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사담집 4/원두표

여주 벽절, 앞강에 무르익은 저녁놀─

붉게 자줏빛으로 번갈아 반짝거리는 저녁놀은 꿈과 같이 아름다웠다. 약한 바람결에 뛰노는 물결을 따라, 금놀 은놀은 천 조각 만 조각에 갈라지면서 제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개로다!』

강언덕 작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이 움직이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는 한 과객(過客)─ 나이는 삼십 전후 건장한 체격, 광채 있는 눈과 과단성 있어 보이는 이마.

언제부터나 서 있는 사람인지, 언제까지나 서 있으려는 사람인지 작다란 묏산자 봇짐을 등에 지고, 수수히 감발을 하였으나 눈의 광채, 이마의 과단성으로 보아서 심상치 않은 과객이었다.

때는 광해조(光海朝) 4년 5월 중순. 절기로 보아서는 여름도 중간이라 하나, 아직 봄이 때를 온전히 벗지 못한 첫여름, 모랫바닥을 기던 잉어 새끼들도 때 만났다고 물낯 위에 팔딱팔딱 나부끼고 있었다. 엊그제 소나기 한줄기 온 비도, 사태까지는 이루지 않은 모양으로 앞강의 물은 옷고름을 담그면 물들으리만치 푸르렀다.

한참을 강물 위에서 빛을 자랑하던 저녁놀도 차차 자줏빛으로 검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황혼은 차차 세계를 덮기 시작하였다. 작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정신 잃은 사람같이 강물에 서리는 저녁놀만 굽어보고 있던 과객, 자기의 사위에 황혼의 빛이 무르녹기 시작한 뒤에 비로소 바위에서 내렸다.

『음, 날도 차차 어두워가는군. 이젠 어디 읍내로 들어가 볼까?』

저녁놀을 즐기던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날이 기울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저녁놀을 구경하고 있던 것이었다.

객은 강변에서 한길로 들어섰다. 읍내로 향하여 고요히 발을 옮겼다. 무엇을 깊이 생각함인지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서─

걸음마다 주는 그의 힘에 대지는 쿵쿵 울리었다.

강변을 떠나서 여주 읍내로 들어온 그 과객은, 여주는 초행인 모양으로 여남은 집 지나서는 길을 묻고, 여남은 집 지나서는 또 길을 묻고, 이리하여 그가 목적한 여주 호장의 집에까지 이른 때는 벌써 첫여름 기나긴 날도 다 어둡고 고스란한 밤 가운데 천하가 잠기려 할 때었다.

× ×

『대감. 원두표(元斗杓)올시다』

『누구?』

『원두표올시다. 문안 드리러 왔습니다』

『이게 누구냐!』

문안 드리는 사람은 아까의 앞 강변의 과객. 지금의 왕정에 커다란 불평을 품고, 개혁을 꾀하려고 멀리 배소의 노정승을 찾아온 혈기의 지사 원두표.

이 문안을 받는 사람은 완평부원군 오리 이원익으로서 명종 때에 문과에 급제를 하여 선조 대왕 때에는 영의정까지 지내고, 기나긴 정치 생활을 하다가 선조의 대를 지나 광해조에 이르러서 멀리 홍천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 후 중도부처가 되어 지금 여주 호장의 집에 머물러 있는, 만인 숭배의 학자요 정치가였다.

『그래, 자네가 원서방이란 말인가?』

『네, 못 뵈온지 팔구년, 그새 노체 무양하십니까?』

『음. 나는 탈 없이 지나네.』

『시생도 몸만은 그렁그렁 무고히 지났습니다.』

쳐다보는 눈, 굽어보는 눈─ 그것은 십년에 가까운 날짜를 서로 남북에 갈리어 있던 정회를 한꺼번에 풀려는 눈자위였다.

『오래 뵙지 못하는 동안 기력은 어떠합신지?』

『기력도 그저 그만 하이.』

『문안은 전편으로 간간 받자왔습니다마는, 승안치 못한 지는 벌써─』

『글쎄. 팔구년 되나?』

두표는 우러러보았다. 허연 터럭, 허연 수염, 더 굵어진 주름살─ 을묘 삼월 배소로 떠날 때에, 그때의 패기가 아직 어딘가 남아 있는듯하기는 하지만, 노인에게 있어서 팔구년이라 하는 날짜는 짧지 않은 것으로서, 안면과 몸 전체에 늙은 기분이 현저히 나타나 있었다.

왜 늙지를 않았으랴! 자기로 보더라도 그 당시에는 이십살 남짓한 한창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그 의지, 역량, 억제력, 모든 점에 있어서 완숙한 한 개의 장년 남아로 변하지 않았는가?

인사와 잡담은 잠시 교환되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의 말은 좀체 정치에 미치지 않았다. 두표는 단지 인사와 잡담뿐으로 종시하였거니와, 오리 대신도 정치에 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고 두표와 마찬가지로 인사와 잡담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

고스란히 깊어가는 밤

이 밤이 꽤 깊도록 늙은 대신과 젊은 지사는 서로 호활한 웃음을 웃어가면서 잡담을 주고 받았다.

남이 듣자면 그것은 순전히 한 개 잡담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같은 길로 불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늙은 대신과 젊은 지사의 사이에는 이 우습고도 변변치 않은 잡담으로도 넉넉히 서로 의사를 통할 수가 있었다.

『대감, 시생의 집 들보가 썩어서 거진 거진 내려앉아 갑니다. 이것을 썩은 자리를 수선을 하고 손질을 해서 그냥 두어야 되겠습니까, 혹은 이 들보를 들어내고, 다른 들보를 갈아 대야겠습니까? 주저 중이올시다.』

이러한 잡담에 대하여 한참을 생각코 또 생각한 뒤에 비로소,

『갈아 내야지.』

하고 무거운 소리로 대답하는 늙은 대신─

『들보를 갈자면 서까래도 여러 개 다 갈아야겠습니다. 전에 좋은 서까래가 하나 멀리 굴러가 있던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그것도 다시 갖다가 써야겠습지요?』

이런 질문에 대하여 서슴지 않고,

『감만 낡지 않았으면 써야지.』

하고 대답하는 오리 대신─

─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임금의 정치가 부패했으니, 다른 임금을 추대하여야겠는데 거기 대감이 가담해 주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오리의 쾌락에 다름이 없었다.

× ×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는 자정도 썩 넘어서였다.

오리가 먼저 자리에 들기를 기다려서, 두표도 촛불을 끄고 자리에 들기는 들었다.

그러나 잠은 좀체 들 수가 없었다. 긴장한 정신, 언제든 자리에 들기만 하면 곧 잠이 들던 두표도 이 밤 뿐은 잠이 잘 오지를 않았다.

그것은 단지 모든 문제가 너무도 순조로이 해결되기 때문에 기뻐서 잠이 못드는 것이 아니었다. 남이 듣자면 변변치 않은 듯한 잡담으로도 자기네의 의사를 정승에게 대략 전하기도 하였고, 정승의 의사도 대략 알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큰 문제─ 가장 큰 문제가 하나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누구를 추대하느냐?

지금의 썩은 들보를 갈아 내고 다른 들보를 대신 넣는다는 점은 해결이 된 바다. 그러나 그 〈새 들보〉는 어느 들보냐?

자기네 젊은 사람 동지끼리는, 대략 내정한 바가 있다. 선왕의 다섯째 아드님이요, 지금 왕의 넷째 동생 되는 정원군의 소생인 능양군을 추대하여 새 임금으로 모시기로 대략 의논은 합치되었다. 그러나 이 의견에 대하여 오리 대신이 좋게 알는지.

선왕 선조 대왕은 자녀가 많은 분으로서 비빈의 소생이 합하여 십사남, 십일녀─ 즉 이십오 남매였다.

그 가운데서 지금 왕이 그 둘째 아드님이며, 맏아드님 임해군은 왕이 즉위 후에 해하여 버렸고, 조카님 능창군이며 정비(正妃)의 소생 영창 대군도 또한 비슷비슷한 죄명으로 처치하여 형제의 수효는 몇 분 적어졌다 하나,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형제며 형제의 소생인 조카들의 수요를 따져 보자면,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이 많은 왕형제 왕질 중에서 자기네가 마음 두는 분과 오리 대신이 마음 두는 분이 합치가 될지?

그러면 그들 젊은 동지네는 어찌하여, 그 많은 왕족 중에서 하필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하였나? 거기는 또한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대체, 이런 사건의 중심인물이 된다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이 여의하게 되면 두말 할 것 없이 자기는 왕이 되고 자기와 일을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공신이 될 것이지만, 그 일에 착오가 생기는 날에는 역적 도모라는 죄명 아래 참수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이런 일의 중심인물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이냐?

─죽음이냐?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잡는다는 커다란 결심을 한 뒤가 아니면, 좀체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일이 그만치 크거니, 웬만한 왕족네들은 그런 문제에는 관련치 않으려 피할 뿐 아니라, 그런 일에 관련하는 듯한 사람과는 교제도 꺼리고 삼가는 것이었다. 그런 문제에 관련치만 않으면 왕형제 혹은 왕질이라는 부귀 겸전한 지위를 곱다랗게 일생 유지해 나갈 것을, 섣불리 좀 더 욕심을 내다가 큰 코를 다치기가 싫어서 누구든지 꺼리는 바다

그런 가운데서, 능양군 뿐은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연전 능양의 넷째 동생 능창이 역모에 몰려서 왕옥에 갇혔다가 귀양을 갔다.

뜻 안 한 이 일에 놀란 능양은 즉시로 삼촌 왕께 사후하고 탄원하였다. 자기의 동생 능창 뿐은 결코 이런 무도한 일을 꾸밀 사람이 아닌 줄 깊이 믿는 능양은 삼촌 왕의 앞에 서명하고 탄원하고 애걸하였다. 그러다가 종내 왕에게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 능양은 방법을 바꾸어서 이번은 왕비의 오라버니 되는 유희분을 찾아서 애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유는 능양을 만나보지도 않았다. 왕비의 오라버니로 세력이 도저한 유의 눈으로 보자면 왕의 조카 능양 따위는 눈썹에도 걸리지 않았다. 능양이 유희분을 찾은 때는, 유는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던 때로 분주하다 하고 능양을 만나보지도 않았다.

능양은 이번은 다시 유희분의 첩을 만나러 갔다. 현왕의 조카로서, 세월만 순조로우면 일개 외척의 첩 따위가 무엇이냐만, 상서롭지 못한 세월에 태어난 죄로서 능양은 자기의 입술을 깨물면서 유희분의 첩을 찾았다.

그랬더니 유희분의 첩은 명랑한 웃음을 웃으면서,

『저 같은 천비야 재물 밖에는 무얼 압니까? 재물만 마음에 흡족하도록 주시면, 되고 안 되고는 모르지만 대감께 여쭈어는 봅지요.』

하여 드러내놓고 뇌물을 청하였다.

여기서 능양은 재물을 만들기에 동분서주 하였다. 값진 가산이며 할아버님 선조 대왕께서 하사하신 보물이며 헐가로 방매하여 재물을 만들기에 급급하였다.

능양은 동생 능창을 구하려고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동안, 귀양 가 있는 능창에게는 왕에게서 약사발이 내렸다. 능양의 동분서주도 드디어 동생을 구해내지 못하였다.

동생 능창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애매히 잃어버린 (능양과 능창의 아버지) 정원군은 이번 사건 때문에 울화병이 나서 얼마를 병석에서 신음하다가 아들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와 동생을 잃어버린 능양─

비록 의로 보자면 군신지간이요, 친으로 보자면 숙질지간이로되 직접 자기의 동생을 죽이고 이것을 빌미로 아버지까지 죽게 한 왕께 대하여, 능양의 분노와 원한은 컸다.

『이놈을!』

왕이 무에냐. 삼촌이 무에냐? 동생의 원수, 아버지의 원수─ 뼈를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한. 왕만치 힘이 없고 왕만치 세력이 없고 왕만치 군사가 없으니, 할 수 없이 가만 있지만, 이 원한은 끝끝내 가만둘 것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왕께 대하여 속으로 대립을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한 개의 왕질이, 왕족 중에 있었다.

지금의 이 들보를 갈아 내려는 젊은 지사들은 새 들보의 재목으로서 곧 이 능양에게 착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교섭과 타협은 거침없이 끝이 나고, 최후에 이 일의 지휘자가 되어 주기를 빌려 오리 대신에게로 원두표가 오게 된 것이었다.

× ×

자기네(원두표의 동지)는 반정의 중심인물을 능양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대신의 흉중에는 어떤 배포가 있을가?

자리에는 들었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 해결을 얻지 못한 두표는, 잠을 들지를 못하였다. 고요한 가운데 두표의 숨소리. 오리 대신의 숨소리. 멀리서는 닭의 우는 소리─ 밤은 차차 더 깊어갔다.

드디어 두표는 잠에 취한 채, 한번 벌떡 몸을 뒤채며 그의 다리를 대신의 허리에 가로 걸치어 놓았다. 건강한 남자의 무겁고 억센 다리를 노쇠한 몸 위에다 걸쳐 놓았으니 반응은 곧 있었다. 오리는 양손을 들어서 조심 조심히, 자기의 허리에 가로 걸치운 두표의 무거운 다리를 도로 저편으로 밀어놓았다. 거기 대한 반항인 듯이 두표가 두 번째 또 다리를 올려놓을 때에도 오리는 아무 말도 없이 고요히 그 다리를 치워놓을 뿐이었다.

대신도 아직 잠이 못 들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잠이 들었으면 두표의 다리를 역정 내며 밀쳐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잘 것이지, 이렇게 조심 조심히 치워놓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분명히 본 뒤에 두표는 잠꼬대같이 중얼중얼 소리를 내었다

『능양군밖에 없으시지. 들보─ 능양군─ 들─』

말을 맺지를 못하였다. 오리 대신의 손이 콱 두표의 입을 덮기 때문이었다.

『으─ㅁ!』

두표는 그냥 잠자는 체하며, 오리 대신의 손을 떨쳐 버렸다.

고요한 밤의 침묵─.

그 침묵이 잠시 계속된 뒤에 다시 두표의 입에서 나오는 잠꼬대─

『들보감. 능양군─』

그냥 잠꼬대를 계속하려는 두표의 입에 두 번째 힘있게 덮이는 늙은 손.

연하여 (노인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으리만치) 힘있는 손으로 두표의 가슴을 흔들었다.

약간 가슴을 흔들린 뒤에 두표는 잠에서 깨듯 부시시 눈을 떴다. 뜰 때에 노인의 입은 두표의 귀에 꽉 와 붙었다.

『원서방, 잠꼬대 삼가게.』

『네? 네…… 네……』

여전히 잠꼬대같이 명료치 못하게 우무려뜨려 버리고, 다시 자는 듯이 코를 골기 시작은 하였지만, 두표의 젊은 가슴은 희열과 만족으로 터질 듯하였다.

오리도 단 한 가지 반정의 중심인물이 될 사람이 누구인 줄을 몰라서 잠을 못 들던 모양이었다. 두표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막아버린 뒤에는, 고요히 잠이 들었다.

짐짓 코를 골며 잠든 체하고 있던 두표는 대신이 분명히 잠이 들은 것을 본 뒤에는 소리를 감추어 가지고 몸을 일으켰다.

끄르지도 않고 그냥 놓아두었던 묏산자 봇짐을 오른손으로 더듬어 찾아가지고 두표는 잠든 오리 대신에게 하직도 없이, 여주 호장의 집을 뒤로 어두운 밤의 길을 나섰다.

× ×

아침 돋는 해를 온몸에 받고 다시 서울로 길을 채는 원두표─

인제는 일의 팔분은 다 치렀다. 다만 거사(擧事)라 하는 것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동지를 대표하여 여주로 내려올 때는, 커다란 짐이 그의 어깨에 짊어지어 있었다. 거사를 하고 성공을 한다 할지라도, 국민의 사이에는 아무 명망도 없는 자기네 젊은이끼리만 하여 놓으면, 그것은 왕위나 엿보는 한 역적 행동으로 밖에는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온 국민의 신망을 지고 있는 완평부원군 오리 이원익이 이번 일에 가담한 뒤에야, 비로소 국민의 신뢰가 이리로 돌아올 것이다.

기언가, 미언가. 오리 대신의 머리의 기울어지는 방향을 알고자 내려왔던 두표는 완전히 자기의 사명을 다 하고 개선장군의 기개로서 최후의 거사를 의논하려 동지들에게로 길을 채는 것이었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신하가 신하답지 않아야 하느냐?』

『왕이 왕답지 못하여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느냐?』

동지를 규합할 때에 때때로 그의 머리를 엄습하던 이런 번민도, 인제는 그를 괴롭게 하지 못하였다.

단지, 그의 앞에는 광명이 있을 뿐이었다. 슬기롭고 인자롭고 자비심 많은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노련하고 박학한 오리를 수령으로 이고, 용감하고 과단성 있고 무서움을 모르는 자기네들이 장차 주장해 나갈 이 나라는, 행복과 광명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넓은 강역, 가멸은 백성, 굳센 군대, 기름진 땅! 그 모든 것을 주장할 자는, 지, 인, 용이 구비한 능양군 이하 자기네 일당이 아닌가?

여름날 빛을 자랑하는 청청한 초목들도 두표의 이 길을 축복하는 듯하였다. 지저귀는 새, 흐르는 샘물, 솔솔 부는 바람, 어느 것 하나 그의 전도를 축복치 않는 자가 없는 듯하였다.

×

찬위(纂位)와 반정(反正).

같은 행동을 명명한 이 두 가지 명색 가운데 결코 찬위라는 이름은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신중히 하여, 신하가 앞장서고 장래 왕자가 그늘에 숨어서 한 점의 착오도 없이 일을 진행시켜서 장래에라도 찬위에 가담한 역적이라는 이름을 남겨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까옥─』

번쩍 쳐다보니 한 마리의 까마귀였다.

『까옥.』

『쉬─』

『까옥.』

웬일인지 알 수 없었다. 두표는 몸이 오싹하였다. 호랑이가 앞길을 막는다 할지라도, 눈 한 번 깜빡 안 할 두표가 이 세 마디의 ᄁᆞ마귀 소리에 오싹하였다.

『쉬─』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굽어보았다. 그 굽어보는 까마귀를 향하여 팔을 내어 둘렀지만, 까마귀는 그냥 천연히 두표를 굽어보고 있었다.

『쉬─ 저리 가─』

몇 번을 고함을 지르고 호령을 하고, 마지막에는 돌멩이를 던질 때에야 까마귀는 한 번 더 까옥 소리를 하고 저편 산으로 날아갔다.

살펴보매 벌써 망우리(忘憂里) 고개도 넘어섰다. 장차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려는 서울도 이제는 지척이었다.

× ×

아까의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던 명랑한 기분은 몇 마디 까마귀 소리에 모두 사라져 없어졌다.

『무슨 불길한 일이─』

─내 위에 장차 미치느냐, 서울 동지들의 위에 미쳤느냐?

석양녘─

온 천하를 붉게 물들인 석양빛은, 용서 없이 두표의 땀 흐르는 몸을 비추고 있다. 이 황혼의 햇빛을 받고, 두표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 을 조이면서 서울로 서울로 길을 재쳤다.

얼마쯤 가다가 두표는 아무 뜻없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

예사 행객일 테지. 그러나 선비도 아니요, 농군도 아니요, 관속도 아니요 또는 하인도 아닌 수상한 장정 한 명이 자기의 뒤 삼십여 보쯤 되는 거리에서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간다.

「보통 행객일 게다. 의심하자면 무엇인들 의심치 못하겠느냐. 그렇지만 의심할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자기의 마음에 채찍질을 하면서 두표는 그냥 길을 채었다.

그러나 일단 의심의 눈을 던졌으니만치 뒤를 돌아는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따르는 사람의 일거일동은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참 가다 보니 같은 차림을 차린 수상한 사람이 또 내달았다. 또 한참 더 가다 보니 또 내달았다.

여기서 두표는 비로소 자기의 몸이 포교들의 포위 중에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채자 두표의 마음은 긴장되었다.

인제는 〈도망하느냐〉, 〈천연히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이냐〉, 〈삶이냐〉의 문제였다.

잡히기만 하면 죽을 것이다. 죽지 않자면 도망할 길밖에는 없었다.

한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러나, 살필 때에 그는 속으로 절망의 부르짖음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풀마다 나무 뒤마다 포교들의 그림자는 나 비치었다. 한번 지휘자의 군호만 있으면 두표를 향하여 벌의 떼 같이 몰려들 것이었다.

그러나 주저함을 허락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 〈도망〉이라는 한 가지의 활로밖에는 찾아낼 수가 없는 두표는, 등에 짊어졌던 묏산자 보퉁이를 던졌다. 동시에 그의 몸은 나는 듯이 한길에서 벗어나서 왼편 수풀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두표의 도망의 첫걸음인 동시에 또한 마지막 걸음이었다. 황급하여 똑똑이 살피지 못하고 도망의 첫걸음을 내어 짚은 두표는, 포교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서 지키고 있는 그 품 안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이놈!』

『이놈!』

맹렬한 격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격투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사면에서 벌떼와 같이 몰려드는 포교의 무리의 가운데서는 두표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닥치는 대로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고 머리로 받고 하여, 포교 칠팔명은 거진 죽게까지 되었지만, 두표도 드디어 그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에이─ 이, 무서운 놈!』

포장이 자기의 옷의 먼지를 툭 털면서 이렇게 탄식할 때는, 격투도 이미 끝나고 두표는 실컷 두들겨 맞아서 기절을 하고 오라를 진 뒤였다.

× ×

아픔을 호소하는 자기의 신음 소리에 놀라서, 두표는 펄떡 정신이 들었다.

곳은 형조였다. 시각은 어느 때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깊은 밤이었다.

중한 죄인이라고 목에는 칼집을 씌우고 손목 발목에는 고랑을 채워서 꼼짝할 수 없는 몸을 두표는 간신히 조금 움직여 보았다. 팔다리, 허리, 가슴, 할 것 없이 온몸은 마치 부젓가락으로 지지는 듯이 쏘았다.

『으─ㅁ!』

타는 듯한 목. 그러나 물 한 모금 달라 한들 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중한 죄인이라고 옥졸은 이 깊은 밤에도 졸음 오는 눈을 부비어 가면서 지키고 있지만, 한 모금은커녕 한 방울도 주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나? 망우리 고개를 넘어서 주정소를 지나서 한참 더 오다가 포교들에게 포위되어 맹렬한 격투를 시작한 것까지는 기억 되나, 그 뒤는 정신을 잃은 모양으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자기의 신음 소리에 놀라서 깨보니, 몸은 형조에 잡힌 바 되고 몸이 쑤시는 듯이 아플 뿐이었다.

『으─』

다시 나오려는 신음성. 그러나 이번은 그 신음성을 꾹 눌렀다.

역모라는 죄명으로 잡히기만 하면 곡직을 묻지 않고 목을 베어 버리는 시대. 화적이나 강간률로 잡히지 않을 자기이매, 죄명을 입는다 하면 역모 하나밖에는 없을 것이다. 역모라는 죄명으로 잡혔다 하면, 다시는 밝은 햇빛을 보지를 못할 신상이다.

다시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죽어버릴 자기─ 사내답지 못하게 요만 아픔에 참지 못하여 신음성을 내인단 것은 말대까지의 치욕이다. 신음성을 참아라─ 요만 아픔이 무엇이냐? 내 눈앞에는, 요만 아픔과는 비기지도 못할 〈죽음〉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가로막혀 있지 않으냐?

내일부터 자기의 몸 위에 놀랄만한 악형이 내릴 것은 명약관화다. 도당이 누구누구냐? 중심인물이 누구냐? 지휘자가 누구냐? 입을 벌리지 않으려는 사람에게서 억지로 말을 끌어내려는 수단이매, 가장 밤혹하고 가장 무서운 악형이 자기에게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악형을 그냥 견디고 입을 봉하자, 혀가 끊어지고, 이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입뿐은 결코 벌리지 말자.

나는 이미 잡힌 몸으로서 죽음을 각오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니 할 수 없거니와 내 입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고, 나아가서는 목적한 중대한 일이 중도에 꺾이지 않도록─

무서운 아픔 때문에 연하여 나오려는 신음성을 이를 악물고 참아가면서 두표는 자기의 결심을 채찍질하였다.

이러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가 절치하게 분히 생각하는 것은, 누가 이번에 형조에 고변을 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동지냐?」

동지를 손꼽아 보았다. 그러나 굳게 맹서한 동지들은, 아무리 꼽아 보고 꼽아 보고 의심하고 다시 의심해 보아도 의심을 둘 만한 사람이 꼽혀지지 않았다.

그럼 능양이냐?

그러나 이런 일도 있을 수 없다. 능양의 인격을 믿는다는 것은 둘째 두고라도 이런 고변을 하였다가는 의심 많은 왕께 제일 먼저 의심을 받을 사람은 능양 자기에 틀림이 없다. 능양도 고변자가 아니다.

자기네 동지의 사이에서 고변자를 발견할 수 없으면 고변자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자기네 동지 이외에는 절대로 알 사람이 없는 이 비밀을 고변을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온전히 다른 의미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때의 제도에 있어서, 역적 도모를 고변하는 자가 있으면 피고자는 불문곡직하고 참형이요 소인(訴人)은 불문곡직하고 벼슬을 주었다. 그러면 이번 고변자는 자기네의 도당의 비밀 행동은 전연 모르고 단지 벼슬 얻어 할 욕심에 그럴듯한 인물 하나를 골라서 고변한다는 것이 불행히 원두표 자기에게 씌워진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없다.

그럴진대, 자기네 도당의 행동이라든가는 조정에서는 전연 알지 못할 것이며, 어떤 벼슬에 눈 어두운 자의 고변에 자기 한 사람 뿐을 잡아온 데 지나지 못할 것이다.

뼈를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고변자의 행동이언만, 인제라도 자기의 입만 꾹 봉하여 버리면 자기네 도당의 행동이며 계획은 감쪽같이 감추어질 것이다.

입을 봉하자. 입을 봉하자. 혀가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내 입을 봉하자.

캄캄한 옥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도 없는 아픈 몸을 간신히 뒤채며, 두표는 결심에 결심을 더하였다.

여름밤은 짧다. 하지만 고통 가운데서 보내는 밤은 짧지도 않았다. 그 짧지 않은 밤을, 두표는 전전히 구을면서도 신음성 한마디 내지 않고 보냈다.

×

형조에서 금부로.

금부에서 두표에게 대한 악형은 시작되었다. 금부에 갖추어 있는 온갖 형구를 다 사용하면서 하는 문초에 대해서도, 두표는 한 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신음조차 한 번도 내어보지 않았다.

살이 터지고 가죽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갖은 악형을 다하여 보았지만, 두표의 입은 한 번의 부르짖음조차 내지 않았다.

『이놈! 실토를 못 하겠냐?』

『괴수가 누구냐?』

『도당은 몇 놈이냐?』

연거푸 악형을 견디고 악형에 버티다 못하여 기절을 하면, 얼굴에 물을 뿌리어서 정신을 들게 하고 다시 악형을 시작하고─ 이리하여 아침에서 시작하여 밤까지, 잠깐 밤을 쉬인 뒤에는 이튿날 다시 아침에서 시작하여 밤까지, 매일 계속되는 문초에 대해서도 한 번도 입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너무 시진하여 정신없이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까 하고 문초는 그냥 계속되었으나 정신을 잃으면 잃었지 입은 열지 않았다. 도당도 없는 자기는 그런 일은 계획한 적도 없노라는 발명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나무토막을 갖다 놓고 두들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발명도 없고 신음도 없고 자복도 안 하는─ 그것은 신경이며 감정이 없는 한 개의 물체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왕의 친국에 대해서도 여전히 침묵으로 응할 뿐이었다.

그러나, 금부의 본 바에는 분명히 원두표는 무슨 계획을 하던 인물이며 도당도 분명히 있었다.

첫째로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죄인이라도 몇 번 거짓말은 하여 보는 것이어늘, 두표는 자초지종으로 발명도 안 하는 것이 그에게 확실히 무슨 음모가 있었다는 증거점이요, 그보다도 더욱 두표에게 도당이 있었다는 거로는 두표의 가족 실종 사건이었다.

두표가 형조에 잡힌 그다음 날, 두표의 가족들을 잡으러 포교가 필동 두표의 집에 이르매, 가족은 한 명도 없어지고 덩더렇게 비인 집만 남아 있었다.

두표가 형조에 잡혔다는 점이며, 죄명은 역모라는 것을 벌써 두표의 가족에게 내통한 사람이 있었기에 이렇게 손 빨리 피신을 하였지, 그렇지 않고는 못할 일이었다.

여기서 금부의 손은 세 갈래로 퍼졌다. 한 갈래는 물론 이미 잡은 두표 문초였다. 또 한 갈래는 실종된 두표의 가족 수색이었다. 나머지의 한 갈래는 두표와 가까이 상종하던 사람들의 행방 수색이었다.

그러나 그 세 갈래가 모두 다 아무 소득도 없었다.

두표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두표의 가족은 어디로 새었는지 여전히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두표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어디로 새어버렸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두표를 잡아다 놓기는 하였다. 그 위에 역모라는 죄명까지 씌워놓기도 하였다. 그것이 과히 겨냥이 틀리지 않은 것도 짐작은 간다.

그러나 그뿐,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어떤 획책을 하였었는지, 혹은 하려 했는지, 이는 두표가 입을 열거나 두표의 도당을 잡거나 하여야 해결될 문제였다.

그 도당을 잡지 못하고 두표조차 입을 열지 않으매, 인제는 이미 잡은 두표 한 사람을 역모라는 죄목 아래 참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 달 반 동안을 갖은 악형을 다 해가며 문초해 보다가 인제는 금부에서 도리어 싫증이 나서 그만 내어 던졌다.

─ 유월 초엿샛날 (광해 십사년 임술) 역모 죄인 원두표를 새남터에서 참한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이 이상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 ×

참형으로 작정이 된 뒤부터는 두표에게 대한 감시는 더욱 엄중해지는 반면에 대우는 얼마만치 나았다.

끼니를 찾아서 음식도 들어왔다. 때때로 반주가 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두표는 처음 사나흘 (악형이 중지된 이후) 동안은 정신을 못차렸다. 악을 있는껏 다 써서 악형에 대해서는 참고 참았지만, 옥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하였다. 그 혼미 상태는 악형이 중지된 뒤에도 사흘은 계속이 되었다.

사나흘이 지나서 처음으로 제정신을 가지고 끼니를 받아먹었다. 건장하던 육체, 건강하던 육체 바깥 고통이 좀 뜸하면서는 먼저 주림과 목마름을 깨달았다.

주림과 목마름을 면하기 위하여 들여주는 음식을 탓하지 않고 받아먹는 동안, 본시 건강하던 그의 몸은 속으로 부쩍부쩍 나아졌다.

겉으로 보자면 그사이 반삭을 겪은 무서운 악형 때문에 터지고 찢어진 살에 딱지까지 두텁게 앉고, 그것이 또한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내배어서 덧딱지가 앉고 하여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참혹한 형상을 이루었지만 속으로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이리하여 육체의 건강이 회복되어 감을 따라서, 그의 정신도 차차 회복되어 갔지만, 정신이 회복된다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더욱 크게 하는데 지나지 못하였다.

건설되어 가던 꿈, 완성되어 가던 환몽이 그의 눈앞에서 무너져 나갔다. 한 걸음─ 단 한 걸음 더 나가면 넉넉히 잡을 수 있을 아름다운 여름이 자기의 눈앞에서 꺼져 없어졌다.

이제 수일 내로 죽을 몸 생각하면 무얼 하며 애타 하면 무얼 하랴만, 그래도 자기의 눈앞 석 자 되는 거리까지 왔다가 홀연히 없어진 그 환몽에 대하여는 손쉽게 단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죽음을 재촉하는 〈날〉은 하루 또 하루 다가왔다.

× ×

임술 유월 엿새 역모죄인 원두표를 참하는 날—

오늘 참을 당할 죄인을 실은 수레가, 금부를 떠난 것은 오정 때였다.

아교 상투에 회박 얼굴을 하고 몽두리 쓰고 결박을 진 오늘의 주인공.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서 오늘 자기의 위에 임할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레의 흔들거림을 따라서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마지막 지나는 종로 구리개 남대문 등을 눈 떠 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 뒤를 회자수와 형졸들이 따르고, 감형관은 말께 높이 앉아서 맨 뒤를 따르고 있다. 그 뒤로는, 구경꾼의 한 무리가 무슨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우루루 따라간다.

아침까지 맑던 날씨가 오정이 지나면서부터는 차차 검푸러지며 뭉게뭉게 검은 구름이 떠돌아 다니는 것은 마치 오늘의 수형자를 조상하는 듯하였다.

이 일행이 노들강을 건너 형장인 새남터까지 도착된 것은 미시(未時)도 썩 지나서 신시(申時)에 가까운 때였다.

형장에 도착되면서 죄인은 수레에서 거적에 끌어 내려 놓았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감각치 않는 듯이 죄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그 새 한 달을 한마디의 말도 입 밖에 내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아침부터 여태껏 죄인의 눈은 한 번도 떠보지를 않았다.

형을 집행할 유시(酉時)까지는 아직도 한 각 남아 있다. 그동안에 형졸들은 일변 행형의 준비를 하며 일변 구경꾼들의 정리를 하며 돌아갔다. 회자수는 아까 죄인이 타고 온 수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인제 바야흐로 죄인의 목을 자를 시퍼런 칼을 무관심한 태도로 들여다보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수군 수군─ 구경꾼들의 이야기.

차차 차차 더 검푸러 가며 서늘한 바람도 불기 시작하는 날씨─

이러한 가운데서 죄인의 목숨을 재촉하는 시각은 쉬임 없이 흘렀다.

×

『유시요!』

시간을 보하는 소리─

한순간 감형관 이하 구경꾼의 얼굴에까지 긴장의 창백미가 돌았다. 다만, 그냥 태연히 무관심히 있는 사람은, 오늘 목을 잘릴 죄인과 오늘 목을 자를 회자수 뿐. 공기며 대지까지 동요하는 듯하였다.

걸터앉았던 자리에서 고요히 일어서는 형관. 칼을 들고 죄수의 뒤로 돌아오는 회자수. 동요하는 관중, 경계의 눈을 희번득거리는 형졸들. 이러한 가운데서 형관의 목소리가 울리었다.

『물어봐라. 무슨 마지막 소원이라도 없는가고.』

형졸을 통하여 그 말이 죄수에게 전해지자 아직껏 푹 수그리고 있던 죄수의 머리가 비로소 천천히 들리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그의 얼굴은 하늘을 우러렀다. 그러나 눈은 그냥 감은 채 입은 그냥 봉한 채 고개를 두어 번 가로 저어서 아무 소원도 없다는 뜻을 나타내일 뿐.

음산한 하늘 아래서 흐르는 처참한 공기─

『그럼 죄수에게 술을 먹여라.』

앞에서는 형졸이 술대접을 들고 오고, 뒤에서는 회자수가 팔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술이 한 모금 두 모금, 마지막 모금 넘어가는 순간은 회자수의 칼은 죄수의 목을 몸에서 떨구는 순간이었다.

『자, 술 먹어라!』

입술에 닿는 술대접의 차디찬 감각에 죄수는 몸을 흠칫하였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은 번쩍 떴다. 뜬 눈은 한 번, 두 번, 세 번, 고요히 고요히 사위를 살피었다. 살핀 뒤에는 그의 눈가에는 미소라고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이 흘렀다. 그 미소의 뒤를 흐르는 처참한 표정─

『소원─ 마지막 소원이 있소이다─』

오늘철로 처음으로 뜨는 눈─

형조에 잡힌 이래로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입밖에 내이는 말─

형관 형졸 이하 구경꾼들까지도, 이 허공에서 나오는 듯한 음성에 몸을 소스라쳤다.

『응, 무에냐?』

『마지막 소원, 다른 게 아니라 이 결박을 끌러 주실 수가 없겠습니까?』

무슨 기괴한 소리냐, 중한 죄인─ 어찌 결박을 조금 늦구언들 줄 수 있으랴?

주저와 거절의 표정이 형관의 얼굴에 나타나는 순간, 말은 그냥 계속되었다.

『세상을 하직하는 마지막 술잔, 자기의 손으로 들고 마셔 보고 싶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마신들 무얼 하리까만 마지막 잔을 남의 힘을 빌고 싶지 않습니다. 그 위에 나으리네도 아시다시피, 촌보(寸步)를 움직일 수 없도록 중하게 상한 몸─ 결박을 끌러 놓은 달사 무슨 염려가 있으오리까?』

그도 그럴듯한 소원이었다. 형관은 형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구경꾼을 둘러보았다.

형졸이며 구경꾼들의 얼굴에 사리어 있는 죄수에게 대한 동정심은, 드디어 형관으로 하여금 죄수의 이 소원을 허락하게 하였다

『끌러 주어라.』

죄수의 결박은 풀어졌다.

결박이 풀린 죄수는 한번 목을 전후좌우로 둘렀다. 어깨를 앞뒤로 움직여서 팔의 굴신을 시험하였다. 무릎을 짚고 몸을 조금 일으켜서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해 보았다. 그런 뒤에 도로 고요히 앉았다.

『고맙습니다. 술대접을 이리로─』

형졸이 내어주는 술대접을 양손으로 받아 든 죄수. 그 대접을 입으로 가져가는 죄수의 손은 약간 떨리는 듯이 보였다.

이리하여 한 모금, 두 모금 주검의 술은 꿀거덕 꿀거덕 넘어갔다. 세 모금 들여 마시는 순간─

× ×

이때의 일을 누구든 분명히 본 사람이 없었다.

홀연히 죄수가 없어졌다. 동시에 무슨 놀랄 만한 동요가 일어났다.

회자수가 거꾸러졌다.

왁자지껄─

이 놀라운 동요의 순간이 지난 다음에, 군중이 비로소 알게 된 죄수의 탈주. 술 사발로 앞에 있는 형졸의 얼굴을 치고, 뒷발로 회자의 급소를 차 넘어뜨리고 구경꾼 틈을 꿰어서 한강을 향하여 죄수는 달아나는 것이었다.

『저놈 잡아라!』

형관과 형졸들이 정신을 차리고 죄수의 뒤를 쫓기 시작한 때는, 죄수는 벌써 삼사십 보 앞을 달아나는 때였다.

그러나 죄수는 달아나면 어디로? 앞에는 한강이 가로막히고, 좌우편으로는 벌써 길을 지르려 형졸들이 달려가는 가운데서 죄수의 피할 곳은 있음직도 않았다.

이리하여 길을 지르는 형졸들을 피하여 일직선으로 한강으로 달아난 죄수는, 강언덕까지 이르러서 한번 발을 구른 뒤에, 텀벙 하니 한강 물로 뛰어들었다.

뒤를 따르던 형관이며 형들은 아연히 이 꼴을 바라보았다. 죽을 힘을 다하여 강변까지는 왔다 하나, 그 쇠진한 몸으로 물에 뛰쳐 들 면 역시 〈죽음〉의 한 가지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뛰쳐든 죄수는 잠시 뒤에 조금 하류에서 걸핏 머리를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가라앉았다.

그 뒤에는 죄수는 다시는 수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형관 형졸이 강의 배라는 배는 다 풀어 가지고 날이 어둡도록 강을 지키고, 밤에는 물 한 방울 새지 않으리만치 강변을 경계하였지만, 죄수는 다시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두 동강이에 나기 싫어서 목 있는 귀신이 됐지.』

목이 잘리기 싫어서 부러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 이렇게 인정하고 그 강변의 경계를 푼 것은, 그 이튿날도 날이 기울어서였다.

×

유월 엿샛날 한밤중.

장안을 멀리 떠난 뚝섬 어떤 외따른 정자에는 사오인의 장정이 불도 켜지 않고 무슨 의논을 거듭하고 있었다.

『다른 일은 다 뜻대로 됐지만 병판(兵判)이─』

『글쎄……』

그 뒤에는 한숨─

원두표의 동지들이었다. 이제 거사를 하고 정부를 조직한다 하더라도, 장래의 병조판서로 내정되었던 원두표가 오늘 새남터에서 참을 당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랴.

『병판 재목이 있어야지.』

『글쎄─』

또 한숨─

『자건(두표의 호)! 자건! 혼백이라도 있으면 병판감을 지정해 주게.』

그때였다. 어두움 가운데서 정자 위로 쑥 하니 올라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세!』

틀림없는 두표의 음성─

『병판 여기 있네. 나 밖에 누가 병판이 되겠나─』

우렁찬 음성, 힘 있는 음성─ 틀림이 없는 원두표의 목소리

『이게 누구냐?』

『자건이로세.』

『이게─』

때아닌 곡성. 남의 이목을 잊어버린 곡성이 사면을 진동케 하였다.

× ×

금부 옥 안에서 악형이 중지된 뒤로부터 나날이 회복되어 가는 오륙일을 감쪽같이 감추어 가지고 지나는 반삭 간, 두표에게 오로지 한 가지의 희망은 자기의 형을 집행할 곳이 한강 강가 새남터면 하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강가에서 자라서 헤엄치기와 잠수에 능한 두표는, 물에 대해서는 절대 자신이 있었다. 굳게 진 결박을 풀 기회만 있으면, 승리는 자기에게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죽을 목숨을 죽는 순간까지 정신을 버티어 가지고, 다만 한순간이라도 결박 끄를 기회만 얻어 보려고 애를 썼다.

이리하여 그 기회를 겨우 얻은 원두표는 물에 뛰어서는 물 바닥을 기고 기어서 상류로 상류로 올라갔다. 상식으로 판단하여 상류가 하류보다 경계가 헐할 것이므로─ 물 바닥을 십 리.

능히 사람의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여행을 끝내고, 주의에 주의를 더하여 언덕으로 기어오른 때는 날도 캄캄하게 어두운 뒤였다. 형졸이며 나장 나졸들이 왁짜 하니 새남터 앞 강과 그 하류를 수색하는 동안, 이 중죄수는 십여 리의 수저여행(水底旅行)을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관리들이 꿈도 안 꾸고 있는 뚝섬에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몸은 죽게 피곤하였다. 인제는 촌보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죽을 힘, 죽을 애를 다 써서 물 바닥을 여기까지는 기어 올라왔지만, 가뜩이나 쇠잔하였던 몸이 이제는 촌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강변에 넘어져서 정신을 수습하였다. 그 뒤에는 또다시 몸을 겨우 움직여서 엉기엉기 기어서 차차 섬 안으로 들어갔다.

섬에서 그는 한 외딴 정자를 발견하였다.

어디서든 몸을 좀 쉬일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그 정자 마루 아래로 부비어 들어갔다. 들어가서 안심하는 순간, 과도한 피곤 때문에 혼혼이 잠이 들어버렸다.

자다가 밤중에 펄떡 깨어 보매 정자 위에서는 두런두런하는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정신이 아득하였다. 포교의 손이 여기까지 미친 줄 알았다.

그러나 듣고 보매 이게 꿈이 아니나 위의 소리는 귀에 익은 자기의 동지들의 음성에 틀림이 없었다.

「자건, 자건!」

자기를 찾는 동지들의 소리, 자기가 죽은 줄로 알고 서러워하는 동지들의 애통─

× ×

이리하여 일단 죽음의 고개를 넘어섰던 두표는, 후일 능양군을 추대하고 오리 이원익을 수반으로 그의 목적을 달하였다.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인조의 반정(仁祖反正)〉이 즉 능양군의 즉위였다.