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병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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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난 뒤 영철은 안타가운 연정을 참을 길이 없어 서울로 급기야 올라오고 말았다.

그동안 소희게서는 거의 날마다 장문의 편지가 와서 불타 는 영철의 가슴 속에 몇방울 물이 되어 포근히 적셔주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영철의 가슴 속에 끓는 불을 꺼버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추근추근한 준걸이와 지정 여관에 같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영철은 그가 혹시 그 동안 어떻게 소희를 유혹하지나 않나 하는 의심에서 어머니의 만 류함도 듣지 않고 졸업논문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집 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영철은 경성역에 내리자 바로 소희가 유숙하고 있다는 여 관으로 택시를 몰았다. 급한 일이나 있는 듯 숨급히 ××여 관에 발길을 들여논 영철은 하녀가 인도하는 대로 소희 방 문을 노크하였다.

"들어오시죠."

소리를 따라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니 뜻밖에 소희는 자 리에 누워있고 그옆에 준걸이가 얼음 주머니를 만져주고 있 다.

"웬 일이서요?"

영철은 깜짝 놀라 소희 편으로 다가섰다.

"아니 이게 웬 일이야요."

소희는 창백한 얼굴에 그나마 미소를 띄고 힘없이 영철을 쳐다봤다.

"난 급한 일이 있어 잠깐 다니러 왔지만 대체 이게 웬일입 니까?"

"어젯밤부터 감기가 들었는지 기침을 하구 아주 기력이 퍽 쇠약했어요!"

준걸이가 옆에서 대답했다.

"의사가 왔었어요?"

"녜 왔었는데 감기가 들구 기관지에 염증이 있다구 또 폐 첨이 나쁘대나요!"

"그거 큰일이군요! 그럼 자리를 옮겨야겠는데요." 하고 영 철이는 급자기 하녀를 불러 택시 하나를 부르게 했다. 그리 고는 곧 소희를 자리에서 곱게 일으켜 가지고 의전병원으로 옮기었다. 영철이는 그전부터 알던 의사에게 특청을 해서 순번을 바꾸어 진찰을 속히 받고 우선 두어 주일 입원을 시 킨 뒤에 경과를 보자는 의사말대로 즉시 소희를 동남 향한 아담한 일등병실에 옮겨 눕혔다. 그리고는 '면회 일체 사절 주치의' 란 것까지 흰 종이로 병실문 앞에 써 붙이었다. 첫 째 그것은 병자의 안정을 위함도 되지만 그것보다도 영철은 그 보기 싫은 준걸이를 병실에 들이지 말자는 계획이 그 하 나였다.

(너무 그이게 미안을 끼쳐 어쩌나?) 하는 생각에 침대에 누 운 소희는 열높은 머리가 더한층 어지러웠으나 그러나 준걸 이가 옆에 있는 것보다 영철이가 하루 한번이라도 볼 수 있 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희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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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로 왔다니까 하루에 한번이나 볼 수가 있을까 하던 영철이가 아침에 왔다가는 저녁때야 돌아가고 저녁후에 왔 다가는 아홉점 종이 울어야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외로이 자 란 소희 마음엔 세상에 그렇게도 친절한 영철이 하나 밖에 도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볼일을 보서야죠."

하고 미안한 듯이 영철에게 말하면 "괜찮어요. 전화로 대개 교섭을 하니깐요! 염려마시구 병이나 나으서요!"

하고 걱정스런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 눈, 그 코, 그 입, 어쩌면 그렇게도 다정할까? 어쩌면 그렇게 인자할까?)

(저이와 살면 이렇게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저이와 살면 행복스러울 것 뿐이겠지?)

소희는 말끄러미 영철을 다시 한번 치어다 보았다.

"................................."

"................................."

"그런데 강습은 끝마쳤어요?"

영철의 눈이 소희의 불타는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녜 바로 강습이 끝나는 날 그렇게도 무덥더니 골치가 쑤 시구 기침이 나구 그리구 열이 올르구 머리가 휑해지겠죠.

그래서 그날 바로 내려 가려던 끝에 그 모양이 됐어요!"

"참 준걸군이 퍽 애썼지요."

"녜 아무두 아는 사람이 없으니깐 그이가 의사두 데려오구 얼음두 사오구 했죠. 그런데 그인 내려갔어요?"

"아까두 내 여관에 왔더군요. 면회사절이라니깐 병실엔 못 들어 갔다면서 경과가 어떠냐구 묻겠지요!"

영철은 그 말을 퍽 업신 여기는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소희는 가슴 속이 갑자기 지리해짐을 느끼었다. 그 솔 직하고 인내심 많은 준걸이, 사람의 괴로움을 자기 괴로움 으로 알고 어느 때나 상대편의 기분 여하에 움직이지 않고 오직 제 신념으로만 행동하는 그이를 생각할 때, 비록 영철 이의 이 모든 것이 끝없이 감사하기는 하지마는 어쩐지 거 기는 한 개의 허위가 있는 것같이 생각이 되었다.

하나를 비단 이불에 싸인 허수아비라면 하나는 무명에 싼 보화와 같이도 생각되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의 심정을 아는게야!)

하고 혼자 가볍게 한숨까지 지었다.

(자기는 드나들면서 왜 준걸은 못 들어오게 한담? 누가 입 원 시키랬나?)

이렇게 반감이 솟아 오르기도 했다.

(말루는 민주주의니 평등주의니 떠들면서두 가난한 사람 지위 없는 사람을 업수히 여기구!)

소희는 아까 그렇게도 정에 넘치게 생각되던 영철의 얼굴 이 급작스러이 간사스럽고 얄미운 사내로 보이기까지 했다.

"나 저 내일쯤 퇴원하겠어요!"

소희는 무엇을 결심한 듯이 영철에게 토라진 태도로 말을 했다. 영철은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적어도 두주일은 있어야 한다는 데!"

하고 소희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본다.

"몸도 괜찬은 것같구 또 너무 미안해서요!"

"괜찮어요. 몸이 나으서야죠. 염려 마세요."

영철은 호기 있게 말을 한다.

그러나 소희는 시골로 내려가 누워있는 게 차라리 무더운 이 병실에 누워 있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되었다. 시내가 흐르고 들숲이 있는 시골 신선한 공기를 쏘이면서 걸어 다 니면 곧 나을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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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지난 어느날 순회하는 간호부가 편지 한 장을 소희에 게 던져 주고 갔다. 뜯어보니 그것은 뜻밖에 준걸이가 보낸 글발이었다.

'사랑하옵는 소희씨에게!

××여관에서 병원으로 옮아 가신 뒤에 저는 혼자 여관방에 누워서 소희씨를 그리며 애타는 가슴만 쥐어뜯고 있었습니 다. 돈의 권세가 그렇게도 클까? 돈은 그렇게도 사람을 살 수 있고 감금할 수도 있을까 하고 혼자 고민 했나이다. 소 희씨 병은 약이나 쓰시면서 시골 가서 정양만 잘 하면 나을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면회조차 일체 금지하고 이 더운 여름에 침대 위에 땀 흘린 몸을 꼼짝도 못하게 눕혀 두었으니 결국 이것은 첫째 돈있 는 자랑이오 둘째론 병을 치료한다는 것보다 소희씨를 감금 하자는 영철이의 계획 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 을 생각할 때 저는 돈 없는 권력 없는 비탄속에 그날 밤을 혼자 끝없이 고민하고 있으면서 농중조같은 소희씨를 도리 어 가엾이 생각했나이다. 사랑은 순정의 발로로써 두 개 성 이 참된 애정으로 결합해야 할 것이어늘 영철군은 소희씨를 돈으로 사려는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결코 영철 군을 중상함으로서 소희씨를 어떻게 해보자는 수단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소희씨를 어떻게 할 힘도 용기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소희씨야 좋아하든 싫어하든 오직 내 가슴속에 뿌리박힌 소희씨께 대한 참된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만을 고백할 뿐입니다.

아뭏든 기왕 입원을 한 이상 몸조리나 잘 하셔서 하루 바 삐 돌아오시기만 바랍니다. 뵈옵고 떠나고도 싶었사오나 '면 회일체 사절'이란 주치의의 어마어마한 계시를 보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니다. 부디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만 바라고 이만 붓을 던 지나이다.

경성을 떠나면서 준 걸 상 서' 편지를 다 읽고난 소희는 더욱 자기 자신이 무엇에 팔린 더러운 몸 같아서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그 러나 머리가 아찔한게 정신이 팽그르르 돌아 부지해 앉았을 수가 없다. 소희는 어지러운 정신을 어쩔 수 없어 다시 힘 없는 팔을 짚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손아귀에 쥐었던 준걸이의 편지를 되 펴보았다.

역시 준걸의 말에는 진리가 있는 것 같다.

(옳아! 영철이가 거짓이야. 나를 어쩌자는 수단이야. 그 논 둑에서 봐! 어쩌면 막 끌어안으려구 하구!)

새삼스럽게 소희 머리엔 영철이가 비열한 사내로 변하는 순간 준걸의 그 고지식한 모양이 믿음직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준걸의 아내는 될 수 있어도 영철의 아내는 될 수가 없어! 뭐 내가 못될거야 없지만도 만일 영철이의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으로 나를 업신여길 수가 있겠거든! 그렇지만 준걸의 아내 가 된다면 그이가 무엇으로 보나 나를 업신 여길 수는 없을 게 아냐. 더구나 그는 그저 직선으로 나가는 솔직한 사내거 든!)

소희는 혼자 영철과 준걸을 요리조리 저울대질 해 보았다.

그리고는 (영철이가 오면 내일 퇴원하고 시골로 간다구 할 테야!) 하고 소희는 까만 눈을 깜짝거리면서 영철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웬 셈인지 그날 밤 영철은 오지 않았다.

이틀째 되는 날도 영철은 오질 않았다.

"웬 심인가?" 하고 소희는 머리를 갸웃둥거리며 생각해 보 았다. 그러나 영철의 생활을 모르는 소희로서는 어떻게 상 상해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야 겨우 영철에게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거긴 급한 일이 있어서 며칠 동안 평양 방면을 다녀온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던 끝이라 (어쩌면 병든 사람을 두고 어딜 갔누?) 하 고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참는 마음이 굳센 소희로는 그 것도 한순간 그 담부터는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은 채 혼 자 침대 위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마음이 괴로워서 그랬는지 날씨가 무더웠던 탓인지 그날 오후부터 이상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삼십 구도 사부 에서 체열은 떨어질 줄 모르고 소희의 몸을 달달 볶아 놓는 다. 갑자기 변한 용태에 깜짝 놀란 순회 간호부는 허둥지둥 담임 의사를 불러 '펙톨'주사를 놓고 머리에 빙낭을 대고 응 급 수단을 다 했으나 밤이 되어도 열은 내리지 않았다.

(아 세상에 사람이 이같이도 없을까? 아무리 천애의 고아 로 태어났기로니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에게 돈 주고 삼 사 람 하나 밖에 없단 말인가?)

소희는 헛소리 같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망사들창을 통해 산산히 스며드는 새벽 바람만 이불을 어루만질 뿐 간호원도 옆에서 쿨쿨 잠만 들어 손 만져 줄 사람 하나 없음을 생각 할 때 소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뭉클뭉클 쏟아졌다.

서럽고 외로운 나머지 차라리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어 죽고도 싶었다.

(나 죽는다고 서러워할 사람이 누구냐. 내몸이 썩는다고 아 파할 사람이 누구냐?)

소희는 자기가 가냘픈 폐를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버리듯 그 수 많은 균이 막 폐를 달게 씹어먹는 것 같아서 가슴을 주먹으로 몇번이나 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왜 태어났을까? 왜 공부는 했을까? 그리고 이 더운 여름 에 강습은 뭣 때문에 왔을까? 지위가 올라가면 몇푼 어치나 올라가고 돈이 더 생기면 몇만원이 더 생기겠다고 남 다 쉬 는 이 더운 여름에 서울을 온담?)

눈물에 젖은 눈은 안개 어린 달빛같이 보오얄 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열어놓은 들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하느적 하 느적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다.

(뭐 하러 가누?)

소희는 다시 영철이가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주영 든 사람을 두고 어데를 가다니?)

다시 영철을 생각하고 다시금 영철이를 저주해 보기도 했 다.

(준걸이나 있었으면 이 안타까운 밤에 이 뜨거운 머리를 짚어나 달라고나 해봤을겐데)

소희는 밤을 세워가며 그날밤 여관에서 자기의 병 간호를 해주던 준걸의 그 억센 손이 안타까이도 그리웠다. 그리하 여 기다려야 오지 않는 영철에 대한 반동적 심리로 소희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준걸에게 올라와 달라는 전보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