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61장~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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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그 집에서 조반을 먹고 대문 밖에 나섰다. 노파와 어머니와 계향과 세 사람이 번갈아 형식을 권하므로 형식은 전보다 더 많이 먹었다. 더구나 그 밥이며 국이며 전골이며 모든 것이 평생 객줏집 밥만 먹던 형식에게는 지극히 맛이 좋았다. 그럴 뿐더러 형식은 아직도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정성스럽게 권함을 받으며 밥상을 대하여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계향과 같은 아름다운 처녀에게 “어서 더 잡수셔요” 하고 정성스럽게 권함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계향은 형식의 밥상에 붙어서 손수 구운 조기를 뜯었다. 아까 성냥개비에 덴 손가락에 누렇게 탄 자리가 보인다. 계향은 형식의 숟가락을 빼앗아 제 손으로 대접에 밥을 말았다. 형식은, “그렇게 많이 못 먹는데” 하면서 그 밥을 다 먹었다. 계향은 형식이가 밥을 다 먹는 것을 보고 기쁜 듯이 방그레 웃었다. 그 웃는 계향의 눈썹에는 아직도 눈물이 묻었더라. 세 사람은 실로 진정으로 형식을 권하였다. 형식을 자기네의 아들 모양으로, 또는 오라비 모양으로 따뜻한 밥과 맛있는 반찬을 한 술이라도 많이 먹도록 진정으로 권하였다. 그러고 형식도 그 권하는 사람들을 어머니와 같이 또는 누이와 같이 정답게 생각하였다. “아무것도 잡수실 것이 없어서” 하는 인사도 항용 말하는 형식적 인사와 같이 들리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맛나는 반찬이 부족함을 한탄하는 말로 들었다. 형식은 대문을 나설 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영채의 일로 근심하고 슬퍼하고 답답하여 하던 마음을 거의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기쁨을 깨달았다. 아까 오던 안개비가 걷히고 안개 낀 듯한 (하늘에는 보기만 하여도 땀이) 흐를 듯한 햇볕이 가득히 찼다. 형식이가 서너 걸음 걸어나갈 때에 뒤에서, “저와 같이 가셔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계향의 소리로구나 하면서 우뚝 서며 고개를 돌렸다. 계향은 형식의 곁에 뛰어와 살짝 형식의 손을 잡으려다 말고 형식을 보면서, “저와 같이 가셔요” 한다. 형식은 칠성문 밖 죄인의 무덤 있는 데와 기자묘 저편 북망산과 모란봉을 넘어 청류벽으로 걸어갈 것을 생각하면서,
“나를 따라오려면 다리가 아플걸요” 하고 계향의 눈을 내려다보며 ‘같이 갔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계향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계향은 몸을 한번 틀면서,
“아니야요. 다리 아니 아파요” 하고 기어이 따라갈 뜻을 보인다.
“또 날이 더운데” 하며 형식은 계향을 뒤세우고 종로를 향하여 나온다. 길가 초가 지붕에서는 가만가만히 김이 오른다. 벌써 사람들은 부채로 볕을 가리우고 다닌다. 손님도 없는 빙수 가게에 아롱아롱한 주렴이 무거운 듯이 가만히 있다.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소리가 나려니 하고 형식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계향은 길가 가게를 갸웃갸웃 엿보면서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걷어들고 형식의 뒤로 따라온다. 형식의 누렇게 된 맥고자를 보고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떠한 사람인가 생각한다. 그러고 자기가 날마다 만나는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과 형식과를 속으로 비교하여 본다. 그러나 계향은 아직도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 줄을 알 줄을 모른다. 다만 이 사람은 옷을 잘 못 입은 것을 보니 가난한 사람인가 보다 한다. 그러고 형식의 구겨진 두루마기를 본다. 계향은 ‘어젯밤 차에서 구겨졌고나. 왜 벗어서 걸지를 아니하였던고’ 한다. 그러고 형식의 발을 본다. ‘새 구두로구나’ 한다. 아까 담뱃불 붙여 주던 생각을 하고 그 데인 손가락을 보면서 ‘아직도 아픈 듯하다’ 한다. 그러고 형식이가 불붙은 성냥을 보고 ‘이리 주시오’ 하던 것을 생각하고 자기더러 ‘하시오’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한다. 소가 끄는 구루마를 피하여 섰다가 얼른 형식의 뒤를 따라가서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은 잠깐 고개를 돌려 계향을 보고 웃으면서 계향의 잡은 손은 활개를 아니 친다. 두 사람은 팔각 국숫집 모퉁이를 돌아 비스듬한 고개로 올라간다. 계향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는다. 형식은 그것을 보고 잠깐 걸음을 그치며,
“이마에 땀이 흐르는구려” 한다. 계향은 형식의 손을 잡았던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덥지 않습니다” 하고 또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벌거벗은 때묻은 아이들이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두 사람을 보고 섰다. 치마 아니 입고 웃통 벗은 부인이 연기 나는 부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나오더니, 연기가 펄펄 오르는 부지깽이로 머리를 긁고 섰던 사내아이의 머리를 때린다. 맞은 아이는 ‘으아’ 하고 울면서 길바닥에 흙을 집어 그 부인의 면상에 뿌린다. 형식은 영채가 숙천 어느 객주에 어떤 사람에게 업혀 가다가 그 사람의 얼굴에 흙을 뿌리던 생각을 한다. 계향은 우뚝 서며 우는 아이를 돌아보더니 두 손으로 형식의 손을 꼭 쥔다. 두 사람은 또 걷는다.
계향은 매맞던 아이를 생각하다가 버리고 형식과 월향의 관계를 생각한다. 언제 ‘형님’이 이 사람을 알았던고. 평양서 서로 알았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형님을 버려서 형님을 죽게 하였는고, 하고 형식이 원망스럽다 하여 가만히 형식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형식의 걱정 있는 듯한 낯빛을 보고 이 사람이 형님을 생각하고 슬퍼하는구나 한다.
이때에 어떤 젊은 사람이 자행거를 타고 두 사람의 앞으로 지나다가 번쩍 고개를 돌리더니 그만 자행거를 내려 형식의 앞으로 온다. 계향은 형식의 손을 놓고 한걸음 물러서서 지금 온 사람의 모양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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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자행거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쾌활하게,
“그런데 웬일인가? 언제 왔는가?” 하고 담배를 내어 형식에게도 권하고 자기도 붙인다. 형식은 담배 연기를 코와 입으로 내어보내면서,
“오늘 아침차에 왔네” 하고 말하기 싫은 듯이 자행거의 말긋말긋한 방울을 본다. 그 사람은 형식의 곁에 한 걸음 비켜 섰는 계향을 유심히 보고 형식이가 어떤 기생을 데리고 가는가 하고 의심하면서,
“그런데 주인은 어디인가. 왜 바로 내 집으로 오지 아니하고” 하면서도 형식의 얼굴을 보며 ‘무슨 까닭이 있구나’ 한다. 형식은,
“무슨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갈 양으로 온 것이니까” 하고 고개를 들어 멀리 하얗게 보이는 대동강을 본다. 그 사람은 한번 더 계향을 보더니,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군가?” 형식은 잠깐 얼굴이 붉어지며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모른다. 계향도 민망한 듯이 고개를 숙인다. 그 사람은 형식이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심스럽다 하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다. 형식은 빙긋이 웃으며,
“내 누일세” 하였다. 그러고 내가 잘 대답을 하였구나, 하고 마음에 만족하였다. 그러고는 새로운 용기를 얻어 정면으로 그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내 누일세’ 하는 형식의 대답의 뜻을 몰라 담배를 문 채로 멍멍하니 섰다. 그 사람은 형식에게 오직 한 누이가 있는 줄을 알고 또 그 누이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줄을 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더니 담배 꽁달이를 발로 비비면서,
“그런데 어디로 가는가?” 한다. 형식은 다만,
“기자묘를 보러 가네” 한다. 그 사람은 형식의 행색이 수상하다 하면서, “그러면 저녁에는 내 집으로 오게. 하룻밤 이야기나 하세” 하고 자행거를 타고 달아난다. 얼마를 가다가 자행거에서 고개를 돌려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양을 보더니 그만 어떤 길굽이를 돌아간다. 그 흰 껍데기 씌운 나파륜 모자 꼭대기가 번뜻번뜻 보이더니 아주 아니 보이고 만다. 계향은 안심한 듯이 형식의 손을 잡으며,
“그 어른이 누구시야요?” 한다.
“내 친구외다. 동경 가 있을 때에 같은 학교에 있던 친구요.”
계향은 이 말을 듣고 ‘그러면 이 사람은 동경 유학생인가’ 하였다. 그러나(그러고) 자기의 집에 동경 유학생이 여러 사람 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오는 것도 생각하였다. 그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늘 술이 취하여 (자기를 껴안을 때에) 그 입에서 구역나는 술냄새가 나던 것과, 또 한번은 자기의 화상을 그려 줄 터이니 벌거벗고 앉으라 할 때에 자기 ‘그러면 싫소!’ 하고 건넌방으로 뛰어가던 것을 생각한다.
두 사람은 칠성문에 다다라 잠깐 걸음을 멈춘다. 칠성문통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형식은 두루마기 고름을 늦추고 땀에 젖은 자기의 적삼 가슴을 보면서 바람을 맞아들이려는 듯이 두루마기를 벌린다. 계향은 ‘후―후―’ 하고 입김을 내어불면서 두 손으로 두 귀밑을 부친다. 형식은 계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을(얼굴은) 둥그스름하다. 그러고 더위에 술이 취한 모양으로 두 뺨이 불그레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분도 바르지 아니하였건마는, 귀밑에는 어저께 발랐던 분이 조곰 남았다. 계향의 적삼 등에도 땀이 내어 배었다. 형식은 선형의 적삼에 땀이 배어 그 젖은 자리가 작았다 컸다 하던 것을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계향은,
“녜, 왜 웃으세요?” 하고 웃는다. 형식은 계향의 어깨를 만지며,
“적삼 등에 땀이 배었구려” 한다.
계향은 얼른 돌아서며 형식의 등을 만져 보더니 머뭇머뭇하다가,
“여기도 땀이 배었습니다” 한다. 계향은 형식을 무엇이라고 부를는지 모른다. 자기의 집에 놀러 오는 동경 유학생들을 그 어머니는, 혹 ‘무슨 주사’라고도 하고 그저 ‘나리’라고도 하고 또 관 앞에 있는 키 큰 사람은 ‘김학사’라고도 부르건마는, 계향은 형식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그래서 형식의 등에 땀이 밴 것을 보고 ‘나리도’ 할까, ‘이학사도’ 할까 하고 잠깐 주저하다가 ‘여기도 땀이 배었습니다’ 한 것이다. 형식은 그것을 알고 어디 계향이가 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보리라 하여 또 웃으며,
“계향 씨의 얼굴은 술이 취한 것같이 붉구려!” 하였다. 계향도 형식이가 자기의(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를지 몰라 주저하던 것을 알았는가 하여 더욱 얼굴을 붉히더니,
“오빠의 얼굴도……” 하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더 숙이고 말을 다하지 못한다. 계향은 아까 형식이가 자기를 ‘내 누일세’ 하던 것을 생각한다. 형식이가 계향에게서 들으려던 말은 이 ‘오빠’란 말이었다. 그러나 계향이가 ‘오빠의 얼굴도……’ 하는 것을 듣고는 미상불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형식은 친누이 하나와 종매가 이삼 인 있다. 그러나 친누이는 그 시가를 따라 함경도에 살므로, 이래 사오 년간에 만나 본 적이 없고, 방학때를 타서 고향에 돌아가면 누구보다도 먼저 종매 세 사람을 찾아갔다. 그 종매들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종형을 잘 사랑하였다. 그 중에도 형식보다 나이 어린 두 종매는 형식을 만날 때에 떠날 때에 늘 울었다. 시부모의 앞이라 마음대로 반가운 정을 표하지는 못하나, 처음 만나서 ‘오빠’ 하는 소리와 밥상에 놓은 국에 닭고기를 많이 넣는 것으로 넉넉히 그네의 애정을 알았었다. 형식이 방학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실로 이 두 종매에게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함이러라. 계향의 ‘오빠의 얼굴도……’ 하는 간단한 말은 형식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형식과 계향은 또 걷는다. 그러나 계향은 형식의 손을 잡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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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칠성문을 나섰다. 길가에는 쓰러져 가는 집들이 섰다. 철도가 생기기 전에 지나가는 손님도 있어서 술도 팔고 떡도 팔더니 지금은 장날이나 아니면 사람 그림자도 보기가 어렵다. 문 밖에는 문짝 모양으로 만든 소위 ‘평상’이란 것을 놓고, 그 위에는 다 떨어진 볏짚 거적을 폈다. 어떤 낡디낡은 탕건을 쓴 노인이, 이 더운 때에 때묻은 무명옷을 입고 할일이 없는 듯이 평상에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하면서 두 사람의 지나가는 양을 본다. 그 노인의 얼굴은 붉고 눈에 빛이 있으며 매우 풍채가 늠름하다. 형식은 그가 수십 년 전 조선이 아직 옛날 조선으로 있을 때에 선화당(宣化堂) 안에서 즐겁게 노닐던 사람인 줄을 알았다. 그러고 형식의 고향에도 일찍 그 골에서 내로라 하고 번쩍하게 행세하던 사람들이 갑오 이래로 세상이 졸변하매 모두 시세를 잃고 적막하게 지내는 노인이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우뚝 서며 그 노인을 다시 보았다. 그 노인도 두 사람을 본다.
저 노인도 갑오 전 한창 서슬이 푸르렀을 적에는 평양 강산이 다 나를 위하여 있고, 천하 미인이 다 나를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였으리라. 그러나 갑오년 을밀대 대포 한 방에 그가 꿈꾸던 태평시대는 어느덧 깨어지고 마치 캄캄한 밤에 번개가 번쩍하는 모양으로 새 시대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 되고 세상은 그가 알지도 못하던, 또는 보지도 못하던 젊은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철도를 모르고 전신과 전화를 모르고 더구나 잠행정이나 수뢰정을 알 리가 없다. 그는 대동문 거리에서 오 리가 못 되는 칠성문 밖에 있으면서 평양 성내에서 날마다 밤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의 머리에는 선화당이 있을 뿐이요, 도청(道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영원히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리니, 그는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이 세상 밖에 있음과 (같다.) 형식과 그 노인은 전혀 말도 통하지 못하고 글도 통하지 못하는 딴나라 사람이로다. ‘낙오자(落伍者), 과거(過去)의 사람’이라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가 아무리 새 세상 이야기를 하여도 못 알아듣다가 세상을 버린 자기의 종조부를 생각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그 노인에게 대하여 일종 말할 수 없는 설움을 깨달았다. 계향은 형식이가 오래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 양을 보다가 형식의 소매를 끌며, “어서 가세요!” 한다. 형식은 다시 그 노인을 돌아보고 ‘돌로 만든 사람이라’ 하다가 ‘아니다, 화석(化石)한 사람이라’ 하였다. 노인은 한참이나 형식을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눈을 감고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든다. 혜경(계향)은 가늘게,
“아시는 노인야요?” 한다. 형식은 계향의 어깨에 손을 놓고 걷기를 시작하면서,
“녜, 이전에는 알던 노인이더니 지금은 모르는 노인이 되고 말았어요” 하고 웃으며 계향을 본다. 형식은 생각에 ‘계향이 너는 영원히 저 노인을 알지 못하리라’ 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자기가 처음 평양에 올 때에 이리로 지나가던 생각을 하였다. 머리에 흰 댕기를 드리고 감발을 하고 아장아장 이 길로 지나가던 소년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소년은 저 노인을 알았다 하였다. 대동문 거리에서 커다란 유리창을 보고 놀라고, 대동강 위에서 ‘쌩’ 하고 달아나는 화륜선을 보고 놀라던 소년은 그 노인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하던 소년은 이미 죽었다. ‘쌩’ 하는 화륜선을 볼 때에 이미 죽었다. 그러고 그 소년의 껍데기에 전혀 다른 이형식이라는 사람이 들어앉았다. 마치 선화당(宣化堂)이던 것이 도청(道廳)이 되고 감사(監司)이던 것이 도장관(道長官)이 된 모양으로. 그러고 곁에 오는 계향을 보았다. 계향과 그 노인과의 거리를 생각하였다. 그 거리는 무궁대(無窮大)라 하였다. 형식은 어느 집 모퉁이로 돌아서려 할 때에 다시 그 노인을 보았다. 그러나 그 노인은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한다. 계향도 그 노인을 보더니,
“녜? 어떤 노인이야요?” 한다.
“계향 씨는 모를 노인이오” 하고 웃을 때에 계향은 의심나는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본다. 가만히 형식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성 밑 비탈길로 남쪽을 향하고 나아간다. 그리 길지 아니한 풀잎사귀가 내려쪼이는 볕에 조곰 시들어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형식은 무너져 가는 성을 바라보고, 저 성을 쌓은 조상의 얼과 저 성이 지금까지 구경한 조상을(조상의) 성하던 것, 쇠하던 것과 저 성이 그 동안에 몇 번이나 총알을 맞고 대포알을 맞았는고 하는 생각을 한다. 비탈 위에 우뚝 섰는 오랜 성이 마치 사람과 같이 정도 있고 눈물도 있는 것같이 생각되고, 할 말이 많으면서도 들어 줄 자가 없어서 못하는 듯한 괴로워하는 빛이 보이는 듯하다.
계향은 땀을 발발 흘리고 형식의 뒤로 따라가면서 아까 자기가 형식에게 오빠 하고 부르던 생각이 난다. 계향은 아직도 오빠라고 불러 본 사람이 없었다. 계향은 그 어머니의 외딸이요, 또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자세히 모르므로 아는 친척도 없었다. 그러므로 계향이가 형님 하고 부르는 사람은 이삼 인 되건마는 오빠 하고 부를 사람은 없었다. 계향뿐 아니라 계향의 주위에는 오빠, 누나 하고 지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계향이 있는 사회는 대개 여자의 사회요, 대하는 남자는 대개 기생집이라고 놀러 오는 손님뿐이었다. 계향은 처음 오빠 하고 불러 본 것이 매우 기뻤다. 아까 담뱃불을 붙여 줄 때보다 형식이가 더 정답게 보인다 하였다. 그러고 한번 더 오빠라고 불러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죄인들의 무덤 있는 곳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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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향은 앞서서 가지런히 있는 세 무덤을 찾았다. 여러 해 동안에 비에 씻겨 내려 원래 작던 무덤이 거의 평지와 같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무패를 써 박았던 듯하여 썩어진 조각이 무덤 앞에 떨어졌다. 그 곁에도 그와 같은 무덤이 수십 개나 된다. 어떠한 무덤에는 서너 치 넓이 되는 나무패가 아직도 새로운 대로 있다. 계향은 그 셋이 가지런히 있는 무덤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월향 형님의 아버지의 무덤이요, 이것이 두 오라버지(오라버니)의 무덤이야요” 하며 이전에 월향과 같이 왔던 생각을 한다. 계향은 월향을 따라 서너 번이나 이 무덤에 왔었다. 그 중에도 지난봄 월향이가 서울로 가려 할 때에, 월향은 술을 한 병 가지고 계향을 데리고 왔었다. 그때는 따뜻한 늦은 봄날, 이 불쌍한 자들의 무덤 곁에는 이름 모를 조고마한 꽃이 피고, 보통 벌에는 새로난 수수와 조가 부드러운 바람에 가볍게 물결이 지더라. 월향은 그 아버지의 무덤 앞에 술을 따라 놓고 말없이 한참이나 울다가 곁에서 우는 계향의 등을 만지며 자기가 서울을 가거든 네가 한 해에 두 번씩 이 무덤을 찾아보아 달라 하였다. 그때에 계향은,
‘형님의 아버지면 내 아버지요, 형님의 오빠면 내 오빠지요’ (하였다. 계향은 이러한 생각을) 하고 형식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형식은 가만히 세 무덤을 보고 말없이 섰다. 그 눈이 크고 콧마루가 높고 키가 크고, 평생 몸을 꼿꼿이 하고 앉았던 박진사를 생각하였다. 그가 사랑에 젊은 사람들은 모두 데리고, 상해서 사가지고 온 석판으로 박은 책들을 가르치던 것을 생각하고, 그가 포박을 당할 때에 ‘내가 잡혀가는 것은 조곰도 슬프지 아니하거니와 저 학교가 없어지는 것이 슬프다’ 하고 눈물을 흘리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영채의 말에, 영채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옥중에서 절식 자살하였다는 말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시대(時代)의 선구(先驅)의 비참(悲慘)한 운명(運命)을 생각하였다. 박선생은 너무 일찍 깨었었다. 아니, 박선생이 너무 일찍 깬 것이 아니라, 박선생의 동족이 너무 깨기가 늦었었다. 박선생이 세우려던 학교는 지금 도처에 섰고, 박선생이 깎으려던 머리는 지금 사람마다 깎는다. 박선생이 만일 그 문명운동(文明運動)을 오늘에 시작하였던들 그는 사회의 핍박은커녕 도리어 사회의 칭찬과 존경을 받을 것이라. 시대가 옮아갈 때마다 이러한 희생이 있는 것이어니와 박선생처럼 참혹한 희생은 없다. 지금 그 며느리 두 사람은 어떻게 있는지 모르거니와 이제 영채까지 죽었다 하면 아주 박진사의 집은 멸망한 것이라. 형식의 집도 거의 멸망하다가 형식이 한 사람만 남고, 박진사의 집도 거의 멸망하다가 영채 하나만 남았었다. 그러나 이제 영채 죽으니 영채의 집은 아주 이 세상에 씨도 없이 되고 말았다. 수십여 호 되던 박씨 문중이 신미혁명(辛未革命)에 다 쓰러지고, 오직 하나 남았던 박진사의 집이 신문명운동(新文明運動)에 희생이 되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일문(一門)의 운명도 알 수 없고 일가(一家)의 운명도 알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게 이 무덤을 보고 슬퍼하지는 아니하였다. 형식은 무슨 일을 보고 슬퍼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즐거웠다. 형식은 죽은 자를 생각하고 슬퍼하기보다 산 자를 보고 즐거워함이 옳다 하였다. 형식은 그 무덤 밑에 있는 불쌍한 은인의 썩다가 남은 뼈를 생각하고 슬퍼하기보다 그 썩어지는 살을 먹고 자란 무덤 위의 꽃을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였다. 그는 영채를 생각하였다. 영채의 시체가 대동강으로 둥둥 떠나가는 모양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슬픈 생각이 없었고, 곁에 섰는 계향을 보매 한량없는 기쁨을 깨달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혼자 놀랐다. 내가 어느덧에 이대도록 변하였는가 하였다. 형식은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쥐었다. 형식은 어저께 영채의 편지를 보고 울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슬퍼하였다. 그러고 밤에 차를 타고 올 때에도 남모르게 가슴을 아프고 남모르게 눈물을 씻었다. 더구나 아까 경찰서에서 영채가 아주 죽은 줄을 알 때에 형식의 몸은 마치 끓는 물에 들어간 듯하였다. 그러고 계향의 집을 떠나 박선생의 무덤을 찾아올 때에도, 무덤에 가거든 그 앞에 엎드려 실컷 통곡이라도 하리라 하였었다. 그리하였더니 이것이 웬일인가. 은사(恩師)의 무덤 앞에서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리려 하였으나 조곰도 슬픈 생각이 아니 난다. 사람이 이렇게도 갑자기 변하는가 하고 혼자 빙그레 웃었다.
계향은 형식의 모양이 수상하다 하였으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아니한다.
형식은 이렇게 살풍경(殺風景)한 곳에 오래 섰는 것보다 계향의 손을 잡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걸음을 걷는 것이 좋으리라 하여,
“자, 갑시다” 하였다. 계향은 이상하다 하는 듯이,
“어디로 가셔요?”
“집으로 갑시다.”
“북망산에 아니 가시고요?”
“거기는 가서 무엇 하오? 가면서 이야기나 합시다. 영채 씨가 여기 왔던 형적이 없으니까 아마 아무 데도 아니 왔던 게지요” 하고 계향의 손을 잡는다.
형식은, 영채는 죽은 사람으로 작정하고 계향의 집에 돌아와, 노파는 이삼 일 평양에 있는다 하므로 자기 혼자 그날 저녁차로 서울에 올라왔다. 평양을 떠날 때에 노파는 문 밖에 나와 형식의 손을 잡고 울면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영채를 찾아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다만 계향을 떠나는 것이 서운할 뿐이요, 영채를 위하여서는 별로 생각도 아니하였다. 형식은 차 속에서 ‘꿈이 깬 듯하다’ 하면서 여러 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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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 올라올 때에 형식은 무한한 기쁨을 얻었다. 차에 같이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의 사랑을 끌고, 모두 다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듯하였다. 찻바퀴가 궤도에 깔리는 소리조차 무슨 유쾌한 음악을 듣는 듯하고, 차가 철교를 건너갈 때와 굴을 지나갈 때에 나는 소요한 소리도 형식의 귀에는 웅장한 군악과 같이 들린다. 형식은 너무 신경이 흥분하여,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차창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어스름한 달빛을 어렴풋하게 보이는 황해도 연산(黃海道 連山)을 보았다. 산들은 물먹으로 그린 묵화 모양으로, 골짜기도 없고 나무나 돌도 없고, 모두 한 빛으로 보인다. 달빛과 밤빛과 구름빛을 합하여 커다란 붓으로 종이 위에 형체 좋게 그린 그림과 같다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형식의 정신도 실로 이와 같았다. 형식의 정신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욕망과 기쁨과 사랑과 미워함과, 모든 정신 작용이 온통 한데 (모이고 한데) 녹고 한데 뭉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비겨 말하면 이 모든 정신 작용을 한 솥에 집어넣고 거기다가 맑은 물을 두고 장작불을 때어 가며 그 솥에 있는 것을 홰홰 뒤저어서 온통 녹고 풀어지고 섞여서, 엿과 같이 죽과 같이 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때의 형식의 정신 작용은 좋게 말하면 가장 잘 조화한 것이요, 좋지 않게 말하면 가장 혼돈한 상태러라. 엷은 구름 속에 가리워진 달빛이 산과 들을 변하여 꿈과 같이 몽롱하게 만든 모양으로, 그 달빛이 형식의 마음에 비치어 그 마음을 녹이고 물들여 꿈과 같이 몽롱하게 만들어 놓았다. 형식의 눈은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게 반작반작하고 형식의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게 흐물흐물한다. 형식의 몸은 차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형식의 귀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대로 듣는다. 형식은 특별히 무엇을 생각하려고도 아니하고, 눈과 귀는 특별히 무엇을 보고 들으려고도 아니한다. 형식의 귀에는 차의 가는 소리도 들리거니와 지구의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고 무한히 먼 공중에서 별과 별이 마주치는 소리와 무한히 작은 에틸의 분자의 흐르는 소리도 듣는다. 메와 들에 풀과 나무가 밤 동안에 자라노라고 바삭바삭 하는 소리와, 자기의 몸에 피 돌아가는 것과, 그 피를 받아 즐거워하는 세포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의 정신은 지금 천지가 창조되던 혼돈한 상태에 있고 또 천지가 노쇠하여서 없어지는 혼돈한 상태에 있다. 그는 하느님이 장차 빛을 만들고 별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려고 고개를 기울이고,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는 양을 본다. 그러고 하느님이 모든 결심을 다 하고 나서 팔을 걷고 천지에 만물을 만들기 시작하는 양을 본다. 하느님이 빛을 만들고 어두움을 만들고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을 만들고 기뻐서 빙그레 웃는 양을 본다. 또 하느님이 흙을 파고 물을 길어다가 두 발로 잘 반죽하여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그 사람의 코에다 김을 불어넣으매,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목숨이 생기고 피가 돌고 소리를 내어 노래하는 양이 보인다. 그러고 처음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한 흙덩이다가 그것이 숨을 쉬고 소리를 하고 또 그 몸에 피가 돌게 되는 것을 보니 그것이 곧 자기인 듯하다. 이에 형식은 빙긋이 웃는다. 옳다, 자기는 목숨 없는 흙덩이였었다. 자기는 숨도 쉬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 하던 흙덩어리였었다. 자기는 자기의 주위에 있는 만물을 보지도 못하였었고 거기서 나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였었다. 설혹, 만물의 빛이 자기의 눈에 들어오고 소리가 자기의 귀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는 오직 에틸의 물결에 지나지 못하였었다. 자기는 그 빛과 그 소리에서 아무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무 뜻도 찾아낼 줄을 몰랐었다. 지금까지 혹 자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마치 고무로 만든 인형(人形)의 배를 꼭 누르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과 같았었다. 그러므로 그 웃음과 울음은 결코 자기의 마음에서 스스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요, 전혀 타동적(他動的)이었었다.
자기가 지금껏 ‘옳다’ ‘그르다’ ‘슬프다’ ‘기쁘다’ 하여 온 것은 결코 자기의 지의 판단(知의 判斷)과 정의 감동(情의 感動)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온전히 전습(傳襲)을 따라, 사회의 습관(社會의 習慣)을 따라 하여 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옳다 하니 자기도 옳다 하였고, 남들이 좋다 하니 자기도 좋다 하였다. 다만 그뿐이로다. 그러나 예로부터 옳다 한 것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남들이 좋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내게는 내 지(知)가 있고 내 의지(意志)가 있다. 내 지와 내 의지에 비추어 보아 ‘옳다’든가, ‘좋다’든가, 기쁘고 슬프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면 내게 대하여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내가 옳다 하던 것도 예로부터 그르다 하므로, 또는 남들이 옳지 않다 하므로 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 보고 그것을 내어 버렸다. 이것이 잘못이로다. 나는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린 것이로다.
자기는 이제야 자기의 생명을 깨달았다. 자기가 있는 줄을 깨달았다.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있고 또 북극성은 결코 백랑성(白狼星)도 아니요 노인성(老人星)도 아니요, 오직 북극성인 듯이, 따라서 북극성은 크기로나 빛으로나 위치(位置)로나 성분(成分)으로나, 역사(歷史)로나 우주(宇宙)에 대한 사명(使命)으로나, 결코 백랑성이나 노인성과 같지 아니하고, 북극성 자신의 특징(特徵)이 있음과 같이, 자기도 있고 또 자기는 다른 아무러한 사람과도 꼭 같지 아니한 지와 의지와 위치와 사명과 색채(色彩)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형식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달았다.
형식은 웃으며 차창으로 내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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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지금 신막 남천역을 지나 경의 철도 중에 제일 산이 많은 옛날 금천 큰고개 근방으로 달아난다. 초생달은 벌써 넘어가고 창 밖은 캄캄하다. 달빛의 없는 것이 도리어 산들의 모양을 보기에는 편하다. 하늘과 산과의 경계는 굵은 붓으로 되는 대로 구불구불하게 그린 곡선(曲線) 모양으로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 왈칵왈칵 하는 찻바퀴 소리 사이로 산 강물이 조약돌 많은 여울로 굴러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기관차 굴뚝으로 나오는 불빛에 조고마한 산골짜기에 초가집 두어 개가 번적 보이고 혹 오랜 가물에 얼마 아니 되는 물이 가기 싫은 듯이 흘러가는 산강의 한 토막도 보인다. 차가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저편 컴컴한 속에 조고마한 불빛이 반작반작한다. 그 불빛이 차가 달아남을 따라 깜박깜박 있다가 없다가 함은 아마 잎이 무성한 나무에 가리워짐인 듯, 그 불은 꽤 오랫동안 형식의 차창에서 보인다. 형식은 물끄러미 그 불을 본다. 저 불 밑에는 누가 앉아서 무엇을 하는고. 가난한 어머니가 아이들을 잠들여 놓고 혼자 일어나 지아비와 아이들의 누더기를 깁는가. 잘 보이지 아니하는 눈으로 바늘구멍을 찾지 못하여 연방 불을 돋우고 눈을 비비는가. 그러다가 ‘아아 늙었구나!’ 하고 깁던 누더기에 굵은 눈물을 떨구는가. 그때에 아랫목에서 자던 앓는 어린아이가 꿈에 놀라서 우는 것을 껴안고 먹은 것이 없어서 나지도 아니하는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또는 앓는 외아들을 가운데 놓고 늙은 내외가 자리 위에 서서 번갈아 아들의 몸을 만지고 번갈아 울고 위로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느님 내려다봅소서’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형식은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 부모를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아직 젊었으나 아버지는 오십이 넘었으므로, 자기가 조곰이라도 병이 나면 그 병이 낫기까지 목욕재계하고 자기의 곁에서 밤을 새우던 것과, 자기가 혹 눈을 뜨면 아버지는 자기의 눈을 보고 그 아들이 눈을 뜨는 것이 무한히 기쁜 듯이 빙그레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던 것과, 아직 삼십이 다 못 된 자기의 어머니는 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앉은 대로 졸던 것이 생각이 난다. 형식은 잠깐 추연하다가 다시 그 불을 본다. 천지가 온통 캄캄한 중에 오직 불 하나가 반작반작하는 것과, 세상이 다 잠을 다 깊이 들었을 때에 그 불 밑에 혼자 깨어 있는 사람을 생각하매 형식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신세인 듯하였다. 차가 또 어떤 산모퉁이를 돌아서매 그 불은 그만 아니 보이게 되고 말았다. 형식은 서운한 듯이 머리를 창으로 끌어들였다. 차실에 같이 탄 사람들은 다 깊이 잠이 들었다. 바로 자기의 맞은 편에 누운 어떤 노동자 같은 소년이 추운 듯이 허리를 구부린다. 형식은 얼른 차창을 닫고 자기가 깔고 앉았던 담요로 그 소년을 덮어 주었다. 이 소년은 아마 어느 금광으로 가는지 흙 묻은 무명 고의를 입고 수건을 말아서 머리를 동였다. 머리는 언제 빗었는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뭉쳐지고 귀밑과 목에는 오래 묵은 때가 껴 있다. 역시 조고마한 흙물 묻은 보퉁이로 베개를 삼았는데 그 보퉁이를 묶은 종이로 꼰 노끈이 걸상 밑으로 늘어졌다. 형식은 그 노끈을 집어 보퉁이 밑에 끼웠다. 소년의 굵은 베로 만든 조끼 호주머니에는 국수표 궐련갑(菊水票卷煙匣)이 조곰 보이고 그 속에는 물부리가 넓적하게 된 궐련이 서너 개나 보인다. ‘아끼는 궐련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기의 ‘조일(朝日)’을 만져 보았다. 그러고 담배를 붙일 생각이 나서 한 대를 내었다. 형식은 그 궐련에 불을 붙여 길게 빨았다. 그때에 담배 맛은 특별하였다.
형식은 다시 차실을 돌아보았다. 어떤 일본 부인이 잠을 깨어 정신 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두어 번 머리와 목을 만지며 무엇을 찾는 듯이 기웃기웃하더니 도로 신현대(信玄袋)에 엎디어 잠이 든다. 형식도 내일에 곤할 것을 생각하고 한참 자리라 하여 수건을 창문턱에 접어 놓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형식의 정신은 더욱 쇄락할 뿐이요, 암만하여도 잠이 들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그래도 잠이 들까 하고 눈을 감은 대로 찻바퀴 소리를 세었다. 형식의 정신은 마치 풍랑이 침식한 바다 모양으로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형식의 머리에는 영채와 선형과 노파와 배학감과 이희경과 또 칠성문 밖에서 보던 노인과 박선생의 무덤과 계향과…… 이러한 것들이 순서도 없이 번쩍번쩍 떠나온다. 형식은 눈을 감은 채로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사람들은 혹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혹 성난 듯이 입을 내어밀고, 눈을 흘깃흘깃하기도 하고, 혹 나무로 새겨 놓은 듯이 시치미떼고 나서기도 한다. 더구나 영채의 모양이 오래 보이고 또 자주 보인다. 형식은 곁에 놓인 가방을 생각하였다. 그 속에 있는 영채의 편지와 지환과 칼이 눈에 보인다. 형식은 오싹 소름이 끼치며 번쩍 눈을 떴다. 아― 내가 잘못함이 아닌가. 내가 너무 무정함이 아닌가. 내가 좀더 오래 영채의 거처를 찾아야 옳을 것이 아닌가. 설사, 영채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시체라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 아니던가. 그러고 대동강가에 서서 뜨거운 눈물이라도 오래 흘려야 할 것이 아니던가. 영채는 나를 생각하고 몸을 죽였다. 그런데 나는 영채를 위하여 눈물도 흘리지 않아. 아― 내가 무정하구나, 내가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남대문을 향하고 달아나는 차를 거꾸로 세워 도로 평양으로 내려가고 싶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마음은 평양으로 끌리면서 몸은 남대문에 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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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숙소에 돌아와 조반을 먹고는 곧 학교에 갔다. 노파가, “얼굴에 몹시 곤한 모양이 보이는데, 오늘은 하루 쉬시지요” 하는 말도 듣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지나간 사흘 동안에 너무 정신을 쓰고 또 잠을 잘 자지 못하여 얼굴에 졸리는 빛이 보이도록 몸이 피곤하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 첫 시간에는 사년급 영어가 있다. 어저께도 쉬고 오늘도 쉬면 연하여 이틀을 쉬게 된다. 형식은 이것이 괴로웠다. 형식은 병이 있기 전에는 아직도 학교 시간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감기가 들어 여간 두통이 나고 열이 있더라도 억지로 학교에 출석하였다. 그러고 돌아와서 병이 더치더라도 형식은 ‘내 의무를 위함’이라 하여 스스로 만족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한 시간을 편안히 쉬기 위하여 백여 명 청년으로 하여금 각각 한 시간을 허송하게 하는 것을 큰 죄악으로 안다. 그러나 형식이가 이처럼 열심으로 학교에 가는 데는 의무라는 생각 밖에 더 큰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이렇다.
형식은 외롭게 자라났다. 형식은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형제 자매의 사랑도 모르고 자라났다. 그뿐더러 형식에게는 사랑하는 동무도 없었다. 나이 같고 성미가 서로 맞는 동무의 사랑은 여간 형제 자매의 사랑에 지지 않는 것이라. 그러나 형식은 일정한 처소에 있지 아니하여 그러한 동무를 사귈 기회가 없었고 또 불쌍하게 돌아다닐 때에는 동무 될 만한 아이들이 형식을 천대하여 동무로 여겨 주지를 아니하였다. 형식이 열두 살 적에 그 족제(族弟) 하나를 심히 사랑한 일이 있었다. 족제는 형식과 동갑이요, 이전에는 글도 같이 읽었었다. 한번은 형식이가 그 족제의 집에서 놀다가 밤이 깊었다. 그때에 형식은 그 족제와 한자리에서 자게 된 것을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숙소 되는 당숙의 집에 갈 수도 있건마는 ‘어두워서 못 가겠다’고 떼를 쓰고 같이 자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족제는,
‘네 옷에는 이가 많더라’ 하고 크게 소리를 쳐 온 집안 사람이 다 소리를 듣게 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섧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나 어찌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집에서 뛰어나온 일이 있었다. 과연 형식의 옷과 머리에는 이가 많이 끓었었다. 이러하므로 어린 형식은 동무의 사랑조차 맛보지 못하였다. 그 후 박진사의 집에 와서는 자기보다 십여 세 위 되는 사람과만 같이 있었고, 경성에 올라와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형식이가 동무의 재미를 보려면 볼 수 있던 때는 동경 유학하는 동안이었다. 동경에는 자기와 연갑 되는 소년이 많았었다. 그래서 동무에 목마른 형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네와 친하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어려서부터 세상에 부대껴 왔으므로 어느덧 소년의 어여쁜 빛이 스러지고 얼굴에나 마음에나 노성한 어른의 빛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와 연갑 되는 소년들과 친하려 하여도 그 소년들이 마음을 허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형식은 그 소년들에게 비하여 학문의 정도에 차이가 많았으므로 그 소년들은 형식을 선배 모양으로 공경하는 생각은 가지되, 어깨를 겯고 손을 잡고 동무가 되려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 소년들은 형식을 대하면 가댁질하던 것도 그치고 고개를 숙이며, “안녕합시오” 하였다. 형식도 하릴없이, “안녕합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한번은 형식이가 자기보다 두어 살 아래 되는 소년을 붙들고,
“여보, 나하고 동무가 되십시다. 너, 나 하고 지내입시다” 하였다. 그 소년은 농담인 줄 알고, “녜” 하면서 모자를 벗고 경례하고 달아났다. 그 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소년들의 동무가 되려 하였으나 소년들은 헤헤 웃고는 경례를 하고 달아났다. 마침내 형식은 소년의 동무가 되어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고 지금까지 평생 자기보다 십여 년이나 어른 되는 이와 친구가 되어 왔다. 형식은 일찍 이렇게 자탄하였다.
‘나는 소년시대를 건너뛰었어!’ 소년시대를 보지 못한 형식의 마음은 과연 적막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나는 인생의 한 권리를 빼앗겼다’ 하였고, 또 ‘그러고 그 권리는 인생에게 가장 크고 즐거운 권리라’ 한다. 이러한 말을 할 때마다 형식은 적막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스물한 살에 경성학교에 교사가 되어 여러 소년들과 가까이 접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소년들이 ‘선생님’ 하고 슬슬 피할 때에는 형식은 여전히 적막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 어느 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저 소년들과 같이 놀아 보았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형식은 학생들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가 학생들에 대한 일언일동은 어느 것이나 뜨거운 사랑에서 아니 나옴이 없었다. 형식은 어린 학생들의 코도 씻어 주고 구두끈과 옷고름도 매어 주었다. 어떤 교사들은 형식이 이렇게 함을 비웃기도 하고, 심지어 형식이가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을 좋지 못한 뜻으로까지 해석하였다. 더구나 형식이가 이희경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은 필연 희경의 얼굴을 탐내어 그러하는 것이라 하며, 어떤 자는 형식과 희경의 더러운 관계를 확실히 아노라고 장담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형식도 어떤 친구에게 충고를 받은 일도 있었고, 희경도 동창들 사이에 좋지 못한 조롱을 받은 일도 있으며, 희경이가 우등을 하는 것은 형식의 작간이라고 험구를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은 여전히 학생들을 사랑하였다. 만일 학생들 중에 사람의 피를 마셔야 살아나리라 하는 병인이 있다 하면 형식은 달게 자기의 동맥을 끊으리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 중에도 이희경 같은 몇 사람에게 대하여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대하여 가지는 듯한 굉장히 뜨거운 사랑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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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곁가지로 들어가지마는, 이 기회를 타서 형식의 지나간 동안 교사생활을 좀 말할 필요가 있다. 사 년간 형식의 경성학교 교사 생활은 일언이폐지하면 사랑과 고민(苦悶)의 생활(生活)이었다.
형식이 이십 년간 갇히고 주렸던 사랑은 교사가 되어 여러 소년을 접하게 되며(되매), 마치 눈에 가리워졌던 풀의 움이 봄바람을 타서 쑥 나오는 모양으로 나오기를 시작하였다. 부모의 사랑이나 형제의 사랑이나 동무의 사랑도 맛보지 못하고, 하물며 여자에게 대한 사랑은 꿈도 꾸어 보지 못한 형식의 사랑은 사리에 밀려들어 오는 밀물 모양으로 경성학교의 사백 명 어린 학생을 덮었다. 그가 일찍 일기(日記)에,
‘너희는 나의 부모요, 형제요, 자매요, 아내요, 동무요, 아들이로다. 나의 사랑을 나의 전 정신(全精神)을 점령한 것은 너희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가 다 마르도록, 이 살이 다 깎이도록, 이 뼈가 다 휘도록 일하고 사랑하마’ 한 구절은 형식의 거짓없는 정을 말한 것이다. 형식은 아침마다 학교 문을 들어서서 학생들이 노니는 양을 보면 기쁘고, 시간마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이 자기를 보고 자기의 말을 듣는 양을 보면 기쁘고, 밤에 혼자 자리에 누워 학생들의 놀던 모양과 배우던 모양을 생각하면 기뻤다. 그래서 어찌하면 하나라도 학생들을 더 가르쳐 줄까, 어찌하면 그네의 행실을 아름답게 만들고, 어찌하면 그네의 정신을 깨우쳐 줄까 하여 자기가 아는 바 모든 것을 말하고, 할 수 있는 바 모든 방법을 다하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토론회를 할 때에 자기의 가르친 말을 끌어 쓴다든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자기가 시켜 준 어느 방법을 쓰는 것을 보면 형식은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이렇게 지나간 사 년간의 형식의 경력과 시간의 대부분은 전혀 학생들을 위하여 소비되었다. 그 때문에 형식은 얼마큼 신경도 쇠약되고 몸도 약하게 되었다. 자기도 그런 줄을 안다. 그러나 순전히 자기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사년급 학생들을 대할 때에는 마치 봄부터 여름내 땀을 흘리고 고생하던 농부가 가을에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논과 밭을 보고 깨닫는 듯하는 기쁨과 만족을 깨닫는다. 형식(의 생각)에 사년급 학생의 지식의 대부분과 아름다운 생각과 말과 행실의 대부분은 다 자기의 정성으로 힘쓴 결과려니 한다. 과연 형식은 조고마한 기회라도 놓치지 아니하고 자기의 가진 지식과 경험과 감상과 재미있는 이야기까지도 들려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년급 학생을 대하여도 별로 할 말이 없으리만큼 자기가 가진 바를 온통 나눠 주었다. 형식은 교과서를 가르치고 남는 시간을 반드시 새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로 채웠다. 형식이가 독서를 하는 이유의 하나는 이 학생들에게 알려 주려는 욕심이었다. 그러고 학생들도 형식의 말을 재미있게 들었다. “또 더 해주셔요” 하고 형식에게 청하기까지도 하였다. 이렇게 학생들이 청하는 것을 보고는 형식은 더욱 만족하였다. 무론 여러 학생 중에는 형식의 하는 이야기를 귀찮게 여기는 자도 있고, 형식이 한창 정성으로 이야기할 때에 일부러 한눈도 팔며 공책에 붓장난을 하는 자도 있었으나 형식의 보기에 대부분은 자기의 말을 흥미있게 듣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형식에게서 받은 감화와 얻은 지식과 쾌락도 적지 아니하였다. 여러 교사들 중에 학생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기로는 남들도 형식이라고 허하고 형식 자신도 그렇게 확신하였다.
그러나 교사들은 형식의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다지 좋은 줄로도 생각지 아니하고 어떤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생기게 하느니,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소설을 읽어 주어 학생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느니 하고 비방도 한다.
이러한 비방도 아주 까닭이 없음은 아니라. 형식은 항상 학생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자유를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학교 당국도 될 수 있는 대로는 학생의 의사를 존중하기를 주장한다. 더구나 처음 형식이가 이 학교에 교사로 왔을 때에는 교장과 학감이 극히 전제를 숭상하는 인물이 되어서 학생들은 선생에게 대하여 감히 한마디도 자기네의 의사를 표하지 못하였고, 혹 다만 한마디라도 학교의 명령이나 교사의 말에 대하여 비평을 한다든가 반대를 하는 자가 있으면 학생 일동의 앞에서 엄혹하게 책망을 한 후에 혹은 정학도 시키고 심하면 출학까지도 하였었다. 그래서 자유사상을 품은 형식은 여러 번 의견도 충돌하였었다. 형식은 학생들 앞에서,
‘학도에 대하여 불만한 일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옳소. 정당한 일을 학교가 부정당하게 여길 때에는 반항을 하여도 옳소.’ 이러한 위험한 말도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배학감이, 이번 학생의 소동도 형식의 충동이라 함이 아주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
또 형식은 삼사년급 학생들에게 은연중 문학을 장려하였다. 그래서 학생 중에는 혹 소설도 보며, 철학에 관한 서적도 보며, 잡지도 보는 자가 생기고, 그 중에는 가장 문학자인 체, 사상가인 체, 철인(哲人)인 체하여 무슨 큰 생각이나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학생도 몇 사람이 생기고, 또 그러한 학생들도 다른 교사들을 아주 정신생활(精神生活)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주 유치한 사람들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형식의 보기에 이는 학생들의 진보함이라 기쁜 일이언마는 다른 교사들 보기에 이는 학생들이 타락함이요 주제넘게 됨이었다. 교사들뿐 아니라 학생 중에도 이희경 일파가 글자 작은 어려운 책을 들고 다니는 것과 그달에 발행한 잡지를 들고 다니는 것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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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론 이희경 일파가 그 어려운 책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열 페이지나 스무 페이지를 읽은 뒤에 그 속에 있는 뜻을 계통적으로 깨닫지는 못하였다. 다만 여기저기 한 구절씩 혹은 두어 줄씩 자기네가 깨달을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여 하였다. 그네는 하루에 알지는 못하면서도 여러 페이지 읽기를 자랑으로 알고 형식에게 들은 대로 서양 문학자, 철학자, 종교가 같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네의 저서(著書)의 이름을 외우기로 (유일한) 영광을 삼았다. 그러고 그네가 보는 책에서 ‘인생이란 무엇이뇨’라든가 ‘우주란 무엇이뇨’ 하는 구절을 외워 토론회나 친구간에 하는 회화에 인용하였다. 혹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의 격언을 인용하기도 하고 혹 그것을 영어대로 통으로 암기하여 인용하기도 하였다. 인용하는 자기도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그것을 인용하면 자기의 말하려는 바가 잘 발표된 듯하였고, 그것을 듣는 다른 학생들도 ‘흥’ 하고 코웃음을 하면서도 그네의 지식이 많음을 속으로는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자기네도 몰래 낡은 잡지를 사다가 보기도 하고, 또는 이희경 일파에게 들은 말을 가만히 기억하였다가 다른 데 가서 자랑삼아 써보기도 하였다.
이희경은 꽤 이해력이 있었다. 형식의 생각에 희경은 가장 사상이 익었는 듯하고 희경 자신도 (자기는) 제법 형식의 하는 말을 깨닫는 줄로 믿었다. 그래서 형식과 희경이 같이 앉았을 때에는 마치 뜻맞는 사상가들이 오래간만에 만난 모양으로 인생 문제와 우주 문제가 뒤를 대어 흘러나왔다. 그러나 형식은 아직도 희경에게 말할 수 없는 고상한 사상을 많이 가진 듯이 생각하였다. 그는 사실이었다. 형식이가 한참이나 자기의 사상을 말하다가 희경의 멍하니 앉았는 것을 보고는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하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러할 때에는 희경은 형식에게 모욕을 당한 듯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무론 희경은 형식이가 자기보다 지식이 많고 사상이 깊은 줄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보다 여러 십 리 앞섰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형식이가 자기를 ‘네야 알겠니’ 하는 듯이 대접할 때에 형식에게 대하여 불쾌하고 반항하는 생각이 났다. 희경이가 이년급까지는 형식은 자기보다 수천 리나 앞선 사람인 듯이 보였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없는 것이 없고, 형식의 입으로서 나오는 말은 모두 다 깊은 뜻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형식은 조선에 제일가는 지식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삼년급이 반쯤 지나간 뒤로부터는 형식도 자기와 얼마 다르지 아니한 사람과 같이 보았다. 형식의 지식은 그렇게 많지 못하고 형식의 생각하는 바는 자기도 생각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형식이가 강단에서 하는 말도 (별로) 감복할 만한 말이 아니요, 자기도 강단에 올라서면 그만한 말은 넉넉히 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정작 토론회에서 말을 하여 보면 암만하여도 형식만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기가 형식만 못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형식은 여러 해 교사로 있어 말하는 법이 익은 것이지 자기가 그만큼 말을 연습하면 형식보다 나으리라 하였다. 희경의 생각에 삼 년만 지나면 자기는 생각으로나 지식으로나 말로나 모든 것으로 형식보다 나으리라 한다. 사년급이 되어 독본 사권을 배우게 되매 형식도 혹 모른다는 글자가 있고 문법관계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매 희경은 영어로도 형식을 그렇게 우러러보지 아니하게 되었다. 지금은 희경의 보기에 형식은 자기보다 두어 걸음밖에 더 앞서지 못한 사람같이 보이고 장래에는 자기가 형식보다 열 배 스무 배나 높아질 것같이 보였다. 희경은 중학교 교사를 우습게 보게 되었다. 다른 교사를 아무것도 모르는 껍데기로 본 지는 벌써 오래거니와 그 중에 가장 무엇을 아는 듯하던 형식도 자세히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자기는 중학교에 교사 같은 직업을 가질 사람이 아니요, 장차는 큰 학자가 별로 되거나 (박사가 되거나) 중학교에 온다 하더라도 교장이나 주면 하리라 한다.
교사들은 대개 될 대로 다 된 작은 인물같이 보이고 자기는 무한히 크게 될 가능성(可能性)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희경은 형식도 육칠 년 전에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줄을 모른다. 희경이 보기에 형식은 본래 그릇이 작아서 높이 뛸 줄을 모르고, 사 년이 넘도록 중학교 교사로 있고, 또 일생을 중학교 교사로 지내는 것같이 보여서 일변 형식을 경멸하는 생각도 나고 일변 불쌍히도 여긴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희경뿐이 아니다. 희경과 같이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는 자는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애초부터 형식을 존경하지도 아니하였고, 다만 끔찍이 친절하게 굴려 하는 젊은 교사라 할 뿐이었다. 그뿐더러 그들은 형식이 이희경 일파를 편애하는 것과 특별히 희경을 사랑하는 것을 비웃고 얼마큼 형식을 싫어하는 생각까지 있었다.
학생들은 아이로부터 어른이 되었다. 일년급부터 사년급이 되었다. 아무 지식도 없던 것들이 보통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학생들 생각에 자기는 지나간 사 년간에 진보도 하였다. 자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일년급 적이나 사년급 되는 지금이나 학생들의 보기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였다. 형식은 그 가진 바 지식을 온통은 아니라도 거의 다 자기네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자기네보다 높다고 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네가 형식에게 대한 표면의 행동은 전이나 다름이 없어도 마음으로는 형식을 자기네와 동등 또는 자기네 이하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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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항상 입버릇 모양으로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 자기는 진실로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한 것이언마는, 학생들은 이전에는 그것이 다만 형식의 겸사에 지나지 못하거니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학생들은 그 한탄이 참인 줄로 안다. 그래서 형식의 하는 말에도 전과 같이 신용을 주지 아니하게 되었다. ‘나는 지식과 수양이 부족하외다’ 하는 말을 형식이가 자기네를 두려워하여 사죄하는 말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식은 그러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설혹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희경 일파에게 떨어지기를 무서워할 지경은 아니었다. 형식의 보기에 희경 일파는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네가 자기를 따라오려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질을 하더라도 여간 육칠 년 내에 따라잡힐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사상을 가진 선각자로 자신한다. 그래서 겸손한 듯한 그의 속에는 조선 사회에 대한 자랑과 교만이 있다. 그는 서양 철학도 보았고 서양 문학도 보았다. 그는 루소의『참회록(懺悔錄)』과『에밀』을 보았고, 셰익스피어의『햄릿』과 괴테의『파우스트』와 크로포트킨의『면포(麵匏)의 약탈(掠奪)』을 보았다. 그는 신간 잡지에 나는 정치론과 문학평론(文學評論)을 보았고 일본 잡지의 현상소설에 상도 한번 탔다. 그는 타고르의 이름을 알고 엘렌 케이 여사(女史)의 전기(傳記)를 보았다. 그러고 우주(宇宙)도 생각하여 보았고 인생(人生)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인생관(人生觀)이 있고, 우주관(宇宙觀), 종교관(宗敎觀), 예술관(藝術觀)이 있고 교육에 대하여서도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줄로 자신한다. 그가 만원 된 차를 타고 눈앞에 욱적욱적하는 사람을 볼 때에 나는 저들의 모르는 말을 많이 알고, 모르는 사상을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고는 일종 자랑의 기쁨을 깨닫는 동시에 ‘언제나 저들을 나만큼이나마 가르치는가’ (하는) 선각자의 책임을 깨닫고 또 이천만이나 되는 사람 중에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뜻을 이해(理解)하는 자가 몇 사람이 없구나 하는 선각자(先覺者)의 적막(寂寞)과 비애(悲哀)를 깨닫는다. 그러고 자기의 하는 말을 알아들을 만한 친구를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형식은 열 손가락을 다 꼽지 못한다. 그러고 이 열도 못 되는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 신문명(新文明)을 이해하는 선각자요, 따라서 온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 낼 자라 한다. 그러고 지나간 사 년간에 자기가 희경 등 사오 인을 자기와 같은 계급에 끌어낸 것을 더할 수 없는 만족으로 여긴다. 무론 자기보다는 어린아이로되 다른 사람들에게 비기면 어른이요, 선각자라 한다. 조선 안에 학교도 많고 학생도 많되 희경 일파만한 학생은 없다 하며, 따라서 교육자 중에 자기가 홀로 신문명을 이해하고 조선 전도를 통견(洞見)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생각한다. 서울 안에 수백 명 되는 교사는 모두 다 조선인 교육의 의의(意義)를 모르고 기계 모양으로 산술을 가르치고, 일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인 교육계에 대하여 항상 불만한 생각을 품는다. 그가 경성교육회라는 것을 설립할 양으로 두어 달을 두고 분주한 것도 이러한 기관을 이용하여 자기의 교육에 대한 이상(理想)을 선전(宣傳)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다른 교사들은 형식을 그처럼 지식과 사상이 높은 자라고 인정하지 아니하였고, 어떤 사람은 형식을 자기네와 평등이라고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과연 형식의 하는 말에나 일에는 별로 뛰어난 것이 없었다. 형식이가 큰 진리인 듯이 열심으로 하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는 별로 감동을 주는 바가 없었다. 다만 형식의 특색은 영어를 많이 섞고 서양 유명한 사람의 이름과 말을 많이 인용하여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할 말을 길게 함이었다. 형식의 연설이나 글은 서양 글을 직역한 것 같았다. 형식의 말을 듣건대 이러한 말이나 글이 아니고는 깊고 자세한 사상을 발표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좇지 아니함은 그네가 자기의 사상을 깨달을 힘이 없음이라 하여 혼자 분개하여 한다. 공평하게 말하면 형식은 다른 교사들보다 좀더 진보한 점이 있고, 또 자기가 믿는 바를 어디까지든지 실행하려 하는 정성은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마음을 보는 법이 어두웠다. 그의 생각에 세상 사람의 마음은 다 자기의 마음과 같아서 자기가 좋게 생각하는 바는 깨닫기만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좋게 보이려니 한다. 일언이폐지하면 그는 주관적(主觀的)이요, 이상(理想)의 인(人)이요, 실제(實際)의 인(人)은 아니외다.
그의 지나간 사 년간의 교사생활은 실패의 생활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출하였으나 별로 채용된 것이 없었고, 학생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가르치고 시키는 바가 있었으나 별로 환영되지도 아니하였고, 무론 실행된 것은 별로 없었다. 형식은 이것을 보고 분개한 적도 있고 비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자기가 부족함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이 아직 자기의 높은 사상을 깨닫지 못함이라 하여 스스로 선각자의 설움이라 일컫고 혼자 안심하였다. 그러나 남들이 형식의 의견을 채용치 아니함은 자기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함이라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네의 보기에 형식의 의견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요, 또 설사 실행한다 하더라도 효력이 없을 듯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도 차차 형식의 지식이 (꽤) 많음과 어려운 책을 많이 보고 생각이 (꽤) 깊은 줄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농담삼아, 칭찬삼아 형식을 ‘사상가’라고도 하고, ‘철학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별명에는 ‘너는 생각이나 하여라. 실지에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 하는 조롱의 뜻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별명을 듣는 형식은,
‘너희는 사상가가 무엇이며 철학자가 무엇인지를 아느냐’ 하고 비웃으면서도 그러한 별명이 아주 듣기 싫지는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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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벌써 상학종을 쳐서 교사들은 다 교실에 들어가고 배학감이 혼자 궐련을 피우고 앉았다가 형식을 슬쩍 보고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났으나 잠자코 분필통과 책을 들고 이층 사년급 교실에 들어갔다. 형식은,
“시간이 늦어서 미안하외다” 하고 반가운 듯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희경이가 형식을 슬쩍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다른 학생들도 빙글빙글 웃으며 형식을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기도 한다. 김종렬이가 혼자 웃지도 아니하고 점잖게 앉았다.
형식은 책을 펴서 책상 위에 놓고 교의에 걸어앉아서 수상한 듯이 일동을 본다. 형식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이 불쾌한 생각이 난다. 학생들의 태도가 암만해도 수상하다 하였다. 전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다. 오늘은 학생들의 태도에 자기를 비웃는 빛이 보인다. 그러나 형식은 웃으며,
“왜들 나를 보고 웃으시오…… 자 시작합시다. 제 십팔과…… 김군 읽어 보시오.”
학생들은 참다못한 듯이 한꺼번에, “와!” 하고 웃는다.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끽끽 하며 웃는다. 학생들의 등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래서 발을 구르며 책망도 하고 싶고 소리를 내어서 울고도 싶었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서 엄한 목소리로,
“이게 무슨 일들이오? 무슨 버르장머리들이란 말이오?” 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 말소리는 떨렸다. 일동은 웃음을 그치고 모두 바로앉았다. 희경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연필로 책상에 무엇을 그적그적한다. 김종렬은 여전히 시치미떼고 앉았다. 형식은 차마 가르칠 생각이 없다. 가슴이 활랑활랑하고 숨이 차다. 자기가 사오 년간 전심력을 다 바쳐서 가르치던 자들에게 모욕을 받은 것 같아서 참 분하였다. 저편 교실에서는 수학을 강의하는 모양이더니 학생의 웃음 소리와 형식의 큰소리가 나자 갑자기 말이 끊어진다. 아마 이편 교실 모양을 엿듣는 듯하다. 형식은,
“무슨 일이오, 누구든지 말을 하시오. 학생들이 그게 무슨 행위란 말이오? 말을 하시오!” 일동의 시선은 김종렬에게로 몰린다. 희경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 연필로 무슨 글자를 쓴다. 김종렬은 우뚝 일어선다. 학생들은 형식과 종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빙끗빙끗 웃기도 하고 서로 쿡쿡 찌르기도 한다. 어떤 자는 소곤소곤 이야기까지 한다. 형식의 머리터럭은 온통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였다. 종렬은 연설하는 사람 모양으로 한번 기침을 하더니,
“선생님, 한마디 질문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형식을 노려 본다. 형식은 ‘질문’이라는 말에 몸이 으쓱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이라도 상관없다 하는 용기도 난다. 그래서 종렬을 마주보며,
“무슨 질문이오?”
“선생님 그 동안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제가 질문이라 함은 그것을 가리킴이외다” 하고 자리에 앉는다. 일동의 시선은 형식의 입으로 모인다. 형식은,
“그래, 평양 갔다 왔소. 그래서? 그러니 어떻단 말이오?”
“무엇 하러?” 하고 어떤 학생이 혼자말 모양으로 묻자 다른 어떤 학생이, “누구하고?” 한다. 학생들은 또 한번 끽끽 웃는다. 또 어떤 학생이, “누구를 따라서?” 한다. 형식은 다 알았다. 종렬이가 다시 일어나며,
“평양은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학교를 쉬고 가시는 것을 보매 무슨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줄을 추측하기 비난합니다마는…….”
형식은 말이 막혔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자기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게 한참이나 가만히 섰다. 학생들은 또 웃는다. 누가, “계월향이 따라서 후후” 한다.
이때에 배학감이 쑥 들어오며,
“이선생, 왜 이렇게 교실이 소요하오? 다른 교실에서 상학할 수가 없구려” 하고 학생들을 돌아보며, “왜들 이렇게 떠드오?” 하고 돌아서서 나가려 할 적에 학생 중에서, “계월향!” 하고 소리를 지른다. 배학감은 형식을 한번 흘겨보고 문을 닫고 나간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학생들을 둘러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사 년간 교정이 이에 다 끊어졌소. 나는 가오” 하고 교실에 나왔다. 교실에서는 웃는 소리,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무실로 들어가 모자를 집어 들고 어디로 달아나리라 하였다. 그러나 배학감이,
“여기 좀 앉으시오그려” 하고 의자를 권하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의자에 앉아서 궐련을 끄집어내어 불을 붙였다. 배학감은,
“그 동안 어디 가셨어요?”
“녜, 평양 좀 갔다 왔어요.”
“아마 재미 많으셨겠습니다. 평양 경치가 좋지요?”
“노형은 나를 조롱하시오?” 하고 형식은 배학감을 흘겨보았다. 배학감은 웃으면서,
“아, 그렇게 성내실 것은 없지요. 남자가 기생을 좀 데리고 논다고 그렇게 흠할 것은 아니니까…… 다만 이선생님께서는 너무 고결하시니까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단 말이지요. 나는 계월향이가 이선생의 사랑하는 계집인 줄은 몰랐구려. 벌써 알았더면 그러한 실례는 아니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계월향을 감추실 게야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도 그 얼굴이나 보고 소리나 듣게 해주시지요. 허허 참 복 좋으시오.”
“이기지심으로 탁인지심(以己之心度人之心)이로구려! 이형식이가 노형같이…….”
“흥, 무론 노형은 고결하시지요, 성인이시지요, 유하혜(柳下惠 : 신문관본에는 ‘백이숙제’로 바뀌어 있음―편자 주)시지요.”
형식은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고 교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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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운동장에 나섰다. 일년급 어린 학생들이 체조를 하다가 형식을 쳐다본다. 뚱뚱한 체조 교사가 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씻으면서 형식에게 인사를 한다. 형식의 생각에는 모두 자기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더구나 평생 배학감에게 아첨을 하여 가며 자기에게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가지던 체조 교사의 눈에는 확실히 자기를 조롱하는 빛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형식은 ‘다시는 이놈의 학교에 발길을 아니하겠다’ 하면서 교문을 나섰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서는 한참 주저하였다. 자기가 사오 년 동안 집으로 알아 오던 학교와, 형제로 자녀로 아내로 사랑하는 자로 알아 오던 학생들을 영원히 떠나는가 하면 미상불 슬프기도 하였다. 그 운동장에 풀 한 대, 나무 한 가지가 어느 것이나 정들지 아니한 것이 없다. 저편 철봉 뒤에 선 십여 길이나 되는 포플러는 형식이가 처음 부임한 해에 자기의 손으로 심고, 자기가 날마다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 가며 기른 것이다. 그 포플러는 벌써 가지가 퍼지고 잎이 성하여 훌륭한 정자나무가 되었다. 예쁜 학생들이 낮에 그 나무 그늘에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에 형식은 매양 기쁨을 깨달았다. 마치 자기의 마음이 그 포플러가 되어서 어린 학생들을 가리워 주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자기도 쉬는 시간에는 그 나무 그늘에서 거닐기도 하고 반가운 듯이 그 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형식은 간다. 그 나무는 점점 더 퍼져서 수없는 어린 학생들이 그 나무 그늘에서 여전히 즐겁게 노니련만, 다시 자기를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형식은 고개를 돌려 한참 그 나무를 쳐다보며 창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차마 이 학교 문 밖에 오래 섰지 못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안동 네거리를 향하고 내려온다. 일기는 날로 더워 가고 하늘에는 구름장이 떠돌건마는 언제 비가 올 것 같지도 아니하다. 길 가는 사람들은 홰를 내어 부채질을 하고, 구루마꾼들은 흐르는 땀에 눈도 잘 뜨지 못한다. 파출소에 흰 복장 입은 순사가 추녀 끝 그늘에 들어서서 입으로 후후 바람을 내고 섰다. 그러나 형식은 더운 줄도 모르고 이따금 마주 오는 구루마를 비키면서 안동 골목으로 내려온다.
형식의 정신은 극히 혼란하다. 경성학교에 사직표를 제출할 것은 생각하나, 그 밖에는 어찌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없다. 형식의 머리는 마치 물끓는 모양으로 부걱부걱 끓는다. 여러 날 정신과 몸이 피곤한데다가 지금 학교에서 극렬한 사격을 받았으므로 형식은 마치 열병 환자와 같이 되었다. 다만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머리를 내려누를 뿐이다.
아까 교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형식에게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불행한 사건이다. 형식의 전 희망은 그 사년급에 있었고 형식의 전 행복도 그 사년급에 있었다. 그 사년급이 있는지라 형식은 적막함이 없었고, 그 단순하고 무미한 생활 중에서도 큰 즐거움을 얻어 왔던 것이다. 그 사년급은 어떤 의미로 보아 지나간 사오 년간에 그의 재산이었고 생명이었었다. 또 그의 전심력을 다하는 사업이었었다. 그러고 그의 생각에 사년급 삼십여 명 학생은 영원히 자기의 정신적 아우와 아들이 되어, 마치 자기가 오매에 그네를 잊지 못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자기가 그네를 사랑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사랑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형식은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별로 친한 친구도 없으매, 그네를 그처럼 사랑하였거니와, 그네에게는 형식 외에 부모도 있고 형제도 있고 사랑스러운 동무도 있었다. 사오 년래 혹 형식을 따르는 학생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가장 따르는 듯하던 이희경에게도 형식은 결코 중요한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었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오늘에야 비로소 사년급 학생들의 눈에 비치인 자기를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여 오던 자가, 또는 자기를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거니 하던 자가 일조에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줄을 깨달을 때에 그 슬픔이 얼마나 할까. 아마도 인생의 모든 슬픔 중에 ‘사랑의 실망’에서 더한 슬픔은 없을 것이다.
형식은 정히 이러한 상태에 있다. 지금 형식에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번 평양 갔던 일은 변명도 할 수 있으려니와, 그것을 변명하는 것은 형식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변명한다. 사년급 학생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한다는 진리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형식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는 사람에게 셋째나 넷째로 귀중한 것이다. 형식은 지금은 목숨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생에 발 디딜 데를 잃고 공중에 둥둥 뜬 모양이다. 형식이가 아주 말라죽고 말는지, 다시 어디다가 뿌리를 박고 살는지 이것은 장래를 보아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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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정신없이 집에 돌아왔다. 노파가 웃통을 벗고 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먹는다. 어깨와 팔굽이에 뼈가 울룩불룩 나오고 주름잡힌 두 젖이 말라붙은 듯이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두어 줄기 땀이 마치 그의 살이 썩어서 흐르는 송장물 같은 감각을 준다. 반이나 세고 몇 오리가 아니 남은 머리터럭과, 주름 잡히고 움쑥 들어간 두 뺨과, 뜨거운 볕에 시든 풀잎과 같은 그 살과 허리를 구부리고 담배를 먹는 그 모양,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다. 그도 일찍 여러 남자의 정신을 황홀(케)하던 젊은 미인이었었다. 그의 생각에 천하 남자는 다 자기를 보고 정신을 잃은 줄 알았었다. 자기의 얼굴과 몸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하였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가 불과 이삼십 년 전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몸에 있던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가 흘리는 땀이, 즉 그 아름다움이 녹아내리는 물인 것 같다.
그는 무엇 하러 세상에 났으며, 세상에 나서 무슨 일을 하였고, 무슨 낙을 보았는고. 그렇지마는 그 노파는 아직도 살아간다. 병이 나면 약을 먹고, 겨울이 되면 솜옷을 입어 가면서 아직도 죽을 생각은 아니하는 것 같다. 내일이나 내년에 무슨 새로운 낙이 오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르지마는 그는 밤이 새고 아침이 되면, 또 자리에서 일어나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한다. 일찍 형식이가 노파의 빨래하다가 허리를 툭툭 치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담배 먹는 재미로 살으십니다그려” 한 적이 있다. 그때에 노파는 빙끗 웃었다. 형식은 그 웃음의 뜻을 모른다. ‘그렇소’ 하는 뜻인지 ‘아니오’ 하는 뜻인지 몰랐다. 이 뜻을 아는 사람은 없다. 노파 자기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보든지 노파의 살아가는 목적은 담배 먹기 위함이다. 그 담배 연기 속에 노파의 모든 행복과 사업이 있다. 노파는 하루 스물네 시간에 거의 절반은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살아간다. 눈도 끔벅 하지 아니하고 독한 담배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앉았는 것이 노파의 생활의 중심이다. 노파에게서 만일 담배를 빼앗으면 이는 생명을 빼앗음이나 다름없다. 평생 아랫목에 우두커니 섰는, 댓진 배고 헝겊으로 세 군데나 감은 담뱃대가 즉 노파의 생명이다. 노파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아니 나오게 되면 이는 노파의 몸에 피가 아니 돌아가게 된 표다. 노파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는지 아니하는지 모르지마는 곁에서 보기에는 암만해도 그렇게밖에 더 생각할 수가 없다. 담배 먹기밖에 노파에게 모슨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 같지 아니하다. 형식이가 정신없이 들어올 때에 노파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모른다. 아마 아무 생각도 없이 다만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담배 연기만 쳐다보았을 것 같다. 만일 무슨 생각이 있었다 하면 그는 아마 희미한 안개 속으로 보는 듯한 젊었을 적 기억일 것이다. 어떤 대감 집에서 세력을 잡던 기억, 젊고 고운 문객의 품에 안기었던 기억, 그렇지 아니하면 토실토실한 아기의 손에 자기의 부드럽고 살진 젖꼭지를 잡히던 기억, 또는 다 자란 아들이 턱춤을 추며 죽던 기억, 또는 아무 때 어디서 어떠한 고운 옷을 입고 어떠한 맛나는 음식을 먹던 기억일 것이다. 아마 하루에 몇 번씩 담배 연기 속에 이러한 기억이 떠나오는 것을 볼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 기억이 떠나왔던지 모르거니와 노파는 형식을 보고 얼른 곁에 벗어 놓았던 땀 밴 적삼을 입으며,
“어째 벌써 오셔요?” 한다.
형식은 두루마기와 모자를 벗어 홱 방 안에 집어던지면서,
“흥, 학교에도 다 갔소.”
“왜, 이제는 학교에 아니 가셔요.”
“이제는 교사도 그만둘랍니다” 하고 툇마루에 쿵 하고 몸을 던지는 듯이 걸어앉으며, “냉수나 한 그릇 주시오. 속에서 불길이 피어 올라 못 견디겠소.”
노파는 부엌에 들어가 사기 대접에 냉수를 떠다가 형식을 준다. 형식은 냉수를 한 모금에 다 들이켜더니,
“에 시원하다. 냉수가 제일 좋다” 하고 밀수 먹은 사람 모양으로 맛나는 듯이 입을 다시며 혀를 내밀어 아래위 입술에 묻은 물을 말끔 빨아들인다. 노파는 이상한 듯이 물끄러미 보더니 자기 방에 건너가 초갑과 담뱃대를 들고 형식의 곁으로 온다. 형식은, ‘또 나를 위로할 작정으로 오는구나’ 하고 괴로운 중에도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노파의 위로를 듣는 것이 더욱 괴로울 듯하여 먼저 말끝을 돌려,
“어저께 신주사 안 왔었어요.”
“아니오.”
“근래에는 신주사를 싫어하세요. 한동안은 꽤 신주사를 좋아하셨지요.”
“누가 신주사를 싫어하나요. 너무 함부로 말씀을 하시니 그렇지” 하고 픽 웃는다.
“장찌개에 구더기 있다고” 하고 형식도 허허 웃었다. 노파는 이 기회를 아니 놓치리라 하는 듯이,
“그런데 왜 학교를 그만두세요? 그 배학감인가 하는 사람과 다투셨어요?”
“다툰 것도 아니야요. 교사 노릇도 너무 오래 했으니 이제는 다른 것을 좀 해보지요.”
“다른 것? 무엇이오? 옳지, 이제는 벼슬을 하시오. 그런 배학감 같은 사람과 같이 있으니까 살이 내리지, 벼슬을 하면 작히나 좋아요. 저 건너편 집 아들도 일전에 무슨 주사를 해서…….”
“나는 벼슬보다 중 노릇을 하고 싶어요. 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조고만 암자에다가…… 옳지, 칡베 장삼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하고 웃으며 노파를 본다. 노파는 눈이 둥그래지며,
“저런! 무엇을 못 해서 중이 되어요?”
“중이 안 되면 무엇을 해요?” 한참 잠잠하였다.
🙝 🙟
형식은 무심중 ‘중 노릇을 하고 싶어요’ 하였다. 그러나 말을 하고 본즉 과연 중 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또 중 될 것밖에 더 길이 없는 것도 같다. 조선의 문명을 위하여,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힘쓰겠다는 마음이 일시에 다 스러지는 것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아내도 죽고, 아들 딸도 다 죽고 재산도 다 없어진 때문에 느끼는 듯하는 슬픔과 절망이 가득 찼다. 영채의 죽은 것과 영채의 집의 멸망한 것과 자기가 지금 사년급 학생에게 욕을 당한 것과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형식의 정신을 깊고 어두운 땅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다. 지금껏 자기가 하여 온 생활이 마치 아무 뜻도 없고 맛도 없는 것 같고, 길고 불쾌한 꿈을 꾸다가 우연히 번쩍 눈을 뜬 것같이 불쾌한 생각이 난다. 학교에서 사오 년간 분필을 들고 가르치던 것이며, 늦도록 책을 보고 외국 말의 단자를 외우던 것이며, 선형과 순애에게 가르치던 것이며, 영채를 만났던 것과, 청량리에서 한 일과, 평양에 갔던 일이 모두 다 무슨 부끄럽고 싱거운 일같이 보인다. 지금껏 정답게 생각하여 오던 노파까지도 마치 무슨 더럽고 냄새 나는 물건같이 보인다. 모든 것이 다 부끄럽고 불쾌하고 성이 난다. ‘응, 내가 무엇 하러 이 모양으로 살아왔는고’ 하여 본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값이 무엇이며 뜻이 무엇인고 한다. 당장 이 생활을 온통 내어던지고 어디 사람 없는 외딴 곳에 들어가서 숨고 싶은 생각이 난다. 한 시간이라도 이 서울 안에, 이 노파의 집에 있기 싫은 생각이 난다. 그래서 노파에게,
“중이 제일 좋아요. 세상에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요.”
“선생 같은 이야 왜 재미가 없어요. 나이가 젊으시것다, 재주가 있것…… 왜 세상이 재미가 없겠소.”
“아주머니께서는 젊었을 때에 재미가 많았어요?”
노파는 빙그레 웃으며,
“아, 젊었을 적에야 날마다 기쁘기만 했지요. 웃다가도 울기도 했지마는, 젊었을 때에 우는 것은 늙어서 웃는 것보다도 낙이라오…….”
형식은 ‘노파가 참 말을 잘한다’ 하고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노파는 젊었을 때를 생각만 해도 기쁜 듯이 얼굴에 화기가 돌며,
“나는 이선생께서는 무슨 재미에 살으시는지 모르겠습디다. 좋은 벼슬도 아니하고, 고운 색시도…… 하하, 이런 말씀을 하면 선생은 늘 이마를 찌푸리시것다…… 그러나 내 말이 옳지요. 꽃 같은 청춘에 왜 혼자 우두커니 방에만 들어앉았겠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재미가 없어서 중이 되느니 무엇이 되느니 하지요. 나는 젊었을 적에는…… 말을 다 해 무엇 하겠소. 늙으면 허삽니다.”
이 말은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이나 형식을 대하여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형식은 다만 웃고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노파의말에 새로운 뜻과 힘이 있는 것같이 들린다. 그러고 선형과 영채를 대하였을 때의 즐겁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외국 서적에 사랑의 즐거움을 찬미한 것을 보던 생각이 난다. 과연 남녀의 사랑이 인생에 제일 큰 행복이라 할까. 적어도 이 노파는 일생에 기쁜 일이라고는 남녀의 사랑밖에 없는 것같이 말한다. 내가 평생 적막하고, 세상에 따뜻한 재미를 못 붙임은 이 사랑이란 맛을 못 보는 때문인가 하여 본다. 그래서 웃으며,
“그러면 나도 즐거운 재미를 볼 수가 있을까요?” 하였다. 그러고는 미련한 질문을 다 하였다 하고 속으로 부끄러웠다. 노파는,
“아, 재미를 볼 수가 있고말고. 선생 같은 이면 장안 미인들이 저마다 따르지요. 얼굴이 좋것다, 마음씨가 곱것다…… 지금은 세상이 말세가 되어서 그렇지마는, 전 세월 같으면 대과 급제에, 선생 같으신 이는 미인일내 채어 서지를(미인에 걸려 단기지를) 못하겠소.”
“흥, 그러니까 지금은 쓸데없단 말씀이구려. 대과 급제가 없으니까.”
“전 세월만 못하단 말이지, 지금인들 장안에 일등 기생이 여러 백 명 될 터인데……” 하더니 문득 목소리를 낮추며,
“그런데” 하고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영채? 그 새악시 말이야요. 어떻게 되었나요. 그 후에 한번 만나 보셨어요?”
형식은 이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손에 들었던 궐련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형식은 놀랐다.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답니다.”
“물에 빠져? 언제?”
“아마, 그저께 빠져 죽었겠지요.”
“에그머니, 웬일이야요? 왜 빠져 죽어요? 저런!”
형식은 말없이 두 팔로 제 목을 안고 고개를 수그렸다. 지나간 삼사 일의 광경이 눈앞으로 휘익휘익 지나간다. 노파의 눈에는 눈물이 핑 고인다.
“아, 글쎄 무슨 일이야요?”
“나처럼 세상이 재미없던 게지요.”
“에그머니, 저런! 꽃 같은 청춘에 왜 죽는담. 명이 다해서 죽는 것도 설운데 물에를 왜 빠져 죽어?” 하고 한참 묵묵히 앉았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이선생이 잘못해서 죽었구려!”
“어째서요?”
“그렇게 십여 년을 그립게 지내다가 찾아왔는데 그렇게 무정하게 구시니까.”
‘무정하게’ 라는 말에 형식은 놀랐다. 그래서,
“무정하게? 내가 무엇을 무정하게 했어요?”
“무정하지 않구. 손이라도 따뜻이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어떻게 잡아요?”
“손을 왜 못 잡아요? 내가 보니까, 명채…….”
“명채가 아니라 영채야요.”
“옳지, 내가 보니깐 영채 씨는 선생께 마음을 바친 모양이던데. 그렇게 무정하게 어떻게 하시오. 또 간다고 할 적에도 붙들어 만류를 하든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고 형식을 원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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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말에 형식은 더욱 놀랐다. 과연 자기가 영채에게 대하여 무정하였던가. 과연 그때에 영채의 손을 잡으며 나도 지금껏 자기를 그리워하던 말을 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일어나 나가려 할 때에 그를 붙들고 그의 장래에 대한 결심을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너를 거두겠다 하고 같이 영채의 집에 가서 그 어미와 의논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였더면 영채는 그 이튿날 청량리에도 아니 갔을 것이요, 그 변도 당하지 아니하였을 것이 아니었던가. 또 청량리에서 같이 다방골로 오는 동안에도 내가 너를 거두마 할 것이 아니었던가. 다방골로 가지 말고 다른 객점이나 내 집에 데리고 올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였더면 평양으로 갈 생각도 아니하고 물에 빠져 죽지도 아니할 것이 아니었던가. 옳다, 노파의 말과 같이 영채를 죽인 것은 내다. 영채가 내 집에 온 것은,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만났구나’ 하는 내 말을 들으려 함이다. 그러고 ‘이제부터 너는 내 아내다’ 하는 말을 들으려 함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에 무슨 생각을 하였나. 영채가 기생이나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상류 가정에 거둠이 되어 여학교에나 다녔으면 좋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마음속으로는 선형이가 있는데 왜 영채가 뛰어나왔나, 영채가 기생이거나 뉘 첩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기도 하였다. 아아, 상류 가정은 무엇이며 기생은 무엇인고.
또 나는 왜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영채를 찾지 아니하였던고. 학교를 위해서? 교육가라는 명예를 위해서?
옳다, 영채를 죽인 것은 내다. 그러고 평양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영채의 시체도 찾아보지 아니하고 왔다. 칠성문 밖에서 도리어 기쁜 마음을 가지고 왔다. 밤새도록 차 속에서도 영채는 생각도 아니하고 왔다. 영채가 죽은 것이 도리어 무거운 짐이 덜리는 것 같았다.
형식은 고개를 흔들며,
“옳아요. 내가 영채를 죽였어요, 내가 죽였어요! 나를 위하여 살아오던 영채를 내 손으로 죽였어요!” 하고 몹시 괴로운 듯이 숨이 차다. 노파는 도리어 미안한 생각이 나서,
“다 제 팔자지요.”
“아니야요. 내가 죽였어요.”
이때에 우선이가 대팻밥 벙거지를 두르며 들어와 인사도 없이,
“언제 왔나, 그래 찾았나.”
형식은 우선은 보지 아니하고,
“내가 죽였네, 영채를 내가 죽였네.”
“응, 죽었어! 그 전보가 아니 갔던가.”
“내가 죽였어! 그러고서는 나는 그의 시체도 찾지 아니하고 왔네그려. 흥, 학생들 쉴까 보아서.”
“김장로의 따님이 보고 싶던 게지” 하고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선은 활해를 잊지 아니한다. “대관절 어찌 되었나?”
“죽었어!” 하고 벌떡 일어나며, “자네 돈 있나. 있거든 한 오 원 꾸게” 하고 생각하니, 이제는 돈 나올 곳도 없다. 학교에서 유월 월급은 주겠지마는 찾으러 갈 수도 없고, 칠월부터는 형식에게는 아무 수입도 없다.
“돈은 해서?”
“가서 영채의 시체나 찾아야겠네. 찾아서 내가 업어다라도 장례나 지내 주어야겠네” 하고 형식은 괴로움을 못 견디어하는 듯이 마당으로 왔다갔다한다. 형식의 적삼에는 땀이 배었다. 우선은 지팡이로 엉덩이를 버티고 서서 형식을 보더니,
“벌써 다 떠내려 갔겠네. 황해바다로 둥둥 떠나갔겠네.”
“왜 그래요? 물에 빠져 죽은 송장은 사흘 전에는 그 자리에 아니 떠난답니다” 하고 노파가 우선을 보며 말한다.
“떠내려갔거든 어디까지든지 따라 내려가지. 있는 데까지 따라 내려가지.” 하고 잠깐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섰더니, 결심한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우선의 곁으로 와서 손을 내어밀며,
“어서 오 원만 내게.”
“지금 곧 떠날 터인가.”
“정거장에 나가서 차 있는 대로 떠날라네.”
우선은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오 원짜리 지표를 내어준다. 영채가 죽었단 말을 듣고 우선도 미상불 슬펐다. 귀중히 여기던 무엇이 없어진 것 같았다.
형식은 돈을 받아 넣고, 방에 들어가 두루마기를 입고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신을) 신으려고 나섰다. 이때에 어떤 파나마를 쓴 신사가 형식을 찾는다. 형식은 이마를 찌푸리더니 마지못하여 문에 나갔다. 그는 김장로와 한 교회에 있는 목사다. 젊은 얼굴에 수염은 한 개도 없고 두 뺨에는 굵은 주름이 서너 줄 깔렸다. 정직한 듯한 중늙은이다. 우선과 노파는 노파의 방 툇마루에 가서 우두커니 두 사람을 본다. 형식은 책을 놓고 목사를 청해 올려 앉혔다.
“어디 가시는 길이오!”
“녜, 산보 나가던 길이올시다. 더운데 어떻게 이렇게…….”
“뵈온 지도 오래고…… 또 무슨 할 말씀도 좀 있어서.”
“제게요!” 하고 형식은 목사를 본다. 목사는 까닭 있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과히 바쁘시지는 않으셔요?”
“아니올시다. 말씀하시지요.”
“허허허, 이선생께서 기뻐하실 말씀이외다” 하고 또 한번 웃으며 형식의 방 안을 둘러본다. 노파와 우선은 서로 돌아보며 무엇을 수군수군한다. 오늘은 노파가 우선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로다.
목사는 한참 부채질을 하더니 유심히 형식을 보며,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고 말을 내기가 어려운 듯이 말을 시작한다. 듣는 형식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목사의 태도가 수상하다 하였다. 그러고 어서 말을 다 하면 정거장으로 뛰어나가리라 하였다.
🙝 🙟
“다른 말이 아니라, 김장로의 말씀이……” 하고 목사가 말을 시작한다. 노파와 우선은 안 듣는 체하면서도 들으려 한다.
“김장로의 말씀이 선형이를 이 가을에 미국에 보낼 터인데…….”
“녜” 하고 형식이 조자(調子)를 맞춘다.
“그런데 미국 가기 전에 어, 약혼을 하여야 하겠고, 또 미국을 보낸다 하더라도 딸 혼자만 보내기도 어려운즉―이목사는 ‘어’와 ‘즉’을 잘 쓴다―약혼을 하고 신랑까지 함께 미국을 보냈으면 좋겠다는데……” 하고 말을 그치고, 또 웃으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리며,
“녜, 그런데요” 하였다. 이 밖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목사는,
“그런데, 김장로께서는 어, 이선생께서 어, 허락만 하시면…… 어, 이선생도 미국 유학을 갔으면 좋겠고…… 그것은 어쨌든지 김장로 양주께서는 매우 이선생을 사랑하시는 모양인데. 그래서 날더러 한번 이선생의 뜻을 물어 달라고 해요. 어, 그래서…….”
“제 뜻을?”
“녜, 이선생의 뜻을.”
“무슨 뜻 말씀이야요?”
우선은 고개를 돌리며 노파를 보고 씩 웃는다. (노파도 웃는다.) 목사는 형식의 둥그래진 눈을 보더니 비웃는 듯이,
“그만하면 알으시겠구려.”
“……”
“그러면 어, 다시 말하지요. 이선생이 선형과 약혼을 하여 주시기를 바란단 말이외다. 무론 청혼하는 데도 여러 곳 있지마는, 김장로 양주는 이선생이 꼭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구려.”
형식은 이제야 분명히 목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가슴이 뜨끔했다.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형식은 어떻게 어떻게 생각할지를 몰랐다. 가만히 앉았다.
“그 동안 이선생께서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셨지요?”
“녜, 며칠 전부터.”
“그 뜻을 알으셔요?”
“무슨 뜻이오?”
“하하, 영어를 가르쳐 주옵사고 청한 뜻 말씀이오.”
“……”
“지금은 전과 달라 부모의 뜻대로만 혼인을 할 수가 없으니까 서로 잠깐 교제를 해보란 뜻이지요. 그래 어떠시오?”
“제가 감당치를 못하겠습니다. 저 혼자몸도 살아가기가 어려운 처지에, 혼인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요.”
“그것이 제일 큰 문제지요. 경제적 기초 없이 혼인을 어떻게 합니까. 그게 제일 큰 문제지요.”
“큰 문제지마는 우선 한 삼사 년간 미국에 유학하시고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에야 무슨 걱정이 있어요. 또 선형으로 보더라도 그만한 처녀가 쉽지 아니하지요. 이선생께서도 복 많이 받으셨소…… 자, 말씀하시오.”
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았다. 목사는 웃으며 부채질만 한다. 노파는 형식이 왜 ‘녜’ 하지 않는가 하고 공연히 애를 쓴다. 우선은 일전 안동서 형식과 말하던 것을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는다. 모두 다 기뻐하는 속에 형식 혼자는 남모르게 괴로워한다. 목사는,
“자, 생각하실 것도 없겠구려, 어서 대답을 하시오.”
“일후에 다시 말씀드리지요. 아무려나 저 같은 것을 그처럼 생각하여 주는 것은 어떻게 황송한지 모르겠습니다.”
“일후를 기다릴 것이 있어요. 그러고 오늘 오후에 나하고 김장로 댁에 가시지요. 같이 저녁을 먹자고 그러시던데.”
형식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평양도 가야 하겠지마는, 김장로의 집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더 중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채의 시체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을 버리고 금시에 선형에게 취하여 ‘녜’ 하기는 제 마음이 부끄러웠다. ‘선형과 나와 약혼한다’는 말은 말만 들어도 기뻤다. 영채가 마침 죽은 것이 다행이다 하는 생각까지 난다. 게다가 ‘미국 유학!’ 형식의 마음이 아니 끌리고 어찌하랴. 사랑하던 미인과 일생에 원하던 서양 유학! 이 중에 하나만이라도 형식의 마음을 끌 만하거든, 하물며 둘을 다! 형식의 마음속에는 ‘내게 큰 복이 돌아왔구나’ 하는 소리가 아니 발할 수가 없다. 형식이가 괴로운 듯이 숙이고 앉았는 그 얼굴에는 자세히 보면 단정코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 목사를 대할 때에는 형식의 얼굴에는 과연 괴로운 빛이 있었다. 그러나 한 마디 두 마디 흘러나오는 목사의 말은 어느덧에 그 괴로운 빛을 다 없이하고 어느덧에 기쁜 빛을 폈다. 마치 봄철 따뜻한 볕에 눈이 일시에 다 녹아 없어지고, 산과 들이 갑자기 봄빛을 띠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형식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남에게 기쁜 빛을 보이기가 부끄러움이다. 형식은 힘써 얼굴에 괴로운 빛을 나타내려 한다. 그뿐더러 일부러 마음이 괴로워지려 한다.
형식은 이러한 때에는 머릿속이 착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는 욱하고 무엇을 작정할 때에는 전후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작정하건마는, 또 어떤 때에는 이럴까저럴까 하여 어떻게 결단할 줄을 모른다. 길을 가다가도 갈까말까 갈까말까 하고 수십 번이나 주저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마음 약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가 얼른 결단하는 것도 약한 까닭이요, 얼른 결단하지 못하는 것도 약한 까닭이다. 지금 형식은 이럴까저럴까 어떻게 대답하여야 좋을 줄을 모른다. 누가 곁에서 자기를 대신하여 대답해 주는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건넌방을 건너다보았다. 형식은 우선이가 이러한 경우에 과단 있게 결단할 줄을 앎이다. 우선도 웃으면서 형식을 건너다본다.
🙝 🙟
우선은 형식을 보고 눈을 끔적한다. 형식은 일부러 안 보는 체한다. 우선은 또 한번 눈을 끔적한다. 형식은 안 보는 체하면서도 그것을 다 보았다. 그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더 부끄럽고 더 머리가 혼란하다. 우선의 눈 끔적하는 뜻을 해석해 본다. ‘얼른 허락을 해라’ 하는 뜻인지, ‘어서 평양을 가지 아니하고 왜 가만히 앉았느냐’ 하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노파는 참다못한 듯이 우선을 꾹 찌르며,
“왜 이선생이 허락을 아니하오. 그 처녀가 마음에 아니 드나요.”
“흥, 그 처녀가 서울에 유명한 미인이랍니다.”
“또 부자고요?”
“부자기에 사위까지 미국을 보낸다지요.”
노파는 미국에 보내는 것과 부자인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지마는,
“그런데 왜 저러고 앉았어요?” 하고 입을 쩍 다시며 담배를 담는다. 목사가,
“그렇게 하시지요” 하고 다시 재촉할 때에 형식은 겨우,
“그러면 갑지요! 그러나 약혼은 일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하였다. 목사는,
“내 교회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르리다” 하고 웃으며 나간다. 형식은 대문 밖까지 목사를 보내고 들어왔다. 형식의 얼굴은 마치 선잠을 깨인 사람의 얼굴 같다. 우선이가 뛰어오며,
“자네 땡잡았네그려. 미인 얻고 미국 유학 가고” 하고 형식의 손을 잡아 흔든다. 형식은 우선의 눈을 피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도 웃음이 있었다. 우선은 다시,
“허, 자네도 수단이 용한걸. 불과 이삼 일에 그렇게 쉽게 선형 씨를 손에 넣어!”
노파도 웃으며,
“내 그런 줄 알았지. 어째 영채 씨가 오셨는데도 만류도 아니하고…… 그저 영채 씨가 불쌍하지…… 이선생은 벌써 정들여 둔 데가 있는데 공연히……” 말이 끝나기 전에 우선은 노파를 돌아보고 눈을 끔적하며, “쉬!” 하였다. 형식은 짐짓 노파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우선더러,
“나는 경성학교 사직했네.”
“어느새에 사직을 하여, 약혼이나 되거든 하지. 허허허.”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교사 노릇을 그만둘라네.”
“암, 미국 유학으로 돌아오셔서 대학 교수가 되실 터이니까.”
형식은 성난 듯이 획 돌아서며,
“자네는 남의 말을 조롱만 하려고 들데그려. 남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러는데…….”
“응, 동정하네, 퍽 괴로우실 테지.” 노파도 우선의 곁으로 오며,
“내가 어떻게 기쁜지 모르겠소. 이선생이 장가를 드신다니까 내 아들이……”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또 형식을 자기의 아들에 비기는 것이 버릇없는 듯도 하여, “오늘 저녁에 가시거든 확실하게 허락을 합시오. 아까는 왜 그렇게 우두커니 앉았담…… 호호, 아직 도련님이니깐 수줍어서 그러시는가 보여.”
형식은 어쩔 줄을 모르고 공연히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왼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도 하고 손가락 마디를 딱딱 소리를 내기도 하더니,
“여보게 나는 지금 평양으로 떠나겠네. 암만해도…….”
우선은 위협하는 듯이 형식을 노려보며,
“에그, 못생긴 것. 딸이 썩어져 가기로 저런 것을 준담!”
형식도 이 말에는 웃었다. 그러고 과연 못생긴 소리를 하였다. 우선은,
“이제부터는 좀 굳센 사람이 되게. 그게 무엇이람. 계집애도 아니요…… 딴소리 말고 오늘 저녁 김장로 집에 가게. 가면 또 혼인말이 날 터이니까, 아까 모양으로 못난이 부리지 말고 허락하게. 그러고 미국 가게. 나도 경성학교 말을 들었네. 아마 자네는 사직을 아니하더라도 쫓겨나겠나 보데.”
“쫓겨나? 왜?”
“자네가 기생을 따라서 평양 갔다고. 청량리 원수 갚는 게지. 하니까, 약혼하고 미국 가게.”
“그러면 영채는 어떻게 하고?”
“죽은 영채를 어쩐단 말인가. 자네도 따라 죽을 터인가, 열녀가 아니라 열남이 될 양으로. 그런 미련한 소리 말고 어서 꼭 내 말대로만 하게.”
우선의 말을 들으매 형식도 얼마큼 안심이 된다. 자기도 그만한 생각을 못 함이 아니지마는 자기 생각만으로는 안심이 아니 되다가 우선의 활발한 말을 듣고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형식은 우선의 말대로 하리라 하였다. 제 생각대로 한다는 것보다 우선의 말대로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흡족한 듯하였다. 형식은 빙그레 웃으며,
“글쎄” 하였다. 노파도 공연히 기뻐한다.
“점심을 차릴까요. 신주사도 한술 잡수시고.”
“또 장찌개 주실랍잉아” 하고 우선이가 형식의 조끼에서 제 것같이 궐련을 뽑아 손바닥에 턱턱 긁을 박는다.
“그만둡시오. 웬 장찌개.”
“가서 냉면이나 시켜 오오” 하고 형식이가 일어난다.
“요, 한턱하시려네그려. 한턱하려거든 맥주나 사주게.”
“돈이 있나.”
“부잣집 사위가 무슨 걱정이야.”
“부잣집 사위는 이따 되더라도.”
“그 오 원 안 있나.”
“평양 가야지.”
“또 평양을 가?”
“가서 시체나 찾아야지.”
“벌써 황해바다에 떠나갔어! 자네 같은 무정한 사람 기다리고 아직까지 청류벽 밑에 있을 듯싶은가. 자 청요릿집에나 가세.”
“벌써 황해바다에 갔을까!” 하고 형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정 태양이 바로 서울 한복판에 떠서 다 데어 죽어라 하는 듯이 그 불 같은 볕을 담아 붓는다. 형식은 새삼스럽게 더운 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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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인왕산 마루턱에 걸렸다. 종로 전선대 그림자가 길게 가로누웠다. 종현 천주당 뾰족탑의 유리창이 석양을 반사하여 불길같이 번적거린다. 두부 장수의 “두부나 비지드렁” 하는 소리도 이제는 아니 들리게 되고 집집에는 앞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한 손으로 땀을 씻어 가며 저녁밥을 먹는다. 북악의 황토가 가로쏘는 햇볕을 받아 빨간빛을 발하고 경복궁 어원 늙은 나무 수풀에서는 저녁 까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종일 빨갛게 달았던 기왓장이 한강으로 불어 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받아 뜨거운 입김을 후끈후끈하게 토한다. 길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벌겋게 되었다.
가게에 앉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서늘한 밤이 온다’ 하는 듯이 피곤한 얼굴에 땀을 씻으면서 행길에 나서 거닌다.
남산 솔수풀 위에 살짝 덮였던 석양도 무엇으로 지우는 듯이 점점 스러지고, 그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 속으로 자줏빛 띤 황혼이 거미줄 모양으로 아슬랑아슬랑 기어나온다.
해 바퀴는 인왕산 머리에서 뚝 떨어졌다. 북악산에 아직도 고깔 모양으로 석양이 남았다. 장안 만호에는 파르족족한 장막이 덮인다. 그 한끝이 늘어나서 북악산으로 덮여 올라간다. 마침내 그 고깔까지도 파랗게 물을 들이고 말았다.
강원도 바로 구름산이 떠올랐다. 그것이 처음에는 불길과 같다가 점점 식어서 거뭇거뭇하여진다. 그것이 거뭇거뭇하여짐을 따라서 장안을 덮은 장막도 점점 짙어져서 자줏빛이 되었다가 마침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그 속에서 조고만 전등들이 반딧불 모양으로 반작반작 눈을 뜬다. 연극장과 활동사진의 소요한 악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종로와 개천가에는 담배 붙여 물고 부채 든 산보객이 점점 많아진다. 야시를 펴놓으라고 조고마한 구루마도 끌고 오고 말뚝도 박으며 휘장도 친다.
사람들은 배가 불룩하고 몸이 서늘하여 마음이 상쾌하여진다. 낮에는 잠자고 있던 사람들도 차차 기운을 내어 말도 하고 웃기도 하게 된다.
안동 김장로의 집에는 방방에 전등이 켜 있다. 마당에는 물을 뿌려 흙냄새와 화단에 꽃향기가 섞여 들어와 즐겁게 먹고 마시는 여러 사람의 신경을 흥분케 한다. 김장로는 여덟팔자 수염을 손수건으로 (문대고) 한목사는 두 팔로 몸을 버티고 뒤로 기대었으며, 형식도 숭늉을 한입 물어 소리 안 나게 양치를 한다. 세 사람은 맛나게 또 유쾌하게 저녁을 먹었다.
다른 방에서는 부인과 선형과 순애와 계집 하인이 이 역시 맛나게 유쾌하게 저녁을 바치고 말없이 서로 보고 웃는다. 선형의 두 뺨에는 보는 사람의 신경인지 모르거니와 불그레한 빛이 도는 듯하다. 부인은 예쁜 자기 딸에게 황홀한 듯이 정신없이 선형을 마주본다. 선형은 부인을 슬쩍 보고는 순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얘 순애야, 가서 풍금이나 타자. 아까 배운 것 잊어버리지나 않었는지.”
“응 아직 가서 풍금이나 타거라” 하고 부인이 먼저 일어선다. 선형과 순애는 풍금 놓인 방으로 간다.
선형은 등자에 올라앉으며 손으로 치맛자락을 모으고 풍금 뚜께를 열고 두어 번 건반(鍵盤)을 내려훑는다. 높은 소리로부터 낮은 소리까지, 또는 낮은 소리로부터 높은 소리까지 맑은 소리가 황혼의 공기를 가볍게 떤다. 순애는 한 팔로 풍금 머리를 짚고 우두커니 서서 오르내리는 선형의 하얀 손을 본다. 선형은 커다란 보표(譜表)를 펴고 고개를 까딱까딱 하며 한번 입으로 라라라라를 불러 보더니 첫번 누를 건(鍵)을 찾아 타기를 시작한다. 눈은 보표의 음부(音符)를 따르고, 손은 하얀 건을 따른다. 보표의 빠르고 늦음을 따라 선형의 몸짓도 빨랐다 늦었다 한다. 방 안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가득 찼다. 그것이 방에서 넘쳐나서 황혼의 바람에 풍겨 마당을 건너 담을 넘어 마치 물결 모양으로 사방으로 퍼진다. 몇 사람이나 가만히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사람이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는고.
선형의 손은 곡조를 따라 스스로 오르내리고 그 몸은 손을 따라 스스로 움직여진다. 마침내 맑은 노랫소리가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하늘에 둥실 뜬 저 구름아, 비를 싣고서 어디로 가느냐.”
순애도 가는 목소리로 화하여 불렀다. 형식도 이 노래를 들었다. 형식의 정신은 노랫소리로 더불어 공중에 솟아올랐다. 마치 정신에 날개가 돋아서 훨훨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듯하여 말할 수 없는 서늘한 듯도 하고 따뜻한 듯도 한 기쁨이 형식의 가슴에 가득 찼다. 김장로는 목사를 향하여,
“자, 이제는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나 합시다.”
세 사람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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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로의 서재는 양식으로 되었다. 그가 일찍 미국 공사로 갔다 와서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서양식 생활을 하려 한다.
방바닥에는 붉은 모란 무늬 있는 모전을 깔고 사벽에는 화액(畵額)에 넣은 그림을 걸었다. 그림은 대개 종교화다. 북편 벽으로 제일 큰 화액에는 겟세마네에는 기도하는 예수의 화상이 있고 두어 자 동쪽에는 그보다 조곰 작은 화액에 구유에 누인 예수를 그린 것이요, 서편 벽에는 자기의 반신상이 걸렸다. 다른 나라 신사 같으면, 종교화 밖에도 한두 장 세계 명화를 걸었으련마는, 김장로는 아직 미술의 취미가 없고 또 가치도 모른다. 그는 그림이라 하면 종교에 관한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고, 기타에는 옛날 산수 풍경이며 지란매죽 같은 그림은 얼마큼 귀하에 여기되, 이러한 그림은 서양식으로 차려 놓은 방에는 부적당한 줄로 안다. 그러고 서양식 인물화라든지 그중에도 미인화, 나체화(裸體畵) 같은 것은 별로 보지도 못하였거니와 보려고도 아니하고 본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미술이라는 말도 잘 알지 못하거니와, 대체 그림 같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한다. 더구나 조각(彫刻) 같은 것은 아마도 그의 오십 년 생활에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종교와 같이 귀중히 여기는 예술(藝術)도 그의 눈에는 거의 한푼 어치 가치도 아니 보일 것이다. 서양 사람의 생각으로 그를 비평할진대 ‘예술을 모르고 어떻게 문명 인사(文明人士)가 되나’ 하고 의심할 것이다. 실로 문명 인사치고 예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장로는 방을 서양식으로 꾸밀 뿐더러 옷도 양복을 많이 입고, 잘 때에도 서양식 침상에서 잔다. 그는 서양, 그 중에도 미국을 존경한다. 그래서 모든 것에 서양을 본받으려 한다. 그는 과연 이십여 년 서양을 본받았다. 그가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에는 아마 서양을 본받기 위함인지 모른다. 그리하고 그는 자기는 서양을 잘 알고 잘 본받은 줄로 생각한다. 더구나 자기가 외교관이 되어 (미국 서울) 워싱턴에 주재하였으므로 서양 사정은 자기보다 더 자세히 아는 이가 없거니 한다. 그러므로 서양에 관하여서는 더 들을 필요도 없고 더 배울 필요는 무론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는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문명 인사로 자임한다. 교회 안에서와 세상에서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러나 다만 그렇게 인정하지 아니하는 한 방면이 있다. 그것은 서양 선교사들이라.
선교사들은 김장로가 서양 문명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줄을 안다. 김장로는 과학(科學)을 모르고, 철학(哲學)과 예술(藝術)과 경제(經濟)와 산업(産業)을 모르는 줄을 안다. 그가 종교를 아노라 하건마는 그는 조선식 예수교의 신앙을 알 따름이요, 예수교의 진수(眞髓)가 무엇이며, 예수교와 인류와의 관계 또는 예수와 조선 사람과의 관계는 무론 생각도 하여 본 적이 없다.
문명이라 하면 과학,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경제, 산업, 사회 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 서양의 문명을 이해(理解)한다 함은, 즉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한다는 뜻이니, 김장로는 무엇으로 서양을 알았노라 하는고.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함을 안다. 그러므로 그네는 김장로를 서양을 흉내내는 사람이라 한다. 이는 결코 김장로를 비방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김장로의 참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의 문명의 내용은 모르면서 서양 옷을 입고, 서양식 집을 짓고, 서양식 풍속을 따름을 흉내가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리요. 다만 용서할 점은 김장로는 결코 경박하여, 또는 일정한 주견이 없어서, 또 다만 허영심으로 서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양이 우리보다 우승함과, 따라서 우리도 불가불 서양을 본받아야 할 줄을 믿음―깨달음이 아니요―이니 무식하여 그러는 것을 우리는 책망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는 과연 무식하다. 그가 들으면 성도 내려니와 그는 무식하다. 그는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깨달을 줄로 안다. 하기는 그에게는 그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러나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알 수가 있을까. 십 년 이십 년 책을 보고, 선생께 듣고, 제가 생각하여도 특별히 재주가 있고, 부지런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야 처음 보는 남의 문명을 깨달을 동 말 동하거든, 김장로가 아무리 천질이 명민하다 한들 책 한 권 아니 보고 무슨 재주에 복잡한 신문명의 참뜻을 깨달으리요.
그러나 김장로는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지 자기는 잘 모르면서도 서양 사람들이 다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내므로 자녀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안다. 안다는 것보다 믿는다 함이 적당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는 마침내 문명을 알게 될 것이라. 이리하여 조선도 점점 신문명을 완전히 소화(消化)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김장로 같은 이가 자기의 지식을 너무 믿어 학교에서 배워 와 신문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자녀의 사상을 간섭함이다. 자녀들은 잘 알고 하는 것이언마는 자기가 일찍 생각하지 않던 바를 자녀들이 생각하면 이는 무슨 이단(異端)같이 여겨서 기어이 박멸하려고 애를 쓴다. 이리하여 소위 신구 사상의 충돌이라는 신문명 들어올 때에 으레 있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던 바를 생각함은 낡은 사람이 보기에 이단 같지마는 기실은 낡은 사람들이 모르던 새 진리를 안 것이라. 아들은 매양 아버지보다 나아야 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 그러나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이 자기 아는 이상 알기를 싫어하는 법이니 신구 사상 충돌의 비극은 그 책임이 흔히 낡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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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장로가 미술을 위하여서 그 그림들을 붙인 것은 아니로되 그 그림을 보는 자녀들에게는 간접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생각이 나게 한다. 자기는 그림을 위함이 아니요, 거의 거린(거기 그린) 예수의 화상을 위함이언마는 그것을 보는 자녀들은 그와 반대로 거기 그린 예수보다 그림 그 물건을 재미있게 본다. 어떻게 저렇게 정묘하게 그렸는고.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드러나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괴로워하는 빛이 나도록, 풀은 꼭 풀과 같고, 꽃은 꼭 꽃과 같게 어떻게 저렇게 정묘하게 그렸는고 하는 것이 그의 자녀들에게는 더욱 재미가 있었다. 이것은 김장로는 모르는 재미요, 그의 자녀들만 꼭 아는 재미라.
김장로는 자기의 방의 신식이요 화려한 것을 자랑하고 만족하는 듯이 한번 방 안을 둘러보더니, 목사와 형식에게 의자를 권한다. 가운데 둥근 테이블을 놓고 세 사람은 솥귀같이 둘러앉았다. 형식은 담배가 먹고 싶건마는 참았다. 그러고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저녁 서늘한 바람이 하얀 레이스 문장을 가만가만히 흔들고 그러할 때마다 바로 창 밑에 놓인 화분의 월계의 연한 잎새가 한들한들한다. 형식은 장차 나올 담화를 생각하매 자연히 가슴이 자주 뛴다. 그러나 무슨 말이 나오든지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할 것 같다. 아까 우선이가 말하던 대로 하리라 하였다. 아직도 풍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린다. 우선(형식)은 기뻤다. 어서 말을 시작하였으면 좋겠다 하고 목사와 장로의 입을 보았다. 목사가,
“아까 형식 씨를 보고 그 말씀을 하였지요. (하니깐 대강 승낙을 하시는 모양인데) 이제는 직접으로 말씀을 하시지요” 하고 형식을 본다. 장로는,
“녜, 감사하외다. 내 딸자식이 변변치 못하지마는 만일 버리지 아니시면…….”
“허허” 하고 목사가, “그것은 장로께서 과히 겸사시오마는 두 분이 실로 합당하지요” 하고 혼자 기뻐한다. 장로는,
“만일 마음에 없으시면 억지로 권하는 것이 아니외다마는 형식 씨를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외다.”
형식은 아까 모양으로 못난이를 부리지 아니하리라 하여 얼른,
“감히 무어라고 말씀하오리까마는 제가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얼굴을 붉어졌다. 장로는 만족하여 하는 듯이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대며,
“그야말로 너무 겸사외다. 그러면 승낙을 하시는구려!” 하고 한번 힘을 주어 형식을 훑어본다. 형식은 문득 고개를 수그렸다가 아까 우선의 ‘못생겼다’는 말을 생각하여 번적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낯빛을 엄숙하게 하였다. (그러나) 암만해도 ‘녜’ 하는 대답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속으로 괴로워한다. 목사가,
“자 얼른 말씀을 하시오” 하는 뒤를 대어 장로가,
“그렇지요. 주저할 것이 있어요.”
형식은 있는 힘을 다하여,
“녜” 하였다. 그러고는 혼자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개를 돌렸다.
“승낙하셔요?” 하고 장로가 다짐을 받는 듯이 몸을 앞으로 숙인다. 형식은 우선의 쾌활한 것을 흉내내어,
“녜, 명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힘드는 일을 마친 듯이 휘 하고 숨을 내어쉬었다. 과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하여 마음이 가뜬하였다. 그러고 새로운 기쁨이 가슴에 차고 김장로의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 새로 정답게 되는 듯하였다. 형식은 꿈속 같았다.
“어, 참 기쁜 일이오” 하고 목사가 마음이 놓이는 것같이 몸을 한번 흔든다.
“참 어떻게 기쁜지 모르겠소. 그러면 내 아내를 오래서 아주 말을 맺읍시다” 하고 목사의 뜻을 묻는 듯,
“그러시오. 또 지금 혼인은 당자의 허락도 들어야 하니까 선형도 오라고” 하고 목사도 자기 딴에 구습을 버리고 신사상을 좇거니 한다.
장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친다. 그 계집아이가 나온다.
“얘, 가서 마님께 작은아씨 데리고 오십소사고…….”
계집 하인도 이 일의 눈치를 아는지 슬적 형식을 보더니 생끗 웃고 나간다. 세 사람은 말없이 앉았다. 그러나 그네의 눈에 나뜨는 웃음은 그네의 마음의 즐거움을 말하였다. 형식은 이제 선형을 만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첫번 선형을 만날 적과 일전 영어를 가르치던 때에 하던 생각을 생각하였다. 형식의 머리는 마치 술취한 것 같았다. 전신이 아프도록 기쁨을 깨달았다.
부인이 선형을 뒤세우고 들어온다. 형식은 의자에서 일어나 부인께 인사하였다. 부인도 웃으며 답례하였다. 선형은 부인의 뒤에 숨어 선 대로 목사에게 예하고 다음에 형식에게 예하였다. 선형의 얼굴도 붉거니와 형식의 얼굴도 붉었다. 형식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씻었다. 부인이 장로의 곁에 앉고 선형은 부인과 목사의 새에 앉았다. 형식은 바로 부인과 정면하여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