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사 편집실

도하의 대신문사로서의 이름에 값가리만치 외모도 굉장은 하지만 편집실 안도 넓고 복잡한 것이 외모에 지지 않는 규모이다.

늦은 아침의 한때, 수십 명 사원이 각각 맡은 책상 앞에서 그날 석간 준 비를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한고비다. 원고지 위에 펜이 달리고 탁상 전화가 무시로 올리고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삐지 않는다.

사장실에서 나온 여급사가 어수선한 책상 사이를 고비고비 돌아 연예부 책상께로 오더니 원고에 정신이 없는 김종세의 앞에 머문다. 종세는 한때 사회부 기자로도 이름을 날렸으나 요새는 연예부실로 몸을 옮기게 되었다.

두 가지 일에 다 재능을 겸한 신문사로서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일마를 만주로 떠내 보낸 다음날이다. 마음도 가라앉아 일에 잡념이 없다.

“사장께서 좀 보시자구요.”

급사의 말에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긁어 올리면서,

“분주한데 무슨 일이라든.”

“잠깐만 왔다 가시래요.”

펜을 던지고 뒤를 따라 사장실로 향했다. 반갑기보다도 귀찮은 생각이 앞 선다.

주필과 이야기 중이던 사장은 들어온 종세를 보더니 긴하게 자리를 권한다.

“바쁜데 안됐네만 잠깐 앉게나.”

궂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간에 불리우게 된 내용보다 사실 바쁠 때에는 시간에만 정신이 팔리는 것이었다.

“오늘 기사는 아무에게나 맽겨두구 자네 이 길로 곧 가볼 곳이 생겼 어.”

항상 꽁생원이던 사장이 빙그레 웃음을 띠우는 것을 보면 종세도 긴장되 었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이번 일이 아마두 성공인 듯하네.”

종세는 문득 직감하면서,

“교향악단 초빙의 계획 말씀입니까.”

하고 내용을 맞춰 본다.

“계획두 때를 맞춘 것이었지만 자네 추천으로 일마군을 파견한 것두 잘 한 노릇인 것 같애.”

“그야 일마군의 하는 일이 범연이야 하겠습니까.”

“결과는 두구 봐야겠지만 각 방면에서의 반향과 찬사가 빗발치듯 날아 들거든. 전화로 서신으로.”

책상 위에 널려진 엽서와 편짓장을 헤쳐 보이니 주필도 기뻐하는 양이다.

“지금두 막 한 군데서 전화가 왔기에 주필과 의론중이나 무슨 방법으로 든지 후원을 하겠다는 청인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해서 이왕 관계된 자네 를 함께 불러본 것인데.”

“후원이라면 받죠 뭐. 사업두 한층 흥성흥성할 테구 선전두 될 테니깐 요.”

서근서근한 종세의 대답에 주필은 내 뜻을 얻은 듯이나,

“자네두 같은 생각인가. 사실 이번 일이 사로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닌 데 일찍부터 이런 반향이 나타난 것만두 반가운 일이란 말야.”

사장이 뒤를 이어서,

“누군구 하니 자네두 알겠지만 동양무역상회의 유만해라네. 지금 집에서 전화를 걸구 후원을 신탁하면서 누구나 사람을 보내면 만나서 타협해 보겠 다는 것야.”

“유만해, 유만해라면 비록 실업가이긴 하나 문화사업에 몰이해하지는 않 을 테니깐 그런 청이 고이찬킨 하죠.”

“이번 시세에 또 약은 사람이 한몫 톡톡히 본 셈이지. 선선히 이런 일에 말을 걸어올 젠.”

“외국 무역은 맥혔을는지 몰라두 철물을 한다. 금광에 손을 댄다 해서 아마 근자만 해두 몇 백만 원은 좋이 잡았죠. 문화사업에 그까짓 천이나 만 쯤 낸댔자 주머니 끈이 까딱이나 하겠습니까. 모처럼의 청을 물리칠 것야 없겠죠.”

“그럼 자네 이 길로 가서 맞서 보구 오겠나.”

“갔다 오죠. 이왕 제 맡은 일이구 하니 기어이 성사시켜 보겠습니다.”

종세는 대답하면서 사장과 주필에게 만족을 준다.

유만해 별안간 “ , 유만해를 찾아가게 되다니 것두 괜찮은 일야.”

자리에 와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종세는 쓰던 원고를 대충 끊어 버리고 그 날의 편집을 옆자리의 동료에게 맡기고는 신문사를 나왔다.

“인연이래두 여간 이만저만한 인연은 아닌 모양이야. 일마다 맞부딪치게 될 젠.”

그날 아침의 그 우연한 용무를 선뜻 맡고 알 수 없이 흥분되는 길을 나선 것은 청년실업가 유만해를 만나러 간다는 뜻 외에 또 한 가지 종세로서는 숨은 뜻이 있었다.

유만해(柳萬海)는 거리에서 이름 높은 실업가일 뿐이 아니라 종세에게는 또 다른 한 가지 흥미의 대상이었다. 자기와 보다도 실상을 말하면 친구 일 마와 기괴한 한 줄기 인연을 가지고 있는 터이었다. 일마를 경성역에서 보 낼 때에 첫사랑에 실패했다고 한바탕들 떠들었고 신경역 식당 속에서 단영 이 일마에게 첫사랑의 상대자 미려의 이름을 들어 짜증을 냈던 그 남미려 (南美麗)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현재 만해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모르 는 사람은 몰라도 아는 사람들에게 이 괴이한 인연의 한 토막은 숨은 이야 깃거리가 되어 있고 그 당시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흥분을 자아낸다. 친구인 종세들에게 그 일건이 더욱 흥미의 대상임은 물론이었다. 동무의 한 사건이 그토록 친구들에게 범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거리의 소문거리가 되었 을 뿐 아니라 일마로서는 반생의 한 중대한 사건이었던 까닭이다.

일마와 만해는 한 해의 동창이었고 미려는 두 사람이 함께 원하는 대상이 었다. 속세에 있어서 사랑에 이기는 무기는 역시 가장 손쉽게 황금인 모양 이다. 일마와 만해 두 사람의 승패도 이 범속한 기준을 넘지는 않았다. 일 마가 패한 것은 문과 출신의 가난뱅이 학사였던 까닭이요, 만해가 이긴 것 은 백만금의 상속을 받은 법학사였던 까닭이다. 미려가 선택을 옳게 했는지 그르쳤는지는 장구한 인생을 두고 보아야 판명될 일이기는 하나, 만해는 뜻 을 얻어 확실히 행복된 편이었고 일마의 실망은 컸다. 결혼식장에 초대받은 일마는 무슨 까닭으론지 짖궂이 출석해서는 사람 틈에 숨어 배우같이 살며 시 울었던 것이다. 그런 극적 장면이 지난 지 칠팔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 마가 기구한 방면에 길을 잡아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만해는 풍족한 유산을 움직여 무역상을 시작한 것이 점점 일게 되어 근자에 와서는 철공업에 손을 댄다, 금광을 사들인다 해서 사업도 늘리고 유산도 더욱 불려 청년실업가로 서의 이름을 쟁쟁히 날리고 있다. 이 너무도 선명한 대조가 세상의 주목을 오래도록 끌게 하였고 친구 종세들의 관심을 지금껏 이어오게 한 이유였다.

같은 장안에 행복되고 불행된 두 패의 경영자가 살고 있는 셈이 되어 그들 의 생애의 변천이라는 것이 친구들에게는 은연중의 흥미를 끌고 내려오는 제목이었던 것이다.

종세가 오늘 의외의 책임을 맡고 전에 없는 흥분을 느끼면서 거리에 나선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인연이래두 “ 여간 이만저만한 인연은 아닌 모양이야.”

혼자만 알기가 아까워서 우선 첫길로 훈들이나 혹시 만날까 해서 단골찻 집에 들렀으나 아직도 출근 전이다. 한바탕 발장구를 치면서 노닥거리지 못 하게 된 것을 애틋이 여기면서 서대문행 전차를 타려다가 고쳐 생각하고 의 젓한 위품도 보일 겸 택시를 한 대 잡아탔다.

“연회장까지 한달음에 ─ ”

전에 사회부 기자를 할 때에 돌발사건이나 생겨 그 기사를 얻으러 갈 적 에 느끼던 것과도 흡사한 모험감을 느끼면서 차 속에 번듯이 몸을 기대었다.

빛나는 차는 거슬리는 것 없이 전찻길을 닫고 골목을 들어서서 금화장을 오르고 연희장으로 들어선다. 부근에서도 눈에 띠이게 호화로운 붉은 지붕 의 양옥을 가리키면서 종세는 운전수에게 유만해의 이름을 또 한번 일러주 었다.

그날 아침 그 붉은 지붕의 양옥 만해의 집 객실에서는 부부 사이에 조그 만 토론의 한 장면이 있었다.

늦은 아침을 마치고 나서 객실에 들어가 조간 신문들을 들척거리다가 미 려는 문득 한 장을 남편 앞에 내놓으면서 그의 주의를 일깨워 주었다.

현대일보였다. 받아들고 단눈에 내려 훑어보더니,

“굉장한 계획이군.”

만해는 오도깝스럽게 소리를 높인다. 교향악단 초빙의 기사였다. 다섯 단 의 길이의 넓은 지면에 굵은 목각활자로 이번 계획을 야단스럽게 발표한 것 이었다.

“조선의 음악계두 상당하죠. 외지의 교향악단을 데려오게 됐으니.”

미려는 내 일 같이나 반가워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교향악을 이해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된다구.”

“몇 사람이라니요. 음악에 대한 일반 시민의 교양이 몇 해 동안 얼마나 높아졌게요.”

“높아지면 얼마나 높아졌을꾸. 정말 알구들이나 하구 그러나. 괜히 아는 척들 할 뿐이지.”

잘못하다간 모르는 “ 건 당신뿐일지두 몰라요, 괜히. 베토벤이나 쇼팽을 모를 사람이 현대인치구야 당신을 내놓고 누가 있겠수. 그걸 듣구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 줄 알우.”

음악이나 예술에 관해서는 부부는 언제나 의견이 다르다. 미려가 현대 여 성으로서 ─ 물론 교육도 전문 정도까지를 치러 받을 대로는 받았지만 ─ 교양이 높고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보통 이상으로 깊은 데 비겨, 만 해는 최고학부를 마친 편으로서는 그런 것에 대한 이해가 보통 이하로 얕고 때로는 등한시하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다. 더구나 음악에 대한 지식은 남 부끄러울 정도로 저급한 것으로서 부부간의 의견의 간격은 이런 교양의 차 이에서도 왔다.

“일반의 교양 정도를 살펴 가지구 하는 일이지 괜히야 이런 큰 계획을 할 리 있겠수. 대단히 귀중한 사업이구 말구요. 두 손을 들어 찬성할 사람 이 비단 우리뿐이겠수.”

그래도 만해는 이해가 바로 못 가고 생각이 다르다.

“한마디로 하면 허영이야. 계획하는 것두 허영이구 찬성하는 것두 허영 이야. 순진한 시민을 허영의 구렁 속에 빠트려 넣자는 것이야.”

“허영이라니요. 왜 허영이란 말요. 예술을 이해하자는 시민의 자랑을 가 리켜 그렇게 만만히 허영이라구 해서 옳단 말요.”

미려는 웬일인지 오늘 아침 남편의 의견을 도시 좇을 수가 없어서 기어코 발끈했다. 까마잡잡한 얼굴에 약을 올리면서 이 역시 까마잡잡한 남편의 얼 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두어 주일 동안의 해변 피서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안되었다.

해마다 정해 놓고 가는 피서가 부부에게 그다지 신기한 행복도 안 주었으 나 불행도 없었다. 판에 박은 듯이 평범한 연중행사에서 돌아왔을 때 부부 는 전에 없던 피곤을 느끼면서 게으른 며칠 동안을 답답하게 지내오던 중이 었다. 여름 한고비라 별로 분주한 일이 있지도 않았지만 만해는 아직 일터 인 거리의 사무소에도 나가지 않고 휴양 후의 몸을 집에서 쉬이는 것이었 고, 식구라고는 부부 외에 사용인이 있을 뿐인 따로난 단출한 살림살이라 가정에서 그런 남편과 똑같은 나날을 동무하면서 지내기가 미려에게는 무료 한 노릇이었다. 답답할 때 사람의 심사는 공연스리 터져 보는 때가 있다.

의외의 신문기사가 실마리가 되어 부부에게는 그 폭발이 이날 아침에 오게 된 모양이었다.

미려는 얼굴이 붉어지고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곧은 콧대에 빛나는 눈 망울이 부드러운 속에서도 펄펄한 결을 감추어서 도리어 별로 특징이 없고 둥그스름한 남편보다는 고집이 웃질일 듯하다. 한때 거리에서 인물로 이름 을 날렸던 것만큼 삼십이 채 못되는 그의 모양이 원만하게 피어난 꽃송이같 이 허물할 데가 없이 뛰어나 보인다. 짜증을 머금은 가인은 한층 아름다운 것일까. 해에 글은 얼굴에 가는 눈썹을 찌푸린 것이 이날 아침 미려는 유별 스럽게도 아름답게 보인다.


“허영이라니, 그건 당신 자신 당신을 모욕하는 셈이구 무지를 폭로하는 폭밖엔 더 되우.”

“허영이 아니구 뭐요. 그럼 속을 채리구 난 후에 문화를 숭상해두 하는 것이지 입에 밥두 못 들어가는 처지에 음악이니 예술이니 하구 흰 멋들을 피우는 게 허영 아니구 무엇이란 말요.”

만해도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아서 부부는 뜻밖에도 점점 맞서가게 되었다.

“밥만 먹어야 속이 든든해지는 줄 아는 모양이요. 음악두 양식의 하나라 나요. 뱃속만 알구 정신은 모르시우.”

“빈속에 음악만 먹어두 배가 부르다. 어디 그럼 음악만 먹구 살아보지 좀.”

“압다, 그 잘난 장사 좀 하면서 실업이나 하는 듯이 그 야단이요. 돈푼 이나 모으면 우엔 더 사람이 없는 것 같수. 실업가 실업가 하니까 내 세상 만 같지만 숨어선 수전노란 욕밖엔 더하는 줄들 아우. 어찌 반드시 넉넉한 후에만 문화사업을 하겠수. 가난한 속에서 애쓰는 모양들이 안 뵈이우.”

“오라, 미려 같은 사람이 많으니까 이 가난한 땅에서두 문화사업이 흥성 해 가는 모양이군.”

“시끄러워요. 다 당신보다들 난 줄이나 아세요.”

미려는 화를 버쩍 내면서 신문을 탁자 위에 던지고는 자리를 일어섰다.

신문이 찻잔을 다치면서 홍차가 쟁반 위에 쏟아져 흐른다. 그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복도로 휙 나가는 것을 보고는 만해는 더 그를 노엽힐까를 두려워 해서 움춧하면서 한참이나 말을 못 잇는다.

세상의 가정 쳐놓고 얼마간 아내의 목소리가 더 크지 않은 집안이 드물다. 남편의 행세는 밖 세상에 속하는 것이라는 듯 온갖 권세와 세력을 부리 다가도 한 걸음 집에 들어서면 아내의 손에 스스로 즐겨 모든 것을 맡겨 버 린다. 밖에서 거드름부리던 수염을 이상스럽게도 아내에게 끄들리우게 되고 그것을 과히 부끄럽게도 여기지 않는다. 만해의 가정같이 그런 풍습이 더욱 심한 집안은 없어서 미려의 큰소리 앞에서는 만해는 쥐구멍도 찾지 못하는 때가 있다 이런 운명은 . 당초 결혼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만해는 많은 경쟁 자 속에서 애걸복걸하고 미려의 뜻을 얻었던 까닭에 그때부터 아내를 섬기 는 몸이 되고 말아서 웬만한 억지면 대개는 받아주었고, 비위를 맞추기에 애를 써도 아내의 진심을 얻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결혼 팔년 동안의 세월 이 그런 노력의 연속이었다. 미려의 편으로 보면 처음부터 만족스런 결혼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일마다 불만이 많았던 데다가 단조한 가정생활도 무척 무료하게 느끼고 되었고 더구나 한가한, 말하자면 유한부인의 처지로는 피 곤밖에는 느낄 것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하는 몰취미한 사업에도 싫증이 나서 좀더 문화방면에의 전향을 권하나 종시 들어주지는 않아서 그 런 데서도 미려의 불만은 커지게 되었다.

“두구 보구려. 나두 문화 사업할 날이 있지 않은가.”

미려를 내다보면서 목소리를 부드럽히는 만해의 태도였다.

“저승에 가서 한단 말요. 당신 아는 게 밤낮 금광 밖에 더 있수. 그러다 간 되려 봉 빠질 날 있지 않으리.”

“사업을 크게 하자니까 금광에두 열중하는 게지 아무리 내겐들 황금이 마지막 목적이야 되겠수.”

“더두 말구 동요원이나 하나 맨들어 보재두 말 안 들어, 음악원을 세워 보재두 귀 안 기울여, 그러면서 언제 무얼 한단 말요. 당신이 정 싫다면 나 혼자래두 무어나 해볼 터예요.”

“차차 아무거나 생각해 봅시다 그려.”

“이번 교향악단 초빙의 일만 해두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요. 아무나 하면 할 일이지 신문사에만 맽겨둬야 좋을 일이요.”

“벌써 한 수 뺏긴 걸 어떻게 한단 말요.”

“뺏긴 건 뺏겼다구 하구 후원이야 못할 게 있수. 그래서 차차 이름을 알 려서 사업의 실마리를 잡더래두.”

“후원, 글쎄……”

“자, 그럼 이렇게 해요.”

미려는 비로소 속이 풀리면서 들어와서 남편의 팔을 잡고는 책상 앞 전화 있는 편을 가리켰다.

“얼른 전화나 한 통 거세요.”

남편을 전화 앞으로 끌고 가서는,

“현대일보 사장을 부르세요.”

기어코 사장을 청해 내어 교향악단의 일건을 말하고 그 후원을 제의하게 한 것이었다. 미려는 비로소 그날 아침의 노염이 풀렸고 만해도 괴롭던 공 기에서 벗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놓였다. 오래간만에 얼크러지려던 가정의 분위기가 이렇게 해서 활짝 개어 버렸다.

사장이 종세를 불러서 의론했고, 종세가 구체적 의론을 하러 사를 나와 만해의 집을 향했던 것이다. 연희장에서도 가장 아담한 붉은 지붕의 양옥을 바라보면서 어느덧 문 앞에 이르러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을 때, 부부는 마 침 뜰에 내려서 나무그늘 벤치에서 더운 햇살을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종소리를 듣고 미려는

“신문사에서 왔나부우.”

종종걸음으로 복도에 올라가 슬리퍼를 끌고 현관으로 나갔다.

“사장의 분부로 연예부에서 왔습니다.”

종세의 명함을 받고 미려는 방긋이 웃으며 그 아침 손님을 반갑게 불러 올렸다. 종세는 미려를 잘 기억하고 있는 터이나 미려로서는 종세를 대강 그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 그다지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일 은 자기들 편에서 자진해 제의하고 청했던 것인 만큼 다른 손님과는 다른 의미로서 각별히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객실이 아직도 무더웠던 까닭에 미려는 종세를 뜰로 청해 내렸다. 늦여름 의 끝이 한창 찬란하고 벚나무 그늘이 으늑하고 조그만 못에는 고기 그림자 까지 어른거리는 뜰 안이 방보다는 훨씬 견디기 나았던 것이다. 그늘 아래 나무의자가 서늘해 보이고 흰 페인트를 칠한 나무탁자도 선선해 보인다. 종 세는 만해와도 약간 면목이 있을 뿐이지 그다지 익숙한 편은 아니었다. 도 시 아내의 발설로 되어 가는 일이었던 까닭에 손수 나서 서둘기도 겸연해서 뜰에 머무른 채 엉거주춤 일어나서 종세를 맞이했다.

“이번엔 또 장한 사업을 계획하시는데 일부러 가서 치사는 못하구 되려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찾아뵈러 온 것이 저로선 영광으로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종세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진정이었다. 계획에 대한 의론도 의론이려니와 그 하루의 방문을 뒷날 동무 일마에게 전하게 될 때 얼마나 큰 뉴스일까를 생각하는 마음도 물론 한구석에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두 되려 아내가 이번 일에는 더 구미를 느끼면서 적극적으로 법 석을 해서 기어쿠 이렇게 오시게까지 했는데 후원이라군 해두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구 해서 기다리구 있던 차입니다.”

“여자라구 가정에서 너무 놀구만 있기두 무료해서 무엇이나 일을 좀 해 보았으면 한 것이지 법석이야 무얼 했단 말요.”

미려는 은연중에 남편을 핀잔주면서 웃음으로 알맞게 좌석을 맞추어 간다.

아무렴요 힘이 남으시면 “ . 무어나 다 일을 하셔야죠. 실업가로 이름이 높은 댁에서 조만간 그 무엇을 시작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한데요.”

종세가 부채질하는 바람에 만해도 마음이 너볏이 누그러졌거니와 미려도 입이 가벼워졌다.

“계획은 많았답니다. 동요원을 꾸며서 아이들을 모아 볼까두 했었구, 한 때는 음악원을 세워서 음악단을 맨들어 볼까두 궁리했었죠.”

“반가운 말씀입니다 ─ ”

종세는 기회나 잡은 듯이 뒤를 받아서,

“ ─ 그럼 차라리 이 기회에 음악원을 세우시고 그 이름을 내걸어서 후 원해 주시면 어떻습니까. 아무래두 개인의 이름을 내거는 것보다는 무엇이 나 단체 이름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요.”

“대체 이번 일은 얼마나한 규모로 시작하신 것인가요.”

“한 만 원 정도의 계획이죠.”

“그럼 그 반을 부담하기로 하구 무엇이나 음악원의 이름을 내세워 볼까요.”

아내의 말로 일은 의외에도 수월하게 결정되어 가는 것이었다.

만해 부부와 종세는 그 자리로 부랴부랴 녹성음악원(錄星音樂園)이라는 가상의 이름을 지어가지고는 그 기관의 명의로 신문사의 계획을 후원하기로 작정하였다.

“녹성음악원, 거 훌륭하군요.”

종세가 무심히 말해 본 것이 부부의 동의를 얻어 그 자리로 결정되었다.

“희망에 넘치는 좋은 이름이야.”

남편이 찬동하니 아내가 기쁘게 화한다.

“좀 부드럽긴 하나 여자들끼리로만 모을 기관이니까 아주 맞춤인 이름인 데요. 음악에 웬만큼 소양이 있는 순수한 동호자들만을 모아 가지구 합창 부, 기악부를 두어 교향악을 연구할 수 있을 정도까지 교육하게 하겠어요.

실력 있는 개인을 맨드는 건 물론이지만 단체로서는 훌륭한 합창단, 실내악 단, 교향악단을 차례차례로 양성해 내서 이 땅의 음악문화를 위해 대기염을 토해 볼 작정이에요. 교육, 경리 모든 것을 여자들의 손으로서만 하는 점에 다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색을 둘까 해요.”

“대단한 포부이십니다. 젊은 원장이 되실 부인의 자태가 벌써부터 선합 니다.”

종세가 충충대는 바람에 만해도 즐거우면서 배짱이 커진다.

그렇게 되면 내 한 “ 이십만 원은 내지. 이십만 원 자본이라면 당장 웬만 큼은 할 수 있을 테니까,”

미려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남편의 염량이다. 종세의 격려가 의외에 공을 이루게 된 모양이었다.

“이십만 원! 당신 입으로 그것을 듣기는 오늘이 처음이구료. 문화사업의 뜻을 이제 옳게 안 모양이군. 진작 성립이 되었던들 녹성음악원은 벌써 탄 생했을 것이구, 그랬더라면 하얼빈교향악단의 교섭두 신문사에 뺏기지는 않 았을 것을.”

미려가 애석하게 여기니까 종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번만은 어림없습니다. 그저 후원의 정도로나 하시구 다음 기회에나 독점할 생각을 하시죠. 사에선 벌써 교섭해 데려올 사람까지 보냈답니다.”

“아깝게 됐어.”

“가장 적임일 일마군을 보냈죠. 떠난 지 날이 지냈으니까 오래지 않아 교섭을 시작할 것입니다.”

“누 누구를 보냈어요.”

“문화비평가 천일마군이요.”

종세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그때까지 그 줄을 몰랐던 모양인 부부에게 는 금시에 큰 놀람인 모양이었다.

“일마 요.”

미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반문할 때 만해도 입에는 그 이름을 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입술을 떠는 것이었다.

“왜 그 줄들 모르셨나요. 신문에 이름을 안 냈을 뿐이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사실 종세는 일마의 이름이 부부에게 초문이었음을 놀라는 한편 그것을 띄어주게 된 그날의 자기의 역할을 거듭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 었다.

“일마씨가 갔어요.”

미려가 곰곰이 그 신비로운 이름을 입으로 새길 때,

“일마군은 바로 동생인데.”

만해는 같은 이름을 이렇게 부르게 되어 부부의 입에서 흐르는 발음은 같 아도 한때 두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은 그 뜻이 각각 달랐다. 그 각기의 심중을 민첩하게 살피는 종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 얼삥삥 해짐을 느끼면서 한참 동안의 그 무서운 침묵을 깨트리기에 고심 하는 것이 었다.

일마군의 재주가 놀라워 “ . 음악비평을 해두 상당히 날카롭구, 실제로 그 런 일을 시켜두 수완이 있어서 거리에서야 그 방면으로 제일인자죠.”

“재학 당시에두 꽤 재주가 출중했었답니다.”

만해가 얼굴빛을 바로잡고 천연스럽게 말할 때 종세는 그의 마음의 그림 자 속을 두 번째 예민하게 살피고,

“위인이 뜻을 못 얻어 이때껏 헤매이긴 하지만 기골된 품이 반드시 성공 할 날이 있을걸요.”

그 부부의 심리를 가늠보면서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동무를 칭찬 해 볼 때 미려는 심중에 무슨 회포를 감추었는지 끝까지 고집스럽게 침묵하 는 것이었다.


그날 밤 종세는 세상이라도 행복받은 듯이 자랑스런 낯으로 단골찻집에 나타나 훈과 능보를 잡아 놓고는 연설이었다.

“오늘 내가 어딜 갔다 왔겠나.”

장한 문답이나 하는 듯 제목을 갈아 가면서,

“누굴 만나구 무엇을 얘기했겠나.”

하고 법석을 대니 훈은,

“지옥이나 다녀왔나.”

도리어 조롱도 해본다.

“만해를 찾아갔었다네.”

“미려두 만났단 말인가.”

그제서야 능보도 목소리를 바로잡으면서 보통 일이 아니라는 듯이 몸을 으쓱 내민다.

“미려를 만났을 뿐이겠나. 기막힌 계획까지를 들었다네.”

“무 무슨 계획이란 말인가. 어 어떻게 해서 만났단 말인가.”

“하긴 일마군에 관한 일이니까 내가 이렇게 기뻐할 법은 없으나 오래간 만에 만나 보니까 감회두 엷지 않아서 하는 소리네.”

“옛날 용모가 변치나 않았던가.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나이가 드니 되려 아물어져서 옛날보다 곱절 아름답데. 이십대를 붉은 장미라고 한다면 지금은 한 송이 카네이션이라구 할까. 째이구 아물어진 붉 은 카네이션 ─ 삼십대 미인의 용모는 꼭 이 꽃의 인상인가부데. 가제 해수 욕장에서 돌아왔다든가, 약간 거스른 살결이 한층 매력이 있어 만해가 얼마 나 행복된 결혼을 했는가를 오늘 또 한번 느꼈네.”

“그리구 일마가 얼마나 불행한가를 말이지.”

능보는 말하면서 역시 감탄하는 투다.

삼십대에 들었다구 “ 아름답겠나. 미려가 원래 어떤 미인이게 그러나.

그 얼굴 한번 보려구 천리 길을 걸어와두 좋은 인물이 아닌가. 자네가 오늘 만나 본 것만두 큰 행복이야.”

“내 행복보다두 결국 일마군을 위해 행복인줄 아는데, 그 절대 가인이 별 안간 무슨 제의를 했는구 하니 ─ ”

종세는 낮에 들은 부부의 계획, 이십만 원 자본으로 녹성음악원을 설립하 고 그 음악원의 후원으로 하얼빈교향악단 초청의 사업을 응원하기로 작정했 다는 소식을 대충 이야기하고 부부가 일마의 출현을 알고서 한 계획이 아니 라 작정한 후에 비로소 일마가 이번 일에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 그 의외의 우연에 놀라더라던 것까지 붙여 말했다.

“흐음 ─ ”

훈도 아닌 게 아니라 놀랐다.

“굉장한 계획이야.”

“유한마담의 사업욕이란 것인가.”

“유마담이라구 누구나 다 사업욕이 있다든가. 그렇다면 이 땅의 문화사 업이 좀더 흥성흥성했게.”

“그럼 그 굉장한 욕망을 자넨 무엇으로 해석하려나. 결혼의 권태기에 스 며든 유혹이란 말인가. 하긴 권태두 올 때는 됐지만 무엇보다두 미려의 성 격이 만해보다 세단 말야. 결혼두 빌다시피 해서 한데다가 결머리까지 세어 노니 만해는 아내의 호령 앞에서 꿈적을 못하는 모양이지.”

능보의 해석에다가 종세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결혼 팔년에 아직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미려의 또 한가지 불만이 라구 해두 좋을걸. 만해의 밖에서의 생활이 지나치게 방종하단 말야. 아이 없는 것이 그 탓인지 어쩐지는 몰라두 그런 남편의 태도에 불만이 없을 수 야 있겠나.”

“그래서 녹성음악원의 탄생이 되구 교향악단의 후원으로 나타났다, 일마 군과 또 교섭을 가지게 된다 ─ 심상치 않은 인연인 모양인걸.”

“일마군이 돌아오면 볼만하겠군. 탄 자리에 불이 붙으면 좀체 끄기 어렵 다는데.”

“한번 식었던 일마가 다시 타오를까. 하긴 사람의 가슴속을 알 수는 없 지만.”

“두말 말구 어서 만주로 편지나 하게나. 뜨끔하구 가슴을 달리구 되쫓아 오게.”

훈은 농이 아니라 진정으로 종세에게 일러준다.

미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화제는 일마에게로 옮아가 세 사람은 길 떠난 동무의 뒷공론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편지 받으면 총각이 기뻐하렷다.”

“이런 고비를 기다리느라구 지금껏 노총각 행세를 한 셈이지.”

“아무때나 그 사람 제구실 할 사람 아닌가.”

동무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온 것이 종세의 공으로 돌려져 허출하던 판에 종세를 들쑤셔 결국 그날 밤의 술을 우려내기로 했다.

능보가 은파(銀波)를 보기로 주장한 까닭에 세 사람은 그 길로 남촌으로 나가 바 <실락원>을 찾았다.

술을 청하고 은파를 데려다 놓고 일마의 뒷공론에서 시작한 것이 어느덧 이야기는 행복론에까지 발전해 갔다.

“행복, 행복 하니 행복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도리어 이렇게 반문도 해본다.

“행복이 행복이지 무언가. 불행과 구별되는 것이 행복이지 별다른 겐가.”

“그럼 불행은 무언가.”

“옛날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의 행복을 분류해서 건강, 미용, 힘, 돈 ─ 의 네 가지를 들었다는데 대강 이 네 가지를 가지구 못 가지는 데서 행 복과 불행이 갈라지지 않겠나.”

“그 네 가지를 가지면 반드시 행복되겠네 그려.”

“자넨 불행두 행복될 때 있단 말인가. 행 불행은 마음 가지기 나름이란 말인가.”

“‘피칼디’사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형수인 그가 마지막 단 두대에 올라가려 할 때 형리가 여자 한 사람을 권하면서 이와 결혼하면 네 목숨을 살려주마 구 하니 그는 한참이나 여자를 보다가 절름발인 것을 알구 죽으면 죽었지 결혼은 못하겠다구 거절하면서 목숨을 버렸다는 것인데 ─ 죽음과 결혼과 이 두 가지 중에서 피칼디 사람에게는 죽음이 더 행복되었단 말이야. 결혼이 반드시 죽음보다 행복된 것은 아니야.”

“미친 녀석이지, 절름발이든 무어든 결혼을 할 게지 그래 죽음을 취한단 말이야.”

“또 하나! 철학자 ‘포시드뉴스’가 몹시 앓아서 누웠을 때 동무 한 사 람이 철학을 물으러 와서 미안히 여기니까 하는 말이, 고통은 내겐 아무것 두 아니야. 괴로워두 철학은 생각하구 말할 수 있거든. 괴롬이여, 네가 아 무리 나를 괴롭혀두 헛것이다 . 괴롬이 불행이라고는 죽는 한이 있어두 나는 말하지 않을 테다! 구 했다든가. ‘포시드뉴스’에게야 고통인들 불행이라 구 할 수 있겠나.”

“미친 녀석들이야. 철학자 나부랭이의 잠꼬대가 무슨 소용 있다든가. 행 복에는 상식론이 첫째니 행복은 행복, 불행은 불행, 뻔한 노릇이지 그 외 잡소리가 다 쓸데 있다든가.”

끝까지 이렇게 상식론을 주장하는 것은 능보였고 철학자의 예를 들어 한 고비 깊게 생각해 보는 것은 종세였다. 종세는 능보의 반대를 맡아 오던 끝 에 말머리를 돌려본다.

“그럼 대체 자판 지금 행복된 편이라구 생각하는가.”

“그야 행복두 천층 만층일 테니까, 지금 다따가 이 순간을 행복되다구 할지 어쩔 지는 모르나 불행하다구는 생각지 않네. 단골인 실락원에 와서 이쁜 은파를 옆에 앉히구 친구들과 술 마시는 이 시간이 불행할 리가 있겠나.”

“낙원이라면 몰라두 실락원이 뭐 그리 행복되단 말인가.”

종세의 재담에 한바탕 껄껄껄들 웃다가 능보는 어조를 갈면서,

“하기야 지금보다 좀더 행복스런 때라는 것을 생각할 수야 있겠지 ─ 내가 병원 개업이나 해놓고 은파를 데려다가 가정살림을 시작할 때 지금 보 다야 얼마 더 행복스럽겠지.”

“내가 신문사 사장이 되구 훈이 세계적 소설을 써서 노벨상을 타게 되구 할 때 말이지.”

“옳지, 옳지!”

“굉장한 꿈들은 꾼다. 이 알량한 의학박사, 어서 개업할 돈이나 마련해 놔요.”

은파도 웃으면서 자기의 잔을 들어 능보의 입에 대어 준다.

술이 거나해서 때아닌 행복론에 참가하게 된 것을 훈도 기쁘게 여겼다.

술은 마음을 활달하게 해주고 마음이 트이니 공상도 크다.

능보가 개업을 하고 종세가 사장이 되고 자기가 노벨상을 타고……

“내가 노벨상을 타면 그때 일마는 어떻게 될꾸.”

“장안의 갑부쯤 된다구 생각하게나.”

“장안의 갑부라면 천만장자는 되겠지. 그럼 유만해보다 낫게.”

“만해야 그때쯤엔 몰락해 버릴는지 뉘 아나.”

“일마가 미려와 재봉춘하게 된다. 아아, 공상은 즐겁다.”

“즐거울 뿐이겠나. 결국 공상만이 행복될는지 모르네.”

그럴 리야 있나 지금 “ . 한 소리가 모두 공상에만 그친다면 그런 섭섭할 데가 있겠나. 공상은 가끔가다가 실현이 되어야 공상인 것인지 그렇지 않으 면 공상의 값이 있는 줄 아나.”

훈은 어느새 행복론을 혼자서 도맡아 가지고 나선 듯이나 소리를 높이면 서 의기가 장하다.

“그럼 어서 자네 노벨상 타도록 힘쓰게나.”

“아무렴. 그리고 일마는 장안의 갑부가 될 테구, 돼야지.”

“자네 술이 과해서.”

“돼야지 ─ 우리가 지금 그다지 행복된 처지는 아니야. 반드시 더 좋은 때 오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나. 그런 기대 없이는 살 수도 없는 노릇 이구 기대 좀 했단들 허물할 사람 있겠나.”

“사실 이대로 가다 죽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노릇야.”

“인간사라는 건 항상 변하는 것, 우리의 처지가 좀더 좋게 변한단들 조 물주가 설마 시기하겠나 ─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은 ‘마케도니아’

의 많은 왕 속에는 로마의 거리에서 별별 천한 업을 가졌던 사람이 다 있 었다네. ‘시실리아’의 왕들은 ‘코린트’에서 학교 교사노릇들을 했다네 ─ 인간사는 무시로 변하는 것야. 거지두 왕 되구 왕두 거지되구……”

“왕이 거지가 돼서야 쓰겠나. 거지가 왕 되는 경우만을 생각하세나그려.”

“아무렴, 아무렴. 거지가 왕 되는 경우만을 ─ 내가 노벨상을 타구 일마 가……”

“술이 좋기는 해. 이렇게 유쾌하구 좋은 양반들 되는 것을.”

은파도 한몫 공상의 축에 끼이면서 술을 나르는 바람에 세 사람은 초저녁 인데도 벌써 곤드레만드레 취하게 되었다.

총중에서도 술이 약한 훈이 가장 심해서 공상론이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 가 울음으로 변해서 뜻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요란한 술좌석을 혼자서 휘저어 놓았다. 오래간만의 도도한 취흥이었다.

종세들이 불러준 자동차에 정신없이 몸을 던지고 두 동무와 각각 헤어져 서 성북동 집까지 나와 방안에 쓰러진 것도 밤을 세운 것도 ─ 모두가 꿈속 의 일이었다.

이튿날 잠자리에서 겨우 눈을 뜬 것도 오정을 지난 때였으나 눈을 뜨기는 떴어도 맑은 정신은 들지 않는다. 이틀 장취였다. 얼굴은 벌겋고 몸은 달아 서 아직도 취중이었다.

머리맡에 놓인 냉수를 주발 채 벌떡벌떡 켜고는 다시 오훗잠이 들었다.

생시인지 꿈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반오반매.

혼몽한 상태가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일마에게서 온 한 장의 전보를 받았던 것이다.

─ 교섭 순조 만 원 당선 놀라지 말라 하얼빈 천일마.

의아해서 전문을 두 번 읽고 세 번 읽어도 같은 문구이다.

“만 원 당선, 놀라지 말라.”

“무슨 뜻인구. 만 원 당선이라니 어떻게 해서 만 원을 얻었다 말인구.

무엇 때문에 만 원의 행운을 맞췄단 말인구.”

전보지를 다시 놓고,

“꿈두 이상해라, 일마 ─ 만원 ─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사실 아직도 희미한 훈의 정신으로는 꿈속 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도 큰 소식이요 큰 놀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꿈이긴커녕 훈은 지금 틀림없이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요, 눈앞에 거짓 아닌 전보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던가.

정신을 똑똑히 차려 보려고 훈은 또 한번 주발의 냉수를 벌떡벌떡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