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81장~10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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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지금껏 형식이가 자기의 남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아니하였었다.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장로가 웃는 말 모양으로,
“이선생께서 잘 가르쳐 주시더냐?” 하고 유심히 자기를 보았다. 그때에도 선형은 무심히,
“녜, 퍽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요” 하였다.
“네 마음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니?”
그제야 선형은 부친의 말에 무슨 뜻이 있는 줄을 알아듣고 잠깐 주저하였으나 대답 아니할 수도 없어서,
“녜”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는 종일 형식의 일을 생각하였다. 형식이가 과연 자기의 마음에 드는가, 과연 자기는 형식의 아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어떤지를 몰랐다. 형식이가 정다운 듯도 하고 그렇지 아니한 듯도 하였다. 그래서 순애더러,
“얘 순애야, 집에서 내 혼인을 할라나 보다. 어쩌면 좋으냐?” 하고 물었다. 순애는 별로 놀라는 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누구와?”
“자세히 알 수는 없는데, 아마 이선생과 혼인을 할 생각이 있는지…….”
“이선생과?” 하고 순애는 놀라는 빛을 보이며, “무슨 말씀이 계셔요?”
“아까 아버지께서 이선생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이상하게 내 얼굴을 보시던데…….”
순애는 잠깐 생각하더니,
“그래, 형님 생각에 어떻소?”
선형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글쎄 모르겠어. 어쩐지를 모르겠구나. 얘 어쩌면 좋으냐?”
“형님 생각에 달렸지요. 좋거든 혼인하고 싫거든 말고 그럴 게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만이지.”
“왜 그래요. 내 마음에 없으면 아니하는 게지. 부모가 억지로 혼인을 하겠소. 지금 세상에…….”
“그럴까?” 하고 결단치 못한 듯이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기웃기웃하다가, “얘 순애야, 그런데 네 생각에는 어떠냐?”
“무엇이?”
“내가 혼인하는 것이――이선생과.”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러지 말고 말을 해라. 너밖에 뉘게 의논을 하겠니. 아까 어머님께 말씀을 하려다가 어째 부끄러워서…….”
“글쎄, 형님도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런 일이야 자기 마음에 달렸지 누가 말을 하겠소.”
선형은 답답한 모양으로,
“그러면 네 생각에 이선생이 사람이 어떠냐…… 좋을까.”
“좋겠지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삼 일 동안 한 시간씩 글이나 배워 보고야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겠어요. 형님 생각에는 어때요?”
“나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에그, 어쩌나…… 어쩌면 좋아.”
이러한 회화가 있었다. 이 회화를 보아도 알 것같이 선형은 형식에 대하여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십칠팔 세 되는 처녀의 마음이라, 아주 악인이거나, 천한 사람이거나, 얼굴이 아주 못생긴 사람만 아니면 아무러한 남자라도 미운 생각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형식은 세상에서 다소간 칭찬도 받는 사람이므로 선형도 형식이가 싫지는 아니하였다. 차라리 어찌 생각하면 정다운 듯한 생각도 있었고, 더구나 아침에 부친의 말을 듣고는 전보다 좀더 정다운 생각도 나게 되었다. 그러나 무론 선형이가 형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 그렇게 이삼 일 내로 사랑이 생길 까닭이 없을 것이다. 장차 어떤 정도까지 사랑이 생길는지 모르거니와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랑이 생긴 것이 아니다.
형식이나 선형이가 피차의 성질을 모를 것은 물론이다. 형식이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다만 아름다운 꽃을 사랑함과 같은 사랑이다. 보기에 사랑스러우니 사랑하는 것이다. 극히 껍데기 사랑이다. 눈과 눈의 사랑이요, 얼굴과 얼굴의 사랑이다. 피차의 정신은 아직 한 번도 조곰도 마주 접하여 본 적이 없었다. 형식은 선형을 바라보며, 선형은 형식을 바라보며 속으로 ‘저 사람의 속이 어떠한가’ 할 터이다. 그러고 ‘저 사람의 속이야 지내 보아야 알지’ 할 터이다. 다만 김장로 양주와 한목사만 이 두 사람의 속을 잘 알거니 한다. 무론 이 두 사람이 피차에 아는 것만큼도 모르건마는 그래도 자기네는 이 두 사람의 속을 잘 알거니 한다. 그러고 두 사람이 부부 된 뒤에 행복될 것은 확실하거니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을 마주 붙인다. 다만 자기네 생각에――그 미련하게 얕은 생각에 좋을 듯하게 보이므로 마주 붙인다. 그러다가 만일 이 부부가 불행하게 되면 그네는 자기네 책임이라 하지 아니하고 두 사람의 책임이라 하거나 또는 팔자라, 하느님의 뜻이라 할 것이다. 이 모양으로 하루에도 몇천 켤레 부부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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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는 형식과 선형을 번갈아 돌아보더니 목사를 향하여,
“어찌하면 좋을까요” 한다. 아직 신식으로 혼인을 하여 본 경험이 없는 장로는 실로 어찌하면 좋을지를 모른다. 무론 목사도 알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모른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인륜에 대사를 의논하는 터인데 위선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시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다른 사람들도 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목사는 정신을 모으려는지 한참 잠잠하더니 극히 정성스럽고 경건한 목소리로, 처음에는 들릴락말락하다가 차차 크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지하시며, 사랑이 많으사 저희 죄인 무리를 항상 사랑하시는, 하늘 위에 계신 우리 주 여호와 하느님 아버지시여” 하고 우선 하느님을 찾은 뒤에 “이제 저의 철없고 지각 없고 죄 많고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죄인 무리가 우리 주 하느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부터 정해 주신 뜻대로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이형식과 박선형과 약혼을 하려 하오니 비둘기 같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성신께옵서 우리 무지몽매한 죄인 무리들의 마음에 계시사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무지몽매한 죄인 무리라 무슨 공로 있어 감히 거룩하신 하느님 우리 여호와께 비오리까마는 다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시고 하느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공로를 의지하여 비옵나이다. 아멘” 하고도 한참이나 그대로 있다가 남들이 다 고개를 든 뒤에야 가만가만히 고개를 든다. 목사는 두 사람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정성껏 아멘을 불렀다. 목사는 엄숙하게,
“그러면 정식으로 서로…… 어…… 말씀을 하시지요” 하고 장로 양주를 보고 다음에 선형을 본다. 장로는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는지 모르는 모양으로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더니 부인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하여 양반스럽게 느럭느럭한 목소리로,
“여보, 내가 형식 씨에게 약혼을 청하였더니 형식 씨가 승낙을 하셨소. 부인의 생각에는 어떠시오?” 하고는 자기가 경위 있게, 신식답게 말한 것을 스스로 만족하여 하며 부인을 본다. 부인은 아까 둘이 서로 의논한 것을 새삼스럽게 또 묻는 것이 우습다 하면서도 무엇이나 신식은 다 이러하거니 하여, 부끄러운 듯이 잠깐 몸을 움직이고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였다. 장로는,
“그러면 부인께서도 동의하신단 말씀이로구려.”
“녜” 하고 부인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을 본다.
“그러면 약혼이 되었지요” 하고 목사를 본다. 목사는 기도나 하는 듯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눈으로,
“녜, 그러나 지금은 당자의 의사도 들어 보아야 하지요” 하고 자기가 장로보다 더 신식을 잘 아는 듯하여 만족해하며, “무론 당자도 응낙은 했겠지마는 그래도 그렇습니까―― 자기네 의사도 물어 보아야지요” 하고 형식을 본다. ‘어디 내 말이 옳지?’ 하는 것 같다. 형식은 다만 목사를 힐끗 보고 또 고개를 숙인다. 장로가,
“그러면 당자의 뜻을 물어 보지요” 하고 재판관이 심문하는 태도로 위의를 갖추더니 남자 되는 형식의 뜻을 먼저 묻는 것과 다음에 여자 되는 선형의 뜻을 묻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여,
“그러면 형식 씨도 동의하시오?”
목사는 장로의 질문이 좀 부족한 듯하여 얼른 형식을 보며,
“지금은 당자의 뜻을 듣고야 혼인을 하는 것이니까 밝히 말씀을 하시오―― 선형과 혼인하실 뜻이 있소?” 하고 주를 낸다. 형식은 어째 우스운 생각이 나는 것을 힘껏 참았다. 그러나 대답하기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우선을 생각하고 얼른 고개를 들고 위엄을 갖추며, “녜” 하였다. 제 대답도 어째 우스웠다.
“이제는 선형의 뜻을 물어야 되겠소” 하고 목사가 선형의 수그린 얼굴을 옆으로 보며, “너도 부끄러워할 것 없이 뜻을 말해라.”
선형은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장로가 “네 뜻은 어떠냐” 하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였다. 장로도 목사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빙그레 웃는다. 부인도 웃는다. 그러나 목사는 여전히 엄숙하게,
“그러면 부인께서 물어 보십시오.”
“얘, 대답을 하려무나.”
“신식은 그렇단다. 대답을 해라” 하고 목사가 또 주를 낸다. 부인이 또 한번,
“얘, 대답을 하려무나.” 이번에는 목소리가 좀 날카롭다. 선형은 마지못하여 가만히, “녜―” 하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은 사람이 없었다. 장로가,
“어서 대답을 해라” 하고 한번 더 재촉을 받고 또 한번, “녜―”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장로와 목사는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들었다. 또 한 사람 형식도 들었다. 이번에는 목사가,
“어서 대답을 해라!”
“지금 대답을 했어요” 하고 부인이 대신 말한다. 선형의 얼굴은 거의 무릎에 닿으리만큼 수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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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이제는 되었소. 이제는 부모의 허락도 있고 당자도 승낙을 하였으니까, 이제는 정식으로 된 모양이외다” 하고 목사가 비로소 만족하여 웃는다. 목사의 생각에 이만하면 신식 혼인이 되었거니 한 것이다. 장로는 이제는 정식으로 약혼을 선언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여,
“그러면 혼약이 성립되었소” 하고 형식을 보며, “변변치 아니한 딸자식이오마는 일생을 부탁하오” 하고 다음에 선형을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친다. 형식은 꿈같이 기뻤다. 마치 전신의 피가 모두 머리로 모여 오르는 듯하여 눈이 다 안 보이는 것 같았다. 형식은 자기의 숨소리가 남에게 들릴까 보아서 억지로 숨을 조절한다. 목사와 장로는 새삼스럽게 형식의 벌겋게 된 얼굴을 보고 웃는다. 선형도 웬일인지 모르게 기뻤다. 자기가 ‘녜’ 하고 대답하던 것이 기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일전 글 배울 때에 하던 모양으로 치맛고름으로 이마와 콧마루에 땀을 씻었다.
얼마 동안 서로 마주보고 앉았더니 장로가,
“그런데” 하고 목사를 향하여, “성례를 하고 미국을 보낼까요, 공부하고 나서 성례를 하는 것이 좋을까요?”
“글쎄요” 하고 목사가, “몇 해나 되면 졸업을 하겠나요?”
“선형이야 적어도 오 년은 있어야겠지” 하고 선형더러, “오 년이면 졸업을 한다고 했지?”
“녜, 명년 봄에 칼리지대학(大學)에 입학을 하면……” 하고 이번에는 곧 대답을 하고 고개를 든다. 형식의 시선과 선형의 시선이 잠깐 마주치고 서로 갈라졌다. 마치 번개와 같이 빨랐다. 그러고 번개와 같이 힘이 있었다.
“그러고 형식 씨는” 하고 목사가, “몇 해면 졸업을 하시겠소?”
형식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목사에게 자기도 미국에 보내어 준다는 말은 들었건마는 벌써 작정이 된 듯이 말하기는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녜?” 하고 말았다. 목사는,
“아니, 금년 가을에 미국을 가시면 언제 졸업을 하겠나 말이오.”
“금년에 입학을 하면 만 사 년 후에 졸업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박사가 되나요?”
“아니지!” 하고 장로는 여기야말로 자기의 유식함을 보일 곳이라 하여, “박사가 되려면 그 후에도 얼마를 있어야 하지” 하였다. 그러나 몇 해를 있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형식은 그런 줄을 알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제는 김장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아버지다. 장인이다. 그래서 속으로도 웃기를 그치고,
“칼리지대학을 졸업하고 이태 이상 포스트 그래듀에이트 코스 대학원(大學院)을 공부하면 마스터라는 학위를 얻고 그 후에 또 삼사 년을 공부하여야 박사 시험을 치를 자격이 생긴답니다” 하였다. 이 말을 하고 나매 얼마큼 수줍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면 형식 씨는 박사가 되어 가지고 오시오. 여자도 박사가 있나요?”
“녜, 서양은 무론 여자도 있습니다. 일본 여자도 한 사람 미국서 박사가 되었다가 연전에 죽었습니다” 하고 얼른 선형을 보았다. 부인은,
“아니, 여자 박사가 다 있어요?” 하고 놀라며 웃는다. 장로도 여자 박사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자기도 놀랐건마는 아니 놀란 체하였다. 그러고,
“여자가 임금도 되는데” 하고 자기의 유식함을 증거하였다. 목사가,
“그러면 선형이도 박사가 되어 가지고 오지. 허허, 희한한 일이로다. 내외가 다 박사가 되고” 하고 벌써 박사가 되기나 한 듯이 기쁘게 웃는다. 형식과 선형도 웃었다. 다 웃었다. 형식도 박사가 되는 듯하였고 선형도 박사가 되는 듯하였다.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뻤다. 목사가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러면 성례를 하고 가는 것이 좋겠구려. 오 년 동안이나…….”
“그래도 공부를 마치고 성례를 해야지” 하고 장로가 말한다.
“그렇게 어떻게” 하고 부인이 딸에게 동정한다.
“그렇고말고요. 성례를 해야지.”
“그러면 공부가 되나. 공부를 마치고 해야지요.”
“이것도 당자에게 물어 봅시다” 하고 목사가 또 신식을 끄집어내어,
“형식 씨 생각에는 어떻소?”
“제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아오?” 형식은 웃고 말았다. 목사는 선형에게,
“네 생각엔 어떠냐?”
선형도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말이 없다. 목사는 좀 무안하게 되었다. 성례하여야 한다는 편에도 아무 이유가 없고, 아니 해야 한다는 편에도 아무 이유가 없다. 혼인을 하는 것도 무슨 이유나 자신이 없이 하였거든 성례를 하고 아니 함에 무슨 이유나 자신이 있을 리가 없다. 장난 모양으로 혼인이 결정되고 장난 모양으로 공부를 마치고 성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고 일동은 가장 합리(合理)하게 만사를 행하였거니 하였다. 하느님의 성신의 지도를 받았거니 하였다.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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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김장로 집 대문을 나섰다. 수증기 많은 여름밤 공기가 땀난 형식의 몸에 불같이 지나간다. 그것이 형식에게 지극히 시원하고 유쾌하였다. 형식은 반작반작하는 하늘의 별과 집집의 전등과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슬적슬적 보면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의 운수에 봄이 돌아온 것 같다. 선형은 아내가 되었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내 것이 되었다. 그러고 미국에 가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학사가 되고 박사가 될 수 있다. 사랑스러운 선형과 한차를 타고 한배를 타고 같이 미국에 가서 한집에 있어서 한학교에서 공부할 수가 있다. 아아, 얼마나 즐거울는지. 그러고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선형과 팔을 겯고 한배로 한차로 본국에 돌아와서 만인의 부러워함과 치하함을 받을 수가 있다. 아아, 얼마나 즐거울는지. 그러고 경치도 좋고 깨끗한 집에 피아노 놓고 바이올린 걸고 선형과 같이 살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늘 즐겁게…… 아아, 얼마나 기쁠는지. 형식은 마치 어린아이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장래도 장래려니와 지금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기쁘다. 그래서 이 생각하는 동안을 더 늘일 양으로 일부러 광화문 앞으로 돌아서 종로를 지나서 탑골공원을 거쳐서…… 그래도 집에 돌아오는 것이 아까운 듯이 집에 돌아왔다. 마음속에는 눈앞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앉았는 선형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러고 그 모양으로 보면 볼수록 더욱 사랑스러워지고 더욱 어여뻐진다. 형식은 대문 밖에서 한참 주저하였다. 이제는 내가 이러한 대문으로 출입할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자기는 갑자기 귀해지고 높아진 듯하였다. 그래서 주먹으로 대문을 한번 치고 혼자 웃으며 마당에 들어섰다.
노파와 우선이가 툇마루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형식을 보고 벌덕 일어난다. 우선이가 형식의 어깨를 힘껏 치고 웃으며,
“요, 어찌 되었나.”
형식은 시치미 뚝 떼고,
“무엇 말이야?”
“아따, 왜 이렇게…….”
“아, 어떻게 하셨어요” 하고 노파가, “일이 되었어요?” 하고 웃는다.
“무슨 일 말이야요?” 하고 형식도 웃는다.
“어디 자초지종을 내게 아뢰게. 가서 저녁 먹고…… 그 담에는?”
“물 마시고…….”
“그 담에는?”
“이야기하고…….”
“그 담에는?”
“왔지!”
“에끼, 바로 아뢰지 못할 테야!” 하고 우선이가 두 팔로 형식의 팔을 비틀며,
“인제두, 인제두 말을 아니 할 터이야?”
“아이구구, 응…… 응, 말해…… 말해.” 우선이가 팔을 놓으매 형식은, “글쎄 무슨 말을 하란 말이어?”
“주릿대를 안고야 말을 하겠니” 하고 또 한번 힘껏 비튼다.
“오냐, 오냐, 인제는, 인제는 말한다.”
“그래 말을 해!” 하고 팔은 놓지 아니하고 다짐을 받는다.
“가만 있게. 불이나 켜놓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 하고 자기의 방 램프에 불을 켜고 모자와 두루마기를 벗어 방 안에 집어던진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던지던 것과는 뜻이 다르다. 노파는 쌈지와 담뱃대를 들고 형식의 방으로 건너온다. 우선도 담배를 피워 물고 벙거지로 가슴과 다리와 등을 부치며 형식의 말 나오기를 기다린다. 형식은 웃으며,
“약혼했네” 하였다.
“그러면 성례는 언제 하고?”
“졸업 후에 한다대.”
“졸업 후에? 미국 가서 말인가.”
“응, 오 년 후에.”
“오 년 후에?” 하고 노파가 놀라서 담뱃대를 입에서 떼며, “오 년 후에, 다 늙은 담에요? 그게 무슨 일이람!”
“오 년 후에 누가 늙어요?” 하고 형식이가 노파를 보며 웃는다.
“한창 재미있을 시절은 서로 물끄러미 마주보기만 하고 있어요? 에그 참, 어서 성례하시오. 오 년 후라니” 하고 노파는 자기에게 큰 상관이나 있는 듯이 크게 반대한다. 형식은 노파의 말이 옳다 하였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는 동안이 좋지요” 하고 우선더러,
“그런데 칠월 그믐 안으로 떠나게 되었네. 오는 구월 학기에 입학을 할 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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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그믐께?” 하고 우선은 놀라며, “그렇게 급히?” 한다.
“구월에 입학을 못 하면 일년을 잃게 되겠으니까.”
“그러면 무엇을 배울 터인가.”
“가보아야 알겠지마는 교육을 연구하려네. 내가 지금껏 경험한 것도 교육이요, 또 지금 조선에 제일 중요한 것도 교육인 듯하고…… 하니까 힘껏 신교육을 연구해서 일생 교육에 종사하려 하네.”
“교육이라 하면?”
“무론 교육이라 하면 소학 교육과 중학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지. 지금 조선은 정히 페스탈로치를 기다리는 때인 줄 아네. 조선 사람을 전혀 새 조선 사람을 만들려면 교육밖에 무엇으로 하겠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가 아니 그렇겠나마는, 더구나 시급히 낡은 조선을 버리고 신문명화(新文明化)한 신조선을 만들어야 할 조선에서는 만인이 다 교육을 위하여 힘써야 할 줄 아네. 자네도 문필에 종사하는 터니 아무쪼록 교육열을 고취해 주게. 지금 교육은 참 보잘것이 없느니…….”
“그러면 사 년 동안 교육만 연구할 텐가.”
“사 년이 길어 보이나. 충분히 연구하려면 십 년도 부족일 것일세.”
“그런 줄은 나도 아네마는 교육 한 가지만 연구하겠는가 말일세.”
“무론 거기 관련하여 다른 공부도 하지. 다른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공부한단 말일세. 특별히 사회제도(社會制度)와 윤리학(倫理學)에 힘을 쓸라네” 하고 ‘너는 이 뜻을 잘 모르겠다’ 하는 듯이 우선을 본다. 우선은 실로 그 뜻을 잘 몰랐다. 그러나 자기의 어림으로 ‘대체 이러이러한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웃으며,
“그러면 자네의 아내…… 무엇이랄까, 스위트 하트는?”
형식은 웃고 얼굴을 좀 붉히며,
“내가 알겠나.”
“누가 알고…… 남편이 모르면.”
“제가 알지…… 지금 세상에야 지아비라도 아내의 자유를 꺾지 못하니까.”
“그러면 아무것을 배우든지 자네는 상관하지 않는단 말일세그려?”
“물론이지. ‘저’라는 것이 있으니까…… 누구나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권리가 있으니까. 남의 힘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저’를 좌우하겠나. 남더러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하고 충고하거나 알려 주는 것은 좋지마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너는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지.”
우선은 미상불 놀랐다. 그러나 그럴듯하다 하였다. 그러면서도 설마 그러하랴 하였다. 그러나 더 토론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형식의 사상은 자기와는 다름을 깨닫고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였을 뿐이다. 형식은 우선의 이마와 입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이기었다 하는 기쁜 빛이 보인다. 노파는 두 사람의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다만 형식이가 어디로 간다는 줄만 알았을 뿐이다. 세 사람은 각각 딴세상 사람이다. 우선과 형식은, 혹 같은 세상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되 노파는 결코 형식과 한세상 사람이 될 수가 없다. 한방 안에, 같은 시간에 각각 딴세상에 속한 세 사람이 모여앉았다. 그러고 서로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만 한다. 그러므로 그네는 같은 세상에 속하였거니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딴세상 이야기가 나오면 문득 눈이 둥글어진다. 노파는,
“이선생께서 어디를 가셔요?” 하고 가장 놀란 듯하다. 두 사람은 웃었다.
“녜, 어찌 되면 내월 그믐께” 하고 노파는 음력밖에 모르는 것을 생각하고 형식은, “내달 보름께 미국으로 갈랍니다.”
“미국? 저 양국 말씀이야요!”
“녜, 양국이오” 하는 형식의 대답을 이어 우선이가 껄껄 웃으며,
“저 코가 이렇게 크고 눈이 움쑥 들어간 사람들 사는 나라예요” 한다. 두 사람은 웃고 한 사람은 놀란다.
“아, 양국이 얼마나 멀게요?”
“한 삼만 리 되지요”는 형식의 말.
“바다로 한 십만 리 가요” 하고 우선이가 웃는다. 그러나 노파는 삼만 리와 십만 리가 얼마나 틀리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커녕 삼만 리가 얼마나 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만 입을 헤 벌릴 뿐이다.
“여기서 동네를 열댓 번 왔다갔다하기만큼 멀어요. 그런데 크다란 쇠로 만든 배를 타고 쿵쿵쿵쿵 하면서 가요” 하는 우선의 말에 노파는,
“화륜선 타고 갑니다그려. 몇 달이나 가나요?” 하고 담배를 빨기도 잊었다.
“한 서른아믄 달 가지요” 하고 우선이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쭈물거리고 웃는다.
“에그머니!” 하는 것을, 형식이가,
“그것은 거짓말이야요. 한 보름이면 가요” 한다. 노파는 원망하는 듯이 슬쩍 우선을 쳐다보더니,
“무엇 하러 그렇게 먼 데를 가요. 또 부인은 어떻게 하시고…… 에그머니!” 하고 노파는 몸을 떤다. 우선이가,
“부인도 같이 가지요. 이제 이선생이 부인과 함께 양국으로 가는데, 노파는 안 가보시려요? 쿵쿵쿵쿵 하는 쇠배를 타고 저 하늘 붙은 양국으로 가보지요.”
노파는 그런 소리는 들은 체도 아니 하고,
“그러면 언제나 돌아오시나요?”
“모르겠습니다. 한 사오 년 있다가 오지요. 오면 곧 찾아오지요” 하고 형식도 웃는다. 노파는 한숨을 쉬며,
“내가 사오 년을 사나요” 하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두 사람은 웃음을 그치고 노파를 물끄러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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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영채의 말을 좀 하자. 영채는 과연 대동강의 푸른 물결을 헤치고 용궁의 객이 되었는가. 독자 여러분 중에는 아마 영채의 죽은 것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신 이도 있을지요. 고래로 무슨 이야기책에나 (나오듯) 늦도록 일점 혈육이 없던 사람이 아들 아니 낳은 자 없고, 아들을 낳으면 귀남자 아니 되는 법 없고, 물에 빠지면 살아나지 않는 법 없는 모양으로, 영채도 아마 대동강에 빠지려 할 때에 어떤 귀인에게 건짐이 되어 어느 암자에 승이 되어 있다가 장차 형식과 서로 만나 즐겁게 백년가약을 맺어, 수부귀다남자 하려니 하고, 소설 짓는 사람의 좀된 솜씨를 넘겨 보고 혼자 웃으신 이도 있으리라.
혹 영채가 빠져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영채가 평양으로 간 것을 칭찬하신 이도 있을지요, 빠져 죽을 까닭이 없다 하여 영채의 행동을 아깝게 여기실 이도 있으리라.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독자 여러분의 생각하시는 바와 내가 장차 쓰려 하는 영채의 소식이 어떻게 합하며 어떻게 틀릴지는 모르지마는, 여러분의 하신 생각과 내가 한 생각이 다른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일 듯하다.
부산서부터 오는 이등 차실은 손님의 대부분을 남대문에 내리우고 영채의 탄 방에는 남녀 합하여 오륙 인밖에 없었다. 영채는 한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차가 떠나자 얼굴을 남에게 아니 보이려는 듯이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어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남산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로 그의 주의를 끄는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같이 탄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기가 싫어서 멀거니 휙휙 지나가는 메와 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별로 슬프지도 아니하고 괴롭지도 아니하였다. 곤한 잠을 반쯤 깬 모양으로 정신이 희미하였다. 꿈속 같기도 하였다.
노파와 두어 동무의 작별을 받을 때에는 슬프기도 하였다. 자기의 신세가 애달프기도 하였다. 자기는 이십여 년 살아오던 세상을 버리고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 푹푹 가슴을 우귀어 내는 듯도 하였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는 괴로운 세상을 버리고 마는 것이 시원한 듯도 하였다. 그래서 영채의 머릿속은 마치 물끓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두 시간을 지나매 영채의 정신은 아주 침착하게 되었다. 남대문 정거장에를 어떻게 나왔는지, 어떻게 차를 탔는지 잊어버린 듯도 하였다. 남대문을 떠난 지가 여러 십 년 된 것 같기도 하고 노파와 동무의 얼굴이 마치 여러 십 년 전에 보던 얼굴같이 희미하여진다.
영채의 눈에는 여름낮 볕을 받은 푸른 산이 보이고 밀과 보리의 누른 물결과, 조와 피의 푸른 물결도 보인다. 풀의 향기를 품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모시 적삼의 틈으로 불어 들어와 땀 나는 살을 서늘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도리어 영채에게 일종의 쾌감을 주었다. 그래서 영채는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안 보이는 것을 보려고도, 보이는 것을 안 보려고도 아니 하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고, 귀에 들어오는 대로 들었다. 그러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 것이며, 무엇 하러 가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이따금 나는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 난다. 그러면 영채는 죽었다 살아나는 듯이 한번 눈을 깜박 하고 진저리를 친다. 그러고는 집 생각과 평양 생각, 형식의 생각이 쑥 나온다. 그러나 조곰씩조곰씩 나오다가는 얼른 스러지고 또 여전히 꿈꾸는 사람같이 된다.
그러다가는 혹 청량리의 광경이 (눈에) 보인다. 그 짐승 같은 사람들이 자기의 손목을 잡아 끌던 생각이 나고는 혀로 입술을 빨아 본다. 조곰 힘을 들여 빨면 짭짤한 피가 입에 들어온다. 그러면 그 피 맛을 보는 듯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한참 있다가는 만사를 다 잊어버리려는 듯이 한번 고개를 흔들고 침을 뱉고는 아까 모양으로 메와 들을 바라본다. 바람이 영채의 머리카락을 펄펄 날린다.
차가 개성 터널을 지나서 황해도 산 많은 데로 달아난다. 푸푸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올라가다가는 수루루 하고 고개를 내려가며 또 푸푸하고 비스듬한 산모퉁이를 돌아가서는 수십 길이나 될 듯한 길로 미끄러지는 듯이 내려간다. 좌우에 풀 깊은 산골짝으로 푸푸 하고 올라갈 때에는 그 풀숲에서 단김이 후끈후끈 올라오다가 수루루 내려갈 때에는 서늘한 바람이 지켜 섰던 모양으로 휙 지나간다. 길가에 산 옆에 이물스럽게 생긴 바윗돌들이 내려쪼이는 햇빛에 빠직빠직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고 여기저기 외롭게 선 나무들도 졸린 듯이 잎새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고 가만히 섰다. 이따금 평평하게 뚫린 곳이 있어 거기는 냇가에 누워 자는 소도 보이고 한 뼘이나 넘어 자란 조밭에 김을 매다가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는 모자(母子)도 있다. 그러나 영채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이 차창에 턱을 걸고 앉았다.
차가 길게 고동을 울리며 어떤 산굽이를 돌아설 때에 기관차의 석탄 연기가 영채의 앞으로 (휙) 지나가며 영채의 오른편 눈에 석탄 가루를 집어넣었다. 영채는 눈을 감고 얼른 머리를 차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고 손에 들었던 명주 수건으로 눈을 씻었다. 그러나 석탄 가루는 나오지 아니하고 눈물만 흐른다. 눈이 몹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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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수건으로 눈을 씻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속으로 ‘에구 아파’ 하였다. 석탄 가루가 처음에는 눈 윗시울 속에 들어간 듯하더니 한참 비비고 난 뒤에는 어디 간지를 알 수 없고 다만 아프기만 하였다. 그래도 수건을 눈 속으로 넣어서 씻어 내려 하다가 마침내 나오지 아니함을 보고 영채는 화를 내어 차창에 손을 대고 손 위에 얼굴을 대고 엎디어 울었다. 지금껏 졸던 슬픔이 갑자기 깨어난 모양으로 눈물이 쏟아진다.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게 그저 슬프기만 하여 소리를 참고 울었다. 지금껏 꿈속 같던 정신이 갑자기 쇄락하여지는 듯하였다. 지나간 모든 생각이 온통 슬픔을 띠고 분명하게 마음속에 일어난다. 영채는 눈에 석탄 가루 들어간 것도 잊어버리고 혼자 슬퍼서 울었다. 오늘 저녁이면 나는 죽는다. 나는 대동강에 빠진다. 이 눈물도 없어지고 몸에 따뜻한 기운도 없어진다. 오늘 본 산과 들과 사람은 다 마지막 본 것이다. 나는 몇 시간 아니 하여서 죽는다 하는 생각이 바늘 끝 모양으로 전신을 폭폭 찌른다. 내가 왜 났던고, 무엇 하러 살아왔는고, 하는 후회도 난다.
이때에 누가 영채를 가볍게 흔들며,
“여봅시오. 고개를 드셔요” 한다. 영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겨우 한 눈을 떠서 그 사람을 보았다. 어떤 일복 입은 젊은 부인이 수건을 들고,
“이리 돌아앉으세요. 눈에 석탄 가루가 들어갔어요? 제가 씻어 내 드리지요” 하고 방그레 웃더니 영채의 얼굴에 슬픈 빛이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눈을 치떠서 영채의 얼굴을 본다. 영채는 감사한 듯도 부끄러운 듯도 하면서 그 부인의 말대로 돌아앉으며,
“관계치 않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인은 영채를 안을 듯이 마주앉으며,
“아니야요. 석탄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를 아니해요” 하고 수건을 손가락 끝에 감아 들고 한편 손으로 영채의 눈을 만지며,
“이 눈이야요? 이 눈이야요?” 하다가 영채의 오른 눈 윗시울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수건으로 살짝 씻어 낸다. 그 하는 모양이 극히 익숙하고 침착하다. 영채는 하는 대로 가만히 앉았다. 그 부인의 피곤한 듯한 따뜻한 입김이 무슨 냄새가 있는 듯하면서도 향기롭게 자기의 입과 코에 닿는 것을 깨달았다. 부인은 좀더 바싹 영채에게 다가앉으며, 눈을 비집고 연해 고개를 기울여 가며 씻어 낸다. 부인은 화가 나는 것같이,
“에그, 남들이 없었으면 혓바닥으로 핥았으면 좋으련만” 하더니, “에라! 나왔어요. 이것 보셔요. 이렇게 큰 게 들어갔으니까” 하고 수건에 묻은 석탄 가루를 영채에게 보인다. 그러나 영채는 눈이 부시고 눈물이 흘러서 그것이 보이지를 아니한다. 부인은 걸상에서 일어나 영채의 겨드랑에 손을 넣어 일으키며,
“자, 세면소에 가서 세수를 하셔요” 하고 앞서 간다. 차가 흔들리건마는 그 부인은 까딱없이 평지로 가는 모양으로 영채를 끌고 차실 저편 끝 세면소로 간다. 가다가 차실 중간쯤 해서 자기와 같이 앉았던 양복 입은 소년에게서 비누와 수건을 받아 들고 간다. 그 맞은편에서 책을 보고 앉았던 어떤 양복 입은 사람이 두 사람의 모양을 우두커니 보고 앉았더니 다시 책을 본다. 영채는 비틀비틀하면서 그 부인의 뒤를 따라 세면소에 갔다. 부인은 대리석판에 백설 같은 자기로 만든 세면기에 물을 따라 손으로 휘휘 저어 한번 부셔 내고 맑은 물을 가뜩이 부어 놓은 후에 비눗갑을 열어 놓고 붉은 줄 있는 큰 타월로 영채의 어깨와 옷깃을 가리어 주고 한 손으로 영채의 허리를 안는 듯이 영채의 몸을 자기의 몸에 기대게 하고,
“자, 비누로 왁왁 씻읍시오” 하고 물끄러미 영채의 반질반질한 머리와 꽃비녀와 하얀 목과 등을 보며,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다가 이따금 영채의 어깨를 가리운 수건도 바로잡아 주고 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걷어올려 준다. 남이 보면 마치 형이 동생을 도와 주는 것같이 생각하겠다. 사실상 그 부인은 영채를 동생같이 생각하였다. ‘얌전한 처녀다. 재주가 있겠다. 교육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그러고 석탄 가루가 눈에 들어가서 울던 것을 생각하고 ‘어리다, 사랑스럽다’ 하였다.
영채는 슬프던 중에도 그 부인의 다정한 것을 감사하게, 기쁘게 여기면(서) 잘 세수를 하였다. 자기의 등에 그 부인의 손이 얹힌 것을 감각할 때에 월화에게 안기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부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나 월화와 비슷하다 하였다. 그러고 그러나 나는 죽는다 하였다. 영채는 세수를 다 하고 일어섰다. 부인은 수건을 준다. 영채는 얼굴과 손을 씻었다. 부인은 수건을 달래서 영채의 목과 귀 뒤를 가만가만히 씻어 주었다. 영채는 눈을 떠서 정면으로 부인을 보았다. 영채의 눈은 벌겋다. 그러고 눈썹에는 아직 물이 묻어서 마치 눈물이 묻은 것 같다. 부인은 어머니가 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빙그레 웃으면서 영채를 보더니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자 갑시다. 가서 점심이나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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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오던 모양으로 영채의 자리에 돌아왔다. 영채는 그제야 겨우,
“감사합니다” 하였다. 부인은 앉으려 하다가 다시 자기의 자리로 가서 그 소년과 무슨 말을 하더니 가방 속에서 네모난 종잇갑을 내어들고 와서 영채의 맞은편 걸상에 앉으며,
“이것 좀 잡수셔요” 하고 그 종잇갑의 뚜께를 연다. 영채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를 끼인 것이다. 영채는 무엇이냐고 묻기도 어려워서 가만히 앉았다. 부인은 슬쩍 영채의 눈을 보더니, 속으로 ‘네가 이것을 모르는구나’ 하면서 영채에게 먹기를 권하며,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자기 먼저 하나를 집어먹으며, “자 잡수셔요” 한다.
“평양 갑시다(갑니다)” 하고 영채도 한쪽을 집어서 그 부인이 먹는 모양으로 먹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랐었다.
“댁이 평양이시야요?” 하고 부인은 또 하나를 집는다. 영채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랐다. 나도 집이 있나 하였다. 그러나 집이 있다 하면 노파의 집이다 하여 고개를 돌리며,
“녜, 평양 있다가 지금 서울 와 있어요” 하고 영채는 집었던 것을 다 먹고 가만히 앉았다. “자, 어서 잡수셔요” 하고 부인이 집어 줄 때에야 또 하나를 받아 먹었다.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 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 하였다. 부인은 또 한쪽을 집어 안팎 옆을 한번 뒤쳐 보며,
“그런데 방학이 되었어요?”
나를 여학생으로 아는구나 하고 한껏 부끄러웠다. 그러고 이 일본 부인이 어떻게 이렇게 조선말을 잘하나 하다가 너무도 조선말을 잘함을 보고 옳지 일본 가 있는 조선 여학생이로구나 하면서,
“아니야요. 잠깐 다니러 갑니다. 저는 학교에 아니 다녀요.”
“그러면 벌써 졸업하셨어요. 어느 학교에 다니셨어요. 숙명이요, 진명이요?”
“아무 학교에도 아니 다녔어요.”
이 말에 그 부인은 입에 떡을 문 채로 씹으려고도 아니 하고 우두커니 앉아서 영채를 본다. 그러면 이 여자는 무엇일까 하였다. ‘남의 첩’이라는 생각도 난다. 학교에 아니 다녔단 말에 다소 경멸하는 생각도 나나 또 그것이 어떤 계집인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好奇心)도 난다. 그러나 어떻게 물어 보아야 할지를 한참 생각하다가,
“그러면 평양에는 친척이 계셔요?”
영채도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지 모른다. 오늘 저녁이면 죽어 버리는 몸이요, 또 이 부인이 이처럼 친절하게 하여 주니 자초지종을 있는 대로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나 그래도 말을 내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또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몰라 떡을 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앉았다. 부인도 가만히 앉았다. ‘이 여자에게 무슨 비밀이 있구나’ 하매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러나 영채의 불편하여 하는 것을 보고 말끝을 돌려,
“제 집은 황주야요. 동경 가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쟤는 제 동생이구요.”
영채는 다만, “녜―” 하고 그 소년을 보았다. 소년도 기대어 앉아서 눈을 꿈벅거리며 여기를 쳐다보다가 영채의 눈과 마주치매 눈을 돌려 방(창) 밖을 내다본다. 둥그스름하고 살이 풍후한 얼굴에 눈이 큰 것과 눈썹이 긴 것이 얼른 눈에 뜨인다. 영채는,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남매가 잘 닮았다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없고 서로 이따금 마주보기만 한다. 영채는 ‘내게도 저런 동생이 있었으면’ 하였다. 그러고 동경 유학하는 그의 신세를 부럽게도 여겼다. 또 나는 죽는다 하였다. 나는 왜 이렇게 박명한고, 나는 어찌하여 일생을 눈물로 보내다가 죽게 태어났는고 하였다. 차는 간다. 해도 간다. 내가 죽을 시간은 가까워 온다 하고 자기의 손과 몸을 보았다. 그러고 나오는 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영채는 눈물을 감추려 하였으나 참으려면 참을수록 흐득흐득 느껴 가며 눈물이 나온다. 영채는 마침내 자기의 걸어앉은 무릎 위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그 여학생은 영채의 곁으로 옮아앉아 영채를 안아 일으키면서,
“여봅시오, 왜 그러셔요?”
영채는 자기의 가슴 밑으로 들어온 그 여학생의 손을 꼭 쥐어다가 자기의 입에 대며 엎딘 채로,
“형님, 감사합니다. 저는 죽으러 가는 몸이야요. 아아, 감사합니다” 하고 더 느낀다.
“에?” 하고 여학생은 놀라,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왜, 무슨 일이야요. 말씀을 하시지요. 힘있는 대로는 위로하여 드리지요. 왜 죽으려고 하셔요. 자 울지 말고 말씀합시오. 살아야지요. 꽃 같은 청춘에 즐겁게 살아야 하지요. 왜 죽으려 하셔요?” 하고 수건으로 영채의 눈물을 씻는다. 영채는 번히 눈을 떠서 여학생을 본다. 여학생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활발한, 남자 같은 사람에게도 눈물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에게는 그 여학생이 정다운 생각이 간절하게 된다. 영채의 눈물은(눈물을) 씻은 수건에는 영채의 입술에서 흐른 피가 묻었다. 여학생은 가만히 그 피와 영채의 얼굴을 비교하여 본다. 불쌍한 생각이 간절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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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은 영채의 신세 타령을 듣고,
“그러면 지금도 그 형식을 사랑하시오?”
사랑하느냐 하는 말에 영채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자기가 형식을 사랑하였는가, 알 수가 없다. 자기는 다만, 형식이란 사람은 자기가 찾아야 할 사람, 섬겨야 할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요, 칠팔 년래로 일찍 형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어서 형식을 찾고 싶다, 어서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이루겠다, 만나면 기쁘겠다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채는 멀거니 여학생을 보다가,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어려서 서로 떠났으니까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면 부친께서 너는 아무의 아내가 되어라 하신 말씀이 있으시니까 지금껏 찾으셨습니다그려. 별로 사모하는 생각도 없었는데…….”
“녜, 그러고 어렸을 때에 정들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되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어째 그리운 생각이 나요.”
“그것이야 그렇겠지요. 누구나 아잇적 생각은 안 잊히는 것이니깐. 그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 생각도 나시지요?”
영채는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녜, 여러 동무들이 나요. 그러나 그의 생각이 제일 정답게 나요. 그랬더니 일전 정작 얼굴을 대하니깐 생각던 바와 다릅데다. 어째 이전에 정답던 것까지도 다 깨어지는 것 같애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마음이 섭섭한지 울었습니다.”
잘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말하기 어려운 듯이,
“그러면 지금은 그에게 대해서는 별로 사랑이 없습니다그려.”
영채는 저도 제 생각을 모르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글쎄요, 만나니깐 반갑기는 반가운데 어쩐지 기다리고 바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애요. 내 마음속에 그려 오던 사람과는 딴사람 같애요. 저도 웬일인가 했어요. 또 그이도 그다지 저를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알았습니다” 하고 여학생은 눈을 감는다. 무엇을 알았단 말인고 하고 영채도 눈을 감는다. 여학생이,
“그런데 왜 죽을 결심을 하셨어요?”
“아니 죽고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 하나를 바라고 지금껏 살아오던 것인데 일조에 정절을 더럽히고…….” 괴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나며, “다시 그 사람을 섬기지도 못하겠고…… 이제야 무엇을 바라고 사나요” 하고 절망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그것이 죽을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찌하고요?”
“살지요! 왜 죽어요?”
영채는 깜짝 놀라 여학생을 본다. 여학생은 힘있는 목소리로,
“첫째, 영채 씨는 속아 살아 왔어요. 이형식이란 사람을 사랑하지도 아니하면서 공연히 정절을 지켜 왔어요. 부친께서 일시 농담삼아 하신 말씀 한마디 때문에 영채 씨는 칠팔 년 헛된 절을 지킨 것이외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피차에 허락도 아니한 사람을 위해서 절을 지키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야요? 마치 죽은 사람, 세상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절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이 있어요? 영채 씨의 마음은 아름답지요, 절은 굳지요. 그러나 그뿐이외다. 그 아름다운 마음과 그 굳은 절을 바칠 사람이 따로 있지 아니할까요. 하니까 지금 영채 씨가 그이를 사랑하시거든 지금부터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실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거든 다른 남자 중에 구하실 것이오. 그런데…….”
“그러나 지금토록 마음을 허하여 오던 것을 어떡합니까. 고성(古聖)의 교훈도 있는데” 한다.
“아니오. 영채 씨는 지금까지 꿈을 꾸고 지내셨지요. (허깨비를 보고 지내셨지요.) 얼굴도 잘 모르고 마음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마음을 허합니까. 그것은 다만 그릇된 낡은 사상의 속박이지요. 사람은 제 목숨으로 삽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지아비가 어디 있겠어요. 하니깐 영채 씨의 과거사는 꿈입니다. 이제부터 참생활이 열리지요.”
영채는 이 말을 듣고 놀랐다. 열녀라는 생각과 틀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과연 지금토록 형식을 사랑한 적은 없었고, 다만 허깨비로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형식이라고 짓고, 그러고는 그 사람과 진정 형식과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찾는 대신 이형식을 찾다가, 이형식을 보매 그 사람이 아닌 줄을 깨닫고 실망하고 나서는, 아아, 이제는 영원히 형식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실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영채는 잘못 생각하였던 것을 깨닫는 생각과 또 아주 절망하였던 중에 새로운 광명이 발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참생활이 열릴까요? 다시 살 수가 있을까요?” 하고 여학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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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생활이 열리지요. 지금까지는 스스로 속아 왔으니깐 인제부터 참생활이 열리지요. 영채 씨 앞에는 행복이 기다립니다. 앞에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버리고 왜 귀한 목숨을 끊어요” 하고 이만하면 영채의 죽으려는 결심을 돌릴 수 있다 하는 생각이라,
“그러니까 울기를 그치고 웃읍시오. 자, 웃읍시다” 하고 자기가 먼저 웃는다. 영채도 따라서 빙그레 웃더니,
“행복이 기다릴까요! 그러나 의리는 어찌합니까. 의리는 어기고 행복을 찾을까요. 그것이 옳을까요!” 하며 마음을 정치 못하여 한다.
“의리? 영채 씨께서 죽으시는 것이 의리 같습니까?”
“의리가 아닐까요?”
“어찌해서 의릴까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허하였다가 그 사람에게 몸을 바치기 전에 몸을 더럽혔으니 죽어 버리는 것이 의리가 아닐까요?”
옳다, 되었다 하는 듯이 여학생이,
“그러면 몇 가지를 물어 보겠습니다. 첫째, 이씨에게 마음을 허하신 것이 영채 씨오니까. 다시 말하면 영채 씨가 당신의 생각으로 마음을 허한 것입니까, 또는 부친의 말씀 한마디가 허한 것입니까?”
“그게야 무론 아버지께서 허하신 게지요.”
“그러면, 부친의 말씀 한마디로 영채 씨의 일생을 작정한 것이오그려.”
“그렇지요. 그것이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아닙니까.”
“흥, 그 삼종지도라는 것이 여러 천 년간, 여러 천만 여자를 죽이고, 또 여러 천만 남자를 불행하게 하였어요. 그 원수에 글자 몇 자가, 흥.”
영채는 놀라며,
“그러면 삼종지도가 그르단 말씀이야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겠지요. 지아비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겠지요. 그러나 부모의 말보다도 자식의 일생이, 지아비의 말보다도 아내의 일생이 더 중하지 아니할까요? 다른 사람의 뜻을 위하여 제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저를 죽임이외다. 그야말로 인도(人道)의 죄라 합니다. 더구나 부사종자(夫死從子)라는 말은 참남자의 포학(暴虐)을 표함이외다. 여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이외다.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고 지배함이 마땅하외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복종하는 그런 비리(非理)가 어디 있어요” 하고 여학생은 얼굴이 붉게 되며 기운을 내어 구도덕(舊道德)을 공격하더니, “영채 씨도 이러한 낡은 사상에 종이 되어서 지금껏 속절없는 괴로움을 맛보셨습니다. 그 속박을 끊읍시오. 그 꿈을 깨시오. 저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시오. 자유를 얻읍시오!” 하는 여학생의 얼굴에는 아주 엄숙한 빛이 보인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요?” 하는 영채의 사상은 자못 혼란하게 되었다. 영채는 자연히 그 여학생의 손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게 된 것 같다. 여학생의 입으로서 나오는 말대로 자기의 일생이 결정될 것 같다. 그래서 영채는 여학생의 눈과 입을 바라본다. 여학생은,
“여자도 사람이지요. 사람일진대 사람의 직분이 많겠지요. 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도 여자의 직분이지요. 또 혹은 종교로, 혹은 과학으로, 혹은 예술로, 혹은 사회나 국가에 대한 일로 인생의 직분을 다할 길이 많겠지요. 그런데 고래로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아내 되는 것만으로 여자의 직분을 삼았고 남의 아내가 되는 것도 남의 뜻대로, 남의 말대로 되어 왔어요. 지금까지 여자는 남자의 한 부속품, 한 소유물에 지나지 못하였어요. 영채 씨는 부친의 소유물이다가 이씨의 소유물이 되려 하였어요. 마치 어떤 물품이 이 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 가는 모양으로…… 우리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도 되려니와 우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채 씨께서 할 일이 많지요. 영채 씨는 결코 부친과 이씨만을 위하여 난 사람이 아니외다. 과거 천만대 조선과, 현재 십육억 동포와, 미래 천만대 자손을 위하여 나신 것이야요. 그러니깐 부친께 대한 의무 외에, 이씨께 대한 의무 외에도 조상께, 동포에게, 자손에게 대한 의무가 있어]요. 그런데 영채 씨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고 죽으려 하는 것은 죄외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여학생은 웃고,
“오늘부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시지요.”
“어떻게 시작해요?”
“모든 것을 다 새로 시작하지요. 지나간 일을랑 온통 잊어버리고 새로 모든 것을 시작하지요. 이전에는 남의 뜻대로 살아왔거니와, 이제부터는……” 하고 여학생은 잠깐 말을 멈추고 영채를 바라본다. 영채는 얼굴이 붉게 되고 숨이 차며 여학생의 눈과 입에 매어달린 것 같다가,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요?” 한다.
“이제부터는 제……뜻……대……로…… 살아간단 말이야요.”
열차는 산 속을 벗어나서 서흥 벌판으로 달아난다. 맑은 냇물이 왼편에 있다가 오른편에 가다가 한다. 두 사람은 잠자코 바깥을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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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여학생에게 끌려 황주서 내렸다. 여학생은 영채를 자기의 친구라 하여 집에 소개하고 자기와 한방에 있기로 하였다. 그 집에는 사십여 세 되는 부모와, 여학생보다 삼사 세 위 되는 오라비와, 허리 구부러진 조모가 있었다. 그 조모는 손녀를 보고 아무 말도 없이 너무 반가워서 눈물을 흘렸다. 여학생의 자친은 다정하고 현숙한 부인이다. 부친은 딸이 절하는 것을 보고도 별로 기쁜 빛도 표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고개를 돌렸다. 여학생은 그것을 보고 혼자 빙긋 웃었다. 오라비는 웃으며 누이를 맞았다. 그러고 누이의 어깨를 만지며,
“왜 오는 날을 알리지 아니했니?” 하였다. 그러고 동경에 관한 말을 물었다. 오라범댁은 부모 앞에서는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여학생과 마주앉았을 때에는 손을 잡고 등을 만지고 하며 반기는 빛이 넘친다. 영채는 이러한 모든 광경을 보고 재미있는 가정이다 하였다. 그러고 없어진 집 생각이 났다.
그날 저녁에는 부친을 빼어 놓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서 밀국수를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하였다. 영채는 여학생의 곁에 잠자코 가만히 앉았다. 오라비는 영채에게 대하여 어려운 생각이 나는지 한참 이야기하다가 밖으로 나가고 여자들만 모여앉았다. 여학생은 쾌활하게 조모와 모친과 형수(오라범댁)를 번갈아 보아 가며, 동경서 일 년 동안 지내던 이야기를 한다. 조모는 이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 중에도 형수가 제일 재미있게 듣는다. 모친은 딸의 이야기는 듣는지 마는지 먹을 것만 주선하며 이따금 딸의 이야기에는 상관도 없는 질문을 한다. 딸이, “어머닌 남의 말은 아니 듣고” 하면, “왜 안 들어. 어서 해라” 하기는 하면서도 또 딴소리를 하여서는 젊은 사람들을 웃긴다. 영채도 남을 따라서 웃었다. 실상 모친은 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조모는 더구나 알아듣지 못한다.) 조모는 웃기도 그치고 하품을 시작한다. 형수와 영채만이 턱을 받치고 재미나게 듣는다. 얼마 있다가 모친도 졸린지 눈이 껌벅이며 눈물이 흐른다. (모친이) 일어나 베개를 내려 조모께 드리며,
“어머님께서는 주무십시오. 그 애들 지껄이는 것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하고 자기도 팔을 베고 눕는다. 두 노인은 잠이 들고 세 청년만 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셋은 즐거웠다. 영채도 형수와 친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에는 셋이 한자리에서 가지런히 누워 잤다. 영채는 늦도록 잠이 아니 들었으나 마침내 잠이 들어서 꿈에 월화를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혼자 웃었다. 죽으러 가던 몸이, 어젯저녁에 죽었을 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다. 그러나 자기의 전도는 어찌 될는지 걱정이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병욱이다. 자기 말을 듣건대 처음 이름은 병옥이었으나 너무 부드럽고 너무 여성적이므로 병목이라고 고쳤다가, 그것은 또 너무 억세고 남성적이므로 그 중간을 잡아 병욱이라고 지은 것이라 하며 영채더러 하루는,
“병욱이라면 쓸쓸하지요. 나는 옛날 생각과 같이 여자는 그저 얌전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은 싫어요. 그러나 남자와 같이 억세고 뻑뻑한 것도 싫어요. 그 중간이 정말 (여자에게) 합당한 줄 압니다” 하고 웃으며, “영채, 영채…… 어여쁜 이름이외다. (그러나 과히 여성적은 아니외다.)”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집에서는 병욱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병옥이라고 부른다. ‘병옥아’ 해도 대답은 한다.
병욱은 영채를 매우 재주 있고, 깨닫기 잘하고, 공부 잘한 여자로 알았다. 처음에는 자기의 말을 못 알아들을 듯하여 아무쪼록 알아듣기 쉬운 말을 골라 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평등으로 대접한다. 영채는 무론 병욱을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한 지식과 생각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 안다. 그러므로 병욱의 입으로 나오는 말이면 무엇이나 주의하여 듣고 힘써 해석해 본다. 그래서 이삼 일 내에 병욱의 생각을 대강 짐작하게 되었고, 또 병욱의 생각이 자기가 지금토록 하여 오던 생각과는 거의 정반대됨을 깨달았다. 그러고 그 생각이 도리어 합리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지금은 차 중에서 병욱이가 하던 말을 잘 깨달아 알게 되었다.
병욱과 영채는 깊이 정이 들었다. 둘이 마주앉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에 취하게 되었다. 영채는 병욱에게 새로운 지식과 서양식 감정을 맛보고, 병욱은 영채에게 옛날 지식과 동양식 감정을 맛보았다. 병욱은 낡은 것을 모두 싫어하였었다. 그러나 영채의 잘 이해한 사상을 접하매 옛날 사상에는(사상에도) 여러 가지 맛있는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소학이며 열녀전이며, 한시 한문을 배우고 싶은 생각까지도 나게 되었다. 집에서 먼지 오르던 {고문진보} 같은 것을 내어서 이것저것 영채에게 배우기도 하고, 배운 것을 외우기도 하였다. ‘참 재미있다’ 하고 어린애같이 기뻐하면서 소리를 내어 읊기도 하였다. 부친은 병욱이가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칭찬을 하는지 조롱을 하는지 모르게 ‘흥, 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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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은 음악을 배운다. 한번은 사현금을 타다가 영채더러,
“집에서는 음악 배운다고 야단이야요. 그것은 배워서 광대 노릇을 하겠니? 하시고 학비도 아니 준다고 하지요. 내가 울고불고 떼를 쓰며 이것을 배우게 했어요. 집에서는 난봉났다 그러시지요. 오빠께서는 좀 나시지마는” 하고 웃었다. 한참 재미롭게 사현금을 타다가도 밖에서 부친의 기침 소리가 나면 얼른 그치고 어리광하는 듯이 진저리를 치며 웃는다. 영채도 사현금 소리가 좋다 하였다. 서양 악곡(樂曲)을 많이 들어 보지 못하였으므로 탑골공원의 음악도 별로 재미있게 아니 여겼더니, 이제는 서양 악곡의 묘미도 차차 알아 오는 듯하다.
병욱은 사현금과 한시와, 영채와 이야기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게 되었다. 더구나 새로 맛보는 한시 맛에 사현금을 잊어버리는 일까지 있다. 그러면서도 병욱은 분주히 돌아가며 형수를 도와 집일을 보살핀다. 하루는 크게 주름잡은 조모의 낡은 치마를 입고, 팔을 부르걷고, 호미를 들고 땀을 죽죽 흘리며 마당 구석과 담 밑과 울안에 잡초를 다 매고 이웃에 가서 화초를 얻어다가 옮겼다. 흙 묻은 손으로 땀을 씻어서 얼굴에는 누런 흙물이 여기저기 묻었다. 한(한참) 호미로 굳은 땅을 팔 적에 부친이 들어오다가 물끄러미 보고 섰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병옥이는 농사하는 집에 시집을 보내야겠군” 하였다. 또 모친은 보고,
“얘, 그만두어라. 더운데 널더러 김매라더냐” 하면서 웃었다. 병욱도,
“이제 봅쇼. 온 집안이 꽃밭이 될 테니” 하고 웃었다. 그러나 부친이나 모친이 병욱(의) 꽃 심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알지 않는 모양인 것을 보고 곁에 섰는 영채를 돌아보며,
“꽃을 중하게 아니 여기는 터에 음악 배우는 것을 왜 좋아하겠소” 하고 웃으며, “이제 아무렇게 해서라도 꾀꼬리를 한 쌍 잡아다가 아버지 방문 밖에 걸어 드릴랍니다. 설마 꾀꼬리 소리를 싫다고야 아니하시겠지, 어때요, 묘하지요?” 하고 웃는다. 영채도,
“녜, 묘합니다” 하고 웃었다.
“꽃이 고운 줄도 모르고, 꾀꼬리 소리가 고운 줄도 모르고 사는 인종은 불쌍하지요?” 하고 찬성을 구하는 듯이 영채를 본다. 영채는 그 뜻을 잘 알았다. 영채는 예술(藝術)이라는 말을 일전에 배웠더니 그 뜻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기생도 일종 예술가다. 다만 그 예술을 천하게 쓰는 것이다 하였다. 옛날 명기들은 다 예술가로 그네는 음악을 하고 무도를 하고, 시와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므로 그네는 오늘날에 이르는 바 예술가로구나 하였다. 그러니까 자기도 예술가다. 예술가 되는 것이 내 천직인가 하였다. 자기도 병욱과 같이 음악을 배울까 하였다. 자기가 지금껏 원수로 알아 오던 춤추기와 노래부르기도 이제 와서는 뜻이 있구나 하였다. 이럭저럭 영채는 죽을 생각을 그치고 병욱과 같이 즐겁게 살아가도록 힘쓰리라 하게 되었다. 영채의 마음에는 기쁨이 생겼다.
병욱도 영채가 이제 변하여 가는 줄을 안다. 그래서 기뻐한다. 무도와 성악(聲樂)을 배우기를 권하고, 동경을 가면 그것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음악학교가 있는 것과, 성악과 무도를 잘 배우면 세계적 공명(世界的 功名)을 이룰 수 있는 것도 말하였다. 병욱은 영채의 목소리에 혹하다시피 취하였다. 서투른 창가를 불러도 저렇게 아름답거든 자기가 익숙한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였다.
병욱의 집은 황주성 서문 밖에 있다. 한적하고 깨끗한 집터이다. 이웃에 집도 많지 아니하므로 둘이서 손을 마주잡고 석양에 산보도 한다. 산보할 때에는 두 처녀가 꿈 같은 장래를 이야기한다. 무르익은 풀잎 밑으로 흘러내려오는 시내에 두 발을 잠그고 소리를 맞추어 노래도 부른다. 둘은 이런 말을 한다.
“집에서 자꾸 시집을 가라는구려.”
“어떤 데로?”
“누가 아나요. 당신네 생각에 합당하면 좋다고 그러지요. 이번에는 기어이 시집을 가야 된다고 아주 엄명이야요.”
“그러면 어찌하셨어요.”
“아무 때나 내가 가고 싶어야 가지요”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 생각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고 얼굴을 붉힌다. 영채도 웃으며,
“어디요? 동경?”
“녜, 그런데 집에서는 큰 반대지요. 서자(庶子)예요. 또 가난하고…… 호…… 그러나 사람은 참 좋아요. 얼굴도 좋고, 풍채도 좋고, 재주도 있고, 마음도 크고 곱고…… 아아, 너무 자랑을 했다. 그러나 자랑이 아니야요. 아마 영채 씨가 보셔도 사랑하리다. 언제 한번 보여 드리지요. 그러나 빼앗아서는 안 되어요” 하고 영채를 보고 웃는다. 영채는 고개를 숙인 대로 웃는다.
이 모양으로 사오 일이 지났다. 영채는 서울 노파와 형식에게 자기가 살아 있단 말을 알려 주지 아니하였다. 후일에 서로 알 날이 있기를 바랐다. 영채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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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차차 이 집 내용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정이란 맛을 보지 못한 영채에게는 부모 있고, 형제 있고, 자매 있는 이 가정은 마치 선경같이 즐겁고 행복되어 보이더니 점점 알아본즉 그 속에도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첫째는 부자간에 뜻이 맞지 아니함이니, 아들은 동경에 가서 경제학을 배워 왔으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본을 내어 무슨 회사 같은 것을 조직하려 하나, 부친은 위태한 일이라 하여 극력 반대한다. 또 딸을 동경에 유학시키는 데 대하여서도 아들은 찬성하되 부친은 ‘계집애가 그렇게 공부는 해서 무엇 하느냐, 어서 시집이나 가는 것이 좋다’ 하여 반대한다. 방학에 집에 올 때마다 부친은 반드시 한두 번 반대하지마는 마침내 아들에게 진다. 작년 여름에는 반대가 우심하여 동경 갈 노비를 아니 준다 하므로 딸은 이틀이나 울고, 아들과 어머니는 부친 모르게 돈을 변통하여 노비를 당하였다. 그래서 딸은 부친께는 간다는 하직도 못 하고 동경으로 떠났다. 그 후에 며칠 동안 부친은 성을 내어 식구들과 말도 잘 하지 아니하였으나 얼마 아니 하여, “얘, 이달 학비는 보냈니? 옷값이나 주어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부친은 기어이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 하고, 아들은 졸업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여 두어 번이나 부자끼리 다투었다. 부친은 자기의 친구의 아들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어느 재판소 서기로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그가 작년에 상처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기어이 사위를 삼으려 하나 아들은 반대한다. 그 사람은 원래 부유한 집 자제로 십육칠 세부터 좀 방탕하게 놀다가 벼슬이 하고 싶다는 동기로 전수학교에 입학하였다. 근래에 흔히 있는 청년과 같이 별로 높은 이상이라든지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금줄을 두르고 칼 차는 것을 유익한(유일한) 자랑으로 알며, 한 달에 몇 번씩 기생을 희롱하여 월급 외에도 매삭 몇십 원씩 집에서 돈을 가져간다. 좀 교만하고 경박하고 허영심 있는 청년이라. 그러나 부친은 무엇에 혹하였는지 모르되, 이 사람밖에는 좋은 사람이 없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아들은 이 사람을 싫어할 뿐더러 도리어 천하게 여긴다. 이리하여 부자간에는 만사에 별로 의견이 일치하는 일이 없다. 부친은 아들을 고집쟁이요 철이 없고 부모의 말을 아니 듣는다 하고, 아들은 부친을 완고하고 무식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천하는지를 모른다 한다. 그러면서도 부친은 아들의 진실함과 친구간에 존경받는 줄을 알고, 아들은 그 부친의 진실함과 부드러운 애정이 있는 줄을 안다. 이러므로 부자간에는 무엇이나 반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어 모친은 특별한 의견은 없으되 흔히 아들에게 찬성한다. 그러할 때마다 부친은 모친을 한번 흘겨보고, 모친도 부친을 한번 흘겨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애들이 서로 흘겨보는 것과 같아서 얼른 풀어지고 만다.
그 다음에 걱정은 아들 내외의 사이에 정이 없음이다. 영채가 이 집에 온 지가 십여 일이 되도록 그 내외간에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지나가는 사람 모양으로 서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돌리든지 나가든지 한다. 그래도 아내는 밤낮 남편의 옷을 빨고 다리고 한다. 영채가 여기 온 후로는 밤마다 며느리와 딸과 자기와 한방에서 잤다. 그러고 아들은 사랑에서 혼자 자는 모양이었다. 영채는 얼마큼 미안한 생각이 있어서 병욱더러 다른 방에 가기를 청하였더니 병욱은 웃으며,
“걱정 마시오. 우리 오빠는 아니 들어오셔요.”
“왜 그러시나요?”
“모르지요. 이전에는 아니 그러더니 일본 갔다 와서부터 차차 멀어갑데다” 하고 입을 영채의 귀에 대며, “그래서 우리 형님이 나를 보고 울어요” 하고 동정하는 듯이 한숨을 쉰다. 영채도 며느리가 불쌍하다 하였다. 그렇게 얼굴도 얌전하고 마음도 고운 부인을 왜 싫어하는고 하여,
“무엇이 불만해서 그러나요?”
“모르지요. 불만할 것이 없을 듯하건마는 애정이 아니 하는(가는) 게지요. 내가 오빠한테 물어 보니까,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지마는 그저 보기가 싫구나 합디다. 아마 형님이 오빠보다 나이 많아서 그런지? 참 걱정이야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영채는 놀라며,
“형님께서 나이 많으셔요?” 영채도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달리 적당한 칭호도 없었거니와 또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오 년 장이랍니다” 하고 웃으며, “형님이 처음 시집올 때에는 우리 오빠는 겨우 열두 살이더라지요…… 형님은 열일곱 살이구, 그러니 무슨 정이 있겠어요. 말하자면 형님이 오빠를 길러 냈지요. 한 것이 다 자라나서는 도리어……” 하고 호호 웃는다. “오빠도 퍽 다정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언마는, 애정이란 마음대로 안 되나 봐요” 하고 두 처녀는 두 내외에게 무한한 동정을 준다. 영채는,
“그러면 어쩌면 좋아요. 늘 그래서야 어떻게 사나요.”
“요새 젊은 부부는 대개 다 그렇대요. 큰 문제지요. 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터인데……” 하고 두 처녀가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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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간에 의견이 합하지 않는 것은 견디기도 하려니와, 내외간에 애정이 합하지 않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상관없는 남의 일이언마는 다만 십여 일이라도 같이 있는 정리라, 영채에게는 이것도 걱정이 된다. 영채의 생각에는 될 수만 있으면 이 내외를 정답게 하여 주고 싶다. 영채에게는 그 부인이나 남편이 다 같이 정답게 보인다. 오래 교제를 하여 볼수록 그 부인이 마음에 들어 이제는 진정으로 (형님이라 부르고 싶다. 이전 월화에게) 대한 정과 비슷한 애정이 솟아오른다. 무론 월화에 대한 것과 같이 존경하고 의탁하는 생각은 없으나 한껏 사랑스럽고 한껏 불쌍한 생각이 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부인의 곁에 있어서 이야기 동무도 하여 주고, 기회만 있으면 위로도 하여 준다. 부인도 이제는 영채와 친하여서 여러 가지로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한다. 병욱은 다정하면서도 얼마큼 뻑뻑한 맛이 있거니와 영채는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맛이 있었다. 그래서 부인은 영채와 말하기를 유일의 낙으로 알았다. 차라리 어떤 점으로는 시누이보다도 영채가 더 정답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영채의 손을 꼭 쥐며, “아이구, 어쩌면 좋소” 하기까지 한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영채의 생각이라. 영채는 웬일인지 모르게 그 부인의 남편 되는 이에게 대하여 일종 정다운 생각이 난다. 처음에는 친구의 오빠인 까닭이라 하였으나 차차 더 격렬하게 그의 모양이 생각이 나고, 그의 모양이 번뜻 보일 때마다 문득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얼굴이 뻘개진다. 영채가 보기에 그도 자기를 다정한 눈으로 보는 듯하다. 영채는 암만 그것을 억제하려 하건마는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리에 누워도 그의 좀 넓적한 얼굴이 눈에 보여서 도무지 잘 수가 없다. 그러할 때마다 곁에 누운 부인을 안으면 부인도 영채를 안아 준다. 영채는 부인에게 대하여 미안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다. 어서 이 집을 떠나야 하겠다 하면서, 또한 차마 떠나기가 싫기도 하다. 그래서 영채에게는 또 한 가지 새 괴로움이 생겼다. 요사이 영채는 흔히 멀거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왜 그렇게 멀거니 앉았어요?”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이로부터 영채는 차차 남자가 그리워진다. 전부터 외롭게 적막하게 지내 왔거니와, 지금은 그 외로움과 그 적막과는 유다른 적막이 더 굳세게 영채의 가슴을 누른다. 이전에는 넓은 천지에 저 혼자만 있는 듯한 적막이더니 지금은 제 몸이 반편인 듯한 적막이로다. 다른 반편이 있어야 제 몸은 온전하여질 것 같다. 공연히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얼굴이 훗훗하여진다. 피곤한 듯도 하고, 술취한 듯도 하다. 무엇에 기대고 싶고 누구에게 안기고 싶다.
영채는 가만히 앉아서 이때껏 접하여 오던 여러 남자를 생각하여 본다. 자기의 손목을 잡아 끌던 사람, 겨드랑으로 손을 넣어 끌어안던 사람, 억지로 뺨을 대던 사람, 음란한 눈으로 자기를 유혹하며 교만한 말로 자기를 위협도 하던 사람. 그때에는 그렇게 원수스럽고 미워 보이던 남자들조차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따뜻한 감각을 준다. 남자의 살이 자기의 살에 와 닿던 감각이 자릿자릿하게 새로워진다. 지금 내 곁에 남자가 하나 있었으면 작히 좋으랴. 누구든지 손을 달라면 손을 주고 안아 준다면 안기고 싶다.
영채는 신우선을 생각하고 이형식을 생각한다. 여러 해 동안 접하여 오던 남자 중에 신우선은 가장 영채의 마음을 끌던 사람이다. 그는 풍채가 좋고, 쾌활한 기상이 좋고, 어디까지 모르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어떤 날 저녁에 둘이 마주앉아서 우선이가 영채를 달랠 때에 영채의 마음도 아니 움직임도 아니었다. 당장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때에 영채는 온전히 몸과 마음을 형식에게 바친 줄로 자신하였으므로 이를 갈고 억제하였다. 실로 그 동안 영채는 다른 남자의 모양이 생각에만 떠나와도 큰 죄로 여겨서 제 살을 꼬집어 억제하였다. 이러므로 지금껏 영채는 독립한 사람이 아니요, 어떤 도덕률(道德律)의 한 모형(模型)에 지나지 못하였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고 그 속에 들어 엎디인 모양으로, 영채도 알 수 없는 정절이라는 집을 짓고 그 속을 자기 세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사건에 그 집이 다 깨어지고 영채는 비로소 넓은 세상에 뛰어나왔다. 더구나 기차 속에서 병욱을 만나며 자기가 지금껏 유일한 세상으로 알아 오던 세상이 기실 보잘것없는 허깨비에 지나지 못하는 것과, 인생에는 자유롭고 즐거운 넓은 세상이 있는 것을 깨닫고, 이에 비로소 영채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젊은 사람이 되고, 젊고 어여쁜 여자가 된 것이라. 영채의 가슴에는 이제야 비로소 사람의 피가 끓기 시작하고 사람의 정이 타기를 시작한다. 영채는 자기의 마음이 전혀 변하여진 것을 생각한다. 마치 나서부터 어둡고 좁은 옥 속에서 지내다가 처음 햇빛 있고, 바람 불고, 꽃 피고, 새 우는 세상에 나온 것 같다. 영채는 거문고를 타고 바이올린을 울린다. 그러나 그 소리가 모두 다 새로운 빛을 띤다. 그러고 영채의 눈에는 기쁨과 슬픔이 섞인 듯한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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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꿈같이 기쁘게 지낸다. 날마다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다 가르치고 나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선형은 이제는 낯이 익어서 부끄러워하면서도 조곰씩 농담도 한다. 그러나 순애는 여전히 웃지도 아니하고 말도 많이 하지 아니한다. 형식은 선형으로 더불어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는 우두커니 앉았는 순애를 보고는 문득 말을 그치고 미안한 듯이 슬쩍 순애를 본다. 순애는 형식의 눈을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형식이야 자기를 보거나 말거나 전에 보던 데를 보고 앉았다. 이렇게 되면 형식도 말하던 흥이 깨어져서 잠자코 앉았고, 선형도 책장만 벌깍벌깍 뒤진다. 어떤 때에는 순애가 먼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형식과 선형은 가만히 순애의 뒷모양을 본다. 순애는 등이 좀 굽은 듯하고 어딘지 모르나 슬픈 빛이 보인다. 그러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는다. 웃으면서도 서로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형식은 아주 세상과 인연을 끊은 모양이 되었다. 학교는 사직하고, 학생들도 이제는 놀러 오지 아니하고, 원래 많지 않던 친구들도 근래에는 오지 아니한다. 우선도 무슨 분주한 일이 있는지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깨어서부터 잘 때까지 선형과 미국만 생각한다. 그래도 조곰도 적막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더할 수 없이 기뻤다. 형식의 모든 희망은 선형과 미국에 있다. 기생집에 갔다고 남들이 시비를 하고, 돈에 팔려서 장가를 든다고 남들이 비방을 하더라도 형식이에게는 모두 우스웠다. 천하 사람이 다 자기를 미워하고 조롱하더라도 선형 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칭찬하면 그만이다. 또 자기가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면 만인이 다 자기를 우러러보고 공경할 것이다. 장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현재를 가장 가치 있는 듯이 보려 하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진 형식에게는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이라. 자기가 경성학교에서 교사 노릇 하던 것과, 그 학생들을 사랑하던 것과, 자기의 생활과 사업에 의미가 있는 듯이 생각하던 것이 우스워 보이고 지나간 자기는 아주 가치 없는 못생긴 사람같이 보인다. 지나간 생활은 임시의 생활이요, 이제부터가 참말 자기의 생활인 것 같다. 그래서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도에는 오직 행복뿐이요, 아무 불행도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자기의 몸은 괴롭고 혼란한 티끌 세상을 떠나서 수천 길 높은 곳에 올라선 것 같다. 길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도 이제는 자기와는 종류가 다른 불쌍한 사람같이 보인다. 더구나 이전에는 자기의 동무로 알아 오던 주인 노파가 지극히 불쌍하게 보이고, 갑자기 더 늙고 쪼그라진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박복한 형식에게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어떤 사람이 김장로에게 형식의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는 장로가 불쾌한 낯빛으로 부인께,
“세상에 어디 믿을 사람 있소” 하여 이러한 회화가 있었다.
“왜요?”
“형식이가 기생집에를 다닌다구려.”
부인은 자기가 기생이매 이러한 말을 듣기가 좀 고통이 되었으나 이제는 귀부인이라, 그것을 고통으로 여길 체면이 아니라 하여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뉘 말을 들으니까 형식이가 다방골 계월향이라든가 하는 기생에게 취해서 밤마다 거기 가서 파묻혀 있었다는구려. 그러다가 탑골 승방이라든가 어디서 누구누구와 그 계집 때문에 다툼이 나서 발길로 차고 때리고 야단이 났더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계월향이가 형식에게 싫증이 나서 평양으로 도망하는 것을 형식이가 따라갔더라고요. 내가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니까 날짜까지 분명히 알고 확실히 증거까지 있다는구려” 하고 한숨을 쉬며, “얘야, 내가 일을 경솔하게 하였어.”
부인은 깜짝깜짝 놀라며 이 말을 듣더니,
“아, 누가 그래요?” 한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그러한 사람에게 준단 말가, 하는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형식의 외모와 말하는 양을 보매 그러한 것 같지는 아니하여서,
“누가 형식을 허노라고 그러는 게지요.”
“허,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차차 들어 본즉, 그 말이 확실한 모양이외다. 우선 형식이가 평양 갔다는 날짜가 꼭 이틀 동안 우리집에 아니 오던 날이오그려. 그래서 경성학교에서도 말하면 내어쫓은 모양이라는구려.”
“에그, 저런!”
이러한 말을 하다가 마침 선형이가 들어오므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선형은 대강 그 말을 들었다. 그 후에 장로 부부는 다시 그런 말을 하지는 아니하였으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근심이 있었다. 선형도 왜 그런지 모르게 그 말을 듣고는 좀 불쾌하였다. 형식을 보아도 웃고 싶지를 아니하고 도리어 미운 듯한 생각이 난다. 여전히 정다운 생각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미운 생각과 의심이 난다. 선형의 가슴에는 괴로움이 생겼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여전히 쾌활하게 지나건마는, 장로 집 식구들은 자연히 말이 적어지고 웃음이 적어지고 형식을 대할 때에 일종 불쾌하고 경멸하고 괘씸하여 하는 생각으로써 한다. 형식도 차차 이 변천을 깨닫게 되었다. 순애의 슬픈 듯한 눈은 가만히 여러 사람의 눈치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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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이 보기에 형식은 처음부터 자기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 자격이 부족하였다. 자기의 이상의 지아비는 이러하였다. 첫째, 얼굴 모양이 둥그레하고 살빛이 희되 불그레한 빛이 돌고, 그러하고 말긋말긋하고 말소리가 유창하고 또 쾌활하고, 뒤로 보나 앞으로 보나 미끈하고 날씬하고, 손이 희고 부드럽고 재주가 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러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원칙상 부귀한 집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어떤 목사나 장로의 아들이기를 바랐으나, 점점 목사나 장로는 그다지 귀한 벼슬이 아닌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상의 지아비는 미국에 유학하는 중이어니 하였었다.
그러다가 처음 형식을 보매 미상불 처녀가 처음 남자를 접하는 기쁨이 없음은 아니었으나 결코 자기의 짝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자기보다 여러 층 떨어지는 딴 계급에 속한 사람이어니 하였다. 첫째, 형식의 얼굴은 자기의 이상에 맞지 아니하였다. 얼굴이 길쭉하고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좀 들어가고 눈꼬리가 처지고, 게다가 이마에는 오랫동안 빈궁하게 지낸 자취로 서너 줄 주름이 깔렸다. 그러고 손이 너무 크고 손가락이 모양이 없고…… 아주 못생긴 사람은 아니나 자기의 이상에 그리던 남자와는 어림없이 틀린다. 형식의 태도에는 숨길 수 없이 빈궁한 빛이 보이고 마음을 쭉 펴지 못하는 듯한 침울한 기상이 드러난다. 게다가 그의 이력과 경성학교 교사라는 그의 지위는 선형의 마음에는 너무 초라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일찍 그를 정답다고 생각한 일도 없고 하물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일도 없었다. 만일 선형이가 형식에게 조곰이라도 호의를 가진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불쌍하게 생각하였음이리라. 선형의 눈에 형식은 과연 불쌍하게 보였다. 몇 시간 영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들으매 얼마큼 형식에게 숨은 위엄과 힘이 있는 줄도 깨달았으나 십칠팔 세 되는 처녀에게는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형은 ‘형식과 순애가 배필이 되었으면’ 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형식과 약혼을 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일변 놀라며 일변 실망하였다. 형식 같은 사람으로 자기의 배필을 삼으려 하는 부친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게도 생각이 되었다. 자기의 이상이 온통 깨어지고 자기의 지위가 갑자기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선형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줄을 안다. 부친의 말 한마디에 자기의 일생은 결정되거니 한다.
그래서 선형은 형식의 좋은 점만 골라 보려 하였다. 형식의 얼굴을 여러 가지로 교정하여 본다. 눈꼬리를 좀 끌어올리고, 광대뼈를 좀 깎게 하고, (손을 좀 작게 하고) 깊숙한 아래턱을 좀 들여밀어서 얼굴을 동그스름하게 만들고 또 뺨과 이마에는 적당하게 살을 붙이고 분홍 물감칠을 하고…… 이렇게 교정을 하노라면 형식의 얼굴이 차차 자기의 마음에 맞게 된다. 그러나 이따금 들여밀려는 광대뼈가 더 (쑥) 나오기도 하고, 내밀려는 뺨이 더 쑥 들어가기도 하며, 눈이 몹시 가늘어지기도 하고, 혹은 쇠눈깔 모양으로 커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화를 내어서 형식의 얼굴을 발로 왁왁 비벼 부시고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았다가 그래도 안심이 아니 되어서 다시 형식의 얼굴을 만들기를 시작한다. 어떤 때에는 곧잘 마음대로 되어서 혼자 쳐다보고 즐겨할 때에, 정말 형식이가 즐거운 얼굴을 가지고 들어와서 모처럼 애써 만든 얼굴을 말못되게 깨트리고 만다. 글을 배우다가 이따금 형식을 쳐다보고는 형식의 얼굴에다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은 탈을 씌워 본다. 그러나 그 탈이 씌워지지를 아니한다. 형식은 있는 정성을 다하여 가장 사랑하는 장래의 아내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에 선형은 열심으로 형식의 얼굴을 교정한다. 순애는 그 곁에 앉아서 형식과 선형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려 한다.
선형은 형식의 얼굴 교정하기를 그쳤다. 그 사업이 도저히 성공하지 못할 줄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형식의 얼굴에 아무쪼록 정이 들기를 힘쓴다. 지금까지는 형식의 얼굴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에 맞도록 변화하게 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자기의 마음으로 하여금 형식의 얼굴에 맞도록 변화하게 하려 한다. 억지로 ‘형식의 얼굴 곱다’ 하여 본다. ‘광대뼈 내민 것과 눈꼬리 처진 것이 도리어 정답다’ 하여도 본다. ‘그의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긴 것이 도리어 남자답다’ 하여도 본다. 그러면 과연 그렇다 하여지기도 하고 더 보기 흉하다 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오래 상종을 하고, 말도 많이 듣고, 서로 생각도 통하여짐을 따라 선형은 차차 형식에게 정이 들어 온다. 형식의 입술이 곱다 하게도 되고 형식은 썩 다정하고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다 하게도 된다. 자리에 들어가서는 으레 형식의 모양을 한번씩 그려 보고 (얼굴을) 교정도 하여 본다.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형식의 입술을 그려 놓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혼자 웃으며 ‘이것만 해도 좋지’ 한다. 선형은 형식의 입술을 사랑한다. 그래서 형식의 얼굴이 온통 입술이 되고 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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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도 자기의 외모가 선형의 마음을 끌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약혼한 뒤로부터 형식은 혼자 거울을 대하여 제 얼굴을 검사하여 보고, 여기는 선형이가 좋아하려니, 여기는 싫어하렷다 하여 보며, 선형이가 하던 모양으로 자기의 얼굴을 교정하여 본다. 그러나 그 얼굴이 선형이가 발로 비비던 얼굴인 줄은 모른다. 그러나 형식은 자기의 인격을 믿고 지식을 믿는다. 자기의 인격의 힘이 족히 선형의 마음을 후리리라 한다. 선형은 아직 어린애다. 자기의 말동무가 되지 못한다. 선형은 아직 자기의 인격을 알아줄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고통이다. 왜 내게는 여자가 취할 만한 용모와 풍채가 없으며, 세상이 부러워하는 재산과 지위와 명예가 없는고 하여 본다. 평생에는 우습게 말도 하고 조롱도 하던 용모, 재산, 지위도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몹시 부러워진다. 그래서 자기를 부귀한 집 도련님을 만들어 보고 호화로운 미소년을 만들어 보고 그러한 뒤에 선형을 자기의 앞에 놓아 본다. 그렇게 하여 보고 나면 현재의 자기의 처지가 퍽 보잘것없게 초라해 보여서 혼자 등골에서 땀이 흐른다. 선형이가 자기를 사랑할까, 도리어 밉게 여기든가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다시 선형을 대하기가 싫다. 내가 선형과 혼인한 것이 앙혼(仰婚)이 아닐까. 그는 돈이 있고 지위가 있고 용모가 있는데 나는 무엇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게다가 ‘처갓집 돈으로 미국 유학을 하여’ 하면 더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세상이 다 자기의 못생긴 것을 비웃는 것 같다.
조선에 나만큼 열성 있는 사람이 없고 인격과 학식과 재주도 나만한 사람이 없다. 조선 문명의 주춧돌은 내 손으로 놓는다 하던 형식의 자부심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없어진 것은 아니지마는 그것이 형식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선형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형식의 유익한(유일한) 목적이라. 선형의 사랑을 못 얻을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형식의 유일한 슬픔이라. 미국 유학을 하는 것도 조선의 문명을 위한다는 것보다 선형 한 사람의 사랑을 위한다는 것이 마땅하게 되었다. 사랑의 앞에서는 모든 교만과 자부심이 다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형식은 선형이 없이는 못 산다. 만일 선형이가 자기를 떼어 버린다 하면 자기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 만일 선형이가 자기를 버린다 하면 자기는 칼로 선형과 자기를 죽일 것이라 한다. 다행히 선형은 부친의 명령을 거역할 자가 아니요, 또 사랑이 없다고 자기를 버릴 자가 아니다. 그러나 도덕의 힘을 빌려 법률의 힘을 빌려서야 겨우 선형을 자기의 사랑에 복종케 한다 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니, 선형은 나를 사랑한다’ 하고 억지로 확신하여 본다.
형식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아니하여 선형의 사랑을 시험하여 보리라 하는 생각이 난다. 우선 악수를 청하여 보고 다음에 키스를 청하여 보리라. 그래서 저편이 응하면 사랑 있는 표요, 응치 아니하면 사랑이 없는 표로 알리라 한다. 우선이가 일찍 ‘사내답게, 기운 있게’ 하던 말을 생각하여 오늘은 기어이 실행하여 보리라 하면서도 이내 실행치 못하였다.
근일에 장로 부처의 태도가 얼마큼 변하여진 듯하다. 선형의 태도는 여전하지마는 그 눈에는 무슨 근심이 있는 듯하다. 형식도 대개 그 눈치를 짐작하였으나 자기가 먼저 말을 내기도 어려워서 혼자 걱정만 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조곰도 잘못한 일이 없으니까 언제나 여러 사람의 오해가 풀릴 날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래서 일간에는 영어만 가르치고는 곧 집에 돌아와서 책을 보았다.
하루는 형식에게 편지 한 장이 왔다. 황주 김병국의 편지다. 그 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내가 내외간에 애정이 없는 것도 형도 아는 일이어니와 근래에 와서 더욱 심하게 되었다. 내 아내에게 결점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내 마음이 방탕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 나는 근래에 극렬한 적막의 비애를 느끼게 되었고, 이 비애는 결코 내 아내의 능히 위로하여 줄 바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구한다. 무엇을 구한다는 것보다 어떤 사람을 구한다. 그러고 그 사람은 이성(異性)인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을 못 구하면 죽을 것같이 적막하다. 그래서 억지로 내 아내를 사랑하려 한다. 그러나 힘쓰면 힘쓸수록 더욱 멀어져 간다.
내 누이가 돌아왔다. 누이를 대하면 매우 유쾌하다. 또 누이도 내 마음을 알아주어서 여러 가지로 위로도 하여 준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못 얻는 정신적 위안을 누이에게서 얻으려 하였다. 그래서 과연 얻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누이의 사랑에는 한정이 있다’ 함이다. 나는 이제는 누이의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구하던 것은 오직 정신적 위안뿐인 줄 알았더니 이제 와서 비로소 그렇지 아니한 줄을 깨달았다. 즉 나의 요구하는 것은 정신적이라든가 육적(肉的)이라든가 하는 부분적 사랑이 아니요, (영육(靈肉)을 합한) 전인격(全人格)의 사랑인 줄을 깨달았다.
그런데 한 이성(異性)이 내 앞에 나섰다. 나는 견딜 수 없이 그에게 끌려진다. 나는 지금 의리와 사랑의 두 사이에 끼어서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긴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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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병국의 편지를 보고 놀랐다. 병국은 유학생 중에도 극히 도덕적 인물이었다. 술도 아니 먹고 계집은 무론 곁에도 가지 아니하였다. 그 중에도 부부의 관계에 대하여는 극히 굳건한 사상을 가졌었다. 누가 아내에게 애정이 없다든지 이혼 문제를 말하면 병국은 극력하여 반대하였다. 한번 부부가 된 이상에는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하여 예수교적 혼인관을 가졌었다. 당시 유학생에게 연애론과 이혼론이 성하였을 때에 병국은 유력한 부부 신성론자였다. 그러하던 병국이가 이제는 이러한 말을 하게 되었다. ‘아내를 사랑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건마는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멀어 가오’ 하는 병국의 편지 구절을 형식은 한번 더 읽어 보았다. 그러고 ‘나는 무엇을 구하오. 그것은 이성인가 보오. 이것을 못 얻으면 죽을 것 같소’ 하는 구절과, ‘내가 구하는 것은 정신적이라든지 육적이라든지 하는 부분적 사랑이 아니요, 영육(靈肉)을 합한 전인격적 사랑이외다’ 한 구절을 생각하매, 병국의 괴로워하는 모양이 역력히 눈에 보이는 듯하여 무한히 동정이 갔다. 그러나 형식은 또 자기의 처지를 생각한다. 선형은 과연 자기를 사랑하여 주는가. 자기는 선형에게 ‘부분적이 아니요 전인격적인 사랑’을 받는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하여도 선형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는 냉담한 것 같다. 이 약혼은 과연 사랑을 기초로 한 것일까.
그날 저녁에 선형은 ‘녜’ 하고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그 ‘녜’가 무슨 뜻일까. ‘형식을 사랑합니다’ 하는 뜻일까. 또는 ‘부모께서 그렇게 하라 하시니 명령대로 합니다’ 하는 뜻일까. 선형의 자기에게 대한 처지가, 병국의 그 아내에게 대한 처지와 같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며(생각하매) 형식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난다. 만일 선형이가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 하면, 이는 불쌍한 선형을 희생함이라. 선형은 속절없이 사랑 없는 지아비 밑에서 괴로운 일생을 보낼 것이요, 또 형식 자기로 말해도 결코 행복되지 아니할 것이라. 남의 일생을 희생하여서까지 자기의 욕심을 채움이 인도에 어그러짐이 아닐까. 이에 형식은 선형의 뜻을 물어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튿날은 마침 순애가 두통이 나서 눕고 선형과 단둘이 마주앉을 기회를 얻었다. 영어를 다 가르치고 난 뒤에 형식은 있는 힘을 다하여,
“선형 씨, 한마디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하고 형식은 고개를 숙였으나 선형은 고개를 들어 형식의 갈라진 머리를 보고 의심나는 듯이 한참 생각하더니,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살짝 얼굴을 붉힌다.
“제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이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꺼리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는 형식의 가슴은 자못 울렁울렁한다. 사생이 달린 큰 판결이 몇 초 안에 내리는 듯하다. 선형도 아직 이렇게 책임 중한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으므로 형식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난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모르면서 간단히, “녜” 하였다. 약혼하던 날 대답하던 ‘녜’와 다름이 없는 ‘녜’로다. 형식도 더 말하기가 참 어려웠다. 또 그 대답이 무섭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형의 참뜻을 모르고 의심 속으로 지내기는 더 무서웠다. 그래서 우선의 ‘사내답게’ 하던 말을 생각하고 기운을 내어,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선형 씨는 나를 사랑합니까?” 하고는 힘있게 선형의 눈을 보았다. 선형도 하도 뜻밖에 질문이라 눈이 동그래진다. 더욱 무서운 생각이 난다. 실로 아직 선형은 자기가 형식을 사랑하는가 않는가를 생각하여 본 적이 없다. 자기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권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자기는 이미 형식의 아내다. 그러면 형식을 섬기는 것이 자기의 의무일 것이다. 아무쪼록 형식이가 정답게 되도록 힘은 썼으나, 정답게 아니 되면 어찌하겠다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한 일이 없었다. 형식의 이 질문은 선형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래서 물끄러미 형식을 보다가,
“그런 말씀은 왜 물으셔요?”
“그런 말을 물어야지요. 약혼하기 전에 서로 물어 보았어야 할 것인데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물어야지요.”
선형은 잠자코 앉았다.
“분명히 말씀을 하십시오. 오냐라든지 아니라든지…….”
선형의 생각에는 그런 말은 물을 필요도 없고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이미 부부가 아니냐. 그것은 물어서 무엇 하랴 한다. 그래서 웃으며,
“왜 그런 말씀을 물으셔요?”
“하루라도 바삐 아는 것이 피차에 좋지요. 일이 아주 확정되기 전에…….”
“에? 확정이 무슨 확정입니까.”
“아직 약혼뿐이지 혼인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직 잘못된 것을 교정할 여지가 있지요.”
선형은 더욱 무서워서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의 말하는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약혼했던 것을 깨트린단 말씀입니까?” 하는 선형의 눈에는 까닭 모르는 눈물이 고인다. 형식은 그것을 보매 이러한 말을 낸 것을 후회하였으나,
“녜― 그 말씀이야요.”
“왜요?”
“만일 선형 씨가 나를 사랑하시지 아니하면…….”
“벌써 약혼을 했는데두?”
“약혼이 중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무엇이 중합니까.”
“사랑이지요.”
“만일 사랑이 없다 하면?”
“약혼은 무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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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선생께서는?”
“제야 선형 씨를 사랑하지요. 생명보다 더 사랑하지요.”
“그러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오. 선형 씨도 저를 사랑하셔야지요.”
“아내가 지아비를 아니 사랑하겠습니까.”
형식은 물끄러미 선형을 본다. 선형은 고개를 숙인다.
“그것은 뉘 말입니까.”
“성경에 안 있습니까.”
“그렇지마는 선형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형 씨의 진정으로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합니까, 또는 사랑하니까 아내가 됩니까.”
이것도 선형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찬가지’라는 말에 형식은 놀랐다. 그것이 어찌하여 마찬가질까. 이 계집애는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할 줄을 모르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일언이폐지하고,
“한마디로 대답해 줍시오…… 저를 사랑하십니까” 하는 소리는 얼마큼 애원(哀願)하는 듯하다. ‘아니오’ 하는 대답이 나오면 형식은 곧 죽을 것 같다. 꼭 다문 선형의 입술은 형식의 생명을 맡은 재판장의 입술과 같다. 선형은 이제는 머리가 혼란하여 더 생각할 수가 없다. 형식의 비창한 얼굴을 보매 다만 무서운 생각이 날 따름이다. 그래서 다만,
“녜!” 하였다. 형식은 한번 더 물어 보려 하다가 ‘녜’가 변하여 ‘아니오’가 될 것이 무서워서 꾹 참고 갑자기 선형의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마치 형식의 손에 녹아 버리고 마는 듯하였다. 선형은 가만히 있다. 형식은 한번 더 힘을 주어서 선형의 손을 쥐었다. 그리하고 선형이가 마주 꼭 쥐어 주기를 바랐으나 선형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다. 형식은 얼른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왔는지 형식도 모른다. 선형은 인사도 아니 하고 형식의 나가는 양을 보았다.
선형은 책상에 기대어서 눈을 감고 혼자 생각하였다. 형식이가 하던 말이 분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 부끄럽지도 아니한가. 이러한 말을 부끄럼 없이 하는 형식은 암만해도 단정한 남자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이 기생집에 가서 기생과 하던 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가 형식에게 욕을 당한 것 같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든지 동포를 사랑한다든지 부부는 서로 사랑할 것이라든지 하면, 그 사랑이란 말이 극히 신성하게 들리되, 남자가 여자에게 대하여, 또는 여자가 남자에게 대하여 사랑해 주시오 한다든지, 나는 사랑하오 한다든지 하면 어찌해 추해 보이고 점잖지 아니해 보인다. 선형이가 지금껏 가정과 교회에서 들은 바로 보건대, 다른 모든 사람은(사랑은) 다 거룩하고 깨끗하되 청년 남녀의 사랑만은 아주 불결하고 죄악같이 보인다. 선형은 사랑이란 생각과 말이 원래 남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인 줄을 모른다. 이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관한 말은 적지 않게 선형을 불쾌하게 하였다. 선형의 생각에 자기의 지아비는 극히 깨끗하고 점잖은 사람이라야 할 터인데 그러한 소리를 염치없이 하는 형식은 죄인인 듯하다. 더러운 기생에게 하던 버릇을 내게다가 했구나 하고 선형은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형식이가 잡았던 손을 보았다. 그 큰 손 속에 자기의 손이 푹 파묻혔던 것과 자기의 손을 아프도록 힘껏 쥐어 주던 것을 생각하고 선형은 무엇이 묻은 것을 떨어 버리는 듯이 손을 서너 번 내어두르고 치마로 문대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본즉, 사랑하여 준다는 말과 손을 잡아 주던 맛이 아주 싫지도 아니하였다. 그뿐더러 형식이가 힘껏 손을 꼭 쥘 때에는 전신이 찌르르 떨리는 듯이 기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 손을 내어들고 보다가 방그레 웃으며 가만히 입에 대어 보았다. 또 선형은 생각하였다. 자기는 과연 형식을 사랑하는가.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니까 그 지아비의 아내가 되었느냐’ 하던 말과 ‘만일 사랑이 없다 하면 약혼은 무효지요’ 하던 형식의 말을 생각하였다. 만일 그렇다 하면 부모의 명령은 어찌하는가. 내가 형식에게 사랑이 없다 하면 ‘나는 형식에게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모께서 정해 주신 이 혼인은 거절합니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주장하신 신성한 것이니까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의 말을 잘못이다. 형식의 말은 깨끗지 못한 말이다. 그러나 자기는 형식의 아내다. 결코 사람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형식의 아내다.
선형은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암만해도 마음이 정치 못하여 다시 책상에 기대어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이시여, 죄 많은 딸의 죄를 용서하시고 갈 길을 밝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고 잠깐 주저하다가, “제 지아비를 정성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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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병욱이가 혼자 앉아서 한 손으로 곁에 뉘어 놓은 바이올린을 되는 대로 울리며 영채에게 배운 {고문진보}를 읽을 적에 어디 갔다 오는 병국은 한 손에 파나마를 들고 부채를 부치며 들어와서 병욱의 방 문지방에 걸어앉으며,
“요새에는 또 한시(漢詩)에 미쳤구나. 이제는 음악은 내버리고 한시 공부나 하지” 하며 웃는다.
“왜요? 이렇게 손으로는 음악하고 눈으로는 시를 읽지요” 하고 자주 바이올린 줄을 울리며 아이들 모양으로 몸을 흔들고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는다.
병국은 병욱의 몸 흔드는 양을 보고 웃고 앉았더니,
“손님은 어디 가셨니?” 한다.
(병국은 영채를 손님이라고 부른다.) 병욱은 고개를 번쩍 들고 웃으면서,
“손님 어디 오셨어요. 어디서 왔나요?”
병국은 누이가 자기를 조롱하는 줄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아, 그이 말이다.”
“아, 그이가 누구 말이야요?” 병욱은 병국이가 영채를 위하여 괴로워하는 줄을 알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병국은,
“그만두어라” 하고 휙 돌아앉는다. 병국은 견디지 못하여 일어서서 나가랸다. 병욱은 뛰어나와 병국의 소매를 당기며,
“오빠, 들어오십시오. 내가 잘못했으니.”
“싫다, 어디 가야겠다” 하고 팔을 잡아챈다. 병욱은 깔깔 웃으며,
“글쎄 여쭐 말씀이 있으니 여기 좀 앉으셔요” 하는 말에 병국은 또 앉았다. 병욱의(병욱은) 손으로 병국의 등에 붙은 파리를 잡으며,
“오빠, 무슨 근심이 있어요?” 하고 웃기를 그치고 병국의 얼굴을 모로 본다. 병국은 놀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 병욱을 보며,
“아니, 왜? 무슨 근심 빛이 보이니?”
“녜, 어째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애요” 하고 ‘나는 그 근심을 알지’ 하는 듯이 생긋 웃는다. 병국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웃으면서,
“양잠회사를 꼭 세워야 하겠는데 아버지께서 허락을 아니 하시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그 일로 갔다가 오는 길이다. 너는 바이올린이나 뽕뽕 울리고, 나는 돈을 벌어야지…….”
병욱은 한 걸음 물러서서 다른 데를 보며 비웃는 듯이,
“흥, 그것이 근심입니다그려. 내가 돈을 너무 써서. 그렇거든 그만둡시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공부하지요. 여자는 저 먹을 것도 못 번답디까.” 병국은 껄껄 웃으며,
“잘못했소, 누님. 그렇게 성내실 게야 있소? 제가 남을 조롱하니까, 나도 당신을 조롱하지요.”
병욱은 다시 병국의 곁에 와 서며,
“그것은 농담이구요” 하고 앉아서 몸을 우쭐우쭐하며 소리를 낮추어, “오빠, 나 영채 데리고 동경 가요. 좋지요?”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고 극히 냉정한 체하나 벌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말을 왜 하니?”
“일간 가게 해주셔요. 집에 있기도 싫고 또 영채를 데리고 가면 입학 준비도 해야지요. 그러니까 곧 떠나게 해주셔요” 하고 유심하게 병국을 본다. 병국은 누이의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누이의 정을 더욱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만으론 확실치 못하므로,
“글쎄, 개학이 아직도 한 달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빨리 간다고 그러느냐.”
병욱은 형(오라비)의 눈을 이윽히 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어서 가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하는 말에 병국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그렇다. 영채가 오래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는 괴로울 것이요, 또 미상불 위험도 없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도 그러한 생각이 있기는 있었다. 자기가 어디로 여행을 가든지 영채를 어디로 보내든지 하는 것이 좋을 줄을 알기는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끄는 힘이 있어서 실행을 못 하였다. 병국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옳다,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야 한다” 하고는 휘 한숨을 쉰다. 병욱은 형(병국)의 어깨를 만지며,
“영채도 오빠를 사랑하니 동생으로 알고 늘 사랑해 주십시오. 저도 제 동생으로 알고 늘 같이 지내겠습니다. 동경 가면 둘이 한집에 있어서 밥 지어 먹고 공부하지요. 불쌍한 사람을 건져 주는 것이 안 좋습니까. 또 영채 씨는 좀더 공부를 하면 훌륭한 일꾼이 되겠는데요.”
병국은 고개를 숙인 대로 누이의 말을 듣더니 손으로 무릎을 치고 몸을 쭉 펴면서,
“잘 생각하였다. 네게야 무엇을 숨기겠니. 실로 그 동안 퍽 괴로웠다” 하고 또 잠깐 생각하다가 한번 더 결심한 듯이, “그러면 언제 떠나겠니?”
“글쎄요, 오빠께서 가라시는 날 가지요.”
“그러면 모레 낮차에 가거라. 내일 노자를 얻어 줄 것이니.”
이때에 영채가 대문 밖으로서 뛰어들어오다가 병국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병국도 얼른 일어나서 답례한다. 영채는 뒷산에서 뜯어온 붓꽃〔花菖蒲〕 한줌을 병욱에게 준다. 병욱은 그 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더니 절반을 갈라 들며,
“이것은 오빠 책상 위에 꽂아 드려요. 이것은 우리 둘이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