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공무한/8장
이튿날.
연회장 만해의 집에서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아침부터 집안이 몹시 수선스 러웠다.
수선스럽다고 해도 휑휑하게 넓은 집안에서 단 한 사람 여자의 목소리만 이 야단스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흡사 주인 없는 집안같이 여자의 어성이 높다.
사실 그날은 주인 없는 집안이었다. ─ 만해는 간밤을 밖에서 새우고 아 침이 늦어도 들어오는 기색이 없었다. 가정을 가진지 칠팔년에 처음 있는 괴변이었다. 아내 남미려의 어성이 높은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식구라고는 외에 젊은 식모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따라서 미려의 싫은 소리의 대상이 그날 애매하게도 그였던 것이다.
미려는 지금 노염의 대상이 바로 식모인 듯이 그에게 야단 호령이 자심하다.
“그래……어제 아침 나가실 때 별다른 눈치가 없었더냐 말이야.”
미려는 만해와는 침실이 다르고 일어나는 시간이 각각 다른 까닭에 두 사 람의 집안에서의 행동은 반드시 일치되지 않았다. 미려가 침실에서 일어나 나왔을 때 남편은 벌써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나간 때가 많았다. 지난날 같 은 날이 그런 때였다 . 늦잠을 자고 났을 때 남편은 벌써 집을 나간 뒤였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을 못 본 지가 전전날 밤부터 벌써 사흘째였던 것이다.
“아주 눈치두 말씀두 없으셨어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식모의 심상한 대답에 미려는 불만을 느끼면서,
“어제 저녁엔 사에서 기별이 없었구.”
어제 오후 미려는 거리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던 까닭에 사에서의 기별 유무도 물론 식모에게 묻는 수밖에는 없었다. 가정에서의 주부는 미려 가 아니고 식모였다. 미려는 만해와 마찬가지로 자기 개인과 일신이 중요한 것이어서 가정 일은 대개 식모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부부간의 소식은 피차 에 식모를 통해서 알고 전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이날의 남편의 소식은 한집안의 열쇠를 쥐인 식모에게도 아는 바 못되었다.
“없었어요. 아무 기별두.”
“그럴 리가 있나. 아무 기별두 없이 밖에서 밤을 새우다니 그런 법이 세 상 어느 곳에 있을구 ─ 식모가 우리 집에 들어온 후 그런 일이 한 번이나 있었던가. 어디 있었던가 말해 봐요.”
족치는 바람에 식모는 공연히 뜨끔해지면서,
“그야 없었죠. 한 번두 그런 일이 있을 리 있었나요.”
“그랬겠다. 한 번두 없었겠다. 있을 리가 없었겠다. 그런데 웬일인구, 오늘 이럴 법이 천하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고는 식모도 대답할 바를 몰라,
“글쎄요.”
얼버무리면서 그 야단스러운 부인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식모의 눈으로 보면 자기가 주부격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는 하고 있는 그 보통이 아닌 집안의 부부의 풍습이 항상 이상하게 보였다. 부부는 집안에서 는 각각 독립된 한 사람이요, 그 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부부로서의 자격 보다도 중요한 모양이었다. 부부라는 것은 다만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 는 표정일 뿐이요, 두 사람의 거동은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았다. 잠자는 방 잠자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이 서로 어긋나는 때가 많은 것이요, 한 방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때라고는 극히 적었다. 어느 나라 어느 고장의 법식인지 그 야릇한 풍속에 식모는 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피차에 즐겨서 그런 살 림을 하는 그들로서 남편이 하룻밤 밖에서 잤다고 펄펄 뛰는 아내의 꼴 또 한 식모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날의 그 법석은 그렇듯 수선스러워서 만약 그 당장에 초인종 소리만 안 났더라면 언제까지 애매한 식모를 못살게 굴었을는지 모른다.
식모가 뛰어나갔을 때 문간에는 S전문학교 교수 안상달의 부인 혜주가 서 있었다.
“부인이세요?”
혜주를 보고 식모는 다른 때보다는 한결 반가운 생각이 났다. 가뜬한게 단장을 하고 나타난 그의 모양이 그날 그 부산한 집안에서는 유별스럽게 신 선하게 보였던 것이다.
“들어오세요. 아씨 계셔요.”
식모는 반가운 판에 내섬기면서 제 마음대로 혜주를 응접실로 인도하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안교수 부인 오셨어요.”
하고 미려에게 고하는 것이었다.
혜주는 미려와는 학교 때부터의 친한 사이로서 미려에게는 꼭 한 사람의 알뜰한 동무였다.
자주 놀러오는 그와는 식모도 낯이 익었다. 그가 나타났으므로 말미암아 미려의 흥분도 가라앉을 것이 사실로 식모가 특히 반가워한 것은 그 까닭이 었다.
식모의 목소리에 미려도 겨우 얼굴빛이 누그러지면서 그 꼴 그대로 응접 실에 나타났다.
“교수 부인은 이렇게 방문두 이른 법인가. 아침부터 말쑥하게 채리구 나 섰으니.”
스스럽지 않은 사이라 두 사람은 언제나 농으로부터 말을 시작했다.
“이른 게 뭐야. 오정이 가까운데 정신이 빠진 품이 무에 있은 모양이지 ─ 녹성음악원 원장의 그 꼴은 또 무언구.”
조롱을 받고 미려는 비로소 어지러운 자기의 모양을 돌아보고 벽 위에 시 계를 바라보았다. 동무의 말대로 어느덧 오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화가 나서 배길 수 있어야지.”
의자에 주저앉으며,
“댁의 안선생두 더러 그러는 수가 있수?”
찬찬히 바라보니까 혜주는,
“뭐 말야. 유선생이 어쨌단 말야.”
다구지게 파묻는다.
“어제 나간 채 안 들어왔구료 ─ 밖에서 밤을 새우면서.”
“밤을 새우다니.”
혜주도 천연스러울 수는 없었다.
괴변인걸 개벽 “ ─ 이래의 괴변이야. 남편이 가정 밖에서 밤을 지우다니.”
부채질하는 바람에 미려는 흥분이 새로워지면서,
“그까짓 아무러나 화를 내지 않으려구 해두 제절로 나는구료.”
“알구 보니 당신들의 그 개인주의의 당연한 결말 같은데 화를 내서 무엇 하우. 남편이 아무렇게 하든 자유의지의 소행이거니만 생각하면 됐지 화를 낸다는 건 지는 점이 아닐까.”
“내 개인주의가 아직두 철저치 못한 탓인 모양이야 ─ 어떻게 하면 좋을꾸.”
“세상 남편치고 개인주의가 아닌 사람이 하나나 있어야 말이지. 누가 착 하구 누가 악한 게 있나. 다 일반이니.”
“안선생두 더러 그러나.”
“외박하는 일이야 없어두 맘속으로야 무얼 생각하는지 뉘 알겠수. 다 그 렇겠지만 결혼한 지 칠팔년이나 되면야 가정에 꿈인들 있을 리 있수. 항상 곰시락곰시락하면서 밖에서 무슨 꿈들을 꾸구 있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지.
자기 꿈속엔 아내는 한 발자욱두 들여놓지 못하게 한다. 그 꿈의 내용이 무 엇인지 알 길이 무어요……요행 집주인은 열중하는 게 학문이라 꿈두 그 속 에 있으려니 하구 안심은 되지만 그렇다구 가슴속을 활짝 헤쳐 볼 수도 없 구 사람은 다 제 혼자야.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각각 저 한사람밖엔 믿을 것 이 없어.”
“아니 혜주가 다 그런 소리를 하나. 혼자만 살뜰한 스윗홈을 가졌다구 모두들 부러워하는 혜주가 ─ ”
“스윗홈이 아니라구 부정하구 싶진 않어두 난 부부관념에 대해선 영원한 회의주의자야.”
“가정이구 뭐구 내겐 다 시들해. 당하구 보니 화가 나긴 나두 ─ 그까짓 정 화나면 분풀인들 못하나. 복수를 생각하면 맘이 통괘하거든. 사랑없는 가정 언제인들 못 뛰어나가겠수.”
“분풀이니 복수니 그런 우울한 소리 그만두구 어서 나갑시다.”
한이 없는 설화에 혜주는 끝을 막으면서 미려를 들추슬렀다.
“실상 오늘 함께 영화구경을 가려구 이렇게 채리구 나섰어. 「남방비 행」이 왔다든가, 오래간만에 좋은 영화일 것 같아서 ─ 자, 어서 채리구 나와요. 기다리구 앉았을께.”
울적하던 판에 차라리 잘됐다고 미려는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화장에 한 시간이 넘어 걸렸다. 축음기를 틀며 그림책을 보며 하면서 기 다리기에 맥이 난 혜주는,
“개인주의의 극치야. 남편이 들어오건 말건 화장에는 한 시간이 걸리구 아내로서 제일 중요한 일이니.”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혜주의 출현과 그와의 회화로 인해 미려의 마 음이 누그러진 것은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맑은 자태로들 거리에 내려섰을 때, 미려의 얼굴 에는 근심의 그림자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고 한가한 가정부인의 유 유한 자태였던 것이다.
그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그 길로 영화관에 들어가 새로 개봉된 「남방 비행」을 보게 되었다.
미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아름다운 한 폭 속에 정신을 흠뻑 뺏겼다.
그렇게 마음에 맞는 영화는 평생에 처음이었다. 흥분과 감격으로 전신의 피 가 유쾌하게 수물거렸다.
─ 변지에 파견된 공사의 젊은 부인은 주위와 생활이 뜻에 맞지 않아 고 독하기 짝없다. 늙은 남편은 청춘의 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돌연히 날 아온 비행사는 어릴 때의 소꿉동무였다. 부인은 그에게서 지난날의 꿈을 찾 으며 청춘의 희망을 붙인다. 탄 자리에 붙은 불은 좀체 끌 수 없어 두 사람 은 열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분별과 냉정은 악마의 것이다. 남편과 가 정을 배반하고 드디어 사랑의 줄행랑을 놓는다. 비록 짧은 순간의 것이기는 하나 지극히 행복스런 해결이다.
미려에게는 거기까지의 이야기가 필요하고 긴한 것이요, 그 다음부터의 지리한 부분은 쓸데없는 잔소리 같았다.
“쓸쓸한 여자가 거기에두 있구나.”
느껴지면서‘자니 올토’의 연기자 한 토막 한 토막 가슴을 울렸다. 사랑 없는 가정의 비극이 절실한 실감을 가지고 미려를 쳤다.
그 한 시간 반 동안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훌륭한 진리를 새로 발 견해 낸 듯 미려는 안타까운 만족 ─ 웬일인지 흐붓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이 었다 ─ 을 느끼며 혜주와의 함께 복도를 걸어 내려왔다.
“그런 해결의 방법을 혜주는 어떻게 생각하우.”
“옳지 않다구야 할 수 없지 ─ 그밖에 또 무슨 길이 있느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으니깐.”
“내겐 큰 신발명이나 한 것 같구료. 신대륙 발견의 감격 이상이야 ─ 남 방비행, 평생 가면 내 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집에 가 가만히 혼자 울테야.”
끝에 해결이 괜히 덧붙이기지 “ . 흡사 수신교과서의 결론같이 그런 해결 에 반드시 그런 불행이 오라는 법이야 있나.”
“그까짓 불행이 와두 좋아. 해결을 하는 순간 두 사람은 인생의 최고의 감격을 살았는데 그까짓 불행이 무엇 하자는 것요.”
미려는 마치 자기 자신의 형편 이야기를 하듯 흥분하는 것이었다.
찻집에 들어가 차를 시켜 놓고 흥분이 좀체 사라지지 않아서 같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혜주가 의외의 것을 발견하게 되어 두 사람은 또 새로운 놀람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낮에 배달된 그날 석간신문 사회면에서 만해와 남구의 싸움의 기사를 발 견한 것이었다.
“무슨 곡절이 있었게 집에두 안 들어갔겠지.”
혜주가 중얼거리면서 내미는 신문지 위에 미려는 둥그런 눈을 내달렸다.
……동양무역상회의 사장 유만해는 홍천금광의 실패로 말미암아 격분한 결과 광산의 매도자 브로커인 박남구와 난투 끝에 전신에 상해를 당하고 기 생 청매 등의 만류와 간호로 간신히 당장을 피했다더라. 전 재력을 기울인 그 금광의 실패로 유만해는 아마도 파산일 듯…….
대충 이러한 기사에 미려는 정신없이 신문지를 던지고 자리를 일어서서 그 길로 회사를 찾았다.
“주인은 대체 어딜 갔단 말요.”
파물으나 이동렬도 최성수도 청매의 집은 차마 댈 수 없어 모른다고만 뻗 섰다.
─ 싸움, 청매, 파산.
미려에게는 놀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복잡한 심사가 물 끓듯 수물거 렸다.
그날 밤 오래도록 집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설레고 있는 판에 이슥해서야 남편 만해는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은 꼴로 나타났다.
“지옥을 다녔왔단 말요?”
남편의 어처구니없는 꼴에 미려는 되려 화를 내는 것이었다.
머리와 손에 때묻은 붕대를 감은 그 부상병 같은 꼴이 가엾게 보이지 않 고 추잡하게 보였다.
악한 브로커와 싸워 상처를 입고 파산에 임한 불행한 남편이라는 생각보 다도 기생집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늦도록 늦장을 부리다가 헤적헤적 집을 찾아든 추잡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 꼴로 “ 집엔 왜 찾아든단 말요. 차라리 없어지든지 못하구.”
“사정두 모르구 괜히.”
“밖에서 밤을 지낸 게 무슨 알량한 사정이란 말요.”
“천천히 들어봐요.”
청매라는 게 누군지 대나 봐요.”
다따가 발설에 만해는 뜨끔했으나,
“청매 따위가 문제가 아니요. 별안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가 눈앞에 절박한 것요.”
남편이 야단스럽게 설레려고 해도 아내는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홍천광산이 글러지구 박남구와 싸웠단 말이죠. 싸웠으면 싸웠지, 집을 비우라는 법은 어디 있나요.”
“……그렇소. 신문에 난 대로요. ─ 실업가 유만해는 오늘부터 낙오된 것요. 박남구와 싸우다가 진 것요. 수많은 경쟁자 속에서 떨어져 장안 사람 의 조소를 받으면서 자리를 밀려난 것요. 눈앞에는 시꺼먼 함정밖엔 없구, 그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빠져 들어가는 것요.”
“그런 사정 앞에서 가정은 한푼 어치의 값두 없단 말요. 청매와 가정과 어느편이 중하단 말요.”
“한자리에 앉았다가 응급수당을 하노라구 병원에 갔다 그렇게 된 것이 지, 저 청매와 누가……”
변명하는 아이와도 같다.
“탈을 말아요. 파렴치를 부끄러워해요. 가정의 권위를 무시하고 짓밟은 것이 내게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미려는 분한 김에 견딜 수 없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만해의 밖에서의 생활이 얼마간 방종한 것은 반드시 오늘에 시작된 일은 아니었다. 아내가 아는 것은 집안에서의 남편뿐인 것이요, 밖에서의 행동까 지 일일이 살필 수 없는 노릇이다. 남편의 자유로운 세계라는 것이 항상 아 내의 그것보다는 넓은 것이며 남보다 유다르게 결머리가 세인 미려의 눈을 속이기도 만해로서는 여반장이었다. 그런 남편의 눈치를 미려는 대강 짐작 은 하면서도 목도하지 않은 이상에야 어쩌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부 사이에 금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도 첫째로는 그런 남편의 태도에서 온 것이었고, 남편의 태도로 말미암아 미려의 신뢰와 사랑이 없어지기 시작 한 것이 사실이었다. 원래 미려보다도 만해 자신의 간청으로 결합된 부부였다. 일단 식기 시작할 때 미려의 사랑은 살얼음같이 삽시간에 차졌다.
“미려의 그 쌀쌀한 일도가 날 밖으로 몰아낸 것요.”
만해는 아내를 책하는 것이었으나 미려의 편으로 보면 모든 원인은 남편 쪽에 있었다. 원인 결과를 서로 미는 속에서 가정은 드디어 오늘같이 찬 것 이 되었다.
오늘의 미려의 감정은 반드시 질투에서 온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청 매 한 사람쯤을 사이에 두고 질투에 불붙을 정도로 남편이 살뜰하게는 여겨 지지 않았다. 질투가 아니요, 사랑이 아니요, 모욕이었던 것이다. 가정에 대한 남편의 반역 속에 커다란 모욕을 느꼈던 것이다. 이 모욕감이 미려의 심사를 불질렀다.
“이까짓 가정을 누가 달갑게 여긴다구.”
홧김에 되구말구 손에 잡히는 것을 던지니 맞은편 벽의 거울을 맞히게 되 어 금시 깨트려진 유리조각이 뎅그렁 하고 떨어졌다. 이번에는 도리어 남편 에 대한 아내의 도전이었던 것이다.
“일생의 중대한 일에 당면하게 된 이 당장에서 사소한 일로 사람을 못살 게 군단 말요?”
만해도 드디어 소리를 높이게 되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에 미려를 격분시 킬 뿐이지 그의 의견을 휘일 수는 없었다.
“중대한 일은 무어구 사소한 일은 무어란 말요. 가정은 사소하구 밖에 일만 중대하단 말요. 그따윗 사소한 가정을 가져서는 무엇 한다 말요.”
“일에 바쁜 남편이 밖에서 하룻밤쯤 지내구 왔단들.”
“오라, 그게 남자들의 특권이란 말이지, 누가 맨들어논 특권인구. 당신 두 교육 받은 현대인이요. 현대인의 자랑을 요만큼이나 가졌소? 멀쩡한 야 만인이지. 어디 남자에게만 그런 특권이 있으라는 법인가 봅시다. 아내는 죽어만 지내라는 것인가 봅시다.”
이 말을 실지로 설명하려는 듯 미려는 그 늦은 밤에 그 자리로 분연히 집 을 나서는 것이었다.
아내로서의 용기가 아니라 남편과 대등한 한 사람으로서의 용기를 낸 것 이다. 대담하고 올찬 용기였다.
그날 밤 만해에게는 지난 밤 미려를 괴롭게 했던 번민 이상의 번민이 왔다. 밤이 패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면서 고시랑고시 랑 잠 한숨 못 이루었다. 미려가 미려의 침실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 만해는 자기의 침실에서 괴로운 하룻밤을 꼬박 뜬 눈에 새웠다.
“흠, 이게 복수라는 셈이지.”
괴로운 코웃음을 치면서도 미려의 경우와 같이 역시 화가 났다. 피곤한 정신에 노염이 솟으면서 이튿날 아침 느지막해서 미려가 어슬어슬 나타났을 때에는 저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 이럴 법이 세상에.”
“왜요. 맛이 독하죠 ─ 호텔에서 하룻밤 자구 왔죠. 호텔에서 잔 것이 그럴 젠 기생집에서 자구 왔을 때의 심사가 어떨지 좀 생각해 보죠. 남자의 이기주의가 얼마나 몹쓸 것인가를 실물교육으로 더러 배워 봐요. 세상의 남 편들이 얼마나 뻔질뻔질하구 밉살스러운가를.”
“이래두 문화인이니까 이만했지 정말 야만인 같았으면 오늘 아침 살인이 래두 났겠다.”
“에그머니, 살인이라니.”
이번에는 미려가 화를 내게 되었다.
“ ─ 그게 야만인의 발악이 아니구 뭐란 말요. 그래두 그 편견을 버리지 못하우 ─ 사내만 사내라는 그 교만한 편견을 버리지 못해요?”
“미려가 조선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요. 구라파에나 태어났더라면 발달된 개인주의 사상과 높은 도덕문화 속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것을 이 뒤떨 어진 조선에 태어난 까닭으로 남자에게서 욕만 받게 된단 말이지.”
만해가 목소리를 부드럽혀서 이렇게 구슬리는 것은 타협하자는 뜻이 아니 었다. 가슴속에는 불붙는 노염이 활활 피어올랐다.
“야유하는 셈이오? ─ 왜 그럼 구라파 사람같이 교양있는 사내가 되구료. 여자들만을 책하지 말구.”
“교육이 탈이야.”
만해는 드디어 터지고야 말았다.
“ ─ 구라파니 개인주의니 반지빠르게 배워 가지구는 남녀동등이니 아내 의 지위가 어떠니 철없이 해뚱거리는 꼴들이 가관이야. 몸에서는 메주와 된 장 냄새를 피우면서 문명이니 문화니 하구 가제 깬 촌놈같이 날뛰는 것 을……복수는 다 무어야. 여편네가 사내에게 복수라니. 이 사랑 없는 가정 을 누군 달갑게 여기는 줄 아나. 한꺼번에 다 부서 버릴까부다.”
“이런 가정을 맨든 것이 누구란 말요.”
“누가 이런 가정을 맨들었누. 이 되지 않은 문화주의자 같으니라구.”
남편의 버릇도 아내와 같은 모양이다. 무엇을 집어 벽에 던졌는지 오늘은 거울 대신에 괘종이 깨트러졌다. 뎅그렁 하고 유리가 떨어지면서 움직이던 추가 섰다. 가정은 침묵한 것이다.
“옳지, 잘 하우. 말 잘 했소. 마지막이란 말이지. 나두 실상 이걸 원하 지 않은 바 아니었소.”
미려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황겁지겁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에 미려는 두 짝의 트렁크 속에 옷가지를 꽁꽁 재여 넣고 예금 통장 현금 등 신변에 , 있는 대로의 것을 지니고는 집을 나섰다. 자동차에 앉아 거리로 향했다.
“기어코 집을 나왔구나.”
하는 감상도 아무것도 없이 흥분 속에서 전신이 끊으면서 정신없이 익숙한 길로 굴러 내려갔다.
호텔에 이르러 간밤에 하룻밤을 지낸 바로 그 방을 또 빌렸다. 짐을 방 가운데 놓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을 때 아직도 꿈속을 헤매이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올 것이 왔구나.”
개운한 생각이 나는 한편 알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등을 내려 누르기도 한다.
큰일을 저질러 놓은 듯한 일종의 불안이요, 두려움이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 두려움과 잡념을 말살해 버릴 마음의 용기가 필요 했다.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부실한 탓이거니 자기를 꾸짖으면서 오로지 행 동의 열정에 주의를 모으기에 힘썼다.
“결국 와야 할 것이 왔을 뿐이다.”
반성도 뉘우침도 불필요하다. 눈앞의 현실이란 그렇게 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눈앞에 온 대로의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할 뿐이다. 그 외의 잡념은 공연한 것이요 해로운 것이다 ─ 이렇게 미려는 생각하면서 움 직이는 마음의 주초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솔직하게 말하면 미려는 지금까지 오늘이 오기를 마음속 그 어느 한 구퉁 이로 은근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메마른 샘물 줄기같이 가정에서 시비가 마르고 끊어진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그 허물의 태반이 남편의 태도에 있었다고 미려는 생각하고 또 그 편이 편리하기는 하나 그렇 게 생각하는 미려의 심중을 한 겹 더 헤쳐 본다면 더 근본적인 인간성의 발 로로 돌릴 수 있을 것이요, 미려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그 근본적인 것에 서 오늘의 결과가 왔다고 생각함이 옳을 법하다 ─ 기적이라는 것은 항상 가정 안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신비는 언제나 눈 밖에만 있다. 현재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기적과 신비를 구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신비 없는 생활 이 죽음을 의미함에 그것을 구하는 마음이 미려의 경우같이 간절함은 없었 고, 그 마음의 지향을 결정적으로 지어 준 것은 남편이었다. 참으로 오늘 그를 행동 속으로 밀어낸 것은 남편의 태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합의의 결과요 따라서 조금도 거리낌없는 , 결론이었다. 허물이 있고 그릇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남편이 져야 할 것이다 ─ 이렇게 미려는 생각하면서 마음을 대담하구 다구지게 먹었다.
용기를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분간을 지내게 될 그 한 간 방에 정을 붙이려고 애쓰면서 옷을 갈아입고 몸을 가다듬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사 동을 구해 말동무로 혜주를 불러내기로 했다.
혜주는 무슨 일인가 하고 설렜는지 예측 이상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식당에서 점심상을 마주대하고 앉아 대강 미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혜 주는 그다지 놀라는 법도 없이 비교적 심상한 표정이었다.
“보배와 달러. 꽤 맹랑하구 다구진걸. 집을 나오다니.”
실상은 놀란 까닭에 범연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어느 시대나 노라는 삐지 않는 모양이지. 후손이 또 하나 생겼으 니 땅속의 노라두 기뻐하렷다.”
“난 가정의 노라가 아니구 인간의 노라야. 인간성을 막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련 것야.“
“남방비행의 여주인공같이 말이지. 어저께 남방비행을 보고 오늘 그것을 모방하다니 여간내기가 아닌걸.”
“그렇게 됐구료 ─ 그러나 대상 없는 여주인공이니 하릴없지.”
미려는 쓸쓸히 웃으면서 식도를 움직였다.
“막연한 흥분만을 가지군 일이 다 된 게 아니야. 또렷한 법적 수속을 밟 구래야.”
“물론이지. 변호사를 대서 정식으로 결말을 지을 작정이야. 일시적으로 생각해낸 행동이 아니구 굳은 결심을 먹구 한 일인 바에야……”
혜주를 보내고 미려는 번잡한 생각에 지쳐서인지 일시에 피곤을 느꼈다.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는다는 것이 연일의 피곤으로 말미암아 홀연히 잠 이 들었다. 몇 시간 동안의 단잠이었다.
눈을 떴을 때 방안은 황혼에 누르끄레 물들어 있다. 뉘엿거리던 해가 막 서산을 남은 듯 서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일면 누런 바다다. 그 바다 아래에 두툴두툴 솟은 도회의 윤곽이 칙칙하게 저물어 가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가 답답하게 허공과 방안에 차 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그 야릇한 누른빛이 알 수 없이 가슴을 건드 려 미려는 침대에서 내려서 창의 휘장을 내렸다. 방안은 더한층 침침하다.
벽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보나 낮에 켠 등이라는 것은 되려 답답만 하다.
그렇다고 불을 다시 끄니 켜기 전보다 또 한층 어둡다.
“아, 안타까워.”
다시 창께로 가 휘장을 올리니 누런 황혼이 여전히 새어든다. 삼라만상이 한꺼번에 어둠 속에 잠겨 버리려는 마지막 순간의 안타까움이 방안을 살러 버리려는 듯도 하다.
미려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으며 요 속에 얼굴을 묻었다. 뼈 속이 자지러 지게 아프며 몸이 떨린다.
“왜 이리 서글픈고.”
전신이 한꺼번에 꺼져 버릴 듯이도 휑휑해지며 눈물이 푹 솟았다. 아이같 이 그 자리에서 발버둥치며 울고도 싶다.
지금까지 살던 집과는 지붕 아래가 달라진 그 한 간 방에서 별안간 폭풍 우 같은 공허가 엄습해 온 것이었다. 물론 배반하고 나온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다. 속이 비고 마음이 허한 것이나 대체 무엇이 부족한지는 미려 자신 도 그 자리에서 헤아릴 수는 없었다.
향수였다. 무서운 향수가 잠자고 난 뒤의 허한 가슴속을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무엇인지 그 어디인지가 그립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 면서도 현재를 벗어나 그것을 그리워하는 심사가 불같이 몸을 태웠다.
“대체 그리운 것이 무엇일꼬.”
어지러운 꼴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눈물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층을 내려와 로비에 들어갔다. 음악이 들렸다.
저녁식사가 시작되기까지의 한때를 사람들은 음악으로 보내고 있었다. 미려 도 그곳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모차르트의 가벼운 소나타 이중주였으나 그 경쾌하고 맑은 곡조가 미려에 게는 도리어 슬펐다. 마디마디가 향수를 복돋아 주고 꿈을 말한다. 음악도 꿈꾸는 사람에게는 필경은 슬픈 것이다. 슬픈 것은 때로는 즐거운 것도 된다. 즐거운 것으로 음악을 시름없이 듣고 있을 때 문득 옆자리에 와 앉으면 서 미려의 주의를 끄는 사나이가 있었다. 언제인가 집에서 만난 일이 있던 김종세임을 알고 미려는 모르는 체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댁에서 실례가 많았었습니다.”
종세는 하고 싶은 말마디가 가진 듯 긴하게 표정을 누그렸다.
“선생이 지금 왜 여기 와 계신지 빤히 알구 있죠. 세상일 잘 알기로야 신문기자는 조물주 다음엔 가거든요.”
미려는 그럼 자기의 오늘 일을 벌써 세상 사람이 다 알게 됐누 하고 종세 가 무서운 것으로 여겨져 화제를 돌려 보았다.
녹성음악원 때문에는 “ 공연한 수고만 끼쳐 드리구 말만 퍼지게 됐는데 사정두 있구 해서 성사될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이번 후원만은 약속한 대로 틀림없이 하겠습니다만.”
“만해씨와는 일전에 자리두 같이하구 한 까닭에 그 사정이라는 것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이 앞으로 어떻게 되시는지 세상의 기대가 컸던 것만큼 음악원 일만은 계획대로 하셨으면 합니다만.”
“제 사정이 급작스럽게 절박해져서 그런 일을 미처 생각지 못하게 됐어요.”
“거기 관해선 천천히 말씀 들을 기회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저두 바빠서요. 일마군이 만주서 돌아온답니다. 호텔에 방 교섭을 왔던 길에……”
“일마씨가요?”
“교향악단보다 먼저 오죠. 홀몸으로 오는 것이 아니래서 방을 고르기가 까다로워요.”
종세의 한마디 한마디에 미려는 긴장되고 몸이 달았다.
하늘 위의 별 아파트 청운장 이층 방에서 박능보는 이른 저녁의 한때를 하는 일 없이 우 두커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조금 일찍이 사퇴하고 나왔다. 밤차로 도착한다는 일마의 전보를 받았던 까닭이다. 역으로 나갈 시간을 앞두고 잠시 명상에 잠기고 있었다.
“불과 달포 동안에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두 변하나.”
동무 일마의 그 동안의 운명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시험관 속의 액체에 변화같이 삽시간에 놀라운 변화를 한 것이다.
두 번이나 행운을 맞히고 그 위에 사랑조차 얻어 가지고 이제 고향으로 돌 아오려는 것이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행운을 찾으러 떠났던 길 같다. 떠날 때와 돌아오는 때의 신세가 얼마나 엄청나게 다른가. 밤낮으로 보고 어울리고 하던 친한 사이므로 그 변화는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능보 자신이나 훈이나 종세에게는 아무 변화도 없었던 까닭에 동무의 변화는 한 층 신기하게 여겨졌다.
“자기는 그 동안에 무얼 하구 있었던가,”
육체의 애꿎은 신진대사가 있었고 변치 않은 나날의 일고가 있었을 뿐이다.
하나하나의 세포가 달포 전과는 다른 것으로 변했을는지 모르나 생활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방안 책시렁에 책 한 권 늘지 않았고 책상 위 현미경은 먼지를 보얗게 쓰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은파와의 관계도 미적지근한 그 대로 조금의 발전도 없다 . 속히 개업이나 하고 두 사람만의 조그만 가정을 가지자고 지금은 벌써 농이 아니라 진정으로 은파가 조르는 것이나 아직 개 업할 성산은 아득하다 ── 아무 변화도 없는 것이다. 무료한 답보가 있을 뿐이다. 변한 것은 일마뿐이다. 일마만이 운명을 갈고 행운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구 이 아파트에서 떠나려는 것이다.”
바로 이웃방이 일마의 방이다. 몇 해를 한 지붕 아래에서 가까이 왕래 하면 서 형제와 같이 다정하게 지내오던 그가 더 다정한 그의 짝을 데려오는 것 이다. 아파트를 떠나서 둘만의 행복스런 보금자리를 가지려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이 서글프게만 여겨지면서 쓸쓸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고 훈이 찾아왔다. 이 역 일마를 맞으러 능보와 함께 역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자네 동무 한 사람 뺏기게 됐네 그려.”
능보는 일어서서 훈과 함께 이웃방 앞에 이르렀다. 자기 방 열쇠로 손쉽게 열 수가 있었다.
동무 없는 방안이 휑휑하고 쓸쓸하다. 홀아비의 살림그릇이 신혼의 살림그 릇으로 변하려고 한다. 책상 위 먼지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방안을 살피려 니 신기한 기적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금발미인에게 동무를 뺏긴다.”
“평생에 굉장한 연애를 하겠다구 벼르더니 그게 굉장한 연애라는 것인가.
그런 구라파주의자는 없더니 필경 그 일을 치자구.”
능보보다는 역시 훈이 일마의 비위를 더 잘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었다.
“일상 엉뚱한 꿈을 꾸며 결국 엉뚱한 짓을 하고야 마는군.”
실상 훈의 꿈도 일마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부질없이 향수를 느끼 는 것이었고, 그 그리워하는 고향이 여기가 아닌 거기였다. 현대문명의 발생 지인 서쪽 나라였다. 일마는 누구보다도 대담하게 그 향수의 갈증을 채우고 꿈을 수입한 것이다. 일마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훈 은 자기일 듯싶었다.
“실물로 예증한 셈이지. 일마두 맹랑한 걸물이야.”
“어서 금발미인 구경이나 나가세나.”
능보는 팔 시계를 들어 보면서 훈을 재촉했다.
일마들을 맞이해 호텔까지 동행해다 주고 훈과 능보는 거리로 나오면서 머
리 속은 나아자의 인상으로 그득히 차 넘쳤다. 오래간만에 보는 동무, 일마
의 정든 낯도 나아자의 신선한 인상 속에서 숨어 버리곤 했다.
“흡사 누구 같을까 ── 영화배우의.”
훈이 생각해 내려고 애를 쓸 때 능보가 수월하게 잡아내면서,
“류쉐엘 같지 않은가 ──코리이느 류쉐엘. 불란서 배우의.”
“옳지, 류쉐엘과 비슷해 ── 온순하고 순결한 자태가.”
“눈이 높단 말야. 일마가 사람 하난 잘 골랐어. 한 점 나무랠 곳이 없어.”
“내가 만약 일마라면 이상 더 꿈이 없겠네.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더 바 랄 것이 없겠어. 그만하면 얻을 것은 다 얻었단 말야. 그 이상의 원은 욕심 이란 것야.”
“일마의 꿈두 필경은 동양이었던 모양이지. 나아자의 얼굴은 아무리봐두 동 양의 것이거든. 동양의 특징을 가진 순 서양의 얼굴이야. 눈이며 눈썹이며 코며가 온순한 조선의 것이란 말야. 피부가 희구 머리카락이 노랄 뿐이지.”
“일마의 꿈이 우리의 꿈일 테니까. 우리 모두가 꿈꾸는 하나의 이상형 일 지두 모르지. 어떻든 장안에 일색 하나 더 늘었어. 내가 미인이로라구 뽐내 는 축들이 나아자의 앞에서야 숨이나 크게 쉬겠나. 그 눈, 그 별 같은 눈망울.”
역 폼에서 일마가 사람을 차례로 소개하니 머리는 숙이지 않고 방글방글 바라보던 그 눈이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자동차로 호텔에 이르렀을 때 모 든 새로운 것에 신기한 듯 눈을 보내면서도 끝까지 품격 있고 의젓한 나아 자였다. 묵은 전통에서 오는 교양의 빛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었다.
초저녁이기는 했으나 식사도 할 겸 두 사람은<실락원>을 찾았다. 화장을 마치고 난 은파가 뛰어나오면서,
“나두 역에나 나갈걸요. 금발인의 풍채가 어때요 그래.”
궁금해 라니,
“나아자를 본 눈으로 지금 은파를 보려니까 흡사 말뚝을 대하는 것 같구료.
은파는 벌써 여자가 아니야.”
하고 훈이 나무래도 은파는 천연스럽게,
“옳아, 그렇게 놀랍단 말이죠. 어떻길래 교만한 일마의 눈에 걸렸죠. 정말 한번 봐둘걸요.”
“나두 여자 보는 눈이 달라진 걸. 그 오똑한 조각을 보구 난 뒤엔 거리의 여자란 여자가 죄다 널쪽같이 납작하게만 보인단 말야.”
능보의 술회에 은파는 비로소 샐쭉해 하면서,
“당신들의 그 꼴같잖은 서양 승배 그만들 둬요. 거지가 뭘 보구 침 흘리듯 서양이라면 사족을 못 펴구 ── 야만의 추태지 뭐란 말요.”
흥분하는 양이 통쾌해서 훈은 숭굴숭굴 웃으면서, 누가 서양을 숭배하나 “ , 아름다운 것을 숭배하는 것이지. 아름다운 것은 태 양과 같이 절대라나. 서양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사 족을 못써두 좋구 엎드려 백배 천배 해두 좋거든. 부끄러울 것도 없구 추태 두 아니야 — 은파가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건 되려 속을 뵈이는 점이지. 괜히 가만히나 있잖구.”
“그놈의 아름다운 건 다 무엔구.”
“나두 은파와의 결혼을 좀더 생각해야겠어.”
“미안하우. 제발 요량대루.”
은파도 능보를 따라 웃으면서 다시 농으로 돌아가 자라는 화해졌다.
“그렇게 놀랍다면 그럼 —— 가령 미령보다두 더 잘났단 말요?”
“미려와 나아자와 — 글쎄, 내 생각엔 나아자가 난걸.”
그러는 자리에 뛰어든 것이 종세였다. 늦도록 시중을 들고 오다 보니 그렇 게 늦었다.
“나아자들을 보구 제일 실망한 게 누군 줄 아나.”
종세는 숨도 갈지 않고 다짜고짜로 이 소리였다,
“미려라네—호텔에서 찬찬히 살피려니 그 수심에 넘치는 자태는 차마 못 보겠데. 멀리서 멀끔히 바라보는 그 자태를.”
동무들을 보낸 후 일마는 나아자와 함께 작정된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나아자는 여행의 피곤도 잊고 기쁜 기색이었다. 거리의 규모가 상상이상으 로 째이고 동무들의 흥성흥성 나와 맞이해 주고 하는 것이 초행의 그에게는 반가운 인상을 주었다.
“호텔이 이렇게 훌륭한 줄은 몰랐군요. 하얼빈서두 드물게 보는 호화로운 치창이에요.”
사실 만족스런 표정이요 말소리였다.
“이곳에두 서양 문명이 상당히 뿌리깊게 배어 들었거든 — 적어두 겉만은.”
“당신의 고향이 아주 맘에 들었어요. 유쾌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호텔만이 조선의 모양이 아니라우. 호텔 밖에 여러 가지 구저분한 현실면 이 있을 테니 아예 실망은 하지 마우.”
“어느 고장엔 두 가지 면이 없나요. 왜 밝은 쪽이 있으면 어두운 쪽두 있는 건 아무데나 매일반인데 실망을 하다뇨.”
보이가 앞서서 방을 열고 여러 짝의 트렁크를 들여놓았다. 일마가 목욕, 식 사 등 몇 가지의 주의를 묻고 열쇠를 받으니 보이는 나갔다. 두 사람만이 넓 은 방안에 섰을 때 일마에게도 사실 오랫동안의 긴 여행을 마치고 마지막 목적점에 도달했다는 안도의 느낌이 우연히 솟았다.
넓은 침대 의장 화장대 , , —두 사람의 소용인 그런 방안의 살림그릇이 홀몸 의 것과는 달러 염염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 속에서 나아자의 자태는 한층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 역 안도의 감정 속에서 잠시 방심의 상태로 서있는 것이었다.
북으로 향한 창을 여니 저물어 가는 뜰 안에 팔각당의 검츠레한 윤곽이 내 려보인다. 나아자는 창 앞에 서서 부근의 풍경을 진기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조선의 집인가요?”
“옛날사람들이 세운 낡은 집.”
“얼마나 넉넉하고 운치가 있어 보이는죠 — 흡사 만주에서 보는 것 같은.”
“같은 동양의 집이거든.”
“동양을 전 원래부터 이해하지만 그 동양의 아름다운 것을 참으로 즐겨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름다운 것은 즐겨해두 추한 것에서 느끼는 환멸은 얼마나 큰 것일까. 추 한 것이 아름다운 것보다는 언제나 많으니깐.”
“추한 건 추한 것으로 또 동정이 가게 되죠.”
“팔각당 넘엔 개천이 있구 그 넘엔 빈민굴이 있다우. 빈민굴 없는 데가 없 겠지만 조선은 전체가 한 커다란 빈민굴이라우.”
“그럼 빈민굴 속에서 함께 살죠. 누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을 원하나요.”
나아자는 돌아서서 일마에게로 몸을 쏠리며,
“저를 참으로 잘 이해해 주실려면 제가 강박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주 셔야 돼요.”
진득이 일마의 눈 속을 들여다본다.
“당신을 이렇게 따라 나온 건 괜히 바람에 불려서가 아니예요. 의외의 행운 을 얻은 것을 부러워한 까닭두 아니구 피차의 계급이 같은 것을 만만히 봐 서두 아니구 — 참으로 당신을 믿구 사랑하니까 모든 것을 버리구 이렇게 길을 같이한 것이죠.”
나아자는 사랑한다는 말 이상의 표현을 한 줄을 몰랐으나 그 한마디가 속 과 정성을 다 털어논 한마디였다. 당신을 좋아하구 존경하구 믿구 끔찍이 여 기구 — 한다는 뜻이었다. 최대한도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누가 그런 줄을 모르우.”
“그럼 절 오해하지 마세요. 저두 또 믿어 주세요.”
몸을 맡기면서 새삼스럽게 일마의 애정을 구한다. 두 사람은 마치 그것이 첫번인 듯 열정적으로 피차를 안았다. 이미 아내인 나아자를 일마는 오늘 신 선한 신혼의 기분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보이가 노크를 하고 목욕의 준비를 고하지 않았던들 두 사람은 좀체 갈라 질 줄 몰랐을 것이다.
호텔은 기숙사가 아닌 까닭에 각각 방 사람들의 생활은 반드시 일치되는
법이 없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 시간이나 로비에서 쉬는 시간이나는 각기 다
르고 자유롭다. 그런 속에서도 미려는 더욱 그런 시간의 배려가 다른 사람들
과는 동떨어지게 달랐다. 될 수 있는 대로 뭇사람의 눈에 띠지 않도록 세심
의 주의를 하는 것이었다. 식당에 나타나는 시간은 누구보다도 이르거나 그
렇지 않으면 늦었고, 로비에 나타나는 것도 사람의 그림자가 뜸한 때를 택했다.
— 아직도 일신상의 소문이 거리에 펼쳐짐을 즐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제 오후 종세에게서 일마의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알 수없이 기가 죽어지면서 방에만 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설레는 마음과는 반대 로 용기는커녕 도리어 주렵이 들었다. 웬일인지 두려운 생각이 났다.
일마를 만남이 여간 일이 아닌 — 희망과 실망의 교차된 야릇한 감정이 들 었다.
저녁때는 되어 복도에 수선스런 발소리가 나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마 도 일마들의 도착인 모양이었다. 넓은 호텔 안에서는 어느 때 누가 떠나고 누가 오는지 일일이 눈치채고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그날 복도에서 나는 수 선스런 말소리만은 미려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뜸한 뒤에 문밖을 지나는 보이에게 곡절을 물으니까.
“바로 저 북쪽 구석방에 새로 손님이 들었답니다.”
혼자 설명하면서,
“만주서 돌아왔다는데 금발미인을 데리구, 아주 훌륭하군요. 국제부부치구 는 보던 중 놀라워요.”
미려는 종세의 말눈치에서 일마의 국제연애의 일건을 대략 짐작은 하고 있 었으나 보이의 입으로 직접 국제부부니 금발미인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려니 공연히 뜨끔해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굉장한 손님들이군.”
“저희두 외국 여자를 많이 봤지만 그렇게 째인 여자는 처음인데요.”
미려는 혼을 뽑으려고만 하는 소리 같다. 미려는 단번에 기가 죽으면서 보 이의 설화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밤에도 꼼짝하지 않고 방에만 있었고, 오늘 아침 식당에도 가장 늦게 내려 간 것이었다.
제 스스로 질려 제 몸을 방안에 가둔 것이다. 반달 동안 역시 두문불출 방 안에서 죄수 노릇을 했다. 전날부터 내려오는 수심과 감상은 더욱 가슴을 물 어뜯었다.
오후의 따스한 햇빛이 서창에 그득히 쪼일 때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 었다. 바람을 쏘이러 뒤뜰로 내려갔다.
일광실을 지나 후원으로 나가니 돌담과 벽에 기어오른 담장이의 신선한 빛 이 눈을 끈다. 무엇보다도 민첩하게 가을을 수입한 그 진홍빛 잎새가 금시에 가을을 느끼게 했다.
실상인즉 미려도 오늘 선선한 홑적삼을 벗고 붉은 겹저고리를 입었던 것이다. 저고리의 빛과 담장의 빛은 공교롭게도 일치되어 피차에 가을을 자랑하 는 듯 오후의 햇빛 아래에 신선하게 보인다. 미려에게는 자기의 모양이 보이 지 않는 까닭에 담장이와 자기의 모양과 어느편이 더 아름다운지를 판단 할 수는 없었다. 담장이의 빛을 보고 선뜻 가을 감각에 눈떴을 뿐이다.
그러나 담장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잔디를 밟으며 후문으로 들어섰을 때, 저편 묵은 돌층대를 걸어 내려오는 화려한 색채가 눈을 끌었다. 그 역 담장이의 빛이었다. 진홍빛 드레스를 입 은 염염한 자태가 담장이 이상으로 미려의 정신을 뽑았다. 붉은 머리카락에 해가 쪼여 금빛 윤곽이 그림 같다. 그 색다른 남녀가 누구인지를 미려는 물 론 직각할 수 있었다.
일마와 나아자였다. 단둘이고 원 속에서 오후의 산보를 하는 것이었다.
미려는 주춤했으나 벌써 자기도 두 사람 눈에 띠인 몸으로 비겁하게 뒷걸 음을 칠 수도 없어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두 사람도 차차 이쪽으로 가까 워 왔다.
나아자의 편에서도 멀리 미려의 자태를 발견하고 그 선선한 가을 감촉에 주의했던 것이었다. 담장이 빛깔 같은 저고리의 고운 빛에 정신이 끌리면서 일마를 돌아보았다.
“조선 여자의 옷맵시가 곱다더니 헛말이 아니군요.”
언제인가 일마에게서 들은 흰옷과 꽃신의 아름다움을 문득 생각해 냈던 것 이다.
“흰옷두 곱지만 봄 가을로 시절이 변할 때의 색옷들두 저렇게 곱잖우. 긴 치마에 꽃신만 신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저두 한번 저렇게 채려 보겠어요. 짧은 치마에 구두는 흡사 양장인데요.
투피스 셈으로.”
나아자는 자기의 옷맵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잊어버리고 미려의 맵시에 찬미를 마지않으며 마른 잔디를 사뿐사뿐 밟았다.
그것은 흡사 미려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나아자의 자태에 잠시 취했던 것과도 같다 붉은 드레스와 . 금빛 머리카락에 정신을 뽑혔던 것과도 같다.
미려와 나아자 두 사람을 한꺼번에 바라보고 두 사람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있음은 그 자리에서는 일마 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떠나 제삼자의 입 장에 서 있는 까닭이다. 미려에게는 자신의 자태가 안 보이고 나아자에게도 자신의 자태가 안 보이는 것이나 일마에게는 두 사람의 자태가 함께 보이는 것이다.
하얼빈을 떠난 후로 나아자의 자태를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것 으로 여기는 일마에게 지금 눈앞에 나타난 그 뜻하지 않은 조선옷의 자태도 놀라운 것으로 비취었다. 나아자와 함께 염치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면서 가까 이 왔던 것이다.
서로 보아도 보지 않은 체 놀라도 놀라지 않은 체하고 시침을 떼고 스치는 것이 문명인의 태도인지는 몰라도 야박스런 근대인의 버릇이다. 그러나 참으 로 놀랐을 때는 그런 냉정한 여유도 없어진다. 일마와 나아자의 미려를 보는 눈이 그러했다. 미려가 머뭇거리면서 엇비슷이 외면하고 있는 동안에 두 사 람은 은근히 그를 관찰하면서 지났다.
참으로 행복스런 한 쌍이었다. 공작같이 자랑스럽고 행복스런 두 사람이었다. 미려는 외로운 자신의 모양과의 대조에서 오는 쓸쓸함을 느끼면서 더 돌 아볼 염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섰을 때, 몇 걸음 앞섰던 일마가 다시 뒤돌아 서면서 소리를 거는 것이 아니었던가.
“……저,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으나 — 남미려씨가 아니던가요?”
그 목소리에 미려도 돌아서면서 처음으로 일마와 대면했다.
“역시 미려씨이시군요.”
그 한마디 속에는 무한한 감회와 뜻이 있는 성싶었다. 팔년 동안 포개진 시 간의 주름이 있었고, 그 주름 속에 간직하고 잊혀졌던 회포가 그 한마디 속 에 살아난 듯 들렸다.
미려도 시간의 주름을 뛰어넘어 팔년 전의 회포에다 오늘을 잇은 것이었으 나 벌써 감격과 기쁨보다는 오늘은 쓸쓸한 고독과 서글픔이 앞섰다. 행복스 런 부부의 앞에서는 팔년 전의 회포도 벌써 무의미한 것이다. 팔년 동안 일 신이 얽매어 있었고 오늘 그것을 풀고 자유롭게 뛰어 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에는 시간은 무정하고 엄숙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기대와 기쁨도 일순 에 사라지고 환멸의 슬픔이 커다랗게 맥쳐왔다.
가까이 온 나아자에게 일마는 미려를 소개하고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만의 다정한 말을 건넸다.
친구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것일까, 혹은 교향악단 내연의 후원을 자청한 여 자라고 일러줌이었을까. 나아자의 미소를 띠인 말소리를 번역해서 일마는,
“음악 후원의 좋은 일을 하시니 대단히 고맙다구 나아자두 기뻐하는군.”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아자의 그 고마워하는 미소도 미려에게는 반갑기는커녕 괴롭게 들릴 뿐이다. 세상에서 기쁜 것은 벌써 자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뻐 하는 양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서게 된 자신의 쓸쓸한 모양을 반성하는 것이 었다.
후원의 산보에서 방으로 들어와 미려는 저녁때까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마를 그런 모양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변치 않는 꿈의 대상이요, 그리운 마음의 고향이었다. 팔년 후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그는 벌써 찾아들 고향이 아니고 멀어진 꿈이었다.
며칠 전 집을 나와 황혼의 방 속에서 홀로 애달픈 향수에 운 것은 그래도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였다. 그 그리워하는 원의 대상이 일마였음은 아마 미려 자신도 또렷이 마음속에 집어서 느끼지는 못했을는지 몰라도 꿈 을 가진 서글픔이요, 빠져 나올 길이 있는 고독이었다. 이제 일마를 만나 보 니 벌써 막힌 길이요, 잃어진 꿈이다. 위안 없는 절망과 고독이 가슴을 파헤 치는 것이었다.
너무도 시간이 지리한 것 같아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을 겸 세수를 하고 화 장대 앞에 앉았을 때 문을 노크하고 보이가 들어왔다.
“저쪽 구석방 심부름인데요.”
하고 봉투에 든 편지를 내놓았다.
“저녁을 같이 하시자던가요.”
보이가 먼저 발림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봉투를 뜯으니 일마의 글씨인듯한 두어 줄 글이 간단히 읽혔다.
— 나아자가 특별히 오늘 저녁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 하오니 승낙해 주시 면 큰 영광이리라 — 는 뜻의 것이었다.
“곧 대답을 가져오라는 분분데 편지 쓰실 것 없이 제 귀에만 일러주시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보이가 재촉하는 바람에 편지를 더 거푸 읽을 겨를도 없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생각할 겨를 도 없이 간단히 그 자리로 승낙의 대답을 주는 수밖 에는 없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던 까닭이다.
보이가 나간 후에 그렇게 홀홀히 대답한 것이 혹 천하게나 여겨지지 않을 까 하는 뉘우침도 나기는 났으나 그것도 자기의 편견이리라고 고쳐 생각하 면서 일마의 처지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와의 접촉의 기회를 피할 것은 없다고 마음먹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만찬의 식탁은 특별한 분부로 보통과는 규모가 다른 모양이었다.
미려를 앉힌 맞은편에 일마와 나아자가 나란히 앉아 화목한 웃음으로 그날 밤의 주빈을 대했다.
“내가 조선 와서 처음 뵙는 당신이구 처음 대접하는 만찬이랍니다. 자랑은 아니나 반갑게 받아 주세요. 오늘 뜰에서 우연히 만나 뵙구 사귀게 된 정의로.”
나아자의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마 자신의 말인지 미려에게는 기괴한 착 각이 일어나면서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날 밤의 그 만찬도 일마 자신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짜장 나아자의 발설로 된 것인지도 헤아릴 수 없었다.
“이왕 이곳에 나온 바에는 이곳의 하나씩 하나씩 배워 가야 할 테구, 그렇 게 하려면 친한 동무두 한 사람쯤은 필요하다구 생각했었는데 오늘 마침 만 나 뵙게 돼서 이런 행복은 없어요. 당신은 그렇게 곱구 의젓하신 것이 저의 행복스런 동무될 것을 믿습니다. 오래도록 사귐이 길기를 바랍니다.”
나아자의 말을 일러준 후에 일마는 자기의 말로,
“좋은 동무가 돼서 아무쪼록 잘 지도해 주십시오.”
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일마를 중간에 세우는 것도 멋스러워 미려는 되구말구 기억하고 있는 영어 로,
“이렇게 알게 된 것이 되려 제게 다행입니다. 그 다행함을 져버리지 않도록 좋은 동무 되려구 애쓰겠습니다.”
한마디 대답하니 나아자는 뜻을 얻은 듯 이번에는 그도 영어로 변했다.
“계획이 많답니다. 첫째, 조선말을 배워야 할 것 — 사랑하는 고장의 말이 니깐, 둘째, 조선옷을 연구해야 할 것 — 나두 그 옷이 대단히 입구 싶답니다......”
“아는 데까지는 가르쳐 드리구 말구요.”
두 사람의 대화하는 양을 일마는 신기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날 밤 홀에서 무도회가 있으니 함께 참석하자는 나아자의 권고에 미려는 수월하게 대답을 했으나 방에 와 생각하니 멋스럽기 짝없는 일이었다.
부부가 보이는 속임 없는 친절이 가슴에 사무쳐서 선뜻 대답은 한 것이나 그날 밤 만찬부터가 결코 편편하고 떳떳하게 받을 것은 못되었다. 황차 무도 회에 이르러서야 쓸쓸한 홀몸이 무슨 체면으로 부부 속에 끼어 면구스런 꼴 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나아자의 친절 앞에 부끄러운 생각도 났다. 나아자의 마음과 미려의 마음은 반드시 똑같이 담박하고 무심한 것은 아닐 듯싶다. 일마와 미려의 지난날의 미묘한 관계를 모르는 까닭에 나아자의 심중은 백짓장같이 맑고 관대한 것 이나 일마에게 대한 과거의 회포를 가슴속에 지니고 그것을 말할 바 없는 미려의 심중은 그만큼 괴롭고 복잡했다. 나아자는 일마와 부부로서 통하는 것이나 미려도 일마와는 한 줄기 은은한 마음의 교통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꿈에도 모르는 나아자의 앞에서 미려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생각이 났다. 그 런 복잡한 마음의 그림자를 품고 부부 사이에 끼어 천연스럽게 자리 없는 한몫을 보자는 것이 떳떳한 예의로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승낙한 일이요, 한편 행복된 나아자의 은근한 자랑에 의지해본 들 어떠리 하는 심정도 없지 않아서 옷을 갈아입었다. 요행 모인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가 부부끼리가 아니요, 홀몸인 외짝도 많았던 까닭에 미려는 나 아자들의 틈에서 그다지 불편한 느낌 없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호의와 우정의 표현이라는 것일까 — 음악이 시작되자 나아자는 첫 춤의 상대를 미려에게 청하는 것이었다. 앞에 와 서서 선뜻 손을 잡고 끌때 미려 는 영문을 몰라 일어서면서 세상에 여자들끼리 추는 춤이라는 것도 있나 생 각하면서 끌려 나갔다. 사람들도 두 사람의 춤을 진귀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미려는 뭇시선 앞에서 겸연쩍으면서도 나아자의 뜻을 고맙게 여겨 그 야릇 한 한 번 춤을 즐겁게 출 수 있었다.
춤이 끝났을 때 일마는 박수하면서 그제서야 부부의 춤이 시작되었다. 몇 번을 거듭한 때였을까. 이 역 홀몸인 듯한 외국 사람 하나가 나아자에게 춤 을 청하고 나아자가 승낙했던 까닭에 일마는 비로소 그 틈을 타서 미려와 결고 일어섰다.
일마와 맞붙들고 도는 미려에게는 신기한 생각이 났다. 춤이란 그런 때의 두 사람을 맞붙들어 세우기 위해서 생겨난 물건 같다. 춤이 아니었던들 두 사람이 어찌 그렇게 수월하게 맞잡고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인가.
“오늘 저녁의 만찬이며 무도회며 — 누구의 발설인지 몰라두 미안만 해요.”
“다 나아자의 뜻이죠. 물론 별 속없이 정말 맘에 들어서 하는 짓이지만.”
“그러니까 더욱 미안해요.”
미려는 두려운 생각조차 들어서 외딴 곳으로만 돌면서, 이 자리에선 물론 말씀드릴 “ 수 없구 언제나 조용한 때 얘기 드렸으면 하 구 있었는데 — 모든 것이 퍽두 변했답니다.
“미려씨가 요새 이 호텔에 묵구 계시는 이유 말이죠.”
“어떻게 아세요.”
“종세군에게서 들었죠. 만해군의 실패와 그간 가정의 형편을 대강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인지 만해가 그릇됐는지 지금 와선 분간할 수 없어요. 도저히 견 딜 수 없어서 집을 뛰어나와 봤으나 눈에 뜨이는 것이 모두 괴로운 것 뿐이 군요.”
은근히 자기들을 의미하는 말인 줄을 알고 일마는,
“늦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너무 늦은 까닭에 모든 것이 어긋나구 뒤틀리구 만 것입니다.”
“지각을 한 사람의 맘속이 얼마나 쓸쓸한지 아마도 먼저 와 나란히 앉은 사람들에겐 일 바 없을 것예요. 뭇시선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서 부끄 럽구 설구……”
말도 아무릴 수 없게 가슴이 주저앉으면서 몸에서 맥이 빠지는 것이었다.
“애꿎은 세상일이 언제나 그런 게죠.”
아무리 들어도 일마의 말은 답답하고 범연하고 평온하다. 만족된 사람의 배 부른 감상이지 괴로운 하소연은 아니었다. 일마의 심경과 미려의 심경은 오 늘 벌써 판이한 성질의 것이었고 그 사이의 거리도 퍽이나 멀었다.
“애꿎다는 것은 — 제 맘은 이렇게 불행하건만 일마씨의 맘은 그렇게 행복 스럽단 말이죠.”
“물론 난 행복에 대해 말하려는 것두,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만.”
“별이예요. 하늘 위의 별이예요. 쳐다볼수록 점점 멀어져 나중에는 까맣게 높아지는 그 별이예요 — 손을 뻗치나 벌써 손끝에 닿지 않는.”
지껄이다가 문득 좌우를 휘둘러볼 제 두려운 생각이 불현듯이 들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마와의 사이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마음의 하소연을 하고 그를 괴롭히는 것인가. 법적 수속이 끝나기 전에는 아직도 남의 아내인 몸이다. 아내된 몸 으로 일마에게 마음을 고백해서 옳을 리 없으며 그에게 나다분히 싫은 소리 를 늘어놀 염치도 없다 — 태도를 반성할 때 지금 추고 있는 춤조차가 두려 운 것으로 여겨졌다.
음악이 끝나자 의자에 주저앉으며 괴롬 속에서나 놓여난 듯도 했다. 남의 춤을 바라보는 편이 한결 편한 노릇이다. 더구나 일마 부부의 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아름다운 한 쌍의 모양이 꿈속의 것으로 느껴지면서 더욱 멀어 가는 하늘 위 별들이다. 바라보기가 안타깝기는 하나 두려운 생각만은 없어 지는 것이었다.
몸이 불편한 것을 청탁하고 미려는 먼저 홀을 사양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일마와 나아자의 함께 겨른 양이 떨쳐버리려고 해도 고집스럽게 떠오르면 서 마음을 괴롭힌다. 떨어지는 별같이 눈앞으로 휙 날아왔다가는 다시 하늘 위로 까맣게 솟아오르곤 한다. 손 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듯하면 서도 기실 아득하게 멀어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평생 그 별들을 우러러만 보 고 지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새까맣게 어두워진다.
“그릇된 오산이었던가.”
이 며칠 동안의 자기의 행동을 생각해 보나 행동과 오늘의 결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결과를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요. 그 행동은 행동으로서 당연한 것이었고 오늘의 결과야말로 뜻하지 못했던 의외의 것이었다. 행동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은 희망과 행복이 아니었다. 앞으로 외롬과 슬픔이 닥쳐올 것을 예료하면서 그렇다고 물론 행동을 뉘우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막연한 불안에 잠기게 되었다.
이튿날 오후 울가망한 판에 거리에 산보를 나가려고 아래로 내려갔을 때 복도에서 우연히 일마를 찾아온 종세를 만나 그의 입에서 의외의 소식을 듣 게 되었다. 마치 그 맘을 전하려고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긴한 목소리로,
“만해군의 소식을 아십니까.”
하고 수군거렸다.
“왜요, 또 칼부림을 하구 싸웠나요.”
“도망을 쳤답니다 — 상해로 사랑의 줄행랑을 놨어요.”
“네. 상해로 사랑의……”
냉정하려고 하던 미려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랑의 줄행랑이라니요.”
“청매와 손을 잡구 — 말이죠.”
“청매라니 — 기생 말이죠.”
“눈치는 나두 벌써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감쪽같이 사라질 줄 은 몰랐어요. 청매는 사실인즉 내게두 무관한 사람이 아닌데 얼떨떨해 정신 이 없는걸요. 거리의 소문 속에 내 이름두 한몫 끼이게 됐으니 이런 망신두 없구요.”
미려는 그 길로 당황히 버리고 나온 집을 찾아가 보았다.
떠날 때의 집 그대로의 속에서 식모가 뛰어나와 아이같이 반기며 미려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없는 . 빈집에서 쓸쓸해 못 견디겠다는 뜻인 듯싶었다.
“제발 아씨는 더 가지 말아 주세요.”
휑휑한 복도에서 식모는 울 듯이나 낯을 찡그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