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4/월산 따른 지녀

동짓달 그믐께 맵고 쓰린 바람은, 덩더렇게 가지만 남은 나무에서 노래를 부르고, 두꺼운 솜옷을 입은 몸도 견디기 힘들도록 찬─ 근래에 보기 드문 혹한이었다.

이 혹한임에도 불구하고 자미당(紫薇堂)을 중심으로 한 경복궁 일대는 두선거리고, 퇴조 시각이 훨씬 지난 이 때까지도 빈청(賓廳)이며 각 아문에는 노소 재상들이 그냥 남아 있고 정원에는 여섯 승지가 한사람도 퇴궐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자민당과 정원과의 사이에는 내관(內官)들이 연락부절로 내왕하였다.

세조 대왕 승하하신지 1년하고 두달─ 아직 그 복조차 벗지 못하였는데 지금 새 임금이 또한 생명에 위험을 받는 즈음이었다.

때는 명나라 성화(成化) 기축년, 태조대왕 건국하신 뒤 세종대왕의 문치(文治)와 세조 대왕의 무비(武備)를 다 겪고 나서, 인제는 반석위에 튼튼히 자리 잡은 국가이지만 그사이 연여(年餘)를 국상이라 하여 웬만한 중대한 사건은 모두 뒤로 밀어 두었었는데, 또 다시 이 국가의 위에 불행이 이르려 하니, 징그럽기도 징그러웠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귀찮았다. 장차 또 다시 삼년간은 내놓고 술도 못 먹고 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웬만한 일은 좀 (표면으로나마) 삼가야겠으니 이것이 적지 않게 귀찮았다.

그런 중에도 몇몇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더욱 마음 조리게 한 것은, 이 임금께는 후사(後嗣)가 매우 모호하다 하는 점이었다.

후사가 모호하다는 것은 도리어 그 말이 모호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후사가 모호하였다.

아드님을 보기는 보셨지만 일찍이 잃으셨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왕실의 어른 되는 정희대비(貞熹大妃 = 世祖大王 妃로 지금 임금의 어머니)의 뜻은 다른 왕손에게 왕위를 전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있었다.

본시 이 임금은 왕실의 계통으로 보자면 임시로 꾸어온 격이었다.

이전 임금인 세조 대왕께는 두 아드님이 있었다. 세조 대왕 맏아드님(후일 덕종이라고 추증한 분)을 왕세자로 책봉을 하셨다. 그런데 불행이 맏아드님인 왕세자가 세조 대왕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면, 인제는 세상 떠난 왕세자의 맏아드님을 왕세손으로 책봉을 하셨다가, 장차 종사를 부탁하는 것이 순로(順路)이다. 그런데 세조 대왕은 이 원손(元孫)보다도 왕세자의 둘째 아드님을 더 총애하셨다. 즉 작은 손주님(차손)을 더 사랑하셨다.

그러나 왕위라는 존엄한 자리는, 그렇게 귀여운 손주라고 내어 맡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한번 굴러서, 염도 내지 않았던 둘째 아드님께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런지라 이 임금이 승하하고 이 임금님이 아드님이 없으시면, 왕위가 어디로 굴러갈는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장차 왕위 갈 곳이 예측하기에 힘드니만치 자칫 처신 잘못하였다가는 어느 귀신 모르게 목 달아날는지 알 수 없다. 눈치 빠른 재상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귀중한 모가지를 잃지 않기에 전전긍긍하였다.

동짓달 그믐─ 날씨도 차거니와 사람 사람의 마음을 휘돌아다니는 이상한 바람은 더욱 찼다.

× ×

이렇게 황황히 돌아가는 대궐 대전에는, 당년 열다섯 살 나는 월산대군 부인(月山大君 夫人)이 있었다. 세조 대왕의 맏손주며느리였다.

『자 장차 어떻게 되려나?』

당연한 순서로 보자면 (신민된 자로서는 망극한 일이지만 지금의 임금이 승하하시면 왕위는 당연히 월산대군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아니, 지금이 아니라 작년 세조 대왕께서 승하하신 뒤 그 위를 이을 분은 승하하신 분의 맏손주님 되시는 월산대군님밖에는 없으실 것이다. 그것이 헛길로 굴러서, 숙(叔)에게로 갔었지만, 인제 숙마저 승하하시면 옥새의 돌아올 곳은 지아버님인 월산대군이래야 될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어른 되는 시할머님이, 시동생에게로 마음을 두는 것이 분명하였다.

비교적 사물에 대한 인식력이 조달한 월산부인은 지금 자기의 눈앞에서 어릿거리면서도 또한 자기의 몫에는 안 돌아올 듯한 거대한 보물에 대한 동경 때문에, 바야흐로 일어날 왕실의 비극에도 그다지 커다란 자극을 받지를 않았다.

× ×

동짓달 스무아흐렛날이었다.

싸라기눈이 내렸다. 그 사이에 추위를 대표하는 자인 듯이 날쌔게 부는 바람에 몰려서 두꺼이 무장한 옷 틈으로 약간 내놓은 사람들의 얼굴을 때렸다.

이러한 가운데를 자미당에서 정원으로 빈청으로─ 내관들의 내왕은 더욱 빈번하였다.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정창손(鄭昌孫) 등 중신들이 어명으로 자미당에 불리어 들어갔다. 이때는 벌써 임금은 의식을 가지지 못할 때였다. 본시 포류지질이신 위에, 세조 대왕 재궁(梓宮)을 빈전에 다섯 달을 모시고 나신 뒤에도, 지금껏 상중 소찬을 지켜오시니만치 놀랍게도 여위신 용안이 이불 밖에서 미약한 호흡을 하고 계실 따름이었다.

나이는 가장 젊지만 현직이 영의정인 직책으로 신숙주가 중신들을 대표하여 먼저 부복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전하! 신등이 참내왔습니다.』

그러나 임금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뿐더러 이 사람들이 온 것도 인식도 못하는 모양으로, 표정의 움직임조차도 없었다.

『전하! 전하!』

연거퍼 불러 보았다. 거기 대하여 비로소 약간 눈썹이 움직이는 듯하였다.

『전하! 신등이 참내하왔습니다.』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었다.

『전하, 이미 이렇게 되었사오니, 무엇보다도 종사 부탁할 분을 지시하시옵소서.』

그때였다. 발(巖) 뒤에서 말이 나왔다. 정희대비의 음성이었다.

『사직은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승계하게 하도록 세조 대왕 때부터의 하비가 계셨고, 전하께서도 아까 그 뜻으로 하명이 계셨으니까, 그렇게들 아시고 준비를 하시오.』

『네이─』

중신들은 뒤의 사관(史官)을 돌아보았다. 사관의 붓소리가 고요한 자미당에 공기를 약간 움직일 뿐이었다.

그 날 저녁, 그 임금은 재위 1년간이라는 짧은 왕 생애와 20세라는 젊은 수(壽)로서 영원한 딴 세상의 길을 떠나셨다. 이 임금의 짧은 왕 생애의 기간에 애독하던 책에 당신이 스스로 기입(記入)하고 하던 글을 따라서, 예종(睿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바쳤다.

이 임금의 뒤로, 이 임금의 조카님이요 세조 대왕의 손주님으로서, 세조 대왕 재위 중에 세상 떠난 왕세자의 작은 아드님인 자을산군이 새 임금으로 이 삼천리강토에 군림하였다.

새 임금의 형님이요 겸하여 본시의 왕위(王位)의 주인인 월산대군(月山大君 = 왕 장손)은, 위로하는 뜻으로 커다란 저택(지금 덕수궁이라 불리는, 이전에는 경운궁이라 일컬은)을 주어서 거기 거처하게 하였다.

× ×

어린 귀인 월산부인의 야망은 싹도 터보지 못하고 꺾이어 나갔다.

어디 호소도 못할 일이다. 호소는커녕 말도 못할 일이다. 말은커녕 눈치라도 보였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당해 내지 못할 일이다.

『월산이 불평을 품고 찬역을 도모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고자질을 하여 벼슬깨나 얻어 보려는 위인이 수두룩한 이판에서 조금이라도 눈치 다른 점을 보이기만 하여도 큰일이다.

게다가 대궐 안에는 패거리가 너무도 많았다. 노산(魯山) 이전의 궁인 패거리들은 세조 대왕이 모두 일소하여 버리었지만, 그 뒤에 생겨난 패거리로 볼지라도 첫째로 가장 큰 세력에 정희대비를 배경으로 삼은 궁인 패거리가 있다. 그 다음에는 지금 임금이며 월산의 어머님 되는 이를 배경으로 삼은 궁인 패거리가 있다. 그 다음에는 대행왕(예종)비를 배경으로 삼은 패거리가 있다. 그 외에 또 딴 세력을 배경으로 삼은 궁인 패거리가 있다. 대궐 안에 고귀한 과부(전왕비)가 여러분이 있는 만치, 계통 다른 궁인 갈래가 여럿이 있었다. 이 궁인들이 모두 표면으로는 화친한 듯이 보이나, 이면으로는 각각 제 패거리씩 나누어서 저편을 깎으려 한다.

이러한 판국 안에서 없는 죄라도 쓰기가 십상팔구어늘, 무슨 별다른 눈치라도 보이기만 하였다가는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

월산 내외는 마음속에는 적지 않은 불평과 불만을 품었지만, 표면으로는 하사하신 많은 재보며 전답이며 저택에 대하여 사례를 하고 딴 꿈을 단념하였다.

× ×

이씨조선 제9대째의 임금이신 신왕이 등극하신 것은 보령 13세 때였다.

임금에 대(代)수가 벌써 9대라 하나 이 아홉 분 가운데 본시부터 「장차 임금이 되실 자격」을 가지시고 대궐 안에서 탄생하여 등극까지 하신 분은, 제6대의 노산군 (후일 단종이라 추증되신 분) 단 한 분뿐이다.

태조, 정종, 태종, 세 분은 모두 고려 때에 한 신민으로 출생한 분이다. 세종대왕은 태종대왕의 아드님이라 하지만, 태종의 단지 왕자(왕세자가 아니다)로 계실 때에 더구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서, 탄생 당시에는 〈장차 왕위에 오를 분〉이라고는 생념도 못할 무명 종친이었다. 문종대왕은 세종이 한낱 왕자(양녕대군이 왕세자였다) 시대에 탄생하였으니만치 역시 왕위는 생념치 못할 분이었다. 그 뒤 단종 대왕이 비로소 〈왕세자의 맏아드님〉 즉 왕세손으로 대궐에서 탄생하신 것이다.

그 뒤를 이으신 세조 대왕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드님으로 형님이 왕세자이니치 왕위는 생념도 못하고 소년기와 청년기를 자유로이 민간에서 보낸 분이다. 예종 대왕은 세조의 아드님으로 탄생은 하였지만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날 뿐 아니라 세조가 아직 수양대군인 시절에 탄생하였으니만치 왕손은 될지언정 왕자도 못되는 분이었다.

이번에 새 임금은 세조 대왕의 세자(世子)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고, 더욱이 아버님이신 세자는 등극도 못하고 별세하셔서 그 뒤는 왕질(王侄)이 되어, 표면으로는 차차 용상과 거리가 멀어 갔지만 할아버님 되시는 세조 대왕이,

『이 아이가 영특하니 장차 사직을 맡길 만하다.』

고 전교가 있었던 까닭에 대궐 안에서는 고이고이 길렀으므로 귀인다우리만치 귀인다웠다.

다시 말하자면 창업주(創業主)나 반정주(反正主)와 같이, 전반생(前半生)은 아주 다른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임금이 된 이가 아니요, 꼭 격에 맞는 임금다우신 임금이었다. 그 위에 매우 인자하시고 총명하시고 사물에 대한 이해력과 통찰력이 강하시었다.

당신의 형님 되는 월산대군과 당신과의 사이의 델리케이트한 입장도 잘 이해하셨다. 순서로 따지자면 형님에게로 갈 왕위가 당신께로 오기 때문에 형님은 얼마나 섭섭하실까?

이 점에 대해서도 많이 유의하시고 무시로 월산을 궁중으로 청하여 들이어 잔치를 베풀고 같이 즐기며, 청하지 못할 때는 글이나 시로 수창하여 형제의 정을 조금이라도 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여기 이간 붙이는 자가 나설 틈이 없도록 하시었다.


新苽初嚼水精寒
兄弟親情忍獨看

이런 노래며,

期會親戚
聘招住妓
義雖君臣
恩則兄弟

이런 글을 늘 보내시어 의가 끊이지 않기에 노력하셨다.

월산은 왕위를 놓친 데 대해서는 약간 섭섭지 않은 것도 아니나, 아우님인 임금의 취하는 태도며 가지는 심정을 보면 눈물나도록 황송하였다.

이씨 조선 아홉대─ 이 동안 세종대왕의 어대를 제하고는 어느 대라 왕족끼리 서로 의심하고 심지어는 살육을 하고─ 이러해 보지 않은 대가 있었던가? 태조 대왕 창건 초에 벌써 〈방번 방석의 난〉이라 하여 살육의 첫 페이지를 기록하여 가지고, 그 사이 아홉 대 동안에 무죄히 참살을 당한 종친의 수효는 그 얼마나 되며 신민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지금도 임금이 자기를 의심을 하려면 얼마나 의심을 하랴? 본시 자기가 용상의 주인이거니, 임금이 자기를 만나기가 얼마나 꺼림칙하랴? 임금이 조금이라도 자기를 내심에 꺼리면, 그런 눈치를 비치기만 할지라도 「월산이 보위를 엿봅니다」고 들고 일어설 신하가 열이면 아홉이다. 이런 가운데서 자기가 지금껏 무사태평히 신명을 그냥 가지고 부귀를 그냥 누리는 것은, 오로지 임금이 지극히 우애한다는 점을 천하가 다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는 월산은 힘을 다하여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홀로 교제를 끊고 집에 숨어서 친척끼리나 청하는 잔치를 즐기며, 늘 궁중에 들어가서 아우님인 임금을 비롯하여 세 분 대비께 문안 드리고 살얼음을 밟듯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

월산 부인이 제일 오랫동안 불만을 품었던 사람이다.

대궐에 문안 들어가서 왕비(아랫 동서)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저 영화가 본시 내 것이었거니 하고 생각이 좀체 없어지지를 않았다. 윗 동서 되는 자기가 아랫 동서 되는 왕비께 꿇어 절할 때마다 마음속에는 세상에 이런 법도 있나 하였다.

그러나 차차 지내며 보매 자기의 환경과 입장이, 왕비의 그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편안하였다.

위로는 겹겹이 세 겹 대비를 모셔야 하고, 아래로는 패거리 패거리로 나누인 궁인들의 말썽 틈에 섞이어서, 수백 궁녀를 시앗으로 삼고 하루에 단 한시도 마음 놓을 기회가 없이 세월을 보내는 왕비에게 비기건대, 자기는 마음 내킬 때는 친척들이나 청하여 잔치나 하고, 궁중에서 하사하는 진찬으로 구복을 즐거이 하고, 부귀 아울러 가진 자기의 생활이 훨씬 앞섰다. 아직 슬하를 못 본 것이 좀 쓸쓸하였으나 이십 청춘에 그것은 근심까지 될 것이 아니요, 만약 근심되는 일을 억지로라도 찾아내자면, 남편 되는 월산대군이 포류 기질로 흔히 자리에 눕게 된다는 일뿐이었다.

신분이 왕형이요, 전답 노비(奴婢) 나라에 으뜸가는─ 천하 제일 팔자이었다.

×

이 월산부인의 〈근심 같지도 않던 근심〉이 그렇게 빨리 〈정말 근심〉으로 실현되리라고는 뜻도 안 하였다.

월산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시름시름 하다가 그야말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

큰병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이만 병으로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떠나지 않을까 하는 근심까지도 하여본 일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갑자기 변을 만난 것이었다.

이때에는 과연 월산부인은 눈앞이 아득하였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의식(衣食)의 걱정이 아니었다. 애욕의 걱정도 아니었다. 의식, 애욕, 이런 문제를 모두 초월하여 다만 앞이 딱 막혔다.

생각하여 보면, 이 세상의 남녀라는 것은 다 한때는 (원칙상) 부부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원칙상 한날 한시에 죽게는 마련되지 않은 것이라, 홀아비가 되든가 과부가 되든가 둘 가운데 한가지는 반드시 되는 법이다. 자기가 지금 당한 경우도 말하자면 사람의 살림살이의 한 부분, 한 과정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치로 따져 보자면 이런 것이로되, 급기야 자기가 당하고 보니 감정이라는 것은 이치로는 결코 해석이 되는 바가 아니었다.

『야, 내 눈이 이상한지 참말 그런지 이상하구나! 해는 떴는데 날이 왜 이리 어두컴컴하냐?』

오라비 박원종(朴元宗)에게 대하여 월산부인이 물어본 말이었다.

하다못해 자식이라도 있으면 좀 위로라도 되련만, 불행히 아직 슬하도 보기 전에 지아버님을 잃고 보니 인제는 대(代)까지 끊어졌다.

망극할 따름이었다. 목을 놓아 울어보나 가신 임의 대답이야 어찌 들으랴?

×

종친이라는 것은 도대체 몸가짐이며 거처 처신을 조심하여야 하는 것인 위에, 더욱이 홀몸까지 되었으니 더 삼가야 한다. 월산 떠난 뒤부터는 궁중과의 교섭도 자연히 줄고, 교섭이 줄으니만치 소원하여지기도 하였다.

하늘은 수(壽)를 빌리심에 월산 형제에게는 왜 그다지도 인색하셨는지, 월산 떠난 지 몇 해가 못 지나서 월산의 아우님인 임금님도 승하하셨다. 남자 삼십팔 세 한창 장년이시거늘, 이 임금 승하하시고 승하하신 임금의 원자 되시는 분이 십구 세라는 청춘으로 등극하셨다. 승하하신 임금께는 성종(成宗)이라 묘호를 바쳤다. 새 임금은 후일 연산군(燕山君)이라 강봉(降封)이 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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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되는 임금까지도 승하하시어 궁중과도 더욱 소원하게 된 월산부인은 인제 남은 여생을 오로지 먼저 가신 지아비님을 사모하고 즐기는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여승과 같이 깨끗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먼저 가신 임을 그리고 사모하다가 수 다하면 내생에서 다시 만나 금생에 다하지 못한 정회를 풀리라.

×

지금의 새 임금께는 장차 비극적으로 전개될 참화의 원인이 다분히 내포(內包)되어 있었다.

지금 임금의 친어머니요. 선왕의 왕비 되는 윤씨는 죄없이 폐한 바 되고 궁중에서 쫓겨나서 마지막에는 죽음까지 받았다.

죄가 없다 하면 어폐가 있다. 죄라 지목하면 죄랄 수도 있는 죄가 있기는 하였다. 먼젓번 임금은 태평성대의 군왕으로서, 매일 종친이며 사랑하는 신하들을 데리시고 잔치를 즐기시고, 그러니만치 기녀(妓女)며 궁녀들도 많이 가까이 하셨다. 그런데 왕비는 약간 질투심이 강하였다.

여인을 가까이 하시는 임금과, 질투 강한 왕비─ 물론 감정이라는 것은 군왕이나 신민이나 일반이라, 충돌도 생기고 마지막에는 폐출(廢出)되고 사사(賜死)되고…….

선왕은 이 일이 장차 큰 비극을 빚어낼 줄은 뜻도 못 하였다. 윤씨를 폐출한 뒤에 새 왕비를 맞아들이고 원자로 하여금 이 왕비를 생모로 알게 하면 되리라, 이쯤으로 믿어두었다. 사실 신왕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이 신왕이 즉위한 뒤에 신왕의 외조모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였다.

신왕은 여기서 번민하였다. 어머님의 죽음을 동정하랴? 그러자면 아버님을 원수로 삼아야 한다. 아버님의 하신 일을 시인하랴? 그러자면 어머님의 원한은 누구에게 가랴? 번민의 끝에는 술을 불렀다. 술을 받으면 광포하여졌다.

갑자의 사화(士禍), 무오의 사화─ 온갖 난정과 난행이 전개되고 실행되었다.

×

궁중과 국민이 이렇듯 난장판이 되었을 때에, 월산부인은 대궐의 부름으로 대궐로 들어갔다. 왕세자를 보육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월산부인은 이 직책을 달갑게 받았다. 지금 세조 대왕의 혈통으로, 적출(嫡出)로는 오직 임금이 계실 따름이다. 지금 자기가 장차 맡아 보육하려는 세자야말로, 세조 대왕의 유일한 혈통이다. 몸이 세조 대왕의 혈통에 적을 두었으매, 어찌 이를 소홀히 여기랴. 지금의 임금은 기위 선왕이 처사 잘못하시기 때문에 후일 폭군이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셨으나, 그의 아드님을 잘 보육하여 세조 대왕의 혈통 보존에 힘쓰자. 아버님이 잃은 명예를 아드님이 다시 회복하도록 하여 드리자.

월산부인은 광대한 그의 저택을 노비들에게 일임하고 자기는 세자 보육을 위하여 홀홀히 입궐하였다.

×

비교적 영특한 세자였다. 장차 장성하면 아버님이 잃은 명예를 넉넉히 다시 회복할 듯이 보였다.

월산부인은 세자가 젖을 먹을 때만 유모에게 맡기고, 다른 때는 통 자기가 맡아서 심지어 기저귀 갈아대는 것까지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세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정이 들게 하고, 차차 장래 철이 들어오면 사람으로서의 더욱이 왕자(王者)로서의 훈육을 베풀어보려 하였다.

그 어떤 날이었다.

그 날도 종일 세자를 데리고 노느라고 피곤한 월산부인은, 저녁에 세자를 유모에게 맡기고, 자기는 자기의 침소로 돌아왔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퍽 많이 남아 있는 자색, 더욱이 일찍이 고귀한 가문에 출가하여 지금껏 고귀한 생활을 계속하였고, 해산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았고, 청춘에 홀몸이 된 그는, 벌써 사십이 넘었지만 때때로는 사람의 눈을 현혹하게까지 하는 자색이 그냥 퍽 많이 남아 있었다.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탄식하였다. 주인 없는 자색이로다. 볼일이 없는 아름다움이로다. 아아 왜 그다지도 일찌기 돌아가셨나?

눈물지려는 얼굴을 거울에서 떼고, 궁녀의 펴주는 금침에 몸을 눕혔다.

『안녕히 쉽시요.』

『오냐, 물러가거라.』

문을 열고 물러나가 차차 멀어가는 궁녀의 발소리.

×

깜짝 놀랐다. 놀라서 깨니 가슴 위에 태산이 덧엎인 듯 무겁다. 물컥 물컥 나는 술 내음새. 몸을 빼치려 해 보았으나, 놀라운 완력에 끼어 움쩍을 할 수 없다.

『누구요?』

작으나마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어 보았다. 그러나 대답도 없었다.

『누구야? 이─』

다시 이번은 고함 지르려 하였다.

그때였다. 대답이 비로서 들렸다─

『나요?』

『?─』

『아! 상감마마! 이게─』

더 말이 안 나왔다. 더 힘도 못 썼다. 더 뿌리치지도 못하였다. 하느님 맙시사, 하느님 맙시사. ─마음속으로 연하여 부르짖을 따름이었다.

×

밝는 날 아침, 임금은 월산부인에게 비빈의 예에 의지한 관복을 하사하고 그 품질도 비빈과 동렬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월산부인의 그림자는 대궐 안 어디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

이전에는 죽으면 지하에 먼저 가신 임을 뵙겠다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돌아갈 곳조차 가지지 못한 자기였다.

대궐을 뛰쳐 나온 발은 곧자로 자기 집으로 향하였지만, 대문까지 이르러 생각하매, 이것은 월산댁이지 자기 집이 아니었다. 더럽힌 몸이 이제 무슨 면목으로 월산댁으로 들어갈까?

성으로 기어올랐다. 북으로 무악재로, 내키지 않는 발을 옮겨 놓았다.

새벽의 청신한 공기─ 이 청신한 공기조차 자기의 더럽힌 몸과 대조되어 생각되어, 그를 괴롭게 하였다.

무악에서 백악으로─ 가파로운 바위들이며 곧 굴러날 듯한 돌들을 서슴지 않고 밟으며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돌아다니기를 사흘. 배고픈 줄도 몰랐다. 목마른 줄도 몰랐다. 단지 자기는 천하의 죄인이라는 생각뿐이 그의 가슴에 사무치고 넘쳐서 흐를 따름이었다. 그는 이제는 이씨 문의 한 며느리도 아니요, 박씨 문의 한 딸도 아니었다. 천하의 성도 없는 씨(氏)도 없는 한 근본없는 여인일 따름이었다.

×

그러나 사흘 뒤 그는 종내 갈 데 없이, 월산댁 대문 밖에 와서 밤중에 귀를 기우렸다. 인제는 갈 데도 없는 그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씨 문 위패의 앞에밖에는 나아갈 데가 없은 것이었다.

하인들의 눈을 이리저리 피해 가면서, 겨우 남편의 위패 모신 곳까지 이르른 그는 삼단 같은 머리를 잘라 헤치고 꿇어앉아서 빌었다.

─ 빌 염치도 없습니다. 이 앞에 나올 염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염치를 무릅쓰고 이곳에 나온 것은 단지 오로지 당신 앞에 다시 한번 이 더러운 몸이나마 나타내고 싶은 더러운 정에서 나온 바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진일을 울고는 빌고 빌고는 다시 울고, 이러기를 나흘─ 그가 경복궁을 나서서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돌아다닌지 만 이레째 되는 날 더러운 몸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십수 년 만에 그의 남편을 만나려 영원의 나라로 향하였다. 그때는 그의 몸에는 그사이 임금에게서 전염된 바, 더럽고 창피한 성병이 발창이 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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