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6장
36. 어머니가 없어도 사람은 산다
이창훈 씨 내외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은 무사히 치렀으나, 은주는 자꾸만 음악 콩쿠르가 한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마지막 가시는 어머니를 뵙지 못한 것이 모두 음악 콩쿠르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그뿐만 아니라, 은주의 음악적 소질을 칭찬해 주신 오 선생까지 점점 원망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오 선생님만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을 뵐 수 있었을 텐데......’
은주는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은주는 콩쿠르에 나가기가 점점 더 싫어졌다. 나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가지 않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장례식을 치른 날 저녁, 이창훈 씨 부부는 은철이와 은주를 앞에 불러놓고 길게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람이란 언젠가는 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란다. 그러니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건강을 해치면 안 돼. 그것은 도리어 불효가 된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산 사람은 또 산 사람으로 앞일을 생각해야지.”
이창훈 씨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은주도, 은철 군도 외로운 몸이 되었으니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은철 군은 지금 한창 공부해야 될 때니까, 구두 닦는 일은 그만 하고 학교에 다니는 게 어떻겠니?”
이창훈 씨 부인도 남편 말에 찬성했다.
“그럼요. 공부란 할 때 해야지, 때를 놓치면 못 하는 것이니까. 은철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은주와 함께 집으로 와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나 은철은 오랫동안 잠자코 앉았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면서 대답했다.
“선생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대단히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은철은 말끝을 잇지 못하고 잠시 동안 머뭇거렸다.
“그러나 선생님, 얼마 동안만 저희들을 이대로 두시면 고맙겠습니다. 은주는 물론 선생님의 따님이니까 언제라도 선생님 댁으로 가야 하겠지만, 은주가 지금 곧 선생님 댁으로 간다는 것은 도리어 은주의 마음을 괴롭히는 결과가 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은주와 영란이는 도저히 한집에서 지낼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주만이 아니고 영란이를 괴롭히는 결과도 될 것입니다.”
은철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창훈 씨 내외의 간절한 마음을 결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란의 그 오만한 태도를 생각하는 순간, 은철이로서는 도저히 이창훈 씨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은주를 사랑하는 은철이의 마음은 절대적이었다.
은철이의 이 어른스러운 한마디에 이창훈 씨 내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은철 군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겠네. 그러면 당분간 이대로 좀 더 지내보다가, 기회를 봐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좋을 성싶네. 영란에게는 나도 잘 타일러 볼 테니까.”
“고맙습니다. 좀 더 이대로 두어 주십시오. 은주는 제가 힘닿는 데까지 잘 보호했다가 돌려보내겠습니다. 은주는 선생님의 따님인 동시에 제 사랑하는 동생이기도 하니까요.”
“음, 은철 군이야말로 참으로 건실한 소년이네.”
이창훈 씨 내외는 진심으로 은철이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그리하여 은철은 다시 구두닦이를 시작했고, 은주는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오 선생은 여전히 은주에게 음악 연습을 시켰고, 영란은 여전히 은주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 콩쿠르가 모레로 다가온 날 아침이었다.
어머니 없는 쓸쓸한 방에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려고 할 때, 은주는 어머니 생각이 불쑥 나서 가슴이 메이는 것 같은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난 왜 어머니 돌아가시는 걸 보지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는 그 콩쿠르에 자기가 서슴지 않고 나간다는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또다시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정말 나가기 싫다! 정말로 나는 나갈 수 없다.’
은주는 그러면서 선반 위를 쳐다보았다.
‘아, 저기 참기름이 있다.’
먼지가 가득 앉은 참기름 병이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은주는 그것을 보자 정신병자처럼 선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기름병을 내렸다. 병에는 기름이 절반 이상이나 들어 있었다.
‘이걸 먹으면 배탈이 나고, 배탈이 나면 기운이 없어서 노래를 못 부르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은주는 막막하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으면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은주는 병마개를 뽑아 들고 벌컥벌컥 참기름을 절반이나 마셨다. 눈을 딱 감은 채 메슥메슥해서 토할 것 같은 참기름을 꾹 참고 다 마셔버렸다.
그 때 은철은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은주는 방을 나서면서 말했다.
“오빠, 나 학교 가.”
“응, 서둘러 가야겠다.”
은철은 비를 든 채, 대문을 나서는 은주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안 계셔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은철에게 들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은주에게 또 한 분의 새로운 어머니가 생겼으니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윽고 은철이도 집 안을 깨끗이 치운 후에 구둣솔과 구두약이 든 조그만 궤짝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