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34장
34. 영란의 구두를 닦는 은철이
이창훈 씨는 그 후 여러 번 은주의 판잣집을 방문하여 은철 어머니의 병환을 보살폈고, 혜화동 근처에 아담한 방 두 개짜리 집을 얻어서 당분간 그리로 가서 살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은철이와 그의 어머니는 끝내 그것을 사양했다.
“대단히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당분간 이대로 두어 주세요. 아무래도 저는 얼마 안 가 죽을 것만 같으니, 그 때 은주와 은철이를 돌봐 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날 기력도 없이 말했다.
“그건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은철 군은 제 아들처럼 생각하고 돌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은철 군은 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사양을 하니...... 그것도 모두가 영란이 탓입니다. 영란이가 조금만 마음이 따뜻한 아이라면 은철 군의 마음도 조금은 풀릴 것을...... 하지만 이제 얼마 안 가 영란이도 뉘우칠 것이고, 또 은철 군의 마음도 풀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히 생각지 말고, 이대로 좀 더 두고 보시지요.”
그러면서 이창훈 씨는 당분간 필요한 약값과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주고 갔다.
“참, 고마우신 어른이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으나 은철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은철이는 다시 종로 4가로 나가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은철이를 경찰에 고발한 깨알곰보 봉팔이는 그 후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실은 은철이보다 자기가 더 나빴기 때문에, 은철이가 경찰서에서 풀려 나온 것을 알자 경찰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영란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구두를 닦을 마음으로, 쭈르르 앉아 구두 닦는 소년들 앞을 지나다 무심코 한 소년 앞에 한쪽 발을 넌지시 내놓았다.
“잘 닦아줘요.”
영란은 이렇게 말하며 얼핏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네네. 잘 닦아 드리지요.”
은철은 여학생의 구둣발을 들여다보며 신이 나서 솔로 구두의 먼지를 털다가 얼핏 여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영란이가 깜짝 놀란 것과 동시에, 은철이도 영란이도 둘 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둘의 입술이 다 같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영란이는 차가운 얼굴로 은철을 매섭게 내려다보았다. 은철이는 은철이대로 한 손으로는 영란의 구두 뒤꿈치를 쥐고, 한 손에는 구둣솔을 잡은 채 엉거주춤 앉아서 무서운 얼굴로 영란을 쳐다보았다.
한순간, 두 소년 소녀는 얼어붙은 듯이 동작을 멈추고 말을 잃었다. 그것은 마치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스크린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다음 순간, 영란은 그만 구두 닦는 판에서 발을 냉큼 내려놓았다.
‘내가 왜 하필 너 같은 거한테 구두를 닦아?’
영란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발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내가 왜 하필 너 같은 계집애의 구두를 닦아 줘?’
그와 동시에 은철이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발꿈치를 잡았던 손을 탁 거두어 버렸다. 두 소년 소녀의 감정은 서로 날카로워지면서 무섭게 얽혔다.
다음 순간, 영란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잔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우 보통 아이들 같으면 삐쭉대며 그대로 홱 돌아가고 말겠지만, 영란은 그러지 않고 그냥 그대로 은철이 앞에 오뚝이처럼 오뚝 서 있었다.
“어서 닦아요!”
영란은 계속 버티고 서 있다가 다시 구둣발을 냉큼 올려놓으면서, 거만한 목소리로 명령하듯이 외쳤다. 너무나 잔인하고 건방진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서 닦으라는데, 사람은 왜 자꾸 쳐다봐?”
영란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다시 튀어나왔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도전이었다.
은철은 그 때까지도 영란의 새침한 얼굴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쏘아보면서 머릿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영란이가 필사적으로 걸어오는 이 싸움에 어떻게 하면 이길 수가 있을까?’
보통 애들 같으면 ‘내가 왜 이 계집애의 구두를 닦아?’ 하고 보기 좋게 거절해 버리겠지만,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은철이가 지는 셈이 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기는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어 지는 것이었다.
보통 애 같았으면 삐쭉거리며 그대로 가 버렸을 텐데 도리어 기가 살아서 달라붙는 영란의 투지를 꺾어 버리려면, 은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눈앞에 건방지게 내민 영란의 구두를 닦아 줘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다.
‘그래.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꾹 참고 이 구두를 묵묵히 닦아야 한다!’
정말로 그렇다. 남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이 장군이 역경에 처해 있던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적군의 부하 몇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초라한 한신을 비웃으며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그들은 두 다리를 쩍 벌리며 가랑이 아래로 엎드려서 기어 지나가라고 했다.
한신은 훌륭한 장군이라 그 따위 몇 놈을 물리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는 묵묵히 그들의 가랑이 밑을 엉금엉금 기어서 지나갔다. 그 꼴을 본 그들은 ‘하하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어 대었다.
“한신도 이젠 다 됐구나! 일국의 장군이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가다니.”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실컷 비웃었다. 그러나 한신은 후에 크게 공을 세워 소하, 장양과 함께 한나라 삼걸의 한사람이 되었다.
은철은 한신의 이야기를 문득 생각했다.
‘물론, 영란은 나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비웃음을 나는 도리어 비웃어 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한 은철은 입술을 꼭 깨물면서 영란의 재촉을 달게 받아 들였다.
“왜 빨리 안 닦고 멍하니 앉아만 있는 거야?”
“닦지요!”
은철은 순순히 대답하면서 영란의 구두에 솔질을 하기 시작했다.
“잘 닦아요!”
은철은 대답 대신 입술만 꼭 깨물고 있었다. 피가 나도록 깨물며, 묵묵히 영란의 구두를 닦았다. 때를 빼고 약칠을 하고 광을 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도 허술하지 않게, 똑같은 열의와 성의를 다하여 묵묵히 닦았다.
은철이가 구두를 닦는 동안, 영란의 입가에는 승리자로서의 만족한 웃음이 연거푸 떠오르고 있었다.
자기 발밑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아 묵묵히 자기의 구두를 닦고 있는 은철의 모습이 약간 가엾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우쭐한 마음이 영란을 여왕과 같은 기분으로 만들어 주었다.
‘네까짓 것이 아무리 잘난 척해 봐야 별 수 있어? 돈을 벌려면 닦아야지, 별도리 있냐고?’
은철이의 깊은 속을 일지도 못하고, 영란은 은철이가 다만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비굴한 자식!’
영란은 그처럼 자기에게 대들던 은철이가 단돈 50원을 벌려고 씩씩거리며 구두를 닦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같으면 죽으면 죽었지 그런 노릇은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간 불쌍하기도 해.’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구두를 다 닦고 났을 때, 영란은 거지에게 동냥을 주는 셈으로 100원 한 장을 내주며 말했다.
“거스름은 가져도 좋아.”
그러나 은철은 묵묵히 50원을 거슬러 주면서 말했다.
“안 가져도 좋아.”
그 말에 영란은 힐끔 은철을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50원을 받았다.
“아니꼬워서 정말......”
영란은 종알거리면서 홱 돌아서서 정류장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은철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또박또박 걸어가는 영란의 뒷모습을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