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9장
가을은 완전히 거리를 둘러싸고 생활 속에 젖어들고 있었다.
물든 수목이 아름답고 여자들의 치장이 눈을 끌고 과일가게 앞이 신선한 향기를 풍기게 되었다.
그 시절의 향기와 빛깔 속에서 사람은 한층 긴장되며 왕성히 쏟는 생활의 의욕을 느꼈다.
가을은 의욕의 시절인 듯싶었다. 줄기찬 생활에의 의욕이 세포의 구석구 석에서 넘쳐 나오는 것이었다.
뜰 안의 한 포기의 나뭇가지에서도 물론 잎새들이 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뜻을 일으켜 주고 힘을 복돋아주는 듯 보였다.
적어도 훈은 그 맑게 개인 오전의 가을 나무를 바라보면서 전신으로 시절 의 탄력을 느끼며 솟아오르는 힘을 느꼈다.
반도영화사 사장실에서였다.
김명도와 마주앉아 그에게 긴한 부탁을 받으면서 문득 창밖으로 뜰 안의 나뭇가지를 내다보노라니 알지 못할 힘이 솟아오르는 곳이었다.
영화의 창 작 각본을 써 달라는 청이었다. 그 청을 하기 위해 명도는 일 부러 사람을 보내 훈을 초청한 것이었다.
“……기어이 집필해 주시면 사로서 더한 영광은 없겠습니다.”
거듭 조르는 명도의 간청에 훈도 구미가 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사례를 물론 예에 어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드릴 작정이구요.”
명도는 즐겨서 시작한 영화회사의 일이라 이름이 사장일 뿐이지 계획, 경 리, 각반 일을 거의 혼자 손으로 맡아보다시피 하는 처지였다. 원작의 교섭 은 물론 사례에 관한 것도 자기 혼자의 뜻과 요량으로 적당히 작정했다.
“사례가 문제가 아니라 ──”
“그럼, 더욱 거절하지 마시구 ──”
“짧은 시간에 생각을 해낼 수 있을까 해서요.”
“가을철을 이용해서 촬영을 마치려는 까닭에 급히 서두는 것인데 촉박은 합니다만 특히 생각을 하셔서.”
훈이 망설이는 것을 명도는 반은 벌써 승낙의 태도임으로 알고 조급히 결 론으로 훈을 내려 씌우려는 것이었다.
“두 주일 안으로 완성될 것을 믿겠습니다.”
자리를 일어서면서 벌써 용담은 끝났다는 듯이 밖으로 훈을 끄는 것이었다.
촬영소는 다른 곳에 둔, 순전히 사무만을 위한 영화사라고는 해도 온채의 집을 쓰고 있는 이 구석 저 구석에는 배우와 종업원의 그림자도 펀득펀득 띄어서 어딘지 없이 화려한 공기가 떠돌고 있다.
영화사업에만 따르는 그 특유한 공기가 훈에게 일종의 자극을 주는 것이 었다.
거리에 나와 훈을 그릴로 이끌었다.
오찬을 시작하면서,
“.......터놓구 말씀 드리면 이번 영화를 이렇게 조급히 서두르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닷한 내막도 아니었으나 대단히 비밀인 듯한 어조로,
“선생두 아시는 여배우 단영의 청이 기어쿠 원작을 선생께서 얻으라는 것입니다. 간곡한 부탁을 저두 저버릴수 없어서.”
“단영의 청이요.”
초문의 소식에 훈도 귀가 뜨이면서 부탁의 내용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 겨 보았다.
“물론 단영 자신이 출연할 것이니까 여주인공의 배역을 완전히 살리는 작품을 희망합니다만.”
“단영의 청이라구요.?”
또 한번 외어 보면서 단영의 자태를 새삼스럽게 가슴속에 떠올려 보았다.
“단영 때문에는 사실 있는 애를 태우고 간을 다 녹이면서 여러 해를 바 쳐 오는 접니다만 ── 그렇게 어여쁜 노새같이 어거하기 힘든 여자는 처음 이예요.”
명도의 아닌 때의 주책없는 하소연이었으나 사실 훈도 그들의 사이를 짐 작하지 못하는 배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훈 자신 단영에게는 마음으로는 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시 돋친 줄기 위에 한 송이의 야물어진 해당화 ── 그것이 단영의 인 상이라고 할까. 열정을 머금은 붉은 꽃은 모진 가시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 은 까닭에 사람들은 탐스럽게 우러러볼 뿐 좀해 손을 대지 못 한다. 언덕 위 해당화에게는 그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다 속의 산호주다. 푸르게 내다보이는 바다 속에 붉게 잠겨 있는 산호주의 수풀을 자나깨나 꿈꾸는 것 이나 언덕 위와 바다 속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모래밭에서 바닷바람을 쏘이고 조수냄새만 맡고 사는 해당화는 슬프기 짝없다. 바람 속에 산호주의 냄새를 맡으나 걸어가 산호주를 만날 길은 없다. 언덕위에서 하염없이 바다 를 바라보면 언제나 서글프다. 반기며 날아드는 봉접은 많으나 산호주의 꿈 에 잠겨 있는 그에게는 하나도 긴한 것이 없다. 가시를 준비해 가지고 막아 내기에는 급급했다. 축들은 좀해 손을 대지 손울 대지 못한다. 야물어진 그 한 송이 꽃을 탐스런 것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단영을 싸고도는 뭇 사내들 속에서 가시의 탄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 명도들이었으나 훈도 그 속의 한 사람임은 훈과 단영만이 아는 일이었다. 퇴폐의 꽃일지는 모르나 퇴폐의 매력에 훈은 누구보다도 끌리는 것이었다.
“한 송이 악의 꽃이야.”
하는 동무들의 비판을 들으면서 ── 악의 꽃이므로 더욱 기우는 정을 금할 수 없었다. 악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은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하나의 숨어서 흐르는 정인 모양이다.
단영이 일마에게 대해서 애태우고 있음을 훈도 잘 안다.
어떤 때 일마에게,
“자네가 평생에 한 번 가지겠다는 굉장한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사랑의 대상으로 단영의 어디가 부족하단 말인가. 단영은 너무도 붉은 꽃인지는 모르나 그러니까 되려 굉장한 사라의 대상으로 적당 하지 않은가.”
걱정도 아니요, 충고도 아닌 이런 말을 던진 일이 있었다.
“연애는 취미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자네 취미에 맞는 다구 반드시 내 취미에 맞을 게 아니거든, 그렇게 비위에 맞거든 자네나 어서 한몫 대서 보 게나.”
일마가 대답하는 것을 훈은 쓸쓸하게 받으면서,
“내 취미는 내 취미지만 단영의 취미라는 것이 있을 테니깐 문제가 그렇 게 단순하든가.”
말하는 것이었다.
일마는 일상 원하던 굉장한 연애의 표본으론지 만주서 나아자를 데리고 왔다. 단영의 심사가 절망 속에서 얼마나 뒤흔들리고 있을까를 훈도 잘 짐 작할 수 있다. 그의 마음속이 가엾어지면서 ── 그에게 대한 훈 자신의 정 이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 여전히 솟는다. 오늘 명도에게서 단영의 뜻을 거 쳤다는 각본 부탁의 일건을 듣고 더욱 감회를 금하지 못하던 것이다……
식사를 마치려 할 때 훈들은 같은 그릴 문간에 나타난 단영을 문득 발견 했다.
훈과 명도가 사장실에 잇을 때 단영도 영화사에 있었던 것이다. 훈들이 나 간 후 얼마 있다가 단영도 배우 주손과 함께 거리로 나와 훈들의 뒤를 따랐 던 것이다. 훈과 명도의 그날의 교섭을 알고서임은 물론이었다.
명도는 단영을 가까이 불렀다. 반드시 식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닌 듯 훈들 의 식사가 끝났을 때 단영은 벌써 주손과도 떨어져 훈들을 따라 밖으로 나 왔다.
“오래간만에 저두 얘기가 있어요.”
둘이 거리를 걸었다.
“사장은 그만 물러가셔요. 저두 제 부탁을 좀 하게.”
장승같이 머물러 선 명도를 흘겨보면서 단영은 훈과 함께 멀어가는 것 이었다.
단영의 조금 풀 없는 자태를 훈은 가을의 탓이라고 느끼면서, 물론 그의 마음의 그림자를 살피지 못하는 배 아니었다. 가을은 의욕의 시절이자 또한 감상의 시절이다. 생활의 건강한 의욕을 느끼는 훈에게도 그날 한 줄기 감 상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뒷거리로 들어서자 단영은 핸드백 속에서 담배갑을 집어냈다. 익 숙한 솜씨로 권연을 태워 무는 것을 훈이 신기한 것으로 바라보노라니,
“요새 담배가 부쩍 늘었답니다.”
단영은 생긋 웃으면서 연기를 내뿜는다.
“여자의 용기가 사내보다 훨씬 웃질인 모양인데 ── 난 벌써 십년째 담 배를 배우려는 것이 아직두 옳게 피우지는 못하니.”
훈의 솔직한 고백이다.
“── 무서운 생각이 나서 흡연을 종시 못하는구료. 객겨서 쓰러질 듯한 생각이 들군 해서 ── 단영이 나보다 웃질야.”
“첨엔 독하고 떫구 쓰더니 차차 구수해지면서 입에 맞게 되었어요. 독이 라는 것두 정만 들이면 차차 좋아지는 모양이예요.”
“그놈의 독을 정 들일 수 있어야지.”
하는 훈에게 보라는 듯이 단영은 깊게 연기를 머금고 솔솔 뿜으며,
“홧김에 담배밖에는 먹을 게 있어야죠. 실상은 맛을 알구 먹는 것두 아 닌 모양이에요. 거저 시간을 태워 버리구 뉘엿거리는 속을 가라앉힐라구 대 중없이 푹 푹 피우는 것이죠.”
담배 먹는 이유라는 “ 것두 그렇게 단순치는 않구료. 단영이 담배 먹는 이유 ── 가을의 글줄이나 우러나겠는데.”
“만주서 돌아와서부터 하루에 다섯 갑씩 태우게 되었답니다. 도룡뇽이 안개를 뿜듯 연기로 온통 몸을 감추어 버리자는 셈이죠.”
“연기가 속 몸을 감춘다 ── 나두 다시 담배나 배워 볼까.”
단영은 반쯤 탄 것을 버리더니 다시 새것을 피워 물었다. 다섯 갑을 태우 는 이치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반개씩을 허비해 버리며 손을 쉬지 않는 동안에 다섯 갑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세상에 꼭 한가지의 원하는 물건이 남았을 때, 선생은 어떻게 하시 겠습니까.”
단영의 목소리를 수수께끼같이 들으면서 훈은 얼삥삥했다.
“잡을 수 없는 언덕 위에 것이든 평생 맘속으로 꿈이나 꾸는 수밖엔 더 있수.”
“꿈만으로 사람이 만족할 수 있나요.”
“만족 할수 있구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꿈밖엔 남아진 것이 없으니깐 말요.”
“꿈으로 해결된다면 세상일이 얼마나 편안하구 수월하겠어요. 원하는 물 건이라면 필경에는 가져 보구 맨져 보구 뜯어 보구 하지 않으면 안타까워서 배길 수 없는 사람의 천성이니 걱정이죠.”
“맨져 보구 뜯어 보구 할 수 없으니 꿈이래두 꾸구 지낸단 말이죠.”
어조를 갈아서,
“── 가령 그 원하는 것이 사랑일 때 사랑은 한쪽만의 뜻으로 되는 것 은 아니니 그때 꿈이라는 건 기막하게 자유로운 행복이거든. 가령 내가 단 영을……”
훈의 농에 단영은 비로소 마음을 놓으면서 터놓고,
“일마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를 생각 중이에요.”
비로소 일마의 이름을 들으면서 마음의 그림자의 초점을 헤쳐 보이는 것 이었다.
“── 꿈이구 정신이구 제겐 다 소용없어요. 범이 토끼를 잡듯 앙칼진 발톱으로 목을 잡아서 할퀴구 뜯구 시원할 때까지 피를 마시지 않구는 견딜 수가 없어요. 숨김없는 욕망이 별것 아닌 이것예요.”
“시원할는지는 몰라두 ── 단영이 그런 어여쁜 범이 될 수 있을까가 문 제지.”
“선생께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단영은 새삼스럽게 아첨하는 태도였다.
“일마를 마지막으로 꼭 한번 만 만나게 해 주셔요.”
“그게 한 가지 청이란 것요?”
“저는 이젠 만나주지 않는답니다. 선생께 부탁하는 수밖엔 없어요.”
“만나서 할퀴구 뜯구 하겠단 말이지. 동무를 불쌍한 토끼로 팔아 넘긴 다?”
“대신 선생의 청을 들어 드릴께요. 무엇이든지.”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 노릇을 하란 말인데 은전 서른 잎으론 내 맘을 살 수 없어.”
“은전이 싫으면 뭐든지 드린다니깐요…… 제 인생은 어차피 많이 남은 인생은 아니예요. 적당한 때 깨끗하게 살러 버리려구 해요. 일마를 마지막 으로 만나겠다는 것이 결코 과한 욕망은 아닐 것 같아요.”
거기까지 실토를 하는 단영의 심중을 훈은 측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단영과 일마 두 사람의 승부에서 이겨서 양양한 일마에게 보다도 가엾은 패자 단영에게 동정이 감은 자연스런 일이다. 일마를 한번 대면함이 단영에게 그렇게 중대한 뜻을 가지는 것이라면 아무리 친우일지언정 그의 뜻을 한두 번만 휘어서 잠시 단영 앞에 굽히게 함이 그를 리가 없을 듯싶다. 몇 시간의 희생쯤이 한 사람을 구하는데 그다지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 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훈은 애걸하는 단영에게 선선하게 대답하고 일마를 상대로 두 사람의 비 밀의 계약이 그 자리에서 맺어졌다.
“그럼 저녁에 어김없이 일마를 빼내 올 테니.”
“선생의 힘을 믿겠어요.”
“큰 음모나 꾸미는 것 같아서 맘이 좀 떨리기두 하는구먼 ── 요행 일 마가 내 말이라면 하늘같이 믿는 터이라……”
훈과 헤어진 단영은 반날 동안 혼자 생각에 잠기어 솟아오르는 흥분을 금 할 수 없었다.
훈이 무심히 던진 음모라던 말이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제 스스로 감격을 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사실 단영의 마음속에는 훈도 모르는 단영 자신도 집어내 말하기 어려운 한 폭의 숨은 음모가 있었고 계획이 서리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율연히 몸이 떨리는 그 계획에 자신 겁을 먹으면서도 냉정히 차근차근 마음을 정리해 갔다.
“내게 남은 꼭 한 가지 길이다.”
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담하고 엄청난 계획이다 .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내버리려고 결의한 그 의 심경으로는 당연한 귀결일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그것 한 가지를 위해서 ──”
모든 것을 버려도 좋다고 작정했다.
단영은 원래부터 열정의 노예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품성이다. 열정의 마지막 꽃을 찬란하게 피워 보고 사라짐이 그에게는 여자로서의 본의였다.
사랑하는 것은 눈앞에 두고 꿈으로만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가져보고, 만져보고, 뜯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 단영의 이런 신념은 언제나 변할 때가 없었다.
훈과 약속한 조그만 그 집으로 일찌감치 가서 한 간방에 요리도 분부해 놓고 보이들에게 필요한 말도 일러 놓았다.
방에 우두커니 앉아 시계를 보며 미심해 하고 있는 동안에 훈이 나타났다. 틀림없이 일마를 동반해 온 것이었다. 신기한 생각이 나서 단영은 벌떡 일어나 두 사람 앞에 막아섰다.
일마는 놀라는 눈치였다. 약속과는 다르다는 듯이 훈을 원망하는 듯 바라 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단둘이 소설 얘긴지, 각본 얘긴지를 하자구 사 람을 끌어내더니.”
“내가 좀 있다구 소설 얘긴 못하나요. 왜 그렇게 언제나 눈에 가시 같이 만 보여요?”
단영이 곧 목소리를 누그리며,
“만주서 온 후 첨이길래 저녁이나 한 때 드릴까 생각했었죠. 과히 허물 마세요. 부인 생각이 나시더래두 좀 앉으시구. 짧은 인생을 그렇게 칼날같 이 엄격하게 저밀 필요가 뭐예요.”
훈이 그 뒤를 받아서 데설데설 노닥거리는 바람에 일마도 하는 수 없이 얼굴빛을 누그리고 자리에 앉는 수밖에는 없었다.
“끌어내기에 얼마나 고심참담을 했게 ── 홀몸일 적에는 얼마든지 자유 로 할 수 있던 동무두 장가만 들면 꼼짝없이 매인 몸이니 ── 세상에 결혼 이 무서운 것야.”
훈이 야유하는 듯 일마 대신에 도리어 단영을 보니,
“나아자가 만만한 여자가 아니죠 ── 더구나 요새 신혼 기분이래서.”
단영도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찰거머리같이 사시장철 붙어만 있는 게 부부라면 결혼은 죄수나 노예의 길밖엔 더 되나.”
“날 이렇게 윽박어대자고들 끌구 나온 셈인가.”
일마가 덜 좋아하는 것을 단영은 위로한다는 것이 되로 조롱하는 셈이되 었다.
“정다운 부부를 보구 샘이 나서 하는 소리죠 ── 그러나 나아자는 저두 잘 아니 걱정하실 것은 없어요. 나중에 책임을 묻는다면 저두 한몫 나서서 설명해두 좋으니까요.”
“잘들 노닥거린다 ── 대체 오늘밤 목적이 뭐란 말요.”
일마가 화를 내고 행여나 나가 버릴까를 겁내서 단영은 그의 마음을 잡기 에 애쓴다.
“만주서 너무두 알뜰한 대접을 받았기에 답례를 할까 해서요. 여행담 두 들을 겸.”
“단영은 만주 여행을 안하구 왔단 말인가.”
“욕당한 이야기나 할까요. 카바레와 호텔에서 기억이나 하세요. 남을 그 렇게 모욕하구두 내 사는 건 내 특권이로라구 늠실거리긴가요.”
“누가 누굴 욕준 셈일꾸. 남의 방에 멀쩡하게 침입하구서두 되로 욕을 받었다구.”
“언제나 그 원수 안 갚나 두구 보죠. 사람들 앞에서 욕주구 울리구 ── 여자 하나의 마음쯤 아무리 무시하구 짓밟어두 좋다구만 생각하는 야만인은 언제나 한번 변을 당하구야 버릇이 떨어져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다든가. 내가 복수의 날 얼마나 맘속에 곱아 왔게.”
“에그 무서워라. 원수를 갚겠다구. 어서 얼마든지.”
“장담은 그만둬요. 사람이 장잠만은 안할 것이라나.”
“장담을 할게. 어서 그 맘먹은 복수나 해보라니까.”
“내일 아침에 후회하는 꼴을 누가 다 볼꾸. 그 육신을 땅바닥에 눕히구 엉엉 짖는 꼴을.”
물론 그 말의 내용을 아는 것은 단영 한 사람뿐이었다. 단영의 가슴속에 만 묻혀 있는 하나의 비밀이었다.
일마와 훈은 암팡진 여자의 ‘농’에 되려 마음이 유쾌해지면서 처음에는 서름서름하던 만찬의 자리가 차차 화해가고 즐거워 갔다.
“술두 쓰다.”
유별스럽게 입에 쓴 그날 밤의 술을 단영이 섬기는 대로 받아서 기울이면 서 일마의 꽁하던 마음도 점점 풀려 가는 것이었다.
“원래 쓴 것이 술인데 사내대장부가 술쯤에 항복을 하구야 내 복수를 받 을 수가 있수?”
단영이 추스르는 바람에 사실 일마는 없는 주량을 내서까지 입에 대고는 잔을 한 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이 들이켰다.
훈도 일마와 거의 같은 양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뉘 알았으랴 단여의 , 소위 복수하는 것은 참으로 그 술이었던 것이다.
유별스럽게 입에 쓴 그날 밤의 술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다지 술에 약하지 않는 일마와 훈이언만 보통 때의 반도 못되는 주량으 로 곤드레만드레 취해 버렸다. 술맛에 취한 것이 아니라 외에 또 그 무엇에 도 취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모르는 결에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깊은 잠에 잠겼다.
그 모양을 보고 단영은 기뻐도 했거니와 한편 겁을 먹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이를 부르더니 두 사람의 조치를 각각 다르게 분부하는 그의 목소리 가 약간 떨리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마는 단영의 아파트에 있었다.
새벽녘이 되어 침대에서 잠이 깨어 자기의 몸이 의외에도 단영의 방에 누 워 있음을 깨닫고 일마는 크게 놀랐다. 그렇게 된 간밤의 곡절이 번개 같이 몸을 흐르며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단영과 같은 침대 같은 요 속인 것이다. 옆에 누운 단영의 몸을 밀치며 벌떡 일어나니 벌써 밤은 완전히 밝은 때이다. 창이 환하다. 모르는 결에 허물을 가지게 된 하룻밤은 육체와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 놓 고 지금 활짝 새인 것이다. 나른한 몸과 정신이 금시 긴장되면서 날카로운 것이 육신의 중추를 찔렸다.
“간밤에 대체 무엇이 일어났었누.”
단영도 결코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만을 감았을 뿐 말끔한 정신 으로 멀뚱거리고 있었다. 일마보다도 먼저 깨어나 잠 안 오는 새벽을 갈피 갈피 생각 속에서 곰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마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신이 좀 드셨어요?”
따라 일어나 요 속에 발을 뻗고 나란히 앉으려니 탐탁한 일마의 육체가 바로 옆에 앉은 것이 별안간 신선한 욕망을 일으켜 준다.
몸을 쏠리며 그의 목덜미에 더운 입을 갖다 대려다가,
“요 어여쁜 악마!”
하고 밀치는 바람에 단영은 거의 침대 밖으로 밀려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비싸게 “ 굴지 말아요. 당신의 몸이 뭘 그리 순결하다구.”
얇은 슈미즈 바람으로 침대 아래로 내려서는 단영의 자태에 일마는 새삼 스럽게 부끄럼을 느끼면서 똑바로 그를 바라볼수 없었다. 곧 자기 자신의 자태를 돌아보면서 낯을 붉히고 옷섶을 여미며 부리나케 침대를 내려섰다.
“나를 그래 어 어떻게 했단 말인구, 이 요물 같으니.”
달려들어 단영의 머리를 벅벅 쥐어뜯고도 싶었으나 ── 이제는 벌써 그 것도 무의미할 것 같아서 내의며 양복이며 어지럽게 널려진 옷가지를 주섬 주섬 주워 모을 수밖에 없는 일마였다.
“얼마든지 복수를 하라구 거듭거듭 장담을 하더니 ── 이제 와서 대장 부 답지 못하게 싫은 소린 뭐요 ── 그렇다구 한번 새겨진 허물이 벗어질까.”
“복수, 이게 복수란 건가. 괴악한 음모요 죄악이지 이게 복순가.”
“아무러나 내 화나 풀었으면 복수지 칼을 들구 격투를 해야만 맛이겠수.”
“내가 만약 검사였다면 이 자리로 고발을 하겠다 ── 부정한 술로 사람 의 정신을 뽑구, 그 동안에 악을 하다니 훌륭한 범죄야.”
“고발이구 뭐구 해보지. 제단에 올랐던 가엾은 희생의 양이 무얼 큰소릴 해요. 그만한걸 다행으로나 여기지 못하구 ── 내 계획이 살로메의 계획이 아니었던 걸 기뻐나 해요. 당신이 요하네가 아니었던 것이 천상의 다행이었 지 내 결머리로 당신의 목인들 못 잘랐을 줄 아우?”
단영의 살스러운 소리에 사실 일마는 뜨끔해지면서 대꾸도 없이 옷을 분 주하게 갈아입는 것이다. 단영의 생사를 가리지 않는 살로메적인 무더운 열 정은 일마의 잘 아는 바였다.
“어서 놀라지나 말아요 ── 계획을 생각한 장본인은 나였든지 몰라두 침대에서의 의사는 순전히 당신의 것이었음을.”
의외의 한마디에 일마는 옷 입던 손을 휘들휘들 떨면서 금시 얼굴이 화끈 달았다.
“뭐 뭣이라구. 사람을 농락해 놓구두 되려……”
“그러게 놀라지 말라구 그랬죠. 남녀 중에서 농락한 것이 누군지는 참으 로 조물주만이 알 일이예요. 아담이 이브를 꼬였는지 이브가 아담을 꼬였는 지 ── 신화만을 믿을 수도 없는 우리가 어찌 안단 말요.”
“사람을 속여 놓구두 이제 와서 그런 발뺌을 하려구……”
일마의 손이 자기도 모르는 결에 달려가 단영의 볼을 갈기고 있었다. 단 영의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정말이라면 ── 그 무서운 진실에 소름이 치밀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렐 것이 없어요. 당신두 결국 한 사람의 사내였던 것이구 사 내의 뜻아라는 걸 당신을 통해서 똑바로 알았어요. 조금두 황당해 할 것이 아니라 피차이 맘을 곰곰이 반성해 보는 것이 어때요. 사람의 천성이라구 할까 본능이라구 할까, 그것이 그다지 고귀한 것도 신령스런 것두 아니구 정조라는 건 말하자면 하나의 자세요, 태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신의 결백 이라는 것두 일종의 태였을 뿐인 것을 ── 자기만의 장한 듯 그렇게 남을 모욕할 것은 없었단 말이요.”
단영의 한마디 한마디가 뼈 속에 잦아들면서 일마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더 단영의 볼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화는 벌써 단영 한 사람에게 대해서 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술 취한 속에서 사람이 무얼 할지 뉘 아나. 정신을 온통 뽑아 놓구 그 잠꼬대 속에서 한 허수아비의 행동을 가지구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게 그 르지.”
입에 보나 가리운 듯 말소리도 약하고 작다.
“허수아비의 행동인지 무엇인지는 모르나 난 그 행동 속에 숨은 인간의 천성이라구 할까, 잠재의식이라구 할까, 그걸 말하는 것에요. 천성과 본능 은 많은 사람이 다 같다는 것, 성인두 없구 군자두 없구 코가 하나구 눈이 둘이듯, 다 같은 범상한 지아비와 지어머니라는 것 ── 내가 기뻐하는 건 이 발견이예요. 신대륙의 발견 이상의 발견 ── 발견은 만족을 주었어요.
내겐 벌써 두려운 것도 없구 겁나는 것도 없구 당신에게 대한 우상적 존경 두 사라졌어요 ── 그렇다구 물론 당신을 경멸하는 건 아니나 아직두 이렇 게 좋아하구 사랑하니까요. 그 뻐기는 것이 얄밉구 아니꼬울 뿐이지.”
일마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단영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새겨들으며 가만 히 있기가 멋쩍어 즐기지 않는 담배를 붙였다.
“……결국 책임을 나누자는 셈인가. 일을 저질러 놓구 나서 혼자만 악마 가되기 싫으니까 한 굴레 속에 나마저 잡아넣자구 버둥거리는 모양이지.”
“버둥거리긴 누가. 내게 책임문제가 돌아오면 당신두 꼴 좋겠다. 어디 세상에 공포나 좀 해놀까. 꿀리는 게 누군지 알아보게. 난 조금두 겁날 것 이 없어. 겨 묻은 개가 무슨 개를 흉본다더라. 악마니 뭐니 하면서 ── 아 직두 내 앞에서 그 아니꼬운 영웅노릇을 하구 군자노릇을 하구 싶단 말이지.”
맞선대야 밑천조차 찾을 것 같지 않아서 일마는 담뱃불을 죽이고 자리를 일어섰다.
아무리 속이 “ 달어 해두 악마는 악마거든. 어여쁜 악마 ── 지금 내 심 사가 홍등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구 나가는 폭밖에는 더 되는 줄 아나.”
그 말에서 같이 단영이 모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금시 눈초리가 휘어 오 르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뭐요. 홍등가에서 하룻밤을 새웠다구. 이 멀쩡한 악한 같으니.”
담배갑을 집어던진 것이 일마의 얼굴을 맞히고 떨어졌다.
“── 그래두 뼈가 살아서. 어디 두고 보자. 내게 항복하구 와서 설설 빌날이 있잖은가. 비밀의 열쇠가 내 손아귀에 꼭 쥐어졌거든. 이 열쇠만 한 번 던지는 날에는 당신의 그 알뜰한 결혼생활두 산산이 조각이 날 것을 각 오나 하구 있어요, 큰소리 말구. 나만 더 노엽혀 보지. 괜히.”
위협의 말만이 아니었다. 단영은 자기의 곁머리를 위해서는 사실 무엇을 할지 헤아릴 수 없는 여자이다. 일마는 뜨끔해지면서 이마에 땀이 빠지지 돋았다.
“어서 나아자 앞에 가서 변명할 말이나 잘 생각해 봐요 ── 별안간 볼 일이 있어 시골 내려갔다가 새벽차로 왔다든지, 촌에는 우편소가 없어서 전 보를 못 쳤다든지 ── 그럴듯한 거짓말이나 꾸며 봐요. 행여나 나아자가 짜증을 내구 달아 나왔다간 정말 야단일 테니.”
일마는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대꾸를 못하며 방문을 나갔다. 흡사 꾸중 을 받으며 나가는 아이의 모양이었다. 단영을 설굳혔다가는 사실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양같이 온순한 자태였다.
일마는 이른 아침의 거리를 걸으면서 떨떨한 입맛을 금할 수 없었다.
단영의 앞에서 큰소리는 해보았으나 사실 홍등가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나 오는 기분은 아니었다. 일마에게는 홍등가에 드나들어 본 경험이 없지 않았다. 그런 때의 그 감격 없는 범상한 기분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고집스럽게 남는 것이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공포도 있었고 부끄럼도 섞였다.
시렁 위의 한 개의 과일을 훔쳐먹었을 때의 흥분 맞잡이는 되었다. 두렵 고 부끄러우나 그 속에는 일종의 숨은 감격이 있었다.
그 감격이 두렵고 부끄러웠다. 아무에게도 고할 수 없는 부끄럼이 불쾌한 감정을 일으켰다. 입맛이 떱떨하고 쓴 것은 반드시 담배를 피운 맛만도 아 니었다.
“누구의 허물이 더 클꾸.”
를 생각할 때 벌써 마음이 괴로웠다.
단영이 일마의 자유를 유린한 것같이 일마 또한 단영의 자유를 밟아준 셈 이 아니던가. 유혹의 시초가 누구였든지 간에 결과에 있어서는 같은 허물을 똑같이 진 두 사람이다. 단영이 일마에게 꿀릴 것이 없듯이 일마 또한 단영 을 면책하고 윽박아댈 염치가 없었다. 단영이 도도하게 내섬기던 말이 한마 디 한마디 다시 살아 나오면서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같은 허 물의 연루자요, 같은 음모의 공모자인 것이지 유독 일마가 단영에게 대해 죄를 물을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가엾은 여자다, 단영은.”
측은한 생각이 나며 그런 위험한 모험까지를 해서 원을 채우자는 단영의 심지에 한 줄기 동정이 없지 않았다. 안타까워하는 심사가 밉다느니 보다는 먼저 딱한 것이다. 애걸복걸하는 여자의 열정이라는 것은 남자에는 역시 한 폭의 풍경으로 바라보이는 것이 아닐까.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정이 일마에게는 번민을 더해 주는 결과가 될 뿐이었다.
단영을 동정하니 더 어쩌자는 것인가. 동정은 동정으로 해놓고 허물은 허물 대로 남는 것이다. 동정으로 말미암아 허물이 지워질 리는 만무하다. 허물 에서 오는 번민은 단영에게 대해서보다도 더 많이 나아자에 대해서 솟았다.
단영에게 대한 마음의 해결은 그것으로서 지웠다고 해도 아내 나아자에게 대해서는 무엇으로서 그 지울 수 없는 허물을 바로잡자는 것일까. 눈앞이 어두워지고 다리가 떨렸다.
사실 호텔에 이르러 먼저 목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고 정신을 맑히고 방에 들어갔을 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나아자를 보고는 선뜻 말이 나가지 않 았다.
나아자는 밤새도록 잠 한숨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눈이 붉고 얼굴이 하 룻밤 사이에 홀쭉 빠진 것도 같다. 그 역 그 자리에서 얼른 말이 나가지 않 은 모양이었다.
“호텔을 나간 길로 별안간 급함 일이 생겨 동무와 함께 저녁차로 시골을 다녀온 것요.”
거짓말을 하면서 일마는 속이 무시무시했다.
“── 내년 봄쯤 교외에 집을 지을까 해서 땅을 좀 살려구 거간이 꼭 어 제래야 틈이 있다구 해서 부랴부랴 떠났던 것인데.”
거짓말은 뒤를 이어 차레차례로 새로운 거짓말을 낳았다. 내섬기면서도 일마는 자기의 재주에 놀랐다 . 한편 단영이 거짓말의 지혜까지를 뙤어주던 것이 뼈저리게 생각났다.
“── 촌이래서 밤중에 전보나 칠 수 있단 말요? 놀랄 줄은 알았으나 하 는 수 없이 시침을 떼는 수박에는 없었소.”
때를 따라 거짓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거짓말이 아니었더라면 그 당 장을 어떻게 모면했을 것인가.
“땅이 나보다두 더 소중한가요?”
“노여 마시오. 두 사람의 집을 지을 땅이 아니오?”
달려들어 안으니 나아자도 거역은 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서 전부가 해결 된 것은 아니다. 일마는 저지른 결과가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럽게 느끼며 몸이 떨렸다.
괴로워하는 것은 일마뿐이 아니었다. 단영도 저지른 일의 결과가 결코 소 홀한 것이 아님을 점점 깨달으며 마음이 무거워 갔다. 당장에서는 통쾌해서 일마의 앞에서 싫은 소리도 해보고 큰소리도 쳐보았으나 혼자 곰곰이 생각 할 때 반드시 통쾌한 것만도 아니면서 서글픈 생각이 들며 마음이 침울해 갔다.
그렇게 원하던 것을 삽시간에 가져 버렸다. 그런 수단으로밖에는 일마의 뜻을 휘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휘인 뜻의 결과로 남은 것이 무엇이던가. 그 인색한 기쁨에서 얻은 만족이 대체 얼마나한 것이었던가.
정신은 놓치고 육체만 잠시 얻었다고 그 만족이 그다지 달가운 것은 못되었다. 차라리 육체를 놓치더라도 정신을 얻었던들 더 보람 있지 않았을까. 가 져 버린 후의 일시의 육체의 감동이라는 것이 참으로 보잘것없고 뜻없는 것 임을 실감으로 깨달으면서 단영은 마음이 서글프기만 했다.
처음부터 각오는 했던 일이나 질서를 깨트리고 악으로 악을 산 것이 더욱 마음을 괴롭혔다. 일마에게 대해서 큰소리는커녕 부끄럽기 짝없다. 다시 또 그와 면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일마뿐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해서 부 끄럽다. 낮을 쳐들고 걸어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악마에게두 후회라는 것이 있나.”
자신을 비웃어 보며 마음을 다져는 보나 그럴수록에 반성은 더욱 맵고 차 게 가슴을 매질했다.
그날 하루 아파트에 박혀 가지가지 생각에 곰싯거리며 해결 없는 마음의 방황을 한 것이다. 다음날 또 하루 거리에 나갈 기력이 없었다.
잠옷바람으로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며 차를 달이고 레코드를 걸고 하는 것이 종일의 일이었다.
저녁때는 되어서 찾아온 것이 훈이었다.
“학질이 걸렸나. 꼼짝 안하구 들어만 있게.”
학질이란 말이 지금의 꼴을 똑 들어 맞춘 것 같아서 단영은 뜨끔하면서 손이 얼굴로 갔다. 얼굴에 그 무슨 표정이라도 났을 것 같다. 휘줄한 자기 꼴이 새삼스럽게 돌려다 보이면서 ── 겸연한 마음을 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범연하고 대담하게 굴려고 애썼다.
“정말 학질이래두 걸린 것 같아요. 골이 뜨끈뜨끈한 게.”
“학질을 뗐어야 할 것이 학질에 걸리다니.”
조롱하는 훈도 피곤해 보인다. 아마도 쓴 술에 톡톡히 혼이 난 모양이다.
“목표만을 노리지 남자까지를 골릴 필요야 있었나. 난 대체 무슨 꼴인구. 함정 속에 함께 끌려들어간 토끼두 아니구.”
“노여워 마세요. 그만한 희생쯤.”
단영은 미안한 듯 훈의 앞으로 나서며,
“교환조건으로 계약하구 하룻밤 동안의 희생을 산 것이니 대상을 반드시 갚아드릴 테예요.”
“무슨 대상으로 갚잔 말인구. 몸 피곤한 것쯤이 문젠가. 상한 내 비위를 무엇으로 바로잡으려구.”
“내가 일마를 원했듯 당신은 날 원하지 않았어요? 일마를 내 희생으로 바쳐 주었듯 어서 날 희생으로 하란 말예요. 얼마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온전히 한 몸을 맡긴다는 듯 훈에게로 쏠리며 몸을 던지다시피 한다.
“자, 난 지금 당신 앞에 바쳐진 양이에요. 어서 뜻대로……”
두 팔을 훈의 목에 던지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을 때, 훈이 날쌔게 몸을 피한 까닭에 단영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이 이렇게두 타락했었나. 자랑을 잃었나. 난 단영의 맘을 얻고저 한 것이지 이렇게 희생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오.”
“내가 맘을 바친다면 어떡하시겠어요.”
“자랑을 잃은 여자를 난 사랑할 수 없수. 교만하고 도도할 때의 단영을 사랑한 것이지 이제 이 타락한 꼴을 누가……”
그 한마디가 단영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자기가 일마에게 느끼는 것 을 훈이 지금 그대로 말해준 셈이다. 참으로 마음을 얻지 못하고는 사랑은 뜻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