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02장

2. 은주와 신사

“명혜야, 울지 마.”

은주는 민구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훌쩍훌쩍 울고 앉아 있는 명혜를 잡아 일으켰다.

“어서 신문을 팔고 집에 가야지. 울고만 있으면 어떡하니?”

그러자 명혜는 더욱 목놓아 울 뿐이었다. 은주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명혜를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는 신사 한 사람을 붙잡고 따라가면서 말했다.

“신문 한 장만 팔아주세요.”

“오늘 신문은 다 보았다.”

“아이, 아저씨. 그러지 마시고 한 장만 팔아주세요. 네?”

“글쎄, 다 보았대도 그래?”

신사는 귀찮은 듯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고는 갈 길을 재촉했다.

은주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뒤를 돌아보니 그새 명혜는 울음을 그치고 열심히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 때 잿빛 양복을 입은 신사가 총총한 걸음으로 은주 앞을 지나갔다. 은주는 또 신사를 붙잡았다.

“저, 신문 한 장만 팔아주세요.”

“신문 벌써 샀다.”

신사는 계속 걸어가면서 양복 주머니에 접어 넣었던 신문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럼, 다른 신문으로 하나만 팔아주세요, 네?”

은주는 신사 옆에 바짝 붙어 서며 열심히 따라갔다.

“신문만 자꾸 사면 뭐하니?”

그러다가 신사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싱긋 웃으면서 은주에게 말했다.

“너, 어느 학교에 다니니?”

“저어...... 저어, 동신여자중학교......”

은주는 우물쭈물 말을 하다가 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동신여자중학교?”

그러면서 신사는 다시 한 번 은주를 바라보았다.

“호오, 그래? 몇 학년이지?”

“저어, 그런 건 묻지 마시고 그냥 신문 한 장만 팔아주세요.”

“그런 건 묻지 말라고? 그렇지만 나는 무척 알고 싶은데......”

“저어, 아무 학년도 아니에요.”

“응? 아무 학년도 아니라니?”

신사는 잠깐 놀라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무 학년도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그게 저어...... 아직 학년이 없어요.”

신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은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학년이 없다고? 그런데 왜 동신여자중학교에 다닌다고 했지?”

“저어...... 그런 말씀은 그만 하시고 제발 한 장만 팔아 주세요.”

은주는 신사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걸 알려 주면 신문을 사마.”

그 말에 은주는 신사를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슬그머니 돌아섰다. 그러자 신사도 얼떨결에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어가는 은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얘야! 미안하구나. 그럼 이젠 묻지 않으마. 자, 신문 한 장만 줄래?”

그래도 은주는 못들은 척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신사는 왠지 이 소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서 성큼성큼 따라가서 소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신문 한 장 다오.”

신사는 20원을 꺼내 은주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제야 은주는 활짝 웃는 얼굴로 신사에게 신문 한 장을 건네주었다.

“얘야, 아까는 정말 미안했다. 겨우 20원짜리 신문 한 장 팔아 주면서 네가 그토록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으니......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욕심쟁이였다. 용서하거라.”

인자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띤 신사는 은주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은주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얘야, 내가 자꾸만 캐물은 건 이유가 있단다. 내가 바로 그 동신여자중학교의 선생님이거든.”

“네?”

은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너는 우리 학교 교복도 입지 않고, 우리 학교 배지도 달지 않았잖니? 그래서 물어본 거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신사를 쳐다보던 은주의 머리가 다시 힘없이 푹 수그러졌다. 고개 숙인 은주의 눈에서 이슬같이 맑은 눈물이 한 방울 고였다가, 다 해진 운동화 발부리 앞에 툭 떨어졌다.

여기저기 다닥다닥 기워 붙인 보기 흉한 운동화였다.

“선생님, 용서하세요.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은주는 운동화 발부리 앞에 떨어진 눈물 자국을 나머지 운동화로 가만히 문질러 버린다.

“음......”

신사는 짧은 신음을 토해 낸 후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부드러운 말로 물었다.

“왜 거짓말을 했니? 그러면 신문이 잘 팔릴 줄 알았니?”

“아뇨.”

“그럼 왜 거짓말을 했을까?”

“저는 동신여자중학교에 합격하기는 했어요. 그러나 아직 그 학교 학생은 아니에요.”

“합격은 했으나 학생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지?”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은 됐지만 아직 등록을 못 했어요. 내일이 입학식인데, 내일까지 등록을 못 하면 입학이 취소된대요.”

“아, 그랬던가? 그럼 내일까지 등록을 마칠 수가 있을까?”

그 말에 은주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학금과 후원회비 외에도, 이것저것 합해서 약 3만여 원이라는 돈을 학교에 내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어머니는 지금 앓아누워 계세요.”

“오빠나 언니는 없니?”

“오빠가 한 명 있어요.”

“그럼 오빠는 무얼 하지?”

“이젠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은주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치고는, 홱 돌아서서 사람들 틈으로 빠르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야.”

신사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통 애 같으면 없는 사실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동정을 사려고 할 텐데, 저 아이는 그 반대로군.”

이윽고 신사는 가던 길을 재촉해 동대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다시 혼잣말을 했다.

“아참, 그 애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을 잊어버렸네. 할 수 없군. 내일 학교에 가면 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