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욕

편집

온양온천(溫陽溫泉)서 서남쪽으로 한 오리가 될까 조그마한 등 하나를 넘어가면 ××수리조합 저수지(水利組合貯水池) 물이 호수와 같이 푸르게 번뜩이고 있다.

겨울이 되면 스케이트장이 되고 여름이면 보오트장이 되는 이 저수지에는 팔월의 피서객들이 보오트를 저으며 하루의 행복된 해를 보내는 것이다.

이 수많은 보오트 가운데 섞여서 남쪽 숲가로 저어 가는 이인승 보오트 하나에 오렌지빛 파라솔을 받은 여자 하나가 해수욕복만 입은 사내와 꺼릴 사람도 없다는 듯이 큰 소리 로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글쎄 어쩌면 동경서 나오실때도 아무 소식도 없으시고 서 울 와서 계시면서도 알리지를 않으서요? 네?"

울 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엔 독기가 서려 있 었다.

"집에 나올 때도 급전을 받고 나왔고 서울 온 것도 무슨 토지 사건 때문에 급작스레 왔대도. 그리구 하루만에 일을 다 마치고 곧장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사람이 안와서 사흘이나 묵고 있었다니께!"

"그럼 저를 못만났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그야 혜옥씨 집이 개성이니깐 서울에 있었다면 아무렇게 해서라도 찾아 갔겠지만 원체 예정이 어디 들를 프로그람이 없었대도!"

"아니 당신은 변명도 잘하시지 왜 만나잔 편지는 못하십니 까?"

개성사투리로 그 여자는 따국따국 들이댔다.

"무에 변명야요?"

"그럼 변명이 아니고 뭐야요? 서울서 개성이 만리나 되나 요?"

"그렇지만 변명은 아닙니다."

"그럼 언제 어느 시골로 가서요?"

"내일 서울로 올라가서 그 사람이 왔으면 내일 밤차로 내 려가고 그 사람이 안왔으면 그 사람의 뒤를 따라 대구까지 갔다 와야겠어요!"

"그럼 금년 여름에는 아무데도 같이 안가요?"

혜옥은 야속하다는 듯이 가느스름한 눈초리를 샐쭉한다.

"글세 사정을 좀 봐줘야겠어요 졸업논문 준비도 해야겠고 가서 처리도 해야겠고 혜옥씨도 아다시피 우리집에 사내라 군 나 하나밖에 어디 있오?"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끝끝내 불평인 모양이다.

"그건 그렇지만이 뭡니까? 좀 시원스러이 모든 사정을 이 해해 주시면 좋지 않아요?"

"글쎄 선생님이 제게 이해하도록 했으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죠만 연인이라구 동경서 나올 때 내게 알렸으니까? 나 와서나 제게 편지 한 장을 했으니까? 서울을 와서 몇주일씩 계시면서 알리기나 했으니까?"

"몇주일은 무슨 몇주일? 사흘도 안됐는데!"

"글쎄 사흘이라니 단하루라두요? 만일에 우연히 종로서 만 나지 않았다면 금년 여름은 깜박 만나지도 못했겠어 그렇잖 으시니까?"

"참 미안합니다."

"아니오 저는 그런 인사나 받자는건 아냐요! 그래 어쩌면 소위 연인이란 사람에게 그렇게 홀대하느냐 말예요!"

"참 미안합니다. 자! 여기 숲사이로 잠깐 산보나 할까요?"

기슭으로 보오트를 대며 말하는건 사흘전에 서울서 소희게 평양 간다고 떠난 영철이었다.

"숲엔 가 뭘해요?"

혜옥(惠玉)이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산보나 하게요."

"산보요?"

"녜....."

"그런데 선생님 그건 그리 급한 일이 아니지만 저어..."

혜옥이는 무슨 중대한 일이나 있다는 듯이 말소리를 낮춰 가지고 화제를 돌리었다.

"저어 큰 일이 났어요."

"뭣이?"

영철은 눈을 크게 뜨고 혜옥이 편으로 얼굴을 돌리었다.

"웬 일인지 입맛을 잃어 먹을 수가 없어요."

"거 큰 일이군요."

"아무래도 큰 탈이 났나봐?"

"뭐?"

"큰 탈이 났나봐요! 구역이 자꾸 나고, 어떤 때는 그렇게 먹고 싶던 게 또 갑자기 보기도 싫여지겠지요?"

"거 왜 그럴까?"

"집안 사람에게 보이면 수상해 할 것같구 그래서 선생님이 나 만나서 이 여름철은 어디든지 가서 지낼려구 했는데 뭐 선생님을 만날 수가 있어야죠. 그래 난 이제라도 어디로 갔 으면 좋겠어!"

"갈 수가 있어야지 난 이 여름엔 꼼짝할 수가 없는데?"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하죠. 그러니 어머님이나 올케나 눈치를 채지 않겠어요. 어 쩌면 처녀가 그 모양이냐구 야단을 치면 어떻게 해요?"

"참말이유?"

"참말이지 누가 부끄런 줄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헐까봐?"

혜옥이는 시무룩해져서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운다.

"아냐 참말 그러냐고 따져보는게 아뉴? 내가 뭐 당신이 속 인다고 참말인가 거짓인가를 묻는 줄 아슈?"

"그럼 그런 뜻이 아니고 뭐야요?"

"글쎄 그런 뜻이 아니래도."

"그럼 어떻게 해요?"

"몇달이나 됐우?"

"석달째 그게 없어요!"

"석달?"

영철이 눈앞에는 지난 오월 그믐께 신록의 일광을 구경 가 서 혜옥이와 이틀동안이나 한자리에서 지낸 기억이 파노라 마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보오트를 젔던 팔 에 힘이 풀리어 '올'을 거두어 보오트에 걸치고 푸른 숲속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걱정이 되서요?"

(글자 안보임)

"그럼 왜 그렇게 얼굴에 수심을 띄우고 계서요. 당신이 싫 으시다면 유산이라도 시키죠!"

"그건 무슨 소리야?"

말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인즉 그 애가 배지않았거나 또 어 떻게 유산이라도 했으면 하고 생각도 되었다. 아무래도 맘 이 변한 오늘날 더구나 소희 같이 어여쁜 대상이 생긴 오늘 날 정조가 헐어진 혜옥에게 대한 매력은 사라진지 오래다.

마치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거나 마찬가지로 거기는 아무런 흥취도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요 낳라면 낳지만 싫다는 애를 낳어드리진 않겠어 요."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무슨 방법요?"

"................................."

영철은 침묵 속에 혜옥의 얼굴을 치어다 보았다.

"무슨 방법요?"

"글세 그 방법 말이요?"

"유산?"

"................................."

영철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떡거리었다.

"참말 할까요?"

"글세 그랬으면 좋겠어!"

"왜요?"

"결혼식도 하기 전에 애부터 낳면 어떻게해?"

"................................."

"그렇잖어?"

"그럼 결혼식을 하죠?"

"졸업이나 하고 해야지!"

"뭐요?"

"글쎄 졸업이나 하고서 결혼식을 해야 하잖어요?"

"졸업 전엔 못 하나요?"

"해도 괜찮지만!"

"괜찮으면 하죠 구월 초에."

"글쎄 금년은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

"왜요?"

"아버님 대상이 금년 십이월인데! 그네나 지나야지?"

"그럼 명년 봄엔 꼭 하서요?"

"아무럼요."

"그래도 애야 무슨 죄가 있우? 글쎄!"

"할 수 없으면 그대로 낳는게지만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참말요?"

"응!"

"참말?"

"글쎄 그렇게 다질 건 없구 할 수 있으면 어떻게 해버리면 퍽 좋겠어!"

"그래야 선생님께 좋겠어요?"

"나혼자 좋다는 것보다도 두 사람이 다 편할 것같아서!"

"어떻든 없애는게 좋지요?"

"글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럼 없애죠!"

"그랬으면!"

"똑똑히 말씀을 하세요. 없앨테니 꼭 없애달라고 그러세 요!"

"꼭 없애라구야 어떻게 하우? 그렇지만 없애면 좋겠어!"

"참말요?"

보오트가 기슭 편으로 나왔을 때 혜옥은 파라솔을 집어 보 오트 위에 놓으면서

"그럼 꼭 떨어뜨릴게요. 그렇지만 옛법에도 살인자는 사요 지금 법에도 사람 죽인 사람은 사형이니깐 내가 한 생명을 죽이고 살 수 있겠어요!"

하고 보오트에서 텀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혜옥이가 뛰어내리는 통에 영철이가 탄 보오트는 뒤집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몸을 날쌔게 뽑아 뒤집힌 보오트에서 헤어나왔다. 그러나 혜욕은 벌써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물을 꿀꺽 꿀 꺽 먹고 있었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혜옥이 더구나 자살 을 하려는 혜옥이가 물속에서 나오려고 할 리는 없었으나 숨이 막히는지 물밖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것만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자 내손을 잡어요. 글쎄 이게 무슨 일이람!"

영철은 황겁한 태도로 혜옥이의 손을 붙들었다.

"난 싫어....."

혜옥이는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영철은 뿌리치는 혜옥의 손을 잡아 끌어 한팔로 헤어 겨우 물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사람이 모여 들었다.

영철은 얼른 인공호흡을 시켜 물을 토하게 하고는 부끄러 운 김에 바로 자동차를 불러 여관으로 돌아와 방안에 고요 히 눕혀 놓고는 걱정스러이 혜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 다.

한 주일만 지나면 고향으로 온다는 소희와 준걸이가 열흘 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나 팔월 십 오일이 돼도 돌아오지 않 는 것을 보고 누구보다도 가슴을 태운 것은 시골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오빠 영철이는 서울서 바로 동경으로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다릴 필요도 없지마는 돌아온다면 그리고 꼭 돌아 와야할 소희와 준걸이가 돌아오지 않는 데는 아무리 성격이 쾌활한 영숙이로서도 우울한 빛이 떠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진정한 마음을 바쳐 준걸을 사랑한 것은 아니지마는 소희와 같이 그 아름답게 생긴 여자와 뚝 떨어진 서울서 지 낼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잘 왔노라는 엽서 한 장 밖에 보내지 않은 준걸에게 장문 의 편지 회답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자존심이 꺾이는 일이 라 하여 회답조차도 하지 않았지만 떠난 지 이십일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준걸이를 생각할 때 편지라도 해서 내려오도록 못한 것이 급작스레 후회가 됐다.

그것도 준걸이가 혼자 갔으면 그렇게도 몸을 달달볶는 듯 이 안타깝지도 않았겠지만 소희와 같이 비록 그것이 순전한 연애 여행은 아니라도 두 사람이 서울 바닥에 단둘이의 세 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질투의 불길은 점점 화염을 더하여 타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 서울로 하루 바삐 올라갈까도 생각했지만 다섯 시간이나 가는 서울 길을 어머님 혼자 두고 떠날 수도 없어 안타까이 조바심 치던 끝에 그들이 묵는다는 ××여관으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전화도 없는 그 여관이라 호출한 뒤에 우편소 안에서 기다 리기는 너무도 지리하고 괴로웠다. 더구나 시골우편소라 누 가 누군지 아는 곳이기 때문에 영숙은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질투의 불길을 참을 길이 없어 우두머니 우편소 앞에 섰다 앉았다 밖으로 나왔다 하면서 호출인이 나올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어데로 갔을거야. 서울 있으면서 안 돌아올 리야 있다구)

이렇게 생각 하고 나니 영숙은 미칠 것 같았다.

전화의 벨이 울렸다 우편소원이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이 따금 "뭐 쯔쯔돈돈?"

하고 반문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전보인 모양이다.

"어쩐 일일까"

기다리다 못해 그만 짜증이 나서 "안 나와요?" 하고 소원 에게 물었다.

"한번 더 독촉해 보지오-"

소원도 미안한 듯이 전화를 다시 건다. 그러나 영숙은 짜 증이 풀리지 않았다.

"에라 그만 둬라 그까짓 사내만 사내인가?" 하고 발길을 돌리려 할 때에 "호출인이 나왔어요." 하고 영숙이를 부른 다. 그말을 들은 영숙은 바로 돌아가고도 싶지만 그래도 발 길을 돌릴 수는 없어 소원이 열어주는 전화실로 빨리 들어 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관입니까?"

"네 ××여관입니다."

"저 한 이십일 전에 ××공립학교 훈도로 남선생 이준걸이 와 여선생 김소희가 들었죠?"

"글쎄 잘 기억이 안되는데요....."

"온 참 그럼 지금 그런 손님이 안계서요?"

"손님이라고는 일본 손님 하나 밖에 없는데요."

"교원이라고 남녀가 든 일이 그럼 없어요?"

영숙은 똑똑히 엽서를 한번 다시 꺼내 보면서 물었다.

"교원들이 많이 든 일은 있었는데요."

"그때말야요 ××공립학교 훈도 두 사람이 들었어요. 내게 도 편지가 그 여관에 있다고 왔는데요!"

"네 - 참 생각이 나요."

"그럼 그이들이 지금 어디 있어요?"

"여선생은 강습이 끝나는 날 갑자기 병이 나서 의전병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다음날 옮겨 갔는뎁쇼."

"그럼 확실히 지금 그들이 있지 않아요?"

"네 안계신뎁쇼."

저편의 말이 끝나자 영숙은 성난 듯이 전화를 딱 끊고 집 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소희가 입원했다면 준걸이가 서울서 떠날 리가 없 는데! 웬 일인가?)

하고 영숙은 의심나는 태도로 머리를 한번 짤래짤래 흔들 었다.

(아마 준걸인 병원 가까운 여관으로 옮겼을거야)

영숙은 또 이렇게 생각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밤 으로 낮으로 소희의 옆에 앉아서 그의 이마를 짚어 주고 손 을 만져 주고 있을 준걸의 모양이 똑똑히도 머릿속을 파고 들어 미칠 것 같았다.

사람은 제게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라도 그게 다른 사람에 게 넘어가게 되면 갑작스러이 귀여운 보물이 되는 것이다.

지난 날에는 준걸이가 영숙에게 있어는 애인으로서 하찮은 존재였지만, 지금 이렇게 소희와 같이 병원에 묻어 있을 것 을 생각하니 영숙은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에게 준걸이가 더한층 그리워지고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렇게 악마적 생각이 영숙이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 다.

"어머니 나 어디좀 갔다 올게?"

"어딜?"

"서울요."

"서울은 한보름 지나면 갈텐데 또 뭣하러 간단 말이냐."

"그래도 꼭 갈일이 있어!"

"글쎄 일년에 한번 와가지고 한달도 못 있다 가면서 그렇 게 에미가 보기 싫으냐?"

짜증 섞인 어머님의 말소리가 영숙의 가슴을 뭉클하고 찔 렀다. 그러나 영숙이의 남에게 지지않는 성격은 도저히 준 걸의 그 모욕적 태도에 그대로 참고 견딜순 없었다.

"어머님이 보기 싫여 그런게 아냐요. 저야 방학마다 오잖아 요 그렇지만도 어머니 딱한 사정이 하나 있어."

"뭣이?"

"저 소희가 죽게 앓는대."

"뭐? 참 서울 무슨 강습을 갔다더니!"

"강습을 가서 병이 났대. 그래 지금 위독허대!"

"거 큰일이구나 객지에서 아는 사람도 없구!"

"그렇기 좀 가봐야겠어요! 저녁 차로 떠날까?"

"갔다 오렴!"

어머니가 소희를 친달 못지않게 사랑하는 줄을 아는 영숙 은 이렇게 소희를 핑계 대고 서울로 올라 왔다. 정거장에 내리자 영숙은 허둥지둥 택시를 몰아 마치 중병걸린 애인이 나 만나러 가는 것같이 급히 서둘렀다.

"그런데 웬 일이야? 몸이 몹시 편찮어?"

영숙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희의 손목을 꽉 붙들었 다.

"아이 영숙이! 언제 왔어."

소희는 의외라는 듯이 깜짝 놀랐다.

"지금 막 오는 길야 그런데 웬 일이야 입원까지 하고!"

영숙은 어떻게 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소희의 얼굴만 말끄러미 치어다 보았다.

"폐가 좀 나쁘다....."

"폐가? 그런데 혼자 어떻게 입원을 하고 있어?"

소희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을 묻는 게 안타까왔다.

"................................."

"그런데 오빠 서울 오신거 못봤니?"

"삼사일 전에 뵈었어. 그리군 어디 평양을 가신다고 떠나시 군 뵐 수가 없는데....."

"그럼 준걸씬?"

영숙은 먼저 묻고 싶은 걸 겨우 그제서야 시치미를 뚝떼고 물었으나 웬 셈인지 가슴은 두근거렸다.

"시골가지 않았어?"

"시골?"

"응 시골로 내려가섰는데 못뵈었어?"

"아아니 못만났어."

"한 열흘 전에 떠나섰는데!"

"그럼 어디로 갔을까?"

아무래도 영숙은 소희가 준걸의 간곳을 속이는 것만 같았 다. 이 침대 아래라도 숨겨둔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둥그런 눈을 디굴디굴 굴리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기까지 했다.

(아! 그러면 시골로도 안내려갔나? 그러면 그렇지 그 시골 로 내려가 있으면서 전보를 받고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을 수야 있었을라구?)

소희는 한편 꺽어진 자존심이 다시금 회복되는 것 같아서 퍽 유쾌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그를 억측하고 저주한 게 한편 미안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서

(그럼 어디로 갔을까?)

하는 걱정이 또 뒤를 이어 생각났다.

(돈과 명예와 지위와 권력이 없는 것을 통탄하고 떠나간 그 사람이니 혹시 자살이나 하지 않았나? 그이도 천애의 고 아로 자란 사람으로 의지할 곳도 없이 그나마 굳건한 의지 하나로서 그만치라도 됐는데 만일 그 굳은 의지를 죽음길로 택하였으면 어떻게 하나?)

소희는 말똥말동 눈을 깜박이면서 그이가 경성을 떠날 때 자기게 보낸 그 눈물겨운 편지를 회상해 보았다. 소희의 눈 에는 또 축처진 두 어깨를 늘어뜨리고 푹 눌러 모자를 쓰고 힘없이 걸어가는 준걸의 모양이 어른거렸다.

"가난한 사람도 인간은 인간이다."

도스토엡흐스키의 작가의 일기에서 읽은 이 한 마디 말이 갑자기 또 소희의 머리에 떠올라 정처없이 떠나간 준걸이가 끝없이 가엾어 보였다.

(어데를 갔을까?)

소희는 다시 머리를 영숙이 편으로 돌리며

"그래 참말 못만났어?"

"글쎄 떠나기 전날도 그 숙소에 가봤는데 돌아오질 않았 어!"

"웬 일일까? 그런데 넌 갑자기 어떻게 왔니?"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네가 아주 위독하니 속히 올라 와서 간호나 좀 해 주라기에 곧장 쫓아 왔지!"

영숙은 슬쩍 거짓말로 꾸며 대었다.

"참 고맙다....."

발그레한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띄고 소희는 영숙을 바라 보았다. 미풍에 흔들리는 연분홍 장미꽃 잎이라고나 할까 속는 줄도 모르고 참말로 감사하다는 표정이 역력히 그 빛 나는 눈과 우물지는 볼에 나타나 있음을 볼때 영숙은 가슴 속이 뭉클한 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멀리서 사람까지 오게하고 그런걸 난 공연히 그이를 각가 지로 억측을 하고 저주를 하고.....)

소희는 또다시 영철이가 믿음직해지고 마음을 의탁할 것같 이 든든하였다.

준걸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고 영철에 대한 의구가 사라지 자 소희는 두 갈래로 줄달음 치던 생각에 망연자살하고 있 었다.

(준걸의 그 진심! 영철의 그 고마운 인정! 나는 누구를 믿 고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소희의 어지러운 마음이 더한층 마디마디 매듭을 맺고 가 냘픈 심령의 줄을 건드리었다.

조금 있다 영숙이가 변소에 다녀 온다고 나간 뒤 소희의 마음은 더욱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끝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며 자기를 저주했을 준걸의 생각, 바쁜 일에 억매이면서도 하루 바삐 돌아오려고 애쓰고 있는 영철이)

모로 돌아누우며 기지개를 켜는 동안도 두 사람의 그림자 는 소희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병에 차도가 있음인 지 아프던 머리도 조금 깨끗해지는 것 같고 오후면 정기로 오르던 열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된 요즈음 준걸이와 영철 에게서 무슨 승리나 한 듯한 쾌감을 느낄 때 소희는 기분조 차 명랑해지고 몸은 날아갈 듯 가쁜하였다.

더구나 팔월도 스무날게 되니 아침 저녁으로 샛바람이 불 어 들어와 덮은 욧자락을 싸늘하게 스치며 머리 앞에 꽂아 놓은 꽃잎을 하느적 하느적 흔들 때

(오! 생의 기쁨이여!)

하고 외치고도 싶었다.

(오! 청춘!)

하고 부르짖고도 싶었다. 그러다가

(내일이 개학인데!)

하고 소희는 갑자기 날짜를 꼽아 보자 명랑해진 얼굴에 약 간 수운이 떠돌았다.

(영철씨가 와야 어떡허든지 할텐데)

하고 다시 영철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가슴 속에 복받쳐 올 랐다. 그것은 순전히 소희가 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 랫동안 보지 못한 영철의 얼굴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때문이 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자기 병실 문앞에서 낯익은 남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었다. 여자는 영숙이 목소리가 분명하지 만 남자의 목소리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귀에 익은 소리였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병실 문이 따르르 열렸다.

"너무 오랫동안 미안합니다."

영철의 얼굴은 기쁨에 빛났다. 억센 두손이 소희의 가냘픈 손을 힘있게 쥐었다.

"아이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소희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잡혀진 그 손 그 대로 영원히 풀려지지 않았으면도 싶었다.

"혼자 가깝하섰죠. 참 일이 원체 까닭스러워서 온참... 그런 데 넌 엊그제야 왔다구?"

영철은 잡았던 소희의 두 손을 놓으며 영숙이 편으로 얼굴 을 돌린다.

"네!"

영숙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변소에 갔다 오던 길에 정문으 로 들어오는 자기 오빠를 만나 소희 편지를 받고 올라왔다 고 꾸며댄 영숙은 양심상 가책에 긴 말을 하기 어려웠던 모 양이다.

"담임의사를 만났더니 퍽 나으섰다구 이젠 시굴 같은데 가 서서 정양만 잘 하시라더군요?"

"그렇잖어두 선생님이 오시면 퇴원하고 내려 가려던 터야 요!"

"그런 내일 퇴원 할까요?"

"오늘 하죠 뭐 아무렇지두 않은 것 같은데요."

"그럴건 없구 그럼 오늘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일찍 퇴원하기로 하죠."

"그래도 오늘 퇴원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내일부터 학교에 가려는데요."

"그건 안됩니다. 어느 단 시골로 가서야지 또 학교에 나가 시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개학이 벌서? 오... 참 보통학교는 스므하루죠?"

"녜 그래두! 가야하죠 책임상!"

"몸이 나으서야지오 안됩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영철은 그 말이 끝나자 밖으로 쿵쿵거 리고 나가버린다.

그 다음날 아침 영철과 소희는 경원선 급행 이등실 남빛 ' 시트'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날 아침 막 퇴원 하는 길로 경성역에서 차를 타고 지금 정양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굳이 시골로 가서 학교 일을 봐야겠다는 소희를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해서 병기계(病氣屆)를 교장에게 서류 우편으로 부친다. 그리고 개학날부터 이주일 동안 휴양할테 니 양해해 달라고 전보를 친다. 이렇게 서둘러서 겨우 소희 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소희의 마음엔 학교 일이 꺼림직해서 기차가 청량 리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경성역으로 되돌아 가서 시골로 내려가는 기차를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다. 그러나 어느덧 차가 창동 의정부를 지나 동두천역에 다달아 소요산 예쁜 봉이 보일 때 소희는 그만 다시 돌아가 고 싶은 생각은 어디로 가버리고 영철이와 같이 저렇게 고 운 산 맑은 물 흐르는 골짜기로 끝없이 걷고 싶은 충동에 가슴이 뛰기까지 했다.

"저기가 소요산이군요 한번 가섰어요?"

"네 ××여고 삼월 때... 그런데 우린 지금 어델 가요?"

"가시는 데요? 가실데도 모르고 탓었어요?"

"아이참 금강산을 가신다구 하잖었어요? 그렇지만 좀 더 똑똑히 알구 싶어서요!"

소희는 낯빛을 조금 붉히면서 말했다. 사실 금강산을 간다 니 금강산을 가는가보다 했을 뿐 차표도 제가 사잖았으니 어느 금강산을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건 사실이었다.

"몸이 아프시니깐 산을 걸을 순 없잖어요. 그러니깐 위선 외금강 온정리나 신계사 같은데 있다가 건강의 형편을 보아 서 금강의 탐승길을 떠나보죠."

"괜찮은데요 뭐 저 해금강으로 만물상으로 구룡연으로 그 런데쯤은 꽤 다닐 것 같아요!"

소희는 지금껏 한번도 구경 못한 금강산의 절경이 눈앞에 보일 듯이 그리웠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절대로 걸어가서는 안된대요. 그러니 깐 어디든지 조용한 곳에서 잘 정양을 하서야 해요? 그 병 이란건 보매는 잘 모르는 게니깐 근치할 때까지는 절대 정 양을 하서야죠. 그런데 학교를 그만 두시재두?"

"아아니요? 그건 안돼요."

"왜요 제집에나 계시면서 잘 정양하시죠!"

"아이 지나간 날의 신세도 못 갚었는데 또 폐를 끼쳐요?"

"천만에요 동경으로 같이 가섰으면 좋겠는데 수토가 다르 니깐 약하신 몸으로는 견딜 수가 있어야죠!"

"................................."

소희는 대답 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동 편 차창으로 비친 햇발이 서창으로 들여 쪼이는걸 보면 해 도 이제는 퍽으나 기운 모양이다. 기차는 요란할 기적을 울 리며 역구내로 기다란 몸뚱이를 끌고 들어가 천천히 멈춰선 다.

--암벤(안변).....암벤(안변).....

안변역(安邊驛)에 닿은 모양이다.

"자! 여기서 바꾸어 타야 합니다."

영철은 소희와 나란히 일어섰다.

"그럼 또 타요....."

소희는 둥근 눈을 깜박이며 영철을 치어다봤다.

"여기선 몇 정거장 가지 않어서 내리니깐요."

"네....."

"속히 내려요."

"네....."

소희는 영철이 뒤를 따라 내렸다. 다소 몸의 피곤을 느꼈 으나 비온 뒤 산은 푸른 빛이 더욱 새로워 생기 있는 산을 둘러 보는 소희의 정신도 명랑해지는 것 같다.

서울서 돌아온 영숙이가 준걸의 하숙에 발길을 들여놓았을 때 준걸은 집에 있지 않았다.

"선생님 어디 가섰어요?"

주인집에 물어 봤더니 아침 일찍이 양복을 갈아 입고 모자 를 쓰고 나갔다고 할 뿐 어디를 간단 말도 언제 온단 말도 없더라고 한다.

(어딜 갔누?)

영숙은 다시 발길을 자기 집으로 돌리며 생각에 깊었다.

(내가 어제 너무 했나봐)

생각할수록 어젯일이 가슴에 꺼림직했다.

(아무리 당신이 소희를 따러다녀야 그건 벌써 우리 오빠의 것이야요, 그리구 당신 같이 그렇게 음흉한 사낼난 인전 사 랑할 수가 없어요)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그전날 영숙에게 받은 상처를 안은 준걸은 지금 경부선 삼 등실에 누워 가지가지 생각에 깊어 있었다. 첫째 준걸은 소 희가 영철이와 금강산을 갔다는 데에 참을 수 없는 통분을 느끼었다. 그리하여 지금 서울가지 가서 다시 함경선을 바 꾸어 탈 양으로 이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준걸은 어지러운 마음 속에서도 서울 ××여관에서 하룻밤 소희를 간호하던 생각에꿈인 듯 아리따운 환상을 그 리고 있게 되었다.

그 부드러운 몸을 하룻밤 자기가 마음대로 끌어안아 눕혀 도 주고 일으켜도 주던 일이며 그 인어 같은 팔에 주사를 놓을 때 자기가 잡아 주던 그 몽실몽실한 감각이며 또 의식 이 회복됐을 때 소희가 열 나는 얼굴로 자기를 바라볼 때의 그 어여쁘던 모습이며 물에 비친 별같이 젖은 듯 빛나는 눈 이며 모든게 지금 생각하면 꿈속 같았다.

"그러면 소희는 나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었던 모양이지?"

준걸은 손을 불끈 쥐고 외마디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무리 주치의의 면회사절이란 딱지가 붙었기루 그래 죽을 병이 든 사람이 아니어든 왜 찾아 들어가지 못했담! 왜 서 울서 내려왔담!)

하고 가지가지로 후회되는 지나간 날의 추억이 준걸의 아 픈 가슴을 더한층 괴롭히었다.

그리하여 소희를 한시 바삐 만나려는 초조한 마음에 닫는 기차까지도 느린 것같이 생각이 되었다. 정거장에 차가 닿 을 때마다 (정거는 오래두 하네) 하고 일분 이분 지체하는 차가 몹시도 지리해 보였다.

이렇게 초조한 심사로 밤 열 한시 경원선 열차에 몸을 바 꾸어 실었을 때 다소 마음이 안정되기는 했으나 그 밤새에 무슨 일이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준걸 이의 마음은 미칠 것 같이 안타까왔다.

--テシゲソ(철원) テシゲソ(철원)...

소리를 듣고 시계를 보니 오전 한시 삼십 일분! 역에 내리 니 억수로 내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준걸은 가슴에 타는 초려와 흥분 속에 외금강 전차(外金剛 電車)를 바꾸어 탔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한껏 처량한 가슴의 동요를 느끼 면서 준걸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어지러웠다. 소희가 잠옷 만 입은 그대로 영철이의 팔에 감기어 포근히 평화한 꿈속 에 행복을 느끼며 누워 있는 모양도 보이는 듯하며 갈갈이 풀어 헤친 머리채를 흔들면서 찢겨진 옷을 거두어 들고 야 반에 밖으로 뛰어 나오는 모양도 보이었다.

감은 눈에 비취는 광경이라 할지라도 전자의 정경이 전개 될 때는 준걸의 가슴은 아팠다. 그러나 그 다른 정경이 나 타날 때는 손을 불끈 쥐고 그를 구원하려고 뛰어가고 싶은 충동에서 벌컥 미친 사람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내금강 역에 내리는 길로 준걸은 내금강을 들러 장안사로 들어갔다.

아직도 이른 아침 잠속에 잠긴 장안사. 안은 꿈인 듯 고요 히 누워 있었다.

(어느 여관에 들었을까?)

준걸은 내리는 길로 그것부터 생각했으나 그것은 알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선 아무 곳이고 숙소나 정해놓고 찾아 보자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여관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소희가 돈에, 권력에 그 고은 몸을 바쳐서야 되나, 그것두 자기 의사로의 참된 사랑이면야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지 만 그 돈에 그 세력에 자기 몸을 더럽혀서야 되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영철이와 소희가 금강산을 갔다는 말을 듣고 느끼던 격분한 심정을 또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 았다. 그리고 그전날 영숙에게 가지가지로 비웃음을 당하고 견딜 수 없는 격분에서 돌연히 집을 떠나던 자기를 다시 생 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준걸은 겨우 어느 정결한 여관 집을 찾아 들어가 게 되었다.

거기는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웬 남자와 같이 여자 손 님이 한방에 묵고 있을뿐 방마다 텅 비인 게 쓸쓸하였다.

준걸은 마음이 끝없이 초조한 걸 겨우 참고 있다가 조반을 필한 뒤에야 겨우 주인을 불렀다.

그것은 그들의 소식을 알아 보자는 심산이었다.

"여기 수일전 남녀 두분이 묵고 간일이 없어요?"

"어떤 손님요?"

"이영철이란 사내와 김소희란 여자허구 말입니다."

"없는데요....."

"그럼 어디 그걸 좀 알길이 없을까요? 다른 여관에서라두 묵고 갔나?"

"알아보죠!"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왜 찾으십니까?"

하고 이상한 눈치를 보인다.

"아니 저 금강산서 만나잔 말만 듣고 왔는데요!"

자기도 모를 애매한 소리를 하고 나서 그는 얼굴을 붉히었 다.

"네에....."

주인은 무얼 알아 챘다는 듯이 빙긋 웃고는 나가버리고 만 다. 준걸은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낮이 기 울어 찾아 나갔던 사환이 돌아 왔다. 그러나 그 대답은 신 통치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손님은 온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준 걸은 더한층 마음이 우울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할 길이 없 어서 자기 자신이 이집 저집을 찾아 다녀 보기까지 했지만 그들을 찾을 길은 전연 없었다.

(유점사로 갔나?)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그는 다시 그날로 장안사를 떠나 갔 건만 거기도 없었다. 그들 -- 준걸이가 찾는 영철과 소희는 지금 그와 정반대의 방향인 온정리에서 묵고 있었다. 그걸 준걸은 알 리가 없었다.

비온 뒤의 산빛이 새로워진 봉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은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소희는 병인이라하여 하루에 방세만 십원씩을 내는 동편 일호실을 쓰게하고 영철은 그 바로 옆방을 차지했다. 그러 나 그들이 헤어져 있는 시간은 잠자는 밤 뿐이었다.

몇 날이 꿈속같이 지나갔다. 소희도 기분이 명랑해지고 병 세도 훨씬 난 것같다. 그건 소희로서도 반생에 처음 맛보는 호사스런 생활에서 얻은 신선한 향취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거의 규칙적 생활로 날을 보내었다. 아침 일찍 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안에 장치한 세면대에서 낯을 씻고 정규적인 약을 먹으면 영철이가 찾아 들어온다.

그러면 그들은 나란히 시냇물가로 발길을 옮긴다.

맑은 시냇물에 손도 씻고 혹은 발도 씻으면서 이슬이 깃들 인 풀위를 걸어다니단 다시 호텔로 돌아와 준비해둔 조반을 먹고나서 그들은 다시 소희 방으로 돌아온다. 음악 시간이 다.

축음기는 여행용 '포오타불'이니깐 그리 좋은 게 아니지만 레코오드는 오페라 전곡이 여러조 있어쑈고 그 외에도 유명 한 성악곡이며 피아노 바이올린 곡도 많았다. 그리하여 그 것을 틀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행복한 씬이었 다.

그러다가 정낮이 되면 그들은 다시 온정리 서편 언덕에 있 는 감로수(甘露水) 약물 터로 발길을 옮긴다. 감로수 물맛은 차고 좋은데다가 옛날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 물을 마시셨 다 하여 더한층 유명한 것이다.

"이 물을 마시고 만수무강하서요."

그 어느날 소희가 감로수 약수 터에서 물 한쪽도리를 떠가 지고 영철에게 주었다.

"녜! 복을 받겠습니다."

하고 그물을 받아마신 영철은 이번엔 또 자기가 한쪽도리 를 떠서

"이 물을 마시고 금년엔 꼭 결혼을 하세요."

하고 소희게로 주었다.

"아이 참..... 선생님도."

소희는 얼굴이 빨개져서 옆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리세요! 자 받으세요, 팔 떨어져요."

"호호호"

"자 받으세요."

"......................"

"그럼......"

"말씀을 다시 하세요."

소희는 웃는 얼굴이 장미꽃 같이 피었다.

"그럼 이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으서요?"

"네 - 감사해요."

하고 소희는 그제야 십자를 그으며 무슨 예식이나 거행하 는 듯이 공손히 머리를 숙여 두손으로 그것을 받아 마시고 는 다시 소복히 물 한쪽도리를 떠서 영철에게 주었다.

"전 소희씨 주신 물을 마시는게 참말 행복스러운데요."

"아이 망칙도 해!"

"참말 저는 행복된 순간이 금년 여름 소희씨를 뵈온 뒤부 터 조금두 떠나지 않아요!"

"아이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럼 소희씨는 그것을 느끼지 않으서요?"

"왜요 저두 참말 행복스러워요."

"그럼 왜 그리서요. 자 기념으로 악수나 해 주십시오."

영철은 손을 내어 밀었다.

"네....."

소희의 깍은 듯 어여쁜 손이 또 내어 밀었다. 억센 손 보 드란 손이 서로 쥐어졌다.

"소희씨?"

"녜?"

"저푸른 솔을 두고 저 영원히 끊임없는 감로수를 두고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소희의 머리는 숙여졌다.

"소희씨?"

"녜?"

대답은 했지만 머리를 숙인 그대로였다.

"소희씬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

"소희씨!"

"네!"

"왜 대답을 안허서요?"

"................"

"소희씨 참말로 저는 소희씨 없인 도저히 이 세상을 살어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오. 선생님은 그게 일시적 기분이야요. 의지할 곳 없 는 저이니깐 선생님의 너그러우신 마음이 저를 동정하는 나 머지 그렇게까지 생각하신게지, 결코 진정한 사랑이 있는 것은 아냐요! 더구나 저는 선생님을 사랑할 수 없는 몸이 아냐요. 그러니깐 선생님 저를 그저 동생같이 사랑해 주세 요 네?"

"그게 참말입니까? 내가 일시적 기분이란 게 그게 참말이 야요? 그러구 소희씨가 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기 어렵다는 게야요. 전 그러기 때문에 저같이 가난한 사 람 가엾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야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소희씨는 준걸군을 못 잊으십니까?"

영철의 낯빛은 갑작스러이 달라졌다. 말소리는 질투에 타 는 듯 떨리었다.

"그렇게 누구를 꼭 지정해서 말하는 건 아냐요. 그리구 또 준걸씨와 결혼하려고는 꿈에도 생각한 게 아니구요. 그저 막연히 저같이 가난하고 가엾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생각 뿐이죠. 그렇다고 지금 곧 결혼할 생각을 가진 것두 아니구 요!"

"참말입니까?"

영철의 억센 손이 더 굳게 쥐어졌다.

"네....."

"참말요?"

"네 참말이야요!"

"그럼 전 재산을 모조리 누구에게든지 양도해 버리겠어요!"

"그건 안된 말씀이죠. 선생님은 그 돈이 있어야 사실 어른 이 아냐요?"

"그럼 전 혼자 생활해 나갈 수가 없는 사람이란 말씀입니 까?"

"그런 의미는 아니야요. 돈 있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갑 자기 돈이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냐는 말씀야요. 결코 선생 님이 자립하실 자격이 없다는건 아니니깐 그렇게 오해는 마 세요."

"그럼 돈을 버리재두 안된다구 어떡해야 합니까?"

"결국 생활환경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할 수 없다는 게죠."

"................"

소희는 문득 말을 해놓고도 그 순간 이상히도 자기 자신을 반성할 예감이 번개같이 숙이고 있는 자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느끼었다.

("그럼 난 왜 돈 있는 사람을 따라 호화로운 생활을 하구 있을까? 기름진 음식, 값 비싼 옷, 넓고 화려한 방, 비단으 로 만든 자리! 그럼 나는 모순이 아닌가? 말로는 가난한 사 람 가난한 사람하면서두 영철씨 돈으로 일등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 그렇게두 준걸이가 지극히 간호해주던 그 더러운 방을 다시 가겠다구 하지를 못했거든, 그리구 또 여기와서 두 제일 호사스런 방에서 너무도 내 생활에 맞지 않는 호강 을 하구 있지 않는가. 값비싼 약까지 먹으면서)

"소희씨!"

영철은 무슨 생각에 깊은 듯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소희를 불렀다.

"................"

"들어가 점심이나 먹죠!"

이상히 어색해진 공기를 부드럽히려는 듯이 영철은 소희의 손을 잡았다.

"................"

소희는 지금 자기의 모순의 세계에서 혼자 부끄런 맘에 얼 굴을 붉히고 있었다.

"자 들어가요!"

"................"

그러나 아무 말이 없다. 순간의 침묵이 흘러갔다.

"?................"

"................"

"?................"

"................"

"소희!"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소희를 보고 깜짝 놀라 영철은 소 리쳤다. 그 순간 "아니 난."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웬 일이야?"

눈이 휘둥그레서 가슴에 얼싸안은 채 창백해진 소희 얼굴 을 내려다봤다.

"?................"

"................"

"?................"

"................"

"웬 일이야?"

"................"

"소희?"

"................"

"소희?"

"................"

"글세 웬 일야?"

"................"

소희는 그때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뭉클하고 눈물이 솟아난다. 그러는걸 겨우 영철이에게 보이잖게 손가락 끝으 로 씻어버리고는 우두머니 넋잃은 사람같이 안긴 채로 있었 다.

"자! 일어나서요....."

"가시죠!"

끝까지 침착한 태도로 그러나 어디까지나 오빠같은 믿음성 있는 말로 위무해 주는 영철이의 태도가 눈물 나도록 감사 하였다.

"자! 이 물이나 한찬 더 잡수십시오. 원래 관세음보살의 감 로수는 만겁(萬劫)의 불길을 한 방울로 꺼 버려 중생(衆生) 을 구한다지만 이 자연의 감로수를 마시구서 모든 잡념, 모 든 재앙을 다 씻어버리서요!"

소희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물 한 쪽도리를 받아 들었다.

소희가 금강산으로 오는 열흘 때 되는 구월 초승, 벌서 금 강의 추색은 물들기 시작하였다. 아침 저녁은 말할 것도 없 지만 대낮도 선선한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들어 제법 가을 맛이 난다. 더구나 밤마다 들리는 귀뜨라미 소리, 우수수 나 뭇잎을 흔드는 소리, 푸르고 높아진 하늘, 그 위에 뜬 은빛 달..... 이것은 모두가 가을을 알리는 계절의 신호가 아닐 수 없다.

소희의 건강도 거의 완전히 회복되어 아프던 머리도 개인 하는 같이 맑아지고 열도 나지 않았다. 잠도 잘 들수 있고 음식도 잘 먹을 수 있게끔 식욕이 나게되자 소희는 학교 일 도 걱정이 되고 또 영철이도 동경으로 건너가야 할 시기가 된 것을 생각하고 그 어떤 날 밤 시골로 돌아 갈 것을 말하 였다.

"학교를 그만 두시구 동경으로 같이 공부나 가시죠."

영철은 떠불 침대에 걸터앉은 소희 옆에 바싹 다가 앉으며 말을 했다.

"제가 무슨 공부요! 호호."

속 마음으로 동경 음악학교 성악과에 들어가 삼사년간만 꼭 공부했으면 하는 생각이 그칠 날이 없건만 차마 (나를 공부시켜 주세요)하고 곧장 대답할 수 없는 소희는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성악을 공부하시면 아주 장래 대성하실걸!"

"천만에요."

"그러지 말구 학교에 사직원을 내고 떠나시죠! 자 제가 쓸 까유?"

"아이! 시골 보통학교 선생이 어딜 가요 호호호! 전 영원한 교원이 될테야요. 어린이의 벗 그대로 늙을테야요."

"그러지말구 어서 사직원을 내요!"

"아냐요 글쎄 전 시골루 가서 애들이나 가르치고 있겠어 요."

"소희씨!"

"네!"

"난 소희씨가 그 이뿐 손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 러 주어 내 피곤에 잠긴 몸을 재워 준다면 얼마나 행복스러 울지 모르겠어."

"아이 참 영철씨두."

"아냐 참 난 어젯밤 혼자 잠을 못들면서 그 생각을 하구는 꼭 소희씨가 음악공부를 하시구 그리구는!"

"그리구는요?"

"그리구는 저어! 내 아내가 돼서 그렇게 노래를 불러 준다 면 참말 행복스럽겠어."

"아이 참 망칙해!"

소희는 가까이 앉았던 몸을 살짝 떨어져 앉으며 어린애가 어리광 피듯 머리를 도리도리 흔든다.

"글쎄 내 소원이 그렇다는 말두 못해요! 그럼 취소하지요."

"................"

"소희씨!"

"네!"

"난 소희씨가 없다면 죽을테야!"

"가짓부렝이."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서 춤이나 추다 죽을까요?"

"그런 거짓말은 마세요!"

"남은 진정으로말하는데 글쎄 소희씨 남의 말을 저렇게두 몰라 주어!"

"선생님은 애인이 있지 않으세요?"

소희는 짐짓 이렇게 물어 봤다. 동경유학 육년 동안 연인 하나 없을까 하는 여자의 민감이었다.

"없지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온양온천서 그 사건 난 것을 소희가 알지나 않나 하는 걱정이 그의 얼굴 빛을 붉게 물들였다.

"없긴 왜 없어요! 거짓말만 하셔!"

"참말이야 연인이 있으면 왜 소희씨같이 그렇게두 쌀쌀한 여성을 죽자구 따라 다닐라구."

"아이참 누가....."

영철은 소희 가까이 다가앉으며 화제를 돌렸다.

"네 하세요!"

"내가 동경서 나오기 한 주일쯤 전에 '오데라'에 가서 '미구 지'를 뽑잖었겠수?"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구, 이사를 해두 좋구, 소송에두 이길 수 있구, 그리고 혼 담이 성립된다겠죠!"

"그래요?"

"녜 참말이야요 그런데 지금꺼정 제겐 아는 여자라곤 소희 씨 하나 뿐이 있잖어요? 그러니깐 아무래두 소희씨 허구 혼 담이 성립될랴나봐! 그리 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런 농담의 말씀은 그만 두세요! 가엾은 절 왜 자꾸 그리 놀리서요!"

"글쎄 누가 농담을 해요 참말루 진심으루 그리는데..... 소 희 그렇게두 못 믿겠우?"

영철은 조금 더 다가앉으며 어깨너머로 넘긴 팔을 허리 편 으로 내리웠다.

"못 믿어요!"

"어째서?"

"아까두 말씀 드렸지만 지체가 다르니깐요?"

"지체라구요?"

"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냐요. 사람은 모두 평등이 아니야요?

왜 새삼스러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렇지만!"

"그럼 제가 소희씨게 하는 모든 행동을 그저 한 개의 장난 으루만 아서요?"

"그렇게 꺼정은 생각잖어두."

"그럼요?"

"................"

"왜 글쎄 소희는 나를 안타깝게만 합니까? 돈이 있는게 흠 이래서 내 재산 전부를 다른 이게 양도해 버린대두 안된다, 동경을 같이 가재두 안된다, 사랑을 한 대두 거짓이라 결혼 을 하면 얼마나 행복스럽겠느냐구 해두 거짓이라해, 그러니 나같은 사람은 소희씨를 사랑할 수가 없는 몸이군요? 소희 씨! 자 그러지말구 나와 오늘 동경가기루 약속해요. 아무래 두 난 대학원에 이삼년은 더 있을 작정이니깐 그새 소희씬 음악학교나 다니면 좋지 않겠우? 내가 법학사가 되어 사회 에 출입하게 되구, 당신은 음악가로 조선악단에 데뷔하게 되구 그리구 결혼식을 굉장히 거행하면 얼마나 행복스러울 거요? 네 그렇잖어요?"

"그러면 행복되게요?"

속마음은 기쁨의 안개가 사르르 전신을 싸고 돌았지만 겉 으로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왜 그래요?"

허리에 보낸 손에 힘을 준 탓인지 소희와 영철이의 몸은 착 달라붙어 오고가는 따스한 피가 그들을 더욱 흥분시켰 다.

"소희 그렇게해요!"

"어떻게요?"

"학교에 사표를 내구 동경으루 가요."

"................"

"그렇게 해요?"

"................"

"응 그렇게 하기루 작정했죠?"

영철은 소희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 비볐다. 보드러운 살의 감촉이 전신의 피를 끓게 하였다.

"소희씨?"

"................"

"머리를 일루 돌려요 자! 좀 돌려요!"

"................"

열 한시가 땅 쳤다. 밖에는 빗소리가 요란스럽다.

"자! 인젠 가서요 규정시간보다 삼십분이나 늦었는데!"

소희는 영철에게 끌어 안긴 채 뿌리칠 용기도 없다는 듯 쌔근쌔근 숨만 쉬고 있었다.

"네 가죠 그렇지만 얼굴을 이리로 좀 돌려요!"

"가세요"

"오늘 동경 간다는 약속으루....."

영철은 침대에서 일어나 정면으로 소희를 마주 바라보았 다.

"자! 악수나 해요."

소희는 쭉 벋은 팔을 내밀었다.

"악수는 했는데 뭐!"

"그럼은요."

영철은 어색하다는 듯이 멍하니 소희 얼굴만 뚫어지게 바 라보고 있었다.

"소희!"

"네!"

"약속의 프레센트를 안 주시겠오?"

소희는 상기된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

"어쩌문!"

하고 영철도 거의 절망적으로 땅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앉으 며 침대에 걸친 소희의 두 다리를 끌어 안았다.

"소희!"

영철은 머리를 스카트에 비비며 소리쳤다.

"소희 난 소희를 놓치 않을테야!"

"................"

"놓세요."

그러나 영철은 씨근씨근 숨소리만 높을 뿐 꼭 끌어안은 두 팔을 펄 것 같지도 않았다.

"놓세요!"

"놓세요!"

"................"

떨리는 소희 목소리가 웬일인지 갑자기 혜옥이 목소리같이 영철에게 들렸다. 지난 오월 그믐께 일광서 혜옥이 허리를 끌어안았을대 자기를 뿌리치며 '놓세요 놓세요' 하던 소리와 어떻게도 그리 똑같이 들릴까?

영철은 전선에 소름이 쭉 끼쳤다.

"아이를 밴 혜옥이를 두구!)

영철은 다시 가슴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물에 빠져 자살하려던 혜옥이를 겨우 건져다가 며칠 동안 을 지내면서 달래던 생각, 그리고 다시 가을에 동경가서 모 든 것을 좋도록 하자고 약속하고 겨우 개성까지 데려다 주 고서야 무사히 서울로 돌아오던 생각, 영철은 그 순간 (나는 색마가 아닐까?) 하는 양심의 채찍이 그를 괴롭게 하였다.

(낙태를 시켜? 그렇지만 만일에 그게 발각이 되면 형법(刑 法)에 걸리어 벌을 받지 않느냐?)

그는 내년 봄이면 법학사(法學士)가 된다. 법률을 하는 그 로서 그 여자에게 낙태만 시킨다면 자기는 그 아는 법률에 묶이는 몸이 되지를 않느냐.

"놓세요, 너무 흥분을 마세요."

소희의 떨리는 소리.

(사내를 가까이 하면 애를 밴다는데!)

문자 그대로 의미를 새겨 그것을 유일한 성 지식으로 아는 소희의 가슴은 떨리었다. 그저 그리고 있는 순간 벌써 애가 들어 가지나 않았나 하는 의심이 그렇게도 성을 모르는 순 결한 소희의 마음을 괴롭히었다.

"소희!"

영철은 혜옥이 생각 때문에 끌어 안았던 두 팔을 힘없이 풀면서 일어났다.

"네?"

빨갛게 흥분된 소희의 모양! 무엇에 놀란 듯 둥그란 까만 눈이 어여쁘게도 빛나고 있었다.

소희를 그대로 두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 영철은 세시치는 소리가 들리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타는 가슴만 쥐어 뜯고 있었다.

한 개의 처녀를 버려 준 자기로서 그리고 잉태까지 한 여 성을 두고서 그것도 처음에는 참된 사랑에서 결합한 연애 관계거든 몇 달이 못가서 또 다른 한 개의 순진한 처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자기의 색마적 야심이었다.

법학을 공부하느니만큼 그는 이론이 정연하고 또 사물에 대한 관찰을 퍽 명확히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한 개 의 법칙을 어기기 어려워 하고 법적 근거를 무시할 수 없는 이성적 두뇌를 가진 그련만 아버지의 유전인지는 몰라도 확 실히 그에게는 여성에 대해서만은 법칙조문을 무시한 호색(好色)적인 경향이 있다.

영철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비로소 어떤 결정적 태 도를 취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갖게 되었다.

첫째 혜옥이에게서 어린애를 낳게되면 그것을 양육비를 주 어 기르도록 하고 참된 아내는 소희로 하여 소희와 사실상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영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의를 입은 그대로 방문 을 열고 바로 그 옆인 소희 방 있는 편으로 갔다. 방문 핸 들을 돌려 보았다. 소희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거 의 앉다시피 엉거주춤하고 열쇠 구멍으로 한 눈을 감고 한 편 눈으로 방안을 들여다 봤다. 방안은 환한 등으로부터 날 씬한 허리가 영철의 눈에 이상한 충동을 주었다. 영철은 숨 소리를 높여 가며 그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소희두 나를 생각하는가? 저렇게 잠을 못자고 있으니!)

하고 한편 무엇에 승리나 한 것처럼 영철이 가슴에는 기쁨 의 물결이 솨 하고 밀려드는 것 같았다.

영철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방문을 녹크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열쇠 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소희는 둥그런 눈을 깜박이면서 노크하는 문편을 무엇에 놀란 듯이 얼굴을 돌려 바라보고 있다. 둥근 눈의 매력 긴장한 얼굴, 표정의 이상한 귀여움, 그것은 순진한 처녀만이 아니면 가질 수 없 는 아름다움이었다. 영철은 한참 동안이나 넋 잃은 사람같 이 열쇠 구멍으로 그 아름다운 포오즈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다시 허리를 일으켜 두어번 녹크를 했다.

"누구세요?"

떨리는 소희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영철은 대답도 않고 두어번 녹크를 더 했다.

"영철입니다."

"웬 일이서요 세시나 됐는데!"

"잠이 안와요!"

"전 옷을 벗고 누웠는데요!"

"잠깐 문을 좀 열어 주시오."

속으로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면서 영철은 뛰는 가 슴에 동요를 느끼며 소리쳤다.

"아이 늦었는데 가서요 전 자겠어요!"

확실히 무슨 불안을 느낀 말소리다. 애원하는 듯 갸날픈 소희의 떨리는 소리 그것은 더한층 영철이의 마음을 흥분시 켰다.

"잠깐만 할말이 있어."

"거기서 하서요?"

"글쎄 잠깐만 열라니깐."

"가서요 내일 뵙죠!"

"잠깐 할말이 있대두."

"거기서 말씀하서요."

"마주 앉어야 할말이야!"

"그렇지만 인제..... 날이 밝어 오는데....."

소희의 머리에는 영철이가 아까 자기의 두 다리를 꼭 끌어 안고 숨찬 소리로 헐떡이던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갔다. 감 히 문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와서 이번엔 허리를 끌어안고 죽네사네하면 어떡허나) 하 는 생각이 또한 소희의 참새같이 약한 가슴을 할딱거리게 하였다.

영철은 굳이 잠근 문을 두어번 더 녹크하고 다시 열쇠 구 멍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환한 불빛 아래 침의만 입고 앉은 소희가 마치 어려운 일을 당한 어린애같이 약간 얼굴 을 찡그리고, 왼편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고민하는 양이 영철이에게는 더한층 어여쁘게 보이었다.

"어서 문을 열어요! 참."

열쇠 구멍으로 방안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서 영철은 녹크 를 또 했다. 사르르 소희가 일어났다. 문편으로 가까이 걸어 온다.

(옳다 인전 성공이다)

영철의 가슴에는 방망이질 하듯 요란한 심장의 고동이 머 리를 흥분시켰다.

"딱!"

하는 스윗치 끄는 소리와 함께 방안은 갑자기 캄캄해지었 다. 밖에는 빗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이따금 비를 실은 바람 소리가 솨아 들리기도 하였다.

"어쩌면 불을 끄우 소희....."

영철은 절망 속에 외쳤다.

"가서요..... 어서 가서요"

가느다란 소희의 애연한 목소리!

"자! 문을 열어요! 글쎄 급히 할 말이 있대두."

"내일 하서요....."

"그럼 불이나 켜요!"

"................"

다시 방안은 불빛이 흘렀지만 열쇠 구멍 직선으로 놓인 테 불에 상반신을 걸치고 있던 소희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 다.

"문을 열구 이야길 좀 들어요. 긴한 이야기래두?"

"글쎄 밝는 날은 못해요?"

"지금 꼭 해야 된대두!"

얼마 있다 원피스로 갈아 입은 소희의 모양이 다시 열쇠 구멍 직선으로 보이는 테불에 나타났다.

"문을 열어요. 잠깐만!"

다시 문을 노크하며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 보았을 때 소희 는 테불을 의지하고 안타까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이 밤이 다 새도록 여기 서구 있을테야요! 자아 좀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소희는 아무 말도 없이 난처한 얼굴로 문편을 한참 동안이 나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이었다.

"자..... 좀 열어요!"

안타까운 나머지 영철은 요란한 녹크 소리와 함께 소리를 쳤다. 소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문편으로 사뿐사뿐 걸어 오고 있다.

불이나 또 끄러 오지 않나 하는 불안 속에 영철은 가슴이 조이었다. 그러나 열쇠 구멍이 캄캄해지자 달그럭 하는 소 리가 나더니 문은 열려졌다. 문 열리는 순간 영철은 자기도 모르게 방 안으로 왈칵 들어가 소희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두팔로 번쩍 들어 침대 위로 갔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의 속을 태워요!"

흥분에 탄 영철의 말소리는 떨렸다.

"................"

"소희씨!"

"네?"

"내게....."

그의 입술은 말도 그치지 못하고 소희의 볼에 그리고는 입 으로 갔다. 도리도리 흔드는 소희의 얼굴을 다시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영철이 두 손에 붙들린 머리를 흔들면서 소희는 외쳤다.

영철은 소희의 눈과 코와 입과 한두치 가량 거리를 두고 똑 똑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훈훈한 살김 그리고 입김.

날은 점점 밝아간다.

이틀 동안이나 흥분된 기분으로 소희와 영철을 찾던 준걸 은 끝끝내 그들을 찾지 못한채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했 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것이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그로서 그들을 찾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더 구나 영숙에게 그런 모욕을 받은 상처를 안고 영숙이가 있 을 그곳으로 가기는 그의 자존심이 아무래도 허락하지를 않 았다.

(금강의 절승을 우울한 기분으로 걸어나 볼까? 유점사, 마 하연, 명경대, 비로봉, 이렇게 지팡이를 동무삼아 소희를 찾 아가자. 외금강 온정리까지 찾아가면 그동안은 어떡허든지 알 수 있을게 아니냐?)

돌렸던 발길을 다시 마하연 쪽으로 옮겨 그는 장안사를 떠 나고 말았다. 반생을 고생속에 자랐건만 조금도 우울한 빛 없이 지내온 그였어도 이날에 있어서는 끝없이 마음이 울적 하였다.

(어데 가 있을까? 그리구 영철이와 같이 있나? 같이 있으 면 그동안 얼마나 친한 사이가 됐노? 남의 행복을 뺏는 영 철이! 마음 약한 소희!)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금강의 좋은 경치도 다 잊고 지팡 이를 끌면서 발걸음을 힘없이 옮기었다. 그러나 그가 장안 사를 떠나 비로봉가지 오게 되기는 사흘이란 시일을 허비하 였다.

잘 걷는 사람이면 그 거리를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에 넉 넉히 올 것이언마는 그 동안에 혹은 억수로 내리는 비를 피 하고 혹은 중간 중간에서 그들을 찾느라고 사흘이란 시일이 걸리게까지 되었다. 더구나 나중엔 찬 비를 맞으며 걸은 탓 인지 비로봉에 왔을 때는 열이 사십도나 높은 독감에 걸리 어 하는 수 없이 거기서 삼사일 동안이나 정양하지 않을 수 없게까지 되었다.

그 어느날 그것은 바로 그가 조금 감기 기운이 나아서 온 정리로 향해 떠나기 전날 새벽이었다. 준걸은 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흉악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새벽 안개를 헤치고 숲길을 혼자 걸어가는 소복한 소희가 밀림에서 갑작스러이 기어 나온 큰 구렁이에게 칭칭 감기어 꼼짝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을 꿈에 본 때 문이다.

옛날부터 상사배암이 처녀를 가아 죽인다는 전설이 있거든 꿈속에나마 그런 것을 본 준걸은 그것이 결코 전연 근거 없 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떠 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철의 행동이 소희게 대한 야심에서 나온 것으로만 해석하는 그로서 지금의 그 꿈은 준걸의 가슴에 일종의 의운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빨리 찾아가 보자!"

준걸은 그 꿈을 깨자 열이 아직 내리지 않은 몸이건만 초 조한 마음으로 행장을 수습하고 아침 일찍 비로봉을 떠나고 말았다. 천근이나 무거운 몸! 그리고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 고 그는 구룡연이며 연주답이며 옥류동이며 비봉폭이며를 모두 본체만체 오직 소희만을 생각하는 불타는 가슴으로 발 걸음을 발리 하였다. 그리하여 신계사 언덕을 넘어섰을 때 는 오정 때 밖에 되지 않았다.

(소희가 내게는 그렇게두 중한걸까? 그러나 그이는 나를 생각이나 할건가? 부질없는 짝사랑이 아닐까?)

준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온정리에 닿는 길로 일본 여 관을 모조리 뒤져 보았다. 그것은 영철이가 평소에 돈 쓰는 것으로 보아 조선여관에는 들지 않을 것을 안 때문이다. 그 러나 그들은 거기서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준걸은 최후로 온정리 호텔을 찾아 갔다.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거리는 가슴으로

"네. 이영철 김소희 남녀 두분요."

하고 똑똑히 대답했다.

"오늘 아침 떠났습니다."

장부를 뒤적이면서 지배인은 비웃는 듯 준걸에게 말한다.

"떠났어요?"

"네 막 오늘 아침 차루요!"

준걸은 힘없이 빼빼 마른 지배인의 얼굴만 치어다 보고 있 었다.

그들은 오늘 아침 서울로 향해 떠나갔다.

첫째 소희가 학교 일도 일이지만 이제는 든든한 몸으로 이 렇게 오래 호사스럽게 있을 수 없다는 것과 또 영철도 속히 동경을 가야겠으므로 두 사람이 상의를 하고 오늘 아침차로 떠나게 된 것이다.

"퍽 곤하시죠?"

경원본선을 갈아 타고 식당에 들어와 차를 마시면서 영철 이가 물었다.

"괜찮아요 -- 그래두 눈이 자구 감겨요."

하고 소희는 방그레 웃음을 웃었다. 소희는 영철의 빛나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쾌한 웃음이었다.

"영철씨 동경으루 바루 가세요?"

"그럼요!"

"그리면 또 언제 오시나요?"

"내년 봄에나 오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면 또 오구요.

그런데 꼭 삼월까지는 있어야 하우! 같이 갔으면 좋을텐데?"

"글쎄 꼭 있어야할 의무두 있구 또 이제 동경 가야 별루 할 것두 없잖어요. 그러니깐 내년 삼월에 가겠어요."

소희 맘엔 이번에 같이 갔으면 하는 생각도 없잖았으나 첫 째로 의무로 학교 일을 삼월까지는 봐야겠고 또 약혼도 하 지 않고 동경가 있는 동안 사실상 영철의 아내 노릇을 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는 차라리 명년 봄 정식으로 약혼이든 결 혼이든 해가지고 버젓하게 시골을 떠나자는 것이 그 둘째이 었다. 그런데다가 겨울동안 좀 영철과의 문제를 신중히 생 각하려는 것도 그 셋째쯤 되는 조건의 하나였다.

"그럼 서울서 바로 난 동경으로 갈테니깐 가을부터는 우리 집에 계서요. 어머님 혼자 계시니깐 맘이 뇌지를 않는군요!

내 어머님께 편지해 둘테니깐요."

"네. 어머님께서두 꼭 같이 있자고 그리시는걸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어서!"

"어머님이 혹 편치 않으서두 걱정되구 또 무슨 일이 있어 두 어머니 혼자 어려우시니깐 저를 위해서 꼭 가을부터는 집에 계서 주서요!"

"네. 그러죠."

"그럼 바루 서울서 떠나시겠어요?"

"바루 가야죠. 뭐 너무 지체해서 학교에 어떻게 미안한지 모르겠어요!"

"전 서울서 한 이틀 있다 가겠어요! 그러니깐 부디 시골 가 셔선 제집에 계시구 그러구 자주 편지나 주십시오!"

"네! 영철씨두 자주 주서야죠!"

조금 남은 레몬스카취를 마저 마시며 소희는 방그레 웃었 다.

"그리면 잊은 게 없나? ..... 그건 그러기루 하구 저건 저렇 게 하구!"

영철은 혼자 무엇을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자! 그럼 자리루 돌아가죠?"

하고 일어선다. 소희도 따라 일어섰다.

소희와 준걸은 퍽 오래간만에 한 사무실 안에서 책상을 마 주 대하고 앉을 수가 있었다. 전보다도 서로 이상한 감정 속에 그들은 힐끈힐근 서로 치어다 보고 웃기도 하였다. 그 러나 소희의 얼굴엔 희망찬 환희가 흘러넘쳐 있었건만 그와 반대로 준걸의 얼굴엔 전에 볼 수 없던 심각한 우수가 새겨 져 있었다.

금강산 험한 길을 굽이돌아 절승을 구경할 여유도 없이 소 희를 찾아 헤매던 그 안타까운 가지가지 이야기를 한 마디 도 해보지 못하고 준걸은 소희를 마주 대하면 공연스러이 얼굴이 붉어만 졌다.

자기를 조금도 생각지 않는 소희를 따라다닌 게 너무도 어 리석음을 스스로도 느낀 때문이다.

(왜 난 소희를 이렇게두 못살게 좋아하누? 같은 환경에 있 는 그가 그렇게두 천리 만리루 달아나거든 그러나 어쩌문 소희는 자기와 같은 계급의 사람을 그렇게두 이해 하지 못 할까? 돈은 자기의 환경도 계급도 다 잊어버리는 겐가? 그 러나 내가 남을 원망할 권리가 어디 조그마치나마 있느냐? 그를 저주할 무슨 사실적 근거가 티끌만치나 있느냐? 그가 내게 사랑한다고 단 한번이라도 말한 일이 없거던 내가 왜 그를 저주하고 원망하랴!)

이렇게 마음을 돌려도 봤다.

(그렇게 꽤 까닥스러운 연애가 어떠니 인생이 어떠니 떠들 게 없거든 난 내 길이 있지를 않느냐. 곤충(昆蟲)의 세계, 식물의 세계 그게 내 연인이 아니냐. 그게 내 평생의 사업 이 아니냐?)

완전히 인생문제를 떠나 그는 연구실 속으로 마음을 돌이 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소희를 아무리 준걸의 굳은 의지로서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잊자! 나는 내 할 일이 있거던)

그는 다시 굳은 마음으로 머리를 흔들며 사년동안이나 채 집해 오는 곤충표본이며 식물표본이며를 뒤적거려도 보았 다.

(금년 여름은 백두산에나 갈 것을 부질없는 길만 돌아다니구!)

좀처럼 자기가 한 일에 후회를 하지 않던 그가 이렇게 후 회도 해 보았다. 기실 그는 보통학교 교원 시험에 통과가 되어 부임한 이래 다시 문검(文檢)수험 준비를 하느라고 동 식물학 서적을 사들여 독습하는 일방 봄방학이나 여름방학 을 이용해서는 산이나 들로 가서 이상한 곤충이며 재미있는 식물을 채집하기도 하였다.

그렇듯 공부에 열중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끝을 모르고 노 력하던 준걸이가 소희게 대한 사랑이 불타오른 뒤로는 그것 조차 탐탁하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구나 그렇게도 못살게 따라다니던 영숙이조차 여름방한 때 말다툼이 있은 뒤에 서울로 올라가서는 이렇단 편지 한 장도 없는 것이 요즈음의 준걸에게는 퍽 쓸쓸하였다.

(내게는 원래 여성이 태이지 않는 것을!)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자포적 심정에서 모든 것을 잊으려 고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어도 보았다.

그러나 준걸에게는 지난 여름 서울 강습 갔을 때 자기가 짚어주던 소희의 머리며 안아 눕힐 때 자기 몸에 다른 군데 군데의 살의 감촉이 아직도 자기손과 온몸에 남아 있는 것 같이 자릿자릿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럼 다시 소희를 그렇게 대할 길은 없을까?)

안타까운 그리움이 준걸이의 가슴속을 속속들이 파고 들 때 준걸은 멍하니 천장만 치어다보며 지나간 날을 회상도 해보았다.

(이젠 소희는 과연 영철의 것일까?)

생각이 이렇게 될 때 준걸은 소희를 씹어 먹고도 싶은 악 마적 심리로 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준걸의 그런 생각도 순간적이었다. 떠오르는 소희 의 환상은 머릿속에 낙인을 친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만일에 소희가 한번 실수로 영철에게 몸을 더럽혔다 하더 라도 내가 만일 진정으루 그를 사랑하는 이상 그가 내 품안 으로 오기만 하면 나는 그것을 용서해 줄테야. 그까짓 실수 로 그르친 정조를 문제 삼으면 뭘해?)

이렇게도 자기 스스로 소희를 자기 것처럼 준걸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 소희를 만나 한번 더 내 심정을 하소해 볼까? 그 러다가 어리석은 사내라구 욕하면 어떡하나? 그러나 금강산 까지 자기를 찾아갔던 말을 허구 그리구 병들어 비로봉에서 고생한 이야기꺼정 하면 소희의 맘도 돌덩이가 아닌 이상 내게루 돌아설거야! 그럼 내일은 일요일이니깐 일찍이 소희 를 찾아가 한번 이야기나 해볼까? 그러나 정면으로 그리다 거절을 당하면 재미없을테니깐 우선 편지루 어느 정도까지 저편의 눈치를 보아 적극적으로 해보는게 더 좋을게야!)

준걸의 그 저돌적인 굳은 의지도 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 그는 찾아 가려던 것을 단념하고 그만 편지를 쓰려고 작정했다.

"사랑하옵는 소희씨!"

아니 그것보다도

"사모하옵는 소희양께!"

이렇게 쓰는게 나을거야.

준걸은 다른 종이에 이렇게 허두를 잡아놓고서 편지를 쓰 기 시작했다.

'저는 끝없는 절망 가운데서 지금 이 글을 쓰나이다. 벼랑 에서 떨어져 깊은 못 속으로 들어 가려는 순간 지금 저는 조그만 나무가지 하나를 붙잡았나이다. 이 나무가지야 말로 제가 놓지 못할 소희씨인걸 소희씨는 왜 몰라 주십니까? 서 울을 떠나면서도 굴욕과 눈물속에 정처 없이 돌아 다니고 시골로 돌아와서는 영숙씨께서 소희씨와 영철씨가 금강산으 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도 가슴이 답답하여 그 다음 날 무작정하고 장안사로 가서 소희씨를 찾아 봤지요. 그러 나 거기 소희씨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온 금강산 을 두루 헤매며 찾아보질 않았겠어요. 유점사로 미하연으로 비로봉으로 숙박할 수 있는 곳이면 그 어데나 모조리 찾아 보았지요. 그러나 소희씨는 찾을 길이 전혀 없더이다. 중로 에 찬비도 맞고 밤길도 걷는 동안 비로봉에 와서는 독감으 로 사흘이나 고생을 했죠. 주인이 간곡한 간호와 또 초약으 로 간신히 병을 나아가지고 온정리까지 와서 온 마음을 다 찾았건만 끝끝내 찾지를 못하다가 겨우 온정리 호텔에 가서 야 소희씨 소식을 알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소 희씨와 영철씨가 떠난 때였습니다. 그것두 제가 온정리에 도착한 날 아침이라니 반나절만 일찍 갔더면 소희씨를 만나 뵈었을 것이었만 불운의 이 몸은 끝끝내 소희씨를 만나뵙지 못한 채 상한 가슴을 부둥켜 안고 쓸쓸히 이곳으로 돌아 왔 나이다. 그후 학교에서 그나마 뵈옵는 소희씨가 끝없이 반 갑기는 하면서두 이상히도 달라진 것 같은 소희씨를 생각할 때 저는 오직 가슴만 탈 뿐이었습니다. 사랑이란 그 무언지 끝없는 불길이 끊임 없이 가슴속에 불타고 있어, 밤이면 잠 을 들지 못하게 하고, 낮이면 미칠 듯 어지러움을 주어 정 신상은 말할 것도 없고 육체적으로도 견딜 수가 없나이다.

잊으려나 잊어지지 않는 이 괴로움을 어떡허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인생의 사백사 병(病) 가운데 연애 병까지 넣어 가지고 사백오 병을 만들자는 연애병 환자도 보았나이다만 참말 이것이 병이 아닐진대 이다지도 사람을 괴롭힐 수가 있을까요? 더구나 요즈음은 귀뜨라미 소리에 가슴이 아픕니다. 산산한 바람이 누른 잎을 스치고 가는 것 도 웬셈인지 내 병든 가슴을 차고 쓸쓸한 공상으로 만드나 이다. 저는 오직 소희씨를 위하여 평생을 바치려하나이다.

이 마음을 소희씨는 이해해 주시지 않으렵니까!

길고긴 말씀을 다 못 드리고 이만 그치나이다.

준걸상' 준걸의 편지는 가장 불행한 때 소희게 배달되었다. 그것은 동경에 들어간 영철이가 '엥게이쥐 링'이라고 보낸 다이야몬 드 반지 소포와 그의 장문의 편지와 함께 소희게 전하여진 때문이다.

뒷폭에 이름도 없는 편지는 뒤로 두고 소희는 손빠르게 영 철의 편지부터 떼어 보았다.

'약혼하는 의미로 다이야몬드 반지 하나를 보내오!' 하는 구절을 읽는 순간 소희는 얼른 조그만 소포 꾸러미를 급한 손으로 떼어 젖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고도 그대로 넣었는지 점원의 부주의로 그것을 떼지 못 했는지는 모르지만 빨간 실이 달린 흰 딱지에는 '六百八十圓 '이란 타이프라이터로 찍은 정가표가 뚜렷이 금강석 반지에 달려 있었다.

"어쩌문!....."

소희는 가슴에 파동치는 기쁨의 물결에 자기도 모르게 그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망연자살하고 있었다.

"어머니 영철씨께서 편지가 왔어요."

소희는 넋을 잃은 듯이 앉아 있다가 무의식중에 소리를 치 며 안마루로 올라갔다.

"뭐 뭐랬니?"

어머니는 집에 온 편진줄 알고 이렇게 반문하자 소희는 깜 짝 놀라

"제 제게 왔는데요 안녕히 계시다구요! 그리고 어머님 적적 지 않도록 해드리라구요."

소희는 얼른 이렇게 꾸며 대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와 그 반지를 왼편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도 보고 빼어도 보았 다. 금강석이 좋고 빛나는게 어쩌면 그렇게도 손가락이 잘 들어맞는지 소희는 그 반지의 가치보다도 자기 손에 꼭 맞 는게 더 유쾌하였다.

"어쩌문 이렇게두 좋구 꼭 맞는 걸 사 보내섰어....."

기쁜 나머지 이렇게도 중얼거려 보았다.

그리고는 반지 낀 그손으로 간드러지게 턱을 괴고 체경앞 에 서 보기도 했다. 분홍으로 물들인 듯 가을 볕에 잘 익은 빛좋은 능금 껍질과도 같이 발그스레한 양볼에 웃음이 흐르 는 것과 영롱한 눈 그리고 반짝이는 반지 낀 손이 소희게 있어서 아름다운 미의 삼위일체 같기도 하였다. 소희는 얼 른 책상에서 지난 여름 영철이가 주고간 영철의 사진을 꺼 내 들고 뚫어질 듯 그 사진을 보면서 번갈아 체경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기도 했다. 비록 상반신만 박은 것이지만 영철을 보는 듯이 반가왔다.

"아이 나두 동경으루 갔더면 얼마나 행복스러웠을까?"

행복에 찬 희열이 소희의 가슴에 벅차 오를 때 소희는 자 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소희는 편지를 다시 한번 읽고난 뒤에 사진과 반지와 편지 를 한데 접어 책상 속에 넣고 쇠를 잠겄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두기는 너무도 아까운 것 같았다.

그것을 들고 거리거리로 외치고 다니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일 소희는 멍하니 영철을 다시금 생각해 보 았다. 그때 당에 떨어진 이름도 없는 편지가 눈에 띄었다.

"아! 참 아까 같이 온 편지지?"

이상한 불안 속에 그 편지를 손에 든 소희는 벌써 그 편지 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고 보지도 않고 갈가리 짖어 아궁 에 집어 넣은 뒤에

"원 승겁기두 한 사람."

하고 침을 뱉았다.

"그렇게두 사람이 눈치가 없담! 흥!"

소희는 다시 한번 비웃음 속에 그를 조롱하듯 중얼거리고 는 영철에게 회답을 쓰기 시작했다.

구월 그믐께! 영철은 깊어가는 가을 밤 육조방 너른 하숙 에서 자리에 엎드린 채 소희게서 온 편지 회답을 쓰고 있 다.

몇줄 안남은 편지를 끝마치려고 하는 순간 뜻아닌 하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주무세요?"

"왜?"

"손님이 오섰는 뎁쇼!"

"누가 왔어요?"

"여자 손님!"

"들어오시래요."

침의 입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철은 누굴까? 혜옥 인가? 하고 속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방문을 열어 젖혔다.

벌서 하녀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온 여자는 영철이 가 까이 오자

"이선생이시죠?"

하고 긴장된 얼굴로 바라본다.

"녜 이영철입니다."

영철은 처음 보는 이 여성을 의심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어 김혜옥이가 지금 독약을 먹었어요."

"네?"

영철이 머리에는 엊그제 찾아왔던 혜옥이게 절교 선언을 하던 일, 그리고 그 선언을 듣고 '밴 어린애는 어떡하겠느냐 '고 물을 때 양육비는 드리마 하고 딱 잡아떼던 일, 돌아가 던 일이 파노라마 같이 번쩍이었다.

"막 병원으로 차는 태어 보내기는 했는데 생명이 위독해 요!"

"어느 병원으로 갔어요?"

"××병원으루 갔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 있는 곳을 알구 오셨어요?"

"봉투에 써놨어요 이야기는 천천히 하시구 자! 같이 가시 죠."

"................"

무시무시했으나 죽는다는 사람을 가보지 않을 수 없어 양 복으로 손빨리 갈아입은 뒤 영철은 그 여자를 따라 나섰다.

문밖에는 택시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철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숙 이고 차에 올랐다.

(내가 너무 떼는 방법이 서툴렀어!)

그는 이렇게 후회도 해보고

(비록 법적으루 내가 죄되는 일은 없대두 저이가 죽으면 두 생명이 없어지지를 않나?)

하는 양심상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그에게는

(죽었으면 신문에 날테구 신문에 나면 세상에서 다 알게 될테구! 그리면 나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구 더구나 소 희와의 관계도 끊어질게 아닌가?)

하는 것이 더 안타까왔다.

(어떡허든 잘 조처해야 될텐데 그리자면 혜옥이가 죽지만 말았으면!)

이렇게 생각한 그는 혜옥이가 죽는게 가엾다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이 위급하여서 옆에 앉은 여자편 으로 얼굴을 돌리어

"아주 위독해요?"

하고 물었다.

"녜 원체 많이 먹었구 또 먹은 시간이 오랬기 때메!"

"먹은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발견했어요?"

"그건 잘 몰라요!"

"................"

영철의 가슴은 아팠다.

그들이 병원에 발길을 들여놓았을 때 혜옥은 침대에 누워 는 있었지만 안절부절 불똥 뛰듯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머리를 이편으로 돌렸다 저편으로 돌렸다 하며 마치 불속에 뛰어든 벌레 모양으로 안타까와 하였다.

"가서요. 가서요! 미안해요!"

영철이 모양을 보자 혜옥은 최후 가는 길에 한때나마 사랑 했던 그이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거룩한 생각이 들었는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예상밖으로 부드러웠다.

"글쎄 이게 웬 일요?"

울상을 하고 영철은 혜옥이 손을 붙들었다. 손은 따근따근 열에 타고 있었다. 말라는 입술, 가쁜 숨소리, 이따금 혀를 내밀며 아유아유하는 안타까운 말소리, 허트러진 머리며 내 놓은 젖가슴, 이것은 벌써 여성이 아니요 한 개의 마귀로 화한 양이 똑똑히 보였다.

약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겨우 타는 입술을 스푼으로 떠서 바르는 애처로운 양.

"아유 난 죽어."

하고 절망적 비명을 하고는 힘없이 쓰러지고 쓰러졌다는 다시 일어나 가쁜 숨을 할딱거리며,

"영철씨 난 죽어요."

하고 원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양은 아무리 무쇠로 만 든 영철의 가슴이라 할지라도 갈피 갈피 아픈게 찌르르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떡허든 살기만 하우! 내 모든걸 잘못했으니 자! 살어요, 살어요 그리군 잘 살어봅시다."

"아뇨 아뇨..... 아이 배야, 아이 배야."

허리를 꼬부리고 허트러진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면서 그는 다시 소리를 버럭 지른다.

"배가 아푸우?"

"................"

"저걸 어떡해!"

영철은 저혼자 중얼거렸다.

"가요 가요! 내가 다 잘못 했어요! 가요 그렇지만 이 애가 가엾어....."

눈물에 젖은 혜옥의 얼굴이 고통 속에서도 거룩하게 보이 었다. 낳지도 않은 어린애에 대한 모성애가 타올랐음인가 그의 말소리에 영철은 가슴이 찌르르 했다.

"어떻게 도리가 없겠습니까?"

의사게 물어봤으나 열시간 이내에 죽으리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죽다니 죽으면 그는 그뿐이 아닌가? 죽다니 두 생명이 죽다니!)

이렇게 생각을 하니 비록 어여쁜 소희를 얻기 위해 혜옥이 를 버린 자기지만 최후 가는 혜옥이가 끝없이 가엾었다.

(그러나 의사가 구할 길이 없다니 어떡허나?)

영철은 타는 가슴으로 다시 혜옥의 뜨거운 손을 만지면서,

"살아요. 꼭 살어요. 살어만 나면 잘 살어 보십시다."

이렇게 간곡한 말소리로 외쳐도 보았으나 혜옥이의 숨찬 호흡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로도 그것이 다시 소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어쩌나 어쩌나 죽으면 어쩌나! 혜옥이 살아요. 응! 꼭 살 어요?"

머리에 빙낭도 대주고 손도 주무르고 빛 달라진 눈자위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혜옥이의 용태는 점점 악화만 되어 갔다.

(참말로 죽을려나? 참말로 가버리려나?)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 가엾기도 하고 한편 자기 운명이 진 한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하였다.

의사의 예언보다 두 시간이나 이르게 아침 일곱시 오분 혜 옥은 끝끝내 살아나지 못하고 한많은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 았다.

영철은 혜옥이가 최후로 눈을 감으며 외우던 괴테의 시 '그 레첸의 방'을 생각하며 원문으로된 괴테 '파우스트'를 한권 관속에 넣어 주었다. 수의며 관이며 모두 값비싼 것으로 장 례를 호사스럽게 지내주고 나서 무덤에 몇번이나 엎드려 흐 느껴 울었다. 그러나 흙속에 묻힌 혜옥이가 이것을 알 리는 전연 없었다.

사람은 흔히 죽음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이지만 영철 은 참말 혜옥이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하였다. 그리하여 그 는 이상히 떠오른 자비 때문에 혜옥을 생각하게 되고 또 그 를 생각하게 되는데 따라 그가 최후로 외우던 '그레첸의 방' 을 매일매일 되풀이 해 읽기도 했다. 때때로 무덤을 찾아서 꽃을 꽂아 주고 물도 부어 주었다. 엎드려 울기도하고 또 무덤을 쓸쓸히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은 그로 하여금 매일매일 고민의 세계로 인도하여 밤마다 독한 술을 마시고 '마찌아이'서 기생과도 자고 혼자 자기 하숙방에서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 최후로 외우며 눈을 감던 혜옥이의 말소리는 영철의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귀를 막아도 보 고 귀를 씻어 보았으나 그 말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잊을려 고 애쓸수록 그의 귀에 더 새롭게 들리는 것이다.

마음은 어지럽고 가슴은 괴로워 안정(安靜)은 끝내 오지를 안네 그이가 없으면 그 어데나 무덤이니 이 세상은 고해(苦海)라 할까 가엾은 이내머리 미칠듯도 애처롭다 이마음 천갈래도 찢기네 마음은 어지럽고 가슴은 괴로워 안정은 끝내 오지를 않네 창너머론 그 사람만을 바라보고 집을 나가는건 그이를 찾아갈 뿐 웅자한 발걸음 존엄한 몸매 입가의 잔 웃음 그 눈동자의 힘 그 말의 흐르는 매력 잡는 손 아아 그 입맞춤 마음은 어지럽고 가슴은 괴로워 안정은 끝내 오지를 않네 내 가슴은 그이에게로 다가서네 아아 나야말로 그 사람을 끌어안고 내 생각은 그대로 입맞춰 봤으면 그이의 입맞춤에 내몸이 식어져도 이 시를 외울 때면 떠나간 혜옥의 그 열에 타는 모습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가운데서도 똑똑히 외우던 그 시구가 귀에 새겨진 듯 들리 었다. 영철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