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10. 강화도 사건과 임오 정변

외척 민씨의 권력 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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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은퇴한 후에는 왕비인 민씨(閔氏)와 그 일족(一族)의 세력이 강대해져 정권을 20여 년이나 장악했다. 이 기간에 일어난 국내외의 사건들은 대단히 많았다.

강화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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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8년 【이태왕 12년】 에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근해를 통과하다가 식수(食水)를 얻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에 왔는데, 뜻밖에 포대(砲臺)에서 포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응전하여 부근의 포대를 함락했다. 이듬해 일본의 사절이 와서 이 일에 대해 담판했다. 조선 정부는 그 죄에 대해 사과했으며, 또한 위원(委員)으로 하여금 일본의 사절과 강화부(江華府)에서 만나 수호조약(修好條約)을 체결하게 했다. 세간에서는 이를 강화조약(江華條約)이라고 한다. 얼마 후 일본은 공사관(公使館)을 경성(京城)에 설치하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공사로 임명하여 부임하게 했다.

강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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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조약은 근대에 조선이 여러 외국과 맺은 최초의 약이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처음으로 부산(釜山) 외에 두 항구를 개방하기로 승낙했다. 그 후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들도 일본을 모방하여 조선과 조약을 맺고 통상무역(通商貿易)을 하게 되었다.

왕비 민씨와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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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대원군은 왕비인 민씨 및 그 일족과 멀어졌다. 따라서 정부가 개국(開國)하기로 방침을 취한 것을 보고 이를 결코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마침 반역을 기도한 자들이 있었는데 사건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왕의 배다른 형[庶兄]인 이재선(李載先)도 역시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대원군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졌다.

임오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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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5년 【이태왕 9년, 임오년】 에 군영(軍營)의 병사들이 오랫동안 식량을 받지 못하는 등의 일로 폭동을 일으키고 왕궁으로 난입했다. 왕비는 신변이 위태로웠지만 간신히 도피했으며, 민씨 일족 등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대원군은 급히 일어나 궁중으로 들어가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이 난으로 일본 공사관도 역시 폭도들에 의해 불탔으며, 일본인들 중 살해된 자들이 적지 않았다. 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한때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교섭을 벌였으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과 조약을 맺고 흉악한 무리들을 체포하여 이들을 처벌했으며,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에 사죄했고 또한 배상금을 물었다. 이를 임오(壬午)의 정변(政變)이라고 부른다.

청나라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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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 정변에서 청나라 정부는 조선의 요청에 따라 직접 함대(艦隊)를 파견하여 군대를 경성에 보냈으며, 또한 대원군을 유인하여 함대에 태워서 청나라에 억류했다. 따라서 일단 도피했던 왕비는 무사히 궁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는 확 바뀌었는데, 원세개(袁世凱)는 경성에 주재하여 국정을 감독했고 또한 청나라 정부에서 파견한 독일인과 영국인을 채용하여 외교와 세관(稅關)의 업무를 관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