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냐?”

번화한 종로 거리에서 북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는 어떤 세길 어름 앞이었다.

절기로는 봄이라 하되 아직도 겨울 기분이 꽤 많이 남아 있는데도 가비여운 봄 양복으로 몸을 장한 젊은이가 머리를 기울이며 무엇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 1140477─ No.3─ 진열장과 진열장의 새에 약 한 자 가량 있는 양회 담벽에 누런 토필로 이런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이게 뭐냐?”

그 숫자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한번 머리를 기울인 젊은이는 이번에는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북쪽으로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자기의 발걸음의 간격을 조절하여 가면서 꼭 백 걸음을 갔다. 그리고 백 걸음으로 이른 그곳에서 주의하여 가장 가까운 담벼락을 살펴보았다.

거기는 어떤 작다란 구둣방 진열장 아래 역시 누런 토필로써

─ 1140477─ No.4─ 라고 쓰여 있는 것이 있었다.

“?…”

아직껏 비교적 명랑한 기분이 나타나 있던 젊은이의 얼굴이 비로소 긴장되었다.

“이상한 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앞으로 백 걸음─.”

이제 백 걸음을 더 가면 넘버 오가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육 그 다음에는 칠─.

이리하여 제칠에는─.

젊은이는 그 칠이 있는 곳까지 가 보려고 다시 걸음을 조절하면서 앞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오십 보 육십 보 하여 거진 다섯 번째의 백 보에 가까이 이른 때였다. 누가 문득 젊은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젊은이는 귀찮은 듯이 돌아보았다.

“서인준 씨.”

“아, 이필호 씨요?”

걸음을 조절하면서 수상한 숫자의 뒤를 밟던 사람은 서인준이었다. 뒤에서 찾은 사람은 형사 이필호였다.

“아직 경성 계셨구료.”

─ 이필호의 말─

“네 그것도 모르고 계셨소?”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이오니까?”

“좀─.”

수상한 숫자의 뒤를 밟는다는 것은 감추었다.

“바쁘세요?”

“네. 좀.”

“바쁘세요, 잠깐 선생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 그 새 계신 곳을 찾던 중인데요. 잠깐 요 근처 조용한 곳에 가서 한 삼십 분가량만 이야기하실 수 없읍니까?”

“좀 바쁜 일이 있는데요…”

주저하는 인준이를 필호는 미소로써 달랬다─.

“직권으로 간청할 권리는 없읍니다마는 조선 땅 안에서는 경찰관은 법률이 제한한 권리를 조금 넘어설 수도 있으니까 삼십 분 동안만 같이 말씀하실 시간을 어떻게든 빚어 내 보시지요.”

벙글벙글 웃어 가면서 간청하는 데는 인준이도 잡아떼기가 힘들었다. 지금 자기가 뒤를 밟던 숫자─ 만약 그 숫자로서 인준이가 상상하는 바와 같은 종류의 숫자라 할진대 그것은 삼십 분만 지나면 흔적 없이 지워 버려질 종류의 숫자였다. 그것을 놓고 다른 데를 가기는 싫었다.

그러나 일종의 협박적 의미를 띤 필호의 말에는 또한 그냥 잡아뗄 수도 없었다.

인준이는 잠시 생각한 뒤에

“삼십 분만 필호 씨에게 시간을 빌리지요.”

하고 필호와 같이 가기를 승낙하였다.

두 사람은 그곳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어떤 끽다점에 서로 마주 앉게 되었다. 시간이 시간이라 손님도 없어서 조용히 이야기하기에는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다.

“그새 경성 그냥 계셨읍니까.”

이것이 인준이와 필호가 대좌한 뒤에 필호가 물어 본 첫 번 말이었다.

인준이는 미소하였다─.

“그것도 아직 모르고 계시오?”

“아니 서로 그렇게 히니꾸(ひにく─ 야유)할 게 아니라 오늘은 한 번 서로 경찰 형사 이필호 대 민족주의자의 일원 서인준 씨라는 지위를 떠나서 서로 한 개의 양복 세민이라는 지위에 서서 복장 없는 의견을 몇 마디 교환해 봅시다그려.”

“그것도 괜찮은 말씀이외다. 그렇지만 이 공, 나는 혹은 그런 입장에서 이 공과 이야기할 수가 있다 할지라도 이 공의 오랜 관습이 능히 서로 개인 개인으로서의 담화를 끝까지 계속할 수가 있겠소.”

필호는 인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대답하였다─.

“아니 오늘 선생과 말씀하려는 것은 무슨 중대한 문제에 관해서가 아니라 지나가는 인사 몇 마디를 해보려고 그러는 것이외다. 무슨 중대한 일에 관해서 선생에게서 억지의 대답이라도 얻을려면 얻을 만한 수단도 강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선생도 짐작 못하시는 바는 아니겠지요?”

“지나가는 인사라면 그럼 나이가 몇 살이냐, 무얼 하러 조선에 들어왔느냐, 지금 숙소가 어디냐, 어떤 계통이냐 이런 일에 속해서 말씀이외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니외다. 그것도 선생이 먼저 알으켜 주시면 고맙기는 하겠지만 오늘은 단지 서로 좀 친히 알기 위해서 같이 온 것이지 그런 것도 아니올시다.”

인준이는 필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비교적 온화하고 신사다운 필호의 얼굴은 인준이로 하여금 뒤따라 나오려는 히니꾸를 막아 놓았다.

“이 공, 내 말이 혹은 이 공에게는 좀 거슬리는 말이 있었을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렇지만 이 공 생각해 보시오. 가령 여기서 말이외다. 내가 이 공을 한 가까운 친구로 알고 내가 법률에 배치된 일을 행한 것을 자랑 비슷이 말한다 합시다. 아무리 내가 행한 노릇이 법률에는 배치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이론을 세우자면 그 행동을 또한 정당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 아니외까? 이 공이 이 자리에서 내게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개인 개인의 입장에서 그 모든 일을 그저 묵인해 버릴지도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이 공이 오늘 밤 집에 가서 밤을 쉬고 내일 아침 경찰서에 들어가서 경찰서 의자에 앉아서 어젯일을 회상할 때에도 내가 행한 일을 정당시할 수가 있겠읍니까? 문제는 여기 있읍니다. 아무리 이 공이 이 자리에서 서로 복장 없는 의견을 교환하자 하지만 나는 복장 없는 의견은 도저히 이 공 앞에 그대로 배앝아 놓을 수가 없구료. 이것은 이 공도 짐작하시겠지?”

“선생의 말씀 선생의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외다. 그렇지만 선생은 내 말을 혹은 좀 넘어쳐 들이신 모양이외다. 내가 아까 서로 복장 없는 의견을 교환하자 한 것은 공생활(公生活)에 관한 의견이 아니고 사생활(私生活)에 관해서입니다. 가령 가까운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얼마 전 선생이 상해서 이곳에 도착하신 날 아침에 내 명함을 이용해 가지고 윤 백작 댁을 찾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무론 경찰에 보고를 하고 경찰에서 공공히 선생을 소환해서 취조해도 선생은 두 말을 못하실 것이야요. 그렇지만 내 개인의 의견으로는 그 일이 아직 사회의 질서를 문란케 할 만한 범죄까지는 되지 않은 이상에는 그것을 들추어낼 필요가 없어서 언제 선생을 만나거든 조용히 물어보리라, 이만치 생각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이 공은 그날 아침의 그 일을 물으려고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소구려.”

“선생과 좀 가까이 사괴기 겸사해서.”

“그럼 그 날 일을 간단히 말하리다. 이 공도 아시다시피 서울에는 친척도 친지도 없이 발을 덜컥 들여놓았으니 어디 갑자기 갈 데라도 있겠소? 그래서 거리 구경이라도 하느라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윤모의 집에서 밤중에 권총 소리가 났더라는 소문이 들리기에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고 말하자면 호사객의 부질 없는 짓으로 윤 백작 집을 찾아가 보았지요. 그러니 윤 백작 집을 찾아간댔자 좀체 만나기도 힘들 것 같아서 마침 주머니에 있는 이 공의 명함을 잠시 이용한 것이외다. 그 뒤에 이 공 명함을 이용한 데 대해서 미안하다는 말씀 한마디라도 하려 했건만 이 공 댁도 알 수 없고 내 근본이 상해서 들어온 사람이니만치 경찰서로 찾아가기는 좀 발이 저리기도 하고─ 차일피일 오늘까지 별렀소이다. 그때의 사과를 여기서 해둡시다.”

“아니 사과까지는 하실 것이 없읍니다마는 너무도 일이 교묘하게 되어 말씀이외다. 조선 땅에 들어서는 길로 그 소문을 들으시고 들으시는 길로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일에 타인의 명함을 이용해서까지─ 말하자면 모험적 행동을 하시고, 그것을 모두 선생의 설명하신 바 같이 호사객의 일시적 일로 보아 둘까요?”

“그래 두 시구료.”

“그 이상 다른 의미는 없읍니까?”

인준이는 필호의 눈을 바로 보았다. 필호도 인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잠시 서로 마주 보다가 인준이의 눈에서 먼저 미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뒤를 따라서 필호의 눈도 미소하였다.

그만치 알아 두시구료. 그만치 알아 둡시다─ 이런 양해가 성립된 것이었다.

“선생, 선생께 분명히 그 이상 다른 의미가 없다고 맹서하라고까지는 말씀 않겠습니다. 맹서하라 한댔자 선생도 맹서까지는 안 하실 듯하니까….”

“맹세한댔자 이 공은 또 그래도 믿으시지도 않을 것이고…”

두 사람은 여기서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그 뒤에 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윤 백작 댁의 권총 사건이라 하는 것이 후일담(後日譚)이라도 있는 것이면 좀 더 선생께 끈끈히 물어도 볼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자면 혹은 그날의 그 괴변이라는 것이 노백작의 한낱 환각에 지나지 못하지나 않나 하는 의혹도 없지를 않으니깐 그저 이 문제는 이만 묵삭혀 버리고 맙지요.”

“환각?”

“네, 괴한이 들어왔다는 꿈이라도 꾸고 거기 놀라서 권총을 난사했다─ 이렇게밖에는 지금에 있어서는 해석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인준이는 대답치 않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필호에게도 권하고 자기도 한 개 피워 물었다.

담배를 두어 모금 뻐금뻐금 힘있게 빤 뒤에 인준이 입을 열었다─.

“이 공.”

“네?”

“이 공은 백작 댁 후당을 상세히 검분하셨겠지요?”

“대략은 검분했습니다.”

“노백작을 만나 보셨읍니까?”

“만나 보지는 못했읍니다.”

“노백작의 충복 완쇠를 만나 보셨읍니까?”

“못 만나 봤읍니다.”

“이 공은 윤 백작 댁 후당에서 가장 가까운 담장 밖을 상세히 검분했읍니까.”

“거기는 가 보지도 않았읍니다.”

인준이는 눈을 똑바로 떴다─.

“당연히 밟아야 할 이 모든 순서를 밟지 않고 이 공은 어떻게 그 사건을 단순히 노백작의 환각으로 단정하십니까?”

질문이라기보다 힐난이었다. 이 힐난 앞에 필호는 눈을 크게 하고 맞은 편에 앉은 청년을 마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준이가 말을 계속하였다─.

“상해 있을 때에 들은 바에 의지하건대 이 공은 고등계의 첫손가락 꼽히는 경관이라고 합니다. 우리 계통의 사람들도 이 공 때문에 붙들린 사람이 적지를 않아요. 그렇지만 와서 직접 이 공과 대해 보니 과학 탐정 방면으로는 아주 제로구료. 당연히 알아볼 모든 일을 소략해 버리고 노백작의 환각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웬일이외까? 내가 그 새 알아본 바에 의지하건대 노 백작은 환각 때문에 권총을 난사하고 기절을 할 만치 노쇠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면 그 배후에는 무슨 중대한 사건이 숨어 있읍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인준이는 부러 대답치 않았다. 그리고 다른 말을 꺼내었다─.

“이 공은 혹 LC당이라는 결사에 대해서 들은 일이 있읍니까?”

“네, 범죄 잡지에서 간간 그 이름은 본 일이 있읍니다. 본거를 상해에 두고 살인 협박 약탈 등등 놀라운 범죄를 감행한다는─.”

“네, 그 지부는 세계의 조금 큰 도회에는 없는 곳이 없고─.”

“그 LC당과 이번의 사건과에 무슨 관련이 있읍니까?”

“있을지도 모릅니다. 없을지도 모릅니다.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명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두 가지의 좀 이상한 일을 본 일이 있읍니다. 하나는 백작 집에 괴한 침입 사건이 있었다는 그 이튿날 아침에 백작 집 후당에서 가장 가까운 담장 밖에 누런 토필로 1140477─ No.1이라는 조그만 부호가 찍히어 있는 것을 발견했읍니다. 그것을 따라서 No.2 No.3까지를 발견하고 No.4의 위치에까지 가 보니까 어느덧 말살되어 버려서 그 뒤는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오늘 ×× 모퉁이에서 또 우연히 그 부호를 발견하고 그 뒤를 밟아 가다가 이 공을 만나서 여기까지 끌려 왔는데 이 공은 만약 LC당의 존재를 알면 LC당의 당원 상호간의 연락과 회견을 도모하는 부호로서 1140477이라는 (나도 그 의미는 아직 모릅니다마는) 부호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었겠구료.”

“그건 못 들었읍니다.”

“세계적으로 LC당이 사용하는 부호외다. 좀 이상하기는 한 일─ LC당이 엿보는 금액이라는 것은 적어도 몇십만 몇백만이라는 거액이지 돈 천 원이나 만 원 같은 것은 돌보지도 않는데─ 그리고 그런 작은 돈은 돌보지도 않으니만치 가난한 조선에는 아직 지부도 없었는데 조선 경성에서 그 부호를 발견한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 아니외까? 혹은 이 공은 아시겠지만 경성 안에 현금으로 몇십만 원 몇백만 원 자기 집 금고에 넣어 둘 만한 부호라도 있읍니까?”

“글쎄올시다. 그런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없으면 LC당의 조선 잠입은 해석할 수가 없구료.”

해석할 수가 없어? 없는 바가 아니었다. 너무도 명료한 일이었다. 너무도 명료한 일이기 때문에 인준이는 마음속으로 이를 괴롭게 여기었다.

“이 공 정신을 차리시오. LC당의 하는 일은 좀 크외다. 그리고 LC당은 사람의 생명의 귀한 것을 부인합니다. 이 공이 백성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직책을 띠고 있는 이상 좀 바짝 정신을 차리시오. 세계적 범죄사건이라는 것은 아직 생겨 보지 못한 경성 안에서 혹은 놀랄 만한 일이 폭발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좀 잘 정신 차려서 할 수 있는 대로 희생이 작도록 노력해 보시오.”

인준이와 필호 두 사람이 그 찻집을 나선 것은 그들이 거기 들어간 때로부터 사십 분쯤 지나서였다.

그들은 먼저 (아까 인준이가 부호를 보았다는) 구둣방 진열장 앞에까지 가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아까 그곳에 쓰여 있는 이상한 숫자는 다 지워 버리운 뒤였다. 거기서 더듬어서 No.3까지 가 보았지만 아까 인준이가 본 일이 있는 숫자는 모두 지워져 버렸다.

“이 공, 약 반 시간 전까지 분명히 있던 숫자가 다 없어졌소이다. LC당에서는 이런 수단으로써 당원 당원 간의 연락과 통신을 하고 목적을 달한 뒤에는 즉시로 지워 버리는 법이외다. 아까 있던 숫자가 지금 없어진 점으로 보아서 어떤 곳에서 그들은 회견을 하고 의논할 일을 다 끝내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림이 없을 것이외다. 그리고 이것으로 보아서 조선 경성 안에서 LC당이 무슨 커다란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소이다. 이 공의 책임은 크외다.”

“….”

“LC당이 무슨 음모를 진행시키는 이상에는 몇 개의 인명이 희생될 것은 피치 못하겠지요. 그렇지만 그 희생으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대로 적은 한도에 그치게 하는 것이 이 공의 책임이외다.”

이 탐정소설에나 있을 만한 기괴한 사실 앞에 필호는 머리를 수그리고 먹먹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중대한 범죄라 하지만 아직껏 조선 안에서 전개된 범죄들은 모두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고 목적도 단순한 것이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전율할 만한 폭력 단체가 조선 땅 안에 들어와서 조선의 경찰을 상대로 무슨 중대한 일을 꾀하려 한다는 사실에 당면하여 필호는 다만 먹먹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완쇠를 만나 보십시오. 노백작을 만나 보십시오. 만약 그날 밤에 백작을 방문한 괴한이 LC당에 관계된 인물이라 하면 노백작 댁에 권총 사건은 인제 의외의 방면으로 전개될 것이외다.”

“선생.”

“네?”

필호는 눈을 들어서 인준이를 쳐다보았다. 자칭 민주주의자의 일원이라는 인준이가 어떤 임무를 띠고 조선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들어오는 길로 제일 처음 한 일에서 비롯하여 지금 자기에게 주의시키는 여러 가지의 말까지가 모두 그의 임무와는 조금도 관련이 되지 않을 LC당 음모 방지에 있음을 이상히 여기어서….

거기 대해서 인준이가 대답하였다─.

“이 공이 이상히 여기시는 것도 당연하외다. 언제 모두 알 날이 있을 테지. 하여간 나는 내 특수의 임무를 띠고 조선 땅 안에 들어온 사람이외다. 만약 내가 띤 임무가 실행이 된다 하면 무론 법률에 저촉될 것이외다. 실행이 될는지 안 될는지 착수도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릴는지 이것은 모두 아직 미지수외다. 착수도 않고 돌아갈는지 혹은 실행하고 돌아갈는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히 당신네들의 손에 붙들릴는지 이것은 나도 예측치 못할 일이외다. LC당 일은 조선 안에 들어와서 우연히 발견한 일─ 내 임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외다. 내 혼자의 생각으로는 곱다랗게 내 임무를 다하고 이 공을 청하여 축배를 할 예산이지만 사람의 일이 어디 뜻대로 됩니까? 다만 한 가지 지금부터 부탁해 두는 것은 만약 불행히 내가 이후에 경찰에 붙들리는 일이 있다 하면 내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제일 첫 번 알게 된 이 공의 손에 붙들리기─ 이것 하나를 희망과 아울러 부판으로 남겨 둡니다.”

싱긋이 웃으면 이렇게 말하고 인준이는 필호와 작별하였다.

‘LC당의 경성 본거는 어디냐?’

필호와 작별을 하고 자기의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인준이는 연하여 머리를 기울였다.

LC당의 관계자라 한들 조선 땅 안에 여행을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번 당원의 경성 출현은 LC 단순한 여행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들 특수의 부호를 이용해 가면서 하는 가두 연락이라든가 윤 백작 댁 습격이라든가 이런 점으로 보아서 단순한 만유는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LC당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려고 잠입하였다 하면 한두 명의 당원만 잠입하였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십여 명의 당원이 가지각색의 계급의 인물로 가장을 하고 잠입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인준이는 자기의 임무에 방해되는 커다란 방해물을 직각하였다. 경찰이 의심도 할 겨를이 없이 전광석화와 같이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상해로 도로 탈주를 하여버리려고 몸소 자기가 조선 안에까지 들어왔던 이번의 임무가 뜻하지 않은 방해자 때문에 착오가 생기려는 데 대해서 인준이는 속으로 혀를 채었다.

LC당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인준이에게는 너무도 명료하였다. 조선 경찰에서는 이래 두고 두고 연구를 하고 조사를 한 뒤에야 비로서 LC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지만 인준이에게는 너무도 명료하였다.

─ 같은 토끼를 따르는 두 마리의 개─.

인준이 자기의 목적물과 LC당의 목적물과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과히 틀림이 없는 추측일 것이다.

이같은 목적물을 향하여 세계적 범죄 단체인 LC당과 자기와가 여기서 대립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최후의 승리가 어디로 갈는지는 알 길이 없으되 인준이는 자기의 맞은편에서 자기와 대항하려는 놀라운 세력을 보았다.

세계적으로 그 지반을 가졌으며 수천만 원의 기금과 수만 명의 당원을 가진 놀라운 단체가 홀연히 자기의 앞에 나타나서 자기가 바야흐로 집으려는 떡을 가로채어 가려는─ 지금의 인준이외 입장은 이런 불유쾌한 것이었다.

다만 지금 한 가지 자기에게 유리한 점을 억지로라도 찾아 내자면 자기는 그들(LC당)의 존재를 벌써 발견하고 그들을 경계할 준비를 하는데 반하여 그들은 아직껏 자기(인준이)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자기네의 목적물에 손을 댈 사람은 LC당 밖에는 없거니 하고 마음 놓고 있는 점이었다.

그 밖에는 온갖 방면으로 보아서 인준이가 불리하였다. 그 세력으로 금력으로 완력으로 폭력으로 어떤 방면으로 보아서든 저쪽은 세계적이요 이쪽은 개인적이었다.

세계적 단체와 일개인과의 투쟁─ 인제 바야흐로 벌어질지도 알 수 없는 이런 장면을 머리에 그려 볼 때에 인준이의 마음에는 긴장과 함께 일종의 공포심까지 일어났다.

늦은 겨울 아직 꽤 산산한 저녁 바람을 콧등으로 감각하면서 머리를 푹 수그리고 자기의 아파트로 향하여 돌아가는 도중 인준이는 외투 주머니 속에 넣은 자기의 주먹을 몇 번을 힘있게 쥐었다. 표면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한 개 온공한 학자 이상으로는 볼 수가 없는 인준이로되 그의 표박 생활이 낳은 바의 다분의 엽기심과 모험심과 그의 교양이 낳은 바의 범죄 과학에 관한 연구심 등 때문에 표면과 달라 투심에 만만한 인준이의 마음은 이제 장차 전개될 맹렬한 쟁투 때문에 뛰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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