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101장~1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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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 떠난다고 하였으나 병욱의 자친의 반대로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되었다. 만류하는 그 자친의 말은 이러하였다.

“일년 동안이나 그립게 지내다가 만났는데 한 달이 못 되어서 간다고 그러느냐. 너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아니한 게로구나. 저 무명밭에 너 줄 양으로 심은 참외와 수박 다 따먹고 가거라.”

이 말에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은 병욱이가 영채더러,

“어떠니, 어머님의 정이?” 하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영채도 부친의 생각이 나서 소매로 눈을 씻었다.

날마다 낮밥때가 지나면 병욱과 영채는 집에서 한 삼 마장 되는 양지편 무명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가지고 밭모퉁이에 가지런히 앉아서 여러 가지로 꿈 같은 장래를 말하면서 맛나게 먹었다. 어떤 때에는 병국의 부인도 같이 나와서 삼인이 정좌(鼎坐)하여 해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일도 있다. 마침 그 무명밭이 길체에 있으므로 그 곁으로 다니는 사람도 없이 아주 고요하다. 하루는 병국의 부인이,

“아버님께서는 목화에 해롭다고 참외나 수박은 일절 넣지 말라는 것을 어머님께서 기어이 넣어야 된다고 하셔서 나와 둘이서 이 참외와 수박을 심었지요” 하였다.

병욱은 밭고랑으로 거닐면서 아름답게 매어달린 참외와 수박을 한바탕 시찰하더니, 그 중에서 얼룩얼룩한 참외를 하나 따가지고 나오면서,

“이놈은 어째서 이렇게 얼룩얼룩해요? 어째서 어떤 놈은 꺼멓고, 어떤 놈은 희고, 어떤 놈은 이렇게 얼룩얼룩할까. 암만 다니면서 보아도 꼭 같은 놈은 하나도 없으니…….”

“다 같으면 재미가 있겠어요. 사람도 그렇지” 하고 영채가 웃는다.

“아무려나 자연(自然)이란 참 재미있어요. 같은 흙 속에서 별의별 형형색색의 풀이 나고 나무가 나고 꽃이 피고……” 하고 지금 따온 참외를 코에 대고 킁킁 맡아 보며,

“이것도 흙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지.”

“사람도 처음에는 흙으로 빚었다고 하지 아니해요” 하고 병국의 부인,

“참 그 말이 옳아. 만물이 다 흙에서 나왔으니까…… 과연 땅이 만물의 어머니여. 만물을 낳아 주구 안아 주고…… 쌀이라든지 물이라든지 이 참외라든지. 이것은 말하면 젖이지…… 어머니의 젖이지” 하고 사랑스러운 듯이 그 참외를 어루만지다가 사방을 휘 돌아보며, “어때요, 즐겁지 않아요. 하늘은 말갛지, 햇빛은 따뜻하지, 산은 퍼렇지, 저렇게 시냇물은 흐르지, 그러고 저 풀들은 아주 기운 있게 자라지. 그런데 우리들은 그 속에 앉았구려. 에구 좋아” 하고 춤을 추면서 웃는다.

영채가 동그란 돌을 들어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시골서 자라나서 그런지 모르지마는 암만해도 이렇게 풀 있고 나무 있는 시골이 좋아요. 서울이나 평양 같은 도회에 있으려면 어째 옥 속에 있는 것 같애.”

“그렇고말고. 이렇게 넓은 자연 속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온통 자유롭고 한가하고 하지마는 도회에 있으면…… 에구, 그 먼지, 그 구린내 나는 공기, 게다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구린내가 나게 되지” 하고 방금 구린내가 나는 듯이 얼굴을 징그리니,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넓고 깨끗하지 않아요” 하고 후―후― 깊이 숨을 들이쉰다. 과연 공기는 맑다. 풀의 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할 듯이 이따금 후끈후끈 돌아온다.

이렇게 즐겁고 이야기하고 놀다가 수박을 하나씩 따들고 돌아온다. 그것은 집에 있는 부모와 다른 가족에게 드리기 위함이라.

병욱은 수박의 뚜께를 떼고 거기다가 꿀을 넣어 두었다가 아랫목에 누운 조모께 드린다. 조모는 어린애 모양으로 쪼그라진 볼에 웃음을 띠며 맛나는 듯이 그것을 먹는다. 병욱은 기쁘게 보고 앉았다가 이따금 숟가락으로 수박 속을 파드린다. 거의 다 먹고 나서는 으레 병욱을 보고 웃으며, “에그, 자라기도 자랐다. 저렇게 큰 것이 왜 시집가기를 싫어하는고” 하고는 앉은 대로 몸을 한 걸음 끌어다가 병욱의 등을 두드리고, “이제 네가 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까 보다” 하고 한숨을 쉰다. 그때마다 병욱은,

“왜 그래요. 할머니께서는 아흔까지는 걱정 없어요” 하고 크게 소리를 치면, 겨우 들리는 듯이 흥흥 하며,

“아흔까지!” 하고 만다. 지금 일흔셋이니까 아흔까지면 아직도 십칠 년이 있다.

‘내가 그렇게 살까?’ 하는 듯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듯도 하다.

이따금 손녀더러 바이올린을 해보라고 한다. 병욱은 시키는 대로 바이올린을 타면서 곁에 앉은 영채더러,

“듣기는 네가 해라. 할머니(는) 눈으로 들으시니까” 하고 둘이서 웃으면 조모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면서 자기도 웃는다. 그러고는 병욱이가 고개를 기울이고 활을 당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가는 오 분이 못 하여서 대개는 껌벅껌벅 존다. 그러면 젊은 두 처녀는 마주보고 웃으며 자기네끼리만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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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은 멀리로 가려는 딸을 위하여서 여러 가지로 맛나는 것을 시킨다. 손수 쌀을 담가서 떡도 만들고 닭도 잡아 주고…… 그러고는 딸들이 맛나게 먹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앉았다. 부친도 딸을 위해서 쇠갈비 한 짝을 사오고 병국도 성내에 들어가서 과자와 귤과 사이다 같은 것을 사온다. 그러고 병욱과 영채는 무명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다가 혹은 꿀을 두고, 혹은 사탕을 두어서, 혹은 하룻밤을 재우기도 하고, 혹은 우물에 넣어 식히기도 하여 내어놓는다. 한번은 영채가 홀로 꿀 버무린 수박을 부친께 드렸다. 부친은 좀 의외인 듯이 그것을 받아서 숟가락으로 맛나게 떠넣으며,

“응, 고맙다” 하였다. 영채는 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한번은 병욱이가 병국에게 수박을 주며 농담같이,

“이것은 영채가 오빠 드린다고 특별히 만든 것이야요” 하였다. 곁에 섰던 영채는 얼굴을 붉혔다.

병국의 부인은 두 누이가 떠나는 것을 진정으로 섭섭하여 한다. 또 새로 정들인 영채를 한 달이 못 하여서 작별하게 되는 것도 슬펐다. 자기도 누이들과 같이 훨훨 서울이나 동경으로 가보고도 싶었으나 불가능한 줄을 안다. 그래서 미상불 부러운 생각도 있지마는, 또 그는 자기의 분정에 만족할 줄 아는 수양이 있으므로 누이들은 저러할 사람이요, 나는 이러할 사람이라고 곧 단념을 하므로 그렇게 괴로워하지도 아니한다.

이렇게 매우 분주한 연락 속에 긴 듯하던 일주일도 꿈같이 지나고 말았다. 오늘은 떠난다 하여 짐을 묶으며 옷을 갈아입으며 할 때에는 보내는 사람은 보내기가 싫고 가는 사람은 가기가 싫다. 아랫목에 누워 있는 조모라든지, 나는 모른다 하는 듯이 담배만 피우는 부친이라든지, 고추장이며 암치 같은 반찬을 싸주는 모친이라든지, 시어머니를 도우며 말없이 있는 형수라든지, 두루마기를 입고 (파나마를 젖혀 쓴 대로 대소 짐을 묶고) 분주하는 병국이라든지,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며 활발하게 웃고 다니는 병욱이라든지, 또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듯이 우두커니 섰는 영채라든지…… 누구누구를 물론하고 가슴 저 구석에는 말할 수 없는 적막과 슬픔이 있다.

병욱과 영채는 조모, 부친, 모친의 순서로 하직하는 절을 하였다. 조모는 또 한번, “이제는 다시 못 볼 것 같다” 하고 희미한 눈에 눈물이 고이며 병국에게 붙들려 대문까지 나왔다. 부친은 절을 받고 “응” 할 뿐이요 다른 말이 없고, 모친은,

“가서 공부들 잘해 가지고 오너라. 겨울방학에도 오려무나. 영채도 내년에 오너라” 하고 영채의 적삼 등을 펴주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잘 가거라’ ‘잘 있으오’ 하는 인사를 필하고 일행이 동구를 나설 때는 정히 오후 일시경, 내리쬐는 팔월 볕이 모닥불을 퍼붓는 듯하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미진한 정담을 말하면서 간다. 혹 한데 모여서기도 하고, 혹 두 사람씩 한떼가 되어 십여 보를 떨어지기도 하고, 혹 한 사람이 앞서 가다가 길가에 풀잎을 뜯으면서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흔히 모친과 병욱이가 한떼가 되고, 병국의 부인과 영채가 한떼가 되고, 부친과 병국은 대개 말없이 따로 떨어져서 간다. 짐 진 총각은 이따금 작심대로 지게를 버티고 서서 뒤에 오는 일행을 기다리더니 얼른 정거장에 가서 지게를 벗어 놓고 쉬고 싶은 생각이 나서 먼저 달아난다. 사람 아니 탄 마차와 인력거가 떨거덕떨거덕 소리를 내며 마주 오기도 하고 앞서 지나가기도 한다. 일행의 얼굴을 더위로 뻘겋게 데이고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떨어진다. 남자들은 부채를 부치고 여자들은 수건으로 땀을 씻는다.

언제까지 가도 끝이 없을 듯하던 이야기도 거의 다 없어지고 이제는 말없이 탄탄한 신작로로 태양을 마주보며 걸어나간다. 길가 원두막에서 수심가, 난봉가가 졸린 듯이 울려 나오더니,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고요하게 되며, 원두막 문으로 중대가리며, 감투 쓴 대가리, 수건 쓴 대가리, 크다란 총각의 대가리가 쑥쑥 나오며 무어라고 쑤군쑤군하다가 일행이 수십 보를 지나가자, 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일행은 그저 말없이 정거장을 향하고 간다.

영채는 좌우에 새로 이삭 나온 조밭을 보며 지나간 일 삭간의 일을 생각한다. 몸은 비록 가만히 있었으나 정신상으로는 실로 큰 변동이 있었다. 전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하리만한 큰 변동이 있었다. 죽으러 가노라고 가던 길에 우연히 병욱을 만난 일과, 병욱의 집에서 칠팔 년 만에 비로소 가정의 즐거움을 다시 본 것과, 자기가 지금껏 괴로워하던 옥 같은 세상 밖에도 넓고 자유롭고 즐거운 세상이 있음을 깨달은 것과, 또 병국에게 대하여 불타는 듯하는 사랑을 느낀 것을 두루 생각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이제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러 감을 생각하매, 일신의 운명의 뜻밖에 변하여 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 일행은 정거장에 다다라 대합실의 걸상 하나를 점령하고 남은 시간 이십 분에 다 하지 못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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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과 영채는 차에 올라서 차창으로 전송하는 일행을 내다본다. 병국도 사리원까지 갈 일이 있다 하여 같이 올랐으나, 자기는 오늘 저녁에 돌아올 길인 고로 걸상에 앉은 대로 바깥을 내다보지도 아니한다. 모친은 차창에 붙어서,

“얘, 조심해 가거라“를 두 번이나 하고,

“얘, 한 달에 두 번씩은 꼭꼭 편지를 해라“를 서너 번이나 하였다. 병국의 부인은 바로 시어머니의 곁에 붙어 서서 병국(병욱)과 영채를 번갈아 본다. 더위에 붉게 된 그 조고마하고 말끔한 얼굴이 아름답게 보인다. 떨렁떨렁 하는 종소리가 나고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날 적에 병국의 부인은 차창을 짚은 영채의 손을 꼭 누르며,

“가거든 편지 주셔요” 한다. 그 눈에는 눈물이 있다. 그것을 마주보는 영채의 눈에도 눈물이 있다. 헌병들이 흘끗흘끗 이 광경을 보고 벤또 파는 아이의 외치는 소리가 없어지자, 고동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모친은 또 한번,

“부디 조심해 가거라“를 부르며 눈을 한번 끔벅 한다. 병욱과 영채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수건을 두른다. 모친도 수건을 두르건마는 병국의 부인은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한다. 부친도 한번 팔을 들어 두르더니 돌아서 나간다. 덜컥 소리가 나고, 차가 휘돌더니 정거장에 선 사람 그림자가 아주 아니 보이게 된다. 두 사람은 그래도 두어 번 더 수건을 내어두르고는 도로 제자리에 앉는다. 앉아서 한참은 멍멍하니 피차에 말이 없다. 차의 속력이 점점 빨라지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병국은 맞은편 줄 걸상에 모으로 앉아서 두 사람을 건너다보며 부채질을 한다. 차 속에는 선교사인 듯한 늙은 서양 사람 하나와 금줄 두 줄 두른 뚱뚱한 관리 하나와, 그 밖에 일복 입은 사람 이삼 인뿐이다. 그네들은 모두 다 흰옷 입은 이등객을 이상히 여기는 듯이 시선을 이리로 돌린다. 병국은 건너편에 앉은 누이에게 말이 들리게 하기 위하여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나는 네 덕분에 (이등을) 이등을 처음 탄다” 하고 웃는다.

“그렇게 이등이 부러우시거든 더러 타십시오그려” 하고 병욱도 웃는다.

“우리와 같은 아무것도 아니 하는 사람들이 삼등도 아까운데 이등을 어떻게 타니? 죄송스러워서…….”

“그러면 왜 이등표를 사주셨어요. 저 짐차에나 처실어 주시지” 하고 병욱은 성을 내는 듯이 시치미뗀다. 영채는 우스워서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남매간에 어린애 싸움같이 농담을 하다가 병국이가,

“영채 씨도 명년에 귀국하시겠소.”

“녜, 제야 알겠습니까.”

“왜, 나와 같이 오지. 그럼 나 혼자 올까. 형제가 같이 다녀야지” 하고 병욱이가 영채를 보다가 병국을 본다. 영채는,

“그럼 언니께서 데려다 주신다면 오지요” 하고 웃는다. 병욱은 어리광하는 듯이 병국을 보고 몸을 흔들며,

“오빠, 명년에 우리 둘이 같이 와요” 하고 묻는 말인지 대답하는 말인지 분명치 아니한 말을 한다. 병국은,

“그러면 얘하고 같이 오시지요. 댁이 없으시다니 내 집을 집으로 알으시고…….”

“녜, 감사합니다” 하고 영채가 고개를 숙인다.

이러한 말을 하는 동안에 차가 벌써 걸음을 멈추며, “사리잉, 사리잉!” 하는 역부의 소리가 들린다. 병국은 모자를 벗고, “그러면 잘들 가거라” 하고 뛰어서 차를 내린다. 내려서 두 사람이 앉은 창 밑에 와서 선다. 두 사람도 내다본다. 몇 사람이 뛰어내리고 뛰어오르기가 바쁘게 또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난다. 차가 움직인다. 병국은 모자를 높이 든다. 두 사람도 손을 내어두르며 고개를 숙인다. 병국은 차차 작아 가는 두 팔과 머리를 보고, 두 사람은 차차 작아 가는 모자를 두르는 병국을 보았다.

영채는 왜 그런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그래서 정신이 황홀하여지는 듯하였다. 병욱은 슬적슬적 영채의 낯빛을 살피더니 영채를 웃기려고,

“얘, 너 그때에 눈에 석탄재가 들어가서 울던 생각 나니?” 하고 자기가 먼저 웃는다. 영채도 웃는다. 병욱은,

“석탄 가루 들어간 것이 그렇게 아프더냐?”

“누가 그것이 아파서 울었나. 자연히 화가 나서 울었지” 하고 그때 생각을 하여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웃는다.

“아무려나 그때에 네가 우는 얼굴이 어떻게 예뻐 보이든지…… 내가 남자면 당장에 홀리겠더라.”

“에그, 그런 소리만 하시지!” 하고 영채가 손으로 병욱의 무릎을 때린다.

“얘, 잠깐 서울 들러 가자.”

“에그, 싫여요. 누가 보면 어쩌나.”

“서울서는 지금 네가 죽은 줄 알겠구나. 그 이형식 씬가 한 이도.”

“아마 그럴 테지요. 실상 죽었으니깐.”

“누가? 네가? 왜?”

“그때, 나는 벌써 죽지 않았어요? 언니께서 얼굴 씻어 주실 때에.”

“그러고 부활을 했구나.”

“암, 부활이지. 참, 언니 아니더면 꼭 죽었어요. 벌써 다 썩어졌겠네.”

“썩도록 깃허(붙어) 있나.”

“그러면 어쩌고?”

“고기가 다 뜯어먹고 말지.”

“그렇게 큰 것을 고기가 다 어떻게 먹어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병욱은,

“얘, 네가 처음 나를 볼 때에 어떻게 생각했니?”

“웬 일본 여자가 이렇게 조선말을 잘하고 친절하게 하는고, 했지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퍽 활발한 여자다 했지요.”

“그러고 너 그때에 먹은 것이 그게 무엇인지 아니?”

“나 몰라.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라서 언니 잡수시는 것을 가만히 보았지요.”

“내 아예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은 서양 음식인데 샌드위치라는 것이어…… 꽤 맛나지?”

“응” 하고 고개를 까딱 하며 “샌드위치” 하고 발음이 분명하게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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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남대문에 닿았다. 아직 다 어둡지는 아니하였으나 사방에 반작반작 전기등이 켜졌다. 전차 소리, 인력거 소리, 이 모든 소리를 합한 ‘도회의 소리’와 넓은 플랫폼에 울리는 나막신 소리가 합하여 지금까지 고요한 자연 속에 있던 사람의 귀에는 퍽 소요하게 들린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에 그 나라가 잘된다. 수레바퀴 소리, 증기와 전기기관 소리, (쇠마차 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 실로 현대의 문명은 소리의 문명이라. 서울도 아직 소리가 부족하다. 종로나 남대문통에 서서 서로 말소리가 아니 들리리만큼 문명의 소리가 요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다. 서울 장안에 사는 삼십여 만 흰옷 입은 사람들은 이 소리의 뜻을 모른다. 또 이 소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네는 이 소리를 들을 줄을 알고, 듣고 기뻐할 줄을 알고, 마침내 제 손으로 이 소리를 내도록 되어야 한다. 저 플랫폼에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이 분주한 뜻을 아는지, 왜 저 전등이 저렇게 많이 켜지며, 왜 저 전보 기계와 전화 기계가 저렇게 불분주야하고 때각거리며, 왜 저 흉물스러운 기차와 전차가 주야로 달아나는지…… 이 뜻을 아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가.

이렇게 북적북적하는 속에 영채는 행여나 누가 자기의 얼굴을 볼까 하여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병욱은 혹 자기의 동창 친구나 만날까 하고 플랫폼에 내려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도로 차실로 들어오려 할 적에 누가 어깨를 치며,

“병욱 언니 아니야요?” 한다.

병욱은 놀라 돌아서며 자기보다 이태를 떨어졌던 동창생을 보았다.

“에그, 얼마 만이어!”

“그런데 어디로 가오?”

“지금 동경으로 가는 길인데…….”

“왜, 어느새에…… 여보, 그런데 좀 만나 보고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정하오” 하고 썩 돌아서더니, “아무려나 내립시오. 우리집으로 갑시다” 한다.

“아니오. 동행이 있어서…… 그런데 누구 작별 나왔소?”

“응, 아니, 언니 모르셔요?”

“무엇을?”

“에그, 저런! 저 선형이 알지요. 선형이가 오늘 미국 떠난다오.”

“선형이가 미국?” 하고 놀란다. 그 여학생은 저편 이등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선 것을 가리키며,

“저기 탔는데…… 이번에 혼인해 가지고 양주가 미국 공부하러 간다오. 잘들 한다. 다 미국을 가느니 일본을 가느니 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썩는구먼!”

병욱은 여학생을 따라 선형이가 탔다는 차 앞에까지 갔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서 곁에 갈 수가 없다. 선형은 하얀 양복에 맨머리로 창 밑에 서서 전송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대답하고, 그 곁 창에는 어떤 양복 입은 젊은 신사가 그 역시 연해 고개를 숙여 가며 무슨 인사를 한다. 전송인은 대개 두 패로 갈려서 한편에는 여자만 모이고, 한편에는 남자만 모여섰다. 그 남자들은 모두 다 서울 장안의 문명하였다는 계급이다. 병욱은 한참이나 그것을 보고 섰다가 중로에서 선형을 찾아볼 양으로 그 차실 바로 뒤에 달린 자기의 차실에 올라왔다. 영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아까 탔던 사람은 거의 다 내리고 새로운 승객이 거의 만원이라 하리만큼 많이 올랐다. 어떤 사람은 웃옷을 벗어 걸고, 어떤 사람은 창에 붙어서 작별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벌써 신문을 들고 앉았다. 그러나 흰옷 입은 사람은 병욱과 영채 둘뿐이다. 병욱은 자리에 앉아서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영채더러,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앉었니?”

“어째 남대문이라는 소리에 마음이 이상하게 혼란하여집니다그려. 어서 차가 떠났으면 좋겠다” 할 때에 벌써 종 흔드는 소리가 나고, “사요나라, 고키겐요우” 하는 소리가 소낙비같이 들리더니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어디서, “만세,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인다. 또 한번,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의(사람들이) 두 사람의 창 밖으로 얼른한다. 그것은 모시 두루마기에 파나마 쓴 패였다. 병욱은 아까 선형의 곁에 있던 사람이 형식인 것과, 형식이가 선형의 지아빈 줄도 짐작하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영채는 형식이란 소리를 듣고 문득 가슴이 덜렁 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아무쪼록 형식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방금 같은 기차에 형식이가 탄 것을 생각하매 알 수 없는 눈물이 자연히 떨어진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쥐며,

“얘, 울지 말아라. 울기는 왜 우느냐.”

“모르겠어요” 하고 눈물을 씻으며 지어서 웃는다.

용산을 지난 뒤에 병욱은 선형을 찾아갔다. 선형은 병욱의 손을 잡으며,

“이게 웬일이오?”

“동경으로 가는 길이외다. 그런데 미국으로 가신다고요.”

“녜, 편지를 하여 드릴 것인데 동경 계신지, 어디 계신지 계신 데를 알아야지요.”

“나는 아까 남대문에서 우연히 경애 씨를 만나서 그래서 이 차에 타시는 줄을 알았지” 하고 마주앉은 신사에게 인사를 한다. 신사가 답례하면서 앉기를 권한다. 십여 년 영채로 하여금 고절을 지키게 한 형식이란 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기회 있는 대로 형식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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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혼자 앉아서 생각한다. 첫째, 형식이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건대, 어디 멀리로 가는 것인 듯하다. 나는 그가 이 차에 탄 줄을 알건마는 그는 내가 여기 있는 줄을 모르렷다. 그러고 또 한번 칠팔 년 지나온 생각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한번 쑥 나온다. 팔자 좋은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적되, 슬픈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는 조고마한 기회만 있으면 그 슬픈 과거가 회상이 되는 것이라. 영채는 지금까지에 몇십 번 몇백 번이나 이 슬픈 과거를 회상하였으리요. 하도 여러 번 회상을 하므로 이제는 그 과거가 마치 일편의 소설과 같이 순서와 맥락(脈絡)이 정연하게 되어 어느 끝이나 한끝을 당기면 전체가 실 풀리는 듯이 술술 풀려 나오게 되었다. 칠팔 년간을 하루같이 일념에 형식을 그리고 사모하다가 마침내 형식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려 한 것을 생각하매 형식의 생각이 더욱 새로워지고 정다워진다. 영채는 속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 하였다. 그렇게 생각할수록에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진다. 죽은 줄 알았던 나를 보면, 형식도 응당 반가워하렷다. 만나서 속에 품었던 말이나 실컷 하여도 속이 시원하여질 것 같다. 내가 왜 그때에 형식을 찾아가서 ‘나는 지금토록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소’ 하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였던고. ‘나를 사랑해 줄 터이요, 아니 할 테요’ 하고 저편의 뜻을 아니 물어 보았던고. 이제 만나면 서슴지 않고 물어 보리라.

영채는 당장이라도 형식의 탄 차실에 뛰어 건너가고 싶다. 영채의 가슴에는 정히 불길이 일어난다. 그러나 ‘언니께 의논해 보고’ 하고 꿀꺽 참는다.

이때에 차가 수원역에 다다랐다. 바깥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병욱이 선형을 데리고 돌아와서 자기의 곁에 앉히며,

“영채야, 이이는 김선형 씨라는 인데 내 동창이다. 지금 미국 가시는 길이구” 하고 그 다음에는 선형을 향하여, “이애는 박영채인데 내 동생이오” 하고 소개를 한다. 소개를 받은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숙인다. 선형은 박영채가 어떻게 동생인가 한다. 병욱은 영채와 선형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의 얼굴과 운명을 비교해 본다. 영채도 선형이가 형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고, 선형도 무론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칠팔 년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버리려 한 사람인 줄은 알 이치가 없다. 선형은 다만 형식이가 일찍 계월향이라는 계집과 추한 관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니, 이 박영채가 그 계월향인 줄은 무론 알 리가 없다. 세 처녀 사이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서로 잘 공부를 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장차 힘을 합하여 조선 여자계를 계발할 것과, 공부를 잘하려면 미국을 가거나 일본에 유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또 영어와 독일어를 잘 배워야 할 것과, 그 다음에는 병욱과 영채는 음악을 배울 터인데 선형은 아직 확실한 작정은 없으나 사범학교에 입학하려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로 각각 크게 성공하기를 빌었다.

차실 내의 모든 사람의 눈은 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세 조선 여자에게로 모였다.

선형이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며(돌아오매), 형식은 선형의 자리에 편 담요를 바로잡아 주며,

“그래 그 동행이 누굽데까?”

“박영채라는 인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병욱 씨가 자기 동생이라고 그럽데다.”

형식은 숨이 막히고 몸이 떨리도록 놀랐다. 그래서 눈이 둥그래지며,

“에! (누,) 누구요?” 하고 말이 다 굳어진다. 선형은 웬셈을 모르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보면서,

“박영채라고 그래요.”

“박영채, 박영채!” 하고 한참은 말을 못 한다. 그 뒤에 앉았던 우선도 벌떡 일어나며,

“응, 누구? 박영채?”

세 사람은 한참이나 벙어리와 같이 되었다. 우선이가 형식의 곁에 와 앉으며,

“이게 무슨 일이어! 그러면 살아 있네그려! 동성동명이란 말인가.”

형식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더니,

“아무려나, 이런 기쁜 일이 없네” 하기는 하면서도 속에는 여러 가지로 고통이 일어난다. 영채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가 죽고 산 것도 알아보지 아니하고 뛰어와서, 그 이튿날 새로 약혼을 하고, 그 뒤로는 영채는 잊어버리고 지내 온 자기는 마치 큰 죄를 범한 것 같다. 형식은 과연 무정하였다. 형식은 마땅히 그때 우선에게서 꾼 돈 오 원을 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야 할 것이다. 가서 시체를 찾아 힘 및는 데까지는 후하게 장례를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새로 혼인을 하더라도 인정상 다만 일년이라도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칠팔 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자기를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 영채를 위하여 마땅히 아프게 울어서 조상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였는가.

영채가 세상에 없으매 잊어버리려 하던 자기의 죄악은 영채가 살아 있단 말을 들으매 칼날같이 날카롭게 형식의 가슴을 쑤신다. 형식은 이빨을 악물고 흑흑 한다. 곁에 선형이가 앉은 것도 잊어버린 듯하다.

우선은 벌떡 일어나더니 저편으로 간다. 영채의 진부(眞否)를 탐험코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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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이가 일어선 뒤에 선형은,

“웬일입니까. 박영채가 어떤 사람이야요?” 한다. 그러나 대답이 없으므로,

“왜 박영채 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나요.” 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선형은 형식의 숙인 머리를 보고 앉았더니 혼자말 모양으로,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잠잠한다.

얼마 있다가 형식은 고개를 들더니,

“내가 잘못하였어요. 내가 죄인이외다. 큰 죄인이외다” 하다가 말이 막힌다. 선형은 더욱 의아하여 눈띄가 자주 돌아간다. 형식은 말을 이어,

“벌써 말씀을 드려야 할 것인데 인해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없다는 것보다 내 마음이 약해서 지금껏 잠자코 있었어요. 박영채는 내 은인의 딸이외다. 어려서 그 부친과 오라비, 두 사람은 애매한 죄로 옥중에서 죽고, 영채는 그 부친을 구할 양으로 남에게 속아서 몸을 팔아 기생이 (되었다가……” 할 적에 선형은, “에! 기생이) 되어요?” 하고 놀란다. 계월향이란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녜, 기생이 되었어요. 그로부터 칠 년간”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 주저하다가, “나를 위하여서 정절을 지켜 왔어요. 무론 나도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그도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나 있는 데를 알고 찾아왔습데다” 하고는 그 후에는 어떻게 말을 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아니 난다. 선형은 아까 본 영채를 생각하고, 그러면 그가 기생이 되어 칠 년간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 사람인가 한다. 자기 생각에 계월향이라 하면 아주 요염(妖艶)하고 음탕한 계집으로 알았더니 이제 본즉 영채는 자기와 다름없는 얌전한 처녀로다. 그러면 어찌하여 형식이가 영채를 버렸는가 하여,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식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자살을 한다고 유서를 써놓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나도 곧 따라 내려갔지요. 했더니 부지거처지요. 그래서 자기 말과 같이 대동강에 빠져 죽은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와 같은 차에 있소그려” 하고 슬픔을 표하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그러면 접때 평양 가셨던 일이 그 일이야요?” 하고 선형은 정면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눈이 자기를 위협하는 듯하여 눈을 피하면서, “녜” 하였다. 그러고 보면 영채가 죽었다 하는 날은 바로 형식과 자기가 혼인을 맺던 날이라.

선형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오던 의심――즉 형식은 계월향이라는 기생에게 미쳤더라는 의심은 풀렸으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괴로움이 가슴을 내려누름을 깨달았다. 자기 몸도 무슨 죄에 빠진 것 같고 자기의 앞에는 알 수 없는 어려운 일과 괴로운 일이 가로막힌 것 같다.

이때에 우선이가 엄숙한 얼굴을 가지고 돌아보며 일본말로,

“다시카다요(확실해)” 하고 형식의 곁에 앉으며, “참 희한한 일일세.”

“그래, 가서 말해 보았나?”

“아니, 문에서 앉은 것이 보이데. 아까 여기 왔던 이하고 무슨 말을 하는데……” 하다가 선형이 곁에 앉은 것을 보고 말 아니 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는 듯이 말을 뚝 그쳤다가, “아무려나 잘되었네. 지금 그 여학생과 같이 동경으로 가는 모양이니까, 아마 공부하러 가는 게지.”

형식은 걸상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눈을 감는다.

영채는 선형의 돌아간 뒤에,

“언니, 웬일인지 나는 가슴이 몹시 설렙니다.”

“왜, 이형식 씨란 말을 듣고?”

“응, 여태껏 잊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잊은 것이 아니야요. 가슴속에 깊이깊이 숨어 있던 모양이야요. 그러다가 이형식 군 만세라는 소리에 갑자기 터져나온 것 같습니다. 아이구, 마음이 진정치 아니해서 못 견디겠소.”

“아니 그렇겠니. 어쨌든 칠팔 년 동안이나 밤낮 생각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떻게 쉽게 잊겠니? 이제 얼마 지나면 잊을 테지마는…….”

“잊어야 할까요?”

“그럼 어찌하고?”

“안 잊으면 아니 될까요?”

병욱은 물끄러미 영채를 보더니 영채의 곁에 가 앉아서 한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형식 씨가 벌써 혼인을 하였다. 지금 동부인하고 미국 가는 길이란다.”

“에? 혼인?” 하고 영채는 병욱의 팔을 잡는다. 병욱은 위로하는 소리로,

“아까 여기 왔던 선형이라는 이가 그의 부인이란다.”

“그러면 그때에 벌써 약혼을 하였던가” 하고 지나간 일에 실망을 한다. 자기의 지나간 생활이 더욱 슬퍼지고 원통하여진다. 자기는 세상에 속아서 사나마나 한 생활을 해온 것 같고 지금껏 전력을 다하여 오던 것이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아서 실망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더구나 자기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형식을 생각하여 왔거늘 형식은 자기를 초개같이밖에 아니 여기는 것 같다.

“언니, 왜 그런지 원통한 생각이 나요.”

“그러나 장래가 있지 않냐” 하고 힘껏 영채를 안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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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즉시 영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전에 보았던 영채의 얼굴은 다 잊어버린 듯하여 꼭 한번 새로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꼭 죽은 줄 알았던 영채의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차마 영채를 보러 갈 용기가 아니 난다. 형식은 선형의 얼굴을 보았다. 선형은 무슨 실망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반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러다가 이따금 형식을 슬쩍 보고는 불쾌한 듯이 도로 눈을 감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기도 한다. 선형의 눈과 형식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형식의 몸에는 후끈후끈하는 기운이 돈다.

같은 차실에 있는 승객들은 대개 잠이 들었다. 형식도 뒤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무 생각도 아니 하리라 하는 듯이 한번 몸을 흔들고 두 손을 마주잡아 배 위에 놓았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은 형식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폭풍에 물결치는 바다와 같았다.

영채는 꼭 죽었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더라도 자기가 몰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선형과 약혼이 되기 전에 만났어야 할 것이다. 약혼이 성립되고 미국을 향하고 떠나는 길에 만나게 한 것은 진실로 조물의 장난이다. 형식은 결코 영채를 버리려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영채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겸하여 다시 영채를 만날 때에는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유연히 솟아나서 속으로 영채와 혼인할 일과 혼인한 후에 즐거운 생활을 할 것과 아름다운 자녀를 낳아 이상적으로 기를 것까지 생각하였고, 또 영채가 기생인 줄을 안 뒤에는 돈 천 원을 얻지 못하여 종일 번민한 일도 있었다. 만일 영채가 평양에만 가지 아니하였던들, 죽으러 가노라는 유언만 없었던들 자기는 마땅히 영채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은사(恩師)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고 칠팔 년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온 영채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였을 것이다.

형식은 또 영채와 선형을 비교하여 보았다. 선형은 형식이가 일생의 처음 접한 젊은 여자요, 또 선형의 자태는 누가 보아도 황홀할 만하므로 형식에게 극히 깊고 강한 인상(印象)을 주었다. 그래서 처음 젊은 여자를 접하여 보는 젊은 남자가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형식은 선형을 세상에 다시 없는 여자로 여겼다. 다만 그 외모가 아름다울 뿐더러 그 정신까지도 외모와 같이 아름다우리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대하여 본 첫날에 선형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아름다운 덕을 붙였다. 선형은 형식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완전하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얻은 그날 저녁에 다시 영채를 보았다. 영채의 외모도 물론 아름다웠다. 공평한 눈으로 보건대 영채의 얼굴이 차라리 선형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형을 천하 제일로 확신한 형식은 영채를 제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형은 부귀한 집 딸로서 완전한 교육을 받은 자요, 영채는 그 동안 어떻게 굴러다녔는지 모르는 계집이라. 이 모든 것이 합하여 형식에게는, 영채는 암만해도 선형과 평등으로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다만 선형은 자기의 힘에 미치지 못할 달 속에 계수나무 가지요, 영채는 자기가 꺾으려면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매화 가지였다. 그러므로 형식이가 제일로 생각한 선형을 버리고 제이로 생각하는 영채를 취하려 하였던 것이라. 그러다가 영채가 대동강에 빠지고, 게다가 김장로가 혼인을 청하매 형식은 별로 주저함도 없이 약혼을 허하였고 또 슬퍼함도 없이 영채를 잊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형식은 선형에게 대하여서나 영채에 대하여서나 아직 참된 사랑을 가져 보지 못하였다. 대개 형식의 사랑은 아직도 외모의 사랑이었다.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선형의 성격(性格)은 한 땀도 몰랐다. 선형이가 냉정한 이지적 인물(理智的 人物)인지 또는 열렬한 정적 인물인지, 그의 성벽이 어떠하며 기호(嗜好)가 어떠한지, 그의 장처(長處)가 무엇이며 단처(短處)가 무엇인지, 또는 그와 자기와 어떤 점에서 서로 일치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모순(矛盾)하는지, 따라서 그의 성격과 재능이 장차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목적(盲目的)으로 사랑한 것이라. 그의 사랑은 아직 진화(進化)를 지나지 못한 원시적(原始的) 사랑이었다. 마치 어린애끼리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요, 또는 아직 문명하지 못한 민족들이 다만 고운 얼굴만 보고 곧 사랑이 생기는 것과 같은 사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름이 있다 하면 문명치 못한 민족의 사랑은 곧 육욕(肉慾)을 의미하되 형식의 사랑에는 정신적 분자(精神的 分子)가 많았을 뿐이다. 그러니 형식은 다만 정신적 사랑이라는 이름만 알고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었다. 진정한 사랑은 피차에 정신적으로 서로 이해(理解)하는 데서 나오는 줄을 몰랐다. 형식의 사랑은 실로 낡은 시대, 자각 없는 시대에서 새 시대, 자각 있는 대로 옮아가려는 과도기(過渡期)의 청년――조선 청년――이 흔히 가지는 사랑이다. 자기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인 줄을 깨닫는다 하면 형식의 전도에는 대변동이 일어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는 형식에게는 지나간 한 달 동안에 행하여 온 일이 현미경으로 보는 것같이 분명히 떠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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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로 부부는 자기와 영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암만해도 신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번 자기가 영채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끝에 김장로가 웃으며,

“남자가 한두 번 그러기도 예사지” 하였다. 형식은 더 발명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자기의 인격을 신용하여 주지 않는 것을 얼마큼 불쾌하게 여겼다. 그 후부터 형식은 장로 부처를 대하면 한껏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장로 부처는 자기가 선형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자기를 지극히 품행이 방정하고 장래성이 많은 줄로 알았다가 기생과 가까이하며 기생을 따라 평양까지 갔단 말을 들으매 형식은 갑자기 신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 사건 하나로 자기의 가치를 정하려 하는 것이 불쾌하였다. 될 수만 있으면 형식과의 약혼을 파하겠으나 한번 약속한 것을 체면상 깨트릴 수가 없다. 만일 형식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선형의 팔자로다…… 형식의 보기에 (장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더구나 미국으로서 돌아온 하이칼라 청년 하나가 선형에게 마음을 두어 백방으로 운동한 것과, 교회에 어떤 유력한 사람이 사이에 나서서, 일변 형식을 헐어 그 약혼을 깨트리게 하고, 일변 그 청년의 재산 있는 것과, 영어 잘하는 것과, 미국 유학한 것을 칭찬하여 선형과의 혼인을 이루게 하려고 운동하던 줄을 안다. 그때에 장로 부처가 열에 여섯이나 그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과,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선형의 태도가 더욱 냉담하여지고 이따금 근심하는 빛까지도 있던 것을 안다. 그 중에도 장로의 부인은 웬일인지 형식에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이 나서 가장 미국서 온 청년과 혼인하기를 주창한 것과, 그러나 장로의 양반인 것과 장로인 체면이 마침내 이 일을 반대한 것을 안다.

거의 십여 일 동안이나 형식은 김장로의 집에서 미움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을 안다. 그때에 형식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연해 삼사 일간 일절 장로의 집에 가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집에 꽉 들어박혀서 분노함과 부끄러움으로 혼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형식이가, “오늘은 내가 먼저 약혼을 거절하고 말리다” 하고 옷을 입고 나가려 할 적에 선형이가 처음 찾아와서 은근하게,

“어디가 편치 아니하셔요?” 하고 그 뒤에는 순애가 과일 광주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마 병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위문을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선형은,

“어저께 여행권이 나왔어요” 하고 기뻐하는 빛조차 보였다. 형식은 그만 모든 분노가 다 풀리고,

“아니올시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때에 선형과 순애는 물끄러미 형식을 보았다. 선형도 무론 자기 집에 일어난 문제를 안다. 부모가 형식에게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안다. 자기도 기실 형식에게 대하여 좋은 감정을 아니 가졌다. 그러나 부모간에 형식을 미워하는 빛이 보이고, 형식도 그 눈치를 아는지 삼사 일 동안이나 꿈적하지 않는 것을 보매, 형식에게 대하여 일종 동정이 생기고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났다. 그래서 순애를 데리고 형식을 찾아온 것이라. 그때에는 선형의 마음에는 형식이가 극히 사랑스러웠다. 형식도 선형의 눈에서 그러한 빛을 보고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뛰어들어 건져 주겠다는 생각이 나는 것과 같은 동정이라. 잠시 효력이 있으되 오래는 가지 못하는 동정이라. 부부간의 사랑은 이래서는 아니 된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산다. 저 사람이 행복되어야 나도 행복된다. 저 사람과 나와는 한몸이다…… 이러한 사랑이라야 한다. 선형의 형식에게 대한 사랑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대한 동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형식은 이렇게 분명하게는 알지 못하여도 어떤 정도까지는 선형의 마음속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선형은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일생은 오직 선형의 위에 달린 듯하였다. 선형이가 설혹 자기더러 ‘보기 싫다, 가거라’ 하더라도, 또는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로 차더라도 불가불 선형의 치맛자락에 매어달려야 하겠다. 김장로의 집에 가기가 불쾌하고 선형을 대하기가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 불쾌한 것이 오히려 아주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나았다. 전신이 불구덩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렇게 형식은 그 동안 괴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떠나기 한 이삼 일 전부터 장로 부처의 형식에게 대한 태도는 극히 친절하게 변하였고, 선형도 더욱 은근하고 가깝게 굴었다. 형식은 겉정(인심)의 반복의 믿을 수 없음을 의심하면서도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 더구나 떠나기 전날 장로 부처가 자기와 선형을 불러 놓고 자기네 두 사람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올린 뒤에 연해 ‘너희 둘이’라 하여 가며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할 때에는 형식은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는 기쁨을 깨달았다. ‘너희 둘이’라는 말이 자기와 사랑하는 선형과를 한몸을 만드는 듯하였다. 그때에는 선형도 형식을 슬쩍 보고 쌍끗 웃었다. 네 사람은 이 순간이 영원히 있기를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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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이제부터는 자기 앞에는 오직 행복이 웃는 줄로만 생각하였다. 아까 남대문에서 떠날 때에도 여러 친구가 작별을 아껴 할 때에 자기는 오직 기쁘기만 하였다. 희경 일파가 여러 송별객 뒤에 서서 물끄러미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미상불 가슴이 부듯함을 깨달았으나, 그래도 자기의 곁에 선 선형을 볼 때에 모든 슬픔이 다 스러졌다. 이제부터 자기는 선형으로 더불어, 이만여 리나 되는 지구 저편 쪽에 가서 사오 년 동안 즐겁게 공부를 마치고 그때야말로 만인 환호리에 선형과 팔을 겯고 남대문으로 돌아오리라. 그때에는 지금 여기 섰는 여러 사람들이 오늘보다 감정으로―― 더 축하하고 더 공경하는 감정으로 자기를 맞으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비로소 서울이 그립고 남대문이 정답게 생각되었다. 남대문은 오직 행복된 자기를 보내고 맞아 주기 위하여서만 존재하는 듯하였다. 인해 차장이(차장의) 호각이 울고 만세 소리가 들릴 때의 형식의 감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선형은 여자라, 비록 신식 여자로 아무리 공명심과 허영심이 많아서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 동무들이 차차 차창에서 멀어지는 것을 볼 때에는 가슴에 고였던 눈물이 일시에 폭 쏟아져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울며 걸상에 쓰러졌다. 형식은 처음에는 가만가만히 선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 일어나시오. 눈물 씻고” 하다가, 이제는 이렇게만 할 처지가 아니라 하여 한참 주저하다가 한 팔을 선형의 가슴 밑으로 넣어 안아 일으켰다. 형식의 팔에 닿는 선형의 살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선형도 형식의 하는 대로 일어나면서 잠깐 형식의 손을 쥐었다. 그러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아이구, 이게 무슨 꼴이야요. 내지(외국) 사람들이 웃었겠습니다” 하고 웃는다. 그 눈물로 붉게 된 눈과 뺨이 더 곱게 보였다. 내지 사람들은 과연 웃었다.

우선은 형식의 뒷자리에 앉아서 빙그레 웃으며 자기 곁에서 일어나는 형식과 선형의 말을 들어 가며 신문을 보고 앉았더니 고개를 돌리며,

“여보게, 큰일났네그려” 한다. 형식은 선형만 바라보고 우선은 잊어버리고 앉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응? 왜?”

“하하하, 그렇게 놀랄 것은 없지마는…… 오늘 아침부터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일경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금강 낙동강은 십여 척의 증수가 되었다고.”

“어디” 하고 우선의 들었던 신문을 받아 보더니,

“그러면 철로가 불통하지나 아니할까?”

선형도 눈이 둥그래진다. 우선은,

“글쎄, 비를 아끼구 아끼구 하더니……” 하면(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휘휘 둘러본다. 황혼이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되, 하늘은 온통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선득선득한 바람에 이따금 굵은 빗방울이 섞여 떨어진다. 다른 승객들은 신문을 보고는 철롯길이 상할 것을 근심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이나 선형에게 별로 중대한 일은 아니었다. 철로길이 상하면 여관에 들어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때에 병욱이가 선형을 찾아오고, (그 다음에 선형이가 병욱을 따라가고,) 그 다음에 선형이가 돌아오고 형식이가 선형에게 병욱의 동행이 어떠한 사람이던가를 묻고, 선형은 “박영채라는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하는 대답을 하고, 마침내 우선이가 탐험을 갔다가 “다시카다요” 하는 보고를 한 것이라.

이렇게 지나간 일을 생각하다가 형식은 마침내 선형더러,

“가서 박영채 씨를 좀 보고 와야겠소.”

“가보시지요” 하는 선형의 대답은 형식에게는 무슨 특별한 뜻이 품긴 것같이 들렸다. 실로 선형은 지금까지 마음이 불쾌하였다. 그러면 그것이 월향이라는 기생인가. 죽었다더니 그것은 거짓말인가. 속에는 별별 흉악한 꾀를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저렇게 얌전을 빼는가. 사람 좋은 병욱이가 고것의 꾀에 넘지나 아니하였는가. 오늘 형식이가(형식과) 자기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이 차를 골라 탄 것이나 아닌가. 혹 형식이가 아직도 영채를 잊지 못하여 남모르게 영채에게 떠나는 날을 알려 미국 가기 전에 한번 더 만나 보려는 꾀는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매 선형은 일종 투기가 일어나서 픽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선형의 불쾌한 낯빛을 이윽히 보고 섰더니 변명하는 듯이,

“그래도 한차에 탄 줄을 알고야 어떻게 모르는 체하겠어요” 하고 다시 앉아서 선형의 대답을 기다린다. 선형은 말없이 앉았다가 웃으며,

“글쎄 가보세요. 누가 가시지를 말랍니까.” 끝에 말은 없어도 좋은 말이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앉았더니 벌떡 일어서며,

“그러면 갔다 오겠소” 하고 우선더러,

“가서 영채 씨 좀 보고 오겠네.”

“응, 가보게. 그러고 내가 문안하더라고 그러게” 하고 슬쩍 선형을 본다. 우선은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장차 어찌 될는고 하여 본다.

영채를 보고 와서는 우선의 속도 아주 편치는 못하였다. 더구나 영채가 죽으려던 뜻을 변한 동기가, 일본으로 가게 된 이유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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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는 한 미인으로 우선이가 영채를 자랑하였지마는,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지금토록 정절을 지켜 온 것과 청량리 사건으로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한 것을 보고는 영채를 색과 재와 덕이 겸비한 이상적 여자로 사랑하게 되었다. 만일 형식을 위한 우정(友情)이 아니었던들 어떤 정도까지나 열광(熱狂)하였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기가 미치게 사랑하던 계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오는 박영채인 줄을 알 때에 우선은 미상불 창자를 끊는 듯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우정을 중히 여기고 협기 있기로 자임하는 우선은 힘껏 자기의 정을 누르고 형식과 영채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주기로 하였다. 만일 영채가 형식의 아내가 되면 자기는 친구의 부인으로 일생을 접할지니, 그것만 하여도 자기에게는 행복이리라 하였다. 그러다가 영채가 그 슬픈 유서를 써두고 평양으로 내려감을 볼 때에 우선은 깊은 슬픔과 실망을 깨달았다. 비록 아녀자에게 마음을 아니 움직이기로 이상을 삼는 우선도 그 후부터 지금까지 일시도 영채를 잊어 본 일이 없었다. 우선의 일기를 뒤져 보면 취침 전에 반드시 영채를 생각하는 단율 한 수씩을 지은 것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죽은 줄 알았던 영채가 살아서 같은 열차에 타고 있는 줄을 알고 보니, 우선의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자연한 일이라. 게다가 형식이가 아름다운 선형으로 더불어 아름다운 약속을 맺어 가지고 아름다운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보매, 더욱 부러운 생각이 난다. 우선은 벌써 아들을 형제가 넘어 낳고 삼십이 다된 자기의 아내가 행주치마를 두르고 어린애의 기저귀를 빠는 모양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밥 짓고, 옷 짓고, 아이 낳을 줄밖에 모른다. 자기는 그(와) 혼인한 지 십여 년간에 일찍 한자리에 앉아서 정답게 이야기를 하여 본 일도 없고 무론 자기의 뜻을 말하여 본 적도 없다. 잘 때에만 내외는 한자리에 있었다. 마치 아내는 자기를 위하여서만 있는 것 같았다. 홀아비가 육욕을 참지 못하여 갈봇집에 가는 셈치고 아내의 방에 들어갔다.

이러하는 동안에 아들도 나고 딸도 나고 지아비라 부르고 아내라 불렀다. 십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도 서로 저편의 속을 모르고 알아보려고도 아니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실로 신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우선은, 이는 면할 수 없는 천명을(천명으로) 알 뿐이요, 일찍이 관계를 벗어나려고도 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라는 것은 대체 이러한 것이니 집에다 먹여 두어 아이나 낳게 하고 이따금 가보아 주기나 하면 그만이라 한다. 그러고 아내에게서 못 얻는 재미는 기생에서 얻으면 그만이라 한다. 세상에 기생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이 실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식과 서로 대하면 이 문제로 흔히 다투었다. 형식은 엄정한 일부일부주의(一夫一婦主義)를 고집하고, 우선은 첩을 얻든지 기생 오입을 하는 것은 결코 남자의 잘하는(잘못하는) 일이 아니라 한다. 과연 우선으로 보면 첩이나 기생이 아니고는 오랜 일생을 지낼 것 같지 아니하다. 우선의 일부다처주의나 형식의 일부일부주의가 반면은 각각 이전 조선 도덕과 서양 예수교 도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반면은 확실히 각각 자기네의 경우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에게 만일 영채를 주고, 영채가 우선을 사랑해 준다 하면 우선은 그날부터라도 기생집에 가기를 그칠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선은 형식의 경우가 지극히 부럽고, 자기의 처지가 지극히 불쌍히 보였다. 자기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도 하고 싶고 외국에 유람도 하고 싶었다. 기생을 데리고 노는 것도 좋지마는 기생에게는 무엇인지 모르되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기생이 자기에게 친절한 모양을 보이고 또 그 기생이 비록 자기의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구석에 조곰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 부족한 점은 결코 작은 점이 아니요, 큰 점이었다. 그것은 아마 첫째, 정신상으로 서로 합하고 엉키는 맛이 없는 것과 또 사랑의 제일 힘있는 요소인 ‘내 것’이라는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돈을 많이 내어서 기생을 빼어 내면 ‘내 것’이 되기는 되지마는, 암만해도 정신적 융합은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외모의 사랑은 옅다. 그러므로 얼른 식는다. 정신적 사랑은 깊다. 그러므로 오래 간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다.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 말은 아니 하지마는 속으로 밤낮 구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마치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천에 한 사람, 십년 백년에 한 사람도 있을 듯 말 듯하다. 그래서 여자는 춘향을 부러워하고 남자는 이도령을 부러워한다. 자기네가 실지로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매, 소설이나 연극이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좋아서 웃고 울고 한다. 조선서는 천지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 이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저마다 춘향이 되려 하고, 이도령이) 되려 하건마는 다 그 곁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의 흉악한 혼인제도는 수백 년래 사랑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 우선도 그 희생자의 하나이다.

이러한 우선이가 형식과 선형을 눈앞에 보고, 또 그립던 영채가 같은 차를 타고, 같은 기관차에 끌려가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울 것도 자연한 일이다. 또 영채는 이미 기생도 아니요, 겸하여 형식의 아내도 아니라. 오직 한 처녀다…… 하고 우선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생각이 번개같이 가슴에 일어난다. 그래서 우선은 형식의 간 뒤를 따라, 다음 차실 문 밖에 가서 바람을 쏘여 가며 가만히 엿본다. 형식은 영채의 곁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병욱도 이따금 말참례를 한다. 세 사람의 얼굴은 아주 엄숙하다. 우선은 들어갈까말까 하다가 형식의 돌아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뒷짐을 지고 기대어서 쿵쿵 찻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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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을 보내고 병욱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채는 병욱의 손을 잡아 앉히며,

“그래 어때요?” 하고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질문을 한다. 병욱은,

“무엇이 어찌해. 형식 씨라는 이가 잘 차리구서 시치미 따고 앉았더구나. 우리 오빠를 안다구…… 동경 가서 같이 있었노라구…….”

영채는 부지불각에 한숨을 지운다.

“왜, 형식 씨가 그리우냐. 아직도 단념이 아니 되는 게로구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면 왜 휘 하고 한숨을 쉬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고 병욱의 무릎을 치며 웃는다.

“그래도 아주 마음이 편치는 않을걸” 하고 병욱도 웃는다. 영채는 한참 생각하더니 병욱의 손을 꼭 쥐며,

“참 그래요” 하고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어째 마음이 좀 불쾌한 듯해요” 하고 얼굴이 빨개진다. 병욱은 근 십년 기생으로 있던 계집애가 어떻게 이처럼 규문 속에서 자라난 처녀와 같은가, 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그러고 지금 영채의 감상이 어떠한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그래 불쾌하다니 어떻게 불쾌하냐.”

“모르겠어요.”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바로 대답을 해라. 그러면 내 맛나는 거 사주께” 하고 둘이 다 웃는다. 영채가,

“이형식 씨가 퍽 무정한 사람같이 생각이 되어요. 그래도 내가 죽으러 갔다면 좀 찾아라도 볼 것인데…… 어느새에 혼인을 해가지고……” 하다가 병욱의 무릎에 자기의 이마를 대고 비비며, “아이구, 언니,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해요.”

병욱은 영채의 머리와 목과 등을 만져 주며 어린애게 하는 듯이,

“말하면 어떠냐…… 자, 그래서.”

“아마, 내가 여기 있는 줄을 알겠지요?”

“알 테지…… 지금 선형이가 왔다 가서 네 말을 했을 테니깐…… 알면 어떠냐.”

“어떻기야 어떻겠소마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왔다면 아마 놀랄 테지?”

“실컷 놀라 싸지. 아마 가슴이 뜨끔하리라…… 그렇게 적막할 데가 왜 있겠니.”

“만일 저편에서 나를 찾아오면 어찌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할까.”

“그러믄. 왜 무슨 원수가 있담.”

“원수는 아니지마는, 어째…….”

“어째 분이 난단 말이야?”

두 사람은 한참 잠자코 마주보더니,

“언니, 언니가 나를 살려 준 것이 잘못이야요. 나는 (그때에 꼭 죽었어야 할 터인데.) 그때에 죽었으면 벌써 다 썩어졌겠지…… 뼈만 하나씩 하나씩 여기저기 흩어졌겠지…… 그때에 죽었어야 해” 하고 후회하는 듯이 고개를 조악한다. 병욱은 영채의 낯빛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영채의 두 팔을 잡으며,

“얘 영채야,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제 나하고 둘이 가서 음악 잘 배워 가지구…… 둘이서 아메리카로 구라파로 돌아다니면서 실컷 구경하고…… 그러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새로 음악을 세우고 재미있게 살 터인데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하고 영채를 잡아 흔든다. 영채는 멀거니 병욱의 눈을 보고 앉았더니 눈에서 눈물이 쑥 나오며,

“아니야요. 나는 살 사람이 아니야요. 죽어야 할 사람이야요. 가만히 지나간 일생을 생각해 보니까 암만해도 나는 살려고 난 것 같지를 아니해요.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는 옥중에서 죽고, 그러고 칠팔 년 고생이 모두 속절없이……” 하고 흑흑 느낀다.

“얘, 글쎄 웬일이냐. 곧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기뻐하다가 왜 갑자기 야단이냐…… 네가 그렇게 그러면 이 언니는 어쩌게…… 자 울지 마라!”

“암만 생각하여 보아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생각이 없어요.”

“왜? 그러면 너는 아직도 이형식 씨를 못 잊는 게로구나. 네가 그때에 날더러 실상은 이형식 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니?”

“아니오. 다만 그 일만 아니야요. 이 세상이 내 원수가 아니야요. 내 부모를 빼앗고, 내 형제를 빼앗고, 내 어린 몸을 실컷 희롱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마침내 내 정절을…… 내 정절을 빼앗고…… 그러고는 일생에 생각하던 사람은 아랑곳도 아니 하고…… 이렇게 구태 나를 없애고 말려는 세상에 내가 구태 붙어 있으면 무엇 해요. 세상을(세상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세상을 미워하지요. 세상이 나를 싫다 하면 나도 세상을 버리고 달아나지요…… 하늘로 올라가지요” 하는 울음 섞인 말에 병욱도 부지불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깐 말이다―― 그만치 세상한테 빼앗겼으니깐 또 세상에 좀 찾아 가져야지. 내 것을 주기만 하고 말아! 네가 이십 년이나 고생을 했으니깐 그 값을 받아야 아니 하겠니?”

“값이 무슨 값이오? 하루라도 더 살아 있으면 더 빼앗길 뿐이지…….”

“아니다! 왜 그래? 이제부터는 찾는다. 아직도 전정이 구만린데 왜 어느새 실망을 한단 말이냐. 살 수 있는 대로 힘껏 살면서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야지…… 사업으로 찾고 행복으로 찾고…… 왜 찾을 것을 찾지도 않고 죽어?”

“행복? 행복? 내게 행복이 올까요? 이 세상이 내게다 행복을 줄까요!”

하고 병욱의 눈물 흐르는 눈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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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은 수건으로 영채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얘, 다른 손님들이 이상하게 여기겠다. 울지 말아라…… 이 세상이 왜 행복을 아니 주어…… 아니 주거든 내라지. 내라도 아니 주거든 억지로 빼앗지. 빼앗아도 아니 주거든 원수라도 갚지! 또 생각을 해봐라. 이 세상에 너와 같이 설움을 당하는 사람이 너뿐이겠니?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 안 된 사회제도를 고쳐서 우리 자손들이야 행복을 얻고 살게 해야지……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느냐. 그런데 만일 네가 제 고생을 못 이겨서 죽고 만다 하면 이것은 네가 우리 자손에게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많이 하자…… 자, 울지 말고 딸기나 내 먹자” 하고 일어서서 등으로 결은 하얀 두룽이(종다래끼)를 내린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지―― 왜 못 해? 하느님이 큰 일꾼을 만들 양으로 네게 초년 고락을 주었구나…… 자, 우리 둘이 아니 있니? 그까짓 이형식 같은 사람은 잊어버리고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하고 살자…… 자, 옜다 먹자” 하고 빨갛게 익은 딸기를 내어놓고 먼저 자기가 하나를 먹는다. 입에 넣고 씹으니 하얀 이빨에 핏빛 같은 물이 든다. 이것은 어저께 아침 곁에 병국의 부인과 셋이 그 목화밭에 가서 송별연삼아 수박을 따먹으면서 따모은 것이라. 두 사람의 눈앞에는 황주 병욱의 집 광경이 얼른 지나간다.

영채도 울어야 쓸데없음을 알고 눈물을 거둔다. 또 병욱의 말에는 정이 있고 힘이 있고 이치가 있어서 반가우면서도 자기를 내려누르는 듯한 힘이 있다. 가슴이 터져 오게 슬프다가도 병욱의 말을 한마디 들으면 그만 스르르 풀리고 만다. 영채는 병욱이가 남자같이 활발한 듯하면서도 속에는 뜨겁고 예민한 정이 있음과, 또 자기를 위로할 때에는 진정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하는 줄을 잘 안다. 만일 영채가 자살을 하려고 물가에 섰거나 칼을 들고 섰다가라도 병욱의 말소리만 들리면 얼른 “언니” 하고 따라갈 것이다. 영채가 보기에 병욱은 언니라기보다 어머니라 함이 적당할 듯하였다.

그러나 이십 년 생활이 한데 뭉쳐 된 영채의 슬픔이 다만 병욱의 그 말만으로는 아주 다 스러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더 자기의 고집을 부리는 것은 친절한 병욱에게 대하여 미안한 듯하여 영채도 딸기를 먹는다. 빨간 딸기가 두 처녀의 고운 입술로 들어가서는 하얀 이빨을 빨갛게 물들이곤 하다. 차창에는 비가 뿌려서 눈물 같은 물방울이 떼그루 굴러내리다가는 다른 물방울과 한데 합하여 흘러내린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떨리는 전등 가에는 하루살이 등속이 떼를 지어 모여 들어간다. 두 처녀의 입술과 손가락 끝이 딸깃물에 불그레하여졌을 때에 형식이가, “영채 씨!” 하고 두 사람 앞에 와 섰다.

형식은 얼마 전에 이 차실에 들어와서 바로 영채의 곁으로 오려다가 영채가 우는 듯한 모양을 보고 영채 앉은 걸상에서 서넛 건너 있는 빈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찻바퀴 소리에 자세히 들리지는 아니하나 이따금 이따금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들리는 말을 주워 모으면 대강 뜻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죄송한 마음과 자기에게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영채에게 정성껏 사죄를 하리라 하였다.

영채와 선형은(병욱은) 놀라서 일어선다. 두 사람을(사람은) 일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영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고개를 숙였다. 병욱이가 오직 고개를 들고 형식에게,

“앉으시오” 한다. 형식은 앉는다.

“얘, 앉으려무나” 하는 병욱의 말에 영채도 앉는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돌렸다. 형식은 마치 무슨 무서운 것이나 대한 듯이 몸에 소름이 쭉 끼친다. 영채의 뒷모양이 자기를 내려누르고 위협하는 듯하다.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넋이 지금 자기 앞에 나서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금시에 영채가 휙 돌아서며 무서운 얼굴로 자기를 흘겨보고 입에 가득한 뜨거운 피를 자기에게다가 확 뿌리며 “이 무정한 놈아, 영원히 저주를 받아라” 하고 달겨들 것 같다. 왜 그때에 평양 갔던 길에 더 수탐을 하여 보지 아니하였던가. 왜 그때 우선에게서 돈 오 원을 꾸어 가지고 즉시 평양으로 내려가지를 아니하였던가 하여도 본다. 이제 영채가 고개를 돌리면 어찌하나. 아니 왔더면 좋겠다 하여도 본다. 이때에,

“자, 딸기 잡수십시오” 하고 병욱이가 딸기 그릇을 내어놓으며,

“얘, 영채야” 하고 자기의 발로 영채의 발을 꼭 누른다. 영채는 가만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형식은 보지 아니한다.

“영채 씨, 용서해 줍시오. 무에라고 할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대하여서나 영채 씨께 대하여서나 큰 죄인이외다. 무슨 책망을 하시든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제가 철없이 찾아가서 공연한 걱정을 끼쳤습니다. 또 죽지도 못하는 것을 죽는다고 해서 얼마나 노심을 하셨습니까” 하고 고개를 숙인다.

병욱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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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차마 더 영채에게 말이 나오지 아니하므로 병욱더러,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이오니까. 이전부터 영채 씨를 아셨어요?”

병욱은 형식을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형식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준다. 자기를 비웃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아니올시다. 제가 방학에 집으로 오는 길에 차 속에서 만났어요.”

형식은 눈이 둥그래지며 영채를 한번 보고 다시 병욱을 향하여,

“그러면 영채 씨가 평양 가시는 길에?”

“녜” 하고 만다. 형식은 더 알고 싶었다. 영채가 어찌하여 죽을 결심을 풀었으며, 어찌하여 동경으로 가게 된 것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병욱은 고개를 기울여서 영채의 돌아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래서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즐거운 인생을 하루라도 오래 살지 못하여 걱정인데 왜 구태 지레 죽으려느냐고 그랬지요. 그러고 지금까지는 네가 천하 사람의 조롱을 받고, 학대를 받고……” 하고는 주저하는 듯이 형식을 바라보다가 또 웃으면서, “또 일생에 생각하고 사모하던 사람에도 버림을 받았지마는……”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형식의 가슴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병욱은 형식의 낯빛이 변하여짐을 보고 말을 끊었다가,

“그렇게 지금토록 네 일생은 눈물과 원망의 일생이지마는 이제부터 네 앞에는 넓고 즐거운 장래가 있지 아니하냐 하고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렸지요.”

“참 감사합니다. 아씨 덕에 나도 죄가 얼마큼 가벼워진 듯합니다. 저는 꼭 영채 씨께서 돌아가신 줄만 알았어요――이때에 병욱과 영채는 속으로 흥 한다―― 그래 즉시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다음 번 차로 평양으로 내려갔지요――여기 와서 형식은 자기의 변명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 기쁘다 하는 생각이 난다―― 했더니,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정거장에 나가서 수탐을 하여 보았지마는 알 수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알 만한 집에도 가 물어 보고, 또 박선생 묘소에도……” 하다가, 중간에 돌아온 생각을 하매 문득 말을 그치고 고개를 숙인다. 그때에 북망산까지 가보고 대동강가로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시체를 찾아보았더면 좋을 뻔하였다 하는 생각이 난다. 병욱은 한참 듣더니,

“녜, 아마 그리하셨겠지요. 그러면 시체를 찾으시느라고 꽤 애를 쓰셨겠네.”

형식은 ‘이 계집애가 꽤 사람을 골린다’ 하였다. 과연 형식의 등에는 땀이 흘렀다.

영채는 형식의 하는 말을 다 들었다. 그러고 형식에게 대하여 원통한 듯하던 마음이 얼마큼 풀린다. 그러나 형식이가 즉시 자기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내려온 것과, 열심으로 자기의 시체를 찾아 준 고마움도 자기가 죽은 지 한 달이 못 하여 선형과 혼인을 하여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눌려 버리고 만다.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 한 사람이 정다운 애인도 되고 박정한 낭군도 되어 보인다. 그러나 만사가 이미 다 지나갔으니 이제 와서 한탄하면 무엇 하고 분풀이를 하면 무엇 하랴. 차라리 웃는 낯으로 형식을 대하여 저편의 마음이나 기쁘게 하여 줌이 좋으리라 하는 생각도 난다. 그래서 마음을 좀 돌리기는 돌렸으나 그래도 아주 웃는 얼굴을 보여 형식에게 안심을 주고 싶지는 아니하여,

“참말 죄송합니다. 황주 가서 곧 편지를 드리려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잠깐 살아 있는 것을 알려 드리면 무엇 하랴. 차라리 죽은 줄로 믿고 계시는 것이 도리어 안심이 되실 듯하기로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보면 아니 알려 드린 것이 어떻게 잘 되었는지요” 하고 영채도 과히 말하였다는 생각이 나서 웃는다.

“그러면 어찌해서 엽서 한 장도 아니 주신단 말씀이오?” 하고 형식은 분개한 구조로, “그렇게 사람을 괴롭게 하십니까?” 형식은 진실로 이 말을 듣고 영채를 원망하였다. 만일 영채가 엽서 한 장만 하였으면 자기는 마땅히 당장 영채를 찾아가서 영채의 손을 잡았을 것 같다. 병욱과 영채는 형식의 분개하여 하는 얼굴을 본다. 더구나 영채는 형식에게 대하여 불안한 생각이 나서,

“그러나 저는 제가 살아 있는 줄을 알게 하는 것이 도리어 선생께 부질없는 근심을 끼칠 줄로 알았어요. 만일 제가 선생의 몸에 누가 되어서 명예를 상한다든지 하면 도리어――주저하다가―― 선생을 위하는 도리도 아니겠고…… 그래서 억지로 참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고 또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형식이 영채의 하는 말을 듣다가 눈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위하여 주는 영채의 심정이 더욱 감사하게 생각된다. 죽으려 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줄을 알리지 아니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임을 생각하매 자기의 영채에게 대한 태도의 너무 무정함이 후회된다.

마주앉은 눈물 흘리는 영채를 보고, 또 저편 차실에 앉은 선형을 생각하매 형식의 마음은 자못 산란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한참 말이 없고 기차는 어느 철교를 건너가느라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창에 뿌리는 빗발과 흘러가는 물소리는 큰비가 아직 계속하는 줄을 알게 한다. 홍수나 아니 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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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부글부글 끓는 머리를 가지고 영채의 차실에서 나왔다. 우선이가 지켜 섰다가 형식의 어깨를 툭 치며,

“영채 씨가 울데그려.”

형식은 우선의 손을 잡으며,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왜, 무슨 일이 났나. 영채 씨가 바가지를 긁던가 보이그려…… 요― 호남자!”

“아니어! 그렇게 농담으로 들을 것이 아닐세…… 참, 어쩌면 좋아?”

“아따, 걱정도 많기도 많아…… 부산 가서 배 타고, 마관 가서 차 타고, 횡빈 가서 배 타고, 상항 가서 내리고 하면 그만이지 걱정이 무슨 걱정이어!”

형식은 원망스러이 우선의 얼굴을 보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나는 미국 가기를 중지할라네.”

“응?” 하고 우선도 놀라며, “어째?”

“미국 가기를 중지할 테여…… 그것이 옳은 일이지…… 응, 그리할라네” 하면서 우선의 손을 놓고 차실로 들어가려 한다. 우선은 손을 잡아 형식을 끌어당기며,

“자네 미쳤단 말인가. 이리 좀 오게.”

형식은 멀거니 섰다.

“자네 지금 정신이 혼란되었네. 미국 가기를 중지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여?”

“아니 저편은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선형 씨한테 이 뜻을 말하고 약혼을 파하겠네…… 그것이 옳은 일이지.”

“그러면 영채하고 혼인한단 말이지?”

“응, 그렇지! 그것이 옳지!”

“영채는 자네와 혼인을 한다던가.”

“그런 말은 없어.”

“만일 영채가 자네와 혼인하기를 싫다 하면 어쩔 터인가.”

형식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일생 혼인 말고 지내지…… 절에 가서 중이 되든지.”

우선은 마침내 껄껄 웃으며,

“지금 자네가 좀 노보세(上氣)했네. 참 자네는 어린내일세. 세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네그려. 행여 꿈에라도 그런 생각 내지 말고 어서 미국이나 가게.”

“그러면 저 사람을 버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지. 일이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까. 이제 그런 생각을 하면 무엇 하나. 또 영채 씨도 동경에 유학도 하게 되었고 하니까 피차에 공부나 잘하고 장래에 서로 형제삼아 지내게그려. 그런 어림없는 미친 소리는 다 집어치고……” 하면서 형식의 등을 퉁 하고 때린다. 팔에 붉은 헝겊 두른 차장이 지나가다가 두 사람을 실척 본다.

형식은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뒤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형은 조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린 듯이 기대어 앉았다.

형식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의문 하나가 일어난다.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까 남대문에서 차를 탈 때까지는 자기는 오직 선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듯하더니 지금 또 영채를 보매, 선형은 둘째가 되고 영채가 자기의 사랑의 대상인 듯도 하다. 그러다가 또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이야말로 내 아내, 내 사랑하는 아내’라는 생각도 난다. 자기는 선형과 영채를 둘 다 사랑하는가. 그렇다 하면 동시에 두 사람을 다 같이 사랑할 수가 있을까. 남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자기가 지금껏 생각하여 온 바로 보건대, 참된 사랑은 결코 동시에 두 사람 이상에 향할 수 없는 것이어늘, 지금 자기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에 있나. 아무렇게 해서라도, 어떠한 표준을 세워서라도 형식은 선형과 영채 양인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겠다.

오래 생각한 후에 형식은 이러한 결론에 달하였다.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결코 뿌리 깊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는 선형의 얼굴이 어여쁜 것과 태도가 얌전한 것과 학교에서 우등한 것과 부자요 양반집 딸인 것밖에 아무것도 선형에게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아직도 약혼한 지금까지도 선형의 성격(性格)을 알지 못한다. 무론 선형도 자기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 서로 이해(理解)함이 없이 참사랑이 성립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과연 선형을 요구하고, 선형의 영혼은 과연 나를 요구하는가. 서로 만날 때에 영혼과 영혼이 마주 합하고, 마음과 마음이 마주 합하였는가.

일언이폐지하면 자기와 선형 사이에는 과연 칼로 끊지 못하고 불로도 끊지 못할 사랑의 사실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실망함을 금치 못한다. 자기는 비록 선형에게 이 모든 것을 구하였다 하더라도 선형은 결코 자기에게 영혼도 보이지 아니하고 마음도 주지 아니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선형에게는 자기에게 줄 영혼과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부모의 명령과 세상의 도덕에 눌려 하릴없이 자기를 따라오는지도 모르겠다. 무론 일찍 선형이가 자기 입으로 “녜” 하고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그 대답이 과연 자각(自覺) 있게 나온 대답일까.

그러면 자기가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즉 항용 사나이들이 고운 기생 같은 여성의 색에 취하여 하는 사랑과 다름이 있을까. 자기의 사랑은 과연 문명의 세례를 받은 전인격적(全人格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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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결코 지금까지 장난으로 선형을 사랑한 것도 아니요, 육욕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포가 사랑을 장난으로 여기고 희롱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하여 큰 불만을 품는다. 자기의 일시 정욕을 만족하기 위하여 이성을 사랑한다 함을 큰 죄악으로 여긴다. 그는 사랑이란 것을 인류의 모든 정신작용 중에 가장 중하고 거룩한 것의 하나인 줄을 믿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게 대하여서는 극히 뜻이 깊고 거룩한 일이요, 자기의 동포에게 대하여서는 큰 정신적 혁명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으로 진실하고 경건(敬虔)한 것이었다. 사랑을 인생의 전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태도로 족히 인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여 보건대 자기의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너무 근거가 박약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었다.

형식은 오늘 저녁에 이것을 깨달았다. 깨달으매 슬펐다. 마치 자기가 일생 경력을 다 들여서 하여 오던 사업이 일조에 헛된 것인 줄을 깨달은 듯한 실망을 맛보았다. 그와 함께 자기의 정신의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극히 유치함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 인생을 깨달을 때도 아니요, 따라서 사랑을 의논할 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인 줄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도 어린애다. 마침 어른 없는 사회에 처하였으므로 스스로 어른인 체하던 것인 줄을 깨달으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난다.

형식은 생각에 이어 생각을 한다.

나는 조선의 나갈 길을 분명히 알았거니 하였다. 조선 사람의 품을 이상과, 따라서 교육자의 가질 이상을 확실히 잡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나갈 방향을 알려면 그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지금껏 생각하여 오던 바, 주장하여 오던 바는 모두 다 어린애의 어린 수작이라.

더구나 나는 인생을 모른다. 내게 무슨 인생의 지식이 있는가.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 근본적(根本的)으로 무엇인지는 설혹 알지 못한다 하여도, 적더라도 현재에 내가 세상에 처하여 갈 인생관은 있어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할 만한 무슨 표준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있는가. 나는 과연 자각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자기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이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다. 형식은 눈을 떠서 선형을 본다. 선형은 여전히 가만히 앉았다. 형식은 또 생각한다.

나는 선형을 어리고 자각 없는 어린애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형이나 자기나 다 같은 어린애다. 조상 적부터 전하여 오는 사상(思想)의 전통(傳統)은 다 잃어버리고 혼돈한 외국 사상 속에서 아직 자기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오라비와 누이, 생활의 표준도 서지 못하고 민족의 이상도 서지 못한, 세상에 인도하는 자도 없이 내어던짐이 된 오라비와 누이――이것이 자기와 선형의 모양인 듯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다시 눈을 떠서 선형을 보매 선형은 잠이 들었는지 입을 반쯤 열고 가슴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참지 못하여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선형의 손에 입을 대었다. 형식의 생각에 선형은 자기의 아내라기보다 같이 손을 끌고 길을 찾아가는 부모 잃은 누이라는 생각이 난다.

옳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배우러 간다. 네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형식은 저편 차에 있는 영채와 병욱을 생각한다. ‘불쌍한 처녀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 처녀가 다 같이 사랑스러워지고 정다워진다. 형식의 상상은 더욱 날개를 펴서 이희경 일파를 생각하고, 경성학교 학생 전체를 생각하고, 또 서울 장안 길에서 보던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성명도 모르는 남녀 학생들과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네들이 모두 다 자기와 같이 장차 나갈 길을 부르짖어 구하는 듯하며,) 그네들이 다 자기의 형이요 동생이요 누이들인 것같이 정답게 생각된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커다란 팔을 벌려 그 어린 동생들을 한 팔에 안아 본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와 선형과, 또 병욱과 영채와 그 밖에 누군지 모르나 잘 배우려 하는 사람 몇십 명 몇백 명이 조선에 돌아오면 조선은 하루이틀 동안에 갑자기 새 조선이 될 듯이 생각한다. 그러고 아까 슬픔을 잊어버리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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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형의 가슴은 그렇게 평안하지 아니하였다. 형식이가 영채를 찾아가고 없는 동안에 더욱 마음이 산란하게 되었다. 영채가 이 차에 탔단 말을 듣고 몹시 괴로워하는 형식의 모양을 보매 암만해도 형식의 마음에는 자기보다도 영채가 더 사랑스러운 것같이 보인다. 설혹 형식의 말과 같이 영채가 죽은 줄을 믿고 자기와 약혼을 하였다 하더라도 형식의 가슴속에는 영채의 기억이 깊이깊이 들어박혀서 자기는 용납할 곳이 없는 것 같다. (영채가 없으므로 부득이 자기를 사랑하려 하다가 이제) 영채가 살아난 줄을 알매 다시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일어나는 것 같다. 자기는 형식에게 대하여 임시로 영채의 대신을 하여 준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매 더욱 불쾌하여진다.

‘옳지, 영채가 없으니깐 나를 사랑하였지’ 하고 선형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면 나는 이형식의 노리개가 되었던가’ 하고 한참 몸을 흔든다. ‘옳지, 아마 형식이가 미국 유학에 탐을 내어서 나와 약혼을 한 게다’ 하고 벌떡 일어선다. ‘아아, 나는 남의 첩이 된 셈이로구나!’ 하고 주먹을 불끈 쥔다. 형식을 정직한 사람으로 믿었던 것이 후회도 난다. “나를 사랑하시오?” 할 때에 “아니오, 나는 당신을 조곰도 사랑하지 아니하오” 하고 슬쩍 돌아서지 못한 것도 분하고, 형식이가 손을 잡을 때에 순순히 잡힌 것도 분하고 모든 것이 다 분하여진다. 선형은 다시 펄적 주저앉으며, ‘아아, 내가 그러한 사람을 따라 미국을 가누나’ 하고, 방금 울음이 터질 듯이 코를 실룩실룩하기도 한다.

형식이가 속으로 자기와 영채를 비교할 것을 생각해 본다. 영채는 참 곱다. 그러고 영리하고 다정하게 생겼다. 선형도 자기가 친히 거울을 대하거나 남의 칭찬하는 말을 들어 자기의 얼굴이 어여쁘고 태도가 얌전한 줄을 안다. 그 중에도 자기의 맑은 눈이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는 줄을 안다. 그러므로 선형은 자기와 연치가 비슷한 여자를 볼 때에는 반드시 그 얼굴을 자세히 보고, 또 속으로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는 버릇이 있다. 아까도 영채를 보고 곧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았다. 그때에 선형은 매우 영채를 곱게 보았다. ‘친해 두고 싶은 사람이로군’ 하였다. 그러나 알고 본즉, 그는 다방골 기생이다. 형식이가 자기의 얼굴과 더러운 기생의 얼굴을 비교할 것을 생각하매 더할 수 없이 괘씸하다. 영채의 얼굴이 비록 곱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생의 얼굴이다. 내 얼굴이 비록 영채의 것만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반집 처녀의 얼굴이다. 어찌 감히 비기랴 한다.

형식의 끈끈한 것을 보건대 당당한 여학생인 자기보다도 아양을 떨고 간사를 부리는 영채를 곱게 볼 것 같다. 영채가 무엇이냐, 다방골 기생이 아니냐, 하여 본다.

형식이가 계월향이라는 기생과 좋아하다가 평양까지 따라갔다는 말을 들을 제 형식을 조곰 의심하게 되고, 그 후 형식이가 자기더러 ‘나를 사랑하시오?’ 하고 염치없는 소리를 물으며, 나중에 자기의 손을 잡을 때에 ‘과연 기생집에나 다니던 버릇이로다’ 하였고, 지금 와서 선형은 더욱 형식을 더럽게 본다. 한참 악감정이 일어난 이 순간에는 선형의 보기에 형식은 모든 더러운 것, 악한 것을 다 갖춘 사람 같다.

‘아이 어찌해!’ 하고 화가 나는 듯이 선형은 고개를 짤레짤레 흔든다. 자기의 앞에, 형식의 빈자리에 허깨비 형식을 그려 놓고, ‘엑, 나를 속였구나’ 하고 두어 번 눈을 흘겨 본다. 그러고는 또 한번 속에 불이 일어서 몸을 흔든다.

선형은 아직 사람을 미워하여 본 적이 없었다. 팔자 좋은 선형은 미워하려도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자기를 대하는 사람은 다 자기를 귀여워해 주고 칭찬해 주었다. 학교에서 몇 번 선생을 미워하여 본 적은 있었으나 ‘아이구 미워……’ 하고 얼굴을 찡글도록 누구를 미워할 기회는 없었다. 형식은 선형에게 첫번 미움을 받는 사람이다.

형식의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그 얼굴이 어찌해 뻔질뻔질해 보이고 천해 보인다. 선형은 그 얼굴을 아니 보려고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하며 손으로 땀에 축축하니 젖은 머리를 뻑뻑 긁었다.

형식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영채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여 본다. 쌍긋쌍긋 웃는 영채가 보인다. 그 하얗고 동그레한 얼굴이 요물스럽게 보인다. ‘무엇이 고와, 그 얼굴이 고와!’ 하고 발을 한번 들었다 놓는다. 그러고 그 요물스러운 영채가 고개를 갸웃갸웃하여 가며 (형식을 호리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형식은 그 넓짓한 입을 헤벌리고 흥흥 하면서 징글징글한 웃음을 웃는다.

‘아이그, 꼴보기 싫어!’ 하며 선형은 두 손길을 펴서 이마에 댄다. ‘왜 이 사람이 아직 아니 오누’ 하며 자리를 한번 옮아 앉는다.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아!’ 하매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한번 일어났다가 앉는다. 형식이가 돌아오거든 실컷 분풀이를 하고 싶다. ‘너희들끼리 더럽게 잘 놀아라’ 하고 침을 탁 뱉고 달아나고도 싶다. ‘아이쿠, 내 팔자야!’ 하고 함부로 몸을 흔든다. 한번 더 ‘어쩌면 좋아!’ 하고 푹 쓰러져 운다.

선형도 계집애다. 질투와 울기를 이리하여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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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가 영채한테 간 지가 두 시간이나 세 시간이나 된 것 같다. 퍽도 오래 있는 것 같다. 오래 있는 것 같을수록 선형의 마음이 더욱 산란하였다.

선형은 지금까지 형식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하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형식이가 퍽 자기를 사랑하여 주니 자기도 힘껏 형식을 사랑하여 주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은 있었다. 아내 되어서는 지아비를 사랑하라 하였고, 부모께서는 자기더러 이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였으니 자기는 불가불 형식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형식이가 자기더러 요구하는 그러한 사랑,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사랑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다른 여자가 형식을 안아 준다 하면 자기의 생각이 어떠할까 하는 것은 생각하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선형은 지금 자기가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선형도 시기라든지 질투라는 말은 안다. 그러나 시기나 질투는 큰 죄악이라, 자기와 같은 예수도 잘 믿고 교육도 잘 받은 얌전한 아가씨의 가질 것은 아니라 한다.

조물은 각 사람에게 사람으로 배워야만 할 모든 것을 다 가르친다. 그리하되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것과 같이 책이나 말로써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실험으로써 한다. 조물은 말할 줄을 모르고 오직 실행할 줄만 아니까 그러한가 보다. 선형의 인생의 학과는 이제부터 차차 중등과에 들려 한다. 사랑을 배우고 질투를 배우고 분노하기와 미워하기와 슬퍼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이란 죽는 날까지 이것을 배우는 것이니까 선형이가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 점으로 보면 영채나 형식은 선형보다 훨씬 상급생이다. 그러고 병욱은 사람들이 조물을 흉내내어, 또는 조물의 생각을 도적질하여 만들어 놓은 문학이라든지 예술이라든지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퍽 많이 배웠다.

사람이란 이러한 과정을 많이 배우면 많이 배울수록 어른이 되어 간다. 즉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아리따운 태도가 스러지고 꾀도 있고, 힘도 있고, 고집도 있고, 뜻도 있고, 거짓말도 곧잘 하거니와 옳은 말도 힘있게 하는 소위 어른이 되어 간다. 정신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여지고 더욱 복잡하여진다. 일언이폐지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라.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선형은 아직 천진난만한, 엊그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린애다. 오늘에야 처음 사람의 맛을 보았다. 사랑의 불길에, 질투의 물결에 비로소 쓴 것도 같도 단 것도 같은 인생의 맛을 보았다. 옛말에 마마는 백골이라도 한 번은 한다는 셈으로 사람 되고는 한번은 반드시 이 세례를 받는다. 아니 받고 지났으면 게서 더한 행복도 없을 듯하건마는, 그렇거든 사람으로 아니 나는 것이 좋다. 다나 쓰나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두를 놓으면 천연두를 벗어난다.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앓더라도 경하게 앓는다. 그러므로 근년에 와서는 누구든지 우두를 놓으며 그래서 별로 곰보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신에도 마마가 있으니까 정신에도 천연두가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든지 질투라든지 실망, 낙담, 슬픔, 궤휼, 간사, 흉악, 음란, 행복, 기쁨, 성공 등 인생의 만만 현상은 다 일종 정신적 마마라. 소위 약은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의 괴로워하는 양을 차마 보지 못하여 아무쪼록 그네로 하여금 일생에 이 마마를 겪지 않도록 하려 하나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다. 야매한 사람들이 마마에 귀신이 있는 줄로 믿는 것은 잘못이어니와 이 정신적 마마야말로 귀신이 있어서, 지키는 부모 몰래 그네의 사랑하는 자녀의 정신 속에 숨어 들어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자녀에게 인생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방면을 감추려 함은 마치 공기 중에는 여러 가지 독균이 있다 하여 자녀들을 방 안에 가두어 두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바깥 독균 많은 공기에 익지 못한 자녀의 내장은 독균이 들어가자마자 곧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죽어 버린다. 그러나 평생에 바깥 공기에 익어서, 내장에 독균을 대항할 만한 힘을 기르면 여간한 독균이 들어오더라도 무섭지를 아니하다. 한번 우두로 앓은 사람은 천연두균을 저항하는 힘이 있는 것과 같다.

선형은 지금껏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공기 중에 독균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고 그는 우두도 놓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지금 질투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사랑이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가 만일 종교나 문학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대강 배워 사랑이 무엇이며 질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들 이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언마는 선형은 처음 이렇게 무서운 변을 당하였다.

선형은 얼마 울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지금 지나간 자기의 심리(心理)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며 진저리를 쳤다. 선형의 눈은 둥글어진다.

‘내가 어찌 되었는가’ 하고 한참 숨을 멈춘다. 첫번 지내 보는 그 아픈 경험이 마치 캄캄한 밤과 같은 무서움을 준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오싹오싹한 소름이 두어 번 전신으로 쪽쪽 지나간다. 그러다가 멀거니 차실을 돌아보면서,

‘퍽도 오래 있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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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은 몹시 무서운 생각이 난다. 자기의 내장이 온통 빠지직 타는 듯하고 코로는 시커먼 불길이 활활 나오는 듯하다. 씨걸씨걸 하는 자기의 숨소리가 마치 자기의 곁에 어떤 커다란 마귀가 와 서서 후후 찬 입김을 불어 주는 것 같다. 자기의 몸이 마치 성경을 배울 때에 상상하던 컴컴한 지옥 속으로 둥둥 떠 들어가는 것 같다. 선형은 흑 하고 진저리를 치며 차실 내에 여기저기 앉아 조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그 사람들도 모두 다 무서운 마귀가 된 것 같다. 그 사람의 얼굴들이 금시에 눈을 뚝 부릅뜨고 자기를 향하고 달려들 것 같다.

‘아이구 무서워!’ 하고, 선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가리면 영채와 형식의 모양이 또 보인다. 둘이 꼭 쓸어안고 뺨을 마주대고서 비웃는 얼굴로 자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가 그 곁에 섰다가 퇴 하고 침을 뱉으면 영채와 형식이가 갑자기 무서운 마귀가 되어서 ‘응’ 하고 자기를 물어뜯는 것 같기도 하다. 선형은 ‘아이그 어머니!’ 하고 푹 쓰러졌다. 선형의 몸은 알 수 없는 무서움으로 들들 떨린다. 선형은 얼른 하느님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 할 따름이요, 다른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몇 번 하느님을 찾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죄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말았다. 그만해도 얼마큼 무서운 생각이 없어지고 숨소리가 순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형은 곁에 그리스도가 와서 선 것을 상상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때 형식이가 우선으로 더불어 돌아왔고, 또 선형의 손등에 입을 댄 것이라. 선형은 그때에 결코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형식이가 돌아오는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눈을 뜨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형식의 입술이 자기의 손등에 댈 때에는 손등으로 형식의 면상을 딱 붙이고 싶도록 미웠다. 이것이 다 기생과 하던 버릇이로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선형도 잠이 들었다. 휘황하던 전등은 밤새도록 이 두 괴로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고 커다란 눈을 부릅뜬 시커먼 기관차는 캄캄한 밤과 내려쏟는 비를 뚫고 별로 태우고 내리우는 사람도 없이 산굽이를 돌고 굴을 통하여 여러 가지 꿈을 꾸는 여러 가지 사람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잠을 깬 것은 차가 삼량진역에 닿을 적이었다. 시계의 짧은 침은 벌써 다섯시를 가리켰으나 하늘이 흐려 아직도 정거장의 등불이 반작반작한다.

차장이 모자를 옆에 끼고 은근히 고개를 숙이더니,

“두 군데 선로가 파손되어 네 시간 후가 아니면 발차할 수가 없습니다” 한다.

자다가 깬 손님들은 모두 눈을 비비며 “응, 응” 하고 불평한 소리를 하다가 모두 짐을 꾸며 가지고 내린다. 어떤 사람은 차창으로 내다보다가,

“저 물 보게, 물 보게!” 하며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감탄을 발한다. 비 외투를 입은 역부들은 나는 상관없다, 하는 듯이 시치미떼고 슬근슬근 열차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정거장은 무슨 큰일이나 난듯이 공연히 수선수선한다. 형식은,

“우리도 내리지요. 네 시간을 어떻게 차 속에 있겠어요” 하고 선형을 본다. 선형은 형식의 입을 보고 어젯저녁 자기의 손등에 대던 생각을 하고 속으로 우스워하면서,

“내리지요!” 하고 먼저 일어선다. 형식은 가방과 담요들을 한데 들고 앞서 내리고 선형은 형식의 보던 책과 자기의 손가방을 들고 형식의 뒤를 따라 내렸다. 개찰구 곁에 갔을 적에 병욱이가 뛰어오며 뉘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내리셔요!” 하고 아침 인사를 잊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웃는다.

“녜, 네 시간이나 어떻게 기다리겠습니까. 여관에 들어 좀 쉬지요…… 물구경이나 하고요.”

“그러면 저희도 내리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셔요!” 하더니 저편으로 뛰어간다. 형식과 선형의 눈도 그리로 향하였다. 영채가 이편으로 향한 차창에 서서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형식은 ‘어찌하나’ 하고, 선형은 ‘조 요물이’ 하였다. 병욱이가 뛰어가서, “얘, 우리도 내리자. 저이들도 내리시는데” 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영채도 형식과 선형을 보았다. 그러고 얼른 고개를 움촐하였다.

병욱이가 앞서고 영채는 병욱의 뒤에 서서 병욱의 그늘에 자기의 몸을 감추려는 듯이 비실비실 형식의 곁으로 온다. 병욱이가 실적 빗겨 서매 영채와 형식과는 정면으로 마주서게 되었다. 영채는 형식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음에 선형을 향하고 방그레 웃으며 은근하게 인사를 하였다. 선형도 웃으며 답례하였다. 그러나 둘이 다 일시에 얼굴을 붉혔다.

네 사람은 열을 지어서 개찰구를 나섰다. 일없는 손님들은 네 사람의 행색을 유심히 보며 혹 웃기도 하고 수군수군하기도 한다. 마치 형식이가 세 누이를 데리고 가는 것 같다. 대합실에서 여관 하인에게 짐을 맡기고 네 사람은 그 하인의 뒤를 따라 나가다가 정거장 모퉁이에 서서 붉은 물이 굽실굽실하는 낙동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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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물 보셔요!” 하고 병욱이가 가시 돋은 철사에 배를 대고 허리를 굽히며 소리를 친다. 다른 세 사람도 속으로는 ‘저 물 보게’ 하면서도 아무도 입 밖에 말을 내지는 아니한다.

“저것 보게. 저기 저 집들이 반이나 잠겼습니다그려!” 하고 마산선으로 갈려 나가는 길가에 있는 초가집들을 가리킨다. 과연 대단한 물이로다. 좌우편 산을 남겨 놓고는 온통 시뻘건 흙물이로다. 강 한가운데로 굼실굼실 소용돌이를 쳐가며 흘러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그 물들이 좌우편에 늘어선 산굽이를 파서 얼마 아니 되면 그 산들의 밑이 빠져 나갈 것 같다.

길이 좁아서 미처 빠지지를 못하여 우묵우묵한 웅커리(웅덩이)라는 웅커리는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쓸어들여서 진을 치고 앞선 물들이 다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길을 잃은 물은 사람 사는 촌중에까지 침입하여 사람들을 다 내어몰고 방 안, 부엌, 벽장 할 것 없이 온통 점령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업고 늙은이를 이끌고 높은 데 높은 데를 찾아 산으로 기어오른다. 사람들이 (중히 여기고) 중히 여기어 남을 주기는커녕 잠깐 만져만 보자고 하여도 눈이 벌개지며 “못 한다” 하던 모든 세간을 그 벌건 물들이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띄워 가지고 왔다갔다하다가 물결에 강 한복판으로 집어던져 빙글빙글 곤두박질을 하며 한정없는 바다로 흘려내려 보낸다.

사람들이 여름내에 애써서 길러 놓은 곡식들도 그 붉은 물결 속에서 부다끼고 또 부다끼어 그 약한 허리가 부러지는 것도 있을 것이요, 그 부드러운 뿌리가 끊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라. 장차 누렇게 열매를 맺어 가을밤 골안개에 무거운 고개를 숙이려 하던 벼의 꽃도 다 말이 못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온 땅은 전혀 붉은 물의 지배하(支配下)에 들어가고 말았다.

비는 그쳤건마는 하늘에는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검은 구름장이 뭉글뭉글 떠돈다. 부리나케 동편을 향하고 달아나다가는 무슨 생각이 나는지 또 서편을 향하고 몰려간다. 이따금 참다못한 듯이 붉은(굵은)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진다.

벌거벗은 높은 산에는 갑자기 된 폭포와 시내가 거꾸로 매어달린 듯이, 마치 검은 바탕에다가 여기저기 되는 대로 흰 줄을 그어 놓은 것 같다. 그 개천들이 벌거벗은 산들의 살을 깎고, 뼈를 우귀어 가지고 내려오는 소리가 무섭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와 합하여 웅대한 합주(合奏)를 듣는 것 같다.

땅은 목말랐던 판에 먹을 수 있는 대로 실컷 물을 먹어서 무럭무럭하게 되었다. 마치 지심(地心)까지 들여져 젖을 것 같다. 하늘 위이며 땅 밑이 온통 물 세상이로다. 이 물 세상에 서서 사람들은 ‘어찌 되려는고’ 하고 하늘만 우러러본다. 병욱은 다시,

“이렇게 물이 많이 나서 흉년이나 아니 들까요?” 하고 형식을 본다. 형식도 우적우적 높은 땅으로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섰다가 고개를 병욱에게로 돌리며,

“글쎄올시다. 이제라도 곧 비가 그쳤으면 좋으련마는 이제 하루만 더 오면 연사는 말이 아니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에 세 처녀는 일제히 형식의 입을 바라본다. 그네의 속에는 개인(個人)을 뛰어난 일종의 근심과 두려움이 찬다. ‘큰물’, ‘흉년’ 하는 생각과, 물소리와 뭉굴뭉굴하는 구름과, 집을 잃고 높은 땅으로 기어오르는 사람은 그네로 하여금 개인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공통한 생각…… 즉 사람으로 저마다 가지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선형도,

“이제 비가 그치면 오늘 안으로 이 물이 다 찔까요?” 하고 형식을 본다.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갈걸요” 한다.

“상류(上流)에 비가 아니 오면 곧 찌지마는 상류에 비가 오면……” 하고 영채가 연전 평양은 비도 아니 오는데 대동강이 범람하던 생각을 한다.

“평양 시가에도 물이 들어올 때가 있나요?” 하고 선형이가 영채를 보며 묻는다.

“들어오구말구요. 성내에는 별로 들어오는 일이 없지마는 외성에는 흔히 들어옵니다. 그저께도 외성 신시가로 배를 탔다구(타구) 다녔는데요” 하고 선형의 눈을 실적 본다. 선형이 얼른 눈을 피하였다. 병욱은 한참 듣다가 빙긋 웃으며 속으로, ‘너희들이 잘 이야기를 한다’ 하였다. 영채는 병욱의 웃는 것을 보고 한 걸음 병욱에게 가까이 가며 남에게 아니 보이게 가만히 병욱의 손을 잡는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네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저 보고 싶은 데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공통한 생각을 버리고 각각 제가 되었다. 그러고 본즉 여기 서서 구경할 재미도 없어졌다. 그래도 그냥 우두커니 섰다가 의논한 듯이 네 사람은 슬몃 발을 돌려 거기서 십여 보가 다 못 되는 여관으로 향하였다. 하녀들과 반토(지배인)가 “이랏샤이(어서 오십시오)“를 부르고 네 사람은 이층 북편 끝 하치조마(八疊間)로 인도한다. 지나가면서 보건대 각 방에는 손님이 다 찬 모양이요, 모두 무슨 이야기들을 한다. 여관은 물난 덕에 매우 흥성흥성하게 되었다. 네 사람이 각각 방석을 당기어 깔고 앉자마자 소나기가 (쏴 하고) 여관의 함석 지붕을 때린다.

“아이구, 저 집 잃은 사람들을 어찌해” 하고 세 처녀가 일시에 얼굴을 찌푸린다. 비는 좍좍 퍼붓는다. 방 안은 적적하다.


🙝 🙟


집을 잃은 무리들은 산기슭에 선 대로 비를 함빡 맞아서 전신에서 물이 쪽 흐르게 되었다. 어린아이를 안은 부인들은 허리를 굽혀서 팔과 몸으로 아이들을 가리운다. 그러나 갑자기 퍼붓는 빗발에 숨이 막혀서 으아 하고 우는 아이도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머리에서 흐르는 빗물에 섞어(섞인)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흔들거린다.

어떤 노파는 되는 대로 되어라 하는 듯이 우두커니 쭈그리고 앉아서 비에 가리운 먼산을 바라보고, 어떤 중늙은이는 머리 텁수룩한 총각을 데리고 그늘을 찾아서 뛰어간다.

여름내 김매기에 얼굴이 볕에 그을은 젊은 남녀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멀거니 서서 자기네가 애써 지어 놓은 논 있던 곳을 바라본다. 벌건 물결은 조곰 남았던 논까지도 차차 덮고야 말련다.

우르릉 하는 우레 소리가 한번 산천을 흔들 때마다 주렴 같은 비가 앞산으로 고함을 치고 들이달아서는 숨쉬듯 불어오는 동남풍에 비스듬히 휘면서 뒷산으로 달아 들어간다. 그러할 때마다 풀대 사이로 흙물이 모래를 밀고 왁 쓸려 내려온다. 또 한번 우레 소리가 나고는 또 한바탕 앞산 너머로서 모진 비가 밀려 넘어온다. 그 속에 백여 명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섰다. 처음에는 무서운 마음도 나고 슬픈 마음도 났건마는 한참 지나서는 아무러한 생각도 없이 되었다. 굵은 빗발이 깨어져라 하고 얼굴을 때릴 때마다 흑흑 느끼며 몸을 움츠릴 뿐이라.

여러 사람의 살은 싸늘하게 식었다. 입술은 파랗게 되고 몸이 덜덜덜 떨린다. 눈앞에 늘어 있는 집들에서는 조반 짓는 연기가 나온다. 그 연기도 굴뚝 밖에 나서자마자 짓쳐 들어오는 빗발에 기운을 못 쓰고 도로 쫓겨 들어가고 마는 것 같다.

비는 언제 그칠 것 같지도 아니하다. 하늘이 온통 녹아서 비가 되고 말 듯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 중에 저편 언덕에 지게를 기둥삼아 낡은 거적이 하나를 덮어 놓은 것이 있고, 그 밑에는 어떤 행주치마 입고 얼굴에 주름잡힌 노파가 입술을 물고 괴로워하는 젊은 부인을 안고 앉았다. 풀물 묻은 잠방이 입은 젊은 남자는 상투 바람으로 우뚝 서서 바람에 날리려는 섬거적을 붙들고 있다. 이 귀작이(귀)가 들먹하면 이것을 누르고 저 귀작이가 들먹하면 저것을 누른다.

노파에게 안긴 젊은 부인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몸을 비틀고 이따금 아이쿠 아이쿠 하고 소리를 친다. 그러할 때마다 노파는 더 힘껏 그 부인을 껴안아 주고 젊은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본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흙을 밀어다가 노파의 몸을 섬삼아 좌우로 흘러내려간다. 노파와 젊은 부인의 치맛자락이 흙에 묻혔다 나왔다 한다.

이윽고 우레 소리가 저 멀리 서편으로 달아나며 비가 차차 그치고 어둡던 천지가 좀 밝아진다. 산들이 모두 제 모양이 될 때에는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칼칼하게 들린다.

이때에 젊은 남자는 섬거적을 벗겨 내어 버리고 허리를 굽혀 젊은 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어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은 몸을 비틀 뿐이요, 아무 대답도 없다. 노파가 부인의 손을 만지며,

“이것 보려무나. 이렇게 전신이 얼음장같이 차구나.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화증을 내며 눈물을 흘린다.

“어떻게 하나” 하고 젊은 사람도 얼굴을 찌푸린다. 부인은 또 한번 몸을 비틀며, “아이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하고는 말끝에 울음이 나온다. 전신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얘, 그래도 어느 집에 가서 말을 해봐라. 그래도 인정이 있지, 그렇겠니?”

“어느 집에를 가요. 누가 앓는 사람을 들인답디까?”

이때에 저편으로서 지금 바로 조반을 먹은 형식의 일행이 나와서 차차 이편을 향하고 온다. 몸에서 물이 흐르는 사람들은 땅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서 말없이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다른 객들도 둘씩 셋씩 담배를 피워 물고 물구경을 나온다. 갑작 비에 흙이 다 씻겨 나가서 길은 번번하다. 다만 여기저기 도랑이 져서 물이 흘러내려갈 뿐이다. 앞서서 오던 병욱은 앓는 부인 앞에 서며,

“어디가 편치 않아요?” 할 때에 남자는 한번 실적 병욱을 보고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형식과 선형과 영채도 그 앞에 와 선다. 흙투성이가 된 부인은 또 한번 몸을 비틀며, “아이쿠!” 한다. 노파는 그 바람에 뒤로 쓰러졌다가 손에 묻은 흙을 자기의 팔과 허리에 되는 대로 문대면서,

“만삭 된 태모야요. 그런데 새벽부터 이렇게 배가 아프다고……” 하며 말끝을 못 맺는다.

“댁은 어디인데요?” 하고 형식이가 묻자,

“저 물 속에 들어갔답니다. 그 왼수의 물이…… 아아, 사람을 살려 줍시오!”

부인은 또 한번, “아이쿠!” 하며 숨이 막힐 것 같다. 병욱은 부인의 손을 만져 보더니 형식을 돌아보며,

“여봅시오, 가서 방을 하나 빌어 가지고 병인을 들여다 누입시다. 아마 산기가 있나 봅니다” 한다. 영채와 선형은 얼굴을 찡그린다. 그 중에도 선형은 무서운 것이나 본 듯이 진저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선다.

형식은 집 있는 데로 달음질을 하여 간다. 일동은 형식의 가는 양을 보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