈으로 보자면 역시 한 가련한 새 생명이 난데 지나지 못하였다. 새로 난 그 아이도 이제 역시 병도 않고 늙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죽어버릴 것이었다. 기뻐할 일도 아니요 즐거워할 일도 아니요, 이 커다란 우주 의 한편 구석에 또한 시원치 않은 한 조그만 사건이 생겨난 데 지나지 못하였다.

궁중의 모든 처녀들은, 왕손이 탄생한 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장 빛나는 화장을 하고, 태자의 앞에 와서 축하를 드리며 음악을 하며, 춤을 추며 온갖 자태를 다 부렸다. 더구나 우울한 태자의 심경을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가장 흥성스러운 음악과 가장 활발한 춤을 태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런 일도 태자의 눈으로 보자면 아무 신기함도 없었다. 이 넓고 넓은 우주의 한편 구석에서 인생이라 하는 조그만 동물이 날뛰고 덤비는 것이 오히려 싱겁고 귀찮기 짝이 없었다. 처녀들이 가무로써 태자를 위로하려는 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태자는 이편으로 돌아와서 자기 침실, 고요한 곳에 몸을 커다랗게 내어 던졌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처녀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눈을 감았다. 또 다시 어지럽고도 괴로운 생각은 태자의 마음에 일어났다.

─사람은 무엇이냐?

─왜 사느냐?

─죽음이란 무엇이냐?

동시에, 아까 북문에서 본 바 출가한 행자의 경건스럽던 모양이 태자의 눈에 어릿거려서 태자로 여하금 추가할 생각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환락의 궁전, 음악과 춤으로 터질 듯하던 궁전도 고요하게 되었다. 이 때에 태자는 몸을 일으켜서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에 태자의 눈에 비친 것은 태자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하고 이 세상에 대하여 더욱 비관하게 한 것이다.

아까 아름다운 옷과 아름다운 화장으로 손에 악기를 들고 아름다운 노래며, 아름다운 춤을 추던 처녀들이 모두 곤하여 그대로 곤드라져 잠이 들었다. 얼굴에 머리칼 한 올이 내려와도 곧 거울을 보고, 그것을 고치던 처녀들이, 혹은 엎어지고 혹은 잦혀져서 입을 쩍 벌리고 코로는 요란한 소리까지 내며, 심한 것은 옷까지 모두 흩어져서 살이 들어나기까지 하고, 정신 모르고 자는 모양은 참으로 추악하였다.

이것이 아까의 그 아름답던 계집들이냐? 이것이 그 선녀와 같던 처녀들의 꼴이냐, 아 아! 세상이란 모두 이런 것이다. 화려한 면이 있으면 그 남은 반면은 반드시 추악한 것이다. 추악한 면을 그렇지 않은 듯이 꾸며서 반면 감추는 것─ 이것이 사람의 세상이로다.

환락의 뒤에는 슬픔이 있고, 호화의 뒤에는 반드시 추악한 것이 숨어 있다.

여기서 태자는 마침내 마지막 결심을 하였다.


12 편집

태자는 곧 몰래 밖으로 나와서 외양간을 찾아갔다. 그리고 한 사람의 종자를 깨워 가지고 즉시로 말 안장을 준비하라고 명하였다.

종자는 눈을 비비며 태자를 쳐다보았다.

「밤중에 어디로 행차를 하시렵니까?」

태자는 거기 대하여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자, 빨리 안장을 얹어라.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어디로 가시렵니까?」

「설산(雪山)으로─」

종자는 주저하였다.

종자는 태자의 마음을 알았다. 출가를 실행하려는 것을 알았다. 이즈음의 태자의 행동과 마음을 짐작하는 종자는 여기서 안장을 꾸며지 말아얄지 주저하였다.

「자, 어서 꾸며라! 어서 꾸며야지......」

급한 듯한 채근을 종자는 세 번 네 번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릴없이 말 안장을 준비하였다.

「너도 오늘 밤만 나를 바래다 다고. 다시 돌아올 바이 없는 길이로다.」

출가─

인생의 커다란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떠나는 태자로되, 사람의 몸집을 쓴 태자에게는 역시 이별의 슬픔이 없을 수가 없었다. 비록 이 영화의 자리와 호화스러운 궁전과 안일하던 생활에는 마음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늙으신 어버이와 사랑하는 태자비며, 어제 겨우 탄생한 어린 혈속에게 대한 사람으로서의 애정은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종자에게 말 안장을 재촉하여 말께 오른 뒤에 이 궁전을 벗어나 때는, 태자의 머리는 뜻하지 않고 뒤로 돌아가고 하였다. 어둠 가운데 드높이 서 있는 궁전 그 안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많은 사람이며, 자기가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할 때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떠나는 길이었지만, 머리는 연하여 뒤로 돌아가고 하였다.

그 밤으로 태자와 종자는 이백여 리를 달려서, 새벽 동틀 때에는 어떤 강변까지 이르렀다. 태자는 강변에서 말께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의 머리에 썼던 황금관이며 몸에 둘렀던 값진 옷을 모두 벗었다.

「자, 이것을 네게 주니, 가지고 이젠 도로 궁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돌아가거든 상감께 뵙고, 불효한 실달(悉達)은 떠날 때도 못뵈왔거니와 다시 올 기회도 없겠다고 여쭈어라.」

종자는 태자가 주는 금관과 보의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고 좀더─ 다만 조금만이라도 더 따라가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그것을 굳이 거절하고, 종자와 작별을 한 뒤에 혼자서 고행의 길을 떠났다.

태자는 좀더 가다가 어떤 사냥군을 만나서, 그 사냥군에게 낡은 옷을 얻어 입었다. 금관이며 보의는 이미 종자에게 주어버렸고, 이번에는 또한 사냥군의 낡은 옷까지 얻어 입은 태자는, 이제는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한 평민─ 가난한 고행자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완전히 이전의 부귀영화와 인연을 끊은 뒤에 태자는 고행의 길을 채인 것이다.


13 편집

옥환아!

실달태자는 이리하여 설산으로 고행을 하러 들어간 것이다.

네가 지리를 배울 때에, 히말라야산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느냐? 그것이 즉 설산이로다.

가비라 나라, 호화로운 궁전에 앉아서 쳐다보면 사시를 물론하고 흰 눈을 쓰고 있는 높은 산─ 거기로 실달태자는 동경하던 끝에 종내 고행의 길을 떠난 것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일은 너도 알지? 세존도 온갖 부귀와 영화를 헌 신발같이 차 던지시고 설산으로 들어가서 수십 년간을 가지 각색의 고생을 다 하시면서, 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코자 애쓰셨나니, 인생을 구원하려던 옛날 성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몸소 사람의 가장 괴롭고 아픈 일을 맛보신 것이다.

몸은 한 나라의 태자로 태어나서 뜻에만 있으면 무슨 호강인들 못하셨으려만, 세존은 그 부귀영화를 모두 차 던지고 좀더 큰 인생 문제를 해결코자 고행의 길을 떠나셨으니, 예수께서 솔로몬의 영화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져버리는 한 떨기의 들꽃만도 못하다〉고 차버리신 일과 좋은 한 쌍의 일이 아니냐?

그로부터 수십 년, 별별 고생을 다 하시며 인생 문제 우주 문제를 연구하시고 또 연구하신 끝에 드디어 크게 깨달으시사 창도하신 것이 지금 이 세계의 어느 곳이라 안퍼진 곳이 없는 불교로다. 서양의 예수교와 함께 이천 여년간을 동양 전체의 정치며, 사상이며, 도덕이며, 교육이며, 규율이며, 습관이며, 제도며, 온갖 것의 근원이 된 불교는 인도의 어떤 땅 왕자가 자기의 온갖 영화와 부귀를 내어버리고, 몸소 고행을 하시며 얻어낸 인생의 진리로다.

만약 가비라국의 태자 실달이 세상 보통의 사람으로서 자기 앞에 임한 부귀와 영화에 취하여 거기 만족하였으면, 지금 이 세상에 그렇듯 퍼진 불교라는 것이 어디서 생겼으며, 가비라라는 나라며 실달태자라는 이름이 어떻게 아직껏 남았겠느냐?

「사람은 일 대, 이름은 만 대까지!」

라는 말이 있다. 한 때의 부귀와 영화가 그것이 무엇이냐. 만 대까지 전할 그 이름─ 이것이 귀한 것이로다.

「법계(法界)의 임금!」

「사생(四生)의 어버이!」

「삼계(三界)의 도사(導師)」

인도의 한 작은 나라의 태자이던 사람에게 바치는 이런 명예스러운 이름이 모두 한 때의 즐거움을 헌신발같이 내어 던진 실달태자의 과단한 행동의 결과에서 생겨난 명사로다.

「사람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느니라.」

「나는 자는 반드시 죽고, 만나는 자는 반드시 헤어지느니라.」

얼른 보기에 평범한 말이나, 잘 씹어보면 얼마나 위대한 말이냐?

실달태자는 벌써 이천 백여 년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그의 도만은 세상이 계속되는 한, 그냥 더 퍼지고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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