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5장
35. 원망스런 음악 콩쿠르
한 주일이 지나고 두 주일이 지나고, 음악 콩쿠르의 날은 점점 가까워왔다.
그 동안 은주는 오 선생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매일 남아서 음악 연습을 했다. 그러나 영란을 생각하면 통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가능하면 자기는 그만두고 영란 언니를 내보내 달라고 여러 번 오 선생에게 말했으나,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면서 오 선생은 신이 나서 음악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내가 무슨 병이라도 났으면......’
은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자기가 병이라도 나서 콩쿠르에 나가지 못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영란이가 나가게 될 것이고, 따라서 자기의 마음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떡하면 병에 걸릴 수 있을까?’
조금도 거짓 없이 은주는 자기가 무슨 병에 걸리기를 원했다.
‘참기름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지?’
은주는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참기름은 집에도 있는데......’
그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어머니가 앓아눕기 전에 배탈이 날 때마다 잡수시던 참기름 병이 선반에 놓여 있는 것을 은주는 문득 생각했다.
‘그걸 먹을까?’
은주는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똘히 잠겨서 종로 4가까지 걸어왔다.
저녁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전차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쭈욱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큰길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고 있어야 할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나오지 않았나?’
은주는 은철이보다 먼저 집을 나오기 때문에 오빠가 아침에 일터로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우리 오빠 안 나왔어요?”
은주는 은철의 바로 옆 자리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아, 나왔다가 조금 아까 들어갔다. 너의 어머니 병이 갑자기 나빠졌다고, 아까 민구가 뛰어왔었어.”
그러면서 소년은 은주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머니 병이?”
은주는 깜짝 놀라며 동그래진 눈으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 등 뒤에서 누가 불렀다.
“야, 은주야!”
전차 정류장에서 신문을 팔던 민구가 뛰어왔다.
“민구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어머니가......”
은주는 다급한 마음에 한 걸음 다가서며 민구를 불렀다.
“응, 빨리 가 봐! 아까 내가 신문을 받으러 신문사로 가려는데, 우리 어머니가 오셔서 너의 어머니 병이 갑자기...... 그래서 은철이를 빨리 들여보내라고...... 은철이는 바로 집으로 갔어. 어서 가 봐라. 나도 신문 다 파는 대로 빨리 들어갈게.”
민구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은주는 정류장으로 다람쥐처럼 뛰어갔다. 은주는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머니가 혹시 돌아가신 건 아닐까?’
그러한 불길한 생각이 검은 구름처럼 자꾸 은주의 마음속에 떠돌기 시작했다.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길게 늘어선 승객의 행렬은 좀처럼 빨리 줄어들지 않았다. 은주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돈암동까지 뛰어가기로 결심하고 길다란 줄에서 빠져나왔다.
은주는 있는 힘을 다해 원남동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려 견딜 수가 없었다.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은주는 총알처럼 뛰었다.
“어머니! 어머니!”
앓아 누우신 어머니를 혼자 내버려두고 한가롭게 학교에 갔던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학교가 다 뭐야? 음악 연습이 다 뭐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지도 모르는데!’
창경궁 앞을 지나면서는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악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그러자 은주에게는 콩쿠르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원망스럽기만 했다.
‘영란 언니와의 관계도 그렇고...... 아, 어머니! 조금만 더 살아 계세요!’
은주는 삼선교 다리를 허둥지둥 건너면서 눈물 가득한 얼굴로 하느님에게 빌었다.
‘아아, 하느님,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길을 걷는 사람이나 길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모두 자기보다 행복해 보였다.
삼선교 개천가를 오른편으로 끼고 은주는 숨이 하늘에 닿을 듯 얼마 동안 달리다가, 군데군데 방공호가 뻥뻥 뚫린 조그만 언덕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자기 집을 불현듯 바라보았다.
은주는 조그만 쪽문이 달린 판잣집 안의 컴컴한 방에 누워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이는 자기 집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였다. 은철 오빠도 있는 것 같지 않고, 민구 오빠의 어머니도 오신 것 같지 않았다. 그저 판잣집 하나만 언덕 위에 덩그렇게 있을 뿐이었다.
민구네 방공호 앞까지 다다랐을 때, 은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언덕 위의 자기 집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은주는 다시금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자기 집 쪽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도 집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다!’
집안이 너무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 은주는 더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은주는 쪽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면서 커다란 목소리로 불렀다.
“어머니!”
방문이 탁 열리면서 민구 어머니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은주야!”
그것은 항상 은주를 반기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은주의 몸뚱이를 와락 부여안으면서 뛰쳐나온 민구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은주야!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 말에 은주는 내던져진 오뚝이처럼 서너 걸음 비틀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
은주는 와락 달려들어, 어머니의 뼈만 앙상한 두 어깨를 흔들면서 무섭게 울어 댔다.
“은주야!”
어머니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조용히 울고 있던 은철이가 그렇게 외치면서 은주를 꽈악 껴안았다.
“조금만 네가 빨리 돌아왔으면...... 10분만 빨리 돌아왔으면 어머니를 뵐 수 있었을 것을......”
은철은 흐느껴 울면서 은주가 늦게 돌아온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머니는 너를 계속 찾으시면서 돌아가셨단다. 네 이름을 자꾸만 부르시면서......”
“어머니!”
은주는 안타깝게 몸부림을 치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린 어머니가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 어머니, 용서하세요! 그만 쓸데없는 음악 연습을 하느라고......”
음악 콩쿠르가 은주는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이리하여 두 남매는 서로 부둥켜안고 하룻밤을 꼬박 울음으로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