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11. 갑신정변과 갑오 혁신

독립당과 사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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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조선에 독립(獨立)과 사대(事大)의 두 당이 있었다. 독립당은 일본의 국운이 나날이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이에 의존하여 정치를 개혁하자고 한 당파이며, 사대당은 보수를 좋아하고 청나라에 의지하자고 하는 당파이다. 임오(壬午)의 정변 이후 사대당이 세력을 얻었지만 양당의 다툼은 나날이 격화했다.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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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7년 【이태왕 21년, 갑신년】 에 독립당의 우두머리인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등은 일거에 사대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획득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정변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군대가 충돌했으며 폭도들이 일본 공사관을 다시 불태웠으므로, 이듬해에 일본은 조선과 조약을 맺고, 조선은 일본에 대해 사과를 표시했으며 또한 배상금을 물었다. 또한 청나라와 조약을 맺어, 일본과 함께 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다. 이후에 사대당은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오랫동안 세력을 떨쳤지만, 이 기간 동안에 정치는 갈수록 부패하고 백성은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로 고통이 극심했다.

일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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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7년 【이태왕 31년】 에 전라도 고부(古阜)의 백성들이 학정(虐政)을 견디지 못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동학(東學)을 믿는 자들이 남쪽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 무리의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군중을 모아 진격하여 전주(全州)를 함락시켰다. 여러 지방들은 메아리처럼 이에 부응하여, 동학의 세력이 대단히 강력해졌다.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청나라에 지원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속국의 재난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으므로, 일본도 역시 공사관과 거류민의 보호를 위하여 출병했다. 그리하여 이 해 7월에 일본의 군함이 풍도(豐島) 【충청남도】 앞바다를 지나자, 청나라의 군함이 여기에 포격을 가하여 전쟁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패배했으며, 이때부터 두 나라는 전쟁을 계속했다.

일선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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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청나라 양국이 바야흐로 전쟁을 개시하자, 형세는 갑자기 돌변하여 조선 정부는 청나라와 국교를 단호히 단절하고, 일본에 위임하여 청나라 군대를 몰아냈으며, 또한 일본과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먼저 성환(成歡) 【충청남도】 의 적군을 패주시키고 이어서 평양을 함락하여 청나라 군대를 모두 반도에서 떠나게 했다.

갑오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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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일본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여 정치를 개혁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정치의 유서(諭書)를 발표했는데, 사대당 사람들은 모두 무시하고 새로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일체의 정무를 결정했으며, 과거의 제도와 관습 등 많은 것들을 개혁했다. 또 이 해부터 청나라의 연호(年號) 사용을 중지하고 개국(開國) 기원을 사용했다. 이를 갑오(甲午) 【개국 503년】 혁신이라고 부른다.

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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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청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메이지 28년 【개국 504년】 에 양국의 전권위원(全權委員)들이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만나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했다. 이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라고 한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비로소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그 후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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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메이지 29년, 개국 505년】 에 새로 연호를 건양(建陽)이라고 정했으며 처음으로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했다. 전국을 현재와 같이 13도(道)로 나눈 것도 이 해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